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 | 2016. 1. 30. 04:39
*짝사랑 주의. 이즈미는 왕님을, 리츠는 이즈미를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그저 불면증에 걸린 이즈미와... 피아노 치는 리츠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
*추천 BGM은 쇼팽의 Nocturne Op.9 No.2
달의 뒷면, 크레이터 속 녹턴
누군가 두고 간 가을이
홍역처럼 붉다, 라는 문장을 썼다 지운다
저기 핑그르르 수면을 도는 단풍잎
같은 병을 다르게 앓지 못한 우리들은
왜 약속 없이 나누는 열병처럼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서만 생각했을까
―이은규 『홍역』
***
달은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같기 때문에 지구에서는 늘 달의 같은 면만 보게 된다. 지구에서 볼 수 없는 달의 뒤편은 탐사선으로만 볼 수 있으며, 최초로 달의 뒷면을 촬영한 우주선은 1959년 소련에서 발사한 루나 3호이다. 달의 후면은 수많은 크레이터들로 뒤덮여 있다.
***
자유낙하 하는 꿈을 꾼다.
날개가 없어 끝없이 밑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어디에 발을 붙이고 서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세나 이즈미는 꿈속에서 무조건적인 낙하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네’가 나타나면 꿈속임을 알 수 있다던 어떤 시의 구절처럼, 그는 몸이 중력에 의해 강하게 잡아당겨지는 순간 그것이 환상이고, 꿈임을 자각한다. 문제는, 깨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낙하한다. 낙하의 과정은 매우 빠르다. 평지에 서 있다면 지구의 내핵으로, 건물 위에 서 있었다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추락의 순간에는 생각을 할 수 없어, 날 수 없었다. 꿈의 마지막은 언제나 추락 후였다. 무언가 바닥에 부딪히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눈이 떠지지 않았다. 꿈이 무섭다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세나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 말을 다시 말한다면, 비이상적이고 비이성적인 곳에선 무디다는 뜻이었다. 그는 반복적인 꿈이 계속 됨을 믿지 않았다. 처음에는 ‘추락’이라는 공통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 번 ‘죽는 것’을 경험한 결과,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세나는 불쾌했다. 스트레스의 발현을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겪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꿈임을 자각함과 동시에 날아오르려고 했다. 소위 자각몽에서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미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의 추락을 더 경험할 뿐이었다. 무언가 짓눌린 것 같았다. 세나는 죽음과 동시에 지독한 무력감에 젖어 아침을 맞이했다. 그는 그 곳에서 벗어나는 게 죽음 밖에 없다는 것에 절망했다. 날 수 있는 날도 있었지만, 바로 고꾸라질 뿐이었다.
지독한 무기력 속에서 맞이하는 새벽과, 몇 번의 자유낙하를 경험하면서 맞이하는 아침은 실로 더러웠다. 그는 뫼비우스의 띠 안을 걸어가는 것 같았다. 밤에 잠이 들었을 때, 눈치 채면 그는 꿈속이었고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쾅- 하고 지면에 부딪히는 과정을 자각한지 열흘이 지났을 때, 세나는 더 이상 밤에 잘 수 없었다.
곱던 얼굴에 다크서클이 올라왔다. 뾰루지는 나지 않았지만, 내내 잠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성적이 소소하게 떨어졌고, 낮에 병든 닭처럼 조는 일이 많아졌다. 책상에 두 팔꿈치를 올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쪽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 쪽잠은 다행이도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만, 목과 어깨에 근육이 뭉쳐서 발레 동작을 하기 힘들어졌을 뿐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세계는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유닛 연습은 없었다. 그의 왕은 이미 머나먼 우주로 떠나버렸다. 등교하지 않기 시작했다. 기사의 검은 한 번 꺾였다. 검자루를 들고 일어설 기력이 없었다. 그가 남긴 무기와, 유산을 가지고 노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릎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세나는 모든 것을 꿈 탓으로 돌렸다. 그는 도통 잠들 수 없었다.
후유증은 열병처럼 찾아온다. 그는 더 이상 집에서 잘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등 뒤가 꺼지는 것 같았다. 세나는 중력을 믿지 못했다. 꿈이 아님을 인지하면서도 발을 두어 번 굴러 안전한지, 안전하지 않은 지 확인하곤 했다. 물론, ‘꿈’에서는 그 순간 발밑이 없어지면서 추락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날개가 없었고, 끝없이 가라앉았다. 달의 뒤편에 있다는 큰 바다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온 세상이 망가진 기분이었다. 달의 뒷면에서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초가을에 느닷없이 내리는 비 같기도 했다. 세나는 제 기분이 지구에서는 보지 못할 달의 뒤처럼 망가져 버렸다고 확신했다. 그는 낮에 자는 쪽잠을 통해 연명했다. 밤은 부유의 공간이었다. 그는 차라리 떠다니고 싶었다. 중력을 잊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끊임없이 피곤이라는 이름의 소행성이 세나의 세계에 충돌하기를 반복했다. 크레이터 자국은 깊게, 깊게 패였다. 그는 점점 폐허가 되어갔다.
병원에서는 그의 꿈에 대해 스트레스라고 진단했다. 세나는 그 꿈의 원인이 패배라고 생각했다. 기사는 남았지만 왕은 쓰러졌다. 왕이 쓰러지면 게임은 진다. 다른 말들이 얼마나 살아있냐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나이츠’는 보이지 않았다.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꿈은 계속 될 게 분명했다. 끝이 없는 불안을 혼자서 해결하기란 어려웠다. 강한 무력함은 그의 발뒤꿈치에 매달려 있는 그림자처럼 자리했다.
익숙한 불면이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교실에서 잘 수 없었다. 세나는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잘 수 없었다. 또한 속죄하듯, 혹은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도저히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눈에 띄는 자세였고, 선생님께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은 한계였다. 모든 게 극에 달해 있었다. 세나는 걸리지 않고 잘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옥상은 잠겨 있었고, 가든 테라스 쪽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방황하고 방황하다, 낡은 교사 앞에 도착했다.
