히치하이커 | 2016. 2. 9. 02:58
* 목조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 비즈니스 호모.....관계인 리츠이즈 주의해주세요8ㅅ8))
* 몽님이 주신...내용....화려하게...제가 산화..시켰.....읍니다...네.....( mm)
Satellite Love
밤하늘에 떠 있는 인공위성을 사람들은 종종, 별로 착각하곤 한다.
***
무대 위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암전 된 어둠 속에서 캐미컬라이트가 별처럼 빛나는 순간은 「신데렐라」의 무도회장. 12시가 지나지 않으면 마법은 끝나지 않는다. 사쿠마 리츠는 이러한 ‘룰’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대 위는 전장, 인기라는 이름의 보상을 얻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장소. 보상을 위해서라면 ‘과도한 선’을 넘지 않는 어떤 것도 암묵적으로 허락 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신데렐라의 파티 룸 같아, 리츠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른쪽 구역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세나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왕님의 파트였음으로, 저와 세나가 노래를 하기까지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제격’이었다. 사쿠마 리츠의 발에 묻어있는 리듬은 매우 가볍고, 장난스럽게 울렸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체셔 캣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반짝이는 캐미컬라이트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는 츠키나가가 작곡했던 것 중에 가장 섹시한 노래였다. ‘Satellite Love'. 신데렐라와 기사님이 테마인 이 곡은 열두시가 되기 전, 신데렐라가 자신에게 건 마법이 풀리기 전 까지 당신의 기사로 살겠다는 가사를 담고 있었다. 곡에 가사를 붙인 건 세나였다. 리츠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스오우의 목소리가 무대를 울렸다. 부드러운 리듬이 리츠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었다. 그는 오른쪽 구역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세나의 옆으로 다가갔다. 셋쨩, 하고 가볍게 부르면 객석을 보고 있던 세나는 고개를 돌린다. 리츠는 그를 일부러 뒤에서 끌어안았다. 무대 위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무대 위에선 무얼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단 뜻이었다.
‘마법’의 시작이었다.
세나는 명석한 아이였다. 그는 무얼 해야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인기를 얻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리츠는 푸스스 웃었다. 그들의 ‘마법’은 이렇게 뜬금 없는 곳에서, 시작되곤 했다. 마치 「신데렐라」에서 요정대모가 뜬금 없는 타이밍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신데렐라의 마법이 극적인 건, 그게 시작되는 타이밍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복선도 없고 암시도 없었던 상황. 순수한 조력자의 등장, 이후 펼쳐지는 화려한 스테이지는 언제나 소녀들에게 환상을 가져다준다.
리츠는 환하게 웃었다. 인기를 목적으로 한 가짜 사랑. 플라스틱, 인스턴트, 새틀라이트 러브. 무대 위에서만 성립 되는 ‘컨셉’을 기반으로 하는 마음 장난. 사랑놀이. 리츠는 여러 단어를 생각해 냈다가 푸스스 웃었다. 그들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단어 중에서 영원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세나에게 유리 구두는 남지 않는다. 리츠는 버려진 유리 구두를 품에 끌어안는 자신을 상상했다. 입이 썼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감에, 마이크 선이 툭, 툭, 거리며 끊기는 소리를 냈다. 앰프에서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사라졌다. 노래를 방해받은 왕님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리츠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왕님의 사정이었다. 세나는 그런 리츠를 달래려는 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간질거렸다. 세나의 손끝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일 때 마다 그는 작게 웃었다. 머리카락에 닿는 손가락 하나하날 다 먹어버리고 싶었다. 그들의 행동에, 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나루카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리츠는 그 다음 파트가 자신이란 걸 기억해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파트를 방해한다면 더 이상 ‘비즈니스’라는 이름 뒤에 숨을 수 없다. 리츠는 작게 탄식했다. 이건 모두 다 세나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탓에 본디 목적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그는 객석을 바라보았다. 야광봉이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별 같았다. 리츠는 그 흐름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캐미컬라이트가 빛을 내는 순간은 마법이 지속되는 순간. 시계바늘은 아직 12시를 가리키지 않았다. 뭘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순간. 그는 세나와 마주보았다.
“쿠마 군?”
마이크를 대지 않고 세나가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없었던 일에 적지 않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언제나 해왔던 거야, 라고 차마 말해줄 수는 없어서 리츠는 눈을 감았다. 그는 천천히 세나의 입술과 입을 마주댔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혀는 넣지 않았다. 이 이상 선을 넘으면 마법의 순간이라도 혼이 난다. 현실로 추락하긴 싫었다. 그는 오만한 이카로스가 아니었다. 나루카미의 목소리가 끝나가는 소리에, 리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객석을 바라보다,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닿았다. 말캉한 감촉에 기분이 좋았다.
다시, 팬들의 함성 소리가 높아졌다. 리츠는 팬들이 자신들을 통해서 본 ‘환상’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나를 바라보며 노래했다. 맹세의 키스를 나누고 싶다는 가사를, 손을 잡으며 부르자, 세나의 양 볼에 붉은 물이 들었다. ‘사랑놀이’에서 조금 더 나아가고 싶었다. 아직 무대는 끝나지 않았고, 마법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그것이 ‘룰’이었다. 더 이상 할 수 없는 건 없었다.
오늘도, 사랑한다는 말은 리츠의 입 안에만 머물렀다.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무대 위에서도 ‘정도’란 게 있었다. 그는 세나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아이스블루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해 왔던 무대 위의 스킨십들은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리츠는 세나의 손을 잡았다. 세나는 무대 밖, 객석을 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아, 피했다. 리츠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아무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지켜왔던 선이 있었다. 암묵적인 룰. 그 절대적인 그림자의 무게가 서서히 번져왔다. 캐미컬라이트가 켜져 있음에도 마법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울 것 같았다. 사쿠마 리츠는 어린아이처럼 세나의 손을 꼭 쥐었다. 그는 손가락 마디에 힘을 주었다.
세나가 붙인 달콤한 가사가, 목소리를 타고 부드럽게 흘렀다. 리츠는 멀리, 야광봉을 흔드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꼭, 우주에 떠 있는 인공위성이 된 기분이었다. 도시의 하늘을 보는 사람들은 종종, 인공위성을 별로 착각하곤 한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우주에 띄운 인공의 별. 리츠는 저와 세나의 관계 또한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멋대로 착각하는 사람이 잘못인지, 아니면 ‘오해’하게 행동한 사람이 잘못인지 리츠는 감히 판단할 수 없었다.
캐미컬라이트의 불빛이 밤하늘에 떠 있는 인공위성처럼 보였다. 하늘에 떠 있는 것 중에, 인간이 만든 가장 오만한 빛을 떠올리면서 리츠는 비리게 웃었다. 사랑에 차가운 그림자가 졌다. 마주잡은 두 손, 손가락이 점점 차가워졌다. 시계바늘은 점점 ‘열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슬슬, 마법이 끝날 차례였다. 째, 깍, 째, 깍. 리츠는 시간을 셌다. 노래가 끝날 때 까지,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것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입 안이 썼다.
