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상이몽同床異夢











2.

동상이몽同床異夢





***


   카메라가 돌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셔터 한 번에 세상 한 번이 담기는 사진과 달리, 동영상은 흐름을 담는다. 세나는 카메라를 받아 전원을 껐다. 들어왔던 붉은 빛이 꺼졌다. 그 순간, ‘애매함’을 담고 있던 둑이 터져 내렸다. 세나는 무너지지 않으려 했다. 그는 유우키를 바라보았다. 여전한 얼굴이었다. 못난 안경은 여전히 쓰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포실포실한 금발이었다. 봄볕 같은 색이었다. 초록 눈은 여전히 봄날 잎사귀를 닮았다. 변하지 않은 모든 게 슬픔의 이름으로 다가왔다.

    일단 앉을래? 세나가 권했다. 유우키는 어색하게 소파에 앉았다. 30cm정도 차이 나는 간격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세나는 그림자가 벽을 타고 올라와, 제 목을 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유우키의 행동에, 더 마음이 아팠다. 상처를 새삼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았다. 세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초조했다. 손끝이 떨리는 걸 애써 감추었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포개 접었다.


    “이 시간에 왔다는 건”


    세나는 천천히 말했다. 다행이도,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멀쩡했다. 대신 그는 짧은 틈을 두고 호칭을 고민했다. 유우키, 라고 부르기에는 가까운 사이였고, ‘유우군’이라고 부르기에는 친하지 않은 관계였다. 소년 시절이었다면 막 부르지 않았을까, 를 생각할 때 쯤, 옆에 앉아있던 유우키가 입을 땠다. 미안해요, 라는 말이었다. 세나는 그 두서없는 말이 튀어나오게 된 지점을 생각하다가, 괜찮아, 라고 대답했다.

   나는 우리 리더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어. 아니면 쿠마 군이라던가, 세나는 일부러 기운차게 말했다. 그러나 새벽이 묻은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커피 마실래, 세나가 물었고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건넨 말이 무색해졌다. 세나는 시선을 돌렸다. 백열등에 눈이 시려왔다.

   일부러 건넨 블랙커피를 아무 말 하지 않고 마시는 유우키를 보면서, 그는 그들이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를 실감했다. 유우키는 5cm정도 더 자란 것 같았다. ‘유우 군’이라고 자연스럽게 부를 때와 다르게 눈높이에서 차이가 났다. 하지만 달라졌음을 눈치 챘다고 해서 변할 건 없었다. 다시 가까워 질 것도 아니었다. 둘은 어른이었다. 텔레비전의 예능은 작은 비즈니스일 뿐이다. 세나는 심호흡을 했다.


   “어서 찍고 가.”

   “이즈미 씨.”

   “시간 늦었어. 잘 시간 한참 넘겼다고? 애초에 기다린 것도 너 때문이잖아. 그럼 발목이라도 잡질 말아야지.”


    세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유우 군’이라는 호칭을 부르기에는 아직 어색했다. 그의 말에 수긍한 듯, 유우키는 카메라를 들고 다시 현관 쪽으로 갔다. 현관의 이중 문 뒤로 카메라를 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 저렇게나 커버렸구나. 세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공허가 그 곳에 그늘처럼 자리했다. 그 사이의 여백을 메울 재간이 없었다.

    천천히, 유우키 마코토가 다가온다. 런웨이를 걷는 것처럼 우아하다. 허리는 꼿꼿하게 펴져 있으며, 얼굴은 서늘하게 잘생겼다. 우리의 처음이잖아, 좀 더 밝게 웃어야지. 그런 캐릭터잖아 너. 세나가 그렇게 말하자 유우키는 다시 멀어졌다. 세나는 나루카미에게 받은 문자를 떠올렸다. 이즈미쨩의 상대, NG를 상당히 많이 내는 타입이더라고, 라는 문자는 나름의 힌트였을까. 이즈미는 턱을 괴었다.

   두 개의 잔이 놓인 식탁은 어색하기만 했다. 세나는 잠시만, 이라는 말을 하다가 제 커피잔을 들었다. 내용물을 개수대에 버리고, 하얀 컵은 깨끗이 씻어 보이지 않는 곳에 엎어두었다. 컵 표면에 묻은 물방울이 눈물처럼 흘렀다. 세나는 모든 게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 부조리극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와 같았다. 웃어야 했다. 놀라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다시 소파에 돌아와 앉으면서, 세나는 유우키 앞에 놓여 있었던 커피잔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유우키는 혼잣말을 했다. ‘레디, 액션’이었다.

   영화라도 찍는 기분인 걸까 생각하며, 세나는 가면을 썼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던 척 앉아 있었다. 저, 약혼자님, 하고 말을 걸어오는 유우키의 목소리가 달았다. 가짜라는 이름으로 엮이기에는 과분한 상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모든 걸 포기했다. 접어둔 마음을 다시 펴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세나는 제 사랑이 넣어둔 지 오래 된 겨울코트의 주머니 속에 있던 영수증과 같다고 생각했다.

    구깃구깃, 접혀있는 것을 펼 수는 있으나 예쁜 모양새는 나지 않는다. 세나는 커피잔에 입을 댔다. 보이지 않는 입술자국에 제 입술이 닿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우키는 저기, 약혼자님, 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세나는 고개를 돌렸다. 유우 군, 유우 군, 유우 군, 세나는 스물일곱인 자신이 그의 이름을 말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세나는 환하게 웃었다. 카메라 렌즈를 보면서 표정을 만들어 내는 건 자신 있었다. 언제나 해왔던 일이였다. 일, 일, 일. 세나는 그렇게 심호흡 했다. 내 약혼자가 혹시 유우 군? 하고 발랄하게 묻자, 그런 것 같다는 유우키의 목소리가 번져왔다. 아, 역시 좋은 형이 되고 싶었어. 라는 미련이 세나의 그림자를 더욱 검게 물들였다. 세나는 머그컵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유우키를 환영하며 말했다.


    “어서와 유우 군. 기다렸어.”


    카메라 렌즈를 보며 웃는 모습을, 뷰파인더로 보고 있던 유우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세나는 자꾸만 튀어나오려고 하는 그 날의 기억을 억지로 우겨넣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가면은 쓰면 쓸수록 제 얼굴처럼 변해간다. 유우키도 마찬가지인지, 이번에는 별다른 NG를 내지 않았다. 부조리극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재회할 필요가 있었을까, 세나는 유우키를 제 옆에 앉혔다. 몇 가지의 추억을 팔아 넘겼다. 그는 리츠와 이사라가 친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리츠를 통해 조각조각 주워들었던 소식들이 얼기설기 기워져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대화를 이끌어가자 유우키의 표정이 점점 풀려갔다. 삼각대에 고정 된 카메라는 한 편의 부조리극을 담고 있었다. 마음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밝게 웃었다. 그는 자신이 무너지지 않길 바랐다.

