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 | 2016. 1. 24. 23:56
* 왕의 기행 네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날조가 매우 심합니다.
* 감성적인 이즈미 씨 주의 해 주세요.
* 앙스타 전력의 '백스테이지'라는 주제를 받아 썼습니다.
Good bye, SUMMER
いくつもの種をあの丘へ浮かべて
수많은 씨를 그 언덕에 뿌려서
きれいな花を敷きつめてあげる
아름다운 꽃으로 뒤덮어 줘
早く 見つけて 見つけて ここにいるから
빨리 봐줘요 봐줘요 여기에 있으니까
起こされるのを待ってるのに
깨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 「Flower」
***
스테이지 뒤는 우주 같다.
세나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진동이 울렸다. 음을 증폭시키고 있는 앰프에서 나는 소리였다. 강한 비트가 지진처럼 뻗었다. 음이 강해질수록 손에 힘이 풀렸다. 그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잡아줄 사람이 없는 손이 천천히 늘어졌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체력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 몰렸다. 이런 감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세나는 제 앞에 여름이 있다고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의 곁에서 우주를 입에 담을 만한 사람은 하나 밖에 없었다. 세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제 왕의 목소리를 들었다. 노래하는 모습에 거리낌이 없었다. 부드러운 미성이 듣기 좋았다. 별의 목소리를 옅듣는 것만 같았다. '그 날' 이후론 제 목소리를 싫어했던 것 같은데, 제 아이들을 손으로 해쳐놓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은가 싶었다. 세나는 고개를 들었다. 헛웃음이 났다. 그의 시야에 두 사람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리츠와 나루카미는 어린 후배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백스테이지와 무대 사이의 여백에 걸치듯 서 있었다.
왕의 무대를 봐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물에 젖은 꽃다발처럼 탈력감이 들었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소리가 더 번져왔다. 그는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들었었던 "이제 끝일까", 하는 의문이 점점 확신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어야 할 게 1학년 꼬맹이란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나가 기억하는 츠키나가는 언제나 반짝였음으로, 그는 승리에 회의적이었다. 현실적이란 말은 기적을 믿지 않는 다는 말과 궤를 같이 한다.
왕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백스테이지까지 힘차게 뻗었다. 세나는 지휘하듯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처음 듣는 노랜데, 라고 말하는 나루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츠는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나는 알고 있었다. 익숙한 리듬이 가슴에 콕콕 박혔다. 1학년 때 둘이서 만들었던 믹스테이프에 들어 있던 곡이었다. 어디 소속사로 보낼 것도 아니었고, 사무실의 면접용도 아니었다. 시험용도 아니었고, ‘나이츠’의 노래도 아니었다. 둘 만이 기억하고 있을 멜로디였다.
세나는 한숨을 내 쉬었다. 지친 몸에서 나오는 것은 숨뿐이었다. 왕의 노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여름 같은 목소리였다. 작열하는 햇살처럼 목표를 향해, 뚜렷하게 뻗어가는 음들은 듣기 좋았다. 이 곡은 왕 밖에 부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런 무대에서 이런 곡을 사용하는 건 반칙이었다. 무대 뒤에서 듣고 있다는 게 억울하기만 했다. 힘이 빠진 몸은 짐짝처럼 늘어져 있었다. 지금 흐르는 부분에서는 세나가 화음을 넣었었다.
둘 밖에 모르는 노래는 몇 곡이 더 있었다. 대부분 왕님의 목소리로 녹음 된 노래였다. 츠키나가의 믹스테이프에 들어갈 노래였다. 그의 노트북이 아니면 세나의 mp3 정도에만 들어있는 곡들이었다. 세나는 그가 그런 곡들을 더 들고 나올까, 를 생각하다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막막하고, 또한 먹먹했다. 백스테이지에 도착하는 음들은 대부분 멀리 들리곤 했다. 별과 별 사이처럼 멀기만 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감고,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여름이 번져왔다.
여름, 그래 여름이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이 번져왔다. 그는 처음 왕과 무대에 서던 날을 떠올렸다. 왕이 하나, 기사가 둘이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 때는 아직 ‘듀얼’의 전술도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순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왕이 맨 마지막, 세나가 가장 처음이었다. 그는 승자연전방식에서는 기선제압이 중요하다면서 어깨를 두드리던 제 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때로부터 수많은 걸음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어제처럼 선명했다. 그 여름이 자꾸만 번져오는 감각에 울 것 같았다.
그 때 왕은 뭘 불러줬더라, 세나는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만졌다. 그는 입술을 안쪽에서 깨물었다.「언제까지나 그대의 웃는 얼굴에 흔들리며」, 라는 부분이 있던 것 같은데. 그는 천천히 숨을 내 쉬었다. 그 해의 여름은 유난히도 짙었다. 그는 멀리서 번져오는, 파도 같은 함성을 들었다. 왕의 노래에 합당한 찬사였다. 세나는 마지막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많이 걸었고, 많이 지켜왔다. 지탱하며 지켰던 자리가 그 주인에 의해 망가지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츠키나가 레오는 언제나 규격 외의 남자였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세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무대와 연결 된 공간에서 뻗어 나오는 빛무리에 눈이 아파왔다. 이대로 나이츠가 ‘끝’을 맞이한다면, 더 이상 백스테이지에서 왕을 기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힘없이 앉아있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세나는 고개를 돌렸다. 왜?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녀는 산소 캔을 가져왔다. 세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그것을 입에 댔다. 뭐라고 말 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역전의 세나, 그는 웃기지도 않은 타이틀을 떠올렸다.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자, 그 때 그 노래가 번져왔다. 세나는 「웃는 얼굴에 흔들리며」의 다음 가사가 「태양처럼 강하게 피어나고 싶어」임을 기억했다. 라르크 앙 시엘의 「Flower」였다. 왕이 받는 함성은 우주처럼 컸고, 스오우의 무대가 시작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세나는 그 틈을 천천히 응시하다가, 그의 여름을 반추했다. 츠키나가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묘한 확신이 들었다.
굳어 있는 모든 게, 천천히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무너지기 싫어,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산소 캔은 생각보다 미적지근했다. 그는 천천히, 천천히, 호흡했다. 수많은 백스테이지를 거쳤음에도 오늘 만큼 긴장했던 적은 없었다. 처음이 느릿하게 번져왔다. 지켜왔던 ‘우주’는 점점 퇴색하고 있었다. 여름에 안녕을 고할 순간이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해졌다.
***
첫 무대였다. ‘나이츠’의 이름으로 하는 첫 무대였고, ‘세나 이즈미’가 올랐던 가장 처음이었다. 무대 위에 있을 때는 의외로 긴장하지 않았다. 야광봉을 흔드는 사람들은 거대한 점과 별무리처럼 보였고, 사람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흐름 같았다. 실전이 되면, 생각은 없어진다. 자연스럽게 원에서 투로, 둘에서 셋으로 넘어갔다. 처음 치고는 나쁘지 않은 무대였다. 두 번을 내리 이겼고, 한 번을 졌다. 하지만 등 뒤에는 사쿠마 리츠와, 츠키나가 레오가 남아 있었다.