***
마법의 순간이 끝나면 남는 건 허무함이다. 리츠는 침대에 누웠다. 잔여물 같은 마음들이, 가슴 한쪽에 퇴적되어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명백하게, 불쾌했다. 배설할 수 없는 감정에 목이 막혔다. 그는 괜히 침대에서 굴렀다. 발을 움직일 때 마다 침대 스프링이 튀는 소리를 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나는 샤워를 오래, 공들여서 한다. 리츠는 침대 안쪽에 설치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렌즈와 눈이 마주쳤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웃었다. 잠이 오는 척 하품을 한다. 카메라가 원하는 ‘사쿠마 리츠’를 연기한다. 익숙해진 일이었다. 리츠는 다음부터는 절대로 숙소 리얼리티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체력소모가 심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익숙하지 않았다. 따로 살고 있는 다섯을 모아 한 집에 넣자는 발상은 좋았으나, 너무나도 제약이 심했다. 영원히 11시 59분을 가리키는, 고장 난 시계 아래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획을 가장 하고 싶어 했던 건 리츠였다. 오랜 기간, 같은 곳에서 있다면 세나가 눈치 채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당기기만 하고 있는 이 관계에 대해서 결착을 내고 싶기도 했다. 언제나 좋아하는 건 리츠였다. 무대의 마법을 빌어 스킨십을 해오는 것도 리츠였다. 모든 시작은 ‘사쿠마 리츠’의 행동에서부터였다. 하지만 마법이 끝나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유리구두를 들고 찾아올 왕자님이 없는 관계였다. 세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영특했음으로 그의 행동에 어울려주는 것뿐이었다.
콘서트 무대에서 입을 맞추어도 세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뒤에 있었던 토크 시간에서 ‘립크림 향이 좋았다’고 대답했다. ‘완전 짜증나’라는 말도, ‘바보 아니야?’라는 말도 없는 그 토크에 관중은 열광했다. 입술이 마주 닿았는데도 그 정도의 반응 밖에 없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꼭, 홀렸던 것 같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리고 바로 리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서 대답하라는 재촉이 들어있는 눈빛이었다. 리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반추할 때 마다 마음에 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답답했다. 계속 당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보여주고, 사랑해주고, 표현하는 것은 무한정일 수 없다. 리츠는 바닥을 등에 대고 누웠다. 2층 침대의 바닥이 보였다. 침대 안은 좁고 갑갑하기만 했다. ‘세나 이즈미’가 의도치 않게 친 어망에 갇힌 느낌이었다. 샤워기가 물을 뿜는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세나는 머리를 말리고, 피부 관리용 화장품들을 바른 다음에 나와서 곧장 리츠가 있는 1층 침대로 들어올 게 분명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카메라’가 켜져 있음으로. 세나에게는 이런 행동도 비즈니스였다. 한없이 슬픈 일이었다. 무덤덤하고, 나른한 태도로 막아뒀던 감정도 이제 한계였다. 너무 많은 물을 담은 둑은 터지기 마련이었다. 리츠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대 위에서만 표현할 수 있는 소심함, 모든 걸 움켜쥐고 잃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그의 우주를 공전했다.
언젠가 이 관계에 대해서 질문 한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용기가 난 날이었다. 세나는 ‘일이잖아’라는 말로 대답했다. 뭐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느냐는 말엔, ‘바보 아니야?’라는 말로 대꾸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하게 되는 날이 있다고 오히려 리츠를 위로해왔다. 잔인한, 일이었다. 가짜 사랑이라는 말은 그 날 이후 리츠의 세계를 인공위성처럼 돌았다.
인공위성은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보이지만 진짜 별은 아니다. 리츠는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잔잔하게 가라앉혔던 감정에 파문이 일었다. 울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답답하기만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나였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웃었다. ‘연기’하고 있었다. 카메라 앞의 세나는 친절하다. 평소라면 저런 미소를 띄고 걸어오는 일은 없다. 리츠는 벽 쪽으로 붙어 자리를 만들었다. 2층 침대가 만들어 둔 그늘에,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세나에게선 포근포근한 향이 났다. 아침에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샤워를 하니까, 밤에는 마음대로 바디워시를 고르는 탓이었다. 리츠는 카메라를 보다가, 세나를 보면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킁킁거리며 향을 맡자, 세나는 그게 익숙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가 돌고 있는 탓이었다. 평소에는 피를 달라고 하면 무시하고, 짜증내고, 혼을 낸다.
‘마법’을 마음껏 즐기기에는 속이 쓰렸다.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리츠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는 것처럼 셋쨩, 좋은 향기-라고 느릿하게 말하면 세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핸드폰을 두드릴 뿐이었다. ‘마이페이스처럼 애정을 갈구하는 사쿠마 리츠와 싫은 척 하지 않고 받아주는 세나 이즈미’는 이미 성립된 공식이었다. 세나는 고개를 돌려 리츠를 보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나는 몇 가지 원칙을 두고 행동했다. 만약 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룸메이트가 리츠가 아니라 왕님이었다면 내조를 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거고, 나루였다면 같이 팩을 하면서 걸즈토크를 했을 것이었다. 츠카사와 룸메이트를 하게 된다면 야식을 손수 만들어주면서 살찐다고 잔소리를 하며 투덜거렸을 것이다. 카메라가 돌아갈 때 마다 보이는 이런 행동에 반하면, 이건 누구의 탓일까. 리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세나의 목덜미를 느리게 핥았다.
가짜 사랑, 가짜 사랑이었다. 플라스틱, 인스턴트, 새틀라이트. 인공위성 같은 사랑.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위적인 오만함. 리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학적으로 계산된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울리지 않았다. 리츠는 제게 허락 된 마법이, 조금 더 강력된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나가, 자신이 준비한 유리 구두를 신어주길 원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매이고 싶었다. 세나 스스로 매도하는 ‘가짜사랑’이 아닌, 진짜 감정을 나누고 싶었다. 억울했다. 그는, 사랑하고 싶었다. 리츠는 그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쿠마 군-”
“왜요 셋쨩?”
“하지 마.”