    유우키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걸었던 무수한 길들은 무색하기만 했다. 자신에게 물어볼 게 없는지, 그는 질문하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에서 벗어나는 게 없었다. 유우키는 여전히 어린애처럼 행동했다. 세나는 카메라를 끈 다음에 몇 가지를 충고할까 했지만, 곧 그만 두었다. 필요 이상으로 엮이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방송 분량을 뽑았다고 생각 될 때쯤 세나는 그럼 삼일 후에 볼까? 하고 이야길 꺼냈다. 유우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삼일 후에, 웨딩촬영 하는 거 기억 못해?”

    “해…해요.”


   아직 소년에 머물러 있던 이즈미라면 분명 한 마디를 더 덧붙였을 것이었다. 스케쥴 관리를 하는 건 프로의 기본 소양이야. 그 정도도 못하면서 무슨 아이돌이야? 역시 아이돌 그만둬, 라는 말 같은 것, 걱정을 담은 잔소리들을 늘어 놓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나는 괜찮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 사소한 어긋남에 유우키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망설이듯 입술을 안으로 숨겼으나 더 이상 이어지는 문장은 없었다.

   둘 사이에 잠시, 작은 마침표가 찍혔다.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기에는 너무나도 어색한 공백이 침묵의 이름으로 자리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말문을 연 건 유우키였다. 이즈미 씨는 잘 지냈어요? 라는 말에 세나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서 글쎄, 하고 대답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이후, 어떻게 촬영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울컥거리는 치받침이 자꾸만 반추되는 머지않은 과거 위에 내리 앉았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부디 자신이 추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카메라를 끄고 난 다음의 유우키가 자신에게 사과 해왔다는 것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 아이는 언제나 상상했다. 그 사과는 과거에 대한 부정일까, 아니면 미련일까. 세나의 밤은 무대였다. 고민과 미련은 준비된 무대 위에서 발과 발을 엮어가며 왈츠를 췄다.


    새벽 다섯 시. 자야 했지만 잠이 들 수 없었다. 세나는 식은 커피잔을 두 손에 가둔 채로 눈을 감았다. 남는 건 억울함 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수락하지 않는 건데. 그는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시계 분침이 오른쪽으로 오가는 소리가 진하게 들렸다. 째, 깍. 째, 깍. 하며 우직하게 움직이는 리듬이 알려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시야가 아득하게 번져왔다. 칠 년 만에 만난 그 애는 여전히 봄이었다. 겨울의 한 가운데에 서서, 그는 눈을 감았다. 이 허전하게 빈 공간을 채우고 싶었던 건 맞으나, 그것이 ‘유우키 마코토’는 아니었다. 오히려 볼 수 없는 쪽이 감사했다. 세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손에 쥐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새벽이 느리게 번져왔다.







***


    「어떻게 대하면 좋겠니?」


    세나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유우키는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삼일 전의 어색함을 떠올렸다. 한숨을 내쉬었다. 자동차 의자에 기댔다. 멀미가 몰려왔다. 새벽에 그의 집을 도망치듯 나오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다신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트릭스타의 다른 멤버에게는 조언을 구할 수 없었다. 그 때의 그 일은 유우키 마코토와 세나 이즈미만의 기억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웨딩 사진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검은 턱시도를 입는 건 유우키였고, 하얀 턱시도를 입는 건 세나였다. 먼저 도착했는지, 세나는 턱시도 사진을 보내왔다. 미리 리액션을 생각 해 두라는 친절이었다. 잿빛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턱시도였다. 차이나 카라와 비슷한 셔츠, 그 아래에는 검은 보타이가 매여져 있었다. 세나는 언제나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릴만한 걸 찾아내곤 했다. 그건 ‘변하지 않은 점’이었다.

    하얀 정장 재킷을 입어도 반짝였다. 비비했다. 하얀 옷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피부가 죽는 일도 없었다. 잿빛 머리카락에 주황빛 조명이 들어서 반짝였다. 메이크업을 마쳤는지 눈가는 더 깊게 보였고, 그 아래의 푸른 눈동자는 호수처럼 반짝였다. 검은색 바지는 테가 났다. 세나 역시 칠년 전 보다는 키가 컸다. 눈높이가 아래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언제나 내려 덮고 있었던 머리를 깐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코토는 그의 가슴팍에 달린 붉은 동백꽃을 바라보았다.

    동백꽃의 꽃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무리하게 의미를 부여하다가 차창에 머리를 박았다. 두피에 차가움이 전해져왔다. 머리세팅 망가지니까 그만 두라는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우키는 나 어떡해요, 하고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바라고 말하는 말은 아니었다. 쥐고 있던 핸드폰이 두어 번 더 울렸다. 발신인에는 ‘이즈미 형’이라고 적혀 있었다. 만난 뒤로 그는 한 번도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유우키는 한 번도 이름을 수정하지 않았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유우키는 메시지를 열었다. 세나의 웨딩 턱시도 사진이었다. 바뀐 건 없었으나, 가슴팍에 달려 있는 꽃이 변했다. 붉은 동백꽃에서, 푸른 장미로 바뀐 코사쥬를 보면서 유우키는 멋쩍게 웃었다. 기억하기로 푸른 장미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던 것 같았다. ‘가짜 사랑’에 무엇이라도 기대했던 건지, 속이 쓰렸다. 더 이상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우키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푸른 장미 코사쥬를 단 세나를 바라보았다.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답변을 하자, 웃는 이모티콘 하나가 답장으로 왔다.


    「어떻게 대할지 생각은 해 봤니?」


   세나가 물었다. ‘읽음’표시가 갔겠지만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세나는 대답을 기다리다가 지루해졌는지, 사진 한 장을 더 보냈다. 리시안셔스로만 이뤄진 부케였다. 여리여리한 꽃잎들이 겹겹이 둘러싸인 꽃은 의외로 소담스라웠다. 풍성하네요, 라고 대답했더니 세나는 웨딩 부케여서 그렇다면서 자신의 취향과는 좀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의 심미안에 거슬리는 구석이 있는 듯 했다.

    끊임없이 촬영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세나가 일방적으로 내뱉는 정보들을 읽으면서 유우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로에 차가 막혀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다가, 유우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문자가 도착했다. 나루카미와 인터뷰를 했다는 문자였다. 그는 예상 질문을 말해주었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켕겼다. 세나는 어색한 틈을 만들지 않으려는 듯 했다. 그는 유우키의 코사쥬를 부케와 같은 것으로 맞추었다고 했다. 파란 장미는 저에겐 어울리지만, 유우키가 달기에는 너무 화려한 것 같았다는 말이 이어져왔다.