굳게 닫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문은 한 번 밀자, 어이없게 열렸다. 먼지 냄새 나는 그 곳으로 천천히 들어가자 햇볕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우주처럼 뿌려져 있었다. 얼굴에 닿는 게 기분이 나빠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걸어갔다. 그는 청소가 덜 되 있는 곳들 사이에서 유난히 깨끗한 곳을 볼 수 있었다. 청소도 별로 하지 않는 교사에서 그 곳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음악실이라는 명패에는 거미가 줄을 치고 있었지만, 교실만은 깨끗했다.
세나는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그랜드피아노 옆에 준비해 둔 것 마냥 잠자리가 있었다. 홍차에 우유를 탄 것 같은 포근포근한 향이 났다. 그는 햇살이 들어오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의 비밀 장소인 듯 했다. 어둠이 무서웠음으로 세나는 암막을 치지 않았다. 앞코가 하얀 실내화를 가지런히 벗어두고 매트리스 안에 들어가자, 푹신한 감촉이 그의 등허리를 감쌌다. 세나는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본디 세나 이즈미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생각하길 좋아했지만 지속된 불면은 그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차려진 잠자리를 마다할 정도로 여유 있지 않았다. 세나는 얌전히 이불을 덮었다. 눈을 감자, 볕 때문에 오렌지 빛으로 시야가 물들었다. 그 따듯한 색을 붙잡고 그는 떨어진 성적과 돌아오지 않는 왕, 그리고 자신만이 자리하곤 하는 스튜디오를 떠올렸다. 나이츠의 거점으로 사용하던 그 곳은 이제 혼자만 있는 곳이 되었고, 리더만이 낼 수 있는 연습실 대여 신청서를 더 이상 낼 수 없기 때문에 세나는 이주를 준비해야만 했다.
차라리 둘이었다면 지탱할 수 있었을까. 세나는 2학년 말부터 예견된 것처럼 제 곁을 떠난 두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은 먼지우주처럼 천천히 부유했다. 텁텁한 공기였지만 그의 의식은 천천히 멀어졌다. 매우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진행되는 월식처럼, 세나의 눈꺼풀을 수마가 덮어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상냥한 피아노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간만에 찾아온 세나의 잠에는 꿈의 편린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
세나가 눈을 뜬 건 짙은 밤이 찾아온 후였다. 성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시야가 좁아져왔다. 그는 괜히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긴장한 듯 눈을 꼭 감았으나, 낙하도 추락도 없었다. 다만 목소리가 다가왔을 뿐이었다. 셋쨩은 특이하네, 라고 묻는 목소리는 그가 익히 아는 것이었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붉은 눈의 소년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쿠마 군? 하고 부르자 그는 소리가 너무 크다면서 느릿하게 하품을 해왔다.
밤에 그를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언제나 나른해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리츠는 세나가 제 잠자리를 가지고 있는 터라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느릿하게 투덜거렸다. 세나는 그 말이 핑계라고 생각했다. 이거 쿠마 군 꺼? 라고 묻자 리츠는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고민하고 고뇌하고 방황한 것과 달리 여유 있는 모습이라, 세나는 배알이 꼴려 얼굴을 찌푸렸다.
“그 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계속 여기 있었어.”
“쿠마 군이 그 동안 연습도 안 오고 싸돌아다닌 뒤처리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셋쨩한테 부탁한 적 없는데.”
리츠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세나는 자신의 불면에 대해 꺼내 놓으려다가, 한숨으로 내신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할 관계는 아니었다. 같은 일을 겪었지만 느끼고 있는 감정의 무게는 다른 듯 했다. 세나는 아무 말 없이 리츠의 잠자리에 누웠다. 내 침댄데, 라고 말하면서도 리츠는 세나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다만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그랜드피아노의 열린 뚜껑 너머로 그의 은발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극 지문의 (사이) 같은 침묵이 돌았다. 세나의 입에서 혼잣말처럼,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완전 짜증나’ 라는 말과, 간간히 리츠가 목적도, 선율도 없이 리듬만을 가지고 두드리곤 하는 건반, 그리고 그들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애매한 계절이었다. 세나는 매트리스에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덮었다. 리츠는 그의 모습을 잔잔히 지켜보고 있었다.
“셋쨩.”
“왜.”
“잠, 못자?”
리츠가 물었다. 세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걸 네가 알아서 뭘 하냐고 대답했다. 리츠는 나름대로 '긍정'을 표하는 세나의 모난 말에 그냥, 하고 대답했다. 그들 사이에는 다시 서리 같은 침묵이 자리했다. 세나는 그게 발라드를 부르기 전에 되곤 하는, 작은 암전 같다고 생각했다. 침묵이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다. 일학년부터 셋은 붙어 다녔음으로. 둘의 속에서 말이 부글부글 끓었다.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언어, 혹은 어떠한 예견들은 혀 위에서 걸러졌다.
뜬 보름달이 가로등처럼 밝았다. 침묵은 여전히 밤처럼 자리했다. 그것을 깨트린 것은 리츠였다. 그는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으면서 달의 뒷면 같은 마음이야, 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데? 하고 세나가 되물었지만 리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꿈속의 추락이 무서워 잠들지 못하는 세나는 그가 내뱉은 키워드를 붙잡았다. 작은 사색이 예정되지 않은 홍역처럼 번졌다.
지구와 달은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같았다. 언제나 달은 한 면만을 보여준다. 인간이 맨눈으로 보지 못하는 뒷면은 소행성이 충돌하여 만들어 낸 크레이터로 가득하다. 세나는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사실들을 떠올리다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쿠마 군도 악몽을 꿔? 그의 말에 리츠는 흡혈귀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세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등을 돌려 누웠던 것을 돌아누웠다. 이불이 사박거리며 움직였다.
“대신, 나는 셋쨩 같은 어린애들 보다 오래 기억 할 뿐이야.”