승자연전 방식의 듀얼. 그 곳의 첫 주자, 믿을 구석이 있는 자리는 편했다. 잘 했어 세나, 라고 말을 걸어오는 왕에게 세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아직 덜 자라 이마를 덮지 않은 앞머리가 땀으로 가득 젖어 있었다. 그는 메이크업이 지워지지 않게 땀을 닦았다. 긴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앉자 탈력감이 들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숨이 자꾸만 가빠왔다.
러너즈 하이가 찾아온 것 같았다. 무대에 섰던 게 생각 보다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빠르게 숨을 쉬었다. 아까 했던 자잘한 실수들이 떠올랐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실수를 생각하고 나서야 긴장하고 있던 게 모두 풀렸는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세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낚았다. 그의 왕은 손수건을 건넸다. 세나는 땡큐, 라고 말하면서 콧잔등에 맺히는 땀을 닦았다. 머리에 산소가 부족해지며, 몽롱한 느낌이라 그는 숨을 빠르게 쉬었다.
백스테이지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는 우주의 고동과 닮았다는 츠키나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나는 계속 숨을 몰아쉬었다. 츠키나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멀게 들렸다. 세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두 눈두덩이를 손수건으로 덮어, 꾹꾹 눌렀다. 파도처럼 한꺼번에 몰려오는 후회들 속에서 세나는 숨을 헐떡였다. 이상하게도, 숨은 자꾸만 가빠왔다. 리듬을 잃어버린 노래처럼, 고장 나 버린 카세트테이프처럼 그의 어깨는 약동했다. 그의 이상을 처음 알아차린 것은 그의 왕이었다. 한 번 놓아버린 운전대를 다시 잡기 어려운 것처럼, 세나는 제 호흡을 제어할 수 없었다.
가볍게 울리던 숨은 히익, 하는 가쁜 소리를 내뱉었다. 히끅거리는 그 큰 소리에 츠키나가는 당황한 듯, 제 의상이 하얀 바지라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세나, 세나? 하고 묻는 목소리에 대답할 수도 없었다. 세나의 입 속에서 나오는 것은 자음도, 모음도 되지 못한 울음 뿐이었다. 생각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에 울음이 몰려왔다. 이상하게 조율 된 악기에서 나는 기괴한 소리 같았다. 세나는 마이크를 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은 멀쩡하지만, 말은 멀쩡하지 않았다. 세나, 세나, 라고 말하며 츠키나가는 세나의 무릎을 계속 두드렸다. 세나는 몸을 웅크렸다. 가느다란 어깨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는 히끅거리는 목소리를 막기 위해 두 손을 입에 댔다. 숨은 컥컥대며 막혀왔다.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귀에는 멀리서 울리는 사쿠마의 노랫소리와, 가까이서 들리는 츠키나가의 목소리 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과호흡이었다. 그는 제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목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 세나는 몸을 웅크렸다. 울음소리와 섞이는 이상한 숨소리는 듣기 괴로웠다. 흰 손수건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희게 변했다. 그의 왕은 어디선가 검은 봉투를 들고 와, 세나의 두 귀에 걸고, 봉투의 입구를 좁게 만들었다. 숨, 천천히 쉬어 라는 명령에 세나는 숨을 천천히 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어깨는 세게 튀었다. 츠키나가는 그의 손가락이 손바닥의 살을 지나치게 누르고 있는 걸 보았다.
그는 봉투를 놓고, 손을 풀어 주었다. 힘이 빠진 몸은 츠키나가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츠키나가는세나의 손바닥이 다치지 않게, 제 손으로 꼭 잡았다. 왕, 님, 미안, 해, 라고 세나는 천천히 사과했다. 봉투에 막히고 숨소리에 막혀 쇳소리처럼 전해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츠키나가는 괜찮아, 괜찮아, 하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의 손은 세나의 것에 비해 따듯했다. 무대에서 긴장했어? 라는 질문에 세나는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럼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츠키나가는 활발하게 웃었다. 여름 햇살 같은 웃음이었다. 긴장이라도 풀어 줄 요량인지 츠키나가는 노래 불러줄까? 하고 물었다.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츠키나가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시작 부분의 가벼운 허밍으로 시작한 곡은 세나가 모르는 음악이었다. 그의 리듬에 맞춰서 세나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자 했다. 간간히 그의 어깨가 튀는 것을, 츠키나가는 불안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괜찮다고 말하는 듯 웃어보였다.
미성이었다. 두근거리는 목소리였다. 제 목소리는 천재성에 비해 별로라고 말하던 것 주제에, 제법 들어줄 만 했다. 그는 이 상황이 매우 부조리극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흐르는 눈물이 버거웠다. 눈이 따가웠고, 크게 열린 목이 아팠다. 봉투는 급하게 부풀었다가 수축하길 반복했다. 라이크, 어 플라워- 하고 가만가만히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에 맞춰 천천히 숨을 쉬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실술들이 몰려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시야가 자꾸만 어두워지려 했다.
츠키나가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일어났다. 온 세상이 어두웠고, 목구멍 끝이 벙벙했다. 그는 봉투를 세나의 손에서 빼앗았다. 히끅거리는 숨을 쉬는 세나에게 츠키나가는 웃어 보였다. 나는 내 기사한테 나쁜 짓 안해. 믿지? 츠키나가는 발랄하게 말했다. 쾅쾅거리는 앰프의 음에 가려졌지만 목소리는 확실하게 들렸다. 세나는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양 끝을 잡았다.
“나도 첫키스니까 이해해주라.”
쌤쌤이, 라고 말하자마자 츠키나가는 세나의 허벅지에 제 무릎을 얹었다. 간이의자가 끼긱거리는 소리를 냈다. 리츠가 부르고 있는 곡이 점점 클라이막스로 다가가는지, 전자음이 크게 째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나는 눈을 크게 떴다. 눈을 감고 있는 츠키나가가 보였다. 집중해, 라는 말과 함께 세나의 호흡은 츠키나가에게 먹혔다. 입술과 입술이 마주 닿았다. 부드러운 노래를 부르던 목소리가, 세나가 만들어내는 쇳소리와 섞였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진공공간인 것 마냥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여름이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닿은 입술은 따듯했고, 섞이는 혀의 느낌이 두근거렸다. 츠키나가는 천천히 혀를 섞으면서, 호흡을 조절했다. 세나의 손은 공중을 방황하다가, 이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츠키나가의 머리카락이 볼에 닿아 간지러웠다. 무대에서 뻗어 나오는 반짝이는 조명이, 백스테이지까지 뻗어 들어와 별처럼 반짝였다. 비현실 같은 순간이었다.