세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는 카메라를 보다가 편집 해 달라는 듯, 검지와 중지를 펴서 가위질 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짜증이 났다. 리츠는 세나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의 행동이 너무 노골적이지 않았냐는 투정이었다. 그 와중에도 ‘연기’라던가 ‘가짜’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났다. 머리가 팽팽 돌 것 같았다. 그동안 참아왔던 마음들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코끝이 찡해왔다. 한 번쯤은 ‘진짜’라고 생각 했던 적도 없던 걸까. 용기 없이 담고 있던 사랑에 이런 반응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여지와 미련을 남겨줄 거라면 한 번쯤은 착각하지 말라고 말해줬어야 하는 게 아닐까.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공중에서 낙하한 기분이었다. 리츠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그의 양쪽 손목을 잡고, 몸을 엎었다. 제 몸 아래에서 놀란 표정을 하고 누워있는 세나가 보였다. 미처 막지 못한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리츠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에 무언가가 치받쳤다.
“이즈미”
일부러 무심하게 이름을 부르면, 불안한 눈동자가 마주쳐온다. 리츠는 몸을 숙였다. 왜, 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숨을 들이키는 게 느껴졌다. 잡혀 있는 두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리츠는 세나의 두 팔을 힘으로 제압했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대신 하는 입맞춤에는 슬픔이 가득 묻어 있었다. 리츠는 제 마음 속에서 굳어버린 감정이, 입술을 타고 넘어가길 바랐다. 혀가 얽혔다. 세나의 숨이 제 인중에 닿을 때 마다 오싹거렸다.
입술이 떨어졌다. 예쁘게 웃는 리츠와 달리 세나는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크게 소리쳤다. 카메라가 있는 걸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쿠마 군,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라고 이어가던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리츠는 그의 가느다란 목에 손을 댔다. 숨을 쉬지 못하게 세게 눌렀다. 세나는 숨을 쉬기가 불편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생리적인 눈물이 눈가에 맺혀 있다 안쓰럽게 흘렀다.
“이즈미”
내가 널 좋아해, 이렇게 사랑해. 리츠는 웃으며 말했다. 세나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바르작거렸다. 그의 말이 단어가 되는 것은 없었다. 리츠는 가느다란 목에 힘을 주었다. 세나의 몸이 벌벌 떨렸다. 그가 괴로워할수록 오히려 제 눈에 눈물이 맺혔다. 리츠는 눈을 깜빡였다. 세계가 한 번 닫히고, 열리는 그 짧은 과정을 수행하는 동안 볼에 투명한 선이 생겼다. 한 번 터진 눈물길을 막을 길이 없었다. 리츠는 아이처럼 울먹였다.
그는 세나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마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까의 입맞춤으로 제 속앓이가 전해진 걸까. 리츠는 자신의 지독한 짝사랑을 생각하며 웃으려 했다. 눈물이 흘렀다. 툭, 툭, 괴로워하는 세나의 얼굴에 눈물이 닿았다. 컥컥거리며 숨을 쉬려고 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호흡처럼 사랑해줘, 날 사랑해줘, 인공위성 같은 사랑 말고, 제대로 네 궤도를 돌게 해줘, 날 봐줘.
“이것도, 가짜 사랑이라고 생각해?”
이즈미, 어떻게 생각해? 리츠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토기가 올라오는지 세나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힘이 빠진 두 손이 리츠를 힘없이 때렸다. 그의 푸른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만큼 나도 괴로웠어, 라고 말하는 리츠의 소리에 화음을 넣듯, 기침이 터지며 방 안을 울렸다. 무서워하는 눈, 그 모습이 낯설었다. 궤도를 이탈한 인공위성이 방향을 잃고 팽팽 돌았다. 목 끝에서 울음이 걸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리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이 막혔다. 호흡이 어려웠다. 통제할 수 없는 사랑에 젖었기 때문이었다.
날, 봐줘. 이즈미.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울었다. 울음 섞인 목소리에 세나는 적지 않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당황에 리츠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는 세나의 위로 쓰러졌다. 한 번 터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랑해줘, 날 사랑해줘, 나는 이즈미가 좋아. 세나가 좋아. 카메라 뒤의 날 봐줘, 사랑해줘, 리츠는 두서없이 제 맘을 쏟아냈다. 기침하며 숨을 찾으려고 하는 세나의 얼굴 위에 눈물과 애정이 집착처럼 쏟아졌다.
용서해줘, 미안해, 사랑해줘, 하지만, 미안해, 사랑해줘. 행간도, 마침표도 없는 원색적인 감정들이 쏟아져 내렸다. 세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만, 호흡을 되찾기 위해 기침을 할 뿐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나는 제 가슴께에 머리를 대고 엉엉 우는 어린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리츠는 끊임없이 세나의 이름을 되뇌었다. 잊고 싶지 않다는 듯, 11시 59분을 영원히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인공위성 같은 사랑은 하고 싶지 않아. 리츠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보이지만, 진짜는 아니잖아, 라는 말은 점점 억울함을 담아 소리가 커져, 마침표에 다다를 때쯤에는 무목無目의 메아리처럼 울렸다. 이즈미, 이즈미, 이즈미. 그는 갈급하듯, 갈구하듯 소리쳤다. 세나는 제 몸 위로 느껴지는 무게를 생각하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가. 손을 뻗어 리츠의 벌개진 눈가를 닦았다. 닿고 싶으나 닿을 수 없는 밤이었다.
11시 59분을 거친 욕망이라는 이름의 초침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악몽 같은 사실주의에 리츠는 눈을 감았다. 어둠이 번져왔다. 닿은 체온 사이에서 오가는 말은,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울음뿐이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감정이 백야의 오로라처럼 밤을 덮어가고 있었다. 울고 싶어, 세나가 중얼거린 말은 깨져버린 유리 구두 조각과 같았다. 깨져버린 유리 구두는 다시 '마법'이 될 수 없다. 마법이 깨지고 난 후의 모든 것은 허무하기만 했다. 리츠는 그를 끌어 안았다. 마주 안아주는 손길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미칠 것만 같았다. 격렬한 사랑 끝의, 허무함이, 눈물처럼 번져와, 파도처럼 리츠의 모든 부분을 잠식해갔다.
그저, 그런 밤이었다. 입 안에 맴돌았던 사랑해, 가 마치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백처럼 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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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커 | 2016. 2. 6. 02:59
*'사랑'을 자각하는 순간은 언제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솜님의 리퀘를 받았어요>< 이즈미에게 휘둘리는 마코토였는데... 이런 걸 드려서 심히 죄송한 기분...
*세나 시점의 이야기도 써 보고 싶네요><
세상을 둘러 싼 중력이 이상해졌다.
이상해지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유우키 마코토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세상은 어딘가 한 걸음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세상이 퍼즐이라면, 그걸 구성하고 있는 피스들이 스스로 손과 손을 놓고 흩어지거나, 아니면 입체 퍼즐로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앞에서 뒤로 넘어오는 프린트물에는 물리 문제가 빼곡했다. 유우키는 선분 위에 그려져 있는 상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래도 세상 속에서, 과학처럼 ‘올바른 답’을 가지는 건 양반이다. 유우키는 샤프를 돌렸다. 검은 제도샤프의 세계가 왼쪽으로 다섯 번 돌았다가,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았다. 창 밖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지나치게 따듯했다. 그는 하품을 섞인 숨을 내뱉었다. 멀리 운동장에서 파도소리 같은 함성소리가 뻗어왔다.
