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멜랑콜리 키친 | 2016. 4. 13. 21:09
4.
밀푀유나베가 말했다. “다 카포”라고.
***
전골을 해먹기로 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여섯 시 경의 일이었다.
츠카사는 에코백을 들고 집 근처 마트로 향하고 있었다. 세나가 육수를 우려 놓는 동안, 작은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오늘은 토마토를 넣은 왜된장국과 만가닥버섯과 유부를 간장과 참기름에 졸여 만든 버섯조림, 우엉 카레 마리네, 고구마 고기말이 데리야끼와 표고버섯 젓갈구이를 먹기로 했었다. 저번 주 수요일에 머리를 맞대고 정한 메뉴들이었다.
전골을 먹기로 한 건 단순한 변덕이었다. 봄 치고는 날이 쌀쌀했고, 오늘은 진한 국물 요리가 당긴다는 츠카사의 말에 집주인이 전적으로 동의했다. 세나는 보기 드물게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서, ‘밀푀유 나베’를 할 거라고 선언했다. 그는 냉장고에서 다시마를 꺼내 1.5리터 정도 되는 물에 넣어 진하게 우리기 시작하더니, 그 물에 황태 대가리와 대파 뿌리부분 반 대, 멸치 한 주먹과 표고버섯 밑동을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그는 국물을 진하게 우릴 거라고 말하면서 기분 좋게 웃더니, 츠카사에게 에코백을 건네주었다. 집 근처 슈퍼에서 나머지 재료를 사 오라는 뜻이었다. 이제 집 근처 지리도 익숙하고, 집 비밀번호도 보지 않고 입력하게 되었으니 심부름 정도는 가도 괜찮지 않느냐는 말에 반박할 거리도 없었다. 츠카사는 입고 있던 잠옷 위에 낙낙한 후드 집업을 걸쳤다. 세나가 던져준 옷이었다. 옷은 한동안 꺼내지 않은 듯, 먼지 냄새가 묻어 있었다.
겉옷을 걸치자마자 쫓기듯 나갔다. 쥐고 있는 핸드폰이 여러 번 진동했다. 누구에게서 왔는지 확인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나는 냉장고 안을 확인 한 다음, 사올 물건들을 정리해, 메시지로 보내겠다고 했다. 츠카사는 에코백 속을 뒤적거렸다. 카드지갑이 손에 잡혔다. 그는 카드지갑을 목에 걸고, 손에 걸린 영수증들을 가지런히 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츠카사는 천천히 걸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노을이 보기 좋았다.
그러고보니 세나의 집은 동네 사람들에게서 ‘노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고 했다. 츠키나가가 말해 준 것이었다. 그는 세나의 집과, 세나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침에는 잘 일어나지만 저녁에는 쉽게 자울자울 하는 것을 알려준 것도 츠키나가였다. 텔레비전 심야 프로그램이 보고 싶으면 소리를 최소로 하고 보라고 조언할 때, 곁다리로 알려 준 말이었다. 츠카사는 그들이 상당히 친하다고 생각했다. 친한 친구와 가까이 살면서도 굳이 보러 가지 않는 것은 사적인 플레이스를 방해하기 싫은 마음에서일까. 츠카사는 뒷목을 긁적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는 츠키나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밀푀유 나베를 먹는데 오시겠습니까? 라는 메시지는 건방졌지만, 세나라면 츠키나가를 문전박대 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반가운 손님을 봄처럼 맞이해주지 않을까. 츠카사는 노을을 받으면서 걸었다. 길가에 심어져 있는 산수유의 꽃눈이 텄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었다. 그는 노을을 받은 꽃눈을 보고, 멈춰섰다가- 다시 움직였다가-를 반복했다.
슈퍼마켓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저번에, 츠키나가와 같이 왔던 곳이었다. 마트를 공유할 정도면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츠키나가는 세나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츠카사는 저가 ‘지금의 나이츠’의 멤버들에게 손을 벌리기 싫어하는 것처럼, 츠키나가도 자신의 기사에게 멋있게만 보이고 싶어 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들은 말해주지 않는 게 많았다. 츠카사는 하품을 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청경채 한 봉지」
「소고기(샤브샤브용) 500g 더 먹을 거면 더 사와도 괜찮」
「팽이버섯이나 느타리버섯 한 봉지」
「깻잎 두 묶음, 숙주 한 봉지」
「이 정도면 오케이. 면 먹고 싶으면 사리만」
세나의 문자 아래에는 츠키나가의 답장도 도착 해 있었다.
「갈게」
「과일 사가야 하나? 세나 뭐 좋아하지? 냉장고에 뭐 남아 있어?」
「잠깐만, 미안해 스오.」
「아직 세나한테 말 안했지?」
「미안해, 못 가」
「미안, 작업이 많아서 무리야 스오!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마감일이 당겨진 걸 까먹었어-!」
「앗, 잠깐, 이거 설마 날 납치하려는 외계인의 소행이 아닐까?」
츠키나가의 거절문자는 현란했다. 마감일도 잊고 살 만큼 정신이 없는 건가 싶었다. 츠카사는 괜찮다고 답장했다. 세나가 부른 거냐는 메시지가 바로 도착했고, 그는 자신이 부른 거라고 대답했다. 츠키나가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괜히 신경을 쓰게 한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석연찮았다. 그는 괜히 달음박질 했다. 마트가 머지 않았다. 에코백에 아직은 차가운 봄바람이 담겨 펄럭였다.
츠카사는 마트 안을 두리번거렸다. 심부름이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괜히 카트를 밀고 천천히 움직였다.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 갔다. 그는 과자 코너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서둘러 발걸음을 움직였다. 한 번 왔다고 물건이 놓인 자리가 얼추 눈에 익었다. 그는 야채 코너에서 청경채와 버섯들을 집었다. 그는 소고기 두 팩을 집고, 우동사리를 카트에 넣었다. 그는 카트 안을 살펴보았다. 아까 놓고 온 새송이버섯이 눈에 밟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 새송이버섯을 카트 안에 담았다. 그리고 잊을 뻔 했던 깻잎과 숙주를 넣었다. 포장 봉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츠카사는 아쉬운 듯 마트 안을 뱅글뱅글 돌았다. 곳곳에 놓인 과자 코너의 유혹이 심했다. 과자 한 봉지만 사 가도 괜찮냐고 먼저 물어볼 걸 그랬다고 혀를 끌끌 차면서, 그는 짠 감자칩과 말차맛 포키 두어 개를 카트 안에 담았다. 이 정도는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약속을 정할 때 군것질에 족쇄를 채우는 불합리한 조항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츠카사는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도착한 메시지가 보였다. 얼갈이배추, 이거 안 사오면 다시 가야 한다? 라는 말이 세나의 목소리로 읽혔다. 그는 서둘러 얼갈이배추를 집어 카트에 담았다. 계산을 하고 나와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발걸음이 가볍기 마련이었다. 묵직한 에코백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집으로 들어오니, 세나는 그의 에코백을 받아들면서 수고했다고 말했다. 부엌으로 나가갈수록 맛있게 끓고 있는 육수 향이 났다. 세나는 그새 양념장을 만들어 둔 것 같았다. 퍼지는 참기름 냄새는 과하게 고소했다. 그는 츠키나가를 초대했지만 거절당했다는 말을 하며 식탁 앞에 앉았다. 세나는 무언갈 곰곰이 생각하는 듯 말을 멈췄다가, 그러네. 바쁜 시즌이니까 어쩔 수 없네, 하고 말했다.
작곡가는 원래 이 시즌에 바쁜가요? 라고 츠카사가 묻자, 세나는 봄이니까, 라고 대답했다. 일단 하던 것을 마무리하려는 듯, 그는 장바구니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뒤를 돌았다. 그는 상추와 양파를 채썰어 두 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았다. 미리 만들어 뒀던 맛간장―간장과 야채육수, 맛술과 설탕, 자두액을 끓여 뒀던 것이었다.―을 열 번, 레몬 즙을 열 번 넣더니, 매실즙 두 큰술, 와사비 두 스푼을 넣어 소스를 만들었다.
세나는 다 만든 소스를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봄은 언제나 새롭기 때문에 새로운 사랑노래가 더 필요한 법이라고 말하면서 세나는 장바구니를 열었다. 그는 포키와 짠 감자칩을 보고서 얼굴을 찌푸렸으나, 뭔가 더 덧붙이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심부름을 했다는 것 자체를 대견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세나는 채소들을 씻었다. 그는 청경채부터 손질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큰 이파리들을 때어내고, 작은 이파리들은 봉오리채로 두었다. 깨끗하게 씻은 청경채가 소쿠리에 담겼다.
츠카사는 세나가 깻잎의 꽁다리를 서걱서걱 잘라내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도울 것이 없느냐고 물으며 가까이 다가갔지만, 세나는 알배추를 손질하면서 식탁 정리를 하는 게 가장 큰 도움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츠카사의 요리 솜씨를 전혀 믿지 못하는 듯 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츠카사는 에코백을 원래 있던 자리에 걸어놓은 다음, 식탁에 놓여 있는 우편물들을 가지런히 모았다. 세나의 작은 방, 그의 침대 위에 가져다 놓았다. 침대에 누워 있던 사자 씨가 얼른 달려, 거실에 있는 소파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갇혀 있던 모양이었다. 츠카사는 그의 방이 여전히 정리되어있지 않음에 놀랐다. 세나 이즈미가 사용하기 때문에 깔끔할 거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는 스노우볼이 놓여있는 협탁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스노우글로브를 흔들자 반짝이 가루들이 눈처럼 흔들렸다.
그는 스노우 글로브 아래에 있던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말-보로-레-드, 츠카사는 입을 열어 곽에 적힌 영어를 읽었다. 세나의 것인지 ‘그의 연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담배였다. 그는 담배 옆에 있는 라이터를 들었다. 담뱃갑은 열려 있었고 몇 개비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방에 담배 특유의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처음 왔던 날에는 맡지 못했던 냄새였다. 세나가 피웠을까, 츠카사는 당황한 채,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방문 밖으로 나갔다. 당황스러움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츠카사는 담뱃갑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발걸음이 쭈뼛거렸다. 어른이 담배를 피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세나 이즈미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여전히 가수였다. 연기 활동과 모델 활동을 주로 하긴 했지만 그래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세나는 츠카사가 아는 사람 중 직업윤리가 가장 투철했다. 그런 사람이 담배를 피워서 목을 혹사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같이 살고 있으면서 그런 것조차 캐치하지 못한 자신을 타박하며, 츠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말을 걸지 못한 채로 그는 머뭇거리다, 담뱃갑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세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알배추 위에 고기, 그 위에 깻잎 두 장과 청경채의 순서대로 탑을 쌓고 있었다. 숙주 말고 콩나물 사올 줄 알았는데- 앞으로 심부름은 카사 군에게 시키면 되겠구나? 세나는 드물게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노래를 하는 것처럼 리듬을 가지고 울렸다. 츠카사는 찝집한 마음으로 언제든 가겠다며 웃었다.
둘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네. 세나는 한 번도 둘이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그가 쌓아올린 밀푀유 나베의 재료들이 큰 칼에 서걱서걱 썰렸다. 냄비에 숙주를 담뿍 쌓고, 냄비 가장자리에 겹겹이 쌓았던 야채와 고기들을 둘러놓았다. 가운데 부분에는 다시 청경채와 표고버섯을 담았다. Marvelous! 비주얼이 훌륭하군요!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세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부엌에 딸린 베란다에서 가스 버너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식사매트 두장을 깔고, 그 위에 식기와 물컵을 가져다 놓았다. 식탁을 정리하며 분주하게 움직일 때 마다, 그 위에 올려둔 담뱃갑이 구석처럼 밟혔다. 츠카사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그 담뱃갑을 세나의 나눔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세나는 육수를 주전자에 옮겨 담았다. 혼자서 느끼는 폭풍전야였다. 츠카사는 으으, 하고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비켜, 냄비를 들고 있는 세나가 말했다.
휴대용 가스버너에 밀푀유나베를 내려놓은 다음, 세나는 의아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 하,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는 나눔접시 옆의 담배를 살펴보았다. 찬찬히, 섬세하게. 지금 이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싶어하는 눈빛으로. 그는 츠카사와 담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츠카사는 저가 아니라는 듯 두 손바닥을 세나에게 내보이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세나는 그게 ‘쇼’나 ‘퍼포먼스’ 라고
“카사 군, 담배 피우는 걸 이렇게 광고하지 않아도 좋은데.”
세나가 말했다. 그는 프로가 되려면 몸 관리부터 신경 써야 한다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말을 끊을 타이밍을 알 수 없었다. 노래하는 직업이라면 목도 당연히 관리해야하는 거 몰라? 카사 군, 머리 괜찮아? 폐포보다 뇌세포가 빨리 죽은 거야? 라며 쏘아붙이는 독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저, 이게 제 게 아니라요, 라고 겨우 변명을 하자, 세나는 꽤나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저가 츠카사의 학부모라도 된 양 생각하는 듯 했다. 우리애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면 어쩌지, 라는 망상이 그의 굳은 표정에 단단히 담겨 있었다. 카사 군 삥 뜯겨? 500엔 주고 과자 한아름 사온 다음 400엔 남겨오라고 하는 애들 있어? 그런 불합리한 걸 당하고 있는 거야? 담배 셔틀까지 시키는 거니? 세나는 거침없이 물었다. 사람 말을 좀 들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치자, 세나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제 담배가 아닙니다!”
“그럼 너 말고 이 집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제게 아니라 세나선배 겁니다!”
“하아?”
“선배야 말로 담배 피우지 마십시오!”
세나는 불퉁한 얼굴을 하더니 담배를 식탁 구석에 던져두었다. 둘은 식탁에 마주 않았다. 부탄가스를 내리고, 버너의 불을 켰다. 세나는 따듯하게 끓인 육수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부었다. 그는 면을 잊었었다는 듯, 츠카사가 사온 우동사리를 풀어 그릇에 담아 올려두었다. 츠카사는 여전히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찾았어? 라는 질문이 오기 까지, 그들의 세계에서는 침묵이 맴돌았다. 뜨거운 육수를 넣은 탓인지, 금방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왔다. 츠카사는 그의 질문에 스노우글로브 아래, 라고 대답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하며 눈치를 보자, 그는 말하지 못할 건 딱히 없다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츠카사는 수제 피클을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하고, 톡 쏘는 맛이 났다.
“협박용이야.”
“협박이요? 넘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넜습니까?”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래.”
“사체? 용달? 떼인 돈 대신 받아 드립니다?”
“무슨 소리야. 세나 이즈미라고? 그런 거 할 리가 없잖아. 애초에 같이 식사하는 것부터 영광으로 알아야 할 정도라구?”
냄비가 끓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세나는 그의 나눔접시를 받아 국물과 함께 고기와 야채를 덜어 주었다. ‘밀푀유’ 하나가 없어질 때 마다 밑에 깔려 있던 숙주가 포로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제 접시에 숙주와 버섯, 약간의 국물을 덜어 놓은 세나는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여전히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긴 피워.”
츠카사는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포지티브한 활동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너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 다는 듯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운동을 더 하십시오, 라고 주장하는 츠카사를 보던 세나는 제 나눔접시를 바라보다가 얼척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인인데 담배 몇 대 피워도 괜찮은 거잖아? 애초에 평소에는 절대 입에도 안 대고? 세나는 버섯을 양념장에 넣어 푹 적신 다음, 상추와 양파와 함께 들어 올렸다.
그는 입에 들어 있는 것을 꼭꼭 씹었다. 억울함을 끊어 넘기려는 듯 했다. 츠카사는 제 나눔접시에 들어 있는 고기를 기름장에 찍었다. 숨이 죽어 나른해진 배추를 간장 양념에 푹 적셔, 기름장에 찍은 고기와 함께 입에 넣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전골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겹쳐 들렸다. 세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걔 때매 스트레스 받을 때만 한 두 번 씩 피워.”
“협박용이란 건 그럼”
“걔는 내가 왜 피우는지 언제 피우는지 알고 있거든.”
“그게 협박이 됩니까?”
“알고 있으니까 무서워하는 거지.”
주제에 내가 사랑해주지 않는 건 더럽게 무서워해. 걔는 내가 지쳐버릴 까봐 무서워하는 거야. 지금 이 같잖은 가출 쇼도 결국은 내가 돌아왔을 때 세나가 날 싫어하면 어쩌지? 라는 멍청한 생각에서 비롯 된 거지. 이상한 버릇이야. 세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말은 꼭 ‘걔’를 사랑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들렸다. 츠카사는 그의 사랑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여러 성격을 집에 비유한다면 신뢰는 기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나의 연인인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은 세나가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며,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더 이상 못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계속 가출을 하는 행위도 츠카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의 사랑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왜 그런 협박을 하는 데요? 소년의 질문에 세나는 코웃음을 쳤다. 질문 자체에서 풋내가 풀풀 풍겼다.
그러면 나한테 돌아와줄줄 알았지. 근데 화를 내면 낼수록 불안해하는 걸 어떡해.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만큼 기다리기로 했어. 세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헤어진다면서요, 라고 굳이 사족을 붙이는 소년에게 세나는 오늘은 그런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형태일까. 츠카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어른스러운 척 다 하던 주제에 결국 카사 군도 어린애네, 세나는 방긋방긋 웃었다.
그럼 담배를 놓아두기만 하는 게 협박의 끝입니까? 츠카사가 물었다.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국자로 냄비 안을 휘휘 젓다가, 불의 세기를 줄였다. 맹렬하게 보글보글대던 냄비가 잠잠해졌다. 그는 조금 졸아든 육수를 확인하고, 주전자에 담겨 있던 육수를 담아 높이를 맞췄다. 냄비 안에 있던 재료들이 찰랑찰랑하게 떠올랐다. 츠카사는 졸아든 마음에 사랑을 채워 다시 끓인다던 노래 가사를 떠올렸다. 작년 겨울 끄트머리에 차트 인 했던 곡이었지만 제목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세나는 음, 하고 말을 다셨다. 그는 예전 기억을 천천히 더듬는 듯 했다.
“가끔 던지기도 해.”
“네?”
“걔가 오면 보이는 데다 전시 해 놓긴 하지만.”
“세나 선배답지 않게 소극적이라 놀랐습니다.”
“사랑하면 원래 물러져.”
걔가 날 좋아해서 불안해하는 거라 어쩔 수 없지 뭐. 세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그럴 때 마다 안심이 간다고 말하는 표정은 잔잔한 수면 같아서, 츠카사는 그의 사랑법이 조금 ‘이상하다’고 지적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비틀려 있는 쌍방향 화살표였다. 서로를 향해 있지만 꼬이고 꼬여, 직관적으로 알 수 없는 화살표. 츠카사는 세나가 ‘그녀’를 마주보고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그릴 수 없었다. 사랑에 져 주고, 언제나 헌신적인 세나 이즈미를 보고 있으면서도, ‘사랑해’ 라고 말하는 세나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없는 부엌에서 요리하는 세나만 봐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츠카사는 어렵네요, 라고 중얼거렸다. 세나는 사랑은 언제나 어렵다고 대답했다. 마음과 마음이 맞아서 사랑하는데도, 그 모양은 사람마다 천지차이라고 말하던 그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츠카사는 고개를 숙이고 얼른 버섯을 먹었다. 간장 양념의 짠 맛과 버섯의 부드러운 맛이 입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세나는 그 모습을 감흥 없이 보더니, 카사 군은 예쁜 사랑을 할 거야- 라고 확신을 하듯 강하게 말했다. 부연 설명을 요구하기 힘들 정도로 당연하다는 듯 건너온 목소리에 진지하게 대답할 수 없어, 츠카사는 자신이 나중에 결혼을 하면 부케를 받아달라고 농담처럼 말을 걸었다.
“그거 내가 그 때 까지 결혼 못 한다는 소리지?”
“제가 일찍 할 수도 있죠.”
“도련님이라서 정략결혼이라도 하는 건가?”
“그러게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무섭습니다.”
“도련님도 고생이라니까.”
세나는 냄비 속을 휘휘 저었다. 처음의 규칙적이고 균형적이던 모습이 흐트러졌다. 사랑은 냄비 안에서 끓는 나베와 같다고 말한 게 누구 노래였죠? 츠카사는 흐트러지는 고기들을 보다가 물었다. 세나는 숙주와 고기 조금, 알배추를 제 나눔접시에 담으면서 왕님 노래, 하고 대답했다. 작곡가가 츠키나가 레오가 아니었는데요, 라고 말하자, 세나는 장르에 따라 쓰는 이름이 다르다고 말했다.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걸 다 외우고 있습니까?”
“아니, 노래가 지문이잖아.”
“전혀 몰랐는데요?”
“그런가?”
“세나 선배와 리더는 의외로 많이 친하신 것 같습니다.”
“기분 나빠. 완전 짜증나.”
세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전골을 먹었다. 할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갈 때 쯤, 세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가지러 갔다. 츠카사는 빈 앞자리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혼자보다는 둘이 좋다. 그는 잠시 식사를 멈추었다. 그는 괜히 냄비 안을 휘휘 저었다. 세나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더니,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해, 조리대 위에 있는 콘센트에 꽂았다. 라디오 튼다? 라는 말에 네, 라고 서둘러 대답하자 세나는 귀찮은 일이 생겼다고 투덜거렸다.
“점심, 저녁, 밤으로 나눠서 ‘홍월’ 특집이래. 완전 짜증나.”
“홍월이요?”
“컴백 준비한다나봐. 갑작스럽게 잡혔으니까… 미리 대본은 못 보내주고, 전 타임 방송 조금이라도 듣고 오래.”
세나는 핸드폰의 볼륨을 올렸다. 일요일 저녁, 그리고 하스밍입니다, 홍월의 칸자키 소마 군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잠시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일요일 저녁의 사근사근한 행복을 그대에게. 라는 하스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게스트가 오는 날이 아닌데 두 배로 귀찮아지겠다고 말하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밤에 하는 거 안 힘드십니까? 츠카사의 질문에 세나는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말했다.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생각보다 괜찮다는 말에,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츠카사가 메이저 데뷜 하면 바로 게스트로 부를 거라고 말했다. 답지 않게 상냥한 목소리였다. 가끔씩 세나는 이렇게 ‘선배 같을’ 때가 있었다.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하게 졸아든 냄비에 다시 육수가 가득 채워졌다.
―「일요일 저녁, 그리고 하스밍입니다.」의 2부입니다. 홍월의 칸자기 소마 군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두근두근, 사랑이 넘치는 연애상담 코너입니다. 이런 코너를 칸자키와 함께 하는 것도 어색하기 그지 없군요.