숨과 숨이 얽히고, 하고 싶은 말들이 섞여 버석버석하게 사라졌다. 여름이 번져왔다. 눈이 부셔 세나는 눈을 감았다. 온 우주가 츠키나가로 물드는 것 같았다. 거세게 몰아치던 호흡이, 천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츠키나가는 그의 어깨를 천천히 쓸어주었다. 츠키나가는 그의 곧은 치열을 천천히 핥았다. 내뱉는 말들이 섞이는 것처럼, 달콤한 소리가 들렸다. 다른 의미로 시야가 점멸할 것 같았다.
눌린 허벅지가 뒤늦게야 아파왔다. 세나의 어깨가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츠키나가는 감은 눈을 떴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설렘이라는 이름의 초신성이 반짝이다가, 이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세나는 제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츠키나가는 천천히 입술을 땠다. 가느다란 실이 길게 이어지다가, 츠키나가가 제 입술을 엄지로 쓸어내리자 끊어졌다.
“저기, 왕님?”
“나도 첫 키스니까 이해 해 달라니까.”
그리고 진정했지? 츠키나가는 푸스스 웃었다. 세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토성의 띠가 된 기분이 들었고, 중력에 돌진하는 소행성이 된 기분이었다. 백스테이지에서 여전히 노래는 흐르고 있었다. 쾅쾅 거리는 비트 속에서 둘의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설렘도, 떨림도, 여전히 있어 세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츠키나가는 이런 상황에서도 의연해 보였다.
한참의 고민 끝에 세나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무대 익숙해?’라는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츠키나가는 글쎄, 라고 말하다가 서툴러도 괜찮다는 말을 내뱉었다. 백스테이지에서는 그래도 괜찮다는 말에, 세나는 그가 몇 단계의 말을 생략했는지를 헤아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세나가 아니어도 괜찮고, 멋있는 세나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이 이어져 왔다. 그는 아까 부르던 노래를 더 불러주겠다고 말했다.
라이크 어, 플라워- 부분부터 끊겼던 노래가 다시 시작했다. 그의 마이크에 불이 들어오기 전 까지 이 노래는 계속되었다. 츠키나가, 스텐바이. 라는 목소리가 다가오기 전 까지 레오는 세나만을 위해 노래했다. 야광봉의 반짝임도- 화려한 함성도 들리지 않는 백스테이지가 순식간에 여름으로 물들었다. 세나는 볼에 볕을 받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미리 리허설 했던 경로를 밟아가기 전에, 츠키나가는 이기고 나서 노래 제목 알려줄게, 라고 말했다. 그 말은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졌다. 세나는 무대로 나아가는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명을 받은 등이 유달리도 크게 보였다. 그는 강해 보였고, 의연해 보였다. ‘왕’이라는 호칭을 짊어지기에는 작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세나는 간이의자에 무릎을 당겨 앉았다. 함성이 몰려왔고, 그것을 등지고 리츠가 다가왔다.
“와, 얼빠진 표정.”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세나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세나는 여름이라 더웠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땀 많이 났네, 라고 말하면서 리츠는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백스테이지의 온기는 무대 위의 열기보다 뜨거웠다. 볼이 달았다. 여름의 한 가운데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름처럼 울리는 츠키나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쭉쭉 뻗어 나가는 목소리가 둘이서 만들었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셋쨩이 붙인 가사지? 리츠가 물었다. 세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는 츠키나가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우주가, 백스테이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주의 고동과 닮았다던 노랫소리가 번져왔다.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여름을.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발치에서 검은 비닐봉투가 힘없이 흔들리다, 발에 채이고 무대 쪽으로 천천히 팔랑거리며 나아갔다. 그것은 짝사랑의 시작이었고 우주의 처음이었다. 세나가 외로운 스테이지를 밟아나가는 이야기의 초장이었다.
아마도, 츠키나가 쪽은 아니었겠지만.
***
고고하게 자라던 그의 우주는 한 번 크게 꺾였다. ‘빅뱅’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세나는 무대를 떠나던 츠키나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전히 백스테이지에서 음은 우주의 파동처럼 울렸다. 세나는 자신이 거쳐왔던 수많은 백스테이지를 떠올렸다. 츠키나가가 없는 무대 뒤는 외톨이 별처럼 외롭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꺾이지 않았던 것은 그가 있을 자리가 이 곳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지켜왔던 우주가 비어버린다면 더 이상 의미는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몰려왔다. 생생하게 다가오는 슬픔이 아팠지만, 눈물처럼 흐르진 않았다. 이제 여름을 보내야 할 때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의 행동들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세나는 풀리지 않은 질문을 목 너머로 꾸역꾸역 삼켰다. 구역질이 밀려왔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왕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화음, 아름다운 리듬, 폭력적에 선율에 길들어진 개처럼 그가 없는 자리를 지켰다. 역전의 세나라는 말을 지탱해 낸 것은 세나였지만, 그것을 만든 것은 츠키나가였다. 그가 있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였다. 백스테이지에서 흐르는 스오우의 목소리를 믿으려고 하다가도, 그의 왕이 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 그를 부정적으로 몰고 갔다.
돌아온 뒤의 츠키나가는 제 목소리가 싫다 말했다. 이상하지? 라고 자조적으로 물을 때가 있었다. 세나는 나이츠의 ‘처음’들을 가지고 있었다. 츠키나가가 준 데모 테잎에서, 지금보다 서툴게 그의 목소리만으로 울리는 것이었다. 그가 없던 백스테이지에서 들었던 것들에 이상한 목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곡에는 꿈을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이돌이 되고 싶었던 계기는 별 거 아니었다. 그걸 꿈으로 만들었던 건 츠키나가였다.
'세나 이즈미'라는 이름의 행성의 회전축이 되어버린 곡들을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왔다. 세나는 진정하려고 노력하면서 천천히, 호흡했다. 그 때처럼 달려와 줄 왕님은 없다.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겨울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달려왔는데, 지금은 분하기만 했다. 이대로 끝이라면 더 이상 츠키나가를 기다리는 백스테이지는 없을 것이었다. 그가 관중석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노래가 울렸다. 함성소리가 번져왔다. 눈을 감으면, 목소리가 들렸다. 세나는 무대 뒤의 침묵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먼지가 쌓일 자리에 대한 예견은 불안하기만 했고, 이런 감정들은 파랑처럼 몰려왔다가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몰려오길 반복했다. 끊없는 그 굴레에서 세나는 눈을 감았다. 스오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목소리에 기대어, 제가 지킨 자리에 돌아올 왕을 소망했다. 망가지고 비틀리더라도 좋았다. 백스테이지는 그래도 괜찮은 장소였다.
