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이즈] 민들레 홀씨 칸타빌레─

*'사랑'을 자각하는 순간은 언제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솜님의 리퀘를 받았어요>< 이즈미에게 휘둘리는 마코토였는데... 이런 걸 드려서 심히 죄송한 기분...

*세나 시점의 이야기도 써 보고 싶네요><














    세상을 둘러 싼 중력이 이상해졌다.

   이상해지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유우키 마코토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세상은 어딘가 한 걸음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세상이 퍼즐이라면, 그걸 구성하고 있는 피스들이 스스로 손과 손을 놓고 흩어지거나, 아니면 입체 퍼즐로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앞에서 뒤로 넘어오는 프린트물에는 물리 문제가 빼곡했다. 유우키는 선분 위에 그려져 있는 상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래도 세상 속에서, 과학처럼 ‘올바른 답’을 가지는 건 양반이다. 유우키는 샤프를 돌렸다. 검은 제도샤프의 세계가 왼쪽으로 다섯 번 돌았다가,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았다. 창 밖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지나치게 따듯했다. 그는 하품을 섞인 숨을 내뱉었다. 멀리 운동장에서 파도소리 같은 함성소리가 뻗어왔다.


    소년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초봄이었다. 유우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에 엎어졌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창가에 놓은 화분에 어울리지 않게 자란 민들레가 보였다. 하얀 팬지가 심어졌다가, 죽어버린 곳에 자란 놈이었다. 창문을 열어 둔 사이에 몰래 홀씨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하얀 꽃송이가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자란 노란 민들레 몇 송이 중 한 놈은 벌써 희끄무레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민들레의 꽃줄기가 흔들거렸다. 그는 멀리 운동장을 내다보았다. 초록색 체육복을 입은 선배들이 와르르 몰려 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체육 시간인 모양이었다. 유우키는 제 눈에 익은 사람을 찾으려 허리를 높게 뻗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어차피 부질없는 일이었다. 멀어지기로 약속 한 다음에야 시선에 들어오는 건 반칙이었다.

   홀씨 같다. 유우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돌렸다. 손가락 사이에 잡힌 펜이, 몇 바퀴를 곧게 돌았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알 수 있었다. 유우키는 하품을 했다. 지구의 회전축이 점점 기우는 느낌이었다. 그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회전축이 이상해졌기 때문에, 세상을 둘러 싼 중력이 맛이 간 게 분명했다. 유우키는 작게 공상하다, 프린트물의 1번 문제로 고개를 돌렸다. 물체에 가해지는 ‘힘’에 대한 문제였다.



민들레 홀씨 칸타빌레─

넌 마치 별똥별처럼 나의 우주를 가로 질러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지구의 회전축이 기우는 소리를 듣고 있어.

Stupid love song





***

    유우키 마코토는 ‘한번만’이라는 말에 약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무른 남자였다. 차갑게 대하려고 해도 ‘한번만’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마음은 푹신푹신하게 꺼지곤 했다. 애초에 그의 ‘차갑다’라는 말은 에그타르트 표면에서 굳은 갈색 설탕 층 같은 느낌이었다. 유우키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타인과 원만하게 지내고 싶어 했으며, 평화주의자 적인 면이 강했다. 물론 심성이나 의지는 굳건했지만, ‘목표’이외의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한없이 민들레 줄기처럼 연약해졌다.

    세나 이즈미는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유우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별똥별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세계, 우주의 경계선을 멋대로 넘나들곤 했다. 남들의 시선에서 본다면 명백하게 예의 없고, 재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그는 유우키 마코토가 애써 그어놓은 선을 함부로 짓밟곤 했다. 둘 사이에서 그런 게 통용될 거라는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는 유우키의 세계에서 가장 ‘한번만’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한번만’ 사진 찍게 해줘, ‘한번만 웃어줘’ ‘한번만 잘 가라고 해 주면 안 돼?’ 유우키는 세나의 말들을 떠올렸다. 그는 꼭 사랑하고 있는 여고생처럼 굴었다. 예전부터 그래왔음으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세나는 언제나 유우키의 중력을 멋대로 흐트러트렸다. 그래도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형’이라고 지칭하면서 따라다니고, 사진을 찍거나 감시망을 조직하거나 하는 건 이미 일상인지라 새롭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세나는 그를 지켜주고 싶어 했다. 그는 소년을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대하곤 했다. 유우키는 그 간극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세나가 하는 모든 일들이 스트레스였음으로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환상 속의 유우키 마코토’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 일은 이미 다 잊었다고 말했고, 나는 이제 당신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세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인 유우키’를 좋아하며 따라왔다. 의미 없는 리듬이었다. 무의미한 반복은 지루함을 낳을 뿐이었다.