    소년 시절이, 번져왔다. 유우키는 무어라 할 말을 고민하다가 문득 그 말을 써서 보냈다. 우리 어렸을 때 같아요, 라는 말을 보내자 세나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속이 뒤엉켜왔다. 멀미인지, 아니면 속앓이인지 모를 기묘한 기분을 끌어안고 있길 십 분정도 했을까, 세나는 메이크업 번진 곳을 수정하고 왔다면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러네」


    라는 말이 파도처럼 천천히 밀려왔다.


   「그럼 촬영할 때는, 내가 다가갈게」


     두 번째 말은 느리게 다가왔다. 유우키는 그 말이 내포하는 뜻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이에요, 라고 물었다. 한참이나 대답이 없기에 타박이 돌아올 걸 기대했다. 고등학교 때 처럼 ‘말 했는데 재깍재깍 이해 못 하는 거 완전 불쾌하니까!’ 따위의 말을 기대했지만, 세나가 돌려준 답은 유우키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학교 다닐 때처럼 내가 쫓아다닐 테니까」

    「너는 그냥, 」

   「부담스러운 척, 싫어해도 괜찮아」

   「오히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유우키는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스물일곱의 세나 이즈미는 이렇게 가끔, 말문을 막히게 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유우키는 네, 하고 대답했다. 그것이 트리거가 됐는지, 세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우키는 그에게서 문자가 오지 않는 게, 촬영이 시작됐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스물여섯 살의 유우키 마코토가 있었다. 초록색 눈은 열여덟 때와 같이 엷게 반짝였다. 웨딩촬영이기 때문에 착용한 투명렌즈가 어색했다. 외모적으로 변한 건 별로 없었다. 키가 컸고, 나이가 들었다는 것 빼고는. 지금의 자신은 여전히 세나가 좋아하는 얼굴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유우키는 거울을 내렸다. 차를 멈추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차는 여전히 막힌 도로 위에 서 있었다. 이번에도 카메라가 꺼지면 한 마디도 오가지 않을까, 유우키는 세나를 정말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이해한 적 없는 사람이었기에,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핸드폰을 쥐고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막힌 도로가 풀리고, 그가 스튜디오에 도착할 때 까지, 세나에게서 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 문을 열자 재 같은 눈이 내렸다. 이번 겨울의 첫눈이었다.

    유우키는 내리는 눈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에 닿자마자 눈 알갱이가 녹았다. 그는 그것이, 그 날의 그와 자신 같다고 생각했다. 촬영을 할수록 갉아 먹히는 듯 했다. 망망대해를 날아가는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날개가 습기에 젖고, 젖어서, 곧 가라앉게 될 게 분명했다. 세나와의 관계는 언제나 그랬다. 먼지가 쌓인 마음을 뒤적거리는 기분이었다.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유우키는 스태프에게 ‘느끼는 데로 표현해 주세요. 들어가자마자 카메라가 표정부터 잡을 거예요.’라는 안내를 받았다. 이미 세나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분명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러저러한 고민을 안은 채로, 유우키는 스튜디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나는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 있을 결혼이 기쁜 것처럼. 웨딩턱시도를 입고, 리시안셔스 부케를 들고 있었다. 색이 없는 부케는 오히려 세나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눈이 너무 부셔서 아파왔다. 유우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세나를 프레임 안에 담고 있는 카메라맨의 뒤에 서자, 세나는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저것도, 아까 이야기했던, 연기일까. 유우키는 도저히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유유 군,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봄처럼 다가왔다. 칠년 만에 처음 듣는 호칭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유우키는 제 뒷목을 머쓱하게 쓸었다. 스태프가 얼른 유우키에게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재촉했다. 세나 씨가 골라놓으셨는데, 유우키 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한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던 세나는, 유우키가 뒤를 돌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거울에 비친 세나는 마치 무대 위의 ‘암전’을 겪는 배우처럼 보였다. 유우키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부조리극을 처음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따지고 싶으나, 따질 수 없었다. 무대 위의 법칙에, 관객은 언제나, 순응해야만 한다.






***


    “좋아하던 애랑 촬영하려니 어떤 것 같아?”


    나루카미가 물었다. 세나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세나는 으으, 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잠시만요, 라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로 손을 뻗는다. 계산 된 행동이었다. 나루카미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 또한 사전에 상의 된 행동이었다. 밖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우 군’이 사진을 찍고 있어서 설레는 거니? 나루카미가 짓궂게 물었다. 세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쌜쭉하게 내밀었다.

    나루 군은 정말, 짜증날 때가 있어.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투덜거렸다. 그는 얼굴을 부채질했다. 손을 움직일 때 마다 행커치프 자리에 꽂아놓은 푸른 장미가 사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카메라를 응시하다가, 이건 비밀인데, 하고 입을 열었다. 비밀, 비밀. 비밀. 그는 그 울림이 매우 사랑스러우면서도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언제나 냉랭한 표정이 무너지며, 웃음을 만들어 냈다. 꽃이 피는 것 같은 과정이었다. 세상이 봄 같다면서 말하는 목소리를 카메라는 아름답게 잡아냈다. 세나는 자신의 이 표정 아래에, 어떤 자막이 깔릴지 상상했다. ‘잊고 있었던 소녀심이 솔솔-’ 일까, 아니면 ‘봄 같은 예비신부의 설렘’일까. 세나는 엺게 웃었다. 그는 이 방송을 체크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차하고 싶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민했다. 광고만 나왔을 뿐 방송은 아직이니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이 가짜 사랑놀이로 마침표를 찍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나 이즈미가 아는 유우키 마코토는 로맨티스트였다. 진실한 사랑을 믿는 만큼, 유우키는 이 가짜 사랑 프로그램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동화 같은 거짓말로 맞이하는 엔딩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독하게 앓았던 짝사랑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

    세나는 몇 가지 질문에 더 대답했다. 유메노사키학원에서 자신이 유우키 마코토를 따라다녔던 이야기, 구애 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집에 인화사진도 많고, 트릭스타의 유우키 굿즈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중에 자랑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자는 사실이었지만, 후자는 거짓말이었다. 스물의 그 날 이후로 세나는 유우키 쪽으로는 그림자도 돌리기 싫어했다. 그는 옥션을 뒤져야할까,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컷, 싸인이 났다. 그대로 가도 될 것 같다는 말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루카미 쪽으로 몸을 기댔다. 어깨를 머리에 기대자, 나루카미는 손을 뻗어 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마가 드러나게 만든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 나루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기뻐? 라는 목소리에 세나는 조금은 죽고 싶어, 하고 대답했다. 세나답지 않은 부정적인 말에 나루카미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농담이야. 그런 거 가지고 죽었으면, 스물에 뛰어내렸어야 했을 걸.”