나이가 많으면 이래서 곤란해. 쌓여가는 시간에는 강렬한 사건이 없으니까, 이런 일을 겪으면 오래 슬퍼할 수밖에 없어. 리츠는 검지로 하얀 건반들을 의미 없이 두드렸다. 그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수면 같던 잔잔한 목소리에는 어떠한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세나는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의무적이거나, 사무적인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은 같은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이미 떠나버린 별에 대해서 사유하고, 답이 지워진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다만, 그 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었다. 세나는 몇 가지 말을 하려고 입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숨을 닮은 바람소리에 리츠는 엷게 웃었다. 고작 고등학교 2학년이 겪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야, 리츠는 그를 어린아이 보듯 얼렀다. 창문에서 가로등 빛과 함께 달빛이 들어왔다. 은은한 빛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아까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
겪었던 불면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교집합 속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세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리츠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조금 더 노력할걸. 리츠는 작게 자책했고, 세나는 이불 안에서 괜찮아, 하고 말했다. 그는 두꺼운 이불 너머로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다시 한 번 괜찮아- 하고 소리쳤다. 차가운 밤에는 사람의 목소리와 온기가 필요한 법이었다. 이 사실을 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크레이터 같은 밤이었다. 엉엉 울고 싶은 밤이었으나, 울음이 나오지 않는 밤이기도 했다. 리츠는 그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건반을 천천히 두드렸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 마다 리듬과 선율이 새겼다. 작은 악보들이 모여 쇼팽의 녹턴이 되었다. 세나는 이불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상냥하고, 따듯한 음이기도 했다. 날이 밝을 때,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들었던 음과 같았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사랑하게 될 것 같은 밤이었다.
리츠는 그랜드피아노 너머에서 보이는 이불 뭉치를 바라보았다. 몇 백 년 동안 연주해왔던 음은 건반을 보지 않아도 익숙하게 뽑아낼 수 있었다. 어린 아이는 상처를 입으면서 크는 법이라지만, 이번에 겪은 열병은 유달리 짙었다. 빈자리를 견디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피아노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세나의 불면은 달의 뒷면에 생긴 자잘자잘한 크레이터 같았다. 겉으론 숨기고 싶어도 숨겨지지 않는 게 있는 법이었다.
야상곡이 반복될수록, 세나가 들어있는 이불뭉치는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기분 좋게 잠이 든 게 분명했다. 리츠는 오후에 들었던 세나의 잠꼬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같이 있어줘, 손을 잡아줘- 라며 반복되는 목소리 끝에는 불안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돌봐야 할 어린아이를 방치해 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잊어버리곤 하는 게 있었다. 그는 천천히 피아노에서 손을 땠다. 세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리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간이 매트리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실내화를 벗고, 그의 옆에 가만히 누웠다. 천천히 이불로 손을 뻗어, 말린 것을 풀어내자 세나의 잠든 얼굴이 보였다. 평소 짓는 짜증난 표정이나, 화난 표정을 제외한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티없이 맑고 천진하기만 했다. 리츠는 이불 끝을 끌어 당겨 제 몸을 덮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이불 밑에서 둘은 가까이 붙어, 규칙적인 숨소리를 냈다.
그는 손을 뻗어 세나의 곱슬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볍게 얽히는 은실 같은 머리카락은 달이 생각나는 색을 하고 있었다. 리츠는 천천히 그의 앞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불안한 기색 없이 자는 모습에 안심이 되다가도, 도둑처럼 하고 떨어지는 입맞춤에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리츠는 아까까지 연주하던 야상곡이 귓가를 맴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좁은 거리였다.
지켜주고 싶었다. 츠키나가의 영향권에서 벗어난다면 채가고 싶었다. 좋아하니까 두 번째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면을 겪는데도 손을 뻗지 않았다. 불안하게 걷는 걸 잡아주고 싶었음에도 그냥 멀리 있을 뿐이었다. 제 발로 덫에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손을 놓고 끝이었을지도 모른다. 세나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츠키나가를 좋아했다. 리츠는 알 수 있었다. 오래 산 존재는 대부분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 법이었다.
하지만 위태롭게 걷는 사랑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엉키는 마음이라도 지금은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접어야 할 사랑일지도 모른다. 가까운 곳에서 세나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자장가를 쳐주는 것만으로도, 혹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 사라질 옅은 불면증. 그의 불안을 이용하여 사랑하고 싶진 않았다. 리츠는 자신의 문드러진 마음을 생각하다가 세나를 바라보았다. 리츠는 자신의 마음 뒤편에 크레이터가 파이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 안에 고이는 녹턴은, 사랑은 쌍방향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애매하게 시선을 돌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이걸로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같은 병을 다르게 앓진 못했다. 다만, 갈급하는 대상이 다를 뿐이었다. 그들의 짝사랑은 한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뒤를 돌지 않는다면 이뤄지지 않을 관계였다. 그들의 공전주기와 자전주기는 같았다.
사쿠마 리츠는 ‘지금은’이라는 단어의 울림을 생각하다가 눈을 감았다. 지구에서는 달의 한 면 밖에 볼 수 없다. 사랑하지 않는 한 면, 친구나 동료 같은 한 면. 애달픈 소리였다. 그들의 주기가 엇갈리지 않는다면, 사랑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불안감이 리츠의 손끝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세나는 깨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세나의 어깨가 잡혔다. 그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고 이불을 추슬렀다. 수마에 빠지진 않았으나, 숨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야상곡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선율이었다. 자장가라고 하기에도 떨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햇병아리 같은 사랑은 홍역처럼 강했다. 그의 볼은 단풍처럼 붉었다. 그는 익지 않은 채로 뚝, 뚝, 서툴게 떨어지는 제 짝사랑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하며 세나를 끌어안았다. 미처 다 안지 못한 몇 센치가 야상곡처럼 느리게 밤을 울렸다.
홍역 같이 앓는 밤이었다. 지구에서는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그저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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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의 우주 | 2016. 1. 28. 23:45
* 봄님과의 연성교환으로 쓴 글입니다.
* 고등학생 때 헤어졌다가 우연히 다시 만난 토모야와 와타루의 이야기입니다.