   세나가 ‘한번만’ 이라고 말하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귀에 귀지처럼 달라붙은 게 분명했다. 유우키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한번만’을 떠올렸다. 저번주의 일이었다. 민들레 홀씨 같은 일이기도 했다. 사람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보던 노란 꽃이 ‘홀씨’가 되는 과정을 거의 보지 못한다. 너무 느리게 변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타이밍에 예상치 못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는 샤프 끝으로 제 볼을 쿡쿡 찔렀다. 세나의 ‘한번만’이 계속 머리에 울려, 문제에 집중 할 수 없었다.

    세나는 쫓아왔고, 유우키는 도망쳤다. 그들의 관계는 그 정도일 뿐이었다. 그의 마지막 ‘한번만’에 대해서 굳이 시간을 들여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기다린다면 세나는 다가올 거고, 자신은 완전 싫어하면서도 휘둘릴 게 분명했다. 그는 숙제를 빼먹은 과목을 기다리는 심정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하기 싫으면서도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짜증났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다는 걸 유우키는 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세계를 감싸 안은 중력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는 마음이 붕붕, 떠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얀 민들레를 푸 불었을 때 부유하는 홀씨 같았다. 중력 법칙이 바뀌었다면 이런 문제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유우키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볕은 여전히 졸음을 가득 담고 있었고, 멀리서 3학년들이 축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하고 우렁차게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굴까, 생각하다가 유우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됐던 간에, 세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유우키, 집중해야지.”


   옆에 앉은 히다카가 말을 걸어왔다. 미안, 히다카 군. 유우키는 작게 사과하고서 문제지를 보았다. 그의 프린트물에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널려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히다카의 프린트물은 공식과 수식으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유우키는 제 볼을 긁었다. 세상에는 수식과 공식을 알고 있음에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힘의 방향이 어디로 오는지를 알고 있어도, 그 공식을 올바른 곳에 알맞게 대입하지 않으면 값은 나오지 않는다. 물리라던가, 수학이 정확한 학문이라고 해도 그 ‘정확함’을 알아채주는 건 사람이다. 유우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세상에는 이처럼 알면서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유우키는 그게 세나와 자신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피하고 쫓아오길 반복했다. 그의 사랑을 무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치 우주의 크기처럼, 영원히 소모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번 주의 그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그를 의식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우키는 제가 세나의 ‘한번만’에 무르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젓가락에 쉽게 갈라지는 조린 무가 아니라, 물엿으로 졸인 연근이 되었어야 했다. 그는 후회해봤자 늦은 일을 반추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때의 감각이 새삼스럽게 번져오는 듯 했다. 유우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힘을 구하는 공식을 썼고, 옆에서 문제를 풀던 히다카는 그의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유우키, 그건 반대쪽의 마찰력을 생각해야 해, 라는 어드바이스에,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다카는 그가 문제를 풀기 쉽게 약간의 해설을 여백에 적어주었다. 샤프펜슬이 움직일 때 마다 해답 같은 설명들이 적혔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민들레 홀씨처럼 부유하고, 또 부유하다가 자유낙하하고 있는 사고思考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해설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어렵니, 라고 물어보는 히다카의 목소리가 봄볕 햇살처럼 상냥하기만 했다. 마찰력과 가해지는 힘에 대한 문제는 어렵진 않았지만, 지금 겪고 있는 문제는 매우 어렵다는 말을 하려다가, 유우키는 그 말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그는 히다카의 프린트물 여백에 손을 움직였다.