소년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초봄이었다. 유우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엎어졌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창가에 놓은 화분에 어울리지 않게 자란 민들레가 보였다. 하얀 팬지가 심어졌다가, 죽어버린 곳에 자란 놈이었다. 창문을 열어 둔 사이에 몰래 홀씨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하얀 꽃송이가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자란 노란 민들레 몇 송이 중 한 놈은 벌써 희끄무레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민들레의 꽃줄기가 흔들거렸다. 그는 멀리 운동장을 내다보았다. 초록색 체육복을 입은 선배들이 와르르 몰려 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체육 시간인 모양이었다. 유우키는 제 눈에 익은 사람을 찾으려 허리를 높게 뻗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어차피 부질없는 일이었다. 멀어지기로 약속 한 다음에야 시선에 들어오는 건 반칙이었다.
홀씨 같다. 유우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돌렸다. 손가락 사이에 잡힌 펜이, 몇 바퀴를 곧게 돌았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알 수 있었다. 유우키는 하품을 했다. 지구의 회전축이 점점 기우는 느낌이었다. 그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회전축이 이상해졌기 때문에, 세상을 둘러 싼 중력이 맛이 간 게 분명했다. 유우키는 작게 공상하다, 프린트물의 1번 문제로 고개를 돌렸다. 물체에 가해지는 ‘힘’에 대한 문제였다.
민들레 홀씨 칸타빌레─
넌 마치 별똥별처럼 나의 우주를 가로 질러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지구의 회전축이 기우는 소리를 듣고 있어.
Stupid love song
***
유우키 마코토는 ‘한번만’이라는 말에 약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무른 남자였다. 차갑게 대하려고 해도 ‘한번만’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마음은 푹신푹신하게 꺼지곤 했다. 애초에 그의 ‘차갑다’라는 말은 에그타르트 표면에서 굳은 갈색 설탕 층 같은 느낌이었다. 유우키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타인과 원만하게 지내고 싶어 했으며, 평화주의자 적인 면이 강했다. 물론 심성이나 의지는 굳건했지만, ‘목표’이외의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한없이 민들레 줄기처럼 연약해졌다.
세나 이즈미는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유우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별똥별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세계, 우주의 경계선을 멋대로 넘나들곤 했다. 남들의 시선에서 본다면 명백하게 예의 없고, 재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그는 유우키 마코토가 애써 그어놓은 선을 함부로 짓밟곤 했다. 둘 사이에서 그런 게 통용될 거라는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는 유우키의 세계에서 가장 ‘한번만’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한번만’ 사진 찍게 해줘, ‘한번만 웃어줘’ ‘한번만 잘 가라고 해 주면 안 돼?’ 유우키는 세나의 말들을 떠올렸다. 그는 꼭 사랑하고 있는 여고생처럼 굴었다. 예전부터 그래왔음으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세나는 언제나 유우키의 중력을 멋대로 흐트러트렸다. 그래도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형’이라고 지칭하면서 따라다니고, 사진을 찍거나 감시망을 조직하거나 하는 건 이미 일상인지라 새롭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세나는 그를 지켜주고 싶어 했다. 그는 소년을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대하곤 했다. 유우키는 그 간극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세나가 하는 모든 일들이 스트레스였음으로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환상 속의 유우키 마코토’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 일은 이미 다 잊었다고 말했고, 나는 이제 당신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세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인 유우키’를 좋아하며 따라왔다. 의미 없는 리듬이었다. 무의미한 반복은 지루함을 낳을 뿐이었다.
세나가 ‘한번만’ 이라고 말하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귀에 귀지처럼 달라붙은 게 분명했다. 유우키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한번만’을 떠올렸다. 저번주의 일이었다. 민들레 홀씨 같은 일이기도 했다. 사람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보던 노란 꽃이 ‘홀씨’가 되는 과정을 거의 보지 못한다. 너무 느리게 변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타이밍에 예상치 못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는 샤프 끝으로 제 볼을 쿡쿡 찔렀다. 세나의 ‘한번만’이 계속 머리에 울려, 문제에 집중 할 수 없었다.
세나는 쫓아왔고, 유우키는 도망쳤다. 그들의 관계는 그 정도일 뿐이었다. 그의 마지막 ‘한번만’에 대해서 굳이 시간을 들여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기다린다면 세나는 다가올 거고, 자신은 완전 싫어하면서도 휘둘릴 게 분명했다. 그는 숙제를 빼먹은 과목을 기다리는 심정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하기 싫으면서도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짜증났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다는 걸 유우키는 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세계를 감싸 안은 중력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이 붕붕, 떠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얀 민들레를 푸 불었을 때 부유하는 홀씨 같았다. 중력 법칙이 바뀌었다면 이런 문제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유우키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볕은 여전히 졸음을 가득 담고 있었고, 멀리서 3학년들이 축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하고 우렁차게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굴까, 생각하다가 유우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됐던 간에, 세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유우키, 집중해야지.”
옆에 앉은 히다카가 말을 걸어왔다. 미안, 히다카 군. 유우키는 작게 사과하고서 문제지를 보았다. 그의 프린트물에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널려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히다카의 프린트물은 공식과 수식으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유우키는 제 볼을 긁었다. 세상에는 수식과 공식을 알고 있음에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힘의 방향이 어디로 오는지를 알고 있어도, 그 공식을 올바른 곳에 알맞게 대입하지 않으면 값은 나오지 않는다. 물리라던가, 수학이 정확한 학문이라고 해도 그 ‘정확함’을 알아채주는 건 사람이다. 유우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세상에는 이처럼 알면서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유우키는 그게 세나와 자신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피하고 쫓아오길 반복했다. 그의 사랑을 무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치 우주의 크기처럼, 영원히 소모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번 주의 그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그를 의식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우키는 제가 세나의 ‘한번만’에 무르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젓가락에 쉽게 갈라지는 조린 무가 아니라, 물엿으로 졸인 연근이 되었어야 했다. 그는 후회해봤자 늦은 일을 반추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때의 감각이 새삼스럽게 번져오는 듯 했다. 유우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힘을 구하는 공식을 썼고, 옆에서 문제를 풀던 히다카는 그의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유우키, 그건 반대쪽의 마찰력을 생각해야 해, 라는 어드바이스에,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다카는 그가 문제를 풀기 쉽게 약간의 해설을 여백에 적어주었다. 샤프펜슬이 움직일 때 마다 해답 같은 설명들이 적혔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민들레 홀씨처럼 부유하고, 또 부유하다가 자유낙하하고 있는 사고思考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해설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어렵니, 라고 물어보는 히다카의 목소리가 봄볕 햇살처럼 상냥하기만 했다. 마찰력과 가해지는 힘에 대한 문제는 어렵진 않았지만, 지금 겪고 있는 문제는 매우 어렵다는 말을 하려다가, 유우키는 그 말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그는 히다카의 프린트물 여백에 손을 움직였다.