* 케이티 페리의 틴에이져 드림을 들어주세요.
끝없는 암전. 배우가 퇴장한 것을 확인한 뒤 막을 내린다. 終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 이성복「 편지 」
2막 3장
등장인물
남자 : 히비키 와타루 (25)
여자 : 안즈 (24)
오로지 둘만 등장하는 二人戟. 처음부터 끝까지 ‘둘’만이 등장해야만 한다. 각 장마다 등장하는 주인공은 바뀌나 이 또한 둘 뿐이다. 만약, 연출의 스타일 상 다른 인물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둘 만이 나와야한다. 필요하다면 마임(mime)으로 해결하도록 한다. 2장에서 ‘남자’를 맡은 히비키 와타루의 머리카락은 짧다. 이것은 반드시 熟知해야 할 사항이다. 위에 서술한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지켜 公演해야 한다. ‘남자’를 연기하는 배우는 1장이라는 이름의 前事와, 2막 1장-2장이라는 이름의 過去를 留念하여 연기할 것.
배경
일본 도쿄, 골목길 어느 카페. 시간적 배경은 12월, 겨울. 내린지 며칠 된 것 같은 눈이 검은 색으로 단단하게 굳어있다. 골목은 내내 얼어있어야 한다. 이 골목은 객석에서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배우들은 골목이 미끄럽다는 사실과, 매우 차갑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연기한다. 큰 도로 쪽을 향하는 좁은 골목은 차양이 들지 않아 얼음이 녹지 않았다. 2막 2장의 끝에서부터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카페,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다. Troye Sivan의 ‘Fools'다. 카페의 ‘출입구’쪽과 카운터가 가깝다. 카운터에는 주인이 앉아있으나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골목 쪽으로 난 창문을 만들어 둔다.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골목의 붉은 벽돌이 보이도록 한다. 여자는 창문 쪽 자리에 미리 앉아있다. 여자는 남자가 들어올 때 까지, 통화를 하면서 다이어리에 일정을 적고 있다. 한가로운 분위기, 창밖의 차가움과 대비되는 따듯한 분위기의 카페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나, ‘여자’가 앉아있는 테이블에는 반드시 전구가 들어 있는 병을 배치하도록 한다.
독백, 끝없는.
이곳에 오기까지 끝없는 방황을 거쳤답니다.
많이 기다렸나요? ‘어메이징’한 일이라구요? 그렇지요, 저 조차 놀란 일이지요. 본래 히비키 와타루라는 남자는 약속에 지각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 카페의 주인처럼 변장하고 있다가, 저기 저 카운터에 앉아 있었겠지요. 그리고 안즈, 당신이 날 찾기 시작하면 ‘어메이징!’ 이라는 감탄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올 예정이었답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생은 너무나도, 잔잔한 물결처럼 움직이니까요.
제가 알고 있는 당신의 일상은 시계와 같아요. 정확하게 움직이죠. 째, 깍, 째, 깍 하며 흔들리는 초침과, 그에 맞춰서 돌아가게 프로그래밍 된 분침처럼 말입니다. 저는 오늘 그걸 깨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오는 길에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답니다. 그래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림자가 고정된 것 같았죠. 내 머리 위에 있는 해는 한 시간, 아니 한 시간 도 되지 않았군요. 삼십 분 동안 열심히 움직였을 거예요. 하지만 내 그림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답니다.
뭘 봤더라, 뭘 봤다고 해야 할까. 아 그래, 도로 위에 죽어있는 동물의 사체를 봤어요. 저는 그게 살아있던 날의 꿈을 보고 있었죠. 작은 토끼였어요. 그 토끼가 왜 도로로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있는 길에서는 이미 죽어 있었죠. 나는 그 토끼의 전사(前事)를 알지 못하는 철저한 외부인이지만, 그게 눈길에 남아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겨우 토끼 한 마리가 당신과의 만남을 방해하다니 이 실로 어이없는 이야기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초조해 보인다구요? 이 히비키 와타루가? 하하, 그것 또한 놀라움이군요. 당신과 이야기 할 때면 뭔가 새로운 날 발견하는 것 같아서 설레요. 당신의 시야는 마치 봄의 아지랑이 같군요. 과연 아지랑이의 시선에서 본 구불구불하고 흐린 세상이, 원래라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미안해요. 아, 주문은 했나요? 아메리카노요, 당연히 시럽을 두 번 넣었겠죠? 아니라구요? 제 기억 속의 안즈는 언제나 펌핑을 두 번 했던 것 같은데. 아, 그것 또한 착각입니까.
오늘의 히비키 와타루는 전혀 ‘저 같지’ 않군요. 오늘 이 곳에서 쓸 가면을 잘못 가져온 느낌입니다. 아아, 실수란 불안하고 또 불안한 일이군요. 아 그래요, 그럼 당신께서는 그냥 아메리카노를 시켰겠군요. 음, 네……. 알았습니다. 미안해요, 제 불찰입니다. 오늘의 저는 아귀가 맞지 않는 퍼즐과 같습니다. 만나자고 한 건 저인데, 죄송한 일이군요. 미안합니다. 발밑이 온통 흔들리는 느낌이라서요. 하지만 바다의 풍랑도 영원히 불지 않는 법, 따듯한 라떼를 마시면서 조금 쉰다면 괜찮을 거랍니다.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첫사랑이라도 만난 얼굴을 하고 있다구요?
그건 어떤 표정입니까? 내 표정은, 지금, 봄바람이 스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요? 아니면 십대의 꿈을 꾸는 느낌인가요? 셰익스피어의 ‘희극’(戲劇)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반부, 줄리엣과 닮아 있나요? 애석하게도 제가 생각하는 제 가면은 골목길에 잔뜩 쌓여 있는 검은 눈덩이들 같습니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고, 자꾸 골목 너머를 본다구요. 들켜버렸네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첫사랑은 아닙니다. 그저, 예전 사람을 만났을 뿐이에요. 히비키 와타루라는 이름의 역사에서 ‘중반’ 쯤에 꽂혀 있는 사람이죠.