―하스미 공은 연애 해 보신 적 있소이까?
―칸자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하나도 안 들리는 군.
―라디오를 하시면서 능청이 느셨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만담처럼 들렸다. 세나는 숨이 폭싹 죽은 배추를 입에 넣었다. 첫 번째 사연은 짝사랑을 하고 있는 스물두 살 청년의 이야기였다. 작은 바를 운영하고 있다는 청년은, 같이 바를 운영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인 그녀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걸 멈출 수 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츠카사는 라디오를 듣는 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묘하게 나른해 보였다.
졸리십니까? 하고 묻자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냥 웃겨서, 라고 대답했다. 고기는 슬슬 질긴 맛이 나고 있었다. ‘맛있을 때’를 지나고 있는 고기가 아쉬워 얼른 나눔접시로 건져두자, 세나는 더 먹으라면서 국물 위를 유영하고 있는 고기들을 떠 츠카사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하스미와 칸자키는 스물두 살 청년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하면서, 일단 그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며 응원을 전했다. 세나는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방송이란 건 참 웃기지.”
“왜 그러십니까?”
“짝사랑 한 번 밖에 못 해본 애한테 연애상담 코너를 맡기고 말야.”
세나는 하품을 했다. 그는 청경채를 양념에 푹 절였다. 몇 조각 남지 않은 양파와 상추 조각들이 청경채에 담겨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아삭아삭’하던 소리를 잃어버린 채 우직하게 씹히는 맛이었다. 세나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연애 초보자들이 조언하는 연애 라디오가 도움이 될 리가 없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름대로 절박해서 사연을 보내는 걸 텐데 말야, 라고 하면서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세나 선배는 도움이 되시는 편입니까? 츠카사는 흥미롭단 목소리로 물었다. 세나는 으음, 하고 목소리를 다시더니, 그다지, 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연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츠카사와 마주보고 식사를 하고 있진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는 모든 DJ들이 주변의 연애담을 바탕으로 상담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래도 세나 선배는 여러 가지 추억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
“칵테일바라던가, 지금 동거하시는 분이라던가, 오르골이라던가….”
“너 완전 짜증난다.”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으시는 분이 하는 연애상담이라면 믿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 츠카사는 고기를 먹었다. 그는 세나의 추억이 모두 한 사람과의 것인 게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유우 군’에게도 제법 순정파였던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츠카사는 세나의 동거인이 ‘유우 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가 얼른 생각을 접었다. 그에게도, 세나에게도 실례인 생각 같았다.
츠카사의 양념장에는 양파와 상추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나는 야채를 잘 먹어야 한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남겨둔 야채들을 그의 간장에 적셔 주었다. 하스미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여전히 사랑에 대한 이야길 하고 있었다. 여러 번 고민해서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사랑이고, 여러 번 눈길이 가는 게 멈춰지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죠. 중요한 건 타이밍이에요.
마음이 확신 됐으면 일단 타이밍을 잘 보라고 말하는 하스미는, 고백은 도전이 아니라 확인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아직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칸자키는 하스미 공은 언제나 멋있는 말을 잘 한다면서 박수를 쳤다. 마이크를 타고 퍼지는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면 먹을래? 그는 건더기가 거의 남지 않은 냄비를 휘휘 저으며 물었다.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동 사리가 면에 녹아들 듯 흘러 내렸다. 세나는 국물을 휘휘 저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카사 군은 대식가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 나눔 접시에 들어 있는 국물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조금’ 걱정된다는 듯, 억지로 먹지 않아도 괜찮다면서 대답 해 왔다. 츠카사는 저도 제 양을 잘 알고 있으며, 남기는 거에 죄책감이 없다고 장난스럽게 대답해왔다. 나이를 먹더니 능청맞아졌다는 감상과 함께, 세나는 턱을 괴었다. 그는 버너의 불을 올렸다. 국물에 보글보글, 기포들이 올라왔다.
“새삼스럽게 말하는 거지만 세나 선배가 해주는 건 모두 맛있습니다.”
“당연하지. 세나 이즈미라구?”
“정말 맛있습니다. 하루하루 도시락 여는 게 기쁠 정도로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자취해서, 요리는 익숙하다구.”
세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반짝반짝거렸다. 자췰 하면 다들 사먹는다고 하던데, 라는 츠카사의 말에 세나는 체중관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스미와 칸자키는 두 번째 사연을 읽고 있었다. 사랑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그들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이야길 나눠갔다. 그들의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츠카사는 그에게 첫사랑에 대한 이야길 해달라고 말했다.
“카사 군부터 하면.”
“팬 여러분들이 첫사랑입니다.”
“하아? 그런 준비된 대답 말고.”
“정말로 팬 여러분들이 첫사랑입니다.”
츠카사는 자신의 청춘에는 그런 버라이어티하고 반짝이는 경험이 적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는 츠카사의 나눔접시를 받아 우동 면과 국물을 덜어주었다. 세나는 무언가를 되짚어보는 듯 했다. 첫사랑, 첫사랑, 그는 입 속에서 그 단어를 굴렸다. 카사 군 제법 불쌍한 삶을 살고 있네 안즈와는 가망이 없잖아?, 세나는 장난스럽게 물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츠카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찌 됐든 지금에 만족한다는 제스쳐였다.
“1학년 때…였나.”
“1학년이요? 유메노사키?”
“우리 집이 아지트였어. 자취 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어서.”
“지금 애인 분이십니까?”
“그런 건 알 거 없고. 첫사랑이랑 지금 사랑이랑 다를 수도 있다구?”
“우우…….”
로망이 크네, 라고 말하며 세나는 푸스스 웃었다. 그는 1학년 때 자신의 집에 ‘걔’가 자주 놀러왔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친구랑 같이 오더니, 날이 갈수록 혼자 오는 날이 늘어났으며, 올 때 마다 빈손으로 놀러왔다고 말했다. 그는 물을 마셨다. 첫사랑은 참 신기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잖아. 세나는 물을 두어 모금 더 마시고서야 말을 이었다. 그의 첫사랑은 유키 구라모토의 ‘last summer’처럼 잔잔한 음악 같았다.
그는 ‘걔’가 언제나 저녁을 먹고 갔다고 말했다. 나는 안 먹는데 왜 니 저녁을 준비 해 줘야 하느냐고 물을 때 마다, ‘세나는 해 줄 거야!’ 라고 대답하는 게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면서, 그는 어설프게 웃었다. 하지만 그 풋내 나는 표정만 봐도 그가 걔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츠카사는 볼을 긁적였다. 괜히 저가 간질거렸다.
고등학교 1학년, 막 자취를 시작했던 세나 이즈미는 요리를 못하던 소년이었다. 그는 점심은 편의점 도시락 반절, 저녁은 아예 먹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만들어도 먹는 건 그 애 뿐이었다고 말했다. 세나는 지금 이 시간에 뭔갈 먹는다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우동 면을 먹었다.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라는 질문에 세나는 글쎄, 하고 얼버무렸다.
재료 손질법은 엉망. 요리 순서도 엉망. 어떤 걸 먼저 넣어야 하는 지도 모르던 어린 세나 이즈미의 결과물은 언제나 맛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그걸 꿋꿋하게 먹고 갔다고 말했다. 세나는 걔가 다음 날 아침에 연락을 받지 않으면 ‘드디어 이상한 걸 먹고 병원에 실려갔구나.’ 라고 생각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이어지던 풍경은 세나 이즈미 소년의 일상이 되었다. 귀찮음이 가득하던 일상에 점점 설렘이 담기는 걸 들으면서 츠카사는 눈을 반짝였다. 세나는 그 표정이 짜증난다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 끓어 오른 냄비를 확인하다, 불을 껐다.
“지금 생각하면 거기서부터가 첫사랑이다 싶지.”
“첫사랑이 아닌 줄 아셨습니까?”
“사랑에 빠진 순간은 거기가 아니라서.”
“설레네요. 세나 선배 치고 훌륭합니다.”
“카사 군은 언제나 건-방-진-걸?”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을 올리거나, 볼을 꼬집지 않았다. 그는 기운이 없어보였다. 그의 사랑은 담담하며 답답했다. 레이디께서는 다른 학교 분이셨나 보군요. 츠카사는 안즈가 전학 오기 전 학교의 이름을 들었는데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세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여자애라고 했어? 라고 묻는 소리에 츠카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나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화의 맥락을 놓쳤나 싶어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여자 애라고 했어? 세나가 다시 물었다. 츠카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이, 어디가 이상한가요? lady께서 요리가 서투르셔서 세나 선배께서 하셨던 게 아닙니까? 츠카사는 의아함을 가득 담아 질문했다. 어색함이 흘렀다. 카사 군한테 말 안했었나? 세나의 목소리에는 ‘그럴 리가 없을 텐데’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츠카사는 물컵을 들어 입에다 가져갔다.
“나 게이야.”
츠카사는 사례가 들린 듯 기침했다. 콜록, 콜록, 거리는 소리가 연신 이어지자 세나는 그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츠카사는 천천히 물을 삼켰다. 아무튼 게이라고. 세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참고로 요리는 나보다 걔가 더 잘했을 것 같은데. 양파를 쓸 때 생으로 쓸 거면 물에다 매운 기를 빼고, 볶으면 단맛이 난다고 알려준 건 걔니까. 세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츠카사는 기침을 멈추고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걸 들어버렸습니다.”
“그런가, 아무튼 요리는 걔가 더 나았어.”
“그렇군요.”
“응, 아무튼 그 엉망인 걸 계속 먹어줬지. 불평을 한 건 처음에 딱 한번이었는데, 그 때도 밀푀유 나베를 했었어. 그럴싸한 건 모양뿐이라는 말을 들었었던가.”
갑작스러운 커밍아웃 따윈 상관없다는 듯, 세나는 ‘그 애’가 했던 말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 말을 듣는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츠카사는 제 그릇에 남은 면을 호로록, 먹었다. 세나는 아무튼 ‘걔’는 굉장히 신기한 녀석이었다는 말로 말을 끝냈다. 그 ‘신기함’의 근거는 그렇게 맛없는 것을 먹였는데도 끊임없이 찾아와서 저녁을 해달라고 졸랐다는 사실이었다. 츠카사는 국물을 마시고, 다시 물을 마셨다.
“리더처럼 버릇없는 사람이군요.”
“그렇지.”
“세나 선배 근처에는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네.”
“아무튼, 기다리는 게 지루해졌을 때 ‘좋아할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지만.”
사랑에 빠진 순간은 훨씬 나중이야. 세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재미없는 사랑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라고 못을 박았다. 츠카사는 ‘일상적인 짝사랑’이네요, 라고 코멘트했다. 세나는 그러네, 하고 웃었다. 힘이 빠진 미소였다. 하스미의 라디오의 연애상담 코너는 두 번째 사연에 대해 아직도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나와 츠카사는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빈 그릇들을 앞에 두고 피식 웃었다.
츠카사는 그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유우키 마코토’이고, 첫사랑은 그와 다른 사람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 때의 유우키라면 세나의 집에 매번 찾아가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제 앞에 놓인 그릇들을 정리했다. 세나는 기지개를 펴다. 이 이야기 내가 아는 사람인가요? 츠카사의 질문에 그는 글쎄? 하고 대답했다. 최근 눈치 챈 것이지만 세나는 불리하거나 곤란한 말에는 언제나 ‘그러게?’ 따위의 말로 회피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글쎄는 ‘멋대로 생각하던가’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츠카사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 물었다. 세나는 여전히 ‘글세’ 라는 말로 답변했다. 치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니 ‘어른은 원래 그렇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라도 얼른 자라야겠다고 투덜거렸다. 세나는 그릇을 개수대로 옮겨 놓고서, 어른은 후식 안 먹는데? 라고 물었다.
“오늘 dessert는 뭔가요?”
“캬라멜 맛 과자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어쩔 수 없군요. 오늘만 어린애 하겠습니다.”
“내일도 어린애면서. 말은 잘해요.”
츠카사는 세나가 그릇을 옮기는 것을 도왔다. 하스미의 라디오에서는 두 번째 사연을 길게 이야기 하느라 세 번째 사연 전에 잠시 광고와 신청곡을 듣고 오겠다고 양해를 구하는 하스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정확하시던 분께서도 돌발 상황에는 어쩔 수 없군요, 라고 말하자 세나는 라디오에 어떤 사연이 들어올지 잘 모르니까, 하고 말하면서 식탁을 닦았다.
―이번 노래는 소인이 소개하겠습니다.
―칸자키에게 맡겨도 괜찮을 진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 말 후에 작게 웃었다. 어서 광고를 틀라는 막내 작가 누님의 콜이 있었음으로 어서 소개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칸자키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이 묻어 있었다. 홍월의 노래는 아직 발매 전이라 틀 수 없다는 농담이 오갔다. 츠카사는 원래 이 라디오가 이런 분위기인지 물었고, 세나는 칸자키가 왔기 때문에 하스미가 부드러워 진 거라고 대답했다.
―이번 주에 새로 차트인 한 노래입니다. 이 작곡가 곡, 요즘 꽤나 인기 있는 것 같지 않소이까?
―확실히 그렇군.
―「그대를 사랑해도 괜찮을까?」와 「계속」이라는 곡이오.
―신청곡 이후에 광고 듣고 다시 뵙겠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져 「일요일 저녁, 그리고 하스밍입니다.」라는 라디오 이름을 말했다. 서정적인 제목과 달리 빠른 비트의 락 음악이었다. 제목과 가사는 서정적으로, 음은 박력 있게 가져간 부분이 좋았다. 입에 자꾸만 맴도는 멜로디였다. 세나는 식탁을 다 닦고, 개수대 쪽으로 돌아가면서 하품을 했다.
“이것도 왕님 노래네.”
츠카사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세나는 오히려 그런 반응이 의아하다는 듯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들으면 티가 나냐는 질문에 세나는 음, 하고 물을 틀었다. 직감적인 것을 이해하도록 서술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듯 했다. 물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와 섞여 들렸다. 세나는 세제를 부드러운 스펀지에 묻혔다.
“글세.”
그릇이 물에 담겨 달그락거렸다. 저렇게 대답한 다음의 세나 이즈미는 아무런 부연 설명을 해 주지 않는다. 꼬치꼬치 캐 묻는 것도 취미가 아니라, 츠카사는 한숨을 내 쉬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자던 고양이가 캣타워에서 뛰어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고양이는 엉망인 털을 그루밍하다가, 츠카사에게 달려와 야옹, 야옹, 거리며 노래했다.
밥 달래, 세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느새 식모가 된 기분입니다, 츠카사는 그렇게 말하며 플라스틱 밥그릇을 꺼냈다. 고양이 사료를 그릇에 붓자, 고양이는 달려들어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세나는 설거지를 다 하고 나서 아이스크림을 꺼내주겠다고 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저녁풍경은 느리고, 또 느리게 흘러갔다.
세나가 출근을 위해 밖으로 나갈 때 쯤 츠카사는 오뎅꼬치를 흔들고 있었다. 만족할 만큼 식사를 한 고양이가 놀아주길 졸랐기 때문이었다. 아이스크림과 캬라멜 콘을 과하게 먹어서 팔 운동을 할 필요도 있었다. 오랜만에 고양이와 이해관가 합치한 날이었다. 그는 펄떡펄떡 뛰는 사자 씨를 위해 매너리즘 넘치는 손길로 오뎅꼬치를 흔들다가, 현관 쪽으로 나가는 세나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세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오늘 좀 빨리 나가네요? 보이는 라디오라서 그래. 게스트 올 때 마다 보이는 라디오 하거든. 세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는 앞당겨진 출근 시간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츠카사는 느리게 흔들던 손을 고양이가 때려 오뎅꼬치가 저 멀리 날아갔다. 그는 그것을 줍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세나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물었다.
“담배 좋아해요?”
세나는 왜 묻냐는 얼굴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완전 싫어해.”
그는 그 말을 남기고 현관을 나섰다. 혼자 있는 집에 흐르는 적막에는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츠카사는 얼른 오뎅꼬치를 주워 고양이에게 흔들었다. 사자 씨가 있는 공간을 제외한 모든 곳의 소리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소름끼치게 어색한 밤이었다. 츠카사는 오늘 세나의 라디오가 시작되면, 그걸 틀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양이 꼬리가 다시 좌우로 흔들렸다.
***
세나는 기지개를 폈다. 심야 라디오 DJ를 하는 것도 익숙해졌지만, 일요일 밤에 나오는 건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는 제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하스미를 바라보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어린애 같은 습성의 그가 어째서 심야 라디오의 게스트로 나오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점심 라디오에 나왔던 키류가 심야로 오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대본을 체크했다.
홍월의 신곡은 사랑노래인 듯 했다. 오프닝 멘트를 말한 다음, 게스트인 하스미를 소개하고, 그와 함께 ‘첫사랑’에 대해서 이야길 하라는 소리가 있었다. 점심의 키류가 일상적인 사랑을, 저녁의 칸자키가 첫눈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길 했다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자신이 이야기하기에는 ‘기다리는 사랑’이 가장 편한데, 세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제 첫사랑에 대해서 회상했다.
방송이었다. 모든 걸 여과 없이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는 말해야 할 부분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설레는 부분이 어디었을까. 그는 저가 사랑에 빠진 순간을 회상했다. 예전에 둘이 같이 나눠 들었던 이어폰에서 흘렀던 곡이 떠올랐다. 1/3의 순수한 감정. 언제나 라디오 오프닝과 클로징에서 함께 하는 노래였다. 그는 입술을 입 안으로 숨겼다. 세나 씨 안돼요, 립 지워져요! 라고 말하는 코디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미안합니다, 라고 사과하자마자 그녀가 달려왔다. 아직 카메라가 돌기 까지 5분 정도가 남았다. 보이는 라디오는 이래서 귀찮다. 게스트가 나올 때 마다 보이는 라디오를 하는 건 좋지만, 갑자기 준비하라고 하면 당황스럽다. 그는 앞당겨진 출근 시간을 생각하며 푹푹 한숨을 쉬었다. 홍월 측 매니저가 하스미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며 그를 깨웠다. 조금만 참고 힘내 봅시다! 라는 목소리를 들으며 하스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신을 힘들게 차리고 있는 게스트를 바라보며 세나는 혀를 끌끌 찼다. 하스미는 원래대로라면 4시간 후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세나는 그에게 첫사랑에 대해서 질문했다. 하스미는 대답하기 싫다는 듯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차피 있다가 말하게 될 거라면서 완전 짜증난다는 어투로 말하자, 하스미는 말하더라도 조금 있다가 말할 거라면서 대꾸해왔다.
하스미가 정신을 차리게 두고, 세나는 제 첫사랑의 ‘공개 범위’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 츠카사에게 말했던 건 말할 수 없다. 괜히 이상한 소문이나 루머가 퍼지는 건 사양이었다. 그는 ‘반절 식빵’에 대해 떠올렸다. 사랑에 빠졌던 순간은 그 때였다. 블루베리 식빵과 치즈 식빵. 1/2개씩 팔던 걸 동시에 먹고 싶었던 날이 있었다. 그 때 제 연인은 반절의 반절씩을 가져가면 오케이지? 하고 말했다.
세나는 참 손이 많이 간다니까! 라고 말하면서 웃던 싱그러운 미소. 여전히 그 조각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 여름의 햇살처럼 쨍하게 내리던 그 모든 모습을 천천히 반추하다가,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 할 시간이었다. 삼! 이! 일! 들어갑니다! 라고 외치는 막내 작가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샴셰이드의 ‘삼분의 일의 순수한 감정’ 반주가 흘렀다. 첫머리의 베이스 소리만 들어도 설렐 때가 있었다. ‘그 애’와 주구장창 들었던 곡이었다. 반절 식빵을 사러가기 전, 여름의 빈 교실에서도 이 노래와 함께 했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사랑의 울림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부담스럽다고 느끼기 전에, 한 걸음 다가와 주면 좋겠다는 기원을 담으면서 세나는 질리도록 말해왔던 오프닝 멘트를 입에 담았다. 앞에 있던 하스미는 마이크가 켜지기 전, 제 볼을 두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부스 안에 들어있는 카메라가 그의 모습을 여과 없이 담아내고 있었다.
“안녕, 밤입니다. 새로운 날의 시작,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날이 바뀌는 이 순간에도 마음에 담은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분이 계시겠죠, 세나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부스를 울렸다. 그는 대본을 천천히 읽었다. 처음이기에 더 지독하고 순수한 사랑에 대해 제 입으로 말하며, 세나는 그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 따라 더 사랑이 깊게 울렸다. 맛없는 밀푀유 나베를 앞에 두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목소리에 다카포를 하염없이 그려대고 싶었다.
오르골 소리가 냄비에서 타닥이는 채소처럼 번졌다. 제 사랑은 이미 다시 차오를 시간이 지나, 냄비 바닥에 눌어붙고 있는 우동 면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익숙함이란 무섭다. 잠시 딴 생각을 해도 버릇처럼 멘트를 내뱉게 된다. 그는 하스미를 소개하라는 문구가 적힌 스케치북을 흔들고 있는 막내 작가를 힐끔 바라 보았다. 홍월의 리더 하스미 케이토님을 모셨습니다, 라고 말하며 박수를 치자 맞은편에 있던 하스미가 네, 하스미 케이토입니다, 하고 대답 해 왔다.
자정 그리고 세나이즈입니다-라는 상투적인 오프닝 멘트에, 하스미는 덧붙여, 하스미 케이토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끝내자마자 둘은 웃음을 터뜨렸다. 간만에 만난 막역한 사이의 친구처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세나는 그의 안부를 물었고, 하스미가 그의 말에 대답하자, 갑자기 게스트가 편성된 것에 자신도 놀랐다며 말문을 텄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흐르고 이어져, ‘첫사랑’이라는 주제에 닿았다.
하스미 씨의 첫사랑이 궁금하네, 라고 가볍게 묻자 하스미는 첫사랑이라, 하고 고민하는 듯 말했다. 저쪽도 생각하고 생각해서, 공개할 부분에 대해 정해왔을 것이다. 세나는 저에게 ‘첫사랑’이라는 질문이 돌아온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확실한 것은 첫사랑에서 이어진 지금의 사랑은 그리움이 불맛처럼 진하게 스며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적절한 대답은 아니었다. 세나는 반절 식빵을 말해야 하나를 고민하면서, 하스미를 바라보았다.