    “이즈미쨩, 나는 가끔 걱정이 돼.”

    “안 해도 돼. 내 앞가림은 내가 해.”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말해봤자 변할 건 없었다. 그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나루카미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그를 화장대 앞으로 대려가 앉혔다. 그들은 세나의 옷매무새와, 머리카락, 메이크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거울을 보면서 물었다. 다음에는 무슨 컷 찍어요? 그의 말에, 옷에 달린 코사쥬를 다시 달아주던 스태프가, 커플사진이요 하고 대답해왔다. 그녀는 운명의 붉은 실 같은 느낌으로 갈 거라고 말했다.

    실 완전 엉켜있고, 우린 뒤돌아 서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좀 별로인가? 세나는 그렇게 말했다. 눈 감으실 게요, 라는 말에 눈을 감았다. 눈두덩이를 브러시가 훑고 지나가는 감촉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 날’도 겨울이었다. 유우키 씨가 밖에 눈 내린다고 하는데, 같이 맞는 씬 찍어볼까요? PD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나는 그러세요, 하고 대답했다.

    그 날에도 눈이 내렸다. 새벽을 틈타 도망쳐 나온 건 세나였기에 알고 있었다.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는 길은 더듬어 가는 길은 휑했다. 첫 눈을 밟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지금도 눈은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는 빈 도로와, 주황색으로 깜빡이던 큰 건널목을 기억했다. 세나는 한숨을 내 쉬었다. 사진 완전 예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스태프의 말에 그는 네, 하고 대답했다.

    메이크업을 마치고 나가니, 유우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언제나 봄 같았다. 세나는 저와 그는 마주닿아 있지만,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계절이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다가갈 때 마다 환상적이라는 표정을 만들어낸다. 그 표정에 유우키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번쯤은 마주 웃어주면 좋을 텐데. 고등학교 때와 같았다. 세나는 일부러 발걸음을 빨리 해 다가갔다.


    "유우 군, 사진 잘 찍었어?”

    “어차피 프리뷰 볼 거잖아요.”

    “그래도, 아 인터뷰만 아니었으면 유우 군의 멋진 모습을 잔뜩 보는 건데. 아쉬워,”

    “결혼 하면 매일 볼 텐데.”


    유우키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세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말이 지나치게 달았다. 속을 것만 같았다. 세나는 애써 착한 아이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우키는 시선을 돌렸다. 천장을 보고, 발 끝을 보다가, 세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그렇죠, 하고 대답했다. 고등학생 때를 흉내내고 있지만 둘 다 묘하게 다른 템포를 연주하고 있었다. 세나는 이게 나이를 먹어버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잘 맞는 톱니바퀴가 아니라면 어색해진다. 그 어색함을 시청자는 귀신 같이 체크한다.

    제대로 하자, 얼른 집에 가고 싶어. 유우 군이 들어올 곳인데 더 청소하고 예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세나는 발랄하게 말했다. 스태프가 다가와 그들의 새끼손가락에 붉은 끈을 묶었다. 엉망진창으로 중간이 엉켜 있었다면 좋겠다는 세나의 오더를 받았는지, 실의 중간은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오로지 ‘끝’만 알 수 있는 곳이었다.


    “뒤 돌아서 설까요?”


    세나가 물었다. 스태프는 네, 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세나는 뒤를 돌아, 세 걸음 물러섰다. 실은 너무 팽팽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결혼사진이라기에는 좀 외로워 보이는데, 라는 사진작가의 말에 세나는 그 정도 거리감이 좋다고 대답했다. 멀리 있는 거울에 비친 유우키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세나는 거울에 비친 제 표정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아, 그렇게 말하자 유우키는 시선을 사선으로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 사진 찍고 점점 붙으면 되죠.”


    마지막 컷은 이마 붙이고 찍을래요. 유우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아득해졌다. 눈을 감았다. 메이크업이 번질 것 같았다. 참자, 참자, 생각하며 심호흡을 했다. 부인, 어디 아파요? 유우키는 ‘스태프’가 지시했던 호칭대로 세나를 불렀다. 이런 식으로 연기해준다면 도리어 편하다. 세나는 뒤를 돌았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유우 군이 그렇게 불러준다니 기뻐.”

    “그, 우리 이제 곧 결혼 할 거고.”


    유우키는 능청스럽게 볼을 긁었다. 메이크업 파인다, 라고 말하며 세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유우키의 볼이 금세 붉어졌다. 그의 녹색 눈과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물 먹은 솜 같은 기분이었다. 둘의 새끼손가락에 묶어뒀던 붉은 털실이 늘어졌다. 연사 소리가 들려왔다. 촤라라라락, 무언가가 넘어가는 것 같은 소리. 이마 마주댄 거부터 찍을까요? 유우키는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오지 마, 세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더 이상 진전시켜봤자 의미 없는 관계임을 생각하다가, 그는 이것도 유우키 나름의 연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미리 좀 다가올 거라고 말해줬으면 잘 받아줬을 걸. 세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숨결이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5cm정도 차이 나는 시선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세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사랑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세나는 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에 매달려 있는 엉망으로 얽혀 있는 붉은 실뭉치가 떴다가, 가라앉았다. 촬영장 분위기를 잡는다고 틀어놓은 곡은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이었다. 세나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의 중반부를 떠올렸다. 장난꾸러기 요정이 눈가에 발라놓은 묘약 하나로 흔들릴 만큼, 사랑은 부질없다.

     모든 것은 연극일 뿐이며, 막이 내려가면 그대로 ‘안녕’할 사이다. 세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밝게 웃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의 웃는 모습을 보는 유우키 또한 따라 웃었다. 서로 고개를 숙이고, 포개듯이 있었다. 손끝에 달린 실의 무게는 중력보다 무거운 듯 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들을 프레임 안에 담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가슴에 응어리가 생긴 듯 했다 치받쳐 올랐다. 억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색할 수 없었다.

    한 겨울밤의 꿈과 같은 상황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너무나도 잔인하다. 유우키가 먼저 손을 뻗어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엮어 잡았다. 긴장한 듯, 손가락 끝이 찬 게 느껴졌다. 세나는 손가락 마디에 힘을 주었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라고 외치는 사진작가의 목소리가 물번짐처럼 번졌다. 좋아해요, 라고 유우키가 말했다. 소년 같은 목소리가 풋풋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는 카메라를 의식한 말일 게 분명했다. 세나는 달콤한 거짓말에 설레는 제가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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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년, 어른










1.