    「많이 어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어떤 문제에 대한 고민인지는 여백이 부족하여 적지 못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 쉬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눈앞이 캄캄해지자, 그 때가 다시 번져왔다. 첫 몽정처럼 끈덕지게 따라오는 일이었다. 그 기억은 그림자처럼 제 발목에 매여 있을지도 모른다. 기분 나쁜 일이었다. 아, 어떡하지 유우키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1번 문제에 손을 댔다. 힘 하나를 구할 때 마다 히다카는 손주의 첫 걸음마를 보는 할머니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그렇지, 하고 응원을 해주었다. 퍽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유우키 마코토는 1번 문제를 풀어냈다. 답은 10J이었다. 그러나 세나 이즈미의 ‘한번만’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차마 구하질 못했다. 얼어있던 호수가 깨지는 건 1cm정도의 균열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2번 문제는 스스로 풀어보라며 히다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왔다. 그 응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괜히 속이 아려왔다. 이건 다 세나 이즈미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좋은 영향 보다는 나쁜 영향을 주곤 했다.

   언제, 홀씨가 돼버린 걸까. 유우키는 창문 쪽 화단의 민들레를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있으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옆에 있었음에도 알지 못했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의 분침의 세계가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유우키는 2번 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1번 문제와 비슷한 방식이야, 라고 어드바이스해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도 이런 조언 요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샤프의 회전축을 바꿨다. 세계가 빙빙 돌았다.






***


   일주일 전 그 날에는 비가 내렸다. 세나는 슬퍼보였다. 그는 자유낙하하고 있는 민들레 홀씨처럼 굴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모습과 달리, ‘연약해 보였다.’ 그렇기에 유우키는 자신의 눈이 잘못 될 대로 잘못 됐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 속 세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싫다고 해도 무작정 쫓아오곤 했다. 이렇게 물렁물렁한 느낌이 아니었었다. 그 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그날따라 하굣길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둑어둑한 골목을 주황색 가로등이 밝혔다. 그들은 인파에 치여 천천히 골목길을 걸었다.

   비가 왔기 때문에 가라앉았다고 하기에는 기묘했다. 유우키가 알고 있는 세나는 비가 오든, 눈이 오던 맹목적인 사랑을 자랑했다. 언제나 눈을 마주쳐오면서 유우 군, 안녕? 하고 말을 걸어왔다.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아도 끈질기게 쫓아왔고, 먼저 인사라도 해 주는 날에는 유우 군 드디어 형과 대화를 할 기분이 들었니? 라면서 기뻐했다. 평소의 그가 얼음장 같다고 하더라도, 유우키 마코토 한정으로 세나는 무른 봄과 같았다.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둘의 하굣길은 비슷했다. 둘은 같은 맨션, 다른 동에 살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많은 갈래의 골목길이 있었다. 집에 빨리 가려면 길을 겹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비는 봄비답지 않게 추적추적 내렸다. 유우키는 모든 상황이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갑자기 바뀌는 계절의 사이에 있는 기분이라, 그는 그걸 어떻게 말하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유우키는 갑자기 낯설게 구는 세나가 어색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가갈 수도 없었다. 지금 말을 걸고, 이야길 하게 된다면 또 휩쓸려 버릴 게 분명했다. 요즘 세나와의 대화의 기승전은 달랐지만, 결은 언제나 ‘아이돌 그만 둬’였다. 유우 군에게는 모델만이 길이야, 라고 정해둔 듯한 태도를 대하는 건 귀찮았다. 그런 걸 언제나 받아들일 만큼 유우키는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말들에 휩쓸려왔던 모든 나날을 회상했다. 차라리 이상해도 말을 걸지 않는 게 나았다. 덜 귀찮기 때문이었다.


    “유우 군.”


    결국 먼저 말을 붙인 건 세나였다. 유우키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초보자의 바이올린 연주처럼 이상하게 튀었다. 목을 가다듬기 위해 콜록거리는 동안 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내가 말을 거는 게 이상하다는 거야? 아아 유우 군, ’트릭스타‘니 뭐니 하는 애들이랑 어울리다가 기본적인 예의도 잊어버렸어?’라는 말이 들려오지 않는 건 참으로 어색했다. 세나는 무표정하게 골목길을 응시했다. 그는 뭔가의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도 말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유우키는 입을 열었다. 이즈미 씨,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라는 물음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cm 아래에 있는 잿빛 머리카락이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 마다 흔들렸다. 가볍게 셋팅해 놓은 머리카락에 습기가 묻어 무거워 보이기만 했다. 유우키는 잠자코 그가 말할 때 까지 기다렸다. 그들의 여백에 빗소리가 무겁게, 또 무겁게 내렸다. 세나는 물에 번진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한 번만 키스해주면 안될까?”