‘사랑’에 대한 고민들이 냄비에 서툴게 쏟아버린 육수처럼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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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타인에게 적응하는 데는 2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습관과 생활방식을 관찰하고, 그것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것을 마치는 시간은 14일 정도가 필요하다. 그와 함께 산지도 벌써 이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스오우 츠카사는 세나 이즈미와의 동거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는 세나가 해주는 일본식 가정식에 익숙해졌으며, 이제 ‘좋은 미나리와 좋은 시금치는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사자 씨’가 좋아하는 간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건방진 고양이가 생각하는 집 안의 서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 고양이는 세나를 가장 위로, 자신을 중간으로, 스오우를 가장 아래로 두고 있었다. 더불어 스오우는 왜 그 고양이가 아침에 밥을 달라고 조를 때 마다 명치에 꾹꾹이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자 씨는 그를 완전히 물로 알고 있었다.
둘이서 하는 저녁식사에도 익숙해졌다. 다섯 시에 귀가하면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으며, 여섯 시에 귀가하면 세나는 견과류를 먹고 츠카사만 식사를 했다. 일곱시나 여덟시 이후에 들어오면 세나는 식사를 하는 그의 앞에서 녹차만 홀짝였다. 츠카사가 열 시에 집에 들어온다면 그는 물만 마시곤 했다. 또한 스오우는 세나가 귀찮을 때는 파스타를, 신경을 쓰고 싶을 때에는 여러 반찬을 내놓아야 하는 일본식 정식을 내놓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가출 후 이주 정도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오우 츠카사의 세계에는 그렇다할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부모님과 싸우고 있었으며, 나이츠의 ‘왕’이었다. 드림패스들을 순조롭게 치루며 여러 유닛들을 격파하고 있었다. 연속되는 라이브에도 이제는 지치지 않았다. 라이브 한 번으로 무찌를 수 있는 유닛들과는 달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꽤나 끈질겨서, 그의 투쟁은 장기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따듯한 밥이 나오는 집에서 기거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나가 아니었더라면 가출한 지 삼일 만에 뜻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츠카사는 세나에게 연결 해 준 츠키나가에게 감사의 뜻을 가득 담아, 얼마 남지 않은 용돈으로 과자를 선물했다. 봉지 과자들을 한아름 안겨줬을 때 봤던 츠키나가의 작업실은 여전히 복잡하고, 또 난잡했다. 그는 언제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듯 했다. 작업실에 딸린 방 밖에는 도시락을 포장했던 플라스틱 통들이 널려 있었다.
세나 선배네 집이랑 가까운데, 왜 거기서 얻어먹질 않느냐 물었더니, 츠키나가는 요즘 일이 쌓여서 한 발자국도 나가기 힘들다고 대답했다. 그는 요즘 여동생과 만날 때도 차 안에서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여 말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의 그는, 언제나 쾌활한 ‘츠키나가 레오’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에, 츠카사는 그에게 건강을 생각하면서 움직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달의 뒷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 그의 집에서 나오기 전, 츠카사는 문득 물었다.
―어른은 원래 이렇게 바쁜가요?
―아니, 인기 있는 어른이 바쁜 거지.
―세나 선배도 쉬고 있다면서 정기적으로 촬영 나가시는 것 같은데, 연예인의 ‘쉬다’는 학생의 ‘쉬다’와 다른 것 같습니다.
―세나 많이 바빠?
―라디오 하러 나갈 때 마다 피곤해보이십니다. 애초에 healing할 시간이 적어 보이구요.
제 속단일수도 있지만요, 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니 츠키나가는 세나에게 잘 해주라고 말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안 그래도 잘 하고 있다는 말에 츠키나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세나가 귀찮지 않게 작업실에도 자주 놀러오라고 권유했다. 집을 좀 치우시면 생각 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도시락의 잔해들을 바라보자, 츠키나가는 그렇다면 평생 놀러 올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며 쾌활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뒤로 하고 뒤를 돌자, 츠키나가는 간간히 외식을 하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말했다. 츠카사는 집밥은 세나에게, 외식은 츠키나가에게 하면 꼭 이혼가정의 아들 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고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별로 좋은 말은 아니었는지, 그 말을 들은 츠키나가의 표정은 매우 어두워졌다. 츠카사는 그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역시 ‘예술가’와 교제하는 건 불편한 일일 것이라 확신했다.
츠키나가 레오나 세나 이즈미나, 감정 변화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가끔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별 거 아닌 농담이나 말 한마디에도 쉽게 우울해하곤 했다. 어른이 된 사쿠마나 나루카미도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츠카사는 자신 만은 ‘정상적’이어야 한다고 다짐하며 츠키나가의 집을 떠나갔다. 이것이 지난 수요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토요일인 지금, 스오우 츠카사는 배가 고팠다.
점심에 먹었던 편의점 도시락이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에 밥상을 차려주면서 세나는 자신이 오후 두 시 쯤 약속이 있다고 선언했다. 자신은 미리 샵에 들렀다가 가고 싶으며, 그런고로 점심은 혼자 먹어야 한다는 말에 스오우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레는 만들어서 냄비에 담아 두었으니 점심에 데워 먹어도 되며, 간단한 밑반찬들은 냉장고에 있으니 꺼내 먹으라는 말에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세나가 나가고 끼니때가 되니 손 하나 까닥하기 싫었다. 카레를 데우자니 냄비 바닥이 신경이 쓰였고, 찬을 꺼내자니 뭘 어떻게 꺼내 어떻게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백엔짜리 동전 하나를 들고 편의점으로 갔다. 연어가 올려져 있는 덮밥 도시락 하나를 계산했다. ‘적당히’ ‘키치’한 맛이었다.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연어 덮밥은 조금 비렸다. 하지만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 꾸역꾸역 다 해치웠다. 평소 먹던 것과 양은 비슷하지만 어째 포만감이 적었다. 배를 꺼트리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팠다.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었지만 허기는 가시질 않았다.
사자 씨를 품에 안고 텔레비전을 봤다. 그는 채널을 유랑하다, 세나 이즈미가 나오는 프로그램에 멈추었다. ‘수요일’에 찍는다던 맛집 기행 프로그램이었다. 재방송이었다. 츠카사는 세나가 말해주던 본방 시간을 생각하면서 사자 씨의 귀 뒤를 긁었다. 세나의 파트너는 전 유성 레드 모리사와 치아키였다. 그들은 양꼬치에 얽힌 추억을 말하더니, 느긋하게 고즈넉한 분위기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숯불 위에 설치된 그릴에서 양꼬치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는 칭타오를 들고 건배했다. 세나 씨도 저도 술 세니까, 이 정도는 마셔도 괜찮습니다! 하고 치아키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은 양꼬치 스무 개씩을 먹어야 본전이라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츠카사는 빼지 않고 먹는 세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쩐지 수요일마다 거실에 있는 런닝머신을 지치지 않고 뛰며, 먹은 걸 모두 게워내고 싶어 하더라. 그는 사자 씨의 발을 조물거리며 화면에 집중했다.
한참 그릴 위에서 돌아가는 양꼬치와, 꿔바로우에 집중하고 있자니,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번호를 신경질적으로 입력하는 것을 보니, 이는 세나였다.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세나의 연인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츠카사는 사자 씨를 품에 안고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이놈의 뚱고양이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라고 묻자 세나는 어, 라고 대답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오늘 약속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츠카사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물었다.
“기분 완-전- 별로야. 짜증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는 아무 일 없다고 대답하면서도 샵에서 세팅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완벽했던 세나 이즈미는 서서히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는 츠카사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카사 군한테 화풀이하기 싫으니까 조금만 조용히 있자? 세나는 조용히 권유했다. 츠카사가 거실 텔레비전의 전원을 끄고 오자, 그는 겨우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도담거리며 착한 아이네, 하고 칭찬했다.
세나는 그 이후로 한 시간 내내 머랭을 손으로 치더니,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빵 반죽을 치댔다. 그러면서도 우울한지, 머랭 쿠키를 두 판을 굽고, 빵 반죽 여러 개를 휴지시켰다. 스테인레스 볼에 금속 거품기가 부딪히는 소리는 차갑고 아찔했다. 스오우는 그 어색한 소리를 들으며 그저 속도 모른 채 배를 발라당 까뒤집고 놀아 달라고 조르는 사자 씨에게 낚싯대를 흔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만들어 둔 머랭 쿠키를 츠카사 앞에 내려두고, 믹서기로 갈아 만든 딸기 주스를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사자 씨를 안고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나올 때 까지 부르지 말라는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조금만 건들면 부서지는 페스츄리 같았다. 그가 집 안에 떨어트린 부정적인 감정 조각들을 차마 주울 수도 없어, 츠카사는 그저 안방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건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구석처럼 있었다. 고양이를 데리고 들어간 세나에게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차라리 저녁을 나가서 먹고 올까 싶었지만, 리츠는 여전히 드라마 촬영 현장에 대기 중이었고, 나루카미는 그리스를 거쳐 프랑스에 있었다. 언제나 끼니를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운다던 츠키나가는 별일로 점심부터 약속이 있다고 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인 듯, 오늘은 츠키나가와 세나 모두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게다가 츠키나가 또한 꽤나, 곤란한 식사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츠카사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츠키나가에게 전화를 했을 때 그는 츠카사의 말은 하나도 듣지 않고 있었다. 정신이 온통 다른 곳으로 쏠려있는 듯 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인스피레이션이 끓어 넘친다더니, 우주가 저를 부르고 있다더니, 빈 부분을 망상으로 채우게 해달라는 부탁 또한 하지 않았다. 그는 ‘츠키나가 루카 앞의 츠키나가 레오’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 갭이 어색해 소름이 끼친다고 중얼거리자, 츠키나가는 문득
―살았다, 고마워 스오. 니 이야길 하면 되겠네! 고마워, 정말 좋아해!’
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츠카사는 맥락도, 상황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오늘 츠키나가가 ‘곤란한’ 상황에 있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 전화를 핑계로 어색한 자리를 잠시 빠져나와 숨통을 틔었던 걸까 싶어서 안쓰럽기만 했다. 전화는 곧 끊어졌다. 망상으로 채워가는 빈 공간은 나름대로 타당하게 보였다.
세나는 여전히 방 안에 있었다. 저녁 식사에 대해 고민하면서 츠카사는 핸드폰에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그는 컵라면을 먹는 게 좋을까 생각했다. 세나의 집 찬장에 쌓여있는 걸 몇 개 정도 봤던 것 같았다. 세나의 집에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그게 ‘연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가긴 했다. 츠카사는 혼자 밥 먹는 법을 스마트폰에 쳐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서걱서걱한 기분이었다. 그는 하릴없이 핸드폰을 뒤적였다. 그는 못 보고 지나친 메시지들을 하나하나 열어보기 시작했다. 츠키나가로부터 라인이 와 있었다. 열어서 확인하니,
「세나 잘 있어?」
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와 있었다. 지금 장난 아니에요, 라고 대답할까 아니면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츠카사는 핸드폰 화면을 잠갔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나의 상태는 정말로 심각해 보였다. 언제나 이성적인 세나 이즈미는 조각난 지 오래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방에 박혀 있는 건 처음이었다. 때문에, 스오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한 말을 해서 츠키나가의 마음을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기도 했다.
친한 친구와 자신이 동시에 ‘깨진’ 느낌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답답할 것이다. 츠키나가는 위로가 필요할 것이고, 세나는 그 ‘위로’에 적당한 상대가 아닐 것 같았다. 그렇기에 츠카사는 그 메시지에 답장하는 것을 잊은 척 하기로 했다. 그는 핸드폰을 잠갔다. 여전히 세나는 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모든 물건이 어질러진, 혼란스러운 우주 안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간간히 울리는 고양이 소리와 망상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세나는 츠카사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에 비해서 츠카사가 알고 싶어 하는 게 많을 지도 모른다. 이런 밤에는 홀로 답답해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무력하지만 별 수 없었다. 세나 이즈미의 사이클에 스오우 츠카사가 모두 들어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다리를 쭉 펴고, 소파에 누웠다. 멀지만 가까웠고, 가깝지만 멀었다. 배가 고팠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 틈에서 사자 씨가 가장 먼저 튀어 나왔다. 그 고양이는 매우 뚱한 표정을 짓더니, 꼬리로 바닥을 팡팡 내리쳤다. 그는 츠카사의 무릎 위로 올라가, 또아리를 말고 몸을 웅크렸다. 저 돼지 고양이는 자기 밥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는 줄 알고? 라고 투덜거리는 세나의 목소리는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는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를 음음, 하고 가다듬었다.
“배고파?”
세나는 눈가를 비비며 물었다. 츠카사는 그의 벌개진 눈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해다. 대신 그는 연어 구이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세나는 그 대답이 꽤나 흡족한 듯, 천천히 부엌 쪽으로 다가갔다. 아직 그를 울린 일에 대해서는 물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건 그 ‘타이밍’을 잘 잴 수 있다는 뜻이다. 츠카사는 천천히 기다렸다. 사자 씨는 츠카사의 허벅지 위에서 기지개를 폈다.
고양이 밥 좀 줘, 라는 말에 츠카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나는 쌀을 씻었다. 그는 쌀 씻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양이 밥을 꺼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밥그릇에 사료를 쏟으니, 도도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고양이가 한 달음에 달려와 사료 그릇에 입을 댔다. 까드득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츠카사는 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앞치마도 하지 않은 채 쌀을 벅벅 씻고 있는 그는, 한 뼘 만큼 외로워 보였다. 세나는 밥솥에 밥을 앉히고,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밑반찬부터 다 만들 거라서 시간 걸릴 거야, 세나는 그렇게 통보했고, 츠카사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세나의 등은 말랐고, 도마 위에서 들리는 칼소리는 규칙적이었다. 그는 당근을 썰었고, 미리 채 썰어져 있는 곤약을 찬물에 두어 번 씻었다. 그는 냉장고 안에서 불린 콩과 톳을 꺼냈다. 츠카사는 식탁에 앉아, 그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세나는 요리할 때 꼭 회색처럼 된다. 무언가를 갈구하듯 ‘색’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명도 밖에 가지질 못한다. 오늘 점심 약속 괜찮았어요? 츠카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톳을 물에 씻던 세나는 천천히 수도를 잠갔다. 물소리가 쪼르르 들리다가 이내 그쳤고, 그는 뒤를 돌아서 츠카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가 내뱉는 그냥, 괜찮았어- 라는 말은 ‘완전 짜증나’ 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톳을 다 씻을 때 까지 세나는 말 한마디 하질 않았다. 그는 팬을 꺼내 참기름을 두르고, 당근을 넣었다. 당근을 달달달 볶다가, 톳과 곤약을 넣고 다시 볶기 시작했다.
물에 불려 삶은 콩을 넣을 때 쯤, 세나는 입을 열었다. 오늘 그 사람을 만나고 왔어, 라고. 츠카사는 그가 말하는 ‘그 사람’이 애인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라고 묻고 싶었으나 입을 꼭 다물었다. 시야 끝에 걸리는 곳에서 사자 씨는 기지개를 폈다. 세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달궈진 팬에 물이 닿아 치지직 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등어랑 연어 중에 뭐가 좋아?”
“연어요.”
“그래.”
세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는 한동안 조리대를 두 손으로 잡고, 조리대를 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카레를 할 걸 그랬나 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는 목소리가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게 힘이 들어, 츠카사는 그의 부엌을 살폈다. 이주 동안 계속 살펴왔던 풍경이었고, 눈에 익어가는 모습이었다. 밖에 나와 있는 그릇들은 모두 두 벌이었다. 그는 파란색으로 무늬가 들어간 접시들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찬장 너머로 보이는 찻잔도 두 개, 물컵도 두 개였다. 그의 집은 ‘둘’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우주였다. 츠카사는 세나의 취향이 진하게 들어가 있는 부엌 또한 회색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연어가 구워졌다. 연어를 먹은 다음에는 차갑게 식힌 토마토를 먹는 게 세나 이즈미의 관습이었음으로, 오늘 후식은 설탕을 자작하게 뿌린 토마토일 것이었다. 츠카사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사람이 말하지 않는 빈 공간을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채웠다. 사자 씨는 집 안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녔다. 꼬리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렸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 하듯 조잘거렸다. 주황빛에 가까운 노란 털들은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조용히 해, 라고 말하는 세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하는 고양이는 얄밉기만 했다.
그릇들은 어색하게 달그락거렸다. 세나는 두 명 분의 식사를 두 개의 그릇에 담았다. 그릇들은 짝을 이루고 있었다. 완벽하게 같은 그릇은 아니었다. 색이 같고 무늬가 다르거나, 무늬가 같고 색이 다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두 그릇은 ‘세트’라는 이름으로 묶이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을 위해 준비 된 세계, 츠카사는 저가 그 공간에 버릇없이 발을 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하여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인생의 문제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해결하고 싶으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는 일단 미뤄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츠카사는 젓가락을 들었다. 잘먹겠습니다, 라고 인사하니 세나 대신 사자 씨가 ‘야옹’ 하고 대답했다. 세나는 턱짓을 하더니 젓가락을 들었다. 알맞게 구워진 연어에 먼저 손을 대고, 밥을 먹었다. 간이 삼삼하게 들어 있었다. 곤약에서는 간장 맛이 났다. 야채들을 담뿍 넣어 끓인 왜된장국이 조금 짜서 밸런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는 연근조림을 입에 넣었다. 아직 따듯했다. 세나는 오늘 모든 반찬을 새로 만들었다. 도마에 칼이 닿는 소리를 들으면서, 각자의 맛을 가지고 있던 야채들이 미소 된장 아래에서 하나로 묶이는 것을 보면서, 연근에 올리고당과 간장이 꾸덕꾸덕하게 엮이는 걸 바라보면서, 톳과 당근, 삶은 콩 따위의 재료들을 볶아내면서 무얼 털어내고 싶었는지 츠카사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 쌓인 서사들을 알고 싶었으나 알고 싶지 않았다.
배고픈 위에 밥이 쌓여 속이 풀리기 시작했다. 밥 다 먹은 다음에는 차갑게 해서 설탕을 뿌린 토마토인가요? 라고 질문하니, 세나는 놀란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젓가락은 약간의 어색함을 담고 움직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편한 관계였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침전할 것만 같았다. 부식될 것 같은 부엌 속은 스노우볼 안의 세계 같았다. 한 번 흔들리면 모든 감정들이 피어올라, 깨진 유리처럼 반짝일지도 모른다. 츠카사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부쉈다.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타박이 돌아왔다.
“왜 다 두 벌이에요?”
“다시 넣어두기 귀찮아서.”
혼자면 외롭잖아.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톳과 곤약을 한 번에 집어 입에 넣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곤약들은 더 하고 싶은 말과 함께 잘게 부서지고 있을 것이었다. 츠카사는 여분의 그릇이 더 있는 것처럼 굴고 있는 세나 이즈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츠카사는 괜히 큰 연근에 가려져 있는 작은 연근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그리고, 혼자면 외로워.”
세나는 의연하게 말했다. 그는 그릇도 외로움을 느낄 거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처졌다. 아까까지 잘 맞던 연근조림의 간이 쓰게 느껴졌다. 그는 한참, 밥을 깨작였다. 오늘 걔를 만났는데, 나 없이도 잘 지내는 것 같긴 하고, 지 이야기나 우리 이야길 좀 하고 싶었는데, 공통으로 알고 있는 애 이야기만 하더라. 꼭 이혼 조정기간 양육권 상담하는 부부 같았어. 세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저녁식사 시간에 어울리는 간이었다. 담담하기에 계속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짜거나 맵지 않았다. 세나는 울지 않았다. 설탕을 뿌리지 않은 미적지근한 토마토 같은 이야기였다. 츠카사는 무조건 상대가 잘못 한 거라고 첨언했다. 그 말이 설탕이라도 됐는지, 세나는 물론이지, 하고 대답하며 웃었다. 웃는 모습이 가장 슬퍼 보인다는 것은 언제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런데도 좋아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왜된장국에 들어 있는 양배추를 건져 먹었다.
“근데 이제 너무 지쳤어.”
“지쳤…습니까?”
“다음에는 이제 헤어지자고 할 거야.”
미련은 남았지만 어떡하겠어. 그쪽이 더 이상 못 믿겠다는데.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젓가락을 세게 쥐었다가, 이내 가볍게 쥐었다. 이렇게 져주는 연애 하는 건 처음인데,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농담마저 묻어 있었다. 그의 말은 싸구려 고기 맛을 조미료로 감춰두는 조잡한 치킨텐더 같이 들렸다.
이렇게 져 주는 연애 하는 건 흔치 않은데. 세나는 미련이 남은 듯,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듯 밥을 집어 입에 넣었다. 말과 함께 흰 쌀알이 뭉쳐져, 그의 위 속으로 흐르고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힘내십시오, 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식탁 위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주제넘게 하고 싶은 말들에 목이 메여, 츠카사는 그저 왜된장국을 후루룩, 후루룩 마실 뿐이었다.
“카사 군.”
“네.”
“우리 바에 갈래?”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물로 목을 축였다. 저 미성년자인데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자, 그는 그런 것은 신경 쓸 게 아니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냉동실에 넣어둔 토마토를 다 먹은 다음에 가자는 말에,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끝내주는 칵테일 바를 알고 있다며 웃었다. 식사는 어물쩡거리게 늘어졌고, 그들이 모두 젓가락을 내려놓는 것은 열 시의 일이었다.
주말은 좋네, 세나는 설거지거리를 개수대에 가져다놓으며 말했다. 그는 라디오가 없는 날은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간다면서 웃었다. 간만에 바이크를 태워주겠다고 말하는 그의 어깨는 여전히 내려간 채였다. 독설을 내뱉을 기운도 없어 보여, 츠카사는 그가 한없이 안타깝기만 했다.
두 사람 몫의 그릇을 씻는 소리를 들으며, 츠카사는 냉동실에 넣어 차갑게 만든 토마토에 설탕 시럽을 뿌려 먹었다. 여러 알갱이들이 폭싹 졸아서 만들어졌을 시럽에는, 설탕 알알들이 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이 중에는 쓴 맛이나 신 맛을 노래하고 싶었던 설탕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연들을 모두 뒤로 감추고 담담한 말만을 하는 세나 이즈미 같은 설탕시럽이었다.
단 것을 극도로 자제하는 세나의 집에는 의외로 달달한 것들이 많았다. 츠카사는 그 점에 대해서 질문했고, 세나는 단 게 두뇌회전에 좋아, 라고 대답했다. 설거지를 마친 그는 쇼파에 앉아 제 몫의 토마토를 먹었다. 그는 설탕 시럽을 토마토 위에 세 번이나 뿌렸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 토마토를 입에 밀어 넣으면서, 세나 이즈미는 제 발 끝만을 바라보았다. 짧게 깎은 발톱이 둥글었다.