「많이 어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어떤 문제에 대한 고민인지는 여백이 부족하여 적지 못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 쉬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눈앞이 캄캄해지자, 그 때가 다시 번져왔다. 첫 몽정처럼 끈덕지게 따라오는 일이었다. 그 기억은 그림자처럼 제 발목에 매여 있을지도 모른다. 기분 나쁜 일이었다. 아, 어떡하지 유우키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1번 문제에 손을 댔다. 힘 하나를 구할 때 마다 히다카는 손주의 첫 걸음마를 보는 할머니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그렇지, 하고 응원을 해주었다. 퍽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유우키 마코토는 1번 문제를 풀어냈다. 답은 10J이었다. 그러나 세나 이즈미의 ‘한번만’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차마 구하질 못했다. 얼어있던 호수가 깨지는 건 1cm정도의 균열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2번 문제는 스스로 풀어보라며 히다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왔다. 그 응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괜히 속이 아려왔다. 이건 다 세나 이즈미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좋은 영향 보다는 나쁜 영향을 주곤 했다.
언제, 홀씨가 돼버린 걸까. 유우키는 창문 쪽 화단의 민들레를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있으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옆에 있었음에도 알지 못했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의 분침의 세계가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유우키는 2번 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1번 문제와 비슷한 방식이야, 라고 어드바이스해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도 이런 조언 요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샤프의 회전축을 바꿨다. 세계가 빙빙 돌았다.
***
일주일 전 그 날에는 비가 내렸다. 세나는 슬퍼보였다. 그는 자유낙하하고 있는 민들레 홀씨처럼 굴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모습과 달리, ‘연약해 보였다.’ 그렇기에 유우키는 자신의 눈이 잘못 될 대로 잘못 됐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 속 세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싫다고 해도 무작정 쫓아오곤 했다. 이렇게 물렁물렁한 느낌이 아니었었다. 그 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그날따라 하굣길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둑어둑한 골목을 주황색 가로등이 밝혔다. 그들은 인파에 치여 천천히 골목길을 걸었다.
비가 왔기 때문에 가라앉았다고 하기에는 기묘했다. 유우키가 알고 있는 세나는 비가 오든, 눈이 오던 맹목적인 사랑을 자랑했다. 언제나 눈을 마주쳐오면서 유우 군, 안녕? 하고 말을 걸어왔다.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아도 끈질기게 쫓아왔고, 먼저 인사라도 해 주는 날에는 유우 군 드디어 형과 대화를 할 기분이 들었니? 라면서 기뻐했다. 평소의 그가 얼음장 같다고 하더라도, 유우키 마코토 한정으로 세나는 무른 봄과 같았다.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둘의 하굣길은 비슷했다. 둘은 같은 맨션, 다른 동에 살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많은 갈래의 골목길이 있었다. 집에 빨리 가려면 길을 겹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비는 봄비답지 않게 추적추적 내렸다. 유우키는 모든 상황이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갑자기 바뀌는 계절의 사이에 있는 기분이라, 그는 그걸 어떻게 말하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유우키는 갑자기 낯설게 구는 세나가 어색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가갈 수도 없었다. 지금 말을 걸고, 이야길 하게 된다면 또 휩쓸려 버릴 게 분명했다. 요즘 세나와의 대화의 기승전은 달랐지만, 결은 언제나 ‘아이돌 그만 둬’였다. 유우 군에게는 모델만이 길이야, 라고 정해둔 듯한 태도를 대하는 건 귀찮았다. 그런 걸 언제나 받아들일 만큼 유우키는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말들에 휩쓸려왔던 모든 나날을 회상했다. 차라리 이상해도 말을 걸지 않는 게 나았다. 덜 귀찮기 때문이었다.
“유우 군.”
결국 먼저 말을 붙인 건 세나였다. 유우키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초보자의 바이올린 연주처럼 이상하게 튀었다. 목을 가다듬기 위해 콜록거리는 동안 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내가 말을 거는 게 이상하다는 거야? 아아 유우 군, ’트릭스타‘니 뭐니 하는 애들이랑 어울리다가 기본적인 예의도 잊어버렸어?’라는 말이 들려오지 않는 건 참으로 어색했다. 세나는 무표정하게 골목길을 응시했다. 그는 뭔가의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도 말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유우키는 입을 열었다. 이즈미 씨,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라는 물음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cm 아래에 있는 잿빛 머리카락이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 마다 흔들렸다. 가볍게 셋팅해 놓은 머리카락에 습기가 묻어 무거워 보이기만 했다. 유우키는 잠자코 그가 말할 때 까지 기다렸다. 그들의 여백에 빗소리가 무겁게, 또 무겁게 내렸다. 세나는 물에 번진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한 번만 키스해주면 안될까?”
골목길의 끝에서 세나가 물었다. 어이없는 말이었다. 유우키가 얼굴을 찌푸리자 세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한 번만 그렇게 해주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게. 세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언제나 여유로운 ‘세나 이즈미’가 아니었다. 유우키는 그게 매우 낯설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세나는 장우산 손잡이를 꼭 잡아, 손가락 마디가 하얗고, 또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한번만, 이라고 조르는 목소리는 낮게 울렸다. 영화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우우키는 제 우산을 접고 세나의 투명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물방울이 묻은 투명우산, 그 위로 뻗어 내리는 주황색 불빛이 우산 안을 은하수처럼 만들었다. 바닥을 향한 유우키의 우산 끝에서는 빗물이 눈물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세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퍼져버린 홀씨 같기만 했다. 유우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아니, 정말로, 할 수 있어.”
“거짓말.”
“한번만.”