완벽한 츠키나가, 철저한 왕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무대 위가 아니니까. 세나는 불합리한 우주 속에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보고 싶었다. 츠키나가가. 자신의 옆, 백스테이지로 돌아와 쾌활하게 웃을 여름이. 세나는 무대의 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백스테이지에 쌓여 있는 먼지가 빛을 받아 우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먼지우주 속에서 세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산소 캔을 던져버리고, 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노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진공인 것 마냥,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아아, 왕님.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탄식했다.
어서 무너져도 괜찮다고 말해줘.
오랜 시간을 기다린 그의 목소리는 목적 없는 화살처럼 입 안에서 맴돌았다. 눈을 감자, 그 때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아프고, 아프고 깨어질 것만 같아서, 세나는 차라리 시들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 따라 백스테이지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그의 왕은 무대 위에서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세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겨울에서 보는 여름은 유달리 멀고, 겨울 밤은 유독 짙고 길기 마련이었다.
いつでも君の笑顔に搖れて
언제까지나 그대의 웃는 얼굴에 흔들리며
太陽のように强くさいていたい
태양처럼 강하게 피어나고 싶어
胸が 痛くて 痛くて 懷れそうだから
가슴이 아프고 아파서 깨어질것만 같기에
かなわぬ想いなら せめて枯れたい
이뤄지지 못할 마음이라면 차라리 시들어버리고 싶어
[리츠이즈] ベイビーベイビビアイラービュー (0) | 2016.0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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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이즈] 달의 뒷면, 크레이터 속 녹턴 (0) | 2016.0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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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이즈] inspiration (0) | 2016.01.19 |
히치하이커 | 2016. 1. 24. 03:09
*원작기반 AU인 기분. 스물 아홉의 왕님과 이즈미입니다.
不宣 :: 餘情
쓸 말은 많으나 다 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편지 말미에 덧붙이는 다 오르지 못한 계단이라 하였습니다
…
때가 깊고 숨이 깊고 정이 깊습니다 밤새 낙엽이 받아낸 아침 서리가 소금처럼 피었습니다
― 정끝별, 「불선여정」中
***
불행 또한 ‘우연’이라는 말에 담을 수 있다면, 그 날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세나는 우연히 알람보다 일찍 일어났다. 하지만 우연히도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미리 계산 해 두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가 샤워를 하고, 아침 대용의 서플리먼트를 마실 때 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발적인 일이었다. 세나는 촬영현장까지 바이크를 타고 가려던 생각을 고이 접었다. 오늘 같은 날은 미끄러지거나, 사고가 나기 십상이었다.
모델에게 있어서 몸은 생명줄과도 같다. 세나는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몸 관리를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하는 남자였다. 그와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나루카미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나는 제 몸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편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몸이 상할만한 취미’는 바이크를 포함하여 단 두 가지뿐이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데리러 올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의 매니저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아침에 벌어진 ‘우연’들을 처리하고 나니, 시간은 30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세나는 컵에 들어있는 서플리먼트를 모두 마시고 다시 양치했다. 담배를 피울만한 시간은 없었다. 손에 냄새가 스미는 건 싫었고, 또 오늘 뿌린 향수를 병째 가지고 나가는 것도 사양이었다. 그는 향이 섞이는 걸 매우 싫어했다. 그는 조만간 미니어쳐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혀를 쯧쯧 찼다. 오늘은 아예 담뱃갑을 놓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전신거울 속에는 완벽한 ‘세나 이즈미’가 보였다. 그는 곱슬기가 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는 모델이었다. 몇 번이고 색을 바꾸고, 새로운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오는 건 고등학생 때 하던, 가볍게 펌이 남아있는 회색 머리카락이었다. 머리끝에 남아있는 검정색이 미련 같아 보였다. 그는 그 부분을 전부 잘라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우연히도, ‘지금 도착했다’는 매니저의 메시지가 바로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세나 씨,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그런가, 잘 모르겠어요.”
세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차 안에서 그는 오늘 촬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물속에 들어가는 촬영이었다. 셔츠 한 장, 바지 한 장 정도의 가벼운 차림으로 수영장 속에 들어가, 마치 그 곳이 심해인 양 사진을 찍어야한단 소리에 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 컨셉이 고래인가요? 라는 말에, 매니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촬영장에 히터는 있겠죠? 세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없으면 만들어야죠, 매니저는 활기차게 웃었다.
눈이 내리는 창문을 와이퍼가 쓸고 지나갔다. 그 자리에 무지개 같은 자국이 연신 남았다. 세나는 그 자국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날이 회색이었기 때문인지, 감은 눈 너머는 검은색처럼 느껴졌다. 그는 괜히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래에 대해서 상상했다. 참, 세나 씨, 이번 촬영은 ‘다른 고래와 소통할 수 없는 고래’에요. 매니저는 그가 잠들기 전에 말해주려는 듯, 얼른 입을 놀렸다.
“저번에 찍었던 ‘우주 고래’ 생각나네요.”
“그렇죠? 그 때 작가님이랑 같은 작가님이래요.”
이번 작품이 저번 작품의 연장선은 아닌데, 우연히 의뢰를 받았대요, 근데 세나 씨가 생각났다지 뭐에요? 매니저는 제법 발랄하게 말했다. 좋은 일이네요, 세나는 졸린 척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는 창문에서 외풍이 불어, 머리가 닿은 쪽이 차가웠다. 그가 작게 숨소리를 내뱉자, 매니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나는 지금 이 공간이 ‘진공’이나 ‘심해’와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물속에 직접 들어가는 건 자신이 없었다. 그는 오늘 촬영이 제법 골치 아플 것이라 확신했다.
물 안은 답답하다. 꼭 일방적으로 짝사랑을 할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폐로 숨을 쉴 수 없고, 볼을 부풀려가며 담아둔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사진작가가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렇게 추운 날에 그런 작업을 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내키지 않은 일’ 또한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다. 결과로 말해야 하는 프로는 작업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이는 세나 이즈미가 십몇 년 동안 지켜온 철칙이었다.
차 안의 공기는 점점 따듯해졌다. 노곤노곤한 기분이었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자면 얼굴이 퉁퉁해질 텐데, 생각하면서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어젯밤 꿈이 미적지근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와 같은 리듬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촬영장으로 가서 촬영을 할 거고, 원하는 사진을 뽑아낼 때 까지 고생할 것이다. 그리고 느즈막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 반신욕을 할 거고, 물 한 컵을 마신 다음 잠에 들 게 분명했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재미없는 회색으로 굴러가는 중이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큰 소리가 났다. 몸이 앞으로 쏠리는 느낌에 세나는 크게 눈을 떴다. 매니저는 그가 묻기 전에 접촉 사고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 과실은 저 쪽이 했다는 말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는 안전벨트를 풀고 내렸고, 세나는 멍한 머리를 잡고 두어 번 털다가 밖으로 나갔다. 다친 곳도, 부딪힌 곳도 없었다. 실로 다행인 일이었다. 우연히 일어난 일 치고는 스케일이 작다고 해야할 지, 크다고 해야할 지 세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매니저는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지금 정신을 놓고 사는 거냐, 허우대도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그래도 괜찮으냐, 하는 목소리에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세나는 택시를 부를까 하면서 천천히 매니저의 쪽으로 다가갔다. 조금 조용히 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 매니저의 등 너머의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비취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세나? 하고 물어보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우연 치고는 질이 나쁜 일이었다.