츠카사는 그의 사랑이 설탕시럽을 뿌린 토마토처럼 물렁하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기다리고 기다리고 녹아가고, 짓물러져 가는 사랑. 사랑이 달면 달수록 쉽게 미어지는 마음. 세나 이즈미 답다면 세나 이즈미 다운 사랑이었지만, 그는 그가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어려운 말이었고, 그는 그 기원을 제 속에 담아 토마토와 함께 녹였다.
달았다. 대책 없이 달달한 밤이었다.
***
바에 갈까? 라고 물었던 말이 사실이었는지 토마토를 먹고 배가 꺼질 즈음에 세나는 오토바이 키를 들었다. 세나는 헬멧을 츠카사에게 건넸다. 기묘하게도, 헬맷 또한 두 개였다. 하얀색과 남색이었다.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앉자, 세나는 별 무리 없이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학생 때 타던 것보다 배기량이 늘었는지,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삼십 분 가량을 달려, 그들은 골목길에 있는 바에 도착했다. 세나는 가게 주차장 한가운데에 오토바이를 주차했다. 언제나 인성이 한결같다는 칭찬에 세나는 완전 짜증난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평소의 세나 이즈미였다. 그가 헬멧을 정리하는 동안, 츠카사는 가게 밖에서 보이는 수조들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수면 아래에서 열대어들이 색색의 꼬리를 자랑하며 유영하고 있었다.
세나는 바 안으로 들어갔다. 츠카사는 그를 놓칠새라 뛰어 들어갔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네? 라는 넉살좋은 목소리가 번져왔다. 츠카사는 세나에게 말을 건 목소리 쪽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두 학년 위의 선배였다. 햇볕을 받은 밀 같은 머리색이 바의 주황색 백열등 아래에서 은은하게 반짝였다. 연예계에 진출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라고 묻자, 카오루는 취향이 아니었다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술도 안 마셨는데 독한 이야길 막 하네.”
“우리 애가 좀 그래.”
“세나 군네 애야?”
“친구네 아들에게 관심도 없고, 인성이 별로네?”
“세나 군에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
실없는 농담이 이어졌다. 그들의 대화는 탁구공이 튀기는 것처럼 가벼웠다. 세나는 바의 구석자리에 앉았다. 츠카사가 세나의 옆에 앉자, 카오루는 그들에게 파티션을 설치 해 주었다. 파티션의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 하는 츠카사에게, 카오루는 연예인이 술 먹는 거 별로 안 좋은 그림이라서, 라고 대답했다. 세나는 답답해도 참으라고 말하며 느리게 하품했다.
우리집 꼬맹이한테는 무알콜 적당한 거 주고, 나는 준벅으로 시작해서 항상 마시던 거. 세나는 간단하게 주문을 마쳤다. 카오루는 익숙하다는 듯 고블렛 글라스를 들었다. 그가 칵테일을 제조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보는 츠카사에게 세나는 술은 마셔봤냐고 물었다. 츠카사는 신년에 몇 잔, 식사 때의 와인 정도가 전부라고 대답했다. 아직 애기네, 라고 말하면서 카오루는 푸스스 웃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모던 바에서는 「양파의 마지막 1mm」가 흘러 나왔다. 이거 세나 군이 쓴 가사랬던가? 라고 묻는 카오루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세나는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말하면서 하품했다. 이 영화 나도 카나타 군이랑 보러 다녀왔어-부터 시작한 시시껄렁한 대화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잔잔하게 이어졌다.
‘신데렐라’와 ‘준 벅’이 자리에 놓이고도, 그들의 대화는 가볍게, 가볍게만 이어졌다. 세나는 녹색으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칵테일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입술을 축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연애 할 때도 이거 주구장창 마시더니, 라고 말하면서 카오루가 안타까움이 섞인 말을 내뱉을 때 까지, 그들의 대화는 민들레 홀씨 같은 느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안 헤어졌어.”
“그게 무슨 안 헤어진거냐?”
“아니야, 아직도 좋아하는데.”
“내가 자기소모적인 연애는 하면 안 된댔지?”
“그래서 너는 그렇게 여자만 만나고?”
“카나타 군 없어서 안 때린 줄 알아.”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각한 세나와 달리 카오루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가벼웠다. 츠카사는 기본 안주로 나온 프레즐 과자를 집어 먹으며, 그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바짝 쫄아 있는 그를 보다가 카오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친하니까 안 싸워, 걱정 마, 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지금 상황에서라면 콩으로 메주를 만든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재미 있는 이야기나 하자면서, 카오루는 기지개를 폈다. 이 노래 뭐야? 라고 세나가 질문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카오루는 노트북을 확인하더니 「사랑해, 라고 말할 수 없는 밤 새벽 2시」라는 노래라고 대답했다. 찌질하네, 라고 말하면서 세나는 칵테일 한 잔을 소주처럼 비웠다. 과격하다니까, 라고 말하면서 카오루는 다음 잔을 준비했다.
“연애 초기에는 여기가 완전 얘내 커플 아지트였는데.”
“하-카-제-군.”
“서로의 눈 색이 담긴 칵테일을 마신다던가.”
나 그래서 준 벅이랑 블루마가리타랑 엄청 만들었잖아. 카오루는 가벼운 농담을 하듯, 츠카사에게 작게 속삭였다. 화를 낼 것 같은 세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뚱한 표정을 하고, 빈 잔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석양을 잔에 양 껏 담은 칵테일이 세나의 앞에 놓여졌다. 알콜 냄새가 옆에서도 진동했다. 세나는 그것 또한 빠르게 비웠다. 주도도, 예의도 없이 술술 넘어가는 술에 츠카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나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마시는 술이 칵테일이 아니어도 괜찮았을 만큼, 알콜 냄새가 진동하는 잔들이 비워졌다. 가성비가 나쁜 타입이라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카오루는 심해어 수조의 공기 펌프를 바꿀 수 있게 됐다고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 쯤이 되자, 그의 얼굴에는 사과 같은 붉은 빛이 들어 있었다.
“걔, 온 적 있어?”
“간간히? 올 때 마다 카나타 군에게 전화를 하는 모양이더라고..”
“왜?”
“너 있냐고 물어보려고.”
“병신 아냐?”
세나는 잔을 던질 듯 들었다가, 사적 재산이라는 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래서 뭐 마시는 데, 라고 말하자 카오루는 항상 마시던 거, 라고 대답했다. 짜증나, 라고 말하면서 세나는 바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츠카사는 크래커 위에 치즈와 물기를 뺀 캔참치를 올린 카나페를 집어먹었다.
카오루는 세나의 앞에 다시 칵테일을 내려놓았다. 노을 진 듯한 주황색이 예뻤다. 잔 가장자리에 묻어있는 설탕들이 조명을 받아 별처럼 반짝였다. Kiss of fire였던가요? 라고 츠카사가 묻자 카오루는 정답! 하고 대답했다. 그는 상을 주듯, 빈 그릇에 프레즐 과자를 쏟아 주었다. 츠카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처음 고백했을 때 이거 마셨었는데.”
“또 시작이네. 흘려 들어, 세나의 애기 군.”
“스오우 츠카사입니다.”
“그래그래 애기쨩 군.”
내가 원래 남자 이름은 잘 기억 못해. 카오루는 작게 웃었다. 세나는 천천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취한 듯, 표정이 평소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사운드트랙이 한 바퀴를 돌았는지, 스피커에서는 다시 세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벼운 어쿠스틱 기타가 반주하는 음악 소리가 멀기만 했다. 손 안에 움켜쥐었던 사랑에서는 알싸한 향만이 풍기고 있다는 가사를 들으면서, 세나는 설탕이 묻은 잔을 기운 없이 핥았다.
세나는 그 애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공원에서 저에게 고백했다고 말했다. 이름 모를 축제날이었고, 노을이 칵테일처럼 진 강에서는 불꽃놀이를 하는지, 불꽃이 팡팡 터졌다는 말이 이어졌다. 반짝반짝하는 하늘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리와, 하늘의 남색 부분에 닿는 반짝임뿐이었다고 말하면서 세나는 잔을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그는 그 애가 자신에게 우주를 가져다주겠다고 말했다면서, 그 다음에 곧장 사랑한다고 말했다며 웃었다. 그래서 처음 이 칵테일을 봤을 때 그 강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면서 말하는 세나의 목소리는 침전할 듯, 아련했다. 마음이 아파, 라고 속삭이는 세나에게 카오루는 그럴 거면 사랑하지 말라고 말했다. 간단명료한 결론이었지만 그것보다 확실한 건 없었다. 츠카사 또한 카오루의 말에 동의하고 싶었다.
세나 이즈미의 사랑은 주는 것을 기반으로 한 사랑이다. 그는 끊잆 없이 기다린다. 사랑을 주면서 ‘받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세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데 왜 지들이 난리라고 말하면서 다 짜증나니 꺼져버리라고 말했다. 잔에 조명이 들었고,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였다. 세나는 그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운지, 턱턱 마시던 것을 멈추었다.
“우주를 가져다주기로 했어.”
“취하셨습니다.”
“‘내’ 우주는 세나니까, 별도 따다줄 수 있다고 했지?”
세나는 묻듯 말했다. 그 말에 확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츠카사는 취한 그의 어깨를 토닥이다가, 돌아가자고 말을 걸었다. 이미 취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봤자 아무것도 안 된다고 말하는 카오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는 이미 이런 모습을 충분히 봐 온 듯 했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을 거라고 말하면서 츠카사에게 물을 건넸다. 그 말을 하는 카오루 또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술주정은 들어주다 보면 가라앉기 마련이라는 말을 남기고 카오루는 다른 손님에게 건너갔다. 그들이 하는 대화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세나는 여전히 그들의 추억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츠카사가 듣기에는 로맨틱했지만, 말하는 그에게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세나는 그들은 취하기에는 가성비가 좋지 않은 타입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눈 색으로 시작해서, 눈 색으로 끝나는 오더를 만들었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느린 템포의 음악이 퍼졌다. 세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었다. 굳게 닫힌 입술은 노래가 끝나갈 즈음에 열렸다. 이 노래 뭐야! 라고 말하는 세나에게, 카오루는 제목을 확인 해 주었다. 세나는 잘 듣지 못한 듯 뭐? 하고 두어 번을 더 질문했다.
“세나 선배가 지금 마시고 있는 칵테일 이름이래요.”
“아 그래?”
“네.”
“착하다 착하다, 대답도 다 해주고.”
흐흥, 오늘의 카사 군은 착한 아이네. 세나는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그는 졸음이 몰려오는 지, 바에 기대고 상체를 숙였다. 머리 위에 우주가 필 것 같아, 라고 의미불명의 말을 중얼거리다가, 세나는 문득 옆을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화를 꺼냈다. 그는 어디론가 전활 걸었다. 수신음이 들릴 때의 그는 매우 초조하고 불안해보였다. 츠카사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전화의 뚜- 하는 소리가 끊길 때 마다 그는 화색이 되었다가, 다음 뚜-가 들리면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받지 않는 전화에 실망을 하고 다시 전화를 걸고를 세 번쯤 반복했을 때, 여보세요?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세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어진 전화가 무슨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있지, 여보세요? 있잖아, 그러니까 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가장 중요한 말을 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는 오늘 준 벅을 마셨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수다스럽고, 급하게 말했다. 요리 순서를 빼먹은 초보 요리사처럼, 그는 저가 하고 싶었고 숨기고 싶었던 말들을 여과 없이 내뱉고, 해야 할 말들을 사이사이에 끼웠다. 잡탕 전골을 요리하는 듯 했다. 그는 여러 가지 말을 쏟아 넣었다. 한 번 쏟아진 말을 주워담을 수 없었기에, 세나의 통화는 자꾸만 길어졌다. 츠카사는 도움을 요청하듯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놓아두는 게 나을 거라는 대답이었다. 세나의 귀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소리가 없는지, 아니면 상대가 응답하지 않는 지 츠카사는 알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세나 이즈미의 말에는 핵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갈 말할 수 없다는 듯 방황하고, 또 방황했다. 소금을 넣지 않아 간이 맞지 않는 맹탕 같았다. 미안해, 전화해서, 그런데, 내가 오늘 준 벅을 마셨어, 응, 저녁에는 설탕을 뿌린 토마토를 후식으로 먹었어. 세나의 목소리는 낫토처럼 진득하게 얽혔다. 망설임의 맛이었다.
하지만 그 머뭇거림도 잠시, 세나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아해, 보고 싶어.”
그의 목소리를 마주잡아 오는 대답이 없는 지, 그는 다시 좋아해, 란 말을 속삭였다. 붙잡아 주지 않는 달콤함이 타버린 설탕처럼 검게 물들고 있었다. 전화가 끊겼는지 뚜, 뚜, 거리는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울렸다. 세나는 하, 하고 짧게 코웃음을 쳤다. 세나 이즈미인데, 라고 끊어진 전화에 중얼거리다가 그는 몸을 일으키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의 ‘삽질’에 츠카사가 관여할 수 없었다. 존나 좋아하는데, 라고 말하다가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칵테일을 비웠고, 세나의 앞에는 준 벅이 다시 놓였다. 머리카락 색을 마셨으니, 눈 색일까, 라고 말하다가, 그는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츠카사는 이 상황에서 그에게 어떻게 조언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카오루는 세나네 애기쨩 군, 이라고 말하며 손짓했다.
츠카사는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를 가까이 대자 카오루는 네가 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뚱한 얼굴을 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는 정말 아무 것도 없으니 내일 아침에 일어난 세나에게 ‘안녕히 주무셨어요’ 라고 말해 주라고 조언했다. 그는 그게 가장 쓸모 있을 거라고 말하며 하품했다. 느긋하고, 나른해 보이는 태도였고, 츠카사는 그를 신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일 아침에 세나에 물을 안부에 대해 생각했다.
닿지 않는 멜로디가 공허처럼 울렸다.
***
한참의 한탄이 지났다. 흘려보내는 것이 정답인 듯, 그는 꽤나 술에서 깬 듯 보였다. 갈래? 하고 묻는 카오루의 말에, 세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답 대신이었다. 파티션이 치워지고, 그는 선글라스를 꼈다. 콜택시가 도착했다는 카오루의 말이 들리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제를 마친 후에 그는 츠카사와 함께 바를 나섰다. 세나의 숨 하나하나에 알코올이 빽빽이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걸음은 휘청이거나 쳐지지 않았다.
그는 택시에 츠카사를 태웠다. 보일러 켜놔,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택시에 주소를 불러주고 나서 세나는 기지개를 폈다. 택시가 출발하기 전 츠카사는 다급하게 선배는요? 하고 물었다. 세나는 기사님과 합의한 가격을 미리 결제했다. 츠카사는 계속 ‘선배는요?’하고 질문했다. 세나는 선글라스를 내렸다. 그는 눈을 마주치더니, 아까까지의 찌질함이 전혀 묻어있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나 술 마시면 원래 집까지 걸어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왜 합니까?”
“시끄러워. 카사 군 주제에 말이 많다? 내가 하고 싶다면 하는 거라구.”
그는 발랄하게 말했다. 오늘 약속이 있다고 조잘거리던 때처럼 텐션이 높았다. 그는 손을 흔들었고, 츠카사를 태운 택시는 서서히 출발했다. 아까 그거 세나 이즈미지요? 하고 넉살좋게 말을 붙여오는 택시기사에 츠카사는 닮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택시 기사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술 마시면 매번 걸어간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면서 허허 웃었다.
그 웃옴소리를 끝으로 택시 안은 적막으로 물들었다. 간간히 자동차의 깜빡이를 켜고 끄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츠카사는 창을 열어, 이제는 익숙하게 된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까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올 때에는 짧게만 느껴졌던 거리였다. 하지만 걸어오기에는 꽤나 먼 거리라, 그는 세나가 마냥 걱정됐다.
이 거리를 어떤 생각으로 걸어갈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고작 두어 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데도, ‘어른’인 세나 이즈미의 연애와 세나 이즈미의 생각에 대해서 스오우 츠카사는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기분이 왜 널을 뛰는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헤어질 것이라 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한 채 사랑한다고 말하는 세나의 목소리를 그의 연인은 어떤 심정으로 듣고 있을 지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망상으로 채워넣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망상을 즐겨 하는 타입도 아니었거니와, 그것으로 빈 부분을 메꾸기에는 알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었다. 츠카사는 뒷머리를 긁었다. 택시에서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밤공기가 차가웠다. 몸을 움츠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냉기가 가시지 않았다. 냉랭하고 어두운 방이 그저 무서워, 그는 방 모두에 불과 보일러를 켰다. 방 안에서 가장 따듯한 곳에 들어가고 싶었는지, 세나가 자는 작은 방 앞에 있던 사자 씨가 야옹 거리며 츠카사 쪽으로 다가왔다.
넓은 집일수록 혼자 있을 때의 빈자리가 크다. 츠카사는 안방으로 사자 씨를 몰고 들어갔다. 그는 문을 잠궜다. 방 안에 딸려 있는 샤워부스에서 샤워를 한 후,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을 때도 세나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 한 가운데에서 또아리를 틀 듯 몸을 말고 자고 있는 고양이는 매우 편해 보여서, 츠카사는 제 고민을 사자 씨가 반절 만이라도 덜어가 주기를 바라며 그의 털을 흐트러트렸다.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 소리에 고양이가 놀라, 화들짝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야옹, 그리고 야옹, 하면서 거는 말소리는 꼭 ‘왜 날 놀라게 했느냐’는 타박으로 들렸다. 형아 속도 모르고 자꾸 그렇게 울 겁니까? 라고 물으면서 츠카사는 핸드폰을 확인했고, 츠키나가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메시지는 츠카사가 몇 시간 전에 무시했던 문자와 구두점 하나 까지 같았다.
세나 잘 지내? 라는 문자에 츠카사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의 리더는 ‘왜?’ 라고 대답했다. 그 왜? 에 대답할 수 있는 건 많았다. 술을 마셔서, 그리고 애인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졌는지 걸어오려나보다는 말을 하려다가 츠카사는 저가 적던 메시지를 다 지웠다. 망상이 점철 된 이야기 보다는 세나가 말한 사실을 알려주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가만가만히 움직였다.
「술 마시면 원래 걸어온다고 하십니다.」
그 문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츠키나가도 바쁜가 보다 싶어서 츠카사는 고양이를 안고 침대에 올라왔다. 그 따끈따끈한 것을 무릎에 올리고 한참을 쓰다듬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나가 문을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밤을 물들이는 외로움과 걱정들이 배고픔처럼 간헐적으로 찾아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고, 잠이 온 집안에 내릴 때 까지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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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큰 대접에 담긴 파스타와 마늘빵의 행진곡
***
그 날, 스오우 츠카사는 악몽을 꿨다.
끊임없이, 어딘지도 모르는 공간 속을 헤매는 꿈이었다. 길을 잡을만한 수단을 모두 잃어버린 채, 그는 어둠 속을 맴돌았다. 중력 또한 제거되었는지 그는 꿈속에서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땅인지 몰랐고, 팔을 휘저을수록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쾌한 꿈은 아니었다. 더욱이, 꿈의 ‘중반’부터는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배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돌덩이를 먹은 것 마냥 위와 장이 불편했다.
츠카사는 끙끙거리며 뒤척이길 반복하다, 자신의 명치에 가해지는 고통에 눈을 떴다. 악몽에서 깔끔하게 탈출 했으나, 고통에 몸이 웅크려졌다. 콩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암막커튼 사이로 천천히,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그는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뒤늦게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정신이 멍했다. 그는 천장과, 침대 바닥, 그리고 제 배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솜뭉치를 바라보았다.
“냐아-”
고양이었다. 얼굴과 배는 하앴고, 등과 꼬리는 누르스름했다. 그는 냐냐, 거리면서 무언가 말을 걸더니, 이내 츠카사의 배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고양이는 그 자세가 매우 편하다는 듯 굴었다. 꼬리가 살랑살랑, 가볍게 흔들렸다. 츠카사는 모르는 고양이에게 안녕, 하고 인사했다. 고양이는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늘어지게 하품했다. 튀어나온 송곳니가 귀엽게 느껴졌다. 츠카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털이 긴 고양이의 귀 뒤를 간질였다. 성격이 온순한지, 아니면 이런 식의 터지가 익숙한지, 그 고양이는 츠카사의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방문 밖에서는 오르골 소리가 들렸다. 그 곡조가 「양파의 마지막 1mm」의 곡조가 아니었다면, 그는 그것을 오븐에서 빵이 구워졌다는 신호로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소한 냄새가 고양이가 열어둔 문을 타고 천천히 넘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츠카사는 여전히 고양이의 머리와 턱을 간질이며, 그것이 츠키나가가 말했던 ‘사자 씨’일까 생각했다.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는 무언갈 말하려는 듯, 수다스럽게 야옹거렸다.
어제는 이렇게 수다스럽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애초에 고양이가 있는 줄도 몰랐고, 츠카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양이의 수염을 톡톡 건드렸다. 그건 조금 기분이 나빴는지 고양이는 꼬리를 툭툭 휘둘렀다. 사자 씨가 움직일 때 마다 길고 가느다란 털이 뿜어졌다. 너 굉장히 털이 멋있구나, 츠카사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턱을 다시 간질였다. 사자 씨에게서는 단 과자 향이 났다.
츠카사는 하얀 털 부근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렸다. 역시 달달한 향이 났다. 그가 알고 있는 세나의 취향과는 먼 향이었다. 세나 선배라면 샴푸도 차가운 향일 줄 알았는데. 츠카사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조금만 더 늦장을 부리려 눕자, 고양이는 다시 그의 명치를 때렸다. 명백한 고의였다. 할 수 없이 그는 일어나야만 했다. 고양이로 인해 깨는 경험은 처음인지라, 그는 자신이 가출하여 ‘다른 곳’에 와 있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어색한 천장을 바라보고, 우주가 그려져 있는 암막커튼을 바라보았다.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두 뺨을 손바닥으로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스오우 츠카사는 어제 가출청소년이 되었으며, 세나 이즈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고양이의 어깨를 끌어당겨, 촉촉한 코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고양이는 그게 불만인 듯, 꼬리로 툭툭 그의 다리를 팡팡 두드리다가, 몸을 뒤틀어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츠카사는 자신의 잠옷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후드 티와, 검은색 체육복 바지에 온통 고양이의 희고, 누리끼리한 털이 묻어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양이를 기르는 집에는 테이프나, 털 제거용 돌돌이가 있기 마련인데, 어째 보이질 않았다. 그는 북극성이 그려진 남색 누비이불을 발 끝으로 밀어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벽 너머에서는 오르골 소리가 들리고, 고양이는 야옹, 야옹, 하고 울었다. 세나는 무언가를 만드는지 도마에 칼이 닿는 소리가 통통통통 번져왔다.