싱숭생숭한 것도 이해가 간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배우는 무대 위에서 절대로 표정이 흔들려서는 안 돼요. 히비키 와타루는 지금까지 모든 배역에서 그걸 완벽히 소화 해 냈죠. 과거의 사람 하나 때문에 그 표정이 흐트러졌다는 건 꽤나 아쉬운 일입니다. ‘의미 있던’ 사람일 거라구요? 하하, 그 말도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저의 청춘의 마지막 페이지, 그 부근에 실려 있을 테니까요. 분명히. 지금 제가 가을을 걷고 있다면 여름에, 겨울을 걷고 있다면 가을에 존재할 사람입니다.
첫사랑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의 세계를 점등시킨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사귀었던 사람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기도 해요. 우리, 그 사람을 지칭할만한 단어를 정할까요? 그 애가 안즈, 당신이 아는 사람이든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이름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건 나의 풍랑을 더 거세게 만들 뿐입니다. 그 이름을 말할 때 마다, 순하게 굴러가는 내 혀가 울음을 목 끝에서부터 긁어 올지도 모르거든요. 오늘의 히비키 와타루는 형편없는 삼류 배우입니다.
이야기해도 괜찮다구요?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기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삼류 배우. 배우는 배역을 넘어서서 자기감정을 꺼내 놓곤 합니다. 아, 어쩜 이렇게 형편없는 연극이 있을까. 그래, 연극은 시간과 배경이 필요하죠. 시간은 30분 전, 장소는 검은 얼음이 잔뜩 얼어 있는 버스정류장입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2막 1장과 2장에 해당 될 거랍니다. 우리의 전사를 모두 다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나는 축약 할 생각입니다. 당신은 추측하면서 들어야 할 거에요. 나의 사랑은 부조리극이니까요. 아, 인물을 아직 말하지 않았군요.
X, X라고 할까요. 미지수니까요. 아니면 변함이 없다는 점에서 0이라고 할까요. 아니, 그래, 변함이 없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몰라볼 뻔 했거든요. 분위기가 달라져서. 아, 많이 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의 외모는 변한 게 없고, 목소리도 비슷하니까요. 달라진 건 나이와 우리의 거리뿐입니다. 아, 커튼콜이라고 할까요? 그 애는 배우 히비키 와타루를 강제로 무대에서 끌어내리니까 말이에요. 아, 커튼콜, 그래 커튼콜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릴 것 같군요.
그래, 커튼콜, 커튼, 콜…….
사귀었던 사이였어요. ‘커튼콜’ 씨와는. 딱 오늘이군요! 1월 28일. 역사에서도 별 의미 없는 그저 평범한 날입니다. 딱 그 애 같은 날이었지요. 고백한 건 그쪽이었습니다. 나의 중력이 되고 싶다고 말했어요. 부유하는 내가 더 이상 꼴 보기 싫다는 말 뒤에 따라왔습니다. 몇 번이고 상상했던 이야기였지만 나에게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 5의 계절 같은 말이었기에 실로 놀라웠지요. 나는 그 말을 붙잡았습니다.
사랑했냐구요? 네, 사랑했습니다. 히비키 와타루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놀라운 일이지요. 날이 끝나면 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날이 시작해도 보고 싶었죠. 나의 욕망은 언제나 그 쪽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북극이 그 쪽인 양 회전하는 나침반 같았죠. 가는 갈급했습니다. 언제나 ‘커튼콜’씨에게. 그 애는 실로 저라는 배우의 가면을 벗기려고 했어요. 텅 빈 관객석, 빈 무대, 꺼져있는 조명, 들리지 않은 음향, 오퍼가 들리지 않는 무대 위. 형광물질만이 반짝이는 그 세계. 저 혼자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 무단으로 들어오더군요.
커튼콜 씨는, 히비키 와타루라는 이름의 모노드라마를 이인극二人戟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나에서 둘이 되는 건 혁명입니다. 매력적입니다. 별처럼, 우주처럼 말입니다. 나는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세계로 끌려들어갔어요. 커튼콜 씨는 말이죠 매우 평범한 사람입니다. 재능도 없어요. 그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 섞여야만, 그래야지만 반짝일 수 있는 주제에 제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게 불안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사랑했고, 그런 사소한 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한동안은 잊고 살았어요. 우리의 사랑은 불변. 언제나 연인들은 그렇게 믿고 다닌답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생각 해 주세요, 안즈.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던가요? 영원을 이야기하던, 그 불멸을 이야기하던 모두가 요정의 장난으로 변하지 않습니까. 내 사랑은, 그러지 않으리라 믿었지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건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쿨하게 끝났어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나와 그는 어느 정도 세계를, 아니 무대를 공유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우리가 헤어진다면 세상이 망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둘이 보던 영화는 빛이 바라지 않았습니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둘이서 봤던 『화양연화』의 왕가위 감독의 미장센은 여전했죠. ‘이별 연습을 할까요?’라고 속삭이던 여주인공의 모습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게 억울했어요. 물론 커튼콜 씨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애를 발음할 때 입술은 같은 모습으로 움직였죠. 윗니를 한 번 치고, 키스를 나누는 것처럼 입술을 붙였다 때고, 웃으면서 발음하게 됩니다. 내 세상은 변했는데 변하지 않은 게 많았어요. 그 애는 헤어지고 나서도 날 보면 웃어줬습니다. 잔인하고 또 잔인했어요. 그래서 나는 피하고 숨었습니다. 커튼콜이 끝난 다음에 배우는 다시 무대 뒤로 들어갑니다.
