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의 우주 | 2016. 2. 20. 14:45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와,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등에서 빌려온 대사가 있습니다.
*24님 사랑해욤
우주의 어느 일요일
나와 상관없이 잘도 돌아가는 너라는 행성
그 머나먼 불빛
―최정례,「우주의 어느 일요일」
***
텐쇼인 에이치가 보는 히비키 와타루는 ‘무대’ 그 자체였다. 어떤 비현실이라도 현실이 될 수 있으며, 관객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공간. 어떤 희곡이라도 공연할 수 있으며, 커튼이 닫히고 난 다음에는 놀랍도록 고요하다. 무엇이라도 설치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연출’ 해 낼 수 있다. 그 역동적인 작은 우주를 히비키는 제 안에 담고 있었다. 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퍽 재미있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활발하고 기행을 일삼았다. 그것은 히비키에게 있어 연극을 하는 것과 같다. 매일 같이 놀라움을 추구하는 것은 관객이 질리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유추하건대, 최소 셰익스피어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그의 나이는 최소 451살. ‘후원’했었다는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하는 것으로 보아 반세기 정도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히비키에게 있어 ‘하루’라는 단위는 작고 사소하기만 하다. 매일 약간씩 변주를 하고, 놀라움을 추구하는 것은 짧은 인간을 위한 나름의 배려일 것이라 생각했다.
요즘 그 기인이 빠져있는 극은 셰익스피어였다. 그는 요 일주일간, 에이치와 나누는 대화 첫머리를 ‘셰익스피어’로 시작하고는 했다. 일주일 전에는 「베니스의 상인」이었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기분이 울적한지 모르겠네요, 우울증 때문에 아주 지쳐버렸답니다. 저 때문에 그대들도 지쳤다지만, 내가 왜 이러는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우울해 지는지, 도대체 어디서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지독한 울증을 얻게 됐는지, 저도 잘 모르겠군요!’ 라면서 히비키는 그늘진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다음에는 활짝 웃으면서 장난이랍니다! 황제폐하, 요즘 수척 해 보이시기에 그대의 일상에 조그마한 바리에이션을 드리고 싶었을 뿐이지요, 라고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일주일 전의 에이치가 어떤 연극의 대사인거니? 라고 상냥하게 물었을 때 그 기인은 맞추는 것 또한 즐거움이고, 미스테리 또한 사랑이니 잠시 뒤로 남겨두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자신의 장난이나, 자신의 행동,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쉬이 알려주는 법이 없었다.
텐쇼인 에이치가 히비키 와타루에 대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단편적이다. 그의 행동이나 사소한 말투를 보고 알아차리거나, 추측하고, 유추했기 때문이다. 알려주지 않으니 추론할 수 밖에 없었다. 히비키의 행동에는 명백한 ‘옛날’이 묻어 있곤 했다. 셰익스피어를 후원했다고 말한다던가, 파우스트를 타락시키지 못한 게 세상에서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러한 편린이었다. 또한 일상에서도 작은 조각들이 묻어나오곤 했다.
피네의 외부 공연을 위해 다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할 때의 일이었다. 히비키는 지독한 멀미에 시달렸다. 히메미야를 놀리지도 않았고, 후시미가 건네는 약 또한 거절했다. 다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었다. 그는 작게 탄식했다. 이 또한 지극히 셰익스피어의 독백과도 같은 어조였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좋은 배우’였다. 그는 에이치와 눈을 마주치더니, 온 세상의 모든 비극을 떠안은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아, 인간의 문물이란 언제나 지독하군요. 증기기관이 나왔을 때도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밑바닥에는 그 밑바닥이 있으며, 추락은 언제나 더 큰 추락을 불러오는군요.”
“후후, 와타루는 재미있네.”
“저의 괴로움이 당신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아아, 자유롭게 말을 달리던 때가 그립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지나치면, 언제나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기 마련이지요.”
“셰익스피어는 말을 잘 탔니?”