소년, 어른



***


    세나 이즈미의 일상은 매우 무미건조하다.

    기상 시간은 스케쥴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대부분 아침 여섯시를 웃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밤사이에 온 ‘일’관련 메일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는 스마트폰의 발달을 매우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루의 일정을 확인하면 아침 조깅을 간다. 러닝 후에는 꼼꼼히 스트레칭을 하며, 아침은 사과 한 알이나 아보카도 반개와 물로 때운다. 이는 오랜 습관이었다.

    혼자만의 아침, 혼자만의 생활. 그의 집안에는 남의 소리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여백이 없다는 쪽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조용한 방에서 사과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침식사를 마치면, 샤워를 하고 얼굴을 정돈한다. 아침 스케줄이 있는 경우는 기상 시간을 3시간 앞당기고, 저녁에만 스케줄이 있을 때는 남는 시간동안 가사를 쓴다. 재미없는 일상은 쳇바퀴처럼 굴러가곤 한다.

    취미가 없는 삶은 잘 마른 자작나무 가지처럼 앙상하다. 밟으면 파스슥 거리는 소리가 나는 낙엽마냥 쓸쓸하다. 하지만 세나는 별 다른 취미나, 흥미가 없었다. 멤버들의 개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나이츠’로 뭉치는 일도 별로 없었다. 화보 촬영이나 런웨이, 예능 프로그램 등, 세나 이즈미에게 들어오는 일은 끊이지 않았지만, 그의 인생은 어딘가 공허함을 안고 움직이고 있었다.

    여백, 그리고 여백이었다. 세나는 아침 즈음에 받는 일을 좋아했다. 새벽부터 나가서 메이크업을 하고, 대중이 알고 있는 세나 이즈미로 활동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하지만 저녁에 나가야 할 때가 문제였다. 그 공허함 속에서 그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학생 때는 시간이 빨리 갔었던 건 왜였을까. 가끔씩 스물일곱 살의 세나 이즈미는 턱을 괴고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너무 멀리 지나쳐오거나, 멀리 밀려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삼 년 전 까지는 그래도 미련이라도 붙잡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휘발되어 사라졌다. 남에게 말하기도 마땅찮은 고민이었다.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외롭다’는 건 친구와도 같은 일이라 딱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남에게 걱정을 시키는 것도 제 타입이 아니었다. 세나는 자신이 점점, 소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아저씨가 되어 감을 느꼈다. 일상에 새로움이란 게 없었다.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지쳐 잠이 들고, 일찍 들어오는 날에는 별다른 일이 없기에 잠이 든다. 책을 읽는 것도 질렸다. 간간히 츠키나가가 보내오는 곡에 가사를 붙이는 것 외에는 여가를 보낼 것도 없었다. 촬영시간이 긴 예능 출연을 반기게 되었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힘들었다. 마음을 터 놓은 친구는 대부분 연예계 사람이었다.


    여러 가지가 변했다. 활발하던 ‘소년’의 일상이 점점 무뎌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다. 스물일곱의 세나 이즈미는 이를 뼈져리게 느끼고 잇었다. 그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는 새하얀 대리석 식탁을 닦았다. 사용하질 않아 먼지가 쌓여있었다. 그의 집은 공허했고, 외로웠음으로 먼지를 먹은 자국이 많았다. 세나는 제 집을 덜컥 촬영장소로 내놓은 이유를 떠올렸다.

   뭐라도, 사람 소리가 들렸으면 했다. 가장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면서, 추억하고 웃을 수 있는 기억을 만들고 싶었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2주만 참으면 되는 변덕. 그는 열네밤동안 제가 끌어안고 갈 수 있는 좋은 기억들이 찾아오길 바랐다. 식탁의 먼지를 다 닦고 나서, 그는 소파 쪽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째깍거리는 시계침 소리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처음 이사를 할 때에는 시계침 소리가 무음이었다. 그는 옛 생각을 하다가 푸스스 한숨을 쉬었다. 가짜 사랑이라도 칠해야할 때가 왔다. 언제까지 과거의 편린을 잡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붙잡고 있었던 ‘과거’도 이미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지 오래였다. 세나 이즈미는 어른이었기에, 어린아이처럼 있을 수 없었다.

 

   사랑하던 계절은 이미 져버린 지 오래였다. 세나는 거실 화병에 장식해둔 드라이플라워를 바라보았다. 안개꽃 같은 옛 사랑이 넘실넘실 번져왔다. 그는 괜히 발가락을 꼬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상 결혼 예능을 찍는다고 해서 일상에 버라이어티한 변화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이 여백이 괜찮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발목에는 공허가 걸려 그림자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짙은 일상이었다.





***


    카메라에 붉은 불이 들어온다. 세나는 정면에 있는 렌즈를 바라보았다. 겨울 자작나무처럼 무미건조하게, 응시하다가 꽃이 개화하듯 웃는다. 그의 사선에 앉아 있는 나루카미는 마지막으로 큐시트를 체크하고 있었다. 세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분 다 준비 되면 갈게요, 라는 감독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피곤에 절은 탓이었다. 벽면에 걸려있는 큰 시계는 새벽 세 시를 알리고 있었다,

    세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천천히 호흡했다. 피곤과 긴장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그래도 촬영만 끝나면 집에 갈 수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다만 문제인 것은 그 집도 ‘촬영 장소’란 것이겠지만. 세나는 왜 제가 제 집을 촬영장소로 제공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란 언제나 쓸모없는 결정을 하는 존재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시, ‘세나 이즈미’가 깨지려 하고 있었다.

    완벽한 몰입을 위해, 세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상상을 했다. 암막커튼의 뒤로 그는 나아간다. 그 ‘닫힌 공간’에는 어둠뿐이다. 그는 작은 야광 도료를 따라 이동한다. 천천히, 천천히. 다치지 않게, 무대 속으로 충분히 녹아들 수 있도록. 세나는 자신이 그동안 써 왔던 여러 가면들을 떠올렸다. 대중이 원하는 가면은 ‘쿨하지만 사실은 여리고 상냥한’ 세나 이즈미‘였다. 그는 그것을 덮어 쓰는 상상을 하며 눈을 떴다. 카메라 렌즈와, 밝게 켜진 조명이 시야를 밝혔다. 그는 방긋방긋 웃었다.


   “세나 씨, 준비 되셨어요?”

   “문제없어요. 세나 이즈미니까.”