‘배역’인 자신만을 기억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적어도 제게는 그런 의미입니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아이러니인가. 사랑은 언제나 그렇다구요? 안즈, 당신은 의외로 잔인하네요. 네 맞습니다. 당신의 말씀처럼 우리는 반짝이던 추억을 나눠 가졌지요. 하지만 커튼콜 씨의 둥그런 뒤통수를 볼 때 마다 마음이 울렁였습니다. 마치, 지금처럼, 풍랑처럼,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끝이 찾아왔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아, 마음에 파랑이 찾아왔습니다. 철썩, 철썩, 부는 바람에 부둣가가 혼란스러워요. 베토벤의 『템페스트』의 3악장이 생각나네요. 다시 한 번 얼굴을 봤을 뿐이에요. 우리는 이야길 했죠. 커튼콜 씨는 잘 지내냐고 물었고, 나는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의 근황을 말했어요. ‘라빗츠’ 멤버들이 졸업 한 다음에 뭉치기로 했었지 않았냐는 말에 나의 커튼콜 씨는 취직을 했다고 대답하더군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나와 그가 그렇게 단절되어 있었다는 게.
멀어졌다는 게.
물론, 멀어진 건 제 자의였습니다. 풍랑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어요.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스민 기억도 없어지리라 믿으면서요. 헤어진 뒤의 연인들은 모두 이런 일을 하더군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 제 머리카락은 자란 적 없답니다. 몰랐다구요? 이거 놀랍군요. 모르는 것도 당연해요.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멀어질 필요가 있었을까요. 또 이렇게 까지 다시 혼란스러울 필요가 있을까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풍랑은 결국 사랑을 연결하는 도구가 됩니다. 풍랑 때문에 섬에 도착한 이들은 모두 사랑과 평화를 얻고 나가죠. 하지만 나의 풍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죠? 나의 마음에서 모두를 쫓아낼 듯 부는 이 파랑은, 무얼 얻기 위해서 부는 것일까요.
버스정류장에서 만났습니다. 우리 둘은 인사했어요. 아까 말했던가요? 네, 그래서 이야기를 하다가. 많이 어른스러워져 있는 모습에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내 추억은 여전히, 자라고 있었구나. 내가 아는 ‘커튼콜’ 씨는 이제 없구나. 아니, 이건 당연한 일이지도 모릅니다. 저는 새삼스럽게 슬퍼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후회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내 추억이 그렇게, 내가 뒤를 돌면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 해 보면 한 번 무대에 올려진 극은, 그대로 끝입니다. 연극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환상이기 때문에 언제나 ‘다른’ 극이 만들어지죠. 한 번의 커튼콜이 끝나면 그대로 끝. 같은 연극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대본과 같은 배우, 같은 음향오퍼와, 같은 연출, 같은 관객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느낌은 반드시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저는 이뤄지지 않는 걸 바랐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마법처럼 다시 만난다면, 어색함 하나 없이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고등학교 삼학년의 나와, 고등학교 일학년의 커튼콜 씨의 모습으로. 어색함 하나 없이. 처음부터 같은 극을 공연하는 것처럼. 멍청한 이야기. 정말이지 삼류 연극입니다. 아, 나의 연극은 이렇게 끝을 맺을 거예요. 나는 말이죠, 나는, 그 애가 나를 사랑해줬잖아요. 이게 내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이런 어색함 없는 만남이 다시 이뤄질 줄 알았어요. 절대로 착각이죠? 세상 안에 같은 연극, 같은 공연은 없는데.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인데.
내 무대는 이제 막을 내립니다. 이제 끝없는 암전이 찾아오겠죠. 나는 걜 그리워 할 게 분명해요. 네, 사실. 미련이 남았어요. 진한 미련이 남았죠.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났고, 한 쪽이 먼저 떠났어야 했어요. 그래서 당신께로 오는 버스를 타기 전에 말했습니다. 우리가 헤어진 그 날 말이에요, 혹시 다음 장을 공연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내가 출연하는 연극에, 와 줄래요? 당신이 있을 자리를 비워둘게요. D23번. D열 23번이랍니다. 하고. 아 멍청한 일이였죠. 아마 그 애는 오지 않겠고, 나의 D열 23번은 영원히 비어있겠죠.
아, 마침 케이티 페리의 틴에이저 드림이 나오는군요. 내가 커튼콜 씨와 가장 처음,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들었던 곡이에요. 카페에 들어올 때 주인께 신청했던 곡이랍니다. 나이스 타이밍, 하하, 정말로 놀라운 일이네요. 이야가기 끝날 때 쯤에, 들려오다니. 들려, 오다니. .... 이제 2월마다 그는 나의 발렌타인이 되겠죠. 없애버린 내 맘속 벽, 그 너머로 D열 23번을 노려보고 있을 건데, 아마도 오지 않겠죠. 아마 발렌타인의 내 무대의 커튼콜이 끝나도록. 절망을 상상하는 건 희망만큼 달콤하네요.
죽을 때 까지 춤을 춰 볼까요. 아, 눈물이 나요. 라떼가 나오네요. 눈물을 섞어 마시는 건 취향이 아닌데. 감사합니다. 지독한 암전, 이제 삼류 배우의 이야기가 끝났으니 안즈의 목소리를 들을 차레죠. 평소처럼 놀래키지 않고 얌전히 들을게요. 눈물을 흘리는 어릿광대는 놀라움으로도 웃길 수 없을 테니까요. 아, 더 이상 어릿광대가 아닐까. 미안해요 나는 종종 내가 커 버린 걸 잊곤 한답니다.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자는 가사에서 우리 둘은 손을 잡았었어요.
그래요 손을, 잡았었지요. 이제는 손끝이 얼어버렸지만. 아 정말 이제 끝이에요. 무대의 막을 내릴 거랍니다. 안녕, 내 첫사랑. 첫사랑 아니라고 했던가요? 하지만 이렇게 앓아본 건 처음이랍니다. 처음 고생하는 사랑을 줄여서 첫사랑. 첫사랑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면서요? 아, 그렇다면 묘비 명에 ‘커튼 콜’ 이라고 적어야 하는 걸까. 아아, 모르겠네요. 언 손 끝을 녹여보도록 할게요. 라떼는 따듯하니까.
손이 차네요.
