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 | 2016. 1. 31. 23:17
* 마코토를 짝사랑하는 이즈미 주의해주세요 :)
* 앙스타 전력에 참가했어용 >< '청소'라는 키워드입니다.
* 제목은 "MAD HEAD LOVE'라는 곡의 후렴구에서 빌려왔습니다
ベイビーベイビビアイラービュ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말처럼
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에서
힘내, 사랑하니까
꽃 덤불이 그려진 빨간 카드에 처음으로 한 줄을 적었다
― 황병승「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
***
세나 이즈미는 사랑을 하고 있다.
세나 이즈미는 주기적으로 청소를 한다.
나는 하품을 하며, 스튜디오 한 구석에 만들어 뒀던 가렌더를 정리하는 셋쨩을 바라보았다. 짜증난다는 말은 주문처럼 속삭인다. 사진을 걸어둔 노끈을 벽에 고정시키기 위해 묶었던 리본을 풀어 내리면, 사진과 함께 집개들이 쏟아진다. 라이터로 가열해 붙이는 고리의 빈자리는 유난히 휑해 보인다. 이 과정을 수행할 때의 셋쨩의 얼굴은 언제나 무표정하고, 등은 불안해 보인다. 발끝으로 서는 아슬아슬한 동작을 수행하고 있는 발레리노 같다.
길이가 긴 가렌더에 걸려있는 것들은 대부분 ‘셋쨩의 유우 군’의 사진이다. 남이 찍어 준 사진이던, 자기가 찍은 사진이든, 충실히 인화해서 집개에 물려 두는 것이다. 나무 집개가 사진을 훼손하면 안 되기 때문에, 사진에는 작은 마스킹테이프가 붙어 있다. 노란색부터 노랑연두, 연두를 거려 초록색까지 이어지는 테이프들은 명백하게 셋쨩의 취향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셋쨩은 예쁜 걸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그의 청소는 노끈과 집개로 만든 가렌더의 왼쪽 매듭을 푸는 것부터 시작한다. 떨어져 잃어버리지 않게 단단하게 묶은 매듭을 천천히 풀면 사진은 쏟아질 듯 한 쪽으로 무너진다. 그 무너지는 걸 감흥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면, 셋쨩의 사랑이 천천히 식어버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스튜디오 한켠의 내 자리는 그게 가장 잘 보이곤 했다. 안즈가 구해준 매트리스에 올라 사진을 노려보는 셋쨩을 바라보는 건 나름의 유희였다. 짜증난다고 말을 하면서도 정말로 짜증을 내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마저 오른쪽 매듭을 풀고선, 책상에 가렌더를 던진다.
‘셋쨩의 유우 군’의 사진은 엉망으로 엉킨 노끈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가렌더 하나를 풀어놓으면 문제는 밑의 칸이다. 밑의 칸은 ‘셋쨩의 유우 군’ 사진뿐만 아니라 우리 유닛의 사진과, 일정이 적혀 있는 메모보드로도 이용하고 있었다. 분을 풀기 위해서는 저걸 다 풀어버리고 던지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셋쨩은 무르기 때문에 그걸 전부 풀어 던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화내고 있는 대상은 ‘셋쨩의 유우군’이지 ‘나이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애매하게 무른 구석을 보는 걸 좋아했다. 빨갛게 익은 사과의 작은 부분이 곪은 것처럼, 팽팽한 감정을 구경할 때 마다 기뻤기 때문이다. 셋쨩의 슬픔은 나의 약진. 그가 청소를 할 때 마다 보여주는 표정들은 나의 승리. 나는 체스에서 상대의 퀸을 따버린 기분을 느끼곤 한다. 완전히 이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체크’를 할 확률이 더 높아진 것이다. 나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매트리스에 눕는다. 그러면 가랜더에서 ‘셋쨩의 유우 군’의 사진만을 빼던 셋쨩은 뒤를 돌면서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해줄래? 쿠마 군은 정말 사람 속도 모르고 눈치도 볼 줄 모르고!”
라는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나는 내 약진을 기뻐하고 있을 뿐이고, 셋쨩은 케케묵은 사진들을 청소하고 있을 뿐인데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건 불합리한 일이다. 나는 베개를 끌어 안고 셋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셋쨩은, 사진을 찢을 기세로 노려보다가, 툭 하고 건드리면 엉엉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다는 식으로 혼자만의 눈싸움을 시작하곤 한다. 벌써 몇 년째 반복해오던 일이라 특별한 감흥은 없다.