“오, 그의 말 타는 솜씨는 제가 보기에 매우 끔찍했답니다. 그가 악마와 계약했던 조건은, 아마도 말을 잘 타게 해주세요― 였을 거예요. 어느 시점부터 좋아졌지만 그 전에는 장어 푸딩 같은 실력이었죠!”
다음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히비키 와타루는 명백한 ‘비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에이치의 옆자리에 앉은 히메미야는 그에게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는 게 짜증난다고 말했고, 후시미는 제 도련님의 입단속을 했다. 그 날 무대 위에서 히비키는 더욱 더 제 소리를 울리고 퍼트렸다. 에이치에게 자신의 일을 말해줬단 게 분한 건지, 아니면 인간의 문명에게 어지러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배알이 꼴리는 것인지 에이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히비키 와타루의 우주는 텐쇼인 에이치와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사이에 이뤄진 계약은 굳건했지만, 이런 식의 계약자를 몇이나 보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에이치는 그를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사랑은 ‘아는 데서’ 시작한다. 그 기인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순간을 살아왔지만, 그런 진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에이치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오늘 히비키를 보지 못한 게 이상했다. 수업을 밥 먹듯이 안 나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연습에는 꼬박꼬박 얼굴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텐쇼인이 참석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은 건 이례적이었다.
에이치는 턱을 괴었다. 달밤이 깊었다. 날이 찼다. 그는 어깨에 걸친 담요를 더욱 더 깊게 둘렀다. 가슴께에서 매듭을 지어 놓은 담요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지만 창문을 닫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밤 아래에 핀 꽃잎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오늘은 ‘찾아오는 날’이었다. 에이치는 탁자에서 발을 까딱였다. 여즉 잠에 들지 않는 제 이유는 밤이 더 깊어야 올 모양이었다. 광대 주제에 황제를 기다리게 하는 게 매우 건방졌다.
그는 몇 분을 더 보냈다. 공백 같은 어둠이 짙었다. 캔들 하나만을 켜 놓은 방 안은 컴컴했다. 에이치는 그 미약한 빛을 보며, 중세의 극장에서는 조명 대신 초를 켜놓을 수밖에 없었다던 말을 떠올렸다. 이런 작은 불빛을 수백 개 수천 개를 밝힌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는 배우는 어떤 기분일까. 에이치는 푸스스 웃었다. 어쩐지 ‘지금’의 히비키가 그런 고즈넉한 무대에서 독백을 읊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외쳤던 햄릿이나, 항상 눈이 가려져 있는 사랑은 눈이 멀어도 제 갈 길을 찾아간다던 로미오가 번졌다.
히비키가 없는 일요일은 느긋하기만 했다. 변주가 없는 주제부만을 계속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캐논변주곡의 첼로가 된 기분이었다. 다채롭게 변화하는 음률을 연주하는 다른 악기와는 달리, 오로지 여덟 음을 연주한다던 첼로처럼 단조로웠다. 에이치는 그 여덟 음을 입에 담아 흥얼거렸다. 멀리서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테라스에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마지막으로 또각. 여덟 걸음을 옮긴 에이치의 악마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의 볼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안녕한가요 에이치?”
에이치가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히비키는 정중하게 속삭였다. 나의 주인님. 안녕하세요. 무엇이든 분부하시죠. 이렇게 와서 대령하고 있으니까요. 하늘을 나르고, 물속을 헤엄치고, 불 속에 뛰어들고, 뭉게구름을 타고…… 뭐든지 주인님 명령이라면 이 에어리얼은 있는 힘을 다하여 복종하겠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서, 에이치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맞은편에 앉았다. 히비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호흡을 타고 미약한 알코올 향이 번졌다.
이번에도 셰익스피어였다. 하지만, 여즉 말했던 대로 ‘첫머리’가 아니었다. ‘에어리얼’이라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건 『템페스트』였다. 하지만 그 극의 첫 대사는 ‘갑판장!’을 외치는 선장의 목소리였다. 오늘은 첫머리가 아니네, 라고 말하자 히비키는 살랑살랑 웃었다. 가끔, 술에, 취하면- 악마라도, 이성을- 잃을- 때- 가- 있답니다. 그는 노래하듯 말했다. 『한여름 밤의 꿈』의 ‘퍽’을 공연할 하고 있는 것처럼 발랄했다.