유우키는 ‘한번만’ 이라는 말에 약했다. 세나가 잘게 내뱉는 호흡이 가까이 닿았다. 세나는 우산을 조금 높게 들었다. 가로등 빛이 내리는 투명우산 속에서는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느리게 도는 것 같았다. 한번만 이에요, 라고 대답하면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환하게 웃지 않았다. 어색하고 서먹했다. 다른 누군가가 세나 이즈미를 뒤집어쓰고,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절이 바뀌는 도중, 그 사이 속을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세나는 눈을 감았다. 유우키는 그의 속눈썹이 생각보다 길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후, 하고 숨을 불 때 파르르 떨렸다. 그는 그대로 세나의 얇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 향이 났다. 복숭아 향 같았다. 그가 바르는 립크림의 향일까, 생각하다가 노크하듯 굳게 닫힌 이를 톡, 톡 건드리면 세나는 입을 열었다. 호흡과, 호흡이 닿아 맺어져 서로의 숨이 되었다. 세나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유우키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는 혀를 섞었다. 곧은 치열을 쓸다가, 다가온 혀를 장난치듯 움직이자, 세나는 작게 떨었다. 인중에 닿는 숨은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 희미한 감촉을 끌어안지 않는다면 흩어져버릴 것 같이 불안했다. 호흡을 교환하고, 숨을 맞추는 그 순간은 유우키 마코토에게는 별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그에게 그 순간은 단순한 수단이었다. 세나 이즈미라는 귀찮은 존재를 잠시 재우기 위한 약간의 변덕. 그 뿐이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세나는 후련해보였다. 어째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뭔가를 놓아버린 것 같았다. 느리게 부유하는 먼지우주처럼, 혹은 민들레 홀씨처럼 천천히 웃었다. 그는 유우키가 우산을 펼칠 때 까지 기다려주었다. 어차피 집으로, 가장 빨리 가는 길은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뒤를 돌았다. 어딜 가냐고 물었을 때 그는 편의점이라고 대답했다. 편의점에 가는 길은 그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우키는 잡지 않았다.
비는 여백을 채우듯 내렸다. 유우키는 그 일이 별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나의 변덕에 어울려줬던 것뿐이었다. 그의 사랑인 듯, 사랑이 아닌 것 같은 집착에 휘말린 것뿐이었다. 그는 세나 이즈미의 ‘한번만’을 이기기 힘들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우키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했던 생각은 ‘아, 배고프다.’ 정도였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초콜릿 우유와 우유 빵을 샀고,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렸다. 세나의 표정이 신경 쓰였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는 내일 세나가 자신을 본다면, 당연히 인사 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물리나 수학 공식처럼 움직였다. 세계가 견고했음으로 깨질 일도 없었다. 유우키는 변함없이 세나를 밀어내고, 세나는 다가올 것이었다. 무조건적인 애정을 부담스럽게 느끼면서, 그가 보고 싶어 하는 ‘순수하고 천사 같은 유우키 마코토’는 더 이상 없다는 걸 가끔씩 확인시켜주면 될 일이었다. 달과 지구는 그렇게 마주보며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가까워지거나 멀어진 적이 없었다. 둘은 그 정도의 관계였다.
그 정도의, 관계였어야만 했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
세나가 인사를 하지 않은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유우키는 여전히 프린터물과 씨름하고 있었다. 멀리서 모리사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로 패스해! 라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는 3학년 A반이었고, 세나 또한 그럼 체육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얀 피부가 타는 걸 싫어했음으로, 그는 어딘가 벤치나, 나무 그늘, 혹은 건물 그늘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유우키는 3번 문제에서 또다시 고민했다. 남은 문제는 많은데, 시간은 남지 않았다. 시계의 분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날의 골목길이 계속 번져왔다. 세나의 뒷모습이 번졌다가, 다시 ‘한번만’이라는 목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밀물과 썰물, 해변가의 파도처럼 반복되는 일이었다. 유우키 마코토는 자신의 세계가 붕 뜨고 있음을 느꼈다. ‘유우키 마코토’라는 이름의 우주에 작용하던 중력법칙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붕 떠서, 먼 곳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그는 세나가 자신을 휘두르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 날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신경이 쓰였다. 마주쳤을 때, 세나는 인사하지 않았다. 대신 초연하게 웃고 꼿곳히 허리를 펴고 걸었다. 엇갈리는 시선이 너무나 싫었지만, 유우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첫 삼일간은 ‘편하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머지 4일간은 내내 불편했다. 없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나날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한숨이 늘어갔고, 눈가에 다크서클이 졌다. 몸 관리가 소홀한 모습을 봐도 세나는 그저 지나갔다.
그 잠깐 사이에. 골목길의 끄트머리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그 사이에, 그는 홀씨처럼 변했다. 환하게 웃던 노란 꽃송이가 하얗게 새어버린 홀씨가 되는 것처럼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눈치 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속이 꼬였다.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주먹을 쥐고 가슴을 친다고 해서 해결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알고 있는 공식과 다르고, 법칙에서 달라져버린 문제를 유우키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십분 남았다.”
교탁에 서 있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답답하게 다가왔다. 이 시간 내에 준비 된 문제를 다 풀어내는 건 무리라, 유우키는 손에서 돌리던 샤프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어차피 테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을 들어 창문을 열자 바람이 몰려왔다. 팬지가 죽어버린 화분에서 핀 민들레 홀씨들이 흩어졌다. 구체이던 게 반구체로 변했다. 유우키는 그 끝, 시선에서 세나를 발견했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양산을 받히고 서서, 축구를 관람하고 있는 듯 했다.
노골적으로 바라보니, 시선이 닿았는지, 세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무시하듯 정면을 바라보았다. 유우키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의 히다카는 그의 3번 문제 여백에 공식을 적어주고 있었다. 자습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우키는 세나의 시선이, 높은 곳을 향하다가, 다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봐주고, 인사해줘요, 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을 쐈다.
인사를 바라는 건 어리숙한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민들레 홀씨를 부는 사람은 그 홀씨가 어디로 가서 싹을 틔울지 신경 쓰지 않는다. 세나는 유우키 쪽을 힐끔, 힐끔 보다가 깊은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유우키는 저가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난이라면 악질이었고, 장난이 아니라면 그거대로 나빴다. ‘한번만’이라는 말로 사람을 잔뜩 휘둘러놓고 피하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우리’의 법칙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는 샤프를 잡아 돌렸다.
샤프의 세계가 돌고, 돌았다. 유우키는 자신을 둘러싼 중력이 변해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우키 마코토라는 이름의 행성의 회전축은 일주일 전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향할 곳을 바꾸고 있었다. 눈치 챘을 땐 이미 민들레는 노란 꽃망울을 홀씨로 바꾸곤 한다. 유우키는 분한 마음을 담아, 남은 홀씨를 불었다. 그는 열린 창문 밖으로 날아간 씨앗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자꾸만 엉켜갔다.
수업 시간,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여백이 찾아왔다. 샤프 소리도, 분침 소리도 작게 들리는 이 (사이)에서, 다시 바람을 타고 일주일 전의 세나 이즈미가 번져왔다. 이번에도 휘둘렸다. 휘둘려버리고 말았다. 유우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히다카가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말했지만, 그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소년을 둘러 싼 고민들은 모든 법칙에서 어긋나 있었음으로, 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규칙위반’을 중력으로 하는 세계가 움직였다. 교실에 있는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유우키 마코토는 제 회전축이 천천히 기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부유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초봄의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졸음을 잔뜩 담은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날이었다.
봄이었다. 무른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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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커 | 2016. 1. 31. 23:17
* 마코토를 짝사랑하는 이즈미 주의해주세요 :)
* 앙스타 전력에 참가했어용 >< '청소'라는 키워드입니다.