    그의 대답을 들은 PD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나의 표정을 잡고 있었다. 이 장면이 어디에 가위질되어 들어갈지, 세나는 아직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다만 자신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계의 분침이 움직일수록, 세나는 제 배역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대중이 원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숙지했다. 이번에 출연하기로 한 리얼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도 세나는 ‘언제나와 같은 배역’을 연기한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갑시다.”

    “나루카미 씨 스텐바이?”

    “네 준비 됐어요.”

    “세나 씨는?”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나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방송을 하면서 늘은 건 긴장을 감추는 솜씨뿐이었다.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그는 프로그램의 ‘설정’을 반추했다. 외국에서 포맷을 수입해 온 이 프로그램은, 연예계의 두 명이 가상 결혼을 하여 그 결혼 생활을 보여준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외국 프로그램과 좀 다른 것이 있다면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파트너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성별’에 의해 정해지는 사랑 보다는 ‘관계성’에 의해 적립된 사랑을 보여주고 싶다는 방송국의 오더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실험적’인 예능이었다. 평소의 세나 이즈미라면 수락하지 않을 프로그램이었다. 모두들 가라앉는 걸 무서워한다. 이런 실험적인 방송에 섣불리 출연하는 건 불안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쌓아둔 기반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상대라면 괜찮겠지만, 혹시라도 제 상대가 남자라면 곤란해진다. 관계성에 집중한다면 아는 사람이 나오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던 인기가 높아지기보다는 하락 할 확률이 더 높았다.

    스물일곱은 얻을 것 보다 잃을 게 많은 나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있던 곳이라, 그 무게감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세나는 한숨을 내 쉬었다. 마음을 정리하려고 해도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안주하기에도 모자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예측 불가능’한 도박에 발걸음을 옮기는 건,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세나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싶다는 담당PD의 말 때문이었다. 세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주는 것에는 익숙하나, 그것이 되돌아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이야기 하는 풋내기 PD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절절하지 않았다면 수락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여태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은 모래와 같아서, 언제 흩어지고 망가질지 모른다. 세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불안감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이 프로그램은 여태까지 연기한 모든 것들과 다를 게 없다. 실험적인 프로그램이라 성공하기만 한다면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연예계에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아이돌’이 살아남는 길이란, 어떻게든 대중의 눈에 드는 것뿐이다. 결벽하고 순수한 구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쿨한 미인. 세나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제 가면을 다시 한 번 체크하고 눈을 떴다.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세나는 두 손을 깍지 껴 스트레칭을 했다. 쌓인 피로가 우드득 소리를 냈다. 이즈미쨩, 피곤하니? 나루카미가 물었다.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쌩쌩해보였다. 세나는 턱을 괴고 잠시 고민했다. 분명 오늘 계속 같은 스케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루카미는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한 살 차이란 게 이렇게 큰 걸까? 세나의 질문에 나루카미는 어머, 하고 말을 늘였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예쁘기만 했다.

   나루카미는 발을 뻗어 세나의 구두를 툭툭 건드렸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장난인 듯 했다. 세나는 하품을 했다. 눈이 뻑뻑해졌지만 눈화장 때문에 눈을 비빌 수도 없었다. 세나는 반신욕을 하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나루카미는 나도,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래도 이거 찍으면 집에 가잖니? 나루카미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지 일부러 발랄하게 말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갑니다, 큐, 라는 사인이 들어왔다. 은은한 조명이 들어왔다. 카메라 여러 대가 그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고 있었다. 나루카미는 메인 카메라를 보면서 웃었다. 안녕, ‘우리 결혼했어요’의 메인 MC, 여러분들의 언니 나루카미 아라시에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상냥하고 나긋나긋했다. 세나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초조한 듯 괜히 옆에 놓인 물을 마셨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뱃속에서 비명이 터졌다.


    “이번에도 결혼을 앞둔 예비커플 중 한분을 모셨는데요, 저와 같은 그룹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이에요.”


   나루카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작'이었다. 세나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호기심을 가진 고양이 같은 푸른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언제나 ‘처음’이 어렵다. 하지만 곧 괜찮아질 것이다. 프로그램은 ‘관계성’에 집중한다고 했으니 조금만 버티면 아는 사람이 올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면 곧장 바이크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미 정리 해둔 집을 다시 정리해놓고, 셀프카메라를 들고 들어 올 ‘그이’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생각 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걱정이란 반복적으로 ‘나이츠’의 쿨한 기사님, 세나 이즈미 씨입니다. 라는 나루카미에 목소리에 맞추어, 세나는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그는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이츠의 세나 이즈미입니다, 라는 말은 여즉 닳아버리지 않았다. 그는 나루카미와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요즘 잘 지내죠? 같은 유닛인데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라요? 대본이라 그래요 이즈미쨩, 나루 군은 정말이지, 알고 있는 건 나루 군이 대신 대답해줘도 괜찮잖아요. 어멋, 그럼 재미가 없잖아. 둘의 이야기는 흐름을 타고 이어졌다. 느긋한 익숙함이 다행이었다.


    “그럼 세나 씨, 왜 여기 나왔어요?”

    “그러게요.”

   “그러지 말구, 갑작스럽게, 「결혼」을 결심 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결혼, 인가요?”

  “결혼이죠.”


   인터뷰가 끝나는 순간부터 결혼준비에 들어가는 신부랄까. 내가 신부에요? 아니, 큐시트에 그렇게 적혀있는데, 와 완전 짜증나 내 상대가 남자란 거잖아, 왜? 사랑에 빠진 남자아이는 사랑스럽다구!. 그들은 빠른 템포로 이야기하며 웃었다. 카메라에 예쁘게 찍혀야 하는데, 생각하면서 세나는 입을 가렸다.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 해 볼까? 나루카미가 말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대충 숙지하고 있었지만, 카메라에 찍히면서 대답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관계성이 있는 x’를 데려온다는 설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케케묵은 추억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것을 굳이 꺼내 들춰보고 싶진 않았다. 이미 끝난 일들에 대한 상념이 그의 우주를 공전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세나는 괜히 물로 목을 축였다. 생기 있게 보이기 위해 발랐던 엷은 분홍 립스틱이 잔 주변에 묻었다.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렌즈를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오히려 무심해서, 바라보는 게 편한 편이었다. 그는 스틸 컷을 찍기 위해 터지는 플래시를 응시했다. 새삼스럽게 옛날 기억이 번져왔다. 그 애를 처음 봤던 날이 안개처럼 스몄다. 나루카미는 어서 대답하라는 듯 응? 왜 결혼하려고 했어요- 라며 재촉해 오기 시작했다.


    “그냥, 외로워서요.”

    “외로워? 세나 이즈미가?”