취했구나, 라고 말하면서 잔잔하게 웃자 히비키는 인정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도 술에 취하니, 라고 묻는 에이치에게, 그는 악마와 함께 술을 마실 존재는 악마뿐이라면서 실실 웃었다. 신이 자신을 찬미하라며 내려준 포도주를 악마는 정말이지 악마적으로 소비할 줄 안다면서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진중했다. 와타루는 그가 무대에서 내려 올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걸 눈치 챘다. 몇 번쯤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학교에 안 나온 것도, 이 일 때문이니?”
“그럼요 에이치. 인간의 ‘하루’는 악마적으로는 너무 가벼운 시간들이죠. 『템페스트』의 「에어리얼」이 부리는 마법보다도 깃털 같답니다.”
히비키는 밝게 웃었다. 웃음의 뒷면에 자리한 그림지가 짙었다. 그가 한 마디를 할 때 마다 달콤한 장미향과, 알코올 향이 났다. 그는 손을 뻗었다. 황제폐하의 손을 잡는 영광을 주시기를- 이라며 잔망스럽게 웃던 그는 에이치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닿은 곳이 화끈거릴 만큼 뜨거웠다. 히비키는 아, 인간은 이렇게 뜨겁지 않죠, 라고 말하다가 이내 말을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암전이었다. ‘커튼이 닫힌’ 무대 뒤는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며 섬세하다. 고요를 친구로 삼은 양, 그는 잔잔하게 멈추어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평소 히비키 와타루가 쓰고 있던 가면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에이치는 또한 추론한다. 이것은 악마 ‘히비키 와타루’의 진짜 모습의 편린인가. 하지만 그 질문은 할 수 없었다. 물어볼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인간은 언제나 악마의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그는 막이 내린 무대에 올라 있는 이 배우가, 자신을 찾아오면서 무엇을 원했는지를 잔잔하게 생각했다.
약속해서 온 걸까, 와타루는? 에이치가 물었다. 와타루는 고개를 저었다. 캔들이 밝히면서 내는 오렌지 빛 불빛과, 창 밖에서 뻗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과 달빛을 받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은은한 색을 담아 물결쳤다. 얼어붙은 호수마냥 고요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관찰자는 알 수 없다. 관객이 막이 닫힌 무대의 사정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보여주기 싫어하는 면을 굳이 캐내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었다. 에이치는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턱을 괴었다.
“오늘은, 「로미오와 줄리엣」, 으로 말을 걸까 했어요.”
“「로미오와 줄리엣?」”
“‘여보게 그레고리- 나는 더 이상 못 참겠어.’ 라는 샘슨의 대사지요.”
하지만 나는 에이치에게 못 참겠는 게 없어서, 그렇게 말할 순 없었어요. 연극이 아무리 거짓이고 환상이래도, 어느 정도의 진심은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템페스트』를 떠올렸는데- 히비키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양쪽 검지는 좌우로 까딱이며 움직이다가, 서로 마주보고 엉킨 실뭉치를 표현해냈다. 하지만 약속은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악마는 절대로 잊지 않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잔잔하게 웃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를 들을 때 마다, 그 냉랭한 아름다움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와타루는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는 닫힌 커튼에 대고 입을 열었다. 와타루는 나를 좋아하니? 라고 묻자 은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에이치는 질문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니, 라는 질문 뒤에 따라올 것이 어떠한 모습인지 알 수 없기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무대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열게 된다. 그는 일정한 선을 마주하며, 히비키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순간은 두 사람의 우주에 마침표처럼 자리했다. 키스를 받은 악마는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 닿아 있지만 너무나도 멀었다. 공전하고 있는 사이가 아니라, 인접한 행성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는 영원한 공전을 꿈꾸는 소행성처럼 와타루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히비키는 그의 행동에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어메이징’이라는 힘찬 외침이나, 사랑스럽군요, 라는 피드백이 없는 지금은 적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서는 서걱거리는 소리는 나질 않았다. 에이치는 입술을 움직여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주로 그의 신변에 대한 것이었지만, 핵심적인 질문은 아니었다.