이번에 집어 든 사진은 ‘셋쨩의 유우 군’이 나이츠 제복을 입었던 날의 사진이다. 듀얼 때의 일이다. ‘빌어먹을 안경’도 벗겨버리고, 제 옷을 입혀 포즈를 취하게 해 놓은 사진인데, 그 사진은 셋쨩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나는 애달픈 것처럼 사진 위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던 셋쨩을 기억한다. 닿을 수 없는 곳,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제 5의 계절 같은 곳에 닿은 기분일 거라고 생각한다. ‘셋쨩의 유우 군’은 나이츠가 아니고, 셋쨩의 옷을 입을 일도 없다. 요컨대 저 사진은 선처럼 이어지는 지구의 시간축을 비틀어, 여름 뒤에 바로 겨울이 오게 만든 정도의 기적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셋쨩은 그 사진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 고정된 ‘셋쨩의 유우 군’의 얼굴은 곤란해 보이고, 셋쨩은 그걸 보면서 온통 투덜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울거나, 더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 갈 것 같았다. 청소는 보통 미련을 동반한다. 그 미련을 얼마나 빨리 끊어버리느냐에 따라 청소 속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셋쨩을 관찰한 결과,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하품을 하면서,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셋쨩, 전혀 청소가 되지 않잖아”
“정말 짜증나네! 청소 할 거거든? 이제 정리하려고 했거든? 쿠마 군이 상관 해주지 않아도 괜찮거든?”
“이제 그 꼴보기 싫은 거 치울 거잖아.”
“유우 군은 꼴보기 싫은 게 아니거든?”
아, 상처받았다. 방금 자기가 한 말에 상처받았다. 셋쨩은 가렌더를 정리하고, 앨범이 꽂혀있는 책꽂이 위쪽에 있던 액자들을 손으로 거둬들였다. 빈자리에는 먼지가 의외로 쌓여 있었다. 이건 다 평소에 정리할 때 액자 표면만 닦은 셋쨩 때문이다. 그 죄가 깊음을 알고 있는지, 셋쨩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물걸레로 먼지를 닦았다. 먼지를 닦는 셋쨩의 뒷모습은 오늘따라 작다. 1분에 0.1cm씩 작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좋은 ‘친구’임으로 이럴 때 말을 걸어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것 또한 오랜 경험에 의해 터득한 물건이었다. 셋쨩, 하고 무미건조하게 부르면 그는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돈다. 이건 곧 울지도 모르니 위험하다는 신호다. 셋쨩은 고양이 같이 자존심이 높아서 우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한다. 나는 이불을 목 끝까지 뒤집어 쓰고 자려는 포즈를 취했다. 의자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힐끔 보고, 우는 걸 안 들켜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셋쨩은 자기가 내 손바닥 위에 올라 가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심한 말 들었어? 라고 물어봤다. 나는 이 때 ‘셋쨩의 유우 군’을 ‘셋쨩의 유우 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그 애’라고 발음할 뿐이다. 셋쨩의 그 애는 하나밖에 없다. 그 간질간질한 호칭을 ‘셋쨩의 유우 군’에게 쓰는 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을 달랠 때는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는 게 중요하다. 이는 중세시대 때, 아니 그 이전부터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가끔 이기적이고 배려심이 콩알만해지는 셋쨩은 모르겠지만.
내 질문에 셋쨩은 몇 번이고 고민했다. 아마도 말을 꾸며내려는 모양이었다. 집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진과 집개를 분리하고 노끈을 정리해서 상자에 넣어버릴 생각이다. 가랜더의 사진들은은 노란 게 예전 거, 초록색이 최근 거다. 평소에는 그라데이션을 먹여 내놓지만 지금의 셋쨩은 그럴 정신도 없이 상자에 넣어둘 것이다. 그게 나름의 청소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청소는 아예 깨끗하게 해서 세상에서 없애버린다는 말이다. 바보 같은 셋쨩은 그걸 모르고 있다. 물론, 나는 알려줄 생각이 없지만.
나는 잠이 안오는 척, 몸을 일으켰다. 가랜더가 떨어진 자리는 휑해보였다. 눈에 익던 게 안 보이기 때문이다. 너무 익숙해진 탓이다. 익숙함은 이래서 무섭다. 셋쨩은 노끈을 엮어 상자에 넣고 있었다. 앨범도, 액자도 다 상자 안에 들어간다. 그는 나름대로 청소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일어나서 먼지떨이로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먼지를 털고, 나름대로 닦아 놓으면 벽에 가렌더가 달렸다는 표시는 양 옆의 고리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여드름을 짜고 난 다음 남는 자국 같은 무늬다. 나는 이 상태를 좋아한다.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무심하게 묻는다. 다정하게 질문하면 내가 셋쨩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들켜버린다. 셋쨩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런 날은 매우 심한 말을 들은 날이다. 가령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이라던가, ‘나한테 이러는 거 이즈미씨에게는 그냥 놀이겠죠!’ 하는 말 들. 의외로 ‘셋쨩의 유우 군’은 우리 유닛 일학년이랑 비슷한 과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상처주는 말을 해버린다. 고민을 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가 있겠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똑같다.