* 제목은 "MAD HEAD LOVE'라는 곡의 후렴구에서 빌려왔습니다
ベイビーベイビビアイラービュ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말처럼
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에서
힘내, 사랑하니까
꽃 덤불이 그려진 빨간 카드에 처음으로 한 줄을 적었다
― 황병승「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
***
세나 이즈미는 사랑을 하고 있다.
세나 이즈미는 주기적으로 청소를 한다.
나는 하품을 하며, 스튜디오 한 구석에 만들어 뒀던 가렌더를 정리하는 셋쨩을 바라보았다. 짜증난다는 말은 주문처럼 속삭인다. 사진을 걸어둔 노끈을 벽에 고정시키기 위해 묶었던 리본을 풀어 내리면, 사진과 함께 집개들이 쏟아진다. 라이터로 가열해 붙이는 고리의 빈자리는 유난히 휑해 보인다. 이 과정을 수행할 때의 셋쨩의 얼굴은 언제나 무표정하고, 등은 불안해 보인다. 발끝으로 서는 아슬아슬한 동작을 수행하고 있는 발레리노 같다.
길이가 긴 가렌더에 걸려있는 것들은 대부분 ‘셋쨩의 유우 군’의 사진이다. 남이 찍어 준 사진이던, 자기가 찍은 사진이든, 충실히 인화해서 집개에 물려 두는 것이다. 나무 집개가 사진을 훼손하면 안 되기 때문에, 사진에는 작은 마스킹테이프가 붙어 있다. 노란색부터 노랑연두, 연두를 거려 초록색까지 이어지는 테이프들은 명백하게 셋쨩의 취향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셋쨩은 예쁜 걸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그의 청소는 노끈과 집개로 만든 가렌더의 왼쪽 매듭을 푸는 것부터 시작한다. 떨어져 잃어버리지 않게 단단하게 묶은 매듭을 천천히 풀면 사진은 쏟아질 듯 한 쪽으로 무너진다. 그 무너지는 걸 감흥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면, 셋쨩의 사랑이 천천히 식어버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스튜디오 한켠의 내 자리는 그게 가장 잘 보이곤 했다. 안즈가 구해준 매트리스에 올라 사진을 노려보는 셋쨩을 바라보는 건 나름의 유희였다. 짜증난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말로 짜증을 내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마저 오른쪽 매듭을 풀고선, 책상에 가렌더를 던진다.
‘셋쨩의 유우 군’의 사진은 엉망으로 엉킨 노끈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가렌더 하나를 풀어놓으면 문제는 밑의 칸이다. 밑의 칸은 ‘셋쨩의 유우 군’ 사진뿐만 아니라 우리 유닛의 사진과, 일정이 적혀 있는 메모보드로도 이용하고 있었다. 분을 풀기 위해서는 저걸 다 풀어버리고 던지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셋쨩은 무르기 때문에 그걸 전부 풀어 던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화내고 있는 대상은 ‘셋쨩의 유우군’이지 ‘나이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애매하게 무른 구석을 보는 걸 좋아했다. 빨갛게 익은 사과의 작은 부분이 곪은 것처럼, 팽팽한 감정을 구경할 때 마다 기뻤기 때문이다. 셋쨩의 슬픔은 나의 약진. 그가 청소를 할 때 마다 보여주는 표정들은 나의 승리. 나는 체스에서 상대의 퀸을 따버린 기분을 느끼곤 한다. 완전히 이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체크’를 할 확률이 더 높아진 것이다. 나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매트리스에 눕는다. 그러면 가랜더에서 ‘셋쨩의 유우 군’의 사진만을 빼던 셋쨩은 뒤를 돌면서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해줄래? 쿠마 군은 정말 사람 속도 모르고 눈치도 볼 줄 모르고!”
라는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나는 내 약진을 기뻐하고 있을 뿐이고, 셋쨩은 케케묵은 사진들을 청소하고 있을 뿐인데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건 불합리한 일이다. 나는 베개를 끌어 안고 셋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셋쨩은, 사진을 찢을 기세로 노려보다가, 툭 하고 건드리면 엉엉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다는 식으로 혼자만의 눈싸움을 시작하곤 한다. 벌써 몇 년째 반복해오던 일이라 특별한 감흥은 없다.
이번에 집어 든 사진은 ‘셋쨩의 유우 군’이 나이츠 제복을 입었던 날의 사진이다. 듀얼 때의 일이다. ‘빌어먹을 안경’도 벗겨버리고, 제 옷을 입혀 포즈를 취하게 해 놓은 사진인데, 그 사진은 셋쨩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나는 애달픈 것처럼 사진 위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던 셋쨩을 기억한다. 닿을 수 없는 곳,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제 5의 계절 같은 곳에 닿은 기분일 거라고 생각한다. ‘셋쨩의 유우 군’은 나이츠가 아니고, 셋쨩의 옷을 입을 일도 없다. 요컨대 저 사진은 선처럼 이어지는 지구의 시간축을 비틀어, 여름 뒤에 바로 겨울이 오게 만든 정도의 기적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셋쨩은 그 사진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 고정된 ‘셋쨩의 유우 군’의 얼굴은 곤란해 보이고, 셋쨩은 그걸 보면서 온통 투덜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울거나, 더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 갈 것 같았다. 청소는 보통 미련을 동반한다. 그 미련을 얼마나 빨리 끊어버리느냐에 따라 청소 속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셋쨩을 관찰한 결과,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하품을 하면서,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셋쨩, 전혀 청소가 되지 않잖아”
“정말 짜증나네! 청소 할 거거든? 이제 정리하려고 했거든? 쿠마 군이 상관 해주지 않아도 괜찮거든?”
“이제 그 꼴보기 싫은 거 치울 거잖아.”
“유우 군은 꼴보기 싫은 게 아니거든?”
아, 상처받았다. 방금 자기가 한 말에 상처받았다. 셋쨩은 가렌더를 정리하고, 앨범이 꽂혀있는 책꽂이 위쪽에 있던 액자들을 손으로 거둬들였다. 빈자리에는 먼지가 의외로 쌓여 있었다. 이건 다 평소에 정리할 때 액자 표면만 닦은 셋쨩 때문이다. 그 죄가 깊음을 알고 있는지, 셋쨩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물걸레로 먼지를 닦았다. 먼지를 닦는 셋쨩의 뒷모습은 오늘따라 작다. 1분에 0.1cm씩 작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좋은 ‘친구’임으로 이럴 때 말을 걸어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것 또한 오랜 경험에 의해 터득한 물건이었다. 셋쨩, 하고 무미건조하게 부르면 그는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돈다. 이건 곧 울지도 모르니 위험하다는 신호다. 셋쨩은 고양이 같이 자존심이 높아서 우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한다. 나는 이불을 목 끝까지 뒤집어 쓰고 자려는 포즈를 취했다. 의자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힐끔 보고, 우는 걸 안 들켜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셋쨩은 자기가 내 손바닥 위에 올라 가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심한 말 들었어? 라고 물어봤다. 나는 이 때 ‘셋쨩의 유우 군’을 ‘셋쨩의 유우 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그 애’라고 발음할 뿐이다. 셋쨩의 그 애는 하나밖에 없다. 그 간질간질한 호칭을 ‘셋쨩의 유우 군’에게 쓰는 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을 달랠 때는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는 게 중요하다. 이는 중세시대 때, 아니 그 이전부터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가끔 이기적이고 배려심이 콩알만해지는 셋쨩은 모르겠지만.