    본심을 말해버렸다. 놀란 듯한 나루카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나는 이걸 어떻게 포장해야 할까 고민했다. 외로운 건 사실이지만, 덜 추하지 않게. 아름답게. 스물일곱까지 연예계에서 배우는 건 무언가를 ‘그럴싸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럴 땐 도리어 솔직해지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그는 말해도 될지, 되지 않을지 망설이는 듯, 카메라 렌즈를 보다가 제 발끝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깨가 조금은 과장스럽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인생에는 가짜 설렘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가짜 설렘? 이즈미쨩은 현실주의자잖아.”

   “너무 현실만 추구하면서 살다 보니까 너무 퍽퍽해졌어.”


    마법이나, 설렘이 하나도 없으니까 삐걱삐걱하고 퍽퍽한 느낌이야. 최근엔 나이츠도 각자 개인 활동으로 바빠서 악수회 같은 것도 없고, 팬들을 만날 장소도 없으니까 더 덜 설렐 수밖에. 이러다가 물기 없는 반죽처럼 날아가겠지? 그래서 나랑 연관이 있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좀 더, 설레 볼까 했어. 마른 땅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결국 갈라져서 망가지잖아.

    세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풍은 어느 순간이 됐든 잘 먹히는 법이었다. 뭐, 이런 건 절대 배우자한테 안 말해줄 거지만.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성격 안 좋은 건 여전하잖니, 라고 말하며 나루카미가 발랄하게 웃었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나누었다. 이상형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세나는 언제나 그 애의 흔적을 말하곤 했다. 딱히 미련은 남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말해왔음으로 ‘관습’ 같은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촬영장엔 누가 있을 것 같아요?”


    나루카미가 물었다. 시계는 세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나는 음, 하고 망설였다. 연예계에서 나랑 관계있을 만한 사람이 없는데, 하고 말하자 나루카미는 ‘츠키나가 레오’가 있다면 어떨 것 같으냐 물었다. 세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뜻이었다. 그 애의 그림자가 물처럼 번졌다가 안개처럼 흐려졌다. 오랜 습관은 간혹 이렇게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다. 세나는 정면을 보고 시청자에게 인사했다. 누가 배우자가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쁜 사랑 해보고 싶어요.

   활짝 웃는 세나의 컷을 끝으로 카메라의 붉은 불이 꺼졌다. 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집 치우러 가겠습니다, 라는 인사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촬영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공간을 살피다가 나루카미에게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건넸다. 나루카미는 손을 뻗어, 세나의 앞머리를 정리 해주었다.


   “이즈미쨩의 상대역이 오늘 콘서트가 있어서, 이렇게 촬영이 밀린 거래.”

   “프로라면 일처리를 제대로 해야지 그게 뭐야.”

   “이게 파일럿 프로라서 일정이 급하게 잡혔잖니. 상대가 바뀌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걸.”

   “완전 짜증나.”

   “오늘 집으로 가는 셀프캠만 찍으면 끝이니까. ‘배우자’ 대접 해 줄 거 없이 쫓아내 버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나 잘 아는 사람이면 내가 쫓아낼 거란 것도 잘 알고 있어야겠지. 난, 세나 이즈미라구?”


    세나의 자신만만한 어조에 나루카미는 경쾌하게 웃었다. 나루 군은 내 ‘배우자’ 누군 지 알아? 세나가 물었다. 나루카미는 이따 집에서 확인하라면서 웃었다. 세나는 집 청소를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았던 어제를 길게 늘어놓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는 손을 흔들었다. 바이바이, 라는 인사를 끝으로 세나는 뒤를 돌았다. 나루카미는 그의 지친 것 같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루카미는 큐시트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세나가 가장 만나기 싫을 것 같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프로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힘들 것 같기도 했다. 나루카미는 세나가 얕게 얼은 호수 위를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매일은 무미건조하고 버석버석했다. 불을 붙이면 활활 타오를 것 같이 바짝 말라 있었다. 나루카미는 이 작은 사건이 세나의 일상에 잠시간의 소나기가 됐음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기지개를 폈다. 세나가 사라진 지 이십 분 쯤 지나 다음 인터뷰어가 들어왔다. 세나의 상대였다. 나루카미는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라고 말하는 안부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여전한 얼굴이었다. 키는 예전보다 컸지만 행동이나, 상냥함이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왜 여기 나오려고 했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은 상황 속, 나루카미는 말을 걸었다. 그는 음, 하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상이 버석버석해서 견딜 수 없었달까…”


    가짜 사랑이라도 필요할 것 같아서. 너무 지루하고, 좀 뭔가 사랑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밝게 웃었다. 나루카미는 애매한 미소를 흘렸다. 둘 사이에 약간의 공백이 그늘처럼 자리했다. 자신이 불러온 어색함에, 나루카미는 잠시 입술을 입 안으로 숨겼다가, 콘서트 끝내고 온 거 치고는 쌩쌩한걸! 하고 말을 이었다.





***


    유우키 마코토의 일상은 무미건조하다.

    기상시간은 스케줄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그는 대부분 오전 10시 경에 일어난다. 트릭스타의 활동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는 콘서트 이외에는 별다른 공식 스케줄이 없었다. 열심히 달려왔으니, 쉬자는 의미였다. 멤버들의 개인 활동이 없다는 것도 이유였다. 졸업 이후 약 6년 동안 별다른 개인 활동이 없다는 건 앞으로 연예계에서 활동할 때 제약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트릭스타보다는 개인 활동에 열중한다는 기사를 냈지만, 유우키 마코토는 무얼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사진기에 대한 트라우마는 해결 됐지만 모델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화보를 찍느라 카메라를 노려보는 행위 자체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은 그토록 강렬했음에도 드문드문 지워진 채 였다. 물번짐 같은 기억이었다. 유우키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턱을 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스안개에 싸인 채로 스쳐 지나갔다. 이는 모두 ‘그 날’ 이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긴장 돼?”

   “딱히?”

   “‘결혼’이잖아. 좀 더 긴장하라구.”


    아케호시는 웃으면서 유우키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앞에서 졸음을 담은 이사라의 목소리가 혼수를 사러갈 때 꼭 자신을 불러야 한다고 말을 걸어왔다. 유우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웨딩 촬영 때 턱시도를 고를 때는 자신을 부르라면서 아케호시가 웃어보였다. 차 안에 설치한 간이 조명에도 반짝반짝한 미소였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셀프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금발을 천천히 정리했다. 히다카 쪽이 조용한 것이, 벌써 잠에 든 모양이었다.