가엾은 셋쨩. 셋쨩은 나이츠의 연습실에서 자기가 ‘셋쨩의 유우 군’을 좋아했다는 흔적을 모두 청소하고 있었다. 으레 있는 일이었다. 모든 걸 보기 싫어하는 날이. 나는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셋쨩의 맞은 편에 가서 앉았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오늘 아침에 마-군이 주고 간 사탕이 있었다. 멋들어진 사탕은 아니었다. 잠이 깰 때 좋다는 사탕이었고, 단 맛은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무심하게 셋쨩에 손에 사탕을 던졌다. 이것 또한 으레 있는 날이었다.
짝사랑은 외롭다. 흔적을 청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정리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셋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짝사랑을 하는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셋쨩은 아마도 “내가 유우 군을 싫어해도 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아마 셋쨩의 머리속에서 엉망진창으로 널려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사랑을 쫓아내고 있다.
청소를 해도 결국 방은 어질러진다. 셋쨩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끝없는 반복과, 반복. 그리고 반복. 피네가 없는 악보처럼 계속 반복된다. 그 리듬을 셋쨩은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하고 상처받는다. 이는 셋쨩의 일상이다. 아마도 설렘보다 일상적이라는 감각이 더 클 것이다. 설레던 게 자연스럽게 되고, 매일매일 설레다 보면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건 어느정도 사랑이 휘발되었다는 말이다.
열렬하지 않다. 매일매일 그런 에너지를 소모하다 보면 망가져버릴지도 모른다. 대신 일상적인 사랑이 되어버리면, 사랑이 일상으로 끌어내려지면 때어낼 수 없다. 청소를 하고 밀어내려고 해도 다시 돌아와 버린다. 다시 머리나 방이 사랑으로 가득 차버리게 되는 것이다. 셋쨩은 가렌더와 사진, 앨범과 액자가 들어있는 상자를 나한테 밀어 넣는다. 나는 ‘셋쨩의 유우 군’과 머릿속에서 두던 체스에서, 내가 졌음을 또 인정해야 한다.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퀸을 잘라내도 어느새 폰이 퀸으로 승격 해 있다. 이건 매우 불공정한 요소지만 어쩔 수 없다.
“힘내,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진 거니까. 그래서 셋쨩은 ‘셋쨩의 유우 군’에게 지는 거고, 나는 셋쨩에게 지는 거다. 나는 상자를 받아서 버리겠다고 말하지만 사실 정말로 정리 해 버릴 생각은 없다. 셋쨩도 그걸 알기에 주는 거다. ‘셋쨩의 유우 군’을 닮은 샛노란색의 상자에는 드문드문 손 때가 보인다. 얼마나 많이 정리했으면. 얼마나 많이 여닫았으면. 이 상자에는 내 패배 또한 묻어있다. 셋쨩이 나를 친구로 봤기 때문에 나는 이 상자를 만질 수 있는 거고, 여기에 보이지 않는 지문과 울음을 잔뜩 찍어 냈다.
세나 이즈미는 주기적으로 청소를 한다.
이건 다, 세나 이즈미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쨩이 청소를 하는 날에는 나도 청소를 하게 된다. 나도 오늘 밤 내 방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셋쨩이 날 좋아하지 않는 이유들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얠 미워해도 되는 백 가지 이유에 대해서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나는 남들보다 방을 어지르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 내일이면 하하 웃으면서 셋쨩에게 “상자 돌려받고 싶으면 나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 같은 속없는 소리를 지껄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다 진 거다.
아마도 ‘셋쨩의 유우 군’은 청소를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건 조금 부러웠지만 막 속이 엉키진 않았다. 이미 일상적인 일에 상처를 받는 건 에너지 낭비였다. 나는 셋쨩을 바라보았다. 벌개진 눈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안에 내가 담길 일이 없음을 알면서도, 지금 셋쨩이 날 바라보고 있다는 데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나는 다시 말한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내 입을 빌어 셋쨩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나한테 늘어 놓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청소는 이 말을 해야 정말로 끝난다. 나는 셋쨩이 먼지떨이를 정리하는 걸 바라보다 다시 말했다. 조금 억울한 기분이었다.
“힘내,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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