내 질문에 셋쨩은 몇 번이고 고민했다. 아마도 말을 꾸며내려는 모양이었다. 집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진과 집개를 분리하고 노끈을 정리해서 상자에 넣어버릴 생각이다. 가랜더의 사진들은은 노란 게 예전 거, 초록색이 최근 거다. 평소에는 그라데이션을 먹여 내놓지만 지금의 셋쨩은 그럴 정신도 없이 상자에 넣어둘 것이다. 그게 나름의 청소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청소는 아예 깨끗하게 해서 세상에서 없애버린다는 말이다. 바보 같은 셋쨩은 그걸 모르고 있다. 물론, 나는 알려줄 생각이 없지만.
나는 잠이 안오는 척, 몸을 일으켰다. 가랜더가 떨어진 자리는 휑해보였다. 눈에 익던 게 안 보이기 때문이다. 너무 익숙해진 탓이다. 익숙함은 이래서 무섭다. 셋쨩은 노끈을 엮어 상자에 넣고 있었다. 앨범도, 액자도 다 상자 안에 들어간다. 그는 나름대로 청소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일어나서 먼지떨이로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먼지를 털고, 나름대로 닦아 놓으면 벽에 가렌더가 달렸다는 표시는 양 옆의 고리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여드름을 짜고 난 다음 남는 자국 같은 무늬다. 나는 이 상태를 좋아한다.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무심하게 묻는다. 다정하게 질문하면 내가 셋쨩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들켜버린다. 셋쨩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런 날은 매우 심한 말을 들은 날이다. 가령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이라던가, ‘나한테 이러는 거 이즈미씨에게는 그냥 놀이겠죠!’ 하는 말 들. 의외로 ‘셋쨩의 유우 군’은 우리 유닛 일학년이랑 비슷한 과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상처주는 말을 해버린다. 고민을 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가 있겠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똑같다.
가엾은 셋쨩. 셋쨩은 나이츠의 연습실에서 자기가 ‘셋쨩의 유우 군’을 좋아했다는 흔적을 모두 청소하고 있었다. 으레 있는 일이었다. 모든 걸 보기 싫어하는 날이. 나는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셋쨩의 맞은 편에 가서 앉았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오늘 아침에 마-군이 주고 간 사탕이 있었다. 멋들어진 사탕은 아니었다. 잠이 깰 때 좋다는 사탕이었고, 단 맛은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무심하게 셋쨩에 손에 사탕을 던졌다. 이것 또한 으레 있는 날이었다.
짝사랑은 외롭다. 흔적을 청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정리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셋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짝사랑을 하는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셋쨩은 아마도 “내가 유우 군을 싫어해도 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아마 셋쨩의 머리속에서 엉망진창으로 널려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사랑을 쫓아내고 있다.
청소를 해도 결국 방은 어질러진다. 셋쨩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끝없는 반복과, 반복. 그리고 반복. 피네가 없는 악보처럼 계속 반복된다. 그 리듬을 셋쨩은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하고 상처받는다. 이는 셋쨩의 일상이다. 아마도 설렘보다 일상적이라는 감각이 더 클 것이다. 설레던 게 자연스럽게 되고, 매일매일 설레다 보면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건 어느정도 사랑이 휘발되었다는 말이다.
열렬하지 않다. 매일매일 그런 에너지를 소모하다 보면 망가져버릴지도 모른다. 대신 일상적인 사랑이 되어버리면, 사랑이 일상으로 끌어내려지면 때어낼 수 없다. 청소를 하고 밀어내려고 해도 다시 돌아와 버린다. 다시 머리나 방이 사랑으로 가득 차버리게 되는 것이다. 셋쨩은 가렌더와 사진, 앨범과 액자가 들어있는 상자를 나한테 밀어 넣는다. 나는 ‘셋쨩의 유우 군’과 머릿속에서 두던 체스에서, 내가 졌음을 또 인정해야 한다.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퀸을 잘라내도 어느새 폰이 퀸으로 승격 해 있다. 이건 매우 불공정한 요소지만 어쩔 수 없다.
“힘내,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진 거니까. 그래서 셋쨩은 ‘셋쨩의 유우 군’에게 지는 거고, 나는 셋쨩에게 지는 거다. 나는 상자를 받아서 버리겠다고 말하지만 사실 정말로 정리 해 버릴 생각은 없다. 셋쨩도 그걸 알기에 주는 거다. ‘셋쨩의 유우 군’을 닮은 샛노란색의 상자에는 드문드문 손 때가 보인다. 얼마나 많이 정리했으면. 얼마나 많이 여닫았으면. 이 상자에는 내 패배 또한 묻어있다. 셋쨩이 나를 친구로 봤기 때문에 나는 이 상자를 만질 수 있는 거고, 여기에 보이지 않는 지문과 울음을 잔뜩 찍어 냈다.
세나 이즈미는 주기적으로 청소를 한다.
이건 다, 세나 이즈미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쨩이 청소를 하는 날에는 나도 청소를 하게 된다. 나도 오늘 밤 내 방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셋쨩이 날 좋아하지 않는 이유들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얠 미워해도 되는 백 가지 이유에 대해서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나는 남들보다 방을 어지르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 내일이면 하하 웃으면서 셋쨩에게 “상자 돌려받고 싶으면 나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 같은 속없는 소리를 지껄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다 진 거다.
아마도 ‘셋쨩의 유우 군’은 청소를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건 조금 부러웠지만 막 속이 엉키진 않았다. 이미 일상적인 일에 상처를 받는 건 에너지 낭비였다. 나는 셋쨩을 바라보았다. 벌개진 눈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안에 내가 담길 일이 없음을 알면서도, 지금 셋쨩이 날 바라보고 있다는 데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나는 다시 말한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내 입을 빌어 셋쨩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나한테 늘어 놓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청소는 이 말을 해야 정말로 끝난다. 나는 셋쨩이 먼지떨이를 정리하는 걸 바라보다 다시 말했다. 조금 억울한 기분이었다.
“힘내,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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