    ‘새벽’이었고, 조금 있으면 ‘동이 틀’ 시간이었다. 나루카미와의 인터뷰는 4시 반이 다 되어야 끝났다. 자꾸 저가 말을 버벅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형을 말하는 부분에서 ‘그 사람’을 말할 뻔 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연애담을 묻는 질문에서 ‘그 때’를 말할 번했다. 여러모로 실례인 일이었다. 지금은 연락을 하지도 않는 사람을 팔아먹을 뻔 했다는 죄책감이 컸다. 자신의 파트너는 한 번에 끝냈다던 인터뷰를 유우키는 몇 번을 재촬영했다.

    유우키는 ‘배우자’의 집을 찾아가는 촬영이 끝난 다음에 무릎부터 꿇어야할까, 하고 물었다. 아케호시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사라는 사람에 따라선 싫어할 수도 있을 거라고 조언했다. 졸린 목소리들이 새벽을 달리는 차 안에서 이리저리 오갔다. 이게 다 촬영 스케줄이 콘서트 마지막 날이랑 겹쳐서 그렇다면서 울상을 짓는 유우키의 처진 어깨를 아케호시가 두드렸다. 기운 내야지, 라면서 다가오는 목소리는 햇살처럼 따듯하기만 했다.

    2주 동안 촬영을 해서 8주 동안 방영하는 프로그램의 이름은 「The midwinter night's Dream」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한여름 밤의 꿈」에서 제목을 빌려온 이 프로그램은, 인연이 있는 연예인들 끼리 가상 결혼을 시킨다는 프로젝트였다. 성별을 초월한 사랑, 얽힌 인연 속에서 이뤄지는 애정을 연출하겠다는 PD의 욕심이 대단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유우키는 다 ‘거짓’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중매를 설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정도 친하고, 어느정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 끼리 모여서 연애하는 척 연기를 하는 것 뿐이다. 정말로 사귀는 건 아니고 ‘계약’ ‘동거 촬영’ 정도의 의미 뿐이었다. 물거품이 되어서 사라질 사랑 같은 건 유우키 마코토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원했다. 이런 프로그램에서는 절대로 무리일 것 같은, 견고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우키가 이 제안을 수락했던 것은,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일상은 버석거린다. 트릭스타는 스케줄상의 편의를 위해 동거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외로움은 물처럼 번져온다. 연애를 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가슴 한켠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이 허했다. 이는 그의 세상에 ‘사랑’이 모두 말라버렸기 때문이었다. 유우키는 마지막으로 설렜던 기억이 언제인지 셈하다 그만 두었다. 나루카미의 인터뷰에서 ‘그 날’과 ‘그 사람’을 말할 뻔 했던 것도 분명 마지막 사랑이 그만큼 오래 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말을 걸었다.


    “지금은, 새벽 네시 반을 넘겼는데, 지금 배우자한테 가고 있어요.”

   “웃키 완전 기대한 것 같죠?”


    아케호시가 바람을 잡으며 밝게 웃었다. 유우키 씨는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인터뷰어 같은 이사라의 질문이 넘어왔다. 다들 유우키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하고 있었다. 유우키는 서로의 외로움을 없애 주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웃었다. 웃키, 로맨틱 한 구석이 있지? 시간이 저녁이었으면 꽃다발 부터 사서 갔을 거라구. 그래 나쁜 건 시간이야. 나루카미와 하던 것보다 편한 질문이 오갔다. 외로움의 편린도 보이지 않는 재잘거림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배우자’가 산다는 맨션의 앞에 도착했다. 유우키는 심호흡을 했다. 이중현관 형식의 좋은 집이었다. 그는 미리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현관 비밀번호는 0340, 집 비밀번호는 0430이었다. 연예인 집 치고는 소박한 비밀번호에, 유우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런 식으로 털털하게 사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는 문을 열었을 때 안즈가 있으면 놀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때의 꿈은 이제 잊어야 마땅했다. 어른이었다. 어른이었고, 어른이었다. 10대에서 벌써 여섯 살이나 밖으로 밀려왔다.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는 자신과 인연이 있다는 ‘배우자’가 부디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다. 닥쳐올 머지않은 미래가 불안하기만 했다. 유우키는 긴장을 덜기 위해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언어를 담길 망설이던 그의 혓바닥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재잘거렸다. 완전, 떨려서 카메라 렌즈도 못 보겠다고 말하면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유우키 마코토는 떨리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잠도 못 자고 기다려 주실 배우자님께 정말 죄송한 느낌이에요, 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유난이 컸다. 모든 소리가 제거된 ‘새벽’이기 때문이었다. 부디 제 외로움을 덜어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유우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유우키 마코토는 현관 앞에 섰다.


    “시간이 늦어서 벨보다는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오라는 연락이 있었어요.”


    유우키는 카메라로 제 얼굴을 찍다가, 바닥으로 렌즈를 내리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우연하게도 제 생일이었다. 센스 있는 사람이거나, 잘 맞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현관에는 슬리퍼 한 켤레와, 로퍼 한 켤레가 있었다.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현관을 지나, 유우키는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두근거림이 점점 증폭하고 있었다. 설렘이 봄처럼 번져왔다.


    “어서 와요.”


    낮은 미성이 들렸다. 안즈는 아니었다. 유우키는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천천히 카메라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뷰파인더에 낯설면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시선이 떨렸다. 곱슬기가 있는 회색 머리카락, 호수 같은 깊은 푸른 눈동자. 유우키는 자신의 시각을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죠? 하고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는 안녕하세요, 하고 다시 인사했다. 카메라에 켜져 있는 붉은 불빛이, 그들이 무대 위에 설 수 있게 지탱하고 있는 마지막 장치였다.


    “유우 군?”


    먼저 그 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유우키는 지금 제 표정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나의 표정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이즈미 씨, 맞나요? 라는 바보 같은 질문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함이 가득 담겨 있는 그 표정을 보면서 유우키는 무어라 할 지 알 수 없었다. 사운드 비어, 라고 세나가 작게 충고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망부석이라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운드가 빈다고 해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나의 등 뒤로 보이는 베란다 창문에서는 먼 곳의 가로등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유우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유우키의 가상 결혼 ‘배우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 마실래? 세나가 어색하게 물었고,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지 낀 채로 멈춰있었던 시계가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었다.

    꼭, 칠 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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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dwinter night's dream






마코이즈 '한겨울 밤의 꿈'이 올라오는 곳입니다. 

비정기 연재입니다 :) 총 10편...일 예정입니다.


마코토와 이즈미가 '우ㄹi 결혼했ㅇㅓ요'라는 프로그램에 나온다는 설정입니다.

마코토 스물 여섯, 이즈미 스물 일곱의 어느 겨울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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