그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양이털을 떼어내고 싶은데, 털을 뗄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방은 두서없게 어지러웠다. 찬찬히 파악한다면 물건이 놓인 규칙을 파악할 수 있을 테지만, 그 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졌다. 츠카사는 자신이 이 방에서 자게 된다면 꼭, 청소와 정리부터 할 것이라 결심했다. 그는 여기저기 놓여있는 ‘쓸데없이 예쁜 소품’들과, 악보, 오선지, 쇼팽의 소곡집, 비발디의 음반 등을 훑어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자 씨가 다시, ‘야옹’ 하고 울었다.
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 04분. 일어나기 적당한 시간이었다. 커튼을 걷으니 방안 가득 햇살이 들어왔다. 채광이 끝내주는 방이었다. 여기에 있는 동안 못 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하품을 했다.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꿨던 악몽이 아직도 그의 두 어깨에 묻어 있었다. 츠카사는 제 발에 차이는 음반 하나를 들어올렸다. ‘May-lily’의 첫 앨범이었다. 언더 시절 음반인 듯 했다.
방주인은 음악을 좋아하는 듯 했다. 여기저기 정리하지 못한 앨범이 널려 있었다. 책장은 CD케이스를 꽂아놓는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꽂지 못한 듯 했다. 또한 방 안에는 구식 카세트 라디오가 두 대나 놓여 있었다. 한 놈은 라디오를 듣는 데 사용하고 있는지, 안테나가 정리되지 않은 채 하늘로 뻗어 있었다. 우주로 통하는 주파수를 잡고 있는 모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츠카사는 뒤를 돌았다. 어제 저가 옷을 걸어뒀던 옷장을 열자, 캐주얼한 옷들이 널려 있었다. 남색 맨투맨, 후드 티셔츠들은 ‘난 세나 이즈미의 옷이 아니에요’를 외치고 있었다. 그는 색별로 정리된 스냅백들을 보다 옷장을 닫았다.
세나 이즈미는 그와 완전히 반대 지점에 있는 사람과 연애를 하는 듯 했다. 여자가 입기에는 큰 옷들, 원피스나 치마 한 장 없는 옷장. 동거를 할 정도로 사랑하면서도 세나 이즈미의 흔적이 없이, 물들지 않은 ‘그녀’. 츠카사는 세나가 ‘그녀’와 성격이 맞지 않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서로 양 극단에 있는 사람은 사랑하기 어렵다. 자신의 사랑을 이유로 양보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 쪽만 양보하다 보면 깨지기 쉽다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츠카사는 지구본 모형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핸드폰 충전기의 케이블을 뺐다. 어쩐지 어제 충전기가 짧은 기분이더니. 그는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방에서는 무거운 향이 났다. 먼지 냄새는 아니었다. 큼큼한 향도 아니었다. 그냥, 묵직한 향. 츠카사는 세나 이즈미의 ‘연인’은 구심점이 확실한 타입일 것이라 확신했다. 세나가 시간을 들여 바꾸려고 해도 절대로 바뀌지 않고, 오히려 그를 포기하게 만들 정도의 고집 있는 사람. 멋있는 사람이네, 츠카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지개를 폈다. 이왕 사랑하고 있다면 잘 됐으면 좋겠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니, 뭉친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세나가 ‘나이츠’ 같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는 방 안이 츠키나가의 작업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질서가 있는 듯 하면서도 혼재한 물건들, 널린 악보와, 확고한 취향이 엿보이는 물건들. 츠카사는 세나의 연인이 정말로 궁금해졌다. 타이밍을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벽을 넘어 들리던 오르골 소리는 어느샌가 끊겨 있었다. 야옹- 하고 사자 씨가 느리게 울었다. 왜 이제야 나오느냐는 타박을 하는 것 같았다.
세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민트색 앞치마를 매고서 조리대 앞에 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세나 선배, 오르골 소리가 좋더라구요, 라고 말하자 세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단지 턱짓을 하며 그에게 식탁에 앉으라고 지시할 뿐이었다. 세나의 미간은 좁혀져 있었다. 츠카사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심기를 거슬렀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무언가를 불에 굽는 소리가 났다. 츠카사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카사 군 학교 가는 길은 알아?”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유 부려도 괜찮아?”
세나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는 계란물을 푹 입혀, 폭신폭신한 느낌이 드는, 바게트로 만든 프렌치토스트와, 갓 구운 스콘을 벚꽃이 그려진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츠카사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탁은 꽤나 높았다. 유사시에 조리대로 사용하려는 목적인 듯 했다. 츠카사는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였다. 키 좀 컸나? 세나가 묻자, 그는 2학년 말 보다 5cm 정도가 컸다고 대답했다.
기특하네. 세나는 그렇게 말하고, 샐러드와 함께 구운 베이컨을 내어 놓았다. 버터와 딸기 잼을 예쁜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리고, 세나는 계란물이 담겨 있던 보울과 식기를 씻기 시작했다. 그가 내는 물소리는 꼭 ‘쓸데없는 걸 물어보지 말라’는 말 같이 들렸다. 츠카사는 괜히 바게뜨로 만든 프렌치토스트를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겉면에 설탕이 발려 있었고, 안쪽은 촉촉했다. 제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습니다, 라고 말하니, 세나는 뒤를 잠깐 돌았다가 다시 개수대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당연하지, 세나 이즈미가 만들었으니까.”
하고 대답했다.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세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밥그릇을 꺼내, 사료를 부었다. 고양이 사료 특유의 냄새가 조금 풍겼고, 사자 씨는 황제의 행군처럼 당당하게 다가와 츠카사의 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사료를 까드득 부수는 소리와, 제가 밥을 먹는 소리가 화음을 가진다는 건 꽤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부엌 뒷정리를 대충 마친 다음, 세나는 도시락 통에 미리 만들어 둔 반찬들을 담기 시작했다. 못 먹는 거 있어? 라고 물어보자, 츠카사는 딱히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는 깔끔한 오일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신선하고 상큼하면서도 야채 특유의 결이 잘 살아 있었다. 계속 손이 가는 맛이었다. 꽤나 요리를 잘하십니다, 라고 말하자, 세나는 그것도 세나 이즈미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는 꽤나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조리대에는 물기가 묻어있었음으로, 그는 츠카사가 있는 식탁에 도시락 통을 가져왔다. 윤기 나는 흰 쌀밥과, 햇감자가 든 아스파라거스 샐러드를 담았다. 그 다음 우메보시와 가쓰오부시를 넣은 양배추말이를 모양이 망가지지 않게 넣었다. 또한 꿀과 미림을 넣은 죽순조림을 가지런히 담았다. 죽순조림의 맛이 감이 안 온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표정을 살피던 세나는 그의 입에 조림을 넣었다. 꿀과 두반장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손이 가는 맛입니다, 라고 하니 세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는 빈 칸에 완두와 참치 레몬무침을 넣었다. 완두의 녹색에 눈이 싱그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봄처럼 상큼한 식단들이었다. 카사 군, 완두는 껍질째로 먹어, 라고 말하는 그에게 츠카사는 네, 하고 대답했다.
“몇 시에 일어나셨습니까?”
“……다섯시?”
세나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츠카사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었다. 그는 직접 만든 듯, 레몬 모양이 그닥 가지런하지는 않은 레몬청에 탄산수를 넣어 섞은 다음, 츠카사의 쪽으로 밀어 두었다. 못 먹여서 한이 생긴 사람마냥, 그는 계속 무언가를 먹이고 싶어 했다. 밥 먹고 씻은 다음에, 오늘은 차로 대려다 줄게. 내일 부터는 버스 타고 가. 세나는 작게 하품했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졸음 운전은 하지 않겠다면서 세나는 커피 한 잔을 만들었다. 그는 작은 유리병에 들어있는 커피를 유리컵에 담더니, 찬물로 농도를 조절했다. 진한 향이 났다. 너도 줘? 라고 말하자 츠카사는 아침에는 홍차 파라고 대답했다. 세나는 자신이 츠카사의 앞에 밀어두었던 레몬에이드를 보다가, 도련님이 마시는 것 같은 홍차는 없는데, 하고 하품했다. 츠카사는 얹혀 살 처지에 이것저것 따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다면서, 세나 선배가 만들어주는 모든 게 서민적인 맛이라 좋다고 대답했다. 세나는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오늘 들어올 생각 하지 마. 쫓아낼 거야.”
“도시락은 돌려주러 들어와야 하지 않습니까.”
“필요 없어. 너 가져. 들어오지 마.”
세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도시락에 뚜껑을 덮어, 두꺼운 밴드로 고정시켰다. 그는 작은 가방에 도시락을 담아 츠카사에게 건넸다. 그는 츠카사가 매고 다니는 가방의 크기를 가늠하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가방 안에 안 들어가려나, 라고 말하자 츠카사는 어차피 가출을 위해서 가방을 학교에 두고 왔다고 말했다. 자세한 사연은 저녁밥을 먹으면서 말해 드리겠다고 말하니, 세나는 그의 속이 뻔히 보인다면서 혀를 쯧쯧 찼다.
어느새 밥을 다 먹은 고양이가 부엌 너머로 쫑쫑쫑쫑 걸어가는 게 보였다. 사자 씨, 라고 세나는 엄한 목소리를 냈다. 고양이는 뒤를 돌더니, 저가 져준 다는 듯, 다시 유턴하여 츠카사의 쪽을 거쳐 쇼파 쪽으로 다가가 누웠다. 고양이 주제에 부엌으로 들어가면 안 돼. 세나는 ‘사자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양이는 대답 대신, 꼬리로 소파를 팡팡 때렸다.
츠카사는 그의 부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쓰기에 쌍문형 냉장고 두 대와, 그냥 냉장고 한 대는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의 집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부엌 같았다. 세나는 먹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체중과 식단에 가장 신경 쓰는 타입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이런 집에 산다는 게 의외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요리를 하고 있는 것 또한 어색했다. 역시 연인을 위해 요리를 배운 걸까. 츠카사는 바게트를 우물거렸다.
“맛있어?”
한참동안 츠카사를 바라보던 세나가 물었다. 츠카사는 입에 있던 것들을 모두 삼키고, 입을 닦은 다음에서야 네, 하고 대답했다. 무언가 구체적으로 더 말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는 사이에 세나는, 그거면 됐어, 라며 말을 끊었다. 한동안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커피를 담은 잔이 식탁에 닿는 소리만이 들렸다. 넓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볕이 따듯했다. ‘봄’이었다. 무언가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츠카사는 의외로 냉장고가 넓네요 라고 말했다.
“혼자 있더라도 퀄리티 있고 예쁘고, 맛있게 먹는 게 좋잖아.”
“혼자라뇨? 동거하시지 않습니까.”
츠카사의 말에 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한숨을 푹푹 내 쉰 다음에야 시끄러워, 완전 짜증나니까 하고 대답했다. 이런 사람이 미디어에서는 어쩌서 상냥하고 사랑스러우며, 냉랭한 구석이 있지만 웃는 모습이 예쁜- 따위의 수식어를 달고 소비되는지 츠카사는 알 수 없었다. 여유 부릴 시간 없을 거니까 바지런히 먹어. 세나는 그에게 샐러드가 든 그릇을 밀어 주었다. 라코타 치즈가 간간히 섞여 있는 걸 이제야 발견한 츠카사는, 한 입을 먹자마자 반짝이는 눈으로 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모습마저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없었던 것이 찾아왔다는 듯한 태도. 츠카사는 그가 ‘혼자 있는’시간이 의외로 길었던 걸까 생각했다. 그런 것 치고는 그가 어젯밤에 머물렀던 작은 방에는 정리가 안 된 것 뿐, 온기가 묻어 있었다. 츠카사는 레몬에이드가 든 컵을 모두 비웠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쏟아져 왔다.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근황을 묻자 세나는 새벽에 하는 라디오 고정과, 화요일 수요일에 고정 된 프로그램이 두 개 있다고 대답했다.
의례적인 질문인지, 세나는 그에게 요즘 뭐 하며 지내느냐 물었다. 츠카사는 자신이 나이츠의 ‘리더’역을 수행하고 있으며, 내일 무대에 오른다고 대답했다. 오늘 쫓겨나면 내일 질 수도 있다고 말하자, 세나는 속이 뻔히 보인다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간간히, 서로의 근황과 바뀐 취향에 대해서 이야길 나눴다. 45분에 챙기러 가. 세나는 시계를 보다, 문득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사는 기분은 어떻습니까?”
“카사 군은 항상 싫은 질문만 하더라. 완전 짜증나.”
세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잔 안에 들어있는 커피를 마셨다. 명백하게 짜증난 표정이었다. 츠카사는 조금 쫄아,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세나는 그냥, 흘러가듯 입을 열었다. 포기 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세나 이즈미 답지 않은 목소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에 지쳤다는 말을 꺼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오래 된 인연이라서 사귀는 거지 뭐…… 특별할 게 있나아?”
“있을 것 같습니다.”
“동거도 사랑도, 특별한 거 하나 없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그거지. 또 익숙해서 사귀는 거야. 걔한테 특별한 의미도 없고.”
세나는 변명을 하려는 듯 말하다가,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걔 말고 다른 걸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구질구질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고 말했다. 츠카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원래 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맛이라고 말하니, 세나는 ‘메이드 인 세나 이즈’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젯밤의 츠키나가는 그에게, ‘밥을 깨끗이 비우고, 맛있다고 내내 칭찬하라’고 조언했다. 그렇다면 절대로 쫓아내지 않을 거라는 말은 믿기 어려웠으나, 지금 세나의 표정을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오래 알아온 만큼 서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면서, 츠카사는 물이 없을까요, 하고 말했다. 무언가 공상에 빠진 듯, 빈 접시를 들여다보던 세나는, 그것을 개수대에 넣고 나서 냉장고에서 언 딸기를 꺼냈다. 어제 마신 거 괜찮았어? 라고 묻는 소리에 맛있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그는 다시 얼린 딸기를 갈았다.
믹서기 소리가 유리 파편 같이 들렸다.
시간을 충분히 쓰고 나서, 세나는 곱게 갈린 딸기를 유리컵에 담았다. 색이 고왔다. 세나가 건넨 음료를 천천히 마시다가, 츠카사는 잔에서 입술을 땠다. 그는 세나를 바라보며, 그에게 얼린 딸기를 좋아하느냐 물었다. 여전히 그가 갈아 낸 딸기쉐이크에서는 진하게 달고, 상큼한 맛이 났다.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그거 마시면 머리도 잘 돌아간 댄다, 라고 빈정거리는 말을 먼저 던진 세나는, 츠카사가 유리잔을 비우는 것을 찬찬히 보다가, 제 뒷머리를 긁었다. 그는 매우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 주기를 츠카사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어제의 츠키나가와 닮아 있었다. 어른이 되면 다 그러는 걸까. 츠카사는 다 마신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딸기는…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요?”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 사랑이 정말 질긴 인연이라고 말하면서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는 습관 같은 사랑이라, 딸기를 엄청 얼렸다고 자랑했다. 츠카사는 그의 뒷모습이 무른 딸기처럼 짓물러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에, 사적인 일에 무언가 첨언하고 싶지 않아 그는 딸기 쉐이크 아래로 가라앉은 딸기 씨앗처럼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오래 좋아했는데, 라고 세나는 작게 혼잣말을 했다. 츠카사는 그의 오랜 사랑이란 단어에서 유우키 마코토를 떠올렸다가, 생각을 지우려는 듯 도리질을 했다. 시계가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빨리 씻고 나와.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빈 잔을 모두 거두어 개수대로 가져갔다. 설거지를 하려는 듯, 울음 같은 물소리가 부엌을 울렸다. 햇살을 받으며 가만히 앉아 있던 사자 씨가 야옹- 하고 길게 울었다.
이상한 아침이었다.
***
세나는 과속을 했다. 츠카사는 그렇게 난폭한 차에 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여유를 부리며 씻었던 것도 아니었고, 교복을 입을 때 늦장을 부린 것도 아니었는데, 출발해야 하는 시간에서 20분가량 늦었다. 세나는 중앙 차선을 넘었으며, 자신의 앞에 끼어들려는 건방진 차량을 클락션 한 방으로 제압했다. 귀를 치면서 울리는 클락션 소리가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지각은 하지 않았지만 스오우 츠카사는 멀미가 나려는 몸을 이끌고, 힘없이 교실로 올라가야만 했다. 넥타이를 본가에 두고 왔기 때문에, 그는 세나가 어쩐 일인지 보관하고 있었던 녹색 넥타이를 하고 등교했다. 아침이 정신 없었기 때문인지, 시간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속절없이 흘렀다. 멍하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같이 도시락을 먹자며 시노와 마시로, 텐마가 다가왔다. 벌써 점심시간 입니까, 라고 묻자, 그들은 책상에 둘러앉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가든 테라스에 봄꽃들이 피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에 대해서 이야길 하는 그들에 맞추어, 츠카사는 도시락 통을 열었다. 전체적인 컬러가 싱그러운 도시락이네요, 라고 말하는 시노의 목소리가 상냥했다. 츠카사는 햇감자가 든 아스라거스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감자 특유의 부드러운 맛과, 아스파라거스의 아삭한 식감, 바삭하게 구워진 베이컨이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튀지 않는 맛이었다.
“평소 도시락과 다른 느낌이네요.”
“그러게, 평소에는 조금 더 호화롭다는 느낌이었는데.”
“어제 가출했습니다.”
츠카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반찬을 집었다. 아침에 한 조각 먹었던 죽순조림은 여전히 꿀과 두반장 맛이 적절했고, 입 속에서 발랄하게 아삭거렸다. 세나는 요리를 할 때 식감을 중시하는 타입 같았다. 그는 평온하게 젓가락을 움직였으나, 같은 테이블에 앉은 토끼들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연두부 같은 친절함이었다. 츠카사는 많이 고민하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머무는 곳은 있는 거야? 마시로가 걱정이 된다는 듯, 물었다.
세나 선배의 집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들은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한숨을 내 쉬었다. 그들은 츠카사의 나사 빠진 –물론 그들은 단어 선택을 매우 유하게 했다.- 금전감각과, 도련님다움 때문에 어디서 사기라도 당한 건 아닐까 하는 수십만 가지의 걱정을 했다면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봄에 알을 깐 참새 같은 목소리들이였다. 츠카사는 그들의 도시락 뚜껑에 자신의 양배추말이를 하나씩 덜어 주었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네요.”
우메보시와 가쓰오부시가 들어간 양배추말이를 먹은 시노가 말했다. 그는 반찬 하나하나가 모두 신경 쓴 맛이라고 말하며 기쁜 듯이 얼굴을 붉혔다. 세나 선배 솜씨가 의외로 좋다고 말하면서, 츠카사는 괜히 저가 더 기뻤다. 텐마와 마시로 또한 양배추 말이가 맛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그는 완두와 참치 레몬무침도 먹어보라 권했다. 껍질을 까지 않은 채 통째로 먹는 완두는 식감이 독특했다. 반찬에서 옮은 상큼함이 흰쌀밥까지 옮아오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 도시락 통 밑에 있던 작은 통을 열자, 오렌지와 키위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츠카사가 같이 먹기를 권하자, 세나 선배는 의외로 세심한 사람인 것 같다구! 라고 말하며 텐마가 젓가락을 뻗었다. 과일 두 개다 맛이 적절히 들어있었다. 맛있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내일 있을 드림페스에 대해 라비츠의 토끼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츠카사는 핸드폰을 건드렸다. 세나에게 맛있게 먹었다고 말할 요량이었다.
핸드폰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츠키나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잘 잤?」
「잠자리는 사나웠지만 잘 잤습니다. 도시락도 받았고요.」
「도시락 메뉴 뭐였는데?」
「흰 쌀밥,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우메보시와 가쓰오부시가 들어간 양배추말이와 죽순조림, 통째로 먹는 완두와 참치 레몬무침, 오렌지와 키위」
「세나 힘썼네. 바쁠 텐데. 맛은 있었어?」
「맛있었습니다. ‘녹색은 맛이 덜하다’는 편견이 덜어질 정도로요.」
츠키나가는 문자에 바로바로 대답했다. 그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애기 입맛에는 고기인데, 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츠카사는 그 문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의 고민을 느끼는 듯,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어때, 계속 재워줄 것 같아? 라고 묻는 문자는 간결했다. 츠카사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한 자 한 자를 꾹꾹 눌러 대답했다.
「어제만 재워준다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디저트랑 아침에 밥 잘 먹었으면 못 쫓아내. 세나 무르니까.」
그리고 또 외로운 사람이지. 문자 두 개가 연달아서 왔다. 츠카사는 그들이 서로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츠키나가의 말대로 하긴 했으나, 솔직히 말해서 쫓겨 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전화가 왔다. 같은 테이블에 있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입을 가리며 전화를 받자, 츠키나가는 불안하면 빈 도시락 통 사진이라도 보내고, 꼭 쫓겨나지 않도록 해 봐, 라고 조언했다. 그는 꼭 그가 세나의 집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식으로, 강하게 말했다.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게 좋아 감사하다고 했더니, 츠키나가는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와하하, 하고 밝게 웃었다. 아, 재미있어, 스오 진짜 좋아해. 츠키나가는 의미를 모르겠는 말을 이것저것 늘어놓다가, 츠카사의 금전감각과 생활력은 완전 꽝이니, 세나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라고 말했다. 스오우는 키위를 입에 넣었다. 츠키나가의 말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츠키나가는, 여러 가지 비유를 대가면서 스오우 츠카사가 세나 이즈미의 집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들을 설명했다.
성경 만큼 길었고, 서사시보다 방대한 이유들이었다. 츠카사는 얼굴을 찌푸리고 디저트 과일에 손을 댔다. 그가 키위 네 조각과 오렌지 한 조각을 먹자 츠키나가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앞에 있는 마시로가 입모양으로 ‘진짜 말 많으시다’-라고 말했다.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끊으십시오, 라고 잘라 말하자 츠키나가는 한 마디만 더 하겠다고 말했다. 한 마디 정도라면 못 들어줄 것도 아니었다. 츠카사는 깨끗이 빈 도시락 통을 뿌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스오, 그래서 그 집에 고양이는 있어?”