4막 終章
등장인물
남자 : 마시로 토모야 (23)
여자 : 안즈 (24)
오로지 둘만 등장하는 二人戟. 처음부터 끝까지 ‘둘’만이 등장해야만 한다. 각 장마다 등장하는 주인공은 바뀌나 이 또한 둘 뿐이다. 만약, 연출의 스타일 상 다른 인물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둘 만이 나와야한다. 필요하다면 마임(mime)으로 해결하도록 한다. 4장에서 ‘남자’를 맡은 마시로 토모야는 학창 시절에 비해 변한 곳이 없다. 이것은 반드시 熟知해야 할 사항이다. 위에 서술한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지켜 公演해야 한다. ‘남자’를 연기하는 배우는 1장이라는 이름의 前事와, 2-3막 전체라는 이름의 過去를 留念하여 연기할 것.
배경
일본 도쿄, 골목길 어느 카페. 시간적 배경은 2월, 겨울. 내린지 며칠 된 것 같은 눈이 검은 색으로 단단하게 굳어있다. 골목은 내내 얼어있어야 한다. 이 골목은 객석에서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배우들은 골목이 미끄럽다는 사실과, 매우 차갑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연기한다. 큰 도로 쪽을 향하는 좁은 골목은 차양이 들지 않아 얼음이 녹지 않았다. 4막 3장의 끝에서부터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골목에는 온통 발렌타인 장식이 되어있다. 4막의 시간적 배경은 발렌타인 당일임을 명심하자.
카페,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다. Troye Sivan의 ‘Fools'다. 카페의 ‘출입구’쪽과 카운터가 가깝다. 카운터에는 주인이 앉아있으나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골목 쪽으로 난 창문을 만들어 둔다.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골목의 붉은 벽돌이 보이도록 한다. 여자는 창문 쪽 자리에 미리 앉아있다. 여자는 남자가 들어올 때 까지, 통화를 하면서 다이어리에 낙서를 하고 있다. 한가로운 분위기, 하지만 여자의 표정은 이와 다르게 어둡다. 대비되게 표현한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나, ‘여자’가 앉아있는 테이블에는 반드시 전구가 들어 있는 병을 배치하도록 한다.
독백, 끝없는.
많이 늦었죠? 여기까지 오는 데 길을 잘 모르겠어서 조금 헤맸어요.
골목이 다 똑같은 모양인 것 같아서 구분을 못 하겠더라구요. 발렌타인 장식이 가면처럼 엉켜 있어서 좀, 들어오기 싫었고. 많이 컸다구요? 늦은 걸 능청스럽게 넘어 갈 정도는 됐죠. 안즈 씨, 뭐 먹고 싶어요? 아메리카노요? 저도 같은 거 마실래요. 좋아하거든요. 근데 시럽을 두 펌프 넣어야 해요. 너무 쓰면 또 못 먹으니까. 하하, 갑자기 불렀는데 나와 줘서 고마워요. 정말 어른이 된 것 같다니, 음, 나이를 먹긴 했죠. 사회생활도 했고.
어깰 으쓱이면서 말할 정도는 됐죠. 으스댈 일은 아니지만. 모습은 하나도 안 변해서, 방에 붙여 놓은 브로마이드를 보면 그대로. 키도 그대로에요. 뭔가 고정 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아마 학교 때 입었던 연극 의상들도 다 맞을 걸요. 사회생활하면서 붙었던 살이 요즘 또 빠지고 있어서 수선할 곳도 더 없을 거예요. 확신할 수 있다니까.
오늘은 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 전에 있던 약속을 펑크 내고 왔거든요. 갈 맘이 안 들어서. 좀 방황하고 싶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런 거예요. 가령 안즈 씨가, 이런 반짝이는 유리병을 깨서 안의 전구를 꺼내고 싶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생각 보다 안 예쁜 거야. 그래서 후회하면서, 아 병이 필요해! 하고 울면서 조각을 다시 붙여 봐요. 근데 그게 예전 거랑 100% 같다곤 할 수 없죠. 전구에게는 새 병이 필요하고, 뭐 그런 거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거예요. 추억으로 남을 때 예쁜 게 있는 거고.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거랑 비슷한 거고, 오래 된 대본을 보고 있다 보면 항상 있는 문장이랑 비슷한 거죠. 음음, 오랜만에 발성하는 거라 잘 될지 모르겠네. “끝없는 암전, 배우가 퇴장한 것을 확인한 뒤 막을 내린다. 終” 이런 거. 이미 끝난 무대에는 간섭 할 수 없어요. 배우든 연츨이든. 『햄릿』에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대사를 빼먹었다고 해서 내린 막을 다시 올릴 수는 없는 거죠.
이미 많이 지나와서 그래요. 그 다시 재결합 하고 싶은 사람이랑 약속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갈까 했어요. 그 사람은 무대 위에 있고, 나는 무대 아래에 있지만. 근데 난 그 선을 의식하는 게 좀 싫거든요. 멀리 있고, 나는 중력이 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고. 이런 무기력한 걸 느낄 바에야 그냥 뭐, 다른 약속이 생겼네- 자연스럽게 잊어버렸다- 하고 멀리 떠나고 싶은 거죠. 뭐 변명이지만. 어쩔 수 없는 거죠. 병은 다시 병이 될 수 없고, 마침표가 찍힌 문장을 접속사 없이 이을 순 없어요.
밖에 비가 내리더라구요. 근데 여기까지 걸어왔어요. 버스정류장에 있을 때, 그 사람이 생각나서 좀 싱숭생숭 했거든요. 그래서 후드를 쓰고, 아 물 묻었다. 이어폰을 끼고 걸었어요. 케이티페리의 틴에이저 드림을 들었죠. 또, 「글리」에서 불렀던 버전도 들어요. 그 두 개를 반복하면서 계속 걷다보니까 꿈처럼 잊었죠. 비가 오는 것도 까먹었어요. 내가 들고 있던 꽃다발은 형편없이 젖은 것 같지만 꽃에는 원래 물을 줘야죠. 자, 꽃다발이 안즈 씨 쪽으로 가니까 내가 비를 맞은 흔적은 젖은 패딩 밖에 없죠. 그리고 물기는 마를 거구요.