   골목길의 끝에서 세나가 물었다. 어이없는 말이었다. 유우키가 얼굴을 찌푸리자 세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한 번만 그렇게 해주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게. 세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언제나 여유로운 ‘세나 이즈미’가 아니었다. 유우키는 그게 매우 낯설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세나는 장우산 손잡이를 꼭 잡아, 손가락 마디가 하얗고, 또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한번만, 이라고 조르는 목소리는 낮게 울렸다. 영화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우우키는 제 우산을 접고 세나의 투명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물방울이 묻은 투명우산, 그 위로 뻗어 내리는 주황색 불빛이 우산 안을 은하수처럼 만들었다. 바닥을 향한 유우키의 우산 끝에서는 빗물이 눈물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세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퍼져버린 홀씨 같기만 했다. 유우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아니, 정말로, 할 수 있어.”

   “거짓말.”

   “한번만.”


    유우키는 ‘한번만’ 이라는 말에 약했다. 세나가 잘게 내뱉는 호흡이 가까이 닿았다. 세나는 우산을 조금 높게 들었다. 가로등 빛이 내리는 투명우산 속에서는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느리게 도는 것 같았다. 한번만 이에요, 라고 대답하면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환하게 웃지 않았다. 어색하고 서먹했다. 다른 누군가가 세나 이즈미를 뒤집어쓰고,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절이 바뀌는 도중, 그 사이 속을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세나는 눈을 감았다. 유우키는 그의 속눈썹이 생각보다 길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후, 하고 숨을 불 때 파르르 떨렸다. 그는 그대로 세나의 얇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 향이 났다. 복숭아 향 같았다. 그가 바르는 립크림의 향일까, 생각하다가 노크하듯 굳게 닫힌 이를 톡, 톡 건드리면 세나는 입을 열었다. 호흡과, 호흡이 닿아 맺어져 서로의 숨이 되었다. 세나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유우키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는 혀를 섞었다. 곧은 치열을 쓸다가, 다가온 혀를 장난치듯 움직이자, 세나는 작게 떨었다. 인중에 닿는 숨은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 희미한 감촉을 끌어안지 않는다면 흩어져버릴 것 같이 불안했다. 호흡을 교환하고, 숨을 맞추는 그 순간은 유우키 마코토에게는 별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그에게 그 순간은 단순한 수단이었다. 세나 이즈미라는 귀찮은 존재를 잠시 재우기 위한 약간의 변덕. 그 뿐이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세나는 후련해보였다. 어째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뭔가를 놓아버린 것 같았다. 느리게 부유하는 먼지우주처럼, 혹은 민들레 홀씨처럼 천천히 웃었다. 그는 유우키가 우산을 펼칠 때 까지 기다려주었다. 어차피 집으로, 가장 빨리 가는 길은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뒤를 돌았다. 어딜 가냐고 물었을 때 그는 편의점이라고 대답했다. 편의점에 가는 길은 그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우키는 잡지 않았다.


    비는 여백을 채우듯 내렸다. 유우키는 그 일이 별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나의 변덕에 어울려줬던 것뿐이었다. 그의 사랑인 듯, 사랑이 아닌 것 같은 집착에 휘말린 것뿐이었다. 그는 세나 이즈미의 ‘한번만’을 이기기 힘들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우키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했던 생각은 ‘아, 배고프다.’ 정도였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초콜릿 우유와 우유 빵을 샀고,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렸다. 세나의 표정이 신경 쓰였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는 내일 세나가 자신을 본다면, 당연히 인사 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물리나 수학 공식처럼 움직였다. 세계가 견고했음으로 깨질 일도 없었다. 유우키는 변함없이 세나를 밀어내고, 세나는 다가올 것이었다. 무조건적인 애정을 부담스럽게 느끼면서, 그가 보고 싶어 하는 ‘순수하고 천사 같은 유우키 마코토’는 더 이상 없다는 걸 가끔씩 확인시켜주면 될 일이었다. 달과 지구는 그렇게 마주보며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가까워지거나 멀어진 적이 없었다. 둘은 그 정도의 관계였다.