“왕님.”
그와 조우했다. 5년 만의 일이었다. 우연한 일이었지만 그다지 겪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엉엉 울고, 일방적으로 털어낸 일에 대해서 마주하는 건 아직도 어려웠다. 열을 내는 매니저를 뒤로 하고 츠키나가는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교통사고 같은 일이었다. 세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상실한 외사랑과 만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하늘에서는 살랑살랑, 눈이 내렸다.
세나는 당장 8m 수영장의 물에 빠져, 숨을 모두 뱉어버리고 가라앉고 싶었다. 다시 그의 세계는 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참으며 세나는 덤덤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 왕님. 그의 작위적인 말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츠키가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오랜만이야 세나! 별들의 움직임이 너와 나를 이끌었던 걸까? 소행성들이 쾅! 쾅! 하고 부딪혀가며 몸집을 작게 만드는 것처럼 신기한 일이구나! 아, 이 순간만으로도 곡이 될 것 같아, 하고 인사했다. 츠키나가는 자신이 가해자라는 자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여전했다. 모든 게.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은 가끔씩 기도를 막곤 했다.
***
강설이었다.
눈은 점점 무게를 더해갔다. 우연히도 사진작가를 태운 택시가 도로 위에서 미아가 됐는지, 촬영은 미뤄졌다. 그러나 우연히도 사진작가와 같은 도로에 보험회사 사람이 있는지, 보험 처리 또한 계속 늦어졌다. 문단과 문단의 ‘사이’ 같은 시간이었다. 세나는 츠키나가를 바라보았다. 눈높이는 5년 전과 비교해서 차이가 없어 보였다. 자란 만큼, 그도 자랐다는 뜻이었다. 변한 게 없네~ 라고 말하는 츠키나가는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츠키나가는 익숙하게 불을 붙였다. 담배에서는 독한 향이 났다. 그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촬영 가던 중? 그는 느긋하게 말을 붙여왔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입을 벌릴 때 마다 물로 된 대기가 폐 속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일방적인 상실이란 그런 것이었다. 츠키나가가 내뿜는 담배연기는 마치 입김처럼 보였다. 5년 전 그 날도, 그랬다. 세나는 그 날을 반추했다.
그 날에도 눈이 내렸다. 멋대로 사랑을 상실한 날이었다. 츠키나가는 그 때도 담배를 피웠다. 이제 끝이야, 라고 말하는 츠키나가는 후련해보였다. 졸업을 하고도 몇 년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왔던 나이츠도 이제 해산, 이라고 말하는 그는 짐을 덜어낸 것 같아서 세나는 매우 서운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다. 어른에게는 어른들의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사랑 노래를 만들어 준다고 했었던 적이 있었다. 나이츠의 이름이 아니라 세나 이즈미의 이름으로. 하지만 츠키나가가 ‘끝’이랬음으로, 받을 일도 사라진 약속이었다. 그는 그 말을 한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때 세나는, 지독한 짝사랑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는 걸 알았다. 본능적인 일이었다. 더 이상 벽에 대고 외치는 사랑은 하기 싫었다. ‘별로’였다.
한 마디를 할 때 마다 채우는 은유의 자물쇠들은 이미 열쇠를 잃어버린 채로 벽 하나를 가득 채웠다. 그게 지겨워졌을 뿐이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츠키나가는 담배를 폈고, 세나는 어색한 연기에 기침했다. 콜록, 콜록, 하며 떨리는 어깨를 츠키나가는 툭, 툭 두드렸다. 평소라면 설렜을 행동이 회색처럼 느껴졌다. 별다른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다.
의미 부여에도 지쳤다. 사랑 노래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의 왕은 이제 뭐 할 거야? 라고 물었다. 세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그의 비취색 눈을 바라보다가, 제 운동화 앞코를 바라보았다. 추운 날이었다. 팔랑팔랑 내리는 눈을 입김으로 몇 번 녹이다가, 그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았다. 담배를 피울까 해, 라고. 그에게 주는 마지막 은유였으나, 츠키나가는 그걸 알아채지 못한 듯, 담배를 끊으면 살이 찐다느니 하는 요상한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다.
물론 그 안에 ‘목이 상한다’는 정보는 들어 있지 않았다. 음악인으로서 나름의 자존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둘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고, 교신을 끝내기로 한 입장에서는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세나는 자물쇠가 덕지덕지 달린 흰 벽에 마지막 자물쇠를 채우는 상상을 했다. 열쇠는 모두 깊은 물 속에 던져두었다. 마음에 고여 있는 열쇠들은 녹이 쓸어서, 다시 아무도 열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끝낸 사랑이었다. 외, 사랑. 세나는 하품을 했다. 입김이 담배연기처럼 몽글몽글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는 츠키나가 쪽을 눈짓 하다가, 손을 뻗었다. 왜 세나, 손 시려워? 손이라도 잡아 줄까? 츠키나가는 발랄하게 말했다. 예전이라면 의미를 부여했을 말들에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보다 목이 막히는 기분은 아니었다. 깔끔하게 털어낸 짝사랑에 박수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도 줘.”
“담배 피워? 세나, 네가?”
“응.”
"우주인 아니지? 웃츄~ 하고 인사해야 할까?"
"아니니까 줘."
