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한