“네 도착했을 땐 못 봤지만, 아침에 잠을 깨우더군요.”
꼬리가 아주 귀여웠습니다. 털이 길었는데 완전 많이 빠지더라구요. 츠카사는 그렇게 말하며, 잠옷에 묻은 털을 다 못 땠다고 투덜거렸다. 츠키나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래, 하고 대답했다. 마지막 질문이 ‘고양이’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츠키나가 레오라는 사람이 이상한 것은 하루 이틀일이 아니었음으로 츠카사는 별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깨끗하게 비운 도시락 통을 찍어 세나에게 사진을 보냈다. 핸드폰을 보고 있지 않은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츠카사는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츠카사는 입에 들어 있는 키위를 다 씹은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마시로는 방송국의 이번 시즌 라디오에 유메노사키 출신들이 꽤나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며, 토요일에 방송하는 「토요일 저녁, 그리고 하스밍입니다」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2시부터 새벽 한 시 오십분까지 방송하는「세나이즈의 3분의 1의 순수한 감정」에서는 3학년 선배들이 메인을, 수요일 오후의 「뮤직 스타트」에서는 서브로 이사라 마오와 오오가미 코가가 ‘꽃가루 날리는 봄날’ 이라는 코너를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시노는 그 말에 덧붙여, 목요일 아후에 카게히라 미카가, 텐쇼인 에이치가 진행하고 있는「달콤한 오후 두시, 티타임」의 ‘사탕 같이 반짝이는’이란 코너의 서브 디제이를 맡았다고 대답했다. 봄 시즌 개편이 젊은 DJ들을 기용하면서 꽤나 파격적으로 변했다는 마시로의 설명에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라디오 메인 DJ로 스물 한 살의 어린 청년을 기용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츠카사는 세나의 라디오의 시간이 매우 늦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도시락을 싸주느라 몇 시에 일어난 걸까, 그는 잠시 고민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텐마는 그에게 즐겨 듣는 프로그램이 있느냐 물었다. 츠카사는 라디오를 즐겨 듣는 편이 아니라고 말하자, 시노는 라디오에는 의외의 매력이 있다고 들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사연을 보내는 청취자라고 말하면서, 요즘은 핸드폰 앱으로도 사연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고 대답했다. 마시로는 뭔가 디제이와 내 사적인 공간이 전파를 타고 세계에 남는다는 게 좋아- 라고 말하면서 매우 설레는 표정을 지었기에, 츠카사는 나중에 한 번 기회가 되면 들어 보겠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세나 선배 라디오는 어떤 느낌입니까?”
“시간이 늦어서 자주 듣진 못하지만, 뭔가 설레는 느낌이지?”
“심야라디오만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다는 평이 많아요. 사실 라디오는 봄시즌 개편에 시작한 게 아니라, 작년 3/4분기부터 시작했고, 구조조정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실력자라고 해야 할까…!”
“오프닝 멘트가 설렌다구!”
텐마의 말에 마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프닝 멘트를 알려줄 수 있냐는 츠카사의 요청에 텐마는 자세한 건 잊어버렸다고 대답했고, 마시로는는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세나이즈의 3분의 1의 순수한 감정’의 오프닝멘트를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 밤입니다, 하루의 끝이면서 새로운 시작,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마시로는 이 다음 멘트는 매일매일 바뀐다고 말하더니, 그 다음 부분이 생각이 나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시노는 매일 바뀌는 이야기들 다음에 하는 멘트는 ‘쏟아냈던 순수함이 1/3밖에 전해지지 않았을 오늘, 잠시 쉬어가기로 해요. 부서질 정도로 사랑해온 순수를 위한 새벽, 맴도는 감정들의 이야기. 자정, 그리고 세나이즈입니다.’ 라고 끊긴 부분을 이어 말했다. 맞아 맞아, 그거라구! 미츠루는 박수를 치며 쾌활하게 웃었다. 봄날 오후에 먹는 오렌지 같은 상큼함이었다.
그 오프닝 멘트는 평소의 세나 이즈미가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말이었다. 그걸 읊는 세나를 생각하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으으, 하고 어깨를 움츠리자, 마시로는 막상 들어보면 목소리 톤이랑 잘 어울린다면서 웃었다. 시노는 새벽 라디오이기 때문에 더- 더- 감성적이어야만 한다면서 오프닝 멘트 때문에 듣는 청취자도 많을 거라는 의견을 내세웠다. 츠카사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세나 이즈미가 저런 감성적인 말을 내뱉는다는 게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색해하는 것을 보던 마시로는 세나 선배가 그런 멘트를 하는 것 보다는 「토요일 저녁, 그리고 하스밍입니다」에서 연애상담을 하는 코너가 있는 게 더 어색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시노 또한 마시로의 의견에 동의하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츠카사는 부활동을 할 때 보여주던 하스미의 철두철미한 모습을 생각하다가 그러게요, 세나 선배 보다는 그 쪽이 더 어색하네요, 하고 대답했다. 방금 먹은 오렌지의 끝맛이 혀에 깊게 남았는지, 도시락 통을 정리하고 나서도 떨떠름한 맛이 났다.
라디오에 대한 화제가 들어가고, 내일 있을 S1 등급의 드림패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예비령에 따라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교실 뒷문으로 나가면서, 마시로는 일요일 오후 2시의 「어메이징!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입니다」라는 라디오도 듣기 나쁘지는 않다면서, 라디오가 처음이라면 들어보는 것도 괜찮다라고 권했다. 솔직하지 못한 모습에 츠카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작게 울렸다. 타이밍 좋게 선생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리고 책상 서랍에 넣었다.
봄이었고, 틀어놓은 히터와, 창문 너머로 넘어오는 따듯한 햇살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되는 날이었다. 맛있는 걸 먹어서인지 간간히 잠이 왔다. 필기를 하며 진도를 따라가면서도, 아까 울린 핸드폰에 정신이 쏠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츠카사는 핸드폰을 슬쩍 확인했다. 액정을 들여다보며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방금 도착한 메시지가 보였다. 츠키나가였다.
「잘못 보냈다」
라는 문자 아래에는
「잘 지내는 것 같아?」
라는 질문이 쌓여 있었다. 두 문자 사이에는 30분가량의 간격이 있었다. 그 사이에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츠카사는 별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메시지를 입력했다. 어제와 오늘 아침의 세나 이즈미 밖에 모르는 스오우 츠카사는,「잘 모르겠어요」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문자에 따라오는 대답은 「고양이는 잘 지내?」라는 말 이외에는 없었다. 츠키나가는 마치, 세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도 된 것 마냥 행동했다. 츠카사는 이것이 매우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츠카사는 츠키나가가 연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세나 이즈미를 어지간히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 끼리 사이가 좋은 것도 좋고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것도 알겠지만, 간접적으로 전해 듣기보다는 서로 얼굴을 마주대고 말해야 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츠카사는 핸드폰을 들어 새 문자를 썼다. 수신인은 세나였다. 그는 꾹꾹, 메시지를 눌렀다. 한 자를 누를 때 마다 핸드폰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조용한 교실 안에서는 손을 움직이는 것조차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리더가 세나 선배를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잘 지내냐고 물어보더라구요.」
핸드폰을 잡고 있었는지, 세나에게서 메시지가 바로 도착했다. 사진을 찍어 보냈던, 깨끗한 도시락 통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왕님은 왜 직접 물어보질 않고? 세나가 보낸 메시지에서는 한 자 한 자에 짜증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전화라도 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츠카사는 그렇게 메시지를 입력했고, 세나에게서는 「완전 짜증나」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텀 없이, 바로 도착한 말이었다.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건드리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게 어색했는지, 선생님은 자꾸만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져, 츠카사는 핸드폰을 얼른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께서 읊는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한 구절이 졸음을 타고 다가와, 꽃이 피듯 내렸다.. 그리고 느린 템포로 다가온 봄기운에 츠카사는, 츠키나가의 문자에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녹아내리는 나른한 햇살 아래, 느긋한 봄이었다.
***
버스 타는 걸 헤맨 것 치고는 빨리 길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오우 츠카사가 세나 이즈미의 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10시 경이었다. 그는 메모 어플에 적어두었던 비밀번호를 입력해 대문을 열었고, 현관 문 앞에서 정중하게 노크했다. 주먹으로 세 번 정도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늘어지는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불투명 유리에 주황색 빛이 들었다. 세나는 문을 열어주자마자, 그의 안부를 묻는 대신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시간 관리는 기본이라구?”
라고 말했다. 그것 또한 세나다웠다. 츠카사는 버스를 잘못 탔다고 말하면서 능청스럽게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내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츠카사가 들어가자마자 사자 씨는 그의 다리에 머리와 볼을 비볐다. 얘 kitty라기 보다는 puppy 쪽이 아닙니까? 츠카사가 묻자, 세나는 종을 잘못 태어난 애라고 말하면서 하품했다. 꼭 리더 같습니다. 츠카사는 방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방 안에서 고양이털이 잔뜩 묻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가자, 세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밥 먹었어? 라는 질문에 츠카사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는 버스를 처음 타보는 바람에 이리저리 헤맸다고 말했고, 세나는 말 했다면 데리러 갔을 거라고 말했다. 잡지가 팔랑, 팔랑, 넘어가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 자리했다.
“데리러 와 달라고 했으면 안 오셨을 거지 않습니까.”
“어라, 들켰어?”
카사군, 많이 컸는데? 세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뭐라도 간단히 먹을래, 아니면 컨디션 조절 할래? 그는 일부러 두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츠카사는 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기다렸다는 듯,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너 오늘 늦게 자라, 라는 말을 하며 세나는 읽고 있던 잡지를 뒤로 뒤집어 두고 부엌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가지런히 걸려 있는 민트색 앞치마를 입고, 리본을 맸다. 그의 행동에는 어느 하나 어색한 것이 없었다.
메뉴 선택권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세나는 늦은 주제에 무슨 메뉴를 선택 하냐며 짜증을 냈다. 그는 냉장고에서 닭다리살을 꺼냈다. 마늘과 양파, 표고버섯이 조리대 위에 놓였다. 그는 스파게티 면을 담뿍 꺼내려다가, 반절을 덜었다. 그는 ‘한 사람’분에 대해서 감을 잡지 못하는 듯 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잠시 고민했고, 그 결과 조리대 위에 있던 재료의 반절은 다시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츠카사는 그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늘 어땠어?”
세나가 입을 열었다. 츠카사는 도시락이 맛있었다고 대답했다. 세나는 아부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익숙한 노래였으나, 무슨 곡인지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츠카사는 세나가 보고 있던 잡지로 손을 뻗었다. 세나는 닭다리살에 파슬리와 후추, 데리야끼소스를 넣어 버무렸다. 비닐장갑과 재료들이 닿는 소리가 두근거리게만 들렸다. 그는 볼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음악 잡지였다. 츠키나가 레오의 인터뷰 옆에, ‘May-lily’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사진이 실린 츠키나가와는 달리, ‘May-lily’는 사진 한 장 없었다. 츠카사는 자신의 신원을 하고 싶다던 히트 작곡가의 인터뷰를 읽어 내렸다. 신분을 감추고 음악 활동을 하는 이유라도 있을까요. 츠카사는 다음 장에 실린 나루카미의 화장품 광고를 훑어보며 말했다. 파스타용 냄비에 면을 넣은 세나는 파프리카를 썰었다. 도마에 칼이 닿는 소리가 한 템포씩 끊겨서 들어왔다. 큼지막하게 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거 왕님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 아냐?”
세나는 표고버섯을 잘라 냈다. 그는 팬에 올리브오일을 둘렀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버벅거림도 없었다. 츠카사는 잡지보다는 세나가 요리를 하는 걸 지켜보는 게 더 재미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다른 팬을 꺼내, 오늘 아침 먹고 남은 바게트를 꺼냈다. 버터를 담은 그릇이 전자레인지 안으로 들어갔고, 20초가 지나 녹은 버터에 그는 마늘을 섞었다. 그는 바게트에 마늘빵 소스를 꼼꼼하게 발랐다.
그는 마늘을 달궈진 팬에 넣었다. 마늘이 노릇하게 익는 냄새가 났고, 그는 모든 재료를 팬에 무식하게 투하했다. 그는 냉장고에서 육수를 꺼냈다. 그거 뭐예요, 츠카사가 묻자 세나는 무심하게도 조개, 라고 대답했다. 육수를 팬 안에 넣자마자, 그는 소금과 데리야끼 소스를 넣어 간을 더했다. 그 와중에 오븐에서는 땡, 하는 소리가 났고, 세나는 미리 준비해 둔 빵을 오븐에 가지런히 넣어 굽기 시작했다.
“조금 많을까?”
“많을 것 같습니다.”
“남기지 마.”
“웃으면서 그런 흉악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세나는 익은 면을 넣었다. 면수를 부어가며 농도를 조절했다. 세나가 만들어주는 것들은 어딘가 ‘양’이 많았다. 먹기 버거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인분보다는 이인분에 가까웠다. 츠카사는 그가 아직도 ‘그녀’와 살던 시간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버릇이 남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괜히 발을 까딱였다.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사자 씨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야, 고양이 밥 좀 줘라. 세나는 팬을 들여다보며 말했고, 츠카사는 세탁실 근처의 서랍장에 들어있는 고양이 밥을 플라스틱 그릇에 덜어 주었다.
까드득, 소리가 났다. 쟤는 밥 줬는데도 저래, 세나는 한탄 하듯 말했다. 츠카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둘이 살던 집이죠? 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세나는 혼자, 라고 대답했다. 그런 것 치고는 작은 방이 세나 이즈미스럽지 않던데요, 라고 문득 말하자, 세나는 츠카사를 바라보다가 재수 없고, 짜증나. 라고 말했다. 어조는 한없이 산뜻했으나, 그곳에 묻어 있는 감정은 탄 데리야끼 소스 같았다.
“실연 했어요?”
세나는 나무 숟가락으로 팬을 뒤적였다. 파스타 면에 맛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팬의 손잡이를 잡고 두어 번 흔들었다가, 손목을 이용해 위로 움직였다. 집 안에 고소한 파스타 냄새가 짙게 스몄다. 그는 괜히, 팬의 바닥을 나무 숟가락으로 벅벅 긁었다. 마늘빵이 익어가는 냄새가 파스타와 겹쳐졌다. 배가 고팠고,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나는 ‘그녀’와 ‘자신’의 거리감을 정의하려는 듯, 미간을 좁히고 내내 고민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파스타에 소금으로 간을 더하고, 몇 번의 면수를 더 넣었을 때쯤이었다. 그는 시계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오늘이 금요일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을 하듯 투덜거리던 그는, 완성된 파스타를 넓은 그릇에 담아 주었다. 츠카사의 앞에 포크와 오목한 숟가락이 놓였다. 잘 먹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파스타에 손을 대자, 그는 오븐 안에서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마늘빵을 꺼냈다. 지금 시간에 지나치게 무거운 식단이었지만 일단은 배가 고팠다.
마늘빵들을 접시에 가지런하게 담고, 직접 만든 피클을 작은 그릇에 담아 준 다음에야 세나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는 물 두 잔을 따라, 한 잔을 츠카사 쪽으로 밀었다. 데리야끼소스와 올리브오일이 입 안에서 간간한 맛을 냈다.면에 스며 있는 양념이 적절했다. 방금 불에서 내린 파스타가 따끈따끈했다. 츠카사는 닭다리살을 입에 넣었다. 자칫 잘못하면 흐물흐물해질 식감을 파프리카가 끈질기게 잡아주었다. 그는 마늘빵 하나를 집어, 반으로 갈랐다. 빵 결이 갈라지며 파사삭, 거리는 소리를 냈다.
세나는 늦은 저녁을 먹는 츠카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별거 중이야.”
“결혼 했습니까?”
“엔조이. 그냥, 둘이 어쩌다 보니까 같이 살고 있는 거지.”
세나는 느리게 하품했다. 결혼을 했으면 진작 주간문춘에 잡혔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 손끝을 매만졌다. 츠카사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파스타의 소스에 마늘빵을 적셨다. 바삭바삭한 빵에 촉촉한 소스가 닿았다. 별미였다. 피클도 직접 담근 거냐는 말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츠카사는 온통 ‘두 개’인 집에서 적어도 ‘부엌’만큼은 세나 이즈미의 세계구나, 하고 짐작했다. 그의 집에 있는 식기들은 모두 짝수다. 집이 둘만의 세계일 것을 상정하고 있는 듯 했다.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서, 그는 홀로 사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언젠가의 세나 이즈미가, 자신은 언제나 손해 보는 사랑만을 하고 있다며 넋두리 하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걸 따로 말할 수는 없었다. 츠카사는 열심히 숟가락과 포크를 움직였다.
“외롭진 않으십니까?”
“괜찮아. 익숙해졌고.”
“정말요?”
“뭐, 그렇지. 그리고 헤어질 거거든.”
다음에 걔가 왔을 때에는 진짜 헤어질 거라고 말할 거고, 우리 사이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고. 세나는 생각만 해도 속이 후련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순간 잘못 들이킨 면에 목이 칼칼했다. 캘록캘록 기침을 하자, 세나는 얼른 물컵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기침 속에서 왜요, 라고 겨우 물었고, 세나는 방랑벽이 싫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런 질문에 대해 여러 번 답을 생각했던 것 마냥 굴고 있었다.
따로 묻지 않아도 세나는 ‘연인’의 방랑벽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혼자 먹는 밥이 지겨울 정도로 많았고, 그동안 버린 나머지 일인분이 많았다고 늘어 놓았다. 언제 올지, 갈지를 말해주지 않으니까 언제나 두 사람 분을 준비하지만, 캐리어를 들고 나간 다음 날 부터는 연락 두절이더니 결국 작업실에서 숙식하는 듯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도 말했다. 이 부분을 말할 때의 그는 매우 분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바꿔 웃었다. 합의되지 않은 별거는 이제 지겹고, 나는 아직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 쪽이 끝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파프리카처럼 아삭거렸다.
그는 걔가 불안해하는 걸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믿을 수 없어서, 방황 끝에 돌아갔을 때 웃어주지 않는 걸 무서워해서 못 온다는데, 그런 병신 같은 말이 어디 있느냐 물었다. 츠카사는 ‘걔’가 아니라 대답할 수 없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골이 세나와 그의 연인 사이에 머물고 있는 듯 했다. 세나는 자신이 백 보 양보하여, 그가 떠나 있는 것 까지는 터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방황하는 건 용서할 수도, 이해해줄 수도 없다고 늘어놓았다.
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었다. 외로웠어요? 라고 묻자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츠카사에게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다. 츠카사가 다시 마늘빵을 잘라, 한 쪽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세나는 돌아가고 싶을 때는 말해, 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외로움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걔’를 사랑하고 있는 듯 했다. 츠카사는 그가 이렇게 맹목적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듣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님을 알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계속 시계를 확인했다. 츠카사는 「세나이즈의 삼분의 일의 순수한 감정」? 하고 질문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몇 가지 당부할 게 있다고 말했다. 츠카사는 숟가락에 면을 말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릇에 남았던 마지막 면이었다. 착한 아이네, 착한 아이야. 세나는 그가 비운 그릇과 그를 번갈아 보다,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츠카사는 그의 웃는 모습에 괜히 불안해졌다.
“일단, 저녁은 같이 먹어. 못 먹을 것 같으면 연락해.”
“네.”
“못 지키면 쫓아 낼 거야.”
세나는 손을 뻗어 츠카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톡톡 두드렸다. 츠카사는 숟가락과 포크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세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다가, 그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니가 안방에서 자. 사자 씨를 데리고.”
“집 주인이 있는데 제가 큰 방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츠카사가 반발하자, 세나는 씁, 하는 소리를 냈다. 재워주는 건 나라고? 카사 군, 자기 주제를 생각 해야지?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힘을 주어 그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장난스러움 투닥임이 오가다가, 세나는 심각한 목소리를 했다. 거기서 자. 안방에 화장실 있으니까 불편하진 않을 거야. 순식간에 진지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츠카사는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네가 걔 방에서 자고 있는데, 걔가 들어오면 이야기 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카락에 닿았던 손이 없어지고, 츠카사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짐 옮길 거 없으니까, 네 교복이랑 옷들 다 안방으로 옮겨 놔. 가장 오른쪽에 있는 옷장 비워놨어. 세나는 미리 생각 해 뒀던 말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자연스럽게 말했다.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표정을 하고 말하는 말에 ‘예의’라는 말을 하며 거절 할 수 없었다. 츠카사를 바라보던 세나는, 제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후련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밥 다 먹었으면 그릇 개수대에 가져다 놓고, 짐 옮겨. 나 이제 슬슬 나가야 하니까. 굼뜨게 있지 말고 어서어서 움직이라고?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머지 마늘빵을 입에 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들을 개수대에 놓았다.
버리는 게 없어서 좋네. 라는 세나의 말에, 츠카사는 그의 식탁이 계속 2인분을 담았을까, 생각했다. 빈자리를 앞에 두고 식사를 하는 기분은 어떨까. 그것도 그 빈자리가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츠카사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역시, 그가 감당하고 있을 외로움에 대해 감이 잡히질 않았다. 평소의 세나 이즈미 같아 보이는 지금도 속이 곪아가고 있을까, 츠카사는 물을 틀어 흰 그릇에 묻은 양념을 불리면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 선배는 옮길 거 없으십니까?”
제가 방에 들어 간 다음에 생각나시면 곤란합니다. 츠카사는 거실로 나아가며 말했다. 세나는 없다는 듯 여유롭게 있다가, 문득 아,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그를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들어간 것 치고 그가 가지고 나온 것은 높이 15cm 정도의 스노우 글로브뿐이었다. 급하게 들고 나오느라 유리공 안의 세상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매우 소중하다는 듯, 품에 안고 움직였다.
그는 츠카사의 ‘이사’를 바라보았다. 그가 들고 온 28인치 캐리어는 창고에 들어갔고, 그가 가지고 온 물건들은 세나가 비워뒀던 수납공간에 차곡차곡 쌓였다. 세나는 츠카사의 나이츠 유니폼을 바라보았다. 옛날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츠카사는 그를 방하해지 않으려고, 최대한 옷장에서 먼 곳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나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는 핸드폰의 액정을 확인하고 작게 하품을 했다. 그는 매니저가 전화를 했다면서 기지개를 폈다.