세나는 츠키나가의 손에서 담배를 받아들었다. 츠키나가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나는 비웃듯 웃었다. 어렸을 땐 이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었다. 작곡만을 하게 된 뒤로 츠키나가는 간간히 담배를 피웠었다. 목을 쓸 일이 없다는 이유였다. 세나는 제 은유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꼈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은 모두가 시인이라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가 담배연기처럼 사라졌다. 츠키나가가 불을 붙여주는 걸 받고, 세나는 천천히 들이마셨다. 다행이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어른인, 탓이었다. 너무 오래 보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그의 짝사랑은 녹이 쓴 채 멈춰버린 톱니바퀴 같았다. 억지로 돌린다면 돌아가겠지만 자연스럽게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아, 후련하다. 세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숨을 내쉬었다. 츠키나가는 그가 후련한 이유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어색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그냥, 이 강설에 잠시 쉬어가는 것 같기도 했고, 눈을 보며 음악을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내뱉는 담배 연기가 눈 내리는 날, 입김처럼 나렸다. 세나는 제 외사랑에 마침표를 찍었다. 어린 과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츠키나가를 위한 시작(時作)이었다. 짝사랑은 모두 은유를 함유하고 있다. 세나의 행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나는 츠키나가의 앞에서 시인처럼 행동했다. 모든 행동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세나는 오늘 제 촬영 컨셉을 떠올렸다. 우연한 일이었다. 같은 고래도 듣지 못하는 소리로 노래하는 고래였다. 그 고래의 모든 행동은 다른 고래에게 닿지 않았다. 다만 물 대신 들이찬 대기 속에 흩어질 뿐이었다. 그는 짝사랑을 하는 게 익숙했음으로, 이 모든 것에 상처받지 않았다. 다만 상처자국이었던 자리에 조금씩, 조금씩, 눈이 소복소복 싸이는 것처럼 남긴 딱지는 단단하게 굳었다.
굳이 긁지 않으면 터지지 않을 상처였다. 다행이다.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푸스스 웃었다. 뭐가 다행이냐는 말이 되돌아왔지만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기 싫었다. 괜히 상처를 긁지 않는 게 어른이었다. 그는 천천히, 츠키나가가 붙여준 담배를 들이마셨다. 연기가 폐부를 채우는 느낌이 신선했다. 눈에서 나오는 찬 공기를 마시는 것 같았다. 이제 드디어 혼자 숨쉴 수 있었다. 그는 심해로, 계속 바다로 가라앉는 고래를 상상하다가 푸, 하고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고래의 숨구멍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하얀 연기가 천천히 뿜어져 나왔다. 세나는 마치, 노래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들어 준 음을 목소리로 덮어 내뱉는 것처럼, 츠키나가가 붙여준 불로 담배연기를 만든다. 그는 나름대로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츠키나가를 바라보았다. 비취색 눈동자는 예전보다 많이 얌전해져 있었다. 천재도 세상에 깎인다는 걸까, 싶어서 세나는 아련하다고 생각했다.
우연이 벌인 일 치고는 깔끔하게 끝날 일이었다. 그들은 담배를 태우면서 몇 가지를 추억했다. 츠키나가에게는 청춘이었지만 세나에게는 사랑의 이름으로 새겨졌던 말들이었다. 세나는 천천히 모든 걸 정리했다. 있지 츠키나가, 하고 그는 입을 땠다. 더 이상 왕님이라고 부르기 싫은 기분이었다. 어색한 호칭에 그의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크게 변했다. 세나는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 재가 땅바닥에 작은 주황을 담아 퍼지다가, 이내 회색으로 변했다.
“좋아했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담배를 땅애 내던졌다. 발로 비비 끄는 도중에 츠키나가가 말을 붙여왔다. 왜 좋아했었어야, 세나?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세나는 많은 변명을 생각했다. 우리는, 다른 고래 같아, 너는 우주에 살고 나는 바다 안에 살고 있어서 모든 은유가 전해지지 않았어, 나는 많이 지쳤단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지, 5년 동안 잊으려던 걸 시작하려면 힘들잖아, 더 이상 힘든 건 싫고, 더 이상 고생하기도 싫고, 널 만나는 것도 싫고, 다 싫고, 싫고, 싫고.
세나는 말을 정리했다. 그는 음, 하고 운을 때다가 푸스스 웃었다. 입에서 뻗어 나온 입김은 담배연기처럼 몽글몽글하게 퍼졌다. 그는 불선不宣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편지 말미에 쓰게 되는 이 말은, 사연을 다 말하지 못하고 이만 줄인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는 물 속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어른이란 해도 될 말과 해도 되지 않을 말, 그리고 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하는 존재다. 그는 그들 사이에 눈처럼 쌓인 시간을 생각하다가, 웃었다.
“글쎄."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눈은 둘 사이에 소복소복 쌓였다. 보험회사 직원이 왔는지, 세나의 매니저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세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라고 덤덤하게 말하며, 그는 츠키나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오렌지는 회색 속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츠키나가는 벙찐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나는 입술껍질이 일어난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뒤를 돌았다.
내린 눈을 밟는 소리가 뽀득뽀득 울렸다. 아, 짝사랑은 이제 질렸어. 세나 이즈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은 츠키나가에게 닿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의 뒤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제 등뒤를 쫓아오는 츠키나가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어 보였다. 조금 슬펐다. 해줄 말이 많았던 것도 같은데 모두 다 잊어버렸다. 더 이상 츠키나가가 만들어 준 노래를 부르지 않는 목이 따끔거렸다. 담배 연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한숨을 내 쉬었다. 해 주고 싶었던, 말이 많았다. 참 많았었다.
허나 모두 불선이었다. 불선, 불선이었다. 눈은 마침표처럼 내렸다.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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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커 | 2016. 1. 23. 02:07
* 소녀님과의 연성교환 글입니다
* 뱀파이어x성야제...인데..집착...끼얹고 싶었......습니다.... 네......
La campanella
살인은 연애처럼 하라.
어두운 그곳에 그가 있다.
나는 그를 가둔다.
어두운 이곳에 그가 있다.
오래 묵은 사랑이
손끝에서 터진다.
― 「카프카-107호」 신해욱
가끔 네 손을 뒤로 묶고 싶다. 도드라진 날개 뼈에 크게 채찍질을 하고 싶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세게 내리친 채찍에 살갗이 찢어져 스며 나온 피에, 하얀 피부에 입을 맞추고 싶다. 뒤로 묶인 손목을 어떻게든 풀고 싶어서 바르작거리는 두 주먹, 하얗게 질린 손톱 끝을 보면서 웃고 싶다. 네가 예쁘다고 했었던 웃음소리처럼. 그렇다면 너는 내게 뭐라고 말할까, 쿠마 군, 이라고 말할까 아니면, 지금처럼 신의 이름을 입에 담을까.