   그 정도의, 관계였어야만 했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


    세나가 인사를 하지 않은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유우키는 여전히 프린터물과 씨름하고 있었다. 멀리서 모리사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로 패스해! 라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는 3학년 A반이었고, 세나 또한 그럼 체육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얀 피부가 타는 걸 싫어했음으로, 그는 어딘가 벤치나, 나무 그늘, 혹은 건물 그늘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유우키는 3번 문제에서 또다시 고민했다. 남은 문제는 많은데, 시간은 남지 않았다. 시계의 분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날의 골목길이 계속 번져왔다. 세나의 뒷모습이 번졌다가, 다시 ‘한번만’이라는 목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밀물과 썰물, 해변가의 파도처럼 반복되는 일이었다. 유우키 마코토는 자신의 세계가 붕 뜨고 있음을 느꼈다. ‘유우키 마코토’라는 이름의 우주에 작용하던 중력법칙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붕 떠서, 먼 곳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그는 세나가 자신을 휘두르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 날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신경이 쓰였다. 마주쳤을 때, 세나는 인사하지 않았다. 대신 초연하게 웃고 꼿곳히 허리를 펴고 걸었다. 엇갈리는 시선이 너무나 싫었지만, 유우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첫 삼일간은 ‘편하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머지 4일간은 내내 불편했다. 없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나날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한숨이 늘어갔고, 눈가에 다크서클이 졌다. 몸 관리가 소홀한 모습을 봐도 세나는 그저 지나갔다.

    그 잠깐 사이에. 골목길의 끄트머리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그 사이에, 그는 홀씨처럼 변했다. 환하게 웃던 노란 꽃송이가 하얗게 새어버린 홀씨가 되는 것처럼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눈치 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속이 꼬였다.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주먹을 쥐고 가슴을 친다고 해서 해결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알고 있는 공식과 다르고, 법칙에서 달라져버린 문제를 유우키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십분 남았다.”


    교탁에 서 있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답답하게 다가왔다. 이 시간 내에 준비 된 문제를 다 풀어내는 건 무리라, 유우키는 손에서 돌리던 샤프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어차피 테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을 들어 창문을 열자 바람이 몰려왔다. 팬지가 죽어버린 화분에서 핀 민들레 홀씨들이 흩어졌다. 구체이던 게 반구체로 변했다. 유우키는 그 끝, 시선에서 세나를 발견했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양산을 받히고 서서, 축구를 관람하고 있는 듯 했다.

    노골적으로 바라보니, 시선이 닿았는지, 세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무시하듯 정면을 바라보았다. 유우키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의 히다카는 그의 3번 문제 여백에 공식을 적어주고 있었다. 자습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우키는 세나의 시선이, 높은 곳을 향하다가, 다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봐주고, 인사해줘요, 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을 쐈다.

    인사를 바라는 건 어리숙한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민들레 홀씨를 부는 사람은 그 홀씨가 어디로 가서 싹을 틔울지 신경 쓰지 않는다. 세나는 유우키 쪽을 힐끔, 힐끔 보다가 깊은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유우키는 저가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난이라면 악질이었고, 장난이 아니라면 그거대로 나빴다. ‘한번만’이라는 말로 사람을 잔뜩 휘둘러놓고 피하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우리’의 법칙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는 샤프를 잡아 돌렸다.

    샤프의 세계가 돌고, 돌았다. 유우키는 자신을 둘러싼 중력이 변해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우키 마코토라는 이름의 행성의 회전축은 일주일 전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향할 곳을 바꾸고 있었다. 눈치 챘을 땐 이미 민들레는 노란 꽃망울을 홀씨로 바꾸곤 한다. 유우키는 분한 마음을 담아, 남은 홀씨를 불었다. 그는 열린 창문 밖으로 날아간 씨앗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자꾸만 엉켜갔다.


    수업 시간,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여백이 찾아왔다. 샤프 소리도, 분침 소리도 작게 들리는 이 (사이)에서, 다시 바람을 타고 일주일 전의 세나 이즈미가 번져왔다. 이번에도 휘둘렸다. 휘둘려버리고 말았다. 유우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히다카가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말했지만, 그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소년을 둘러 싼 고민들은 모든 법칙에서 어긋나 있었음으로, 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규칙위반’을 중력으로 하는 세계가 움직였다. 교실에 있는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유우키 마코토는 제 회전축이 천천히 기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부유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초봄의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졸음을 잔뜩 담은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날이었다.


    봄이었다. 무른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