“나 간다.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괜히 한다고 나대다가 그릇 깨먹지 말아. 다 비싼 거야. 짝 없는 거 맞추느라 힘들었다구.”
“네,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심심하면 고양이랑 놀고, 자기 전에 고양이 방 안에 가두고, 문 잠그고.”
“네.”
“그럼 간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츠카사는 세나의 뒷모습에 대고 인사했다. 세나는 그 ‘안녕히 다녀오라’는 말을 곱씹는 듯,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다가, 한숨처럼 웃었다. 그는 숨이 죽은 야채마냥 기운이 없었다. 그가 신발을 신는 동안, 현관 등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세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다,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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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동육수 샤브샤브와 보글보글 서곡
***
오늘부로 스오우 츠카사는 가출 청소년이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의 봄이었다.
그는 28인치 캐리어의 손잡이를 쥐고 벤치에 앉았다. 캐리어를 발로 건드려 똑바로 세워 두었다. 그는 제가 방 안에서 반드시 챙겨 나와야 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놀이터의 그네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에서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초봄이라지만 아직 겨울이 남아있는 탓인지, 해는 여섯 시가 되기 전에 지곤 했다. 그는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는 그네를 바라보았다.
집을 나오고 나니 한적했다. 당장 갈 곳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미리 싸둔 캐리어를 들고 ‘가출하겠습니다!’ 라고 선언한 다음 나올 때는 카타르시스까지 느꼈다. 비록 가출선언을 하고 두 블록도 나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문자 여러 개가 도착했다는 것과, 계좌가 막히기 전에 인출했던 현금이 얼마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런 사소한 건 지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그가 집을 나왔다는 사실, 그 뿐이었다.
츠카사는 자신이 겪을 수 있는―물론 그가 생각할 수 있는 한도에서의―최악을 생각했다. 몸을 의탁할 장소가 없다면 결국 학교의 방음 연습실에서 자면 된다. 아침을 꼭꼭 챙겨 먹어야하는 타입인 것이 조금 곤란하지만, 그것도 새벽에 학교 담을 넘어서 편의점에서 염가판매하는 도시락을―츠카사는 염가판매 도시락은 80엔 정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먹으면 해결 된다. 점심 또한 편의점 도시락, 저녁도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면 된다. 그는 일본의 편의점이 나름대로 좋은 퀄리티의 음식들을 갖추고 있다는 걸 글로 배워 알고 있었다.
또한 부족한 간식은 나이츠의 공연을 찾아 주시는 누님들이 주는 과자를 먹고 살면 된다. 교복 세탁이 문제였지만 학교에서 살게 된다면 샤워 정도는 따듯한 물로 할 수 있다. 스오우 츠카사가 이끄는 ‘나이츠’는 강한 유닛이었음으로, 연습실에 샤워시설이 딸려 있었다. 그는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해가 져가니 조금 추웠다. 오늘 당장 학교로 들어가기는 조금 아쉬운 기분이었다. 그는 저가 몸을 의탁할만한 장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후배들의 사적인 스페이스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반 동료들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사양하고 싶었다. 하룻밤 정도 묵어가는 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명색의 나이츠의 ‘왕’이 반 친구들의 방을 전전해가며 살고 있다는 건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춥고,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는 지갑에 들어있는 돈을 확인하다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의 농성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장기전’을 생각한다면 일단은 아껴야 했다.
그렇다면 일단 학교에 들어가는 편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나, 당장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가출한 건 난생 처음, 그 ‘처음’을 조금 더 로맨틱하게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마땅한 사람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는 핸드폰 메신저를 켜서 목록을 쭉 내렸다. 그래도 아버지도 사람이라고, 아들과의 유일한 연락수단인 핸드폰은 끊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는 메신저를 바라보다가, 저가 1학년 때의 나이츠 단체 채팅방을 발견 해 냈다. 선배들이 여러모로 바빠 활성화가 자주 되지 않는 방이었다. 그 방에 올라와 있는 마지막 메시지는 1개월 전, 세나가 보낸 메시지였다.
「왕님 어디 있어, 밥 먹으러 와.」
‘왕님’이라고 지칭되어 있는 메시지에 저가 대답하거나, 일이 해결 되지 않았는데도 다른 말을 치기도 조금 그래서 무시했던 기억이 났다. 왕님은 그 메시지를 읽었는지, 혹은 읽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방에 ‘가출했어요’ 라고 쓰려다가 그만 두었다. 채팅방에 먼지를 터는 것 보다는 전화를 하는 게 더 빨랐다. 그는 자신의 네 선배들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신은 영원한 막내일 것이다.
츠카사는 볼을 긁적였다. 고등학생의 세계란 매우 좁아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하기에도 바빠 꾸준히 연락을 하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었다. 또한 ‘유메노사키’라는 울타리에 머물러 있는 그와 달리, 그의 선배들은 매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츠카사의 아버지가 답지 않게 매주 챙겨 보고 있는 수목드라마의 서브 남자 주인공은 사쿠마 리츠였고, 그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의 메인 모델은 나루카미 아라시였다. 물론, 츠키나가 레오는 행방이 묘연했지만 그래도 ‘작곡마인X’나, ‘성천사 루카땅의 오빠P’같은 요상한 닉네임을 써서 활동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갔다. 츠카사는 이런 저런 것들을 생각하며 볼을 긁적였다. 놀이터 옆에 있는 카페 건물에서 「양파의 마지막 1mm」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나가 부른 노래였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았다. 편한 미성이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추어 느린 템포로 쏟아져 나왔다. 졸업 한 선배의 흔적을 메이저에서 발견하는 건 의외로 신기한 기분이었다. 츠카사는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회상했다. 9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한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잘 만든 로맨스 영화였다. ‘그녀’를 기다리며 요리를 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세나는, 츠카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사람 같이 느껴졌다.
영화의 제목은 곡의 제목과 같았다. 둘 다「양파의 마지막 1mm」였다. ‘두 사람의 저녁, 하나 밖에 없는 그림자-’라는 가사를 읊는 목소리는 수면처럼 잔잔했지만, 외로움이 짙게 묻어 있었다. 담담한 목소리 덕분에 더 슬픈 것 같다고 생각하며, 스오우는 핸드폰을 건드렸다. 놀이터를 지나가는 여고생 두어 명이 이 노래 좋지? 영화도 좋고 세나이즈도 좋았어- 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그는 그의 선배가 매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영화와 직접 부른 OST가 모두 히트했다. 신인 치고 위대한 성과였다. 그로 인하여 고정 프로그램이 두어 개 정도 생겼다는 말도 들었다. 점점 더 선배들이 멀어지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츠카사는 발로 땅을 툭툭 찼다. 주황색이던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는 괜히 볼을 부풀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그에게 연락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충동’이었다. 츠카사는 세나의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 귀에 핸드폰을 댔다. 하루 정도 재워주세요, 라고 요구한다면 하아? 지금 카사 군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그런 거야? 라고 말하면서도 가장 잘 넘어가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화기에서는 삭막한 수신음 대신, 샴셰이드의 1/3의 순수한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츠카사는 세나와 츠키나가가 그것을 꽤나 자주 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부서질 정도로 사랑해도 삼분의 일도 전해지지 않아, 순수한 감정은 맴돌기만 해, 사랑이란 말조차 할 수 없는’ 부분이 계속 반복됐다. 따라 부르기도 지쳐 그저 듣고 있을 때, 세나의 목소리로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허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쁜 사람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다른 선배들이 저에게 저녁을 주고 재워줄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리더’는 제외였다. 츠키나가는 너무나도 자유로워서, 방조차 치우고 살 것 같지 않았다. 또한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휘발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츠키나가의 집이 분명 열대 아마존 밀림보다 더 복잡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나루카미 아라시는 괜찮은 선배였지만, 뭔가 밤새도록 걸즈토크를 당할 것 같았다. 츠카사는 내일 모래 S1등급의 드림패스에 출전하는 만큼, 컨디션 조절을 하고 싶었다.
츠카사는 리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리츠의 전화기에서는 바로 자동응답 멘트가 흘러나왔다. 사쿠마 리츠입니다. 드라마 촬영 중, 일 관련이라면 매니저에게. 번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매니저의 번호로 전화를 걸까 하다가, 츠카사는 나루카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뭔가 일이 꼬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편의점에서 도시락 하나를 사서, 학교로 터덜터덜 걸어가게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기에 귀를 댔다. 초조하고, 또 초조했다.
수신음이 가기 시작했다. 츠카사는 제 집 쪽에서 유메노사키 학원까지 가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버스에 만 엔짜리를 넣어도 받아 주던가. 그는 버스에서 거스름돈을 받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집에서 차를 타고서 족히 30-40분은 걸리는 거리에서 통학을 하고 있으니, 걸어가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는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수신음은 길고, 길게 늘어졌다. 늘어지는 수신음이 잠시 한 템포를 쉴 때 마다 츠카사는 ‘나루카미 선배!’ 라고 외쳤다가, 실망한 듯 어깨를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루카미 선배!”
―어머머, 츠카사쨩, 오랜만이네?
나루카미는 발랄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간만에 연락하는 것인데도,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여전히 예의바른 남자애구나, 하고 소녀처럼 웃었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웃자, 나루카미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물었다. 눈치 하난 기가막힐 정도로 빠르다고 생각하며, 츠카사는 그게요, 하고 운을 땠다. 나루카미의 뒤쪽이 소란스러웠다. 혹시 일 하시는 중이십니까? 츠카사는 작게 물었다. 그건 아닌데- 라고 말하면서 나루카미는 작게 웃었다.
이 언니, 츠카사쨩이랑 통화할 시간 정도는 있단다? 나루카미는 그렇게 말했다. 츠카사는 가로등이 켜지고 있는 놀이터의 구석 벤치에서 일어났다. 오늘 머물 곳은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가 고팠다. 위가 쪼그라든것마냥 꼬르륵 소리가 났다. 츠카사는 한쪽 손을 배에 얹었다. 손이 닿은 자리마다 배고픔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가 조금 사정이 있는데….”
―응응, 이 누나 듣고 있다구?
츠카사가 하룻밤 정도 재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을 하는 건, 한참을 머뭇거린 뒤였다. 나루카미와 친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신세를 지는 것 자체가 어색하다고 생각하면서 츠카사는 제 입술을 오물거렸다. 우물쭈물한 목소리를 나루카미는 다정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통화 속에 공백이 생길 때 마다 어색하기 그지없어, 그는 가출을 하게 된 경위와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는 것, 그리고 카드가 모두 정지되었으며, 현금을 많이 들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까지 늘어놓았다.
그의 길고 긴 말을 다 들은 나루카미는 급하게 전화 할 만 했다며 밝게 웃었다. 그럼 재워주시는 건가요? 라고 츠카사가 물었다. 그는 나루카미의 집 주소를 녹음 할 준비를 하려고 전화기를 주섬주섬 건드렸다. 드디어 잘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 귓가에서 환희의 송가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대답은 절망적이기 그지없었다. 츠카사는 그에게 잘 못 들었다며, 다시 말해줄 것을 요구했다.
나루카미는 지금 화보 로케 촬영을 위하여 그리스의 산토리니로 출국한다는 비보를 전했다. 츠카사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놀이터에 켜져 있던 가로등이 지직거리며 깜빡였다. 당장이라도 불량학생들이 모여들어 반딧불이 같은 담배를 피워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츠카사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이나마 밝은 쪽으로 캐리어를 끌고 움직였다. 돌돌거리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물론 내 집이 비긴 하지만, 지문인식이라서… 아무런 등록도 없이 츠카사쨩이 들어가는 건 무리랄까.”
“Oh, Jesus…….”
―안타까운 일이지, 으음…… 다른 선배들에겐 전화 해 봤니?
“세나 선배와 리츠 선배는 전화를 안 받으시더군요.”
―리츠쨩은 요즘 드라마로 열심히니까.
열심히 하는 남자애는 좋아하니까 매번 소식을 체크하고 있는데, 쪽대본이라서 요즘 내내 촬영 현장에서 먹고 자고 하는 모양이더라구? 나루카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작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리츠의 집이 머물기 부적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형이랑 같이 살고 있으며, 형제 둘 다 야행성이기 때문에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될 수도 있다는 소식에 츠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세나 선배에게 전화를 다시 해 보는 게 좋을까요? 츠카사는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학교까지 택시를 타고 갈까 고민하면서, 그는 캐리어 위에 걸터앉았다. 온 세상이 저를 버리려 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피어 있던 꽃들이 봄도 오지 않았는데 한 송이 한 송이씩 지고 있었다. 츠카사는 제가 집을 빠져 나올 때 외치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기억 했다. 한 시간도 못 되어 들어올 거면 나가지 말란 타박을 기억 해 내자 기분이 단박에 나빠졌다. 그는 괜히 발을 까딱였다.
―이즈미쨩은 애인이랑 동거 중이라 무리일걸?
“세나 선배 애인 있습니까?”
―그럼, 사이가 좋은 지는 잘 모르겠지만.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츠카사는 저가 선배들과 꽤나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괜히 머쓱한 듯, 볼을 긁적였다. 나루카미는 호호 웃다가, 왕님에게 연락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는 왕님의 작업실에 딸린 작은 방에 침대가 있었으니, 작업실 정도라면 흔쾌히 빌려주지 않을까, 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는 몇 마디를 더 말하려는 듯, 음, 하고 망설이다가 아니- 아니다. 라고 말하며 말을 끝맺었다. 그 미적지근한 흐름에 츠카사는 무언갈 질문하려고 하다가 말을 삼켰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루카미는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꼭 왕님한테 전화 해 보렴? 하고 걱정이 되는 듯 물었다. 나중에 연락하라는 따스한 당부에 츠카사는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둘 사이에 ‘그래’와 ‘네’ 밖에 오가지 않는 시간이 잠시 흘렀다가, 나루카미는 츠키나가의 번호가 바뀌었다면서 바뀐 번호를 얼른 불러주었다.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하고 한숨을 쉬는 츠카사에게 나루카미는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 좋은 밤 보내, 라고 말하는 나루카미의 목소리는 끝까지 따스했다. 츠카사는 핸드폰에 츠키나가의 바뀐 번호를 입력하면서, 그들이 꽤나 어른임에 감탄했다. 한두 살 밖에 차이나질 않는데도 불구하고 선배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츠카사는 한숨을 크게 내쉬다가, 츠키나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업실이라면 ‘인스피레이션!’ 하고 외치는 그와 부딪힐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가 전화를 받아주길 바랐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여보세요?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츠키나가였다. 리더, 라고 부르자 스-오! 하고 반갑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는 방금 나루에게서 라인을 받았다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나루카미는 그새 걱정이 됐는지, 그에게 연락 한 모양이었다. 데리러 갈까?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신나 보였다. 거절할 이유는 한 톨도 없었다. 츠카사는 자신의 위치를 지도 앱으로 찍어 츠키나가에게 전송했다. 그리 안 머네, 라고 말하면서 그는 킬킬 웃었다.
츠키나가와 전화 연결이 되자마자 상황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츠카사에게 요즘 뭘 하고 지내느냐 물었다. 츠카사는 자신이 나이츠의 리더가 됐다면서 근황을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그거 잘 됐네, 라고 말하는 츠키나가의 목소리는 학창시절의 것보다 조금 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른’의 무게감이 느껴졌고, 그 느낌은 고스란히 거리감으로 다가왔다. 츠카사는 모든 게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만나지 않은 시간이 길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끊길 수 밖에 없었다. 공허한 침묵이 자리했다.. 츠카사는 츠키나가의 네비게이션 소리를 멍하게 듣고 있다가, 다시 한 번, 자신이 가출을 하게 된 경위와 함께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일단, 말 해야 할 것 같았다. 츠키나가는 그의 말을 듣는 지, 듣지 않는 지, 호응조차 하지 않으면서 잠자코 있었다. 아까의 들뜬 어조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츠카사는 몇 번이고 리더? 라고 그를 불러, 그가 잘 듣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다 들었습니까? 라고 묻자 츠키나가는 응, 하고 대답했다. 미심쩍은 마음에 그에게 제 상황이 어떤 지 설명 해 달라고 요구하니, 츠키나가는 츠카사가 걱정 한 것과 달리 제법 정확하게, 그의 상황을 요약하여 정리했다. 나라면 일단 돈부터 더 뽑았을 거라는 말과, 어린 나이에 집 나오면 고생만 한다는 달갑지 않은 조언까지 듣고 나서야 츠카사는 제 말이 전달됐다는 것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는 캐리어를 괜히 조금 밀었다 당겼다를 반복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런 까닭에 지금 잘 곳을 구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자면 되잖아.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잠깐, 나이츠의 리더가 학교에서 잔다고?
“그럴 생각입니다만,”
―모양 빠지잖아! 왕이 학교에서 숙식하다니! 거지들의 왕인가? 「노트르담 드 파리」같은 느낌이야! 음, 잠깐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 해 볼게. 음음, 학교라… 학교….“
“하지만 잘 데가 없으면 학교라도 가야 하지 않습니까.”
―스오! 잘 생각 해 보면 그것도 인스피레이션이라고?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들의 하모니, 아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 곡 쓸 수 있을 것 같아. 로망이고 로맨틱! 하지만 나이츠의 왕이 학교에서 자는 건 허락 할 수 없어!
“잘 곳을 마련 해 주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츠카사의 외침에 츠키나가는 말을 멈추었다. 100m 앞 전방에서 과속에 주의하십시오, 제한속도 60km, 라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침묵이 점점 ‘어색함’이라는 이름으로 바뀔 때 쯤, 츠키나가가 입을 열었다. 까짓것 마련 해 줄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늘 전골을 먹자고 말했다. 직접 해 주시는 겁니까? 응, 진짜 죽여준다니까. 죽으면 어떡하죠? 츠카사는 제법 들뜬 어조로 물었다.
―스오는 여전히 재미가 없네.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야?
츠키나가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의 네비게이션이 10m 앞에서 좌회전을 할 걸 요구했다. 몇 분을 더 어색하고, 밍숭맹숭하게 이야길 하고 나서야 츠카사는 츠키나가의 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른색으로 따로 도색 한 것 같았다. 그는 츠카사의 짐을 들어 트렁크에 넣었다. 조수석에는 타지 말라고 다급하게 말하는 그를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며, 스오우는 뒷좌석에 앉았다. 츠키나가는 그가 앉자마자 히터를 들어 주었다.
“그래서 재워주실 수 있으시죠?”
스오우는 불안감에 한 번 더 물었다. 츠키나가는 시익 웃으며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
그들은 샤브샤브 재료를 샀다. 네비게이션이 말썽을 부려 헤맨 탓에, 슈퍼에 도착했을 때에는 타임세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도시락이 80엔인줄 알았다는 츠카사의 말에, 츠키나가는 미간을 좁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숙’과 ‘식’이 모두 제공되는 숙소를 꼭 마련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츠카사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도련님의 ‘기행’이 매우 불안한 것 같았다. 그리 넓지 않은 슈퍼를 둘이서 몇 바퀴나 돌 동안, 츠키나가는 핸드폰의 연락처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 쉬다가 다시 바라보았다. 깊은 고민이 앉아 있는 행동이었다.
쯔유와 가쓰오부시를 사는 것 보다는 인스턴트 우동으로 육수를 대신하기로―둘 다 그 편이 맛이 있을 거라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하고, 두부와 버섯, 얇게 썬 소고기를 사 작업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어느 정도를 먹는 지에 대해 둘 다 알 수 없어, 그들은 모자라면 야식을 사러 편의점에 가기로 약속했다.
츠키나가는 제 작업실이 장난 아니게 더러울 거라고 예고했다. 그의 ‘예고’는 영화관이 흥행을 시키는 영화 같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몇 번인지 세었던 걸 까먹을 정도였다. 그는 작업실의 닫힌 문을 열기 전에도 몇 번이고 당부했다. 지겨움을 참으며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가 상상할 수 있는 더러움의 가장 최고봉을 상상하고 있다고 몇 번이고 말한 다음에서야 츠키나가의 작업실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의 작업실은 18평 정도의 작은 주택이었다. 한 사람이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았고, 두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버거울 것 같았다. 안방으로 사용되는 곳에 벽을 얹어서 녹음실을 꾸려 놓았다. 작은 방에서 생활하는 듯 그 방 입구 주변을 중심으로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츠카사는 재활용품이 들어 있는 작은 박스를 넘었다.
츠카사가 소음을 걱정하는 듯, 가볍게 벽을 노크하자 츠키나가는 방음 소재를 매우 철저하게 둘렀기 때문에 소리는 잘 새어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바닥에 쌓인 상자와, 재활용품 무더기 사이를 지나갔다. 플라스틱만 겨우 분리해둔 재활용품은 대부분 도시락 뚜껑이었다. 그의 작업실은 빈 도시락통과 빈 에너지드링크 캔들이 널려있는 쓰레기장의 우주였다. 츠카사는 자신의 미래가 암담할 것이라 확신했다.
사실, 얼굴도 모르는 그의 지인의 집에서 기거하는 것 보다는, 츠키나가의 작업실에서 머무르는 것이 편했다. 하지만 작업실 꼴을 보니 차라리 모르는 사람의 집에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곳에서 계속 살게 된다면, 학교에서 숙식하는 것 보다 체면은 차리겠지만 학교에서 숙식하는 것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지러운 작업실 안에서, 그들은 표류하듯 움직였다. 츠키나가는 봉투를 들고 ‘부엌’ 쪽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에 옷 걸어놔! 라는 그의 외침에, 츠카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쓰레기장일 거라고 생각했던 작은 방은 그나마 사람이 사는 꼴을 하고 있었다. 28인치 캐리어 하나가 반쯤 열린 채로 방치당하고 있는 걸 빼면 사람이 살기에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츠카사는 침대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옷가지들과, 미처 정리하지 않은 책, 악보, 쓰레기들이 한데 모여 소우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여행을 준비하는 듯 했다. 몇 개의 일상복은 캐리어 안에 쑤셔 박혀 있었고, 수건 몇 장이 열린 틈새로 보였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작업실에 이사 한 지 며칠 되지 않은 것도 아닐 텐데, 그는 여전히 짐을 풀지 않은 채였다. 츠카사는 저가 기억하고 있는 츠키나가 레오라는 사람만큼이나, 그의 방도 혼돈이라고 생각하면서 느리게 하품을 했다. 방 밖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와 억울한 듯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과 방 사이의 방음에는 신경 쓰지 못했는가 보다 생각하며 츠카사는 핸드폰에 충전 케이블을 연결했다.
우동 육수를 작은 냄비에 담았다. 두 사람이 먹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냄비였지만, 남은 게 그거 밖에 없다는 소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가출’ 말고는 모든 것이 예기치 않은 일들이었다. 야채가 담긴 우동 육수가 보글보글 끓었다. 츠키나가는 거기에 눈대중으로 간장을 넣었다. 불안한 얼굴로 냄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호쾌하게 웃으면서 먹고 죽진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더 늘어난다는 걸 알고 있을지 생각하다, 츠카사는 천천히 젓가락을 들었다.
고기를 넣어 두어 번 흔들고, ‘야매’로 만들었다는 양념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알싸한 고추 맛이 혀에 감돌았다. 지나치게 짠 느낌이었지만 고픈 배에 가릴 건 아니었다. 조금 키치한 맛이 나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니 츠키나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맛없는 전골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맛없는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츠카사는 자신이 가출을 했던 경위를 다시 한 번 설명했고, 츠키나가는 해결이 될 때 까지 절대 굽히지 말라고 조언했다.
제 이야기를 씻은 쌈채소의 물기를 털어내듯 다 털어내고 난 다음, 츠카사는 츠키나가에게 어떻게 살고 있느냐 물었다. 잘 살고 있어요? 라는 질문에 츠키나가는 음, 하고 고민했다. 그는 귀 뒤를 손가락으로 벅벅 긁고, 고기 몇 점을 입에 넣어 삼킨 뒤에야 자신이 작곡에 매진하고 있으며, 이번 시즌에 최고로 흥했다고 대답했다. 츠키나가는 핸드폰으로 음악 재생 사이트에 들어갔다. 소리가 켜져 있는 핸드폰을 누를 때 마다 물이 튀기는 소리가 났다.
1위는 여전히 세나 이즈미 작사, 작곡가 May-lily의 「양파의 마지막 1mm」였다. 츠키나가는 이 곡만 아니었으면 자기가 1위를 먹었을 거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그는 2위의 「보고 싶어 사랑해」, 5위의「무서워」, 7위의 「하지만 너를」, 9위의 「보낼 수 없는 겨울」이 모두 자신의 곡이라고 소개했다. 곡들의 장르는 상이했으며, 작곡가 네임은 모두 달랐다. 소처럼 일하시는 중이군요, 하고 감탄하니 츠키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일 밖에 생각 할 게 없다는 너스레는, 졸아든 국물처럼 들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국물이 두 번 졸아들 때까지 서로의 근황이었다. 냄비가 작은 탓이었다. 그러다가 세 번째 물을 부울 때 쯤 그들은 ‘스오우 츠카사가 1학년일 때의 나이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리츠가 연기 쪽으로 나간 게 매우 의아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처음에 ‘착한’ 서브 남자 주인공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놀라서 반찬 통을 엎을 뻔 했다는 츠키나가의 말에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츠카사는 츠키나가의 말에, 나루카미 아라시가 그리스의 산토리니에서 로케 촬영을 끝낸 다음, 드라마를 찍고 있는 리츠와 컴백 준비를 하고 있는 트릭스타의 이사라를 제외한 예전 2-B반이 전부 나오는 여행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서 프랑스 파리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요즘 나루카미가 패션과 뷰티를 거쳐 힐링까지 손을 댄다면서, 야망이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츠카사는 그의 평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 선배는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세나는……, 요즘 딱히 하는 건 없을 걸? 고정 말고.”
“고정?”
“라디오 하고 있어.”
삼분의 일의 순수한 감정이었나, 츠키나가는 밑반찬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는 짠 반찬에는 맥주가 있어야 한다면서 입맛을 다셨다. 너는 뭐 들은 거 없어? 츠키나가는 츠카사를 턱짓하며 말했다. 그는 음, 하고 망설였다. 세나에 대해서 어물쩍어물쩍 들었던 가십 몇 가지가 떠올랐다. 그는 입 안에 있는 질긴 고기를 씹어 넘기고서 입을 열었다.
“요즘 번화가에서 주택가 까지 술 먹고 걸어 다닌다는 말 밖에 못 들었는데요.”
“그것 뿐?”
“아, 로맨스 영화 주연하고 OST 불러서 9주 연속 1위 하고 있는 거?”
“아아 스오, 정말이지 인스피레이션도 오지 않는 지루한 말이야.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매너리즘에 빠져 버린다고! 나도 알고 있어. 「양파의 마지막 1mm」잖아. 세나 이즈미 주연, 웰메이드 로맨스 영화.”
츠키나가는 자신은 뭔가 새로운 걸 원했다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입술을 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21세기는 정보화 시대인데 벌써부터 알고 있는 게 없냐고 이어지는 잔소리에, 츠카사는 밥상머리에서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옛말을 떠올렸다. 그는 고기 몇 점을 샤브샤브 육수에 떨어트렸다. 작은 냄비에서 고기가 파르르 끓었다.
몇 번이고 물을 부었기 때문에 진한 색이 된 육수 속에서 고기를 꺼내면서 츠카사는 츠키나가에게 뭘 알고 있길래 정보화 사회가 뭐고 뭔갈 더 알고 싶은 건지에 대해 물었다. 츠키나가는 다시 한참을 망설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으으,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속이 아린 표정을 하고 있다가, 한숨을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고양이를 길러.”
“고양이요?”
“품종은 노르웨이 숲, 좀 누리끼리한 앤데.”
“아, 그래요? 세나 선배 그런 거 귀찮아 할 줄 알았습니다.”
“이름은 사자 씨야.”
“되게 프라이빗 한 걸 알고 계시는 군요.”
츠카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우동 사리를 넣겠다고 선언했다. 츠키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아, 츠카사는 그의 왕님이 여전히 ‘기인’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친한 지인들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분위기가 휙휙 바뀐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둘 사이에서 샤브샤브 육수에 넣은 우동 사리가 팔팔 끓었다. 멍하니 앉아 있자, 냄비 바닥에 면이 눌어붙는지, 츠키나가가 젓가락으로 냄비 바닥을 벅벅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계에 소움이 그 정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실로 어색한 일이었다.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찾아왔다. 츠카사는 괜히 상추와 깻잎을 젓가락 끄트머리로 툭툭 건드렸다. 예의도 예절도 필요 없다는 건 나름대로 편했다. 그는 츠키나가의 작업실에 제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어색함을 계속 느끼다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츠카사는 입을 열었다.
“리더는 여행 준비 중인가요?”
“뜬금없는 소리네. 스오, 인스피레이션을 불러오고 싶으면 좀 더 자극적이고, 두근거리는 걸 말해줘. 지금은 별의 ㅂ자, 우주의 ㅇ자도 없다구.”
“작은 방에 캐리어가 있길래, 여행을 떠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츠카사는 작게 하품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조금 졸렸다. 츠키나가는 그와 눈을 마주치다가, 한숨을 픽 내쉬고 그의 앞 접시에 우동사리를 덜어주었다. 국자가 없어 숟가락으로 국물을 담아내 주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츠카사는 지금 이 시즌이라면 비수기니까 느긋하게 동남아를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조언했다. 그만큼, 츠키나가의 작은 방에 있던 옷가지들과 28인치 캐리어는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츠카나가는 여전히,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으음, 하고 고민하며 제법 심각한 얼굴을 했다. 츠카사는 제 어떤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못 본 사이에 그는 좀 더, 날카로워지고 불안해진 것 같았다. 괜히 우동 면을 깨작거리면서 입에 넣고 씹었다. 분명 국물과 함께 먹고 있음에도 입 안이 온통 버석거렸다. 아, 내가 아직도 겁이 많아. 츠카사는 츠키나가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 말을 흘려들었다.
“인생이란 물론 사랑을 향해 방랑하는 여행이지! 난 여기 정착했지만.”
“작업실이 곧 러브라는 말은 좀…….”
“음음, 여긴 나만의 우주라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우주! 유랑도, 히치하이킹도 허락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 내 오선!”
“그렇게 말씀하시면 여기서 자고가기 미안해지지 않습니까.”
츠카사는 농담하듯 말했다. 츠키나가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스오 여기서 자고 가? 허락 한 적 없는데?”
왕의 허락을 안 받는 기사라니, 왕이 됐다고 아주 그냥 기고만장해졌구나! 스오, 아하하, 재미있어!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츠카사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츠카사는 학교에서 자는 건 나이츠의 체면이 안 선다면서요? 라고 말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츠키나가는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적당히 익은 우동 면발 같은 표정이었다.
“세나네 집으로 가. ‘내가’ 연락해둘게.”
츠키나가는 ‘내가’라는 말에 방점을 두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그는 대단한 결정을 내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깊게 내신 숨에 샤브샤브의 진한 국물 표면이 흔들렸다. 츠카사는 젓가락으로 집은 면을 아 먹고 난 다음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는 ‘내가 연락할게’라는 말 뒤에는 ‘그러니까 넌 전화 안 해도 괜찮아’ 라는 말이 엉켜 있었다. 간접적인 연락은 사양이었다. 저가 세나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나 선배에게라면 저도 연락할 수 있습니다.”
“자고 가는 거 자체가 실례일 걸. 니가 연락하면 안 받아 줄 거야.”
“그리고 세나 선배는 누군가랑 동거하고 있다고 나루카미 선배가…!”
츠키나가는 기분이 나쁜 듯 표정을 구겼다.
“그런 거 상관없잖아. 우동 면 불어. 먹고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녹음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츠카사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졸였다. 오늘의 츠키나가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요즘의 그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데 몰랐던 것인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둘 사이에 쌓인 세월이 길었다. 그동안 더 적극적으로 연락을 했어야 하는 걸까. 츠카사는 젓가락을 깨작거리면서 면을 잘게 잘랐다. 기름기가 든 국물은 적당히 따듯했고, 물기를 먹어 흐물흐물해진 봄동이 맛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착잡했다.
세나의 집에서 자는 것도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만큼 고민하고 나온 집이었다. 몇 번이고 짐을 싸는 걸 시뮬레이션 하다가, 어느 날 캐리어를 펼쳐, 짐을 싸게 되고, 수백 번 생각했던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들’을 넣고, ‘넣기 싫지만 넣어야만 하는 것들’과 캐리어의 용량 사이에서 타협하며 짐을 쌌다. 들키지 않게 보관하다가, 감정이 터질 때 쯤 들고 나오는 일은 의외로 힘들다.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마음이 착잡했다.
아까는 잘 들리던 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통화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 불안감은 더 커졌다. 별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아까는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건 저를 불편해한다는 소리가 아닐까. 츠카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축축 쳐진 봄동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청경채와 봄동을 그릇에 담아 꼭꼭 씹어 먹었다. 국물이 적당히 스며 있어서 이제야 맛이 있었다. 맛있어지기 위해서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맛이 스밀 때 까지 끓였던 육수와, 부었던 물의 양을 헤아리면서, 츠카사는 츠키나가의 집에 인스턴트의 흔적들이 널려 있는 것을 비로소 납득했다. 샤브샤브의 국믈이 자작하게 졸아들고, 물 먹은 우동 면이 퉁퉁 불어 가는 것을 보면서, 츠카사는 숙주나물을 건저 먹었다. 봄동과 청경채, 숙주나물과 고기 몇 점 정도가 사라져가고, 양송이버섯이 없어졌을 때 쯤, 츠키나가는 하품을 하며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감과 함께 후련함이 앉아 있었다. 이상한 표정이었다.
“세나한테 가자. 재워주겠대.”
“정말입니까?”
“일단 오늘 하루지만. 하지만 쫓겨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어.”
츠키나가는 쓰게 웃었다. 그는 휴대용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그냥 도시락을 사 먹을 걸 그랬다는 푸념이 무겁게만 들렸다. 리더 맛없는 밥, 너무 먹지 마십시오. 츠카사는 ‘차라리 나가서 사 먹으라’는 말을 입 속으로 꼭꼭 숨겼다. 츠키나가는 그가 자신에게 충고를 하려면 백 년은 이르다는 말을 하면서 경쾌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마치, 고등학교 3학년의 츠키나가 레오를 느끼게 해 주어, 츠카사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세나와 무슨 내용을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알 수 없다는 게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츠카사는 다 먹은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중에 상은 내가 치울게,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며 한시가 바쁜 사람처럼 차키를 들었다. 디저트 먹으면서 쉴 시간을 달라는 츠카사의 요구에, 그는 디저트는 세나가 줄 거라고 말하면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의 템포는 다시금 빨라져, 츠카사는 도저히 그에게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행을 벌일 때와는 달리 초조함이 강하게 묻어나는 것 같았다. 변화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 ‘사이’에 쌓인 먼지가 많았다. 세월이라는 이름의 이물질이었다. 조금 더 연락하고, 그들과 호흡하고 있었더라면 이런 어색함이나 위화감이 들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사회인과 고등학생 사이의 골이 깊다고 생각하며, 츠카사는 츠키나가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츠키나가의 재촉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자신의 28인치 캐리어 앞주머니에 휴대폰 충전 케이블을 넣었다. 다른 집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고 나서야 잊어버린 물건이 무엇인지 생각난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츠카사는 자신이 무얼 빼 먹고 왔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심 한 이상 밀고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세나의 집에서 최대한 오랜 기간을 버텨야 했다. 학교에서 숙식하는 기사도 유닛의 왕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는 츠키나가가 설명해준 세 가지 ‘쫓겨나지 않는 방법’을 숙지하려고 노력했다. 의외로 간단한 항목들이라, 까먹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세 가지를 입에서 웅얼웅얼 거렸다. 스오, 빨리 나와! 라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츠키나가의 목소리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쯔유처럼 맑았다.
***
세나의 집은 츠키나가의 작업실과 멀지 않았다. 그는 단층으로 된 주택에서 살고 있는 듯 했다. 담은 높았지만, 높게 뻗은 벚꽃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정원에는 나무수국과 낮은 수국들을 여러 대 심어놓는다고 츠키나가는 자랑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는 세나 선배 집에 자주 오느냐는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로등 밑에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는 괜히 차의 자동 세차를 작동시켰다. 물이 뿜어져 나오고, 거품과 함께 와이퍼가 움직이면서 창문을 닦았다. 뜬금없는 일이었다.
츠카사가 낑낑거리며 제 캐리어를 트렁크에서 내리는 내내, 츠키나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현관 비밀번호는 05110502야, 라고 말하면서 하품을 할 뿐이었다. 리더는 들어가시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 츠키나가는 손을 뻗어 츠카사의 머리카락을 툭툭 두드리더니, 세나는 나 싫어해, 라고 대답했다.
“말은 험하게 해도 세나 선배는 리더를 꽤나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가 너무 요즘의 우릴 못 봤어.”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그는 들어가는 걸 보고 있을 테니까, 얼른 가 보라고 대답했다. 츠카사는 캐리어를 끌고 움직였다. 드르륵거리는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골목을 울렸다. 대문의 도어락에 위치했을 때, 츠카사는 비밀번호를 차례대로 입력했다. 그는 앞 네자리를 입력하고서 츠키나가의 차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때까지도 그 쪽에 있어서, 그는 뒷자리 네 글자! 라고 외쳐야만 했다.
공 오, 하고, 공, 이. 츠키나가는 두 글자씩 끊어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츠카사는 왕벚나무와 수국들이 잔뜩 심어진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벨을 누를까 하다가 시간을 생각하고 그는 정중하게 노크했다. 똑똑똑, 하고 경쾌하게 세 번을 두드리니, 그지 멀지 않은 곳에서 나가! 하고 크게 대답하는 소리가 번져왔다. 세나의 목소리였다. 9주 동안 음악차트에서 1위를 하고 있는 만큼, 목소리는 기억 속에서 마모되지 않았다.
세나는 잠긴 문을 열자마자, 반짝이는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얼굴이 붉었고, 술 냄새가 진하게 났다. 당황스러운 모습에 세나 선배? 라고 말하자, 세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카사 군 밖에 없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슬리퍼를 신고 츠카사의 등 뒤로 나아갔다. 무언가의 서프라이즈를 찾는 듯 움직이다가, 그는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분위기는 심해처럼 어두웠다.
“제가 온 게 반갑지 않으십니까?”
“아니 딱히. 카사 군 오랜만에 봐서 즐거워.”
“대놓고 실망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뭐, 그렇지.”
세나는 그의 캐리어를 들어다 방 안으로 들였다. 잘 정리된 집 안, 따듯한 분위기의 집이었다. 인테리어 소품 하나하나도 신경 써서 배치한 것 같은 집이었다. 군데군데 통일 된 향의 디퓨저를 놓아 방 안에서 내내 은은한 향이 감돌고 있었다. 츠카사는 곧장 걸어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과 식탁과 조리대로 구분 되어 있는 부엌에는 쌍문형 냉장고가 두 대 들어 와 있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캐리어의 바퀴가 돌돌돌돌, 하는 작은 소리를 냈다.
세나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먹지 않은 1인분이 남아 있었다. 저녁 드시던 중이셨어요? 라고 묻자 그는 시간이 몇인데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며 대놓고 투덜거렸다. 왕님은, 하고 세나가 다시 물었다. 도넛의 설탕 위에 묻은 시나몬만큼 쌉싸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츠카사는 그가 가로등 밑에 서 있다가 돌아갔다는 말을 전할 수 없어서, 그저 저 혼자 왔어요.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디저트는 여기서 먹으라고 했어요.”
“시간이 그런데 디저트 타임을 갖자고?”
“네. 세나 선배도 함께.”
“싫어, 반드시 살 찔 거야. 카사 군은 생각이 있는 거람? 만들어도 네 것만 만들 거니까 꿈 깨시지?”
세나는 하품을 하면서 냉장고쪽으로 다가갔다. 여전했다. 싫은 척, 싫은 말은 다 하면서도 자기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이 무언갈 요구하면 해 주곤 했다. 츠카사는 그의 붉어진 뒷목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알콜이 머무는지, 코가 알싸했다. 술을 마셨느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뒤를 돌아, 눈을 마주치는 과정이 길기만 했다.
디저트에 대한 이의는 받지 않을 것이라 하며, 그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딸기 얼린 것을 꺼냈다. 큐브로 만들어 놓은 그것과, 우유 얼음을 넣어 믹서기에 갈아주는 것 밖에 하지 않을 거라 통보한 세나는, 그에게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필요한 것만 꺼내서 씻으라고 말했다. 츠카사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지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맛없는 샤브샤브를 계속 먹어댄 탓이었다. 거실 한 가운데서 캐리어를 들고 고민하는 후배에게, 세나는 턱짓으로 들어가야 할 방을 알려주었다. 스쳐 지나가며 본 세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알콜 후유증 같은 슬픔이 붙어 있었다.
츠카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깔끔한 집 안에서 유일하게 어지럽혀진 방에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뻑뻑한 눈을 괜히 힘을 주어 감았다 떴다. 그는 침대 옆의 작은 공간에 캐리어를 넣고, 세면도구와 잠옷을 꺼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양말을 꼬불쳐 들고 세탁물은 어디다 놓느냐고 작게 물었다. 세나는 거실과 연결 된 베란다 쪽에 세탁 바구니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믹서기를 가동했다. 명백하게 새벽인 시간이었다. 뻑뻑한 얼음이 갈리는 소리는 지나치게 컸다.
새벽에는 어울리지 않는 디저트였다. 지적하고 싶었지만 세나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그의 마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믹서 때문에 소리는 닿지 않을 것이라, 츠카사는 그저 그냥, 차가운 걸 먹고 내일 아침에 집에서 못 나가겠다고 투정을 부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츠키나가가 말해주었던 ‘쫓겨나지 않는 마법의 행동’을 잊어버리지 않게 다시 한 번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첫 번째 조언을 다시 생각하다가,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가 캐리어를 열었다.
그는 짐을 풀기 시작했다. 옷장에 교복과 사복을 넣고, 유닛복을 정리 해 넣었다. 신발과 양말, 속옷 등은 미리 가지고 온 파우치에 넣어 수납장에 넣었다. 캐리어는 구석, 빈 공간에 수납했다. 츠카사가 자신의 짐을 성급하게 푸는 내내, 세나는 얼음을 곱게 갈았다. 세계를 울리는 듯한 믹서기 소리에, 그가 말하거나 물어보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츠카사는 방 안에서 그 소리를 멍하게 듣고 있었다. 얼음 입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게 갈아버려는 듯, 믹서기는 멈추지 않았다. 세나는 밤마저 갈아버릴 기세였다.
그에게서 나는 술냄새와, 막막함이 신경이 쓰였지만, 츠카사는 이방인처럼 방 안에 놓여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얼음 갈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작은 방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일 아침에 학교에 가느냐 물었고,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일 모래 무대에 선다고 말했다. 그런 주제에 이 시간에 디저트야? 세나는 시비를 걸 듯 말했다.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을 볼 때 마다, 대답은 해변에 다가왔다 사라지는 파도처럼 흩어지기만 했다.
자세한 사정은 내일 아침에 말해도 괜찮을까요. 츠카사는 딸기 음료를 홀짝이며 말했다. 얼음 입자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사 군은 가출하기에는 천 년은 일러. 세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방문을 세게 닫았다. 마치 문 밖의 일들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츠카사는 고등학교 삼학년의 세나를 떠올렸다. 그 때도 이렇게 히스테릭했던가를 고민하면서, 그는 맛있는 음료수를 홀짝였다. 적당한 당도와, 식감에 감탄이 날 정도였다. 츠키나가의 맛없는 요리와 대비되는 실력에, 츠카사는 둘이 같이 살면 서로에게 이득일 거라고 생각했다.
문 밖에서는 물으 트는 소리가 들렸다. 쏟아지는 물소리. 세나는 설거지를 하는 듯 했다. 츠카사는 컵을 가져다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침대 옆 협탁에 유리컵을 내려놓았다. 문 밖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츠카사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그는 어수선한 침대에 누웠다. 작은 방에는 누군가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츠카사는 자울자울 감기는 눈으로,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일지 추리를 했다. 물론 그가 방주인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멀리서, 오르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깊은 졸음이 밀려왔다.
설거지를 하느라 틀어놓은 물소리가 눈물처럼 울리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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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있을 '어나더 스테이지' B11부스(호미와 쟁기와 나의 투쟁) 에서 나오는
레오이즈 'Melancholy Kitchen'의 샘플이 올라옵니다.
200p가 넘는 분량, 느린 전개, 츠카사의 시선을 따라가는 서술방식을 이유로,
총 12편 중, 4편이 이 게시판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
레오이즈인데 츠카사가 열심히 밥을 먹고 있습니다.
츠카사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봄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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