***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가 생각나는 밤이었다. 리츠는 밤하늘을 가리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에 대한 성화는 언제나 자애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쿠마 리츠는 신이 만들어내는 가장 어두운 부근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오늘 크리스마스 전야제 라이브가 없었더라면 이런 곳에 누워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이츠는 본디 개인주의적인 유닛이다. 유닛원이 성탄 기념 성가를 부른다고 해서, 꼭 구경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리츠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쨍한 파랑을 바라보았다. 역시 교회에 있는 건 불쾌했다. 오늘 세나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오지 않았을 곳이었다. 그는 조율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었다. F음을 반복하고 있던 현악기들 중 몇몇은, 본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손이라도 풀고 싶은 것인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파가니니가 연주하던 것 보다는 세련미가 떨어진다. 파가니니가 살던 시대에 비해서 미래인 게 오히려 세련미가 덜하다는 게 나름 유머로 느껴져, 리츠는 피식 웃었다. 밤이 깊어갈 수록 그는 활발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물이었다. 백 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교회에는 한 발자국도 못 들어왔을 것이다. 리츠는 혀를 쯧쯧 차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리츠는 세나의 말을 반추했다. 리스트에게 사사받았던 「라 캄파넬라」를 들려준 다음의 일이었다. 세나는 리츠의 ‘리스트’가 어떤 은유를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리스트는 너무나도 오래 전의 사람이었고, 사쿠마 리츠는 19살의 풋내기 소년이었다. 리츠는 세나의 그 행동들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먼지가 쌓여 있어 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리츠는 자신이 매우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나 이즈미는 현실적이다. 그는 유메노사키 내에서 돌고 있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에 대해 하나도 믿지 않았다. 삼기인三奇人이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도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지나갔다. 그런 그가 성야제 의상을 입고 신을 찬미한다는 것이 사쿠마는 조금 웃기게 느껴졌다. 분명 세나라면 신 또한 믿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느리게 하품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달아나지 않은 졸음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현실적이었다. 왜 이렇게 낮에 맥을 못추냐며 투덜거리는 말에, 나 사실 뱀파이어야, 라면서 진실을 알려줬을 때에도 세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형제가 둘 다 뱀파이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신기했는지, 언젠가 작은 목소리로 형의 컨셉을 지켜주려는 거야? 라고 질문 한 적은 있었다. 요컨대 그는 정말이지 기이하거나 이상한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물이 인간들 사이에서 섞여 지내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학교 안에서 피를 빨린 학생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도, 리츠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모함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사쿠마 리츠는 그런 세나가 좋았다. 비현실을 믿어주지 않는 단호함이 맘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러한 단단함을 사랑했다. 모두가 믿는 걸 믿지 않는 사람은 나름대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으면서도 어울려주곤 했다. 리츠가 셋쨩, 피 주세요- 라고 말하면 얼굴을 찌푸리고, 그런 컨셉은 이제 졸업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면서도 네? 주세요, 라고 조르면 팔을 내밀었다. 그의 손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 건 제법, 재미있는 놀이었다. 그의 피는 맛이 없었고, 빈혈이라도 있는지, 밍밍한 맛이 났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서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세나의 행동은 나름의 여흥이었기에 리츠는 그에게 계속 피를 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흡혈은 마치 기사서약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리츠는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세나의 손가락 끝에 키스한다.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 떨어지면 세나는 리츠의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세나는 맛있니? 맛있어? 라고 빈정거리면서도 한 번 결정한 걸 되돌리거나, 물리진 않았다. 그는 이상한 부분에서 아가페적이었다. 리츠는 그게 재미있어, 괜히 그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추곤 했다. 습관 같은 일이었다.
그의 손바닥을 혀끝으로 핥으면 세나는 기분이 나쁜지, 주먹을 쥐었다. 힘이 들어가 손톱 끝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믿지 않는다면서, 피를 주고, 그런 주제에 무서워서 손을 꼭 쥐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모습을 계속- 계속 볼 수 있다면 저보다 약한 인간에게 몇 번이든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그의 자존심은 아름다움 앞에선 당연하다느 듯 고개를 숙이곤 했다.
리츠는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하는 세나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도 좋아했다. 이로 강하게 깨문, 핏기 없는 입술에서는 당장이라도 신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힘들면서도 참고, 담담하게 보이려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 사랑스러움에 질식할 수 있을 정도였다. 흡혈을 할 때 찾아오는 쾌락을 기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피가 나는 게 무서운 건지 모를 정도로 긴장하는 세나의 어깨는 언제나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로 문다? 라고 말하면 세나는 짜증내기 전에 어서 하던가, 라고 말했다. 리츠는 그럼 기사복을 닮은 나이츠의 의복 아래에 가려져 있는 하얀 손목을 물었다. 송곳니로 여린 피부를 찢고, 혈관에 닿으면 뜨거운 피가 흘렀다. 더럽게 맛없는 피였다. 뭔가 많이 부족하고, 어리숙한 느낌의 피. 여태까지 리츠가 물어왔던 인간들 중 가장 맛이 없다고도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나의 반응만은 언제나 화음처럼 좋았고, 파가니니처럼 섹시했다. 「라 캄파넬라」의 마지막 종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피를 빠는 동안 세나의 반대편 손은 어딜 쥘지 몰라 방황한다. 그 때 손목에서 입을 때고 시선을 올려 쳐다보면 세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미간에 있는 주름들이 사랑스럽고, 꽉 감아 가려진 아이스블루의 눈동자가 아쉽지만 그는 쉽게 눈을 뜨지 않는다. 밀려오는 쾌락에 몸을 가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피가 빨리는 느낌이 생소한지, 허리에 힘을 주고, 앉은 허벅지에 힘을 주는 요령 없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리츠는 무심코, 몇 번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뱉을 뻔 했다. 세나는 목석같았고, 리츠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피를 지혈해 주기 위해 상처자국을 혀로 핥으면, 세나는 그 소리마저 듣고 싶지 않아하는지 얼굴을 꼭 숙였다.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자기보다 500년은 더 산 괴물 앞에서 의연하기란 어려운 일일 텐데도, 그는 엄지에 힘울 줘 구부리면서까지 ‘아무렇지 않아’하고 싶어 했다. 작은 숨을 내쉬면서 오르내리는 가슴팍은 여렸다. 목과 함께 누른다면 숨을 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거라면,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쿠마 리츠는 재미있는 인간을 사랑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영원이나 죽음으로 만들기에는 ‘내일’이 기대되는 군상들을 좋아했다. 세나는 딱 그런 사람이었다. 인간적인 고백을 하지 않았지만, 리츠는 그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보석과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울리는 짝을 찾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는 푸스스 웃었다.
좋아하게 만든 세나가 나빠, 리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눈을 감을 때 종종 세나가 번져오곤 했다. 그는 언제나 서투른 모습으로 자리했다. 리츠는 그 서투름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손목을 뒤로 묶고, 예쁘게 드러난 날갯죽지에 채찍질을 하고 싶기도 했다. 피가 흘러나올 때, 아픔을 견디지 못해서 내는 신음은 얼마나 달콤할까. 절정에 달했을 때, 목을 젖히며 내는 소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리츠는 멋대로 상상했다.