능글맞아졌다구요?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원래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에요. 나는 다시 중력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고민 많이 했는데, 아, 사랑하긴 했어요. 내 첫사랑이니까. 처음 하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랑이죠. 그렇게 아파본 건 처음이니까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거고. 꿈을 같이 꾼 건 처음이니까 첫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이제 추억처럼 남았지만. 추억으로 남은 건 건들 수 없잖아요.
우리는 너무 멀리 왔어요. 그래서 뒤를 돌 수 없는 거죠. 가끔 꿈을 꾸기도 했어요.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 하는. 근데 그건 절대로 불가능 할 것 같은 거죠. 왜냐? 우리는 깨진 병이니까.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한숨을 푹푹 쉬는 관계는 더 이상 사양이에요. 가끔 비오는 날 술이랑 같이 생각난다던가, 그 사람이 쓰던 장미 향이 생각 난다던가 하는 것도 오늘로 끝 할 거니까. 응 표는 간직할까? 아, 미련 남은 것같다구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다. 응, 능글맞아지려구요. 꽃다발 가질래요? 다른 사람 주려던 거지만 지금은 안즈 씨 주려고 산거라고 쳐요. 전사를 몰라도 극을 보는 데는 지장이 없죠. 앞에 사연이 있었다는 것만 짐작하면 관객은 그걸로 오케이니까. 매년 발렌타인 마다 생각나요. 우리는 이 날 헤어졌거든. 서로의 발렌타인이 되기로 약속했으니까, 끝도 그 날에 하고 싶었던 거죠. 영화 같다구요? 그쵸, 재밌죠.
가끔 꿈에서 생각날지도 몰라요. 버스정류장은 이제 절대 거기로 안 가겠죠. 흰 눈이 내릴 때면 보라색 제비꽃을 생각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커튼콜, 마침표가 찍힌 이상 공연은 다시 반복 될 수 없어요. 나는 그게 ‘우리’의 끝으로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진짜 많은 날을 고민했는데, 이게 최선인 것 같더라구요. 우리의 연기, 우리의 연출. 더 이상 공동 저작은 사양이에요. 난 이제 회사원이니까.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다구요? 전혀요. 난 지금 마실 아메리카노 정도를 생각하고 있을 뿐인걸요. 난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우리가 현실을 밟아가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무대 위의 꿈이 끝나면 남는 건 허무함뿐이고, 나는 그걸 잘 알고, 꿈결 같은 사람을 보내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나는 중력이 될 수 없어요. 위성이 될 수는 있었지만. 그래서 그래요. 그래서, 그래요. 그래서…….
말을 할수록 후회가 깊어지네. 그래서 이 이야긴 더 이상 안 하려고요. 재미없는 이야길 들어봤자 뭐 하겠어요. 연극은 일단 극본이 재미있어야 해요. 부조리극은 기승전결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는 거고, 순환구조는 현실이 이상하다는 걸 알려줄 때만 쓰는 거죠. 나랑 그 사람의 추억은 재미있었으니까, 그 순간은 여기 전구처럼 별처럼 반짝이고 있으니까 굳이 순환구조를 사용할 필요도 없죠. 병에 담긴 걸 꺼내봤자 뭐하겠어요. 깨지기만 하지.
무대를 떠난 배우는 현실적이에요. 아 손이 차다. 어, 틴에이저 드림이 여기서도 나오네요. 우연이지만 되게 놀랍다. 아, 나 이제 놀랍다는 말 안 쓰기로 했는데. 음음, 아무튼 그래요. 나는 벗어나려고 많이 노력했거든요. 근데 다시 진흙탕에 빠진다면 내 인생은 모두 송두리째 중력에 휘둘려서 이제는 위성으로도 있을 수 없으니까. 뭐, 발랄하게 이야기하지만 속이 사실 문드러졌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죠. 회사원이 되면 상사한테 뭐라고 할 수 없으니까, 심각한 이야기도 발랄하게 하는 배우가 되곤 해요.
연극해서 다행이지 뭐에요. 아 맞아, 나 여기 오려고 어제 휴가를 썼는데, 실장이 욕하지 뭐에요. 왜 욕했냐면 과거의 사랑한테 그렇게 쓸 시간을 회사를 위해 쓰라고. 좀 이상한 말이었지만 눈치 없는 척 웃었죠. 힘들 때도 웃는 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연기죠 뭐. 아 웃는 거는 예전이랑 똑같다면서 속은 능구렁이가 살고 있는 것 같다고? 그야 당연하죠, 우린 어른이 됐고, 더 이상 학생은 공연할 수 없으니까요. 한 1막쯤에서 막을 내린 배역을 4막에서 찾으면 안 되는 거에요.
오필리어는 죽어버렸고 종장에서는 등장하지 않… 등장 할 지도 모르겠지만 기억이 안 나는 걸 어째요. 아 아메리카노 나왔다. 노래는 좋고, 비는 내리고, 그러니까 그. 더 이상 의미 없을 거에요. 오늘 밤 잠 못 잘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뿐이죠. 일상은 변함없이 돌거에요. 처음 이별할 때 깨달았거든요. 세상을 뒤흔들 수 없다는 걸. 왕가위의 『화양연화』의 미장센은 여전히 아름답고, 두 사람은 여전히 이별 연습을 하고 있죠. 그리고 그 타이틀도 변하지 않아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뭐, 다 그런 거죠. 마침표란 건 의미가 있기도, 없기도 하지만. 일단 내 공연은 끝이 났으니까. 미련은 있지만 내려간 무대에 다시 올라갈 순 없어요. 연극이란 그런 거니까. 다시 내가 아이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음, 커피 왔네요. 시럽 두 번 넣어 주셨나요? 아, 깜빡 하셨구나. 그럼 세 번 넣어 주세요. 오늘은 좀 다르게 마시고 싶은 느낌이라서.
아, 이 병 안에서 별이 반짝반짝 거리는 것 같네요. 예쁘다. 이거 어떻게 만든 거지.
(끝없는 암전. 배우가 퇴장한 것을 확인한 뒤 막을 내린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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