머나먼 불빛을 손아귀에 움켜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에이치는 이 잔잔한 순간,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악마와 닿는 손가락이, 순간이 영원이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대의 뒷면을 보여주고 있던 히비키는, 그대의 영원까지 함게 하겠다고 속삭였다. 에이치는 작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 천사 같네요, 모든 것에 군림하시는 나의 황제폐하. 와타루는 지친 듯 속삭였다.
“달에 맹세해 줄 거니?”
“아, 저 줏대 없는 달님을 두곤 맹세하지 않을게요. 나날이 모양을 바꾸는 변덕스러운 달인걸요.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겠지만, 에이치의 사랑마저 그처럼 변할까봐 무서워요.”
“정말로 무섭니?”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였다. 에이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떠한 장난기도 담지 않은 눈은 자수정처럼 아름다웠다. 장난기 많은 그가 유일하게 사실만을 말하는 이 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에이치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지막 질문에, 히비키는 어울리는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상기된 볼이 줄리엣의 방까지 뻗은 장미넝쿨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에이치는 그의 손바닥을 가볍게 간질였다. 그럼요, 하고 히비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무엇에 대고 맹세할거니?”
“아아, 에이치. 짗궂은 사람.”
“대답 해 주렴.”
나의 악마, 라는 말에 히비키는 목 끝으로 웃었다. 술은 악마마저 솔직하게 만드는 것인지, 십대 끝물에 서 있는 텐쇼인 에이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제 손을 구원이라도 되는 양 붙잡고 있는 악마의 목소리와, 모든 것이 내려간 다음에, 현실만이 존재하는 무대 위를 믿을 뿐이었다. 에이치는 히비키의 손과 제 손을 엮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자, 히비키는 작게 웃었다. 미약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황제 폐하, 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달빛처럼 결이 좋았다.
맹세하지 않을게요. 그래도 기어코 맹세를 하시려거든 당신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세요. 당신은 저에겐 우상이며 신 같은 존재. 당신을 믿겠어요. 눈과 눈이 마주쳤다. 얼어붙은 호수 아래서 너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에이치는 애써 불안을 지웠다. 무대 뒤의 사정을 관객은 알 수 없다. 자신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행성을 사랑한 것이 문제였을까, 그는 그 시발점을 생각하다가, 이내 웃었다. 히비키가 사랑하는 황제에게 불안감은 어울리는 감정이 아니었음으로.
텐쇼인 에이치는 오늘도 닫힌 무대를 본다. 커튼 너머의 세계는 언제다 달콤한 것을 들려줄 것 처럼 잠잠하기만 하다. 머나먼 불빛을 제 심장에 가두는 공상을 하며, 에이치는 히비키의 하얀 손등에 키스했다. 순례자의 키스인가요? 라고 묻는 히비키에게, 에이치는 나의 입술로 네 죄가 씻어진단다, 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죄를 손에 담고 있으면 안 되는 일, 그는 지극히 연극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이 얼마나 달콤한 꾸짖음인가, 히비키는 탄식하듯 말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입술에 닿는 숨은 악마적이지도,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유한이었다. 달빛이 중세 극장의 원형등처럼 엷고, 엷게 퍼지고 있었다. 닿은 숨에서 진한 알콜 냄새가 났다. 얼음 호수의 밑으로 가라앉는 꿈을 꾸며, 에이치는 눈을 감았다. 죄가 혀에서 혀로 옮아, 서로의 목구멍 끝까지 밀려, 심장에 닿았다. 소리 엷은 침묵이 무대의 암전처럼 녹아 있었다.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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