그의 상상은 꿈과 같이 달콤했으며, 만약 크리스마스 전야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쉬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딸기와 설탕을 넣어 만든 감주 같았다. 종은 크게 울렸다. 화음도 없는 시끄러운 소리였다. 여러 명의 구두굽 소리가 들려왔다. 리츠는 1층 예배당을 바라보았다. 2층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작은 본당의 한켠을 차지한 성가대석에,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크리스마스 전야제는 늦은 밤에 시작했다. 졸리진 않았지만 지치는 날이었다. 교회 안으로 유메노사키 학생들이 차곡차곡 들어왔다. 몇몇은 매우 지루해보였고, 몇몇은 신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믿기 어려웠지만, 나이츠의 두 명은 ‘경건한 쪽’이었다. 심지어, 세나의 목에는 반짝이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의외의 일이었다. 세나는 스오우보다 더 진지했다. 그는 지금 ‘라이브’를 대하는 게 아니라 ‘종교 의식’을 대하는 표정이었다. 리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신을 믿는 사람이었나, 하고 중얼거렸다.
셋쨩이 믿는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리츠는 얼굴을 찌푸렸다. 3년 동안 가까이 있었는데도 전혀 알지 못했다.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믿어주지 않으면서 더 멀리 있는 신을 믿는다는 게 화가 났다. 이는 전적으로, 아가페적인 사랑을 베풀지 않는 세나 때문이었다. 그의 사랑은 넓고 얇게 퍼지는 사랑이라기보다는 한 점에 가서 꽂히는 화살 같은 사랑이었다. 그 열정적인 마음을 아가페적으로 썼으면 벌써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리츠는 혀를 쯧쯧 찼다. 그의 피가 맛이 없었던 건 신을 믿어서였을까. 리츠는 볼을 부풀렸다.
그렇다면 그가 기현상을 믿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는 예배당, 제 자리를 찾자마자 두 손을 끌어안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오밀조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신에게 무얼 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츠는 그게 퍽 아쉽다고 생각하며,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지휘자가 단상에 올라옴과 동시에, 성가대석에 서 있는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손이 움직이고, 박자에 맞춘 오케스트라 반주가 흘러 나왔다. 같은 영원을 살아가는 사이인데, 왜 자신은 그의 종교가 될 수 없을까, 리츠는 얼굴을 찌푸렸다.
명백한 불쾌감이 몸 안을 어둠처럼 기어다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세나의 눈은 저만을 바라봐야 한다. 그 눈동자가 담을 수 있는 세상은 사쿠마 리츠면 족했다. 그의 세상을 한정시키고 싶었다. 새장 속에 가둘까, 아니면 내 속에 가둘까, 리츠의 상상은 극단적인 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신을 향해 웃어주는 그가 미웠다. 똑같은 영원이라면 내 쪽이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리츠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계속 머릿속에서 같은 생각이 종이 여러 번 겹쳐 울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신을 찬미하는 그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 곳에서 세나의 목소리는 화음처럼 쌓였다. 명백하게 불쾌한 일이었다. 리츠는 화가 났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서 신을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리츠는 세나를 노려보았다. 세나는 드물게도,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잔잔한 음들이 쌓여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성가가 되었다. 맘속에서 심장박동처럼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리츠는 그의 손목을 뒤로 묶고, 도드라진 날개뼈에 제 자국을 남기는 상상을 했다. 나쁜 아이에겐 벌을 줘야 마땅한 법이었다.
사랑을 하는 아이는 언제나 아름답다. 그 반짝이는 두 눈이 저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잔인한 처사였다. 아, 가둬버리고 싶어. 리츠는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그가 들고 있는 푸른 악보가 거슬렸고, 신을 찬미하는 붉은 입술이 짜증났다. 걸고 있는 인이어와, 목에 매고 있는 감색 리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날 종교로 삼고, 날 믿고, 날 사랑할 순 없었던 걸까. 리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턱을 괴었다.
모든 게 심드렁해졌다. 제 손 안에서 굴릴 수 있는, 농락할 수 있는, 변화 할 수 있는 세나를 좋아했다.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의 후반부처럼, 큰 종소리가 들려왔다. 리츠는 천천히 한숨을 내 쉬었다. 성가대는 신의 가장 가까이에 서서, 노래할 수 있는 자리라고 들었던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리마저 망가뜨리기로 결정했다. 신은 멀었고, 마물은 가까운 법이었다. 리츠는 성가가 끝나기 전, 2층에서 내려왔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 마다 그림자가 짙게 묻어 있었다.
오래 묵은 사랑이, 손끝에서 터졌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울리는 것을 찾아가기 마련이었다. 그의 아름다움은 신의 것인 듯 정교했으나, 그것을 먼저 가져가는 것은 세상 속의 마물이었다. 리츠는 세나의 목을 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신을 찬미하는 목소리를 내뱉는 그 숨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두 목을 조르면 간헐적으로 떨면서, 쿠마 군, 하고 불러줄까. 아니면 지금처럼 신의 이름을 입에 담을까. 사쿠마는 천천히 한숨을 내 쉬었다. 고작 인간 하나에게 휘둘리는 자신이 웃기기만 했다.
그는 침몰하는 화음을 떠올렸다.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려 자신의 것으로, 신에게 손을 뻗는다면 억지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게. 리츠는 교회 밖으로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양은 저 안에서 신을 찬미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사근거리는 미소가 모두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리츠는 그의 하얀 등에 채찍질을 하는 상상을 했다. 꿈과 같은 상상은 곧 현실로 다가올 게 분명했다.
신의 것이라면 매력적이지 말았어야지. 같은 영원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내가 종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날 종교처럼 생각하고, 날 사랑했어야지. 리츠는 그에게 하지 못할 말들을 제 목구멍 너머로 천천히 씹어 넘겼다. 그를 밤에 영원히 가둬, 침몰하고 싶었다. 숨을 쉴 수 없이 목이 졸려오는 세상 속에서 세나가 입에 담을 이름은 사쿠마 리츠, 하나 뿐으로 족했다. 리츠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그의 마지막 노래를 들었다.
흡혈귀는 아이의 현실을 비틀어, 비현실로 옮겨 놓는 꿈을 꾼다. 성가의 화음처럼 달디 단 꿈이었다. 그는 괜히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하늘에 뜬 별처럼 멀리 있는 말이었지만, 이제 곧 세나에게 닿을 말이었다. 구속하고 망가지고 비틀렸으면 좋겠다. 리츠는 사랑에 질식하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밤은 깊기만 했고, 달은 그의 발밑에 그림자를 만들지 못했다. 그의 붉은 눈이 어두운 밤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는 무대가 끝나길 기다렸다. 커튼콜이 끝나고 난 뒤, 정적에 가까운 어둠은 본디 마물의 것이었다. 사랑이 깊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오래 묵혀둔 사랑이 손끝에서 터졌다. 리츠는 연애는 살인처럼 하라던 시구를 떠올렸다. 그의 가느다란 목을 물고 싶은 밤이었다. 그가 지세운 밤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것마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당장 세나를 물어 제 앞에 무릎 꿇리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가지는 건 자신 만으로 족했다. 그의 비틀린 사랑은 연리지처럼 자랐다.
교회의 종소리가 종언처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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