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이즈] Shape Of You


Girl you know I want your love

저기요, 나 그쪽 사랑을 원해요.

Your love was handmade for somebody like me

그쪽 사랑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Come on now follow my lead

이리와요, 내가 리드할게요.

I may be crazy don’t mind me

난 미쳤을지도 몰라요, 신경쓰지 마요.

 

 

Shape Of You 

 

 

효율 없는 사랑을 한다. 세나 이즈미는.

유우키 마코토가 기억하고 있는 세나 이즈미는 언제나 그런 사랑을 했다. 일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영특하기 그지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불규칙한 궤도를 가지고 있는 행성처럼 굴었다. 누군가에게는 과하게 다가가고, 누군가에게는 과하게 멀어지곤 한다. 나쁜 버릇이었다. 그 감정이 누군가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유우키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두시, 그리고 삼십일분이 지나고 있었다. 도로와 인도의 경계를 가르듯 심어져 있는 가로등에서는 주황색 불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와이퍼가 창에 닿는 빗물을 지웠다. 아무것도 닿지 않은 창문을 비가 다시끔 노크했다. 그는 조수석에 던져놓은 핸드폰이 울리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고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유우키는 차선을 변경했다. 빨간 불을 무시하고 달렸다. 아무도 없는 것 마냥 고요한 도로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가만히, 머물러있듯 미동하지 않았다.

그 간격이 괜히 불안했다. 깊은 한숨을 담배 숨처럼 내쉬었다. 초조했다. 술에 취한 그를 데리러가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익숙하다는 지점에 짜증이 났다. 이건 다 그가 효율 없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우키는 깜빡이는 빨간 불을 바라보았다. 속도를 줄이고 건널목을 살폈다. 클러치를 밟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아 괜히 아무것도 차지 않은 목을 만지작거렸다.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 된 이유는 그가 해왕성의 궤도를 침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주제에 공전 궤도가 어긋나있어 가끔은 해왕성의 앞에서 태양을 바라볼 때가 있다는 그 발칙함이 용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깝다가, 너무 무겁다가. 질량도 가벼운 주제에 건방진 일이었다. 유우키는 핸드폰을 들었다. 나루카미가 알려준 장소에 거의 도착했다. 그는 전화를 할까 하다, 그만 두고 다시 전화를 조수석 시트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불안하게, 하고 있어.”

 

프라이데이니 주간문춘이니, 스캔들에는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는 주제에, ‘아끼는 사람이랑 같이 술을 먹으러 들어간 곳이 호텔이라니 질이 나쁘다. 스폰 기사가 뜨기 딱 좋은 호텔인 주제에 자기 차를 끌고 갔다는 것도 악질이다. 나루카미가 같이 있다면 호텔놀이라고 둘러 댈 수도 있지 그런 빠져나갈 구석도 만들지 않았다. 차라리 왕님이라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크든 작든 사쿠마가 같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새벽 두 시 사십분의 세나 이즈미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홀로 있는 것은 결백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무언가 상상을 덧붙여 그럴싸한 스캔들로 만들기에는 너무나 적당한 상황이었다. 가쉽을 좋아하는 기자들은 이미 세나가 체크인한 것 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검지로 핸들을 툭툭 두드렸다. 가죽에 지문이 묻으며 나는 신경질적인 리듬을 듣다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사소한 불안과 약간의 짜증이 그의 심장을 노크했다.

그는 완벽한 스타다. 나루카미가 제게 연락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완벽을 사소한 외로움으로 깨버렸을 때의 후폭풍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우키는 그가 외로움을 모르는 인종인 것처럼 구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혼자 술을 마시러 어색한 장소에 굴러들어가는 것은 대부분 사람 때문이었다. 효율 없는 사랑을 매번 보는 걸 질리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핸들을 돌렸다.

 

시 외곽의 싸구려 호텔은 세나 이즈미스럽지 않다. 이 지점이 오히려 더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을 지금의 세나는 판단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는 너무 많이 주었거나, 너무 덜 준 것들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있음으로 뒤를 돌아볼 여력도 없다. 유우키는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유메노사키의 울타리 안에서는 그저 속만 상하고 넘어갔을 일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는 조금 다르게 변주되는 것을 몇 번이나 봐 왔다. 가끔은 담배였고 아주 가끔은 술이었다.

강한 냄새를 싫어하면서도 굳이 그것을 입에 댄다. 심야에 운전하는 걸 싫어하는 제가 차를 몰고 오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손등에 코를 대고 향수 냄새가 남아있는 지를 확인했다.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가볍게 정리하면서 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자꾸만 삐쭉거리는 언어들을 가지런하게 맘속에서 빗어내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는 순간 화를 낼 것 같았다. 유우키는 룸미러 속 제 눈을 바라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미련해요. 라는 말을 입 속에서 달콤하게 굴려본다. 이즈미 씨, 혼자 마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나도 왔어요. 라고 말해야지, 생각하며 입술에 달라붙지도 않는 말을 꾹꾹 눌렀다. 볼을 부풀린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술이라도 사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유우키는 핸드폰을 들었다. 온 연락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때문에 약해질 때 그는 절대로 유우키를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척 굴면서 저는 선 밖으로 빼버린다. 가장 많이 부르는 건 왕님이었다. 두 번째로 많이 부르는 건 작은 쪽의 사쿠마였다. 세나는 왕님작은 사쿠마는 둘 다 밤잠이 없어 부르기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가끔은 두 사람 모두를 불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기만 한다는 소리도 건너건너 들었다. 세나는 이런 말을 유우키에게 해주지 않는다.

그만의 불문율이었다. 술에 꼴아 있을 때도 어기지 않는 규칙이었다. 유우키는 룸미러 안의 제 표정을 살폈다. 명백한 짜증이 묻어 있었다. 숨을 고르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머리카락이 삐쳐있는 게 신경 쓰인다고 생각하다가 괜히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몇 번 눌렀다. 그는 나루카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방 번호를 확인하고 차 문을 열었다. 한 여름의 새벽공기는 나름 쌀쌀했다.

세 번째로 많이 부르는 것은 나루카미였다. 오늘도 나루카미에게는 새벽 내내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당장 찾으러 가기에는 곤란하다는 말을 들은 건 한시 경이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차키를 들고 다시 나왔다. 구겨 신어 자국이 남은 신발 뒤축을 제대로 빼 신으면서 유우키는 차 문을 잠궜다. 삐빅, 그리고 찰칵. 문을 다시 당겨 잠겼는지를 확인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로비는 어두컴컴했다. 어딜 보나 세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기다렸다. 로비에 있는 괘종시계의 추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다가, 사람이 나오면 곤란한 듯 웃었다. 세나 이즈미씨가 찾아서 왔는데요, 근데 연락을 안 받아요. 아마 자나 봐요. 깨우기 싫으니까 전화하기 싫어요. 그냥 들어갈게요. 유우키는 능숙하게 말하면서 곤란한 듯한 얼굴을 만들었다. 열쇠를 꺼내 주자 활짝 웃는다. 친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관계란 편리하다. 그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승강기 쪽으로 다가갔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위로 올라가는 동안 입 속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아까 부드럽게 고쳐놓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나한테 연락 안했어요? 왜 전화 안했어요? 왜 내 전화 무시했어요? 왜 안 알려줬어요? ? ? ? 연쇄되는 질문만이 그를 따라 궤도를 돌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카펫이 깔려 있는 어두운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복도로부터 아홉 번 째 방을 마주했다.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연신 눌러 내리다, 열쇠를 가져다 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술 냄새가 났다. 곧장 방 안으로 다가가자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세나가 보였다. 그가 밝혀놓은 인공우주 모양의 무드등이 싸구려 주황빛을 내고 있었다.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고 그제야 안도했다. 유우키는 방 안 중앙에 있는 무드등을 바라보다 그의 옆에 앉았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누워 있는 모습이 애잔했다.

동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 세나 이즈미를 발아래 두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답답했다. 그가 제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는 그의 우주에 초대받은 불청객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들이 모두 그랬다. 약한 모습과 뒷면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연락을 하고, 보고 싶다고 말해주었으면 싶었다. 유우키는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부드러웠다.

샴푸 냄새가 났다. 끝이 덜 마른 구석이 있었다. 방 한쪽의 테이블에는 와인잔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기포가 빠진 맥주가 들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패키지를 뜯지 않는 와인병과 그가 좋아한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큐브 치즈의 겉포장지를 보면서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 이즈미의 태양계에서 제가 낄 자리는 없어 뵈는 듯 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 효율이 좋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저를 따라다닌다. 유우 군이 원한다면, 유우 군을 좋아해, 유우 군- 형아를 이렇게나 생각해준 거야? 유우 군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뻐. 유우 군이, 유우 군이, 유우 군이, 라고 이어지는 목소리를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유우키에게 언제나 상냥한 세나 이즈미였다. 그는 효율적으로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언제나 완벽한 모습과 다정한 형아를 보여주는 것은 그의 사랑이 비효율의 끝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손아귀에 쥐고 있는 건 언제나 완벽하게 써먹어야 한다는 말을 가장 지키지 못하는 건 세나였다.

아이러닉했다. 그래서 우울했다. 파랑 같은 기분이었다. 유우키는 그의 머리카락을 계속 정리했다. 예민한 주제에 깨질 않는 모습이 어색했다. 유우키는 깊게 잠든 그의 귀에서 떨어져 나온 커널형 이어폰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에 이어진 그것을 손에 들었다. 그는 세나에게 몸을 기대었다. 체중이 실림에도 불구하고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유우키는 그것을 손바닥에 담아 가만히 귀에 가져다 대었다. 직접 꽂지 않은 이어폰에서 삐져나오는 리듬이 손에 고였다.

제 귀에 곧장 들어오지 않고 겉도는 듯, 막힌 듯 들려오는 노래를 중얼거렸다. 애드시런의 shape of you였다. , 던지듯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우키는 천천히 이어폰을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침대의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 하고 내는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불이 침대 시트와 맞닿아 바삭바삭거렸고, 유우키는 천천히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펴는 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낯선 그림자를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망할 오카마가 연락했어?”

 

세나 다운 말이었다. 글쎄요, 라고 말을 흐리며 유우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침대 곁 바닥에 털썩 앉았다. 세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오늘 새벽까지 촬영 있었잖아, 라고 중얼거리는 말에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다가온 말에 다가가지 않으니 대화가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삐걱, 삐거덕거리는 사이가 멀었다. 제 중력에 편입되지 않은 그가 제법 제멋대로라고 생각하며, 유우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방 안 가득한 술 냄새가 어색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유우키는 갈까? 하고 물었다. 갈까, 라는 말에도 그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찌푸린 채로 얼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제가 그를 찾으러 오는 것을 싫어한다. 계산적이지 못한 사람, 이라고 말할 뻔 한 것을 입 속에 구겨 넣었다. 저는 지금 소년이 아닌데 그는 저에게서 소년을 기대한다. 이 애매한 어긋남은 다분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그 망할 오카마지? 하고 다시 묻는다. 나루카미를 위해 고개를 젓는다. 유우키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간다. 침대에 허락 없이 눕는다. 팔을 그의 허리에 얹어 눌렀다.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형아랑 같이 잘래, 라고 속없이 굴었다. 침대 시트에 떨어져 있는 그의 이어폰 한쪽을 주워 그에게 돌려주었다. 아직도 애드시런의 shape of you가 들려왔다. 몸이 가까워질수록 술냄새가 났다.

완벽에서 멀어지는 그가 어색했다. 사랑하는 동생은 볼 수 없는 행성의 뒷면. 해왕성과 천왕성 정도만 알 수 있는 명왕성의 일탈. 일그러져있는 궤도를 비집고 들어간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운전해서 왔어? 라고 묻는 목소리에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벽까지 일 있었잖아, 라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 물었는데 두 번 다 흘리는 질문들에 대해서 세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힘든 일 있었어?”

딱히? 그냥 이러고 싶었는데.”

무드등 좋아해?”

아니. 별로.”

이즈미 씨 지금 굉장히 청승맞아.”

어른은 그럴 때도 있어.”

 

나도 어른인데, 라고 말하면서 유우키는 제 볼을 긁었다.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보다가 세나는 뒤를 돌았다. 얇은 티셔츠 아래로 비치는 그의 얇은 선을 바라보다가 유우키는 손을 뻗으려 했다. 닿을 듯 말 듯, 제 손가락과 그의 등 사이의 간격은 우주만큼 넓었다. 그 간격을 좁힐까 하다가,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아가 한심해? 라고 묻는 목소리가 곧바로 다가왔다. 아니? 라고 대답하자 세나는 그럼 됐어, 라고 말했다.

노래를 하듯 가볍게 울리는 목소리가 중력을 가지고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지점이 매우 어색했다. 서먹했다. 닿을 듯 말 듯한 그 작용을 어떻게 좁혀야할지 알 수 없어 유우키는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늘 촬영장에서 약간 트러블이 있었는데 그게 좀 마음에 남아서 우울해졌어. 그런데 그 때 이즈미 씨 생각이 나서 그냥 보러 오고 싶었어. 혼자 술 먹고 있다고 해서 그냥, 그냥.

그냥. 그냥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 사탕처럼 굴렸다. 동생이 형을 보러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라는 변명을 더해 그에게 차려 놓았다. 그는 그것을 곱씹는 듯 가만히 음미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뒤를 돌지 않는 모습에 그냥, 이라는 말을 한 마디 더 붙여 놓았다. 닿을 듯 말 듯 한 그 간격을 억지로 좁히면 역횩과만 나는 것을 유우키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효율적이지 못하다. 계산적이지 못하다. 감정을 어디다 쏟아야 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정답을 제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답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멋대로 헤매고 멋대로 상처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 유우키에게 작용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빙글빙글, 제 궤도를 돌고 있을 뿐인데 멋대로 상처를 받고 있는 건 유우키 마코토였으니까. 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는 이라는 이름으로 물러선다.

 

늦게까지 돌아다니면 못써.”

보고 싶었는데.”

유우 군이 살갑게 굴어주는 건 기쁜데.”

.”

그래도.”

 

그래도, 라는 말을 곱씹으면서 유우키는 그의 가느다란 등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봐봐, . 이렇게, 멋대로 멀어지지? 라고 묻고 싶었다. ‘동생이라는 정의에서 저를 빼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유우키는 입 속에서 여러 가지 말을 굴리다가 다음에는 안 그럴게, 라는 말을 하면서 웃었다. 그제야 세나는 뒤를 돌았다. 가지런히 정리된 예쁜 얼굴이 웃고 있었다. 푸른색 눈동자 안에 담긴 제 표정이 어색해 유우키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어냈다.

형아는 유우 군을 정말정말 좋아해- 라고 노래하듯 말하는 건 평소의 세나 이즈미다. 그는 다시 의 입장에서 동생을 쓰다듬는다. 알고 있지, 라고 맥락 없이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웃는다. 오늘은 누가 힘들게 했어, 라고 묻지 않는다. 형아는 그런 자잘한 것들을 동생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지독한 감정이었다. 제 품 안에 쏙 들어올 것 같으면서도 들어오지 않는다. 팔베개 해줘, 라고 어리광 부리듯 말하자 그는 선뜻 팔을 내밀었다.

베개를 고쳐 베고 누운 그의 팔에 머리를 댔다.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이즈미씨, 오늘 나는 조금 힘들었는데 라고 지어낸 거짓말을 한다. 제 동생이 부리는 영악함을 알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유우키는 눈을 감았다. 아마 그는 제가 한 말을 우선으로 믿어줄 것이다. 그게 형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의 사랑은 저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이 제 것과 카테고리가 다르다는 것이 유우키의 유일한 비극이었다. 세나는 손을 뻗어 그의 안경을 벗겼다. 유우키는 그가 아직도 꽂고 있었던 이어폰 한 쪽을 뺐다.

하지만 그가 제 세계로 편입되는 거창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귀를 기댔다. 심장이 콩콩 뛰고 있었다. 제 것과 다른 소리일 게 분명했다. 그는 효율적인 사랑을 하지 못한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거나 너무 멀리 멀어진다. 비즈니스에서는 영악하게 굴고 있는 주제에 가까운 사람의 감정은 바라보지 못한다. 너무 무른 구석을 바라보다가 유우키는 눈을 감았다 떴다. 가까이 있는 그의 얼굴이 뿌얘졌다가, 다시 선명하게 보였다.

 

지어낸 거짓말에 그는 성실하게 대답을 한다. 고작 몇 개월 먼저 태어난 주제에 형처럼 위로한다. 정작 제 품에 안겨 있는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호텔을 나설 때 키스를 하고 싶었다. 저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주간 문춘이든 프라이데이의 카메라던 상관없었다. 화보를 찍을 때처럼 렌즈를 응시하면서 어그러진 관계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떤 마음으로 걱정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주제에 제 속편한 말만 하고 있는 그의 우주를 바라보았다. 천장에 닿아 있는 무드등의 불빛은 안경을 벗은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기에, 모양이 아닌 그저 뭉뚱그려진 빛의 무리처럼 보였다. 유우키는 꼭 그 모습이 세나가 오해하는 제 모습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힘들었지, 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여전히 저를 위로하고 있었다.

정말로 위로받아야 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저 자신의 사랑이 누굴 위해 준비 되어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작은 사쿠마나 그의 왕보다, 그의 감정을 오롯이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저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데. 유우키는 그의 입술을 올려다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침대의 어드매에 어지럽게 엉켜있을 이어폰에서는 오-아이- -아이- - 아이- - 아이- 하는 목소리가 늘어지듯 들려왔다.

 

세나 이즈미는 효율 없는 사랑을 한다.

그것이 유우키 마코토를 위해 준비되었을 것임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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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계의 저편




봄꽃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니까, 「오필리어」 같은 열일곱 살에는. 그리고 스물아홉 살의 세나 이즈미는 ‘사랑은 모두 부질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느는 건 사랑에 대한 환멸과 인생에 대한 지루함뿐이었다. 누군가가 수영장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소통이랑 장비 체크해! 라는 신경질적인 사진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나는 다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좀 더 어렸을 때에는 헤어지면 마냥 아팠던 것도 같았는데, 이제는 그저 버석거리는 자작나무마냥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세나는 양 팔을 쭉 뻗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옆에 없다고 해서 일을 나가지 않을 것도 아니었으며, 이미 잡혀 있는 스케쥴을 할 수 없다고 뻗대지도 않을 것이었다. 세나 이즈미는 어른이었고, 자신의 사생활을 일에 끌어오는 ‘아마추어’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메이크업아티스트에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피곤하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신경질적인 이미지'의 좋은 점은, 이렇게 대답했을 때 넉살좋게 이유를 물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신경과민에는 정수리를 눌러주는 편이 좋다고 대충 대답했다. 세나는 부드럽게 웃으려 노력하며 '참고하겠다'고 속삭였다. 

그 사람과는 삼 주, 아니 이 주 전 쯤 헤어졌다. 적당히 사귀기에 좋은 사람이었다. 끝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 요란하게 알리고 시작한 연애도 아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느는 건 신중함이라 그가 ‘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건 나루카미나 유우키 같은 지인뿐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헤어졌다는 보고는 하지 않았다. 이별은 그다지 큰 이벤트가 아니었다.

모든 게 귀찮았다. 연애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과정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는 건 어떠냐는 권유도, 왜 헤어졌는가를 기승전결에 맞추어 설명해야 하는 재연극장도 하기 싫었다. 모든 과정이 그저 귀찮았다. 유우키가 묻는다고 해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메말라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만약, 다음에 연애를 하게 된다면 주변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고. 

거울에 달려 있는 조명 때문에 시야는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제 얼굴을 가볍게 팡, 팡, 두드리는 브러쉬 소리를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곧 물 속에 들어간다는 긴장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심장이 어째 목구멍 끝에서 뛰고 있는 모양이라 세나는 심호흡을 하며 손깍지를 더욱 더 단단하게 매었다.

눈두덩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섀도우는 평소보다 짙었다. 세나는 찌푸린 채 제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제가 낯선 화장을 덮고 있었다. 화려한 화장에 비해 세팅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유난히 수수해보였다. 그는 메이크업아티스트의 지시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글리터가 그의 눈 아랫부분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명을 받자 글리터를 바른 부분이 반짝였다. 물속에 들어가면 의미가 없지 않을까? 라고 묻자 메이크업아티스트는 그럴 수도 있지만 일단은 노력을 해 보는 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세나의 눈을 마무리하고, 입술을 우- 하고 키스하는 것처럼 내밀어 보라 요구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느린 통기타 소리가 겹쳤다. 키린지의 「에일리언즈」였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고 다시 숨을 내쉬었다. 립 컬러를 골던 그녀는 옅게 웃었다. 이제 세나 씨 집중해야 겠다. 라는 목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오늘 작업을 같이 하는 사진작가 A 씨는, 모델이 원하는 곡을 현장에서 내내 틀고 있는 사람이었다. 조명을 옮기는 소리가 분주했다. 그러니까 이제 말 걸지 말아요. 세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괜히 심술을 부린다며 웃었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기자재를 옮기는 난잡한 소리에 섞여서 들려오는 「에일리언즈」는 쓸쓸하고, 공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는 괜히 둥근 손톱 산을 쓰다듬었다. 수십, 수천, 수만, 수십만의 컷을 찍어도 카메라 앞에 설 땐 긴장이 되었다.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다 눈을 떴다. 거울 속 저를 바라보았다. 아이라인으로 덧그려놓은 날카로운 라인에 푸른 눈은 제법 볼만했다. 유리조각처럼 섬세했다.

스스로를 보면서 '예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의무처럼 짊어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았다. 아직 저가 자신의 미의식에 부합하다는 것은 묘한 고양감을 줬다. 하지만 묘한 불안감이 그의 등에 무게를 실은 채 기대어 있었다. 그는 메이크업을 하기 전에 들었던 ‘오늘의 컨셉’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물에 들어가는 건 역시 긴장 되죠? 라고 묻는 목소리에 세나는 ‘세나 이즈미’라 괜찮다, 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오필리어」였다. 청순하고 아름답게. 동시에 죽음이 가까워 온 유리조각 같은 미성숙함. 그는 제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갔다. 더 이상 소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들어오는 일들은 대부분 이런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나는 잘게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고조가 없는 음악은 어느새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세 번째로 재생하고 있었다. 당신을 좋아해요 베이베, 라고 툭 던지듯 털어놓는 부분을 그는 제 목소리로 따라했다.

옛 애인은 특히, 이 부분을 싫어했다. 쓸데없는 기억들이 파편처럼 그의 수면위로 올라왔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아프게 했어요? 라고 그녀가 질문했다.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런 세팅도 하지 않은 회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거리다 가라앉았다. 그녀는 머쓱한 모양인지 괜히 웃다가 입을 열었다.


“입술 다시.  키스하는 것처럼 우- 해봐요.”


세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브러쉬가 작고 얇은 입술을 쓸어내릴 때 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엷고 연약한 색으로 채우고 있다며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긴장하고 있는 게 티가 난 모양이었다. 세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음, 하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마주 닿게 하라 요청했다.

음, 하고 입술을 마주대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메이크업아티스트는 그에게 물속에서 숨을 잘 쉬냐 물었다. 숨을 예쁘게 쉬어야 촬영이 예쁘게 끝난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나는 입술을 키스하는 것처럼 내밀었다. 얇은 브러쉬가 그의 입술을 가볍게 여러 번 스치고 지나갔다. 의외로 립은 강하게 바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나는 거울 안의 자신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세팅이 되지 않은 잿빛 머리카락과 달리, 아이메이크업은 화려했다. 부드럽게 발린 섀도의 끝은 물고기의 비늘 같은 무늬를 그려 완성했고 아이라인은 깊게 뺐다. 세나는 제 앞머리 끝을 만지작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남자 보컬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고, 촬영장 안의 스텝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영장 특유의 화학약품 냄새를 맡으며 세나는 호흡을 정리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 애와 같이 듣던 노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고작 그러한 일’ 때문에 일할 때의 습관을 바꾸고 싶진 않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세나는 의자에 홀로 앉아 손을 만지작거렸다. 돌입 전의 긴장감을 나눌 상대가 없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상실’이었다.

전 애인과 함께 달의 너머로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먼 이야기였다. 발을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담가 두고, 진저 레몬 맥주를 먹으면서 했던 이야기인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아마 후쿠오카 쪽이 아니었을까. 성게와 크레송을 볶아낸 안주가 맛있었던 곳.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 주제에 이런 사소한 것만 기억이 난다는 게 제법 얄궂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당신이 좋아 에일리언’ 이라는 가사가 들려왔다.

눈을 감자,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수중水中 마냥 숨이 가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마다 아가미가 돋을 것 같았다. 세나는 폐호흡을 하는 물고기를 떠올렸다가 발끝을 까딱였다. 거울 속 그는 표정 없이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결핍이 느껴지는 건 아쉬울 때뿐이다. 철 지난 사랑은 깎아낸 손톱달 만큼이나 의미가 없었다.

세나 이즈미는 ‘예전 버릇’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기실에서는 언제나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페이스북의 메신저던, 인스타그램의 다이렉트 메세지던, 라인이던 간에 언제나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것 같다. 관습적인 일이었다. 다른 날임에도 반복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말에 그가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이란 건 언제나 부질없다고 말하던 나루카미의 목소리가 더 선명했다. 나름 오래 사귀었었다. 상실이 옅어 이상했다. 어딘가 붕, 뜬 느낌이었다. 세나 이즈미는 궤도와 중력을 잃어버린 행성을 떠올렸다. 지금의 저와 별반 다르지 않는 이름 없는 별을 그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상을 하기에는 별로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사랑의 끝은 맥주 거품과 같았다. 텁텁하고 쓰기만 한 주제에 다른 맛에 금방 지워져버린다. 그는 과거를 짚었고, 조금 더 과거를 짚었다. 이상하게 근래 했던 연애는 모두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나곤 했다. 깊게 남는 상처 또한 없었다. 흘러가다가 잠시 고이고, 다시 흐르는 빗물 같은 사랑은 세나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이런 관계는 실패, 일까. 가만히 한숨을 쉬며 세나는 중얼거렸다. 기타 소리가 깊게 끊겼다. 그리고 이어, 한 번 끝났던 노래가 다시 반복되어 들려왔다. 버전을 바꾸는 것도 없이, 다시 「에일리언즈」였다. 옛 애인은 그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걸 싫어했다. 염세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세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가사를 천천히 곱씹었다.

그대가 좋아. 에일리언. 이 별의 외딴 곳에서, 마법을 걸어 보이겠어. 그래도 되겠니? 라고 묻는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동시에 어 딘가 음울했다. 하지만 염세적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옛 애인이 그렇게 말하면 ‘염세적은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게 세나의 몫이었다. 이제는 할 일이 없는 말을 입 속에서 사탕처럼 굴리면서 그는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비어버린 잼통 안의 부스러기를 긁어내는 것처럼 추억이 방울졌다. 세나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와요, 라고 말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손을 흔들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영장의 마른 바닥만을 밟아가며 사진작가에게 가자, 그는 준비운동을 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스태프들은 전신 수영복을 입은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꼭 외계인 같다고 생각했다. 물 가까이에 오자 음악이 윙윙 울렸다. 가벼운 귀울음을 느끼며 세나는 수영장의 구석에서 천천히 스트레칭을 했다. 대기실에 남겨둔 핸드폰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팔을 하늘로 뻗었다.

옛 애인과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연예인이라고 해도 그라비아와 뮤지컬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전’ 아이돌과 ‘배우’의 영역은 상당히 갈리기 마련이었다. 친한 친구로 소문나 있는 게 조금 골치 아팠지만 동시에 캐스팅 되는 예능만 아니라면 평생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세나는 수영장 구석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물에 조명이 고여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는 천천히 발을 담갔다. 심장에서 가장 먼 곳부터 물을 묻혔다. 물의 온도는 차가웠다. 젖어드는 옷자락을 느끼면서 그는 맨 발을 물속에서 까딱였다. 천진한 오필리어의 모습을 이미지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잠수복을 입은 스태프들이 손에 꽃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어깨에 맨 산소통을 바라보며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 군, 준비 되면 들어가자.”

“A씨, 감사합니다.”

“모델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작품이니까.”


사진작가는 샷을 확인해야 한다며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자리를 바라보다 세나는 손끝과 팔에 물을 천천히 묻혔다. 찰박이는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반절 쯤 물에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전히 키린지의 「에일리언즈」는 촬영장에 들려오고 있는데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세나는 제 허벅지 옆을 짚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스트레칭을 하는 듯 목을 길게 뺐다. 천장에서는 밝은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어제의 오후 두 시경이 떠올랐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오렌지 빛의 세상이 다시 ‘옛 애인’의 조각을 끌어왔다.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그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을 세나는 확실히 반추할 수 있었다.

—너는 언제나 경계의 저편에 서 있는 것 같아.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사랑에 빠지려고 하지 않아.

세나는 부드럽게, 노래하듯 입을 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던 것 같았다. 나는 바다 안에 있어서 자꾸만 목이 마른데, 너는 해변가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어. 더 원하고 갈급하는게 나라서 너랑 사랑할 때는, 세나는 물을 받아 울리는 제 목소리를 듣다가 물속으로 뛰어내렸다. 약한 반향이 일었다. 오버 핏의 흰 드레스 셔츠가 물 안에서 해파리처럼 부풀었다. 그는 천천히 중앙으로 헤엄쳐갔다.


“너랑 사랑할 때는.”

비참해. 세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입술이 자꾸만 달싹였다.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키스, 라는 말에 다가오는 감정들은 담배 끄트머리에 달린 재 마냥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물 속에서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는 촬영장의 중심을 바라보다 다시 수영장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피우고 올게요, 라는 세나의 말에 A는 그럴 줄 알았다며 비상구를 가리켰다. 세나는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챙겼다. 봄 치고는 쌀쌀하다며 매니저가 가디건을 걸쳐주었다.

핸드폰은 챙기지 않았다. 젖은 바지가 움직일 때 마다 물 먹은 소리를 냈다. 숨이 막혔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물었다. 비상구를 열고 문을 닫았다. 녹슨 철문이 끼긱거리는 소리를 냈다.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선 당장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괜히 센치해진다고 생각하며 불을 붙였다.

여백 같은 시간이었다. 비참해, 라는 말을 키스대신 혀 위에서 굴렸다. 숨을 들이키며 불을 붙인다. 담배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진한 맛을 느끼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은 흡연을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면 어떻게 사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세나는 철문에 등을 기댔다. 가디건과 녹이 부딪히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약한 파열음이 일었다.

그는 연기를 내뱉었다. 비참한 사랑을 하고 싶진 않았다. 변명할 말들이 후회처럼 떠오르다가,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사라졌다. 끊어진 관계를 달콤한 말로 이어봤자 의미 없음이 분명했다. 어른의 연애를 했었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세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들이 사랑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상처는 뒤로 숨기는 것이 현명했다. 인어공주가 제 다리의 아픔을 가린 것처럼, 예전에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을 숨긴 것처럼 말이다. 세나는 연기를 불었다. 가볍게 흩어지는 그것들은 그가 얼마전 끝낸 사랑처럼 덧없이 흩어지기만 했다.

숨을 정리할수록 마음만 복잡해졌다. 키스하고 싶었다. 그리고 순간, 그 사람을 떠올렸다. 「달의 뒷면」에 있던 이상한 사람. 마일드 세븐 같은 구식 담배를 피우던 사람. 우디한 계열의 향이 잘 어울리면서도 한없이 가벼울 수 있는 사람. 오렌지 빛을 뭉쳐둔 것처럼 생긴 사람. 그리고 동시에 세나는 그를 잊는다.

모르는 사람과 키스한다는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았다. 세나 이즈미는 손해보는 게임은 하지 않는다. 세나는 담배 끝을 털었다. 난간에 재가 쌓이다가 불어온 바람에 하릴없이 흩어졌다. 그는 그것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저가 향수를 가져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 손을 꿰지 않은 카디건의 소매를 흩날렸다.

회색. 그는 짙은 회색과 파랑이 겹쳐진 수면 아래를 떠올렸다. A가 원하는 「오필리어」의 이미지는 그 곳에서부터 덧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담배를 난간에 비벼 껐다. 그는 곧장 두 대째를 꺼냈다. A는 모델의 이입을 중요시하는 남자이니 앞으로 한 까지 정도는 더 피우고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바람이 이미 젖어 있는 청바지 사이로 들어왔다. 그는 높은 난간에서 아래를 둘러보았다.

봄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월이란 날짜가 무색했다. 세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깨물었다. 멘솔 캡슐이 들어있지 않음에도 짓이기듯 이로 물었다. 눈을 감았다. 난간에 기대에 한숨을 내쉬었다. 호흡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천천히, 의식하면서 숨을 마셨다. 완벽한 연출을 꿈꾸며 「이미지」를 뭉쳤다. 다 큰 어른에게 죽음에 고정되어 있는 ‘소녀’를 연기하라고 하는 저의를 셈했다.

자꾸만 생각은 다른 쪽으로 뻗었다. “꼭 우주에 있는 것 같지 않아?” 라고 속삭이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촬영을 앞두고 있는 이 중요한 순간에 생각하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세나가 만드는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템포를 맞추지 않고 말을 걸고, 곁에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데도 옆에 앉았다. 그가 쓰는 곡은 분명 정돈되지 않은 채로 엉망진창일 거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필리어는 사랑하는 것이 비참했을까. 오필리어에게 사랑받던 햄릿이 비참했을까. 세나는 대학 시절에나 읽었던 ‘햄릿’의 원 텍스트를 떠올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여기 오기 전에 밀레이의 그림을 잔뜩 보고 오는 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담배를 마셨다. 폐에 연기가 가득 차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언제까지 연령과 맞지 않는, 조금은 변태적인 이미지의 화보를 찍을 수 있을지.

그는 모든 애매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복잡한 건 한동안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생각에 익숙해져 있는 그의 사고는 자꾸만 다른 곳으로 뻗었다. 생각은 자꾸 엉켜 풀리려고 하질 않았다. 시나몬을 넣은 벌꿀 칵테일을 마시고 싶었다. 아니면 샹그리아나 다즐링 냉침이라도 좋았다. 그는 괜히 연기를 삼켰다. 탐욕스럽게 폐에 채우고 아슬아슬할 때 까지 뱉어냈다.

허기가 졌다. 해결할 수 없는 깊은 허기였다. 하지만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그는 철문에 등을 기대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빌딩 숲에서는 발 디딜 곳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난간의 삐걱거림을 보다가 담배를 비벼 껐다. 달의 뒷면에 가고 싶었다. 그는 발을 가볍게 까딱였다. 여전히 별에서 그를 잡고 있는 중력은 건제하다. 그는 먼 곳을 보다가 제 발 끝을 내다보았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너무 많이 지체하는 것 보다는 빨리 찍고 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는 문을 열었다. 다시 ‘세나 이즈미’의 경계를 밟았다.

저를 맞이할 준비 된 수영장 쪽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런웨이를 걷는 것 마냥 당당하게 움직였다. '세나 이즈미'만을 원하는 저 공간의 주인공은 오롯이 저 뿐이었다. 고민은 다 털었느냐는 A의 말에 세나는 뭐, 그렇죠, 라고 대답했다. 다시 심장에서 먼 곳부터 물을 적셨다. 예민하고 기민하게. 평소의 세나 이즈미처럼 찍으라는 조언이 들려왔다. 조금 더 빨리 말해주지 않은 건 A의 나쁜 버릇이었다. 세나는 ‘에일리언즈’를 속삭였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경계. 느린 템포.

세나는 가디건과 라이터, 담배를 매니저에게 건넸다. 다시 프레임 안에 담길 차례였다. A는 기다리다 지루했는지 그를 렌즈에 담고 몇 번의 플래쉬를 터드렸다. 창백하고 아름다워. 준비가 되면 바로 가지, 라는 말목소리는 이 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위안이었다. 세나는 발 끝을 쭉 뻗었다. 벌써부터 귀가 먹먹했다. 예민하고 파리하게. 평소 제가 쌓아올린 이미지처럼. 세나는 되새기듯 스스로에게, 말없이 속삭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별 거 아닌, 익숙한 일이었다. 세나 이즈미에게는 호흡같은 일이기도 했다.

다만 중력을 믿을 수 없어 그는 괜히 떠들었다. 메이크업은 괜찮으냐 물었다. A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우냐 물었다. A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세나는 텀을 두지 않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천천히 헤엄쳐 세팅 된 촬영 장소로 다가갔다. 수신호를 하는 스텝들이 보였다. 푸른 물속에 잠겨있는 그들은 외계인처럼 보였다. 손으로 물을 가르고 나갈 때 마다 조명에 눈이 부셨다. 세팅하지 않아 힘이 없는 머리카락이 실오라기처럼 하늘거렸다.

세나는 조명이 설치된 한 가운데에 ‘도착’했다. 숨을 내쉬었다. 산소방울이 수면으로 포르르 올라갔다. 그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11m 깊이는 아득할 만큼 짙은 파랑색이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푸른 느낌에, 시야가 아찔해졌다. 그는 고개를 들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물이 가볍게 찰박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스텝이 튜브를 안겨주었다. 세나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끌어안았다. 살이 움직일 때 마다 튜브에서는 까끌거리는 소리가 났다. 키린지의 노래가 울리는 와중 들리는 그 소리는 마치 불협화음 같았다. 갑자기 찾아오는 옛 애인의 기억 같이 이질적이기만 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긴장하는 것 같다는 A의 말에는 긴장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낡은 거 아냐? 라는 나름의 철학을 내뱉었다. 

옛 애인이 말했던, ‘비참하다’는 말의 다음 언어가 기억나질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나 이즈미가 세나 이즈미이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나, ‘내가?’나, ‘내가, 너를?’이라는 말. 이 셋 중 하나를 내뱉었으리란 것뿐이었다. 세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A를 바라보았다. 미미한 불안감에 메이크업이 번졌나요? 라고 다시 질문했다. A는 ‘완벽하다’고 대답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텝들이 웅성거리고, 물을 찰박거리는 소리 때문에 노래가 잘 들리질 않았다. 섞이는 사운드 속에서 몇 분을 헤맨 후에야 겨우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달의 뒷면을 꿈꾸지, 라고 속삭이는 키린지의 목소리에 맞추어 그는 튜브를 놓았다. 그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중앙으로 헤엄쳐갔다. 가라앉지 않도록 발을 움직였다. 드레스 셔츠 사이로 물이 들어왔다. 하늘하늘하게 퍼지는 그에게 스텝이 다가왔다.

힘없는 머리카락 사이에, 푸른색 장미로 만든 화관을 썼다. A의 「오필리어」는 환상 속사랑을 꿈꾸는 이미지인 모양이었다. 햄릿의 무대에서는 절대로 구할 수 없는 파란 장미가 주는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세나는 옛 애인이 소리치던 것을 떠올려냈다. 괜히 싱숭생숭한 기분에 그는 눈을 감았다. 다들 조용히 해, 지금 세나 군 이미지 잡는 중이니까! A씨가 소리치는 소리에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을 거야.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해 줄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가 말했던 ‘경계의 저편’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나름대로, 많이 챙겼는데 닿질 않았던 모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트랙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세나는 눈을 떴다. 오늘 세나는 집중하는 데 오래 걸린다는 A의 말을 듣고 괜히 웃었다. 그의 웃음이 잦아들자, 그의 앞에 있던 촬영 감독이 수신호를 알려 주었다.

‘숨을 못 쉬겠어요.’ 와 ‘산소가 부족해요’ 였다. 전자는 수면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뜻이었고, 후자는 물속에서 산소를 마시고 싶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 미묘한 뉘앙스를 생각하며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면에 올라오면 촬영이 지체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그는 발을 구르던 것을 멈추었다. 몸이 조금 가라앉았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래로, 또 아래로. 몇 m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가라앉았다. 키린지의 노래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물 속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는 저를 담고 있는 카메라의 렌즈를 바라보았다. 물 아래에서 만나는 포식자와 같았다. 카메라의 렌즈는 곧 그의 현재를 잡아 채 포식할 것이었다. 스텝은 그의 주변에 미리 설치해 둔 ‘가라앉은 꽃’을 펼쳤다. 낚싯줄로 목을 꿴 그것들은 제법 그럴싸하게 보였다. 세나는 숨을 참았다.

카메라를 볼 때 마다 호흡이 모자랐다. 꼭 어두운 우주 속을 유영하는 듯 했다. 불현 듯 외로웠다. 그는 눈을 떴다. 시선 처리가 ‘좋다’던가, ‘이대로’라던가, 하는 수신호는 배우지 못했다. 물속에서 혼자 남겨진 듯 했다. 누군가가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소통할 수 없는 아득한 우주. 세나는 일부러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손을 들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발을 구르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불안감이 프레임 안에 계속 담겼다. 수면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스텝들이 다가와 그의 몸을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무수한 산소방울을 내뱉었다. 몇 컷을 찍었는 지, 언제 포즈를 바꿔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딴 우주에서 그는 혼자였다. 하지만 A는 답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원래부터가 그런 사람이었다.

머리를 흔들었다. 물 먹은 솜처럼 물이 떨어졌다. 무언가 묻고 싶었다. 나는 아름다운가요? 메이크업은 어떤가요? 조명은 괜찮은가요? 당신의 연출 속에서는 나는 완벽한가요? 하지만 그 말들은 목 끝에 감겨 움직이질 않았다. 촬영장의 수면 위에서는 키린지의 노래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물 안에 있다 밖으로 나온 것 만으로도 '유리'된 기분이었다. 세나는 침착하게 호흡했다.

신경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들려오는 노래에 집중했다. 좋은 멜로디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카랑카랑한, 오렌지 빛의 목소리였다. 햇살 같은 발성으로 외행성을 노래하는 가사를 곱씹었다. 멜로디에서는 물의 냄새가 났다. 얼굴을 찌푸리자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촬영 스텝은 그것 또한 「에일리언즈」라고 변명했다. 츠키나가 레오의 요즘 신보라는 설명을 왜 들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세나는 애써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밝은 목소리로 황량한 외행성과 잊혀진 명왕성, 그리고 그 곳의 외계인에 대해서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다가 세나는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귀가 먹먹했다. 침을 삼켰다. 세나는 다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외로웠다. 사랑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촬영 전 ‘사랑한다’고 말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냥. 남겨진 것 같아,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츠키나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귀울음처럼 먹먹하게 들리는 곡이었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입술을 씹었다. 키스하고 싶었다. 헤어진 애인이 생각나는 건 아니었다. 건조하고 예민하게, 라는 오더를 다시금 곱씹었다. 지금 이 순간 집중해야 하는 건 카메라뿐이었다. 점점 고조되는 ‘츠키나가’의 곡에 숨이 가빠왔다. 촬영 전에 ‘사랑해’ 라고 속삭여주던 연인의 목소리는 어떤 빛깔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가미를 잊은 물고기처럼 호흡했다. 다시 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우주처럼 어두운 그 곳에, 폐에 가득 숨을 채워 넣고 가라앉았다. 그가 숨을 내뱉을 때 마다 산소방울만이 수면으로 포로로, 날아갔다. 그는 다시 렌즈 앞에 자리했다. 그는 여전히 그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소외와 단절. 경계와 그 저편. 세나 이즈미가 연출할 수 있는 「오필리어」는, 그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렌즈와 비껴난 곳에서 시선을 둔다. 수중 촬영용 카메라 너머의 A는 이런 표정을 좋아할 것이다. 그의 취향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두 번 작업해본 게 아니다. 프로는 아마추어처럼 굴 수 없다. 호흡하는 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나는 카메라가 원하는 세나 이즈미의 가면을 썼다. 지금쯤 카랑카랑한 오렌지의 목소리가 노래하는 「에일리언즈」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을 것이었다.

물속은 짙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절 같은 그 파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세나는 알 수 없었다. 재해석 할 수 없는 것들이 모두 모여 목을 졸라왔다. 숨을 들이킬 수도 한숨을 내쉴 수도 없는, 맘대로 손을 움직일 수도 없는 세계. 세나는 렌즈를 응시했다.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무서웠다. 물속은 외로웠고 그렇기에 우주 같았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세나는 그 이질감에 한 문장을 더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주는 메꿔지지 않는다. 그제야 그것은 끊임없이 익숙한 성경이나, 경전처럼 변해 세나 이즈미의 세계에 스며들었다. 키린지의 「에일리언즈」나 츠키나가 레오의 동명의 음악처럼.

세나 이즈미는 끝없는 상실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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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즈  (0) 2018.06.13

0. 「달의 뒷면」






***

그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면 언제나 눈이 부셨다.

세나 이즈미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단종 된 담배의 낡은 케이스가 손바닥 안에 감겼다가, 풀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묘하게 습기가 찼다. 그는 갑 안에 들어있는 담배의 개수를 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콧잔등 아래로 내려간 선글라스를 치켜 올렸다. 카페 안에서는 낡은 LP판으로 긁어가며 재생하는 90년대 팝이 흐르고 있었다.

손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낡은 메뉴판은 누군가의 손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세나는 질감이 있는 오돌토돌한 오선지에 삐뚤빼뚤하게 적힌 메뉴들을 바라보다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고민이 되는 메뉴였다. 오이와 방울토마토 깨무침 같은 간단한 메뉴부터, 양갈비 로즈메리와 타임 프라이팬 구이까지. 맥주는 라거에서 에일을 거쳐 흑맥주와 윗비어, 바이젠까지. 세나는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1에서 10까지 수를 세는 것 마냥 성실하게 정렬되어 있는 메뉴 사이에서 무얼 고를지 고민이 되는 건 인간의 근본적인 습성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메뉴판을 계속 뒤로, 앞으로 넘기기를 반복했다. 낮 시간 때부터 마시는 체코 맥주와 가라아게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타타키 오이 같은 간단한 안주와 짙은 흑맥주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았다. 애초에 한 낮에 마시는 술 만큼 배덕하고 좋은 건 없으니, 뭘 고르던간에 최악은 아닐 것이었다.

잘 관리 된 둥근 손톱이 페인트를 묽게 칠해 나무결이 그대로 보이는 테이블을 건드렸다. 고민이 많아질 때의 버릇이었다. 그의 손톱은 배경음악과 엇박자로 빗겨가며 톡, 톡,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앓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갸르르르, 하고 목에서 울리는 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세나는 테이블에서 손을 땠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의 끄트머리에 대충 묶어 뾰쪽뾰쪽한 꽁지머리가 걸렸다. 그 남자였다. 시선을 한껏 빼앗을 정도로 밝은, 주황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흐트러트리는 모습은 일상적일 정도로 익숙했다. 인스피레이션이 날아가 버리잖아! 우주의 손실! 이 세계의 종말! 그의 암담한 목소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주황’과는 달리 이질적으로 들려왔다. 

세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마일드 세븐」이었다. 

오늘도 그 남자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름의 지정석인 듯 했다. 세나는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한 낮인데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한가했다. 한량이라는 말에 퍽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세나는 그가 꾸기듯 던져놓은 ‘마일드 세븐’의 담배곽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바뀐지 꽤 된 담배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담배에는 언제나 ‘마일드 세븐’이 적혀 있었다. 묘한 일이었다. 세나는 선글라스를 다시 추켜올렸다. 그 남자를 바라보는 건 드물게 재미있는 일이었다.

「마일드 세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다가 멈춘다. 한없이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무언가를 적어 내린다. 펜은 언제나 볼펜을 사용한다. 샤프가 부러지는 사이에 날아가는 ‘인스피레이션’이 아깝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드물게도 수정액이나 수정테이프는 쓰지 않는다. 만약 「마일드 세븐」이 작가라면 타자를 두드리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세나는 그의 작업 방식에 태클을 걸 생각이 없었다.

둘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가끔 「달의 뒷면」에서 마주치고,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한 단면만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이름도 모르고 그의 정확한 나이나 뭘 하는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그를 관찰하고 있는 것도 그는 모를 것이다. 세나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일드 세븐」은 한동안 제 작업에 몰두할 것이었다. 조용해 졌다는 건 그가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계속 반복되기만 하는 장면은 재미가 없다. 세나는 진저 레몬 맥주를 노려보았다. 칼로리를 계산하다가 한숨을 내쉰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건 나름의 취미였지만 슬슬 자제해야 할 때였다. 다시 시선은 보리소주 미즈와리나, 하이볼이나 단 칵테일에 머물다가 차 종류로 넘어간다. 아메리카노와 샐러드를 먹는 건 어쩐지 건강을 마이너스했다가 플러스하는 눈가리고 아웅하기 식의 조합 같았다.

안녕 하이네켄. 안녕, 세인트 아처. 바이바이, 레페 브라운. 세나는 제가 눈길을 주었던 맥주에게 짧게 사과했다. 체중 관리를 시작 한 다음에는 고를 수 있는 메뉴의 폭이 좁아졌다. 프로 모델이라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메뉴판의 같은 곳을 또 보고, 또 보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고른 메뉴는 아보카도와 훈제연어오픈샌드위치였다. 우유를 곁드리기에는 위장이 무거울 것 같아 물을 부탁했다.

주문과 계산을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배 안에는 묘한 허기가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체중을 조절할 때에 가장 경계해야 할 감각이었다. 하지만 계속 입이 심심했다. 부쩍 흡연량이 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나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창가 자리를 곁눈질했다. 긴 바에 올려둔 물건들의 배치를 바꾸면서 인스피레이션의 고갈을 외치던 남자는 이미 다 쓴 종이를 벅벅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종이공은 익숙한 듯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다시 펜을 돌렸다. 볼펜이 그의 손 위에서 빙그르르 돌아 안착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오후 두 시의 햇살이 느리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았다. 도로 너머를 들여다보다 그는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펜에 종이가 긁히며 나는 소리가 느리지만 성실하게 들려왔다.

세나는 마일드세븐의 지정석을 흘겨보았다.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무언갈 써 댔다. 도로와 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볕이 잘 드는 자리였다. 남자의 발치와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서는 폭신한 고양이용 침대가 있었다. ‘리틀 존’의 자리였다. 오늘도 그 회색 고양이는 고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분주해 하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적는 남자와 한없이 느긋한 고양이의 조합. 언밸런스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시를 든 주인이 세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세나는 샌드위치를 받았다. 함께 나온 나이프와 포크로 샌드위치 조각을 잘게 자른다. 나이프의 날에 문질러 으깨진 아보카도를 호밀 빵의 빈 면에 바르며 고개를 들었다. 카페의 배경 음악은 90년대 팝에서 어느 순간 세련된 ‘요즘 노래’로 바뀌어 있었다. LP판을 돌리는 걸 포기하고 디지털 음원을 재생한 모양이었다. 

노래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카페의 선곡센스는 믿을 만 했다. 적당히 듣기 좋으면서도 사색에 방해되지 않는 것만을 고른다. 광고 촬영장에서 몇 번쯤 들어본 노래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음이 가지고 있는 리듬 자체는 경쾌하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멜로디에서는 물 냄새가 났다. 짙고 암울한 우울. 세나는 이 노래를 '천재'가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민하지 않고 쓴 원 터치에서는 가끔 이렇게 작곡가가 묻어나올 때가 있는 법이었다.

세나는 샌드위치를 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배경음악과 종이, 그리고 펜의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카페는 고요하며, 또한 적막하다. 「달의 뒷면」에는 도통 사람이 오질 않는다. 위치 자체가 후미진 곳에 있는데다가, 정문에는 「츠키나가 레이블」이라는 회사의 간판이 붙어 있다. 사무실로 오해하기에 딱 좋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딱히, 사내 카페도 아닌 모양인지 오후 두 시경 이 곳에 들어오는 손님은 「마일드 세븐」과 세나가 전부였다.

「달의 뒷면」의 간판은 뒷골목 쪽에 있는 낡은 문에 붙어 있다. 육중한 철제문에는 적당한 오선지에 괴발개발한 악필로 ‘영업중’이라고 적혀 있다. 손으로 쓴 메뉴판 마냥 적당한 느낌이다. 카페 이름은 영업 중 종이가 붙은 위쪽에 거친 페인트로 쓰여 있다. 물론, 「달의 뒷면」이라는 한자 또한 영업 중 종이만큼이나 더러운 글씨였다.

후미진 곳에 위치한 동네 카페치고는 와일드한 간판이었다. 대충 필요해서 대충 적은 것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턱을 괴었다. 마일드 세븐은 ‘이게 아니야’라고 큰 소리로 중얼거리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세나는 다시 작게 잘라놓은 훈제연어샌드위치를 씹었다. 차가운 연어와 샤워크림이 호밀빵과 어울리는 게 퍽 좋았다.

사람이 없는 게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생각했다. 뭔가 둘만의 아지트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담배를 챙겨 흡연실로 들어가는 「마일드 세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걸음걸이는 작은 키에 비해서 의외로 묵직하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 끄트머리에 불이 붙는다. 한숨만큼 깊은 연기가 흡연실 안을 깊게 메운다.

어쩐지 눈이 가는 사람이었다. 시선이 저절로 끌린다는 말이 맞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가 무대에 오르는 사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세나는 리듬을 타는 듯, 흡연실의 바닥을 톡톡톡 두드리는 그의 운동화 앞코를 바라보았다. 늘어난 남색 후드티와 엉망으로 묶은 머리카락의 어떤 부분에서 ‘끌림’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제 취향의 남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시선이 그에게로 흘러 고였다. 그가 도로와 가까운 곳에 앉아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햇살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뒷모습에서는 어떤, 강렬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중세시대였다면 분명 왕이나 영주쯤은 됐을 거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물을 마셨다. 마시지 못했던 진저 레몬 맥주가 아른거렸다. 그는 등을 기댔다. 저 남자를 보느라 대본을 하나도 읽지 못했다.

어쩐지, 단 둘만 남으면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낯설지만 익숙한 남자를 관찰하는 취미가 생긴 것 같았다. 미완의 대본은 벌써 며칠이나 읽지 못했다. 흡연실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세나는 다시 선글라스를 위로 올렸다. 제가 그를 관찰하는 것만큼 그 또한 저를 관찰하는 듯 했다. 오후 두 시의 햇살을 받은 ‘리틀 존’은 길게 야-옹 하고 울었다.

대본의 글씨는 여전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린트의 흑백과 다른 선명한 유채색이 가까이 있는 까닭이었다. 집중해야지, 라고 괜히 중얼거리며 그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이럴 거면 집에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애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곳에 오래 있는 것도 별로였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흡연실 안에 있었다. 그가 있는 공간 안에 들어 갈 수 없었다. 세나는 턱을 괴었다. 그와 말을 섞고 싶다가도 섞고 싶지 않았다. 벌써 며칠이나 반복 된 풍경을 깨고 싶지 않았다. 아는 듯 모르는 사이. 오후 두 시 라는 애매한 시간 같은 관계. 세나는 자신들의 모습이 르누아르의 ‘선상파티의 점심’과 별다를 거 없는 구성이라 생각했다.

처음엔 모두 모르는 사이였으나, 같은 프레임 안에 ‘수백 년’ 동안 함께 있었던 애매한 관계. 세나는 대본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저를 바라보면서 하는 생각이 궁금했다. 굳게 닫혀 있는 흡연실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세나는 미완으로 처리된 악보와 확정되었는지 되지 않았는지 모를 대본을 팔랑팔랑 넘겼다.

오후 두 시의 햇살은 애매하게 따듯하다. 아직 완연한 봄이 되지 않은 계절 사이의 계절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질 것이었다. 창가 자리의 남자가 블라인드를 치지 않아 세나에게 햇살이 더욱 깊게 내려오고 있었다. 인테리어 소품인 것 같은 시간이 맞지 않는 괘종시계가 똑딱이는 소리를 내며 시간의 흐름만을 알렸다. 카페의 배경음악은 어느새 인기 아이돌 노래로 바뀌어 있었다.

이 카페는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카페 주인의 취향을 얼기설기 메꿔 만든 이상한 편집숍 같기도 했다. 세나는 흡연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운동화가 나무 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끼긱거리는 왁스칠 된 바닥의 소리를 듣는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부유한 먼지들이 햇살에 닿아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먼지의 우주를 바라보다가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컵에 손을 댔다. 유리잔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손 안을 가득 축축하게 채웠다. 창가 쪽을 보지 않아도 시선이 느껴졌다. 「마일드 세븐」이 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관찰이지, 관심은 아니었다. 적어도, 세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나와 같이 그와 저는 다만. 같은 공간 안에 고이듯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는 묘하게 편안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숨이 찼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저를 응시하고 있는 저 남자가 궁금했지만 궁금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모순 같은 오후 2시였다. 세나는 다시 샌드위치를 씹었다. 호밀 빵의 거친 식감이 입 안을 가득 긁었다. 연어의 차가움과 아보카도의 부드러움이 이어 다가왔다. 누군가가 제가 하는 식사를 지켜보는 건 오랜만의 일이라 묘하게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카페에 흐르는 노래는 체인스모커스의 closer로 바뀌어 있었다.

이상한 나라에 온 것 마냥 맥락 없는 일이었다.

세나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환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빛이 닿은 곳에서는 여전히 먼지 우주가 일렁이고 있었다. 작은 은하를 바라보다가 세나는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타인’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고개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일드 세븐」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카페 안에 내리쬐는 빛처럼 강렬한 빛이었다.


“꼭 우주에 있는 것 같지 않아?”


「마일드 세븐」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랑카랑하면서도 경쾌한 울림이 듣기 좋았다. 세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살을 받은 그의 머리카락은 언제나 바라봐 왔던 것처럼 화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세나가 입을 열지 않자 그는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지금 우주에 있는 것 같지 않아? 그의 질문은 의문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말하고 있는 본인이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성질이 있었다.

그는 대답할 때 까지 질문할 모양이었다. 그와 생각이 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쉽게 대답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말을 섞는 순간 귀찮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세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담배 케이스를 손에 쥐었다. 이 주 정도를 함께 하면서 생긴 무언의 룰이 형편 없이 깨지고 있었다. 그는 ‘카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카멜」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담배를 한 개비 들고 흡연실 앞으로 가자, 그는 소리치듯 외쳤다. 그것은 꼭 소리가 닿지 않는 우주에서의 의사소통법 같았다. 그는 두 팔을 흔들었다. 그의 손끝과 손끝 사이의 벌려진 간격은 생각보다 넓어 보였다. 세나는 그를 응시했다.


“대답해줘, 「카멜!」 우리는 꼭 우주에 있는 것 같지 않아?”

이 허무맹랑하고 맥락 없는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

“조용히 해, 「마일드 세븐」”


세나는 대답 대신 입에 담배를 물었다. 일부러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제 지정석에 앉아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무대에 어울릴 것 같은 반짝임이 「마일드 세븐」에게는 유채색으로 고여 있었다. 세나는 담배 끝을 씹었다. 그는 주머니에 지포라이터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제게 말을 건 그 남자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카멜」 하고 불렀다. 제 것인데도 제 것이 아닌 이름이 암호처럼 어색하게만 들려왔다. 비취색 눈동자는 저를 피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담고 있었다. 내가 세나 이즈미라는 걸 모르나? 싶었다. 할 말이 없어 망설이자 「마일드 세븐」은 다시 「카멜」의 이름을 불렀다.

부유하듯 날리는 먼지 우주. 투명하게 들어오는 햇살, 화려한 괴짜,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마일드 세븐의 빈 곽. 오후 두 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서야 두 시 종을 울리는 카페 안의 괘종시계. 「마일드 세븐」의 뒤쪽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지금 이 순간과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 세나는 모든 비현실들을 목도하며 중얼거렸다.

모두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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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즈



레오이즈 연재소설 Aliens가 올라오는 곳입니다.

왕님과 세나가 서로를 모르는 시공입니다.


오후 두 시, 달의 뒷면에서 만나요 (http://s2senaismes2.tistory.com/44) 와

멸종을 달래는 방법(http://s2senaismes2.tistory.com/52)를

정리해서 장편으로 엮고 있습니다u u)/ 


제목은 키린지의 동명의 노래에서 빌려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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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이즈] 夢魂

리퀘박스에 들어온 사막에서 매 키우는 부족 레오랑 왕자 세나가 보고싶습니다. 는 리퀘를 받아 썼습니다. 

 * 짬뽕동양풍 빈약한 세계관 주의









 




使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
달 드는 사창에 한이 더욱 서리네요
꿈속에 넋이 오간 흔적 남는다면
문앞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夢魂




 

***

 

, 이제 잘 시간이야. 유우 군.”

 

어린 왕자는 세나의 옷자락을 잡았다. 손에 든 호롱의 빛이 잠시간 일렁였다. 세나가 걸친 물빛 비단을 손에 꼬옥 쥐고 있는 모습이 제법 애처로웠다. 밤은 싫습니다, 라고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몇 해 전과 다름없이 방 안에 스몄다. 그가 걸치고 있는 푸른 색 안경이 콧날 밑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다가,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제 공간에 다가갈수록 그가 옷자락을 쥐었던 것을 서서히 놓는 것이 퍽 애처로웠다.

어둠이 무서운 것은 황자를 제외한 모든 왕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각일 것이다. 세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왕자의 처소라기에는 좁지만, 방의 귀퉁이를 한 번에 볼 수 없을 정도로는 넓었다. 이 안에는 우릴 빼고는 아무도 없어, 라고 제법 목소리를 가다듬어 속삭여보지만, 유우키는 그것마저 불안한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대에 눕자, 세나는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을 옆에 내려두었다. 잠들면 가겠단다, 라고 속삭이면서 머리카락을 쓸자, 그는 그것만이 위안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우키 마코토의 궁은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고 지어졌다. 암색 위주로 조형된 그 곳에 어울리는 식물은 자연스래 응달을 먹고 자라는 음험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화재로 전소된 궁을 재건할 때 부린 황자의 심술이었다. 세나는 그의 애매한성격이 그의 처소의 응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한 가지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색의 왕자가 그림자 속에서 죽었을 때의 일을 너무 깊게 기억하고 있는 탓이었다. 세나는 한숨을 쉬듯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숨에 유우키의 표정이 절로 불안해졌다. 세나는 애써 웃으며 그의 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즈미 씨처럼 무예라도 닦을걸 그랬어.”

언제나 하는 소리지만, 유우 군이랑 검은 안 어울려.”

그렇지만, 적어도재워달라고 조르지는 않았을 거야.”

 

만약, 내가 검을 배웠다면 말이야. 유우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안경을 쓴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시력이 좋지 않은 아이에게 그림자가 일렁이는 방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의 손을 가만 잡았다. 황제를 닮은 진한 금발과 녹색 눈동자는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네가 잠든 후에도 조금 머물러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그는 유우키의 볼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오래 검을 잡은 왕자의 딱딱한 손끝을 느끼며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제게 옮은 버릇 같았다.

유우키는 눈을 떴다가, 다시.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어둠이 밀려오는 것이 여전히 어색한 듯 구는 모습이 마음을 저몄다. 세나는 응달에 어울리는 녹색으로 장식된 그의 처소를 바라보았다. 구중궁궐 안에서도 가장 깊숙이 있는 방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문을 열어두어야 겨우 볕이 드는 구조는 명백한 견제였다. 황자가 성격이 나쁘다고 재차 생각하며 세나는 혀를 찼다. 제가 가진 청궁으로 유우키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여러 해를 자란 버드나무처럼 곧게 뻗어 있었으나, 그것이 황자에게 어떻게 비칠 줄 알기에 세나는 그저 그의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황제는 능력 있는 것이 가장 높게 올라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여러 해의 정복전쟁을 거치면서 부풀린 나라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싸움 위에 정당하게 설 수 있는 결함 없는 자라고 믿었다. 외척이던 능력이던, 지략이던 간에 본인이 가진 모든 걸 동원하여 황제의 마음에 드는 것이 왕자의 본분이었다. 황자가 아닌 다른 왕자들이 각기 다른 성을 달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암살과 모략,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환경을 알아서 조성해주는 아바마마의 친절이, 세나는 진절머리 날 정도로 싫었다.

약한 것은 도태된다. 鹿궁의 유우키와 이제는 없는 다궁의 왕자가 그런 사람이었다. 외척도 약하고 오로지 가진 건 제 어머니가 받은 왕의 사랑 몇 줌 뿐인 왕자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웠다. 죽여도 티가 나지 않았고, 그 일에 무어라 말하며 부스러기를 받아갈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청궁의 세나, 궁의 모리사와, 궁의 사쿠마와 같이 나름대로의 세를 가지고 있는 왕자들은 적어도 죽진 않는다. 위협을 가했을 때 무어라 대신 말해줄 이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매를 부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 줘요, 유우키는 잠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나는 입을 열었다궁을 나가 몇 리를 곧장 북쪽으로 달리면, 너른 초원이 나오는데그 곳의 끄트머리는 사막이란다. 매를 부리는 사람들은 말을 타고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유우키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어렸을 때와 변함없이 사랑스러웠다. 지금으 황제와 가장 닮은 머리카락만 아니었어도, 좀 더 티나게 싸고 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나는 매를 부리는 사람들의 매가 얼마나 높이 나는 지를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가장 높이 올라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를 반납하고 황자의 책사로 들어간 하스미처럼 굴 수도 있었다. 세나는 제가 황제의 제목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위로 향하는 발걸음의 곁에 서서, 모든 것을 베어버릴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검. 그쯤이 제게 어울렸다. 하지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필요했다. 방치했다면 유우키도 다색과 비슷하게 됐을 것이다. 세나는 잠이 든 채, 숨을 고르게 내쉬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매일 그를 찾아간다. 말상대를 한다. 제가 하는 일에 유우키를 끼워 넣는다. 그가 유능한 점을 은밀하게 보여준다. 그가 엉망으로 보이는, 어린애 장난 같은 대련을 한다. 휴식을 모두 유우키에게 쏟는 척 연기한다. 유우키 군과 사이가 좋구나, 라고 말하는 질문에 유우 군은 내 동생이니까? 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그런 주제에 그가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고 깎아 내린다. 그런 식으로 벌어들인 십여 년의 무게를 세나는 알고 있다. 유우키 마코토는 존재만으로도 제 발목에 달린 거대한 족쇄였다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 숨이 막혔다. 어느새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유우키 마코토가, 유일하게 평안한 시간이었다. 세나는 호롱을 들지 않고 일어섰다. 그가 걸친 물빛 비단에 빛이 들어 일렁였다. 가슴께가 답답해 한숨을 내쉬었다. 먼 창으로 보이는 하늘을 보다가 아득함에 눈을 감았다. 꿈에서라도 평안하길, 하고 유우키를 위한 기도를 속삭였다. 꿈, 그래. 꿈. 세나는 가볍게 얽히는 그 단어를 입에 머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방을 나서자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사물을 쉬이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은 불을 밝힐 기름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약한 건 죄다. 적어도 이 황궁에서는 그러하였다. 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서 나 황제에 관심 없어라고 해도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이다. 모리사와와 작은 쪽의 사쿠마도 믿지 않을 말이었다. 세나는 천천히 유우키의 방을 빠져나왔다. 제 일문一門도 곧이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유우키를 지키기 위해 세나가 스스로 들어간 새장이었다. 허리춤에 찬 검의 무게가 오늘 따라 깊게 느껴졌다. 다색을 벤 것은 저였다. 그가 조금 더 커서, 황제에게 유의미한 빛으로 일렁인다면 유우키가 바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 애는 유우키와 똑같은 금발과 똑같은 녹안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제 적자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제가 사랑했던 여인의 색을 똑 닮고 있다. 늘그막에 마음이 약해진 노인네의 마음에 들기 좋은 빛이었다. 그 애는 제가 가진 한 줌을 영리하게 쓸 줄 아는 애였다. 그래서 베어버렸다. 제 과오였다. 세나는 천천히, 발소리 없이 걸었다. 배정된 하인이 적은 녹궁에서 들리는 발소리를 유우키가 무서워하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어둠 속을 걸을 수록 그 애가 받아야만 했던 그림자와 무기력함을 새삼 느낀다.

녹궁의 어둠은 오늘도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유우키가 위를 버리고 제 품 안으로 돌아오길 소망했다. 청궁의 볕을 주고 싶었다. 세나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그가 당연히 함께 하길 바랐다. 유우키는 제법 똑똑했다. 궐 안에 도는 소문들을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영특했다. 그게 제 날개가 되어준다고 한다면 세나는 어울리지 않는 왕위도 당연스레 손에 쥐어, 그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상상했다. 황자가 알게 된다면 당장에 목을 치고 싶어할 망상이었다.

세나는 제 목을 쓰다듬었다. 가느리고 여린 목 아래에서 맥이 뛰고 있었다.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해야만 했다. 이 궁 안에서 밤을 지새는 모든 왕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녹궁이 품고 있는 음험하고 짙은 어둠이 오늘따라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세나는 열린 창을 닫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 보다 시간을 지체한 듯 했다.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유우키의 숨을 틔워주었으니 이제 제가 호흡할 차례였다

그는 꿈 속을 향해 걸었다.

 

 

***

 

그는 곧장 궁 밖에 매어두었던 말을 데리고 녹궁의 뒷문으로 갔다. 졸고 있는 경비의 정강이를 차면서 제대로 하라 명했다. 그제야 허리를 펴는 경비들을 혀를 차면서 지나갔다. 어둠이 무서워 이야기를 들려달라, 계속 말하는 그 애의 사랑스러움을 모르는 것들이 그저 한심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에 올라탔다. 그는 곧장 북쪽으로 달렸다. 오늘은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가 초원으로 나와 있는 것은 사막이 찬 새벽뿐이었다.

세나는 몇 리를 북쪽으로 달렸다. 품에 감추어둔 여우 가면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힘이 빠진 말에서 내려 고삐를 손에 잡고 걸었다. 등불에 불을 켰다. 천으로 만든 신발 때문에 발이 저릿거렸다. 풀이 있는 땅을 밟다가, 멀리 퍼진 사막을 바라보았다. 그저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사막과 초원의 고요함은 가끔 궁 안보다 묵직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세나는 사막 쪽으로 걸었다. 말의 발굽이 모래를 소리 없이 밟았다. 소리 없는 적막이 몇 겹을 고귀하게 걸친 물빛 비단 속으로 스몄다.

북쪽의 초원은 그의 '꿈'이었다. 낮잠의 잠시간으로 올 수 없는 깊은 꿈. 현실을 잊게 하는 비현실적인 공간. 그는어둠을 헤치며 천천히 걸었다. 너른 초원의 냉기가 옷을 뚫고 들어왔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어둠은 궁에 스민 것과 모습은 같았지만 성질은 달랐다. 아버지와 형들의 손이 닿지 않는, 저만이 알고 있는 비현실. 저만이 꿀 수 있는 꿈. 세나는 천천히 땅을 밟았다. 어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휘익, 하고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바라보자 맴을 돌고 있는 매가 보였다. 말 달리는 소리가 곧장 들렸다. 심장이 뛰었다. 그 애가 제게로 오는 소리였다. 매가 머리를 향하고 있는 곳의 어둠을 응시하자, 곧 그것을 뚫고 그 애가 왔다. 여우 님! 하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제법 경쾌했다. 오늘은 늦어서 안 오는 줄 알았어! 오늘은 왜 늦었어? 잠깐, 대답하지 마. 내가 망상할 거니까! , 사막의 하늘 아래에서 느껴지던 모든 영감을 여우 님이 뭉쳐줬어.

잠시만, 기다려봐, 나 적을 거니까. 세나는 그가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매 부리는 사람들이 쓰는 기호로 그는 무언가를 빠르게 써 내려갔다. 이거 여우님이 준 종이인데, 정말 잘 써지지 뭐야, 그래서 잊어버리지 않게 됐어, 나의 영감과 모든 음악들을! , 이거 좀 멋있는 말이지, 하지만 아직 말을 걸지 말아줘. 그의 목소리는 날갯짓하는 벌새처럼 통, , 튀었다. 궁 안에서 묻은 모든 어둠이 그가 내는 목소리에 씻겨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마물을 베느라 늦은 거지?”

?”

, 본 적 있어. 이렇게 예쁜 옷.”

 

릿츠를 만나러 장에 갔다가, 근처 신사에서 하는 제마의식을 봤는데, 그 때 완전 여우 님 같은 옷을 입고, 아니잠깐, 여우 님은 신령이니까 제마를 하는 건 아닌가? 세나는 제 앞에 있는 귤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 가면을 그는 제법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예상하지 못하는 타이밍에 덜컥 끌어안았다. 사막의 냄새가 제 코 끝을 찔렀다. 세나는 멋쩍게 하늘을 올려보았다. 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내리 앉을 곳이 없다는 신호인 듯 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밤에도 대책 없이 환한 모습이 마치 태양 같았다. 그의 주변은 무심결에 밝았다. 사막과는 통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세나의 여우 가면을 올려다보더니, 가면 새로 보이는 청색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언제나 입 맞추고 싶은 아름다움이야! 라고 소리치더니 제 부족이 가는 어떤 마을에도 여우님 같은 사람은 없다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막지 않는다면 몇 시진이라도 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나는 손을 뻗어 그의 입술에 대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제 입술에 닿자, 그는 눈을 반짝이며 그것에 입을 맞추었다. 한 쪽 무릎을 꿇어야 하나? 라고 묻는 그의 목소리에 너는 내 신하가 아닌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되물었다. 꼭 왕자님 같은 말을 하고 있어, 라며 웃음소리 섞인 말을 하는 그의 밉살스러운 입술을, 세나는 집개 손가락으로 꼬집다 놓았다. 그러다가 어쩐지 지쳐, 다시 한숨을 놓자, 그 애는 지쳤어? 라고 물었다.

 

딱히.”

하긴 신령님은 안 지친대. 릿츠가 그랬어.”

릿츠가 누구야?”

쿠마, 랬는데.”

잘 모르겠네.”

 

사쿠마는 아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세나는 입을 다물었다. 궁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애는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가죽으로 단단히 만든 보호대에 곧장 내리는 매는 몇 달 전에 덫에 걸려 비실거리던 아이가 아니었다. 쓰다듬어 봐, 라고 제 팔을 내미는 그의 말에, 세나는 손을 뻗어 매의 깃을 쓸었다. 생각보다 부드러우면서 어느 정도는 거친 것이 궐 안에서 부리는 것과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그 이질감에 계속 쓰다듬자, 그 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 라고 물었다. 나한텐 쌀쌀맞은데 매한테는 상냥한 게 귀여워서,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거리낌없이 웃고, 거리낌없이 행동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가끔 이국적으로 들리는 곡조를 들려주거나, 제가 사랑하는 것을 창가로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자유스러움은 사막을 닮았고 너른 목소리는 초원을 닮았다. 이 나라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꼭 그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궁은 세나가 가장 잘 아는 곳이었고 그 곳의 왕은 제 아비 하나 뿐임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그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보았다. 그 애는 가면 아래의 표정을 알 수 없다는 듯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저를 보고 있는 세나를 골똘이 들여보다가, 발꿈치를 들어 제게 가까이 다가왔다. 가면에 경의를 표하듯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감촉 없이 입술을, 가면의 입 자리에 부비다가 쪽, 하는 소리를 내고 떨어지는 꼴이 어색했다.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신령님은 이런 게 익숙해? 역시 젊은 애들을 잔뜩 공물로 받는 게지? 라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신매매는 불법이야, 라고 딱딱하게 말하자 그는 에베베, 하고 혀를 내둘렀다. 익숙하지 않아? 그럼 놀라야지! 내가 귀신에 홀려주겠다잖아! 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사막을 가득 울렸다. 사막의 고요함 안에 사는 주제에 그 곳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세나는 그의 머에 손을 얹었다. 유우키를 쓰다듬듯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의 뾰로통한 얼굴이 재미있었다. ‘제법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라고 제 목소리로 평하자 그제야 심장이 엇박자로 세게 뛰었다. 왜 입을 맞추었어? 라고 묻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사이를 정의한다면 도망갈 것 같았다. 그가 주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다면 퇴색해버리고 만다. 사막과 밤, 초원의 자유로움에 목줄을 매고 싶지 않았다. 그를 느낄 때 느끼는 자유로움을 제외한 다른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세나가 손을 뻗자 물빛 비단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애는 그 흔들림을 보다가 매를 제 팔목에서 날아가게 했다. 그는 세나를 끌어안았다. 좋은 냄새가 나,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세나는 등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의 등을 쓸었다. 유우키를 달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 나라의 초원, 그 끝은 사막으로 차츰 변해가고 있다. 그 애는 말을 타고 별을 읽으며 매를 부린다. 이것이 별과 하늘, 그리고 그 아래의 인간의 사이만치 멀게 느껴지면서도 어쩐지 두근거리게 느껴지는 것은, 사막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수함 때문일 것이다. 세나는 제 심장 소리에 익숙한 변명을 붙이며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궐 밖의 사막은 지도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곳이었다. 세나는 숨을 골랐다. 그와 함께 있으면 제 심장은 어쩐지 이상하게 뛰고 있었다. 얼굴이 불에 댄 듯 홧홧거렸다.

예쁘고 아름다워, 라고 속삭이며 그 애는 한 걸음 뒤로 물렀다. 이름도 모르는, 매를 다루는 부족의 청년을 바라보다가 세나는 당연하지, 라고 허세를 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릿츠가 그러는데 청궁의 왕자님이 신령님 보다 더 아름다울 거래 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았다. 세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한 걸음 물렀다. 그래? 라고 괜히 묻자 그 애는 방긋 웃었다. 호롱불이 닿는 거리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제 손 안의 자유. 세나는 여우 님이 더 아름답다고 내가 우겼어.’ 라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하늘이 밝아지는 것은 떠남의 신호였다. 세나는 뒤를 돌았다. 헤어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세나였다. 폭군 같이 구는 모습에도 그 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올 것을 믿는다는 듯한 그 녹색 눈이 세나는 싫었다. 유우키와 어쩐지 닮으면서도 같은 그 눈동자는 저를 알 수 없는 길로 떠밀 것만 같았다. 제가 관심도 없는 왕위 근처에서 알짱이는 것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 멍청한 곳으로 안내할 것처럼 보였다.

내일 또 봐, 하고 그가 인사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말을 둔 곳으로 가 곧장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제게 익숙한 족쇄를 차러 돌아가는 길에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세나는 그것을 들을 때 마다, ‘같이 갈래?’라고 묻는 그를 상상하곤 했다. 궁의 어둠이 묻지 않은 제 유일한 자유,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쭙짢은 사이. 친하지 않기에 제 목이 스러져도 사라지지 않을 존재.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상 속의 그 애는 세나에게, 언제나 담담한 목소리로 묻는다. 절망적인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같이 갈래?’라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망상 속의 저였다. 세나는 말을 달렸다. 유우키에게 아침인사를 해야 했다. 제가 없는 밤을 견뎠을 그 애를 볕 속에 꺼내 놓고, 궐 안의 아침을 만끽하며 황자에게 인사를 간다. 두 사람은 꼭 한 쌍 같아, 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부드럽게 웃고 그의 건강을 기원하다가, 낮이 돼서야 지치듯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일상은 그렇게 삐걱이듯 움직였다. 세나 이즈미는 호흡이 가빠옴을 느꼈다. 그는 가면을 풀어 제 품 안에 넣었다. 가면의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다, 그는 제 입술에 그의 숨을 묻혔다. 사막의 냄새가 났다. 넓고, 고요하며, 아득하고, 제게는 영 멀게 느껴지는 그와, 그가 제게 주는 모든 사막 같은 풍경에 세나는 헛웃음을 치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숨이 막혀왔다. 아마, 곧 마주할 녹궁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는 제 이름을 모름으로, 이것은 오롯이 세나의 상상이었다.

그는 꿈꾸는 것 같은 그의 목소리를 붙잡았다. 벌써 몇 번이고 즈려밟아 모래가 된 소리였다. 버석거리는 모래 맛이 입 안에 가득했다. 사막과 초원이 닿아있는 탓이었다. 세나는 제 입술에 직접 닿을리 없는 그의 소리를 속삭이듯, 입 밖으로 내었다. 이뤄질 리 없는 한낮의 백일몽 같은 말.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하늘에는 매 하나 날지 않았다. 아득한 파랑에 눈이 부셨다.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부자유를 떠올리자, 이어 그 애와 같은 녹색 눈동자의 제 동생이 떠올랐다. 

꿈꾸듯, 다시 상상했다. 입 안에 목소리가 맺혔다.

 

세나, 우리 같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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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이즈] 열아홉, 스물.










열아홉, 스물.





꽃다발을 받았다. 세나 이즈미의 졸업식에서였다.

유우키는 제 품에 안겨진 어색한 것을 끌어안고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제게 안겨 주었던 것이었다. 책상에 기대어 놓기에도 떨어질 것 같은 거대한 꽃다발이었다. 품 안 가득 머물러 있는 꽃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유우키가 숨을 쉴 때 마다 포장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람은 창가에서 부드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석양은 비스듬한 입사각을 가지고 흰 커튼의 벌려진 사이로 스며들었다.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빛을 등지고 서 있는 탓이었다. 이즈미 씨, 라고 부르면 제 말을 자세히 들으려는 듯, 몸을 제게 기울이던 것을 기억한다. 노래하는 것 같은 리듬으로 천천히, 씹어 내뱉는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상냥했다.

그것은 느린 기타리프나, 심장보다 더 느리게 반주하는 드럼 소리 같은 순간이었다. 유우키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순간에는 모나지 않은 둥그스름한 부분만이 남아 있었다. 울 것 같아, 라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손을 뻗는 동작은 눈 가까이로 느릿하게 다가왔다가, 콧등에 내리 앉은 파란 안경의 무게가 사라짐과 동시에 놀랍게도 흐려졌다.

창 밖에는 벚꽃이 피어있었고, 그는 졸업장을 들고 있었다. 학교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빈 공간이 주는 약간의 적막함과 울림은 교실에 달려있는 째깍이는 시계음과 묘하게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열어둔 창문에서는 겨울을 잊지 못했는지 차가운 바람이 몰려와 귓가에 걸린 머리카락을 흔들었을 것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모습의 윤곽을 더듬을 수도, 자세히 볼 수도 없었지만 유우키는 그게 분명 사진 작가의 프레임에 놓인 피사체처럼 완벽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기념에 대해서 설명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으면 어느 순간 챙길 것이 생기곤 해, 라는 말투는 형이라기보다는 선생님에 가까웠다. 초점이 계속 맺히지 않아 얼굴을 찡그리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멀리 있는 광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흰 손가락으로 정리하던 그는, 끝없이 하늘로 퍼지는 오렌지색의 배경에서 졸업과 기념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연예인이 된 다음에는 챙겨야할 것이 더 많아진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은 몇 개의 기념일을 두르고 있는 지 알 수 없다는 말을 꺼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세나 이즈미의 졸업식은 어떤 특별한 순간일 거라고 말하면서, 그는 아무도 없는 빈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뭉게 그린 유화처럼, 그의 윤곽은 놀랍게도 흐렸다. 시각적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적으니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팬들은 일방적인 기념일을 갖고 있어. 졸업식이나, 첫 홍백가합전 출전이나, 첫 무도관 입성같은 것 부터, 백 일 단위로 끊어서 세는 데뷔일 같이 사소한 것들. 네가 태어난 것도 하루만 챙길 수도 있지만, 백일 단위로 끊어서 더 많이 셀 수 있지. 그리고 그렇게 챙기는 기념일들을 품 안에 안으려면 양 손을 모두 써도 모자랄 거야. 일방적으로 챙기는 것들은 언제나 한 사람에게만 무게를 갖는 법이니까. 세나는 그렇게 설명하며 먼 운동장과 교문을 바라보았다. 

뜬금 없는 말, 같이 들리는 이야기였다. 유우키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이즈미 씨가 내 입학식 날짜를 기억하고 있는 것 과 같은 일인가요? 라고 묻자 돌아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우키는 흐린 시야에서, 그의 고개가 끄덕였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세나는 졸업장을 만지작거리는 지, 그의 흰 손가락이 움직일 때 마다 종이는 고개를 까딱였다. 유우키는 그 모습이 꽃이 꽃대에서 떨어지는 순간 같다고, 생각했다.

팬과 아이돌의 관계는 다분히 일방적이라면서 세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작은 입술이 하는 소리는 멀면서도 가까워서, 유우키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어렴풋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그의 안경이 들려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그를 응시했으나, ‘쳐다보지는 못했다. 상이 맺히려고 하다 흐려지는 순간이 몇 분쯤 반복되고 있었다. 유우키는 세나가 안겨주었던 꽃다발을 끌어 안았다마분지 위에 둘러져 있던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이돌이 먼 곳에서 반짝이고 있으면, 홀로 기념하는 일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세나의 말은 처음 듣는 노래의 모르는 가사 같이 들렸다

앞으로의 리듬을 예측할 수 없어 그저 듣게 되는 목소리는 평소처럼 상냥했다. 유우키는 고개를 숙여 꽃을 내다보았다. 더 이상 그를 바라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복도에서 저를 보자마자 개화하던 그의 표정을 떠올렸다. 평소와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덜컥거리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서운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세나 이즈미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꽃이 피듯 화려하게 웃었다. 눈을 접어가며 웃다가 부드럽게 뜨고 손을 흔들었다.

평소와 같이 유-우- 군- 하고, 노래하듯 불렀다. 저를 마주한 첫 순간에 불렀다면 유- 우- 군--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유우키는 짐작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입안이 썼다. 묘하게 불유쾌한 감각이었다. 세나 이즈미가 만들어내고 있는 순간은 엇박자의 리듬처럼 불안정했다. 숨쉬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호흡이 불편해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유우키는 세나가 지금, 울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저가 품에 안은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꽃다발에는 해바라기가 꽂혀 있었다. 한껏 핀 해바라기 옆에는 프리지아가 안개꽃마냥 둘러져 있었다. 유우키는 그들의 꽃말에 대해 떠올렸지만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해바라기의 활짝 핀 꽃잎을 매만졌다. 일방적으로 기념했던 일들은 어느 순간, 오랫동안 바꾸지 않은 핸드폰 번호나 숫자를 써야만 하는 메일주소의 뒷자리 같은 곳에만 남아 있을 거라는 세나의 목소리는 이 계절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기만 했다.

묘한 불안감이 기시감처럼 맴돌았다. 익숙한 한자의 획을 고민하게 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유우키는 눈을 깜빡였다. 역시, 안경을 벗은 게 훨씬 예뻐,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툭, , 털어내는 듯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 세나는 발을 까딱였다. 교복 밑단에 살짝 가려진 구두 뒷굽이, , , 하고 교실 벽을 두드렸다. 더 이상 올 일이 없을 2학년의 교실 한 구석에 그의 흔적이 지문처럼 남는 모습을, 유우키는 흐린 시야 속에서 붙잡듯 기억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계절에 맞지 않는 꽃이네요.”

그런 말도 알아?”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순간이 어색하고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남의 졸업식에서 받은 풍성한 꽃다발은 제게 어울리지 않았다. 유우키는 세나가 책상 위에 올려둔 파란 안경테를 바라보았다. 버릇처럼 안경을 추켜올렸다. 세나 이즈미의 행동은 언제나 이유를 담고 있다. 그는 허튼 짓은 하지 않는다. 이상처럼 느껴지는 모든 것들도 다 나름의 계산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은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메타포는 유우키가 파악하기에는 너무 고차원적이거나, 비틀려 있었다. 여러해살이풀이 한해살이풀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는 성장기 남자아이가 한 품에 가득 안아야 하는 꽃들을 바라보았다. 보통 졸업식 꽃다발은 이런 식으로 엮지 않는다. 세나는 빈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듯 웃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유우키는 눈을 깜빡였다.

 

힌트를 주세요.”

무슨?”

그냥 꽃을 주고 싶었던 건 아니잖아.”

 

유우키는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대답했다. 한아름 안은 꽃은 품 안에서 자꾸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프리지아와 해바라기를 장식한 녹색 마분지와, 져 가는 하루를 담은 채 반짝반짝 빛나는 비닐의 조합은 세나 이즈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컬러를 제법 멋들어지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의도가 묻어 있었고, 그는 녹색꽃다발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오늘 흰 장미와 파란 장미가 어우러져있는 꽃다발을 들고 졸업사진을 찍었다.

그러니 제가 안고 있는 것은 오롯이 제 것이었다.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았다. 세나는 가만히 숨을 고르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 마다 꽃향기가 짙었다. 그의 은유는 그의 체향만큼이나 엷어서 시간이 지나면 곧바로 사라지곤 했다. 손에 닿을 때 붙잡지 않으면 꽃병에 꽂지 않은 꽃다발마냥 말라비틀어지는 그의 언어를 유우키는 해석할 수 없었다.

안경을 벗어서 흐릿해진 공간, 세나와 제 거리는 한 품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표정을 읽으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숨을 들이킬 수록 꽃 향기에 현기증이 몰려왔다. 언제나 그는 중요한 말을 해주지 않는다. 꽃이 피는 이유를 굳이 알려주지 않는 것 마냥 굴었다. 그런 것이 답답했다. 세나는 흐응, 하고 부드럽게 목소리를 흘렸다.

이제 졸업해서 그래. 세나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한없이 상냥했기에 그는, 그가 울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유우키는 눈을 깜빡이고, 얼굴을 찌푸렸다. 해바라기는 환하게 피어 있었고, 프리지아는 소담스럽게 그 근처를 장식하고 있었다. 기념일에는 꽃을 주잖아, 라고 세나는 부연설명을 했다. 섬세하게 조형된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유우키는 턱을 몸 쪽으로 끌어당기고, 미간을 좁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졸업 축하해요."

"착한 아이네."


유우키는 목에 걸리는 말을 애써 삼켰다. 기념일은 축하해야 하니까 꽃다발을 해 왔어. 세나는 노래하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적어도 그렇게 들렸다. 그의 손에는 졸업장 하나만이 들려 있었다. 저를 위한 꽃다발은 어떤 기념인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제게 안겨준 꽃다발이 어색했다. 괜히 삐거덕거리는 것 같았다. 안경 써도 괜찮아요? 유우키는 괜히 물었다. 그리고 세나는 대답했다. 

아니. 그의 목소리는 나즈막하니 울렸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벗은 모습이 어색했다. 어떻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습관적으로 안경 없는 콧대에 손을 대 안경이 있던 자리를 올렸다. 졸업이네, 하고 세나는 새삼 말했다. 졸업이네요, 하고 유우키는 새삼 대답했다. 이제 테니스 부에 좀 더 편하게 나오겠네.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의 품에는 아무것도 안겨있지 않았다. 받은 것들을 모두 두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제게 안겨주었던 꽃다발이 유난히 크고, 품 안 가득 안아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나는 제가 없는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교내 메신저를 통해 세나 이즈미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나이츠의 선창은 나루카미가 담당할 것이라는 내용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테니스 코트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며, 세나하우스는 왜 '세나하우스'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 조잘거림이 들려왔다.

꽃다발을 안고 있는 것은 오늘, 그여야만 했다. 그의 기념일이었으니까. 유우키는 그의 졸업선물을 챙겨주지 않았다. 꽃다발 하나도 짜질 않았다. 기념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더 할 말을 찾는 듯, 세나는 말 끝을 늘였다. 무언가의 유예기간 같은 순간이었다. 유우키는 해바라기를 손에 들었다. 철사로 제대로 엮지 못한 것이 뽑혀, 미련처럼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바보라서 제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 이즈미 씨. 유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졸업식이야."

"알고 있어요."

"유우 군이 챙겨주지 않는 졸업식."

"내가 기념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서."


그렇지, 의미 없는 날이지.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창문을 닫았다. 그는 교실의 커튼을 치는 대신, 한 걸음 다가와 유우키의 안경을 씌워주는 것을 택했다. 초첨없이 흐리기만 하던 세계가 선명해졌다. 오늘 봐서 다행이야. 그는 세나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는 없어, 라고 그는 다시 한 마디를 보탰다. 그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유우키는 손에 들고 있던 해바라기의 꽃대를 만지작거렸다.

그와, 어울리지는 않는 꽃이었다. 품 안에 가득 들어오게 만드느라, 짧게 자른 줄기를 그의 교복 포켓에 넣었다. 유우 군? 하고 되묻지 않는 그가 어색했다. 귀엽자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기껏 준 건데 왜 되돌려주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세나 답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유우키는 그의 함의를 어느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헛웃음을 터뜨리기에도 애매했다. 유우키는 안경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따.


"내가 졸업하는 거였구나"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를 추궁하고 싶진 않았다. 모르는 척, 새삼스럽게 내뱉기에는 쌓여온 서사들이 애매했다. 할 수 없는 말은 목막힘처럼 머물렀다. 선명해진 시야 앞, 세나 이즈미는 제 앞에 있었다. 관계를 맺어야만 쌓을 수 있는 기념일들이 있다. 한 사람이 제게 의미를 주어야지만 사람은 비로소 '기억'하기 시작한다. 꽃다발에 쌓인 세나 이즈미의 서사와 기념을 유우키는 헤아릴 수 없다. 꽃말을 생각해봐야 의미 없었다. 이것은 꽃말을 알려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더이상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기념일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백일 단위로 무언가를 끊어 세는 것도, 유우키 마코토의 이벤트를 자신의 이벤트처럼 여기지도 않을 것이었다. 꽃을 말리는 법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보관하고 싶다고 어물쩡 말하자, 거꾸로 매달아 두던가, 하는 어설픈 대답이 돌아왔다. 닫은 창문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유우키는 그의 포켓에 제가 꽂아둔 해바라기를 바라보았다. 제가 품에 안고 있는 것들은 모두 저를 닮은 꽃이었다.

그의 녹색 넥타이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는 그를 바라보다가, 유우키는 그것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천천히 제게로 끌려오는 그를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내일부터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듯 구는 이 애매한 친절에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졸업 축하해요, 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 유우키는 저의 입술에 닿는 그의 손바닥의 감촉을 느꼈다.쪽, 하고 들리는 입맞춤 소리가 달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교복에, 그가 안겨준 꽃다발이 닿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제 거리를 찾는 탓이었다. 


"졸업 축하해. 유우 군."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는 언제나 한없이 달콤한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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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이즈] 애매한 봄

*둘 다 뇨타 주의해주세요^q^)!

*무님 제가 많이 사랑해요.. 무님이랑 연성교환하기루했습니다 발레리나 세나랑 곡주는 왕님....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 김경주, 「몽상가」


***

 

오네긴에게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타티아나를 본 적이 있다. 실로 감각적인 첫 만남이었다.

튀튀는 길게 흘러 내려온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로맨틱 튀튀. 긴 잠옷 같이 생긴 베이지색 의상은 발을 움직일 때 마다 얌전히, 그리고 고상하게 움직인다. 사랑의 편지를 쓰는 타티아나, 타티아나의 사랑을 거절하는 오네긴. 장면 장면을 다루는 손끝과 발끝은 섬세하다. 살얼음이 낀 얼음호수 위를 사뿐히 걷는 느낌이다. 발톱을 감추고 우아하게 걷는 고양이 같다. 표정이 없으면 반드시 차가워 보일 그 얼굴은 예민함을 연기로 가리고 있다. 그녀의 표정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꿈결 같다.

타티아나의 긴 머리카락은 아래로 묶어 제법 가볍게 흔들린다. 조명 아래에 드는 은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일본의 타티아나들은 모두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는데 제법 특이한 조형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은색에서 눈을 땔 수가 없다. 봉긋한 가슴 아래로 흘러내리는 튀튀는 몸을 부해보이게 만들지만, 그녀의 발끝을 쫓다보면 몸매가 제법 좋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기민하게 움직이면서도 우아함을 잊지 않는다. 발레리나로서 성취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그녀는 호흡하듯 유지하고 있다.

극의 텐션은 오직 그녀를 위해 움직인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것은 그녀뿐이다. 학생 공연이란 으레 빛나는 하나에게 잠식당하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동정심이 드는 것은 그녀의 상대역이 꽤나 기량이 나쁘기 때문이다. 리프팅을 할 때 그녀의 얇고 가느다란 곡선을 보여주지 못한다. 동작처리를 할 때의 호흡부터가 어색하기 때문에 그녀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 정도로 실력이 차이나는 공연이라면 졸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합당했다.

수준이 떨어지는 공연은 보지 않는다. 새로운 자극이 없는 조잡한 공연을 보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다. 모든 무대 공연이란 사람의 시간을 강제로 소모시킨다. 볼 거라면 좋은 공연만 보고 싶다. 허투루 낭비하는 모든 순간이 츠키나가에게는 새로운 음악을 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무대 매너 때문이 아니었다. 조잡한 남자 무용수가 그녀의 얇은 허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공중동작을 하는 동안 팔과 다리는 땅에 있을 때처럼 움직이지 않고 우아했다.

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츠키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니라면 이 공연을 볼 이유는 없었다. 실로 운명적이라고 생각했다. 공연의 모든 요소들이 타티아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기사가 닦아놓은 피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왕이라면, 이 무대의 왕은 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굴었다. 절로 다음 순간이 기대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타티아나가 저를 사랑하는 오네긴을 어떻게 대할지 궁금했다.

 

오로지 모든 것이 타티아나만을 빛나게 한다. 이 세상에서 대체할 수 없는 무용수는 없다. 모두가 모두의 스페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잔인한 세계에서 그녀는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발끝을 세우고 아름답게 움직인다. 모든 동작에는 이유가 있다. 감정이 실리지 않는 곳이란 없다. 곱슬진 머리카락을 묶은 리본은 짙은 검정이다. 그녀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츠키나가는 그녀를 시선으로 깊게 훑었다.

오네긴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작은 꾀꼬리처럼 그녀는 움직인다. 사랑받고 싶어 숨을 참는다. 그 순간의 그녀는 반짝임을 머금고 있었다. 발끝을 한껏 세우고 숨을 고른다. 사랑의 밀어가 담긴 종이는 갈기갈기 찢어진다. 손에 가만히 쥐어진 종이를 바라보는 그녀와 오네긴의 행동은 잘 짜인 안무지만 어쩐지 삐걱여보인다. 그녀가 동작을 하며 손을 올릴 때 마다 봉긋한 가슴 아래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튀튀의 선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그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인스피레이션, 이라고 중얼거리지만 손을 움직일 수는 없다. 초조하게 극이 끝나길 기다린다. 발레 음악 위로 흐르기 시작한 제 선율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의식적으로 호흡한다. 내쉬는 한숨에, 저에게서 빠져나가버리는 음악이 있을까 불안해한다. 이럴 거면 박스 석으로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해도 이미 나갈 수 없었다. 한 순간이라도 그녀에게서 눈을 땔 수 없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세월이라는 물감을 깊게 덧발라 깊은 색을 내고 있었고, 그녀의 우아함은 드가가 그린 무희와 같았다.

타티아나의 흰 드레스보다는 푸른 옷을 입은 발레리나들의 튀튀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눈 색과 분명 어울릴 것이다. 츠키나가는 제가 붙잡는 선율을 오네긴의 음악 위에 덮어씌운다. 자신의 노래 위에서 음률을 밟는 그녀를 떠올린다. 가슴과 허리의 곡선을 살리기 위해서는 저런 튀튀보다는 짧은 튀튀가 나을지도 모른다. 츠키나가는 턱을 괴었다. 오네긴 따위는 버리고 차라리 나랑 춤을 췄음 좋을 텐데, 라고 속삭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학생공연의 오네긴은 망한 공연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질 나쁜 오디오로 틀고 있을 음향은 조잡하다. 조명 또한 마찬가지다. 충분히 합을 맞추지 않은 것 같다. 팜플렛에서는 한껏 멋있는 척을 다 해놨으면서 그걸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건 감점요소다. 애써 보러 온 보람이 없다. 남자주인공은 설득력이 없다.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야 타티아나가 반한다. 반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공연에서 첫눈에 빠지는 사랑을 재현하지 못하는 움직임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츠키나가는 혀를 찼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설득력이다. 그는 팜플렛을 바라보았다. 팜플렛 위에 스티커로 붙여진 은발 미인의 사진. 줄을 맞추어 붙이지 않은 견출지 위에 빼뚤빼뚤하게 써져 있는 이름. 급하게 구한 대타는 극에 녹아들지 못하고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세나 이즈미, 라는 이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공연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오네긴의 남자 주인공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츠키나가는 다리를 꼬았다. 무대 위의 세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고상하다. 그녀가 발산하는 투명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달빛 같다. 슬픔을 동작하는 그녀는 모든 음률 위를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지금 이 객석이 만석인 것 또한 그녀의 영향일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츠키나가는 세나가 발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걷는 것처럼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수수한 조명은 마치 자연스럽게 내린 밤의 달마냥 그녀에게 다가갔다. 홀릴 것만 같았다.

 

이런 타티아나에게 첫 눈에 안 반하다니, 설득력이 없잖아.”

 

츠키나가는 무심코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이미 망한 공연에 망한 관객매너를 더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무한한 아름다움을 눈에 두고 반하지 않는 남자는 없다. 외계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다. 남자 주인공이 고자인 드라마에 이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혼한 타티아나에게 반하는 오네긴이 나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반하는 타이밍이 너무 늦다고 츳코미를 걸게 된다. 저런 아름다움 옆에 저런 찌질한 남자가 있는 건 어불성설이다. 츠키나가의 말에 주변의 관객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타티아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새로운 표정이었다.

꾀꼬리같은 타티아나가 저렇게 행동할 리 없으니 저것은 세나이즈미다. 사실 성격 나쁜 타입?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망한 공연의 멱살을 잡고 홀로 움직이는 프리마돈나의 프라이드에 감탄하게 된다. 츠키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가 먹먹했다. 무언가 가득 찬 것 같이 꽉 막혔다. 심장소리가 들렸다. 제 것이었다. 츠키나가는 무대를 응시했다. 세나 이즈미의 표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대 위에서는 사랑스러운 타티아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또 다시, 음악이 나왔다. 츠키나가는 제게 흐르기 시작한 멜로디를 생각하며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었다. 발을 까딱였다. 타티아나를 눈에 담지 않으면 금새 지루해진다. 큰일이었다. 극보다 타티아나의 허리선에 관심이 가는 이상 글러먹은 일이었다. 오네긴의 음악으로는 그녀의 움직임을 살릴 수 없다. 그녀가 공중으로 뛰어오를 때 마다 튀튀 자락이 물에 풀리듯 멈추었다가, 다시 흘러내리길 반복했다. 볼륨 있는 가슴의 아래에서 출렁이는 옷자락이 섹시했다.

주변이 어둡지 않았더라면 휘파람을 불었을 것이다. 차라리 독무였으면 좋았을 듯 했다. 츠키나가는 몇 번이고 제 안에서 변주되고 있는 음악을 떠올렸다. 피아노를 기반으로 하는 것 보다는 바이올린이 좋다. 예민한 섹시함을 살리기에는 건반악기보다는 현악이 좋다. 차라리 오네긴보다는 백조의 호수가 나을지도 모른다. 왕자를 찾는 무도회에서의 러시아공주의 춤곡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백조 파드되도 나쁘지 않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젤의 전 막은 어떨까. 

그녀가 만드는 모든 순간이 보고 싶었다. 이레적인 일이었다. 실로 운명적인 일이기도 했다. 츠키나가는 팜플렛을 꼭 쥐었다.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이러다가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왼손목의 맥을 연신 짚었다. 그녀는 유연하게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경박하지 않다. 옷자락마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우연히 들어온 학생공연에서 '세나 이즈미' 같은 사람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갑자기 공연자가 바뀐 듯한 이 졸작에서!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이 완벽한 타이밍이 나올 확률을 속으로 계산한다. 정확한 수치가 없기 때문에 엉터리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근사값일만한 것을 잡아챈다. 필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숫자를 잡아채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면 꼭 사랑해야만 하는 타이밍 같다. 또 다른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오네긴의 지루한 춤이 이어지고 있음으로 이는 오롯이 츠키나가의 리듬, 츠키나가의 선율이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파리하게 흔들리는 제 타티아나를 바라본다.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았다. 이즈미, 라는 이름을 음악처럼 몰래 속삭였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것이 츠키나가 레오가 세나 이즈미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실로 감각적인 일이었다.

 

 

 

***

 

공연 중간,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냅다 달렸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인터미션의 그 짧은 순간 안에 지금 느꼈던 모든 인스피레이션을 담기에는 부족했다. 오선을 펼쳤다. 급하게 그었다. 언제나 모차르트처럼 정돈되어있던 그녀의 악보집에는 성급한 베토벤의 필체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머리카락을 올린 순간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를 담아야 했다. 악보 속에 선율을 담는 것은 츠키나가 나름의 기억법이었다.

흘러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거슬려 높게 묶었다. 세안밴드로 옆머리를 모두 올리고 펜을 돌렸다. 부러질 수 있는 연필보다는 차라리 지울 수 없는 볼펜이 좋았다. 샘에 고인 물을 퍼내듯이 끊임없이 그녀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재가공했다. 봉긋하게 부푼 가슴과 얇은 허리.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 가느다란 골반과 아슬아슬한 허벅지. 그것을 덮고 있는 남의 것 같은 튀튀. 발에 잘 맞는 분홍 토슈즈와 가지런하게 묶은 회색 머리카락. 한없이 꺾일 때 마다 아름답게 몸을 지탱하는 아치형 발등.

세나 이즈미는 츠키나가의 악보 위에서 춤을 추었다. 로맨틱 튀튀보다는 클래식 튀튀가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클레식 튀튀 특유의 선을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펜이 츠키나가의 손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카락을 긁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의 가슴에 대해 떠올린다. 극단적으로 마른 몸의 발레리나 사이에서, 그녀는 이질적이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체형은 선택받는 것이며, 발레는 신체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거면 다 된거 아냐? 하고 중얼거리다가 졸작 같았던 오네긴을 떠올렸다. 츠키나가는 투덜거리면서 악보를 정리했다. 휘갈겨 쓴 공책을 응시하다가 붉은색 펜을 꺼내 들었다. 드물게도 수정할 부분이 많았다. 원터치로 정리되지 않는 욕망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발레 음악 특유의 유연함과 아슬아슬함을 더하다가 펜을 던졌다.

초면인 사람에게 고백을 받는 건 유쾌하지 않다. 그렇게 예쁜 애라면 더 그럴 것이다. 제가 쓰고 있는 것은 꼭 나흐트무지크이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츠키나가는 침대에 다이빙했다. 발을 동동 굴렀다.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자꾸 부정맥이 온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그녀는 제 왼손에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댔다. 손가락 지문 아래에서는 자꾸만 맥이 뛴다. 덜커덕, 덜커덕 하는 심장 소리로도 벌써 몇 번의 곡을 퍼냈다. 눈을 감았다. 천장을 보고 디립다 누웠다. 빈 공간엔 다시 소리가 들린다.

제가 그려내는 세나 이즈미의 다른 모습이다. 그녀는 검은 튀튀를 입고 있다. 그녀에게는 차이코프스키가 어울린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두근거리는 것은 제가 만들어 낸 선율 위에서 움직이는 세나 이즈미다. 츠키나가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대 매트릭스가 끼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간 얼굴을 보자마자 키스할 것 같아! 소리치면서 방을 뱀뱀 맴돈다. 음악은 자꾸만 포르티시모로 격렬해지는데, 심장은 또 터질 것 같았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세나아, 하고 친하지도 않은 그녀를 부른다. 자꾸만 공중에서 정지한 것 같았던 그녀의 비상이 떠오르고, 옷자락과 함께 움직이던 곧게 뻗은 다리와 아치형으로 예쁘게 솟은 발등 산이 떠올랐다. 손목은 가느다랬고 뺨에는 복숭아빛 물이 곱게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잘 다듬어진 예술품과 같아,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았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화살로 심장을 꿰뚫리는 것과 같다는, 누군가 한 지 모를 말을 떠올리며 츠키나가는 책상 앞에 앉았다.

라 캄파넬라의 547초 부근처럼 심장이 자꾸 뛰었다. 죽음의 무도의 도입부 같았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녀를 다른 곳에서 만났을 때, 눈이 마주치자마자 키스할 게 분명했다. 괜히 틴트물 하나 발리지 않는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다가, 붉은 펜으로 교정한 흔적이 가득한 악보에 찍었다. 키스! 세나랑 키스하고 싶어, 라는 욕망을 여과 없이 말하다가도 음악으로 정제해 얌전히 담는다. 2차원에 담긴 마음의 주행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처럼 섬세하지 않다.

보는 순간 사랑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하다. 그 예민함에 어울리는 곡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타티아나를 볼 때, 그녀는 이것 또한 부드럽게 살릴 것이다. 욕심이 나는 무용수였다. 발레음악은 전혀 취향이 아니며 오히려 제 취향인건 피아노와 일렉이다. 전자음과 발레는 수억만광년이 떨어진 은하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 애는 제 곡에 춤을 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한한 과정이 망상으로 뻗어나는 과정은 꼭 짝사랑과 순서가 비슷했다.

세나의 앙다문 입을 떠올린다. 막이 내리기 전 봤던 그 단단한 입술은 불만이 가득했다. ‘사랑하는 소녀가 아닌 그녀의 표정은 러시아의 음악처럼 냉랭하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식으로 일방적으로’ ‘고백하는듯한’ ‘세레나데와 비슷한발레곡을 써주는 건 너무 이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런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가는 처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걱정과 욕망은 언제나 동전의 앞뒷면과 같았고, 츠키나가는 그녀와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한 보 두 보를 넘어 열 보를 건너간다. 속절없이 질주하는 생각의 목줄을 잡고 싶으면서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할 때를 떠올렸다. 한껏 올려 꺾인 발목, 엷은 핑크색 토슈즈, 손끝마저 떨림으로 유지하며 짓던 그 두근거리는 감정. 다시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츠키나가는 오른쪽 검지와 중지를 펴서 제 왼쪽 손목에 가져다 댔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내쉰다. 의식적으로 진정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또 다시 성욕 같은 음악이 찾아왔다. 짙은 욕망을 애써 정제하려다가 츠키나가는 펜을 바닥에 던졌다. 딥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방금, 단 한 번 본 타티아나에게 이렇게 욕망하는 것은 그 때의 오네긴이 너무나도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그 자식을 지워버리고 거기에 자신을, 자신의 음악을 덧발라 독무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퍼졌다. 이런 미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졸작을 공연한 세나가 나빠!”

 

그리고 낼 수 있는 결론은 언제나 졸작을 공연했던 세나 이즈미에게로 귀결된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그 때, 운명에 대한 경우의 수를 계산하던 것처럼 매우 일방적인 흐름이었다. 츠키나가는 다시 제 침대로 다이빙했다. 어째서 막이 끝났을 때 그렇게 찝찝한 얼굴을 지었는지 떠올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평소의 얼굴도 보고 싶었다. 꼭 짝사랑을 하는 기분이었다. 두근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자꾸만 다른 비트를 짜 줬기에, 츠키나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펜을 들었다.

타티아나의 낮게 묶은 머리카락은 단정했지만, 츠키나가 안의 세나 이즈미스럽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좀 더 반짝이고 화려한 게 어울렸다. 하얗기만 한 백조보다는 온갖 반짝이는 것으로 제 몸을 치장한 까마귀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턴을 할 때의 밸런스가 좋았으니 검은 백조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먼 곳을 응시하면서도 부드럽게 속삭이고,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아 오네긴에게 안기던 그녀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졸작과 함께 그녀를 떠올린다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속죄하듯 다시 그녀를 떠올리고, 츠키나가는 펜을 오선 위로 미끄러뜨렸다.

 

 

 

***

 

그 날을 회상하자면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세나 이즈미는 완벽주의자다. 그녀가 밟은 무대는 언제나 완벽해야 했다. 스태프부터 시작해서 모든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연기는 흠 잡을 데가 없어야 한다. 무용계는 언제나 대체할 사람이 있다. 프리마돈나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실수를 바라는 무리들을 가볍게 눌러줄 수 있는 실력이며, 둘째는 체형이고 셋째는 담력이다. 세나는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다리에 난 상처를 가리기 위해 신은 검은색 스타킹 위에 교복 치맛자락이 스치는 것이 묘하게 어색했다.

오네긴은 최악이었다. 프리마돈나가 다쳐서 급하게 대타를 뛸 수밖에 없었다. 학생공연인 주제에 외부인을 받았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실력이 없다면 관객을 제한하던가, 감당할 수 없는 홀은 처음부터 빌리는 게 아니었다. 교내의 발레부는 허구적인 상상력이 강하다. 긍정적으로만 뻗어나가는 환상에 취해있다가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 세나는 가볍게 움직였다. 무대 리허설 때 타티아나가 다쳤던 건 실력 없는 발레리노 때문이다.

오네긴. 그래, 최악이었다. 어디서부터 반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제 연기를 관철했다. 관객석에서 보기에 삐걱거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제가 공연의 퀄리티를 끌어올려준 것과 다르게 그 자식은 찌질했다. 세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네가 날 무시했잖아! 라면서 무대 뒤에서 소리치던 건 잊을 수 없다. 너무 강하게 쥐어 허리 근육이 아팠다. 공중에서 가슴을 부드럽게 펴고 팔을 뻗을 때 마다 무거워, 라고 힘겨워하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했다. 그럼 발레 그만두던가? 라고 대답 할 수밖에 없었다. 체형이 안 예뻐서 솔로 무대밖에 못하고 프리마돈나는 될 수 없는 주제에, 라고 말하기에 노려봤더니 당당하게 내려다보는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친구에게 어디서부터 설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만뒀다. 고상하게 앞에서 욕을 했더니 물건을 던졌다. 최저, 최악이었다. 완전- 짜증나, 라는 말을 대놓고 했다가는 다음 리프팅 때 죽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 라는 말은 실력이 있는 친구가 배신당했을 때 하는 대사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라는 자아만 강조하는 건 옳지 못하다. 적어도 프로를 지망할 거라면 그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 세나는 복도를 지나 교실로 들어갔다. 높게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어폰을 끼고 턱을 괴었다. 바른 자세로 앉아야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리프팅을 할 때 마다 내던져져서 온 몸이 쑤셨다.

공연이 끝난 직후 아끼는 후배에게서 문자가 왔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타티아나 연기가 좋았습니다.’ 라는 문장은 간결했다. 이렇게 정제된 메시지가 온다는 건 문제가 있다. 볼거리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에 명확하게 기억에 남는 것만 서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공연에 출연했던 것 자체가 문제였다. 세나는 투덜거리면서 턱을 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노래가 귀에 가득 담겼다. 심지어 그 공연에는 인터미션 사이에 튄 건방진 애새끼도 있었다.

 

이런 타티아나에게 첫 눈에 안 반하다니, 설득력이 없잖아. 라는 옳은 말을 했지만 내뱉는 방식이 문제였다. 순간 표정이 무너졌다. 실력 없는 파트너의 얼굴이 더 구겨졌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저를 무대에서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기 시작했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한 마디 해줄까 했는데 건방지게 도망갔다. 주황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조명이 닿는 자리에 있어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집중하면서 보고 있기에 기특하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식으로 보답해?

세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제 움직임을 모두 먹어버리겠다는 듯, 똑바로 응시하던 이름 모를 그녀의 눈빛은 한 마리의 맹수 같았다. 그 곳을 스칠 때 마다 소름이 돋았다. 파트너와 음악에 집중하는 게 아닌, 그녀에게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행성의 중력에 소행성이 끌려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이상 그래서는 안 됐다. 세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었다. 결 좋은 곱슬이 굽이치며 흘러내렸다. 머리끈을 손목에 차고, 머리카락을 최대한 높게 올린다.

묘하게 인상에 남는 사람이었다. 막이 끝날 때는 기다려, 세나! 하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제 완벽한 공연을 망친 건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절 갈구해주는 것 같아 대기실에서 기다렸지만 들어오지 않았다. 빈자리를 보면서 몸을 움직이는 건 개운하지 않았다. 묘하게 가슴속에 찝찝했다. 세나는 손목에 걸어 둔 머리끈에 머리카락을 통과시켰다.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었네, 좀 이상한 사람이기도 하고. 라면서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찝찝했다.

조명은 오로지 무대를 위해 존재한다. 무대를 위해 쏘는 빛, 그 귀퉁이를 나누어 받았을 뿐이다. 무대는 그 곳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에 집중하라는 가이드라인이다. 무대 공연을 할 때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무시한 채 반짝인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세나는 제 공연을 망친, 노을색 머리카락의 그녀가 무대 위의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생각이 많아 자꾸 한숨을 쉬게 된다. 세나는 제 볼을 손끝으로 롤링하다가 곧 그만 두었다.

오네긴 역의 발레리노는 그렇게 말했다. 단역으로 춤추는 네가, 타티아나를 모두 외우고 있는 건 쓸데 없는 욕심 아니야? 라고. 내가 발레를 하던 말던 그건 네 상관이 아니지,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자꾸 맘이 꿍하게 뭉쳐졌다. 세나는 팔을 모아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봄 햇살이 간질간질거렸다. 분해서 잠은 안 왔지만 짜증내는 표정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는 싫었다. 돈 덕분에 배역 따낸 니가 할 말인가? 라고 쏘아붙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뭇내 아쉬웠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내가 예뻐? 라고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체형이 그래도 매력적이야? 발레에 문외한인 네가 봐도 아름다워? 하고. 하지만 접점이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묻는 건 명백하게 실례이며 추한 일이다. 세나는 맥락 없는 대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좋았다. 설렘이며 끌림 같은 불확실한 것보다 차라리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에 익숙해지는 편이 나았다. 그 애의 대답에 따라 인생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보던 그 맹목적인 시선 때문이다. 나눠받은 조명 때문에 이목구비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엉망으로 입고 있던 후드집업은 발레 공연에 어울리지 않는다. 노을 같은 머리카락과 녹색 보석 같은 눈 색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의 칭찬에 일희일비할 시간은 지났다. 고등학교 3학년 발레리나는 모두 진지한 녀석들 뿐이다. 필요한 것은 프로의 평가와 날카롭게 벼려진 검 같은 실력뿐이었다.

세나는 가방에서 핸드크림을 꺼냈다. 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핸드크림을 예쁜 손끝에 발랐다. 조만간 네일 샵에 가서 손톱을 다듬어야 할 것 같았다. 체형이 나쁜 발레리나는 다른 강점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피곤한 삶이었다. 세나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움직이며 손등을 쓰다듬었다. 봄 같은 향이 났다. 구입했던 것 중에서 그나마 나았다. 그녀는 손바닥을 손바닥끼리 움직였다. 또 다시 그 애가 생각났다.

그 애에게 매달리는 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를 갈구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정도면, 그 애의 세계에서 저는 프리마돈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작은 목표에 만족하는 건 세나 이즈미 답지 않다. 세나는 발끝을 쭉 폈다. 눈을 감았다. 수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차라리 빠져나가 몸을 움직이는 게 좋을까 생각하며 발목을 까딱인다.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부정적인 감정은 고양이의 헤어볼처럼 애매하게 뭉쳐진다. 세나가 가장 싫어하는 감각이었다.

 

세나! 츠키나가가 찾아!”

그런 애 몰라.”

 

옆자리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츠키나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함부로 팬을 만나주지 않는 건 프리마돈나가 될 여자의 자존심이다. 세나는 다리를 쭉 폈다. 턱을 괴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츠키나가가 불러! 라고 다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마돈나가 될 수 없는 체형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꿈꾸는 건 오만일까 아니면 실력에 대한 과한 자신감일까. 세나는 저를 천천히 정의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상한 말을 내뱉을 것 같다. 한 번 봤는데도 계속 생각나는 건 괜히 짝사랑 같다. 한 번 본 애를 사랑한다는 멍청한 짓을 하기 위해선 몇 만의 확률이 필요할까. 세나는 미처 수량이 짐작되지 않는 무한을 셈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묘하게 기다려 세나!’ 라고 외치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웅장한 호수의 음악이 들렸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었다. 호수 위에서 움직이는 백조를 상상하며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 츠키나가가 불러-”

 

이어폰 안의 발레 음악을 뚫고 들어오는 츠키나가가 불러- 라는 목소리는 연쇄 동작처럼 부드럽게 이어졌다. 유우 군 아니면 안 나가, 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핸드폰의 볼륨을 올렸다. 유우 군이 누군데? 라는 낯선 목소리가 제게 다가왔다. 제 얼굴에 그늘이 졌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시선에 세나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움직일 때 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제 얼굴에 그늘이 졌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주목을 받는 건 익숙하다. 반으로 다짜고짜 찾아오는 멍청이들도 있다. 츠키나가도 그런 애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예의도 모르는 한심한 사람에게 쏘아붙여줄 말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냉랭한 표정을 빚어냈다. 무대 위에서와 달리 생글생글 웃어주는 헤픈 사람이 아니었다. 무릇, 프리마돈나는 언제나 관객에게 행복과 마법을 선사해야 하지만, 무대 아래의 세나 이즈미에게 그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세나!

 

세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애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무너져버린 표정을 다시 빚어 낼 수 없었다. 이런 순간에 무어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녀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햇볕이라는 조명 아래에서 츠키나가는 마치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쾌활하게 웃었다. 많이 기다렸지 세나! 라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어떠한 거리감도 없었다. 마치 저를 예전부터 잘 알던 사람처럼 그녀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돌아왔다.

그녀의 생각을 했다. 우주가 그녀로 물들었다. 그 순간에 그녀가 찾아왔다. 이상하게도 잘 맞는 타이밍이었다. 꼭 사랑에 빠지기 위해 존재하는 순간 같았다. 무어라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뻐끔거렸다. 내 이름은 츠키나가 레오야, 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그녀는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너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우주인과 교신을 할 수 있다면 바로 찾았을 텐데, 내 곡이 완성된 다음에 네가 없어서 얼마나 슬펐는데. 타티아나는 급조된 역이었다면서, 누구에게 물어도 너를 알려주지 않아 고생했어.

츠키나가의 목소리는 강처럼 흘렀다.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차이코프스키보다 세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홀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조잘거리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우주적인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라고 묻는 목소리에 무어라 반응을 하지 못했다. 세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여학생이 자리를 비껴주었고, 츠키나가는 그 자리가 마치 제 자리라는 것 마냥 당당하게 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까딱였다. 개선행진곡을 울리면서 입장하는 왕처럼 굴었다.

우리들 어쩌면 운명 아닐까. 나는 세나를 보면서 곡을 썼어. 내 인스피레이션이 이렇게 흘러넘치는 건 세나 때문이야. 퍼내도 퍼내도 세나를 위한 솔로가 멈추지 않았어. 너랑 춤을 추는 꿈을 꿨어. 나는 평소에 꿈꾸는 사람이라서 꿈을 잘 안 꾸는데! 그녀는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귀가 먹먹했다. 세나는 손을 들었다. 검지로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막았다. 비취색 눈동자가 깜빡였다. 세나? 라고 물을 때 그녀가 내뱉은 숨이 제 검지에 닿았다. 간질거렸다. 세나는 입을 열었다.

 

나 예뻐?”

 

이 순간 그녀에게 질문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그녀는 아까까지 조잘거리던 것과 다르게 부드럽게 웃었다. 세나는 츠키나가가 내뱉을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마치 운명적인 타이밍이었다. 사랑에 빠지기 위해 존재하는 순간. 마치 츠키나가의 입술을 느리게 재생한 스톱모션 비디오처럼 움직였다. 입술을 움직일 때 마다 립크림의 끈적한 감촉과 함께 츠키나가의 숨이 세나의 검지에 닿았다. 이 순간 필요한 대답은 하나였고, 츠키나가는 그걸 알고 있었다.

봄바람이 어설프게 불었다. 삼학년의 봄이었다. 예뻐, 라고 대답하는 말에는 다른 수식어가 따라오지 않았다. 주변이 웅성이고 술렁이는 목소리도, 이 순간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둘만의 독주. 둘만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들러리는 프리마돈나와 그의 파트너를 위해 준비된 순간이었다. 눈을 깜빡였다. 봄이었다. 따뜻한 바람이 살랑거렸다. 머리카락이 사부작거렸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 세나? 츠키나가는 부드럽게 물었다.

세나는 그녀의 숨이 닿았던 제 검지로 제 입술을 톡, 톡 두드렸다.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츠키나가는 자비를 베푸는 왕처럼 웃었다. 그녀는 세나의 품에 악보집을 안겼다. 카세트테이프를 던졌다. 구식이었다. 이런 걸 누가 써, 라고 투덜거릴 순간도 츠키나가는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오네긴에게 첫눈에 반하는 타티아나를 본 적이 있어! 세나! 그는 시적으로 말했다. 세나는 다 풀린 표정을 하고 눈을 깜빡이다가,

 

완전 짜증나.”

 

라고 대답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 라고 말하며 츠키나가는 웃었다.

이상하게 엇나간 타이밍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애매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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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이즈] 멸종을 달래는 방법

*무님이 써달라구 요청해주셔서 썼읍니다..재활하고있습니다....

*『오후 두 시, 달의 뒷면에서 만나요』의 왕님 시점입니다....







멸종을 달래는 방법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거짓말의 목소리이이체)



***



이미 멸종한 동물을 본 적이 있던가.

츠키나가는 담배를 물었다. 이 끝으로 필터를 짓이긴다. 부러 잘근잘근 씹어 내리는 것은 곧 있을 포식에 대한 두근거림이다.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리듬이 번져오는 듯 했다.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이 전의 순간에는 없었던 노래가 채워간다. 그는 손 안에서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오선에 코드를 적는다. 음표를 적어내릴 시간 따위는 없다. , 따다단, 따위의 리듬을 음표가 위치해야 할 자리에 갈겨 그린다. 잡아채지 않으면 휘발되는 순식간의 영감. 그는 떨어지는 물 소리를 들렸다.

미스터 카멜은 약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남의 욕실을 빌려 쓰는 걸 싫어하는 듯 했다. 새로운 걸 싫어하고 익숙한 걸 좋아하는 생물은 으레 멸종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원래 것을 고수하는 건 도태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볍게 웃었다. 샤워 부스가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새 곡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라지기 전에 붙잡지 않으면 다신 가질 수 없는 인스피레이션은, 미스터 카멜이 제게 선사하는 환희와 같았다.

빠르게 채워지는 오선은 모차르트라기보다는 베토벤의 악보를 닮아 있었다. 츠키나가는 정렬되지 않은 채로 악보에 담겨 있는 제 곡을 바라보았다. 마스터피스라기에는 부족한, 날것에 가까운 초고는 평소 저가 정제해내던 음악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는다. 순간, 순간의 목소리를 잡아 끌 수 있는 건 이 곳이 미스터 카멜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유의 날선 체취가 집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카멜 하우스, 라고 하면 싫어할까. 하지만 이름을 알지 못하니 그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다. 리스크 있는 섹스를 하기 싫다더니 아직까지도 부를만한 이름을 가르켜주지 않았다. 카멜- 하고 부르면 제 때 대답해주지 않는 주제에 아직도 제게 라벨링 되어있는 고유명사를 한 번도, 한 번도 말해주지 않는 건 치사하다. 츠키나가는 다시 펜을 돌렸다. 정갈히 호흡한다. 물소리는 아직 들리고 있었다. 카멜은 빗소리를 닮았다. 이미 단종된 지 오래인 그 담배도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악보의 위에 문득 멸종이라고 받아 적는다. 미스터 카멜에게 어울리는 단어였다. 리스크를 짋어지기 싫기 때문에 호텔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섹스를 할 수 있는 가장 프라이빗한 장소는 자신의 집이다. 이 판단까지는 나쁘지 않다. 정석적이고 스마트한 선택이다. 하지만 동시에, 츠키나가는 그의 선택이 너무 여지를 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카메라가 있는 지 없는 지 확인하는 것이 귀찮기 때문에 그것이 없을만한 가장 최적의 장소를 고른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이다.

 

츠키나가는 펜을 돌렸다. 어때, 멸종하기 딱 좋지 않아? 하고 속삭인다.

샤워부스 안에 있을 미스터 카멜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다. 그는 그의 은발을 처음 보던 날을 떠올렸다. 그는 멸종 직전의 동물마냥 섬세했다. 그 날에도 그는 비를 맞고 있었다. 비를 잔뜩 맞은 꼴을 하고서 짜증을 내면서도, 무언가 변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고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고여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끈다. 세상에 없는 유니크한 분위기가 있었다. 세상에서, , 하나. 인간은 으레 그런 단어를 욕망하기 마련이었다. 츠키나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눈치 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 카멜을 처음 만나던 그 날. 그는 카페 안에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듯 단단히 팔짱을 끼고 먼 곳을 응시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도 창밖을 바라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군다.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언제나 용건이 있음을 재확인시켜준다. 그의 사적인 이름이 물결처럼 수근거린다. 카페 안의 목소리가 내는 파장들은 자연스럽게 미스터 카멜에게 쏠린다.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그런 식의 폭력을 동반한다.

시선은 강제적으로 끌린다. 실로 강압적인 행위다. 음악의 원리와 비슷하다. 허락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귀를 비집고 들어가 청신경을 타고 뇌에 도달하는 음률처럼, 그의 아름다움 또한 모든 시선을 잡아끈다. 실로 폭력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본인에게도 그러한 자각이 있다. 비오는 낡의 낡은 카페. 달의 뒷면에서 그는 뒷면이 없는 달처럼 고고하게 떠 있는 것이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재능은 아름다움이며, 그런 의미에서 카멜은 지나치게 무대 위의 사람이었다.

제 주변에서 말하던 사람이 소곤거리던 카멜의 예명은 잊어버렸다. 조금 더 저항하고 싶었다. 굳이 말을 붙이고 헌팅을 하는 것은 제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잘 제련된 검 같은 서늘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싶었다. 날이 잘 버려진 칼의 손잡이를 쥐는 건 저였다. 이런 사람의 왕이 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망이었다. 츠키나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샤워 부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멜, 노래는 잘 해?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라는 목소리는 매우 퉁명스럽다.

츠키나가는 휘파람을 불었다. 미처 앞섶을 잠그지 않은 나이트 가운. 그 아래로 하얀 가슴팍과 가느다란 허리가 보였다. 균형있게 잡힌 몸매 아래에 뻗은 긴 다리에는 상처가 있다. 발가락에는 굳은 살과 터진 살, 그리고 발가락이 부러졌다가 붙은 자국이 있다. 정강이 뼈에 길게 나 있는 흉터자국은 그가 실패한 발레리노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츠키나가는 그의 외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유추하고, 다시 오선 위에 재구성했다. 세레나데를 만드는 기분이었다.

 

작사는?”

글세.”

섹스는?”

왕님이 더 잘 알겠지.”

잘하는 편이네.”

그래?”

내 칭찬은 값이 비싸, 카멜. 전 우주적으로 사랑스러울 때만 말하거든.”

 

그런 무거운 거 받고 싶지 않은데. 츠키나가는 카멜에게 수건을 던졌다. 그는 채 마르지 않은 은색 곱슬머리를 닦았다. 츠키나가는 그가 만들어내는 소음을 들으며 오선 위에 펜을 움직였다. 불을 붙이지 않은 마일드 세븐 끝을 바라보다가 카멜은 혀를 쯧쯧 찼다. 담배 피우지 말랬지? 라고 묻는 목소리는 신경질적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하는 이유에 대해서 카멜은 알고 있을까. 츠키나가는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는 대신 입에서 담배를 빼고, 빈 악보에 마침표를 찍듯 짖이겼다.

입이 심심해, 라고 칭얼거리듯 만든다. 악보에 도돌이표를 채워 넣는다. 코드를 쓰다가 펜을 내려놓는다. 팔을 벌린다. 카멜은 천천히 다가온다. 사냥을 앞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간다.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들을 때 마다 고양이의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생각한다. 귀찮은 관계는 싫어, 라고 그는 다시 말한다. 카멜은 멸종하기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어.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와 입을 맞추었다. , , 하고 가볍게 울리는 키스를 한다.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가 심장 고동소리를 빠르게 움직인다.

하지만 들킬 수는 없었다. 츠키나가는 그의 나이트가운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알맞게 데워진 몸은 산뜻하다. 카멜의 향이 났다. 집이 깔끔하네, 라고 괜히 칭찬을 하며 웃는다. 언제든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달린 날갯죽지를 더듬는다. 큰 손으로 둥글리듯 쓰다듬는다. 보이지 않는 지문을 그의 몸에 덕지덕지 바른다. 이러한 종류의, 보이지 않는 낙인에 대해서 카멜은 매우 친절하다. 어떤 욕망을 가지고 지분거리는 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고고하게 군다.

무대 위의 아름다운 것을 동경한다. 동경하기에 모두 움켜쥐고 싶다. 모든 것이 멸종한 세상에 고고하게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온리 원을 가지고 싶다. 날선 욕망을 가리지 않는 건 왕의 특권. 오오사마, 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입술로 덮는다. 가느다란 허벅지를 더듬거린다. 그와의 섹스는 생상스의 곡을 닮았다. 죽음의 무도의 도입부처럼 느리게 주고받는다. 바이올린 솔로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 때 부터는 열락을 준다. 자신에게 길들인다. 츠키나가는 그를 침대에 엎었다.

스프링이 흔들렸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깨끗한 흰 시트는 주인의 취향을 닮아 있다. 단종된 담배를 피우는 신경질적인 입술에 다시 키스를 한다. 아랫입술을 깊게 깨문다. 송곳니로 누른 곳에는 피가 몰렸다. 쉽게 달아오르는 것은 선정적이다. 멸종에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츠키나가는 휘파람을 불었다. 유성매직 좋아해? 라고 묻는다. 무언가를 연상한 듯 카멜은 고개를 저었다. 은발이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을 때 그 파란 눈은 자신을 너무 지극하게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맹목적이다. 하기 싫은 것을 하려고 했을 때 짜증을 남아 노려보는 눈빛은 오롯이 저만 바라보고 있다. 푸른 눈동자를 마주할 때 마다 오선 위에 올라탈 수 있는 것이 극도로 정제된 음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뮤즈, 라는 식상한 단어 말고 그를 다른 단어로 정의하고 싶어진다. 호흡을 담아 숨을 섞는다. 키스를 한다. 혀를 엮는다. 그의 단정한 골반 위에 제 허리를 비빈다. 이 순간 사라져버리는 음이 많았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음을 잡아채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카멜과 함께 있으면 우주라도 써낼 수 있다. 모든 규칙을 창조하고 재정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독 될 것 같았다. 담배 같은 느낌이었다. 끊으면 끊을수록 탈력이 올 것 같았다. 진심이 되는 건 싫다고 말하던 카멜의 목소리는 음악이 곧 끝날 것을 예고하는 종언처럼 들렸다. ,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아니라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였을까. 그는 비슷한 음악 여러 개를 생각하다가 카멜의 목을 물었다. 그의 하얀 피부에 제 입술을 부빈다. 보이지 않는 제 흔적을 깊게 누른다. 마크는 새기지 않는다.

완벽한 것을 손상시키는 건 그것이 오롯이 제 손아귀안에 들어왔을 때 문이다. 그는 관용있는 왕처럼 그의 피부를 핥았다. 깊게 핥을 때 마다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궤도에 이르지도 못했고, 서장을 연주하지도 못했는데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그저 귀엽기만 했다. 관계를 정의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다. 왕님, 하고 불러오는 목소리가 치사하다고 생각한다.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떠올린다. 이럴 거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고 얼굴을 찌푸린다.

 

대위와 대구, 늑대의 5, 화성법 같은 건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츠키나가는 귀울음처럼 먹먹한 두근거림을 담아 그의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누드 화보 같은 것도 찍어? 라는 말에는 프라이버시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 카멜의 이름을 몰라서 구글에도 검색 해 볼 수 없는데, 라고 질문하자 평생 그렇게 살라는 말이 돌아왔다. 이름을 알면 좀 네가 내 뭐가 된 것 같아서 싫어, 라는 말은 완고하고 단단했다. 예쁜 미간에 주름이 져 있었다.

나는 현실주의자라 리스크 있는 섹스는 안 해. 카멜은 그렇게 말하면서 츠키나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그의 행동을 받을 때 마다 생각나는 것들이 많았다. 스쳐 지나가는 악상을 지금 붙잡지 않는 것만 해도! 전 우주의 손실인데 그깟 리스크좀 밟아도 되잖아! 라고 소리치자 카멜은 귀가 따갑다는 듯 귀를 막았다. 츠키나가는 그의 가슴을 더듬거렸다. 예쁜 분홍빛의 유룬을 더듬다가 유두를 입에 물었다. 노골적인 소리가 부끄러운 듯 카멜은 왼쪽 벽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의 벽지가 뭐가 이쁘다고 봐? 차라리 지금 이 순간. ‘이 있는 유일한 걸 봐. 모노톤의 네 집에서 유일하게 색이 있는 건 나잖아. 네 왕. 오오-사마. 미스터 마일드 세븐. 츠키나가는 충동적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좁혀진 미간이 사랑스러웠다. 사랑해, 카멜, 정말- 하고 속삭인다. 그게, 성애적인 감정이야, 아니면 정말로 좋아한다는 거야, 아니면 네 재미있는 인간에 대한 아가페적인 사랑인 거야? 라고 따박따박 되묻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멸종을 앞둔 동물의 그 불안함과 아슬아슬함을 제대로 이해해 줄 수 있었다면, 저는 사냥꾼이 아니었을 것이다. 츠키나가는 그의 입술에 제 검지손가락을 올렸다. 글쎄, 어떨까? 라고 되묻는 목소리에 어떤 감정이 묻어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미루어 짐작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 사이의 룰이었다. 츠키나가는 미스터 카멜을 바라보았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자기, 라고 부드럽게 부른다. 다분히 불안해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걸 사랑이라고 정의하기에는 애매하지, 라고 대답해준다. 그러면 그제야 카멜은 부드럽게 숨을 내쉰다.

급박하게 바뀌는 호흡, 느끼는 안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애햐 할까. 그와의 섹스는 아득한 수싸움이었다. 장조에서 단조로 팔분음표에서 십육분음표로. 또 다시 도돌이표로, 그것을 다시 거쳐 피네로. 츠키나가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늘의 왕님은 너무 말이 많다고 말하는 카멜을 바라본다. 있지, 이제 카멜은 일본에서 안 나오잖아. 라고 문득 묻는다. 단종된 담배에 관한 이야기임을 눈치 챘는지 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츠키나가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럼 담배는 어디서 구해? 라고 실없이 묻는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카멜을 마주한다. 나는 네 멸종과 아득히 사라질 것 같은 느낌. 리스크를 싫어하면서도 더 큰 리스크를 집 안에 들인 어리석음에 대해서 알고 싶어, 라고 질문할 수 없어서 적당히 고른 질문이었다. 츠키나가는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을 받다가 카멜은 고개를 돌렸다. 집중해 나한테, 라고 조르듯 말하자 카멜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있잖아, 라고 숨을 내쉬면서 호흡하는 그는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무지하게 꼴리는 광경이라고 내뱉으려는 순간, 카멜은

 

그거 까지 신경 쓸 사이야?”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 , 그래. 그럼 그거 까지 신경쓰는 사이가 되어줄게.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마일드하고, 부드럽게. 멸종을 달래듯이.

 

 



[마코이즈] 첫, 사랑니.

*이즈미를 짝사랑하는 마코토 주의해주세요. 

*레오이즈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앙스타 전력의 '탈주'라는 주제를 받아 썼습니다 : )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

오래

그리워했다

- 순간, 문정희




첫, 사랑니.



***


   사랑니가 났다. 정확히는, 사랑니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우키는 제 볼을 쓰다듬었다. 볼이 화끈거렸다. 얼얼했다. 치열 아래쪽에서 원래 있던 이를 밀어내고 이가 자라고 있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며칠 뒤에 이를 빼기로 약속을 잡았다. 빨리 빼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았다. 진료실을 나가기 전에 유우키는 입을 열었다. 발음이 안 좋아진 것도 이거 때문일까요? 라는 질문에 의사는 그럴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애매한 대답이었다. 유우키는 귀 밑, 움푹 파인 곳을 긁적였다. 찬 손에 닿는 볼이 식어갔다.

   아픈 곳을 혀로 지그시 누른다. 치통이 찾아오기 전은 언제나 고요한 겨울 같다. 언제 눈이 내릴지 모르는 순간 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막막하다. 찾아올 고통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유우키는 목도리를 단단하게 맸다. 파란색 목도리는 그의 손에서 몇 번을 감기더니 볼 전체를 감싸 안았다. 병원 문을 밀 때 나는 풍경 소리는 딸랑, 하고 아쉬운 듯한 소리를 냈다. 그는 길게 늘어지는 도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었다. 상실의 계절이라는 말처럼 나무는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나뭇잎을 천천히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일은 탈출일까, 포기일까, 미련일까.

   유우키는 답지 않게 감상적인 생각을 했다. 그는 자라는 이가 들이차 있는 잇몸 아래쪽을 톡톡 건드린다. 턱이 움직일 때 마다 목도리의 부들부들한 부분이 얼굴을 간질였다. 그는 괜히 기침을 하며 인도를 걸었다. 몇 명의 의미 없는 사람들을 지나치고 그는 이윽고 건널목에 자리한다. 혼자 병원에 가는 일은 익숙하면서도 어색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왜인지 자꾸 볼 안쪽 살을 씹게 됐다. 그는 이에 씹힌 자국을 혀로 더듬었다.

   자국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혀로 자국을 밀어낸다. 이렇다고 해서 들어갈 자국이 아니다. 생긴 무언가는 언제나 자리를 남는다. 발생했기 때문이다. 영향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는 언제나 공허하다. 유우키는 제 송곳니를 괜히 건드리다가 다시 ‘사랑니가 있다고 생각되는 쪽’을 더듬었다. 찌릿거리는 통증이 느껴지자 그는 그것을 후회했다. 자리를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은 아픔을 동반했다. 그는 동시에 생각한다. 필요 없는 그 이가 있던 자리도 공허할까.

   몇 센티미터가 되지 않는 이, 그 이를 ‘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사랑니를 빼는 행위도 ‘탈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떠남은 언제나 아픔을 동반하겠지, 생각하며 그는 혀로 입천장을 툭, 툭 건드린다. 동시에 신호등의 신호가 바뀐다. 초록불 아래의 흰 선들을 밟을 때 마다 겨울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바다에서는 바람 냄새가 났다. 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들어 목도리 위를 감쌌다. 목도리 색은 완전한 파랑이었다.

   완전한 파랑, 그리고 그는 그 단어에서 겨울을 닮은 남자를 떠올린다. 세나 이즈미라는 존재는 이제 제 인생에서 빠진 사랑니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유우키는 길을 똑바로 보고 걸었다. 보도블럭은 오늘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이르게 시즌에 들어간 가게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고 있다. 빛무리가 유난히 반짝거리는 겨울은 이별의 계절이다. 이가 아팠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렇지만 그의 두 눈은 의외로 뻑뻑했다. 그는 길가에 멈춰서서 목도리를 다시 맸다.

   사랑니를 빼는 걸 결정하는 건 사랑니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행위이다. 세나 이즈미는 유우키 마코토의 사랑니였음으로 그는 그를 제 인생에서 탈주시키기로 결심했다. 일부러 그 행위를 ‘잊는다’라는 서정적인 단어로 표현하지 않는 건 유우키의 의사였다. 이질적인 단어를 사용할수록 마음에서 더 멀어진다. 현대문학 시간에 들었던 별 거 아닌 말이 유난히도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건너편 가게의 창문에 꼬마전구를 다는 점원들을 바라보았다.

   도로에는 차들이 지나간다. 정원의 낙엽이 가시기도 전에 새 단장을 준비하는 가게에서는 생상스의 론도 카프리치오소가 흘러나온다. 유우키는 제 왼쪽 볼을 잡아당긴다. 아픈 이가 자리하는 곳이다. 그 상태를 유지하며 입으로 숨을 들이키면 이가 차가워진다. 조금은 통증이 가라앉는 것도 같다. 생상스의 마지막 음 다음에는 뉴에이지다. 츠키나가 레오의 곡이다. 제 사랑니의 이름이 붙어있는 곡이기도 하다. 유우키 마코토는 그 곡이 사랑고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세나 이즈미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핸드폰은 주머니에서 진동한다. 손을 들어 확인하면 사랑니가 보낸 메시지다. 병원 다 끝났어? 이 나를 기다리게 하는 건 유우 군 뿐이라고? 그러니까 형아가 같이 가 준다고 했잖아, 라는 메시지에는 ‘빨리 와’라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유우키는 그 안에 들어있는 말이 ‘보고 싶다’와 ‘빨리 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일부러 발걸음을 느리게 걸었다. 츠키나가 레오가 만들어 낸 박자에 맞춰서. 남의 간접적인 사랑 고백을 알게 되는 건 언제나 괴롭다.

   괜히,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 데도.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랑니는 뽑아내야만 한다. 원래 있던 치열을 밀어내고 자라는 것이라면 더욱 더. 마음의 벽을 허물듯 자라버린 사랑니에서는 통증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파온다. 아주 깨질듯이, 세계를 흔들면서. 아직도 이가 아프다. 턱을 벌리기 어렵다. 그는 눈을 깜빡인다. 눈은 아직도 뻑뻑했다. 이별을 앞두고 있는데 우스운 일이었다. 탈주 후 남은 자리는 언제나 진하게 번진다.


   사람은 언제나 무게를 가지고 있고, 상실은 그것의 두 배 정도 무겁다. 미처 말하지 못한 리듬들이 귀에 박힌다. 사랑니가 난 걸 아예 몰랐으면 좋았을 걸, 생각한다. 아예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세나는 자신을 돌봐줘야 할 어린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느껴지는 치통 같은 일이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건 슬프다. 마주 들려오는 리듬이 있을 걸 알고 있기에 유우키는 괜히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이가 아팠다.

   원래 있던 치열 같은 사랑이겠지. 유우키는 두 사람을 생각한다. 비집고 올라와서 아픔만 주고 사라지는 사랑니가 아니라. 상실은 곧 성장이라지만 이럴 거라면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길을 천천히 걷는다. 길의 끝에는 세나가 있다. 핸드폰이 손끝에서 윙윙 울렸다. 보지 않아도 누가 보낸 메시지인지 알 수 있었다. 기다리다 이골이 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나는 기다리는 데 서툴렀다. 유우키는 잘 알고 있지만 츠키나가는 모를 사실이었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상실이 깊었다. 입으로 숨을 쉴 때 마다 이가 시렸다. 이를 모조리 뽑고 싶었다. 아랫니를 윗니로 세게 누르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번져왔다. 첫 사랑니라 더 아픈 걸지도 모른다. 겪어본 적 없는 통증이었다. 이를 빼 버리면 없어질 아픔이기도 했다. 상실은 언제나 아픔을 남긴다. 그는 세나 이즈미를 자신의 인생에서 탈주시키기로 결심했다. 일부로 어색한 단어로 표현하는 실연은 사랑니처럼 지끈거리는 두통만을 남기고 있었다. 더 이상 걷기 싫었다. 이별을 마주하는 겨울 길은 차기만 했다.

   세나에게로 향하는 연속적인 걸음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에게로의 탈주. 마주치지 않고 도망가고 싶기만 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길은 꼭 여름의 모습을 모두 벗어버리고 땅에 쓰러진 낙엽 같았다. 츠키나가 레오 작곡의 러브 송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유우키는 달리듯 걸었다. 멀리서 뚱한 얼굴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세나가 보였다. 여전히 이가 아팠다. 그제야 눈에 눈물이 돌았다. 눈은 더 이상 빡빡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걸 좀 더 빨리 알아챘다면 가로챌 순간이 있었을까 생각하다가 유우키는 낙엽을 밟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세나는 고개를 돌렸다. 유-우-군- 이라고 부르면서 환하게 웃는 반짝임.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도 못해 망설이게 되는 순간이었다. 저에게 다가오며 거리를 좁히는 세나. 그가 다가올 때 마다 이가 아팠다. 눈가에 물기가 어린 것을 눈치 챌 거리까지 세나는 그저 다가오기만 했다. 유우키는 가만히 걸음을 멈추어 기다렸다. 눈부시게 떠나보낼 그. 탈주한 세나가 남길 빈자리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많이 아팠어?”

 

  상냥하게 물어보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다정하기에 서러웠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깜빡이자 고여있던 눈물이 흘렀다. 아까 들었던 사랑 선율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울 정도냐며 호들갑을 떠는 세나의 목소리로도 그 선율을 쫓아낼 수 없었다. 이가 아팠다. 치열을 흔들며 자라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오늘은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단 거 조금만 먹으랬잖아, 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혼을 내는 세나를 바라보다가 유우키는 고개를 저었다.


    “충치가 아니라 사랑니래요.”


   그렇게 말하자 세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게 지금 중요해? 라는 목소리에는 ‘굳이 정정하지 말란 말야’라는 투정이 묻어 있었다. 세나 다워 웃음을 터뜨렸다. 울다가 웃으니까 완전 이상하다는 타박이 돌아왔다. 유우키는 사랑니를 빼는 날을 떠올렸다. 부러 그 날짜를 말하면서 레코드 샵에 가지 않을래요? 하고 묻는다. 그는 이별을 그 날로 미루기로 혼자 결정했다. 세나는 오늘 가지 않고? 라고 묻는다. 유우키는 아직 앨범이 나오지 않았다고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세나는 별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우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이 늘었다. 정확히는 거짓말이 늘었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침묵에서는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들 사이에는 별 거 아닌 이야기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서로 좋아하는 둘’이 하기에는 지극히 무미건조한 대화였기에 유우키는 또 다시 치통을 느꼈다. 얼굴을 찡그리자 세나는 진통제 이야기를 꺼냈다. 유우키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인생에 한 번 밖에 없을 텐데요, 라고 대답하는 혀끝이 썼다. 그는 탈주를 다음으로 미룬다. 일부러 어색한 단어로 표현한 상실은 며칠 후로 몸을 옮겼다. 그 때는 완전한 겨울이겠지, 생각하며 유우키는 파란 목도리를 고쳐 맸다.


   사랑니가 났다. 정확히는 사랑니가 났다는 소식이 들었다.

   첫 사랑니였다. 

[레오이즈] 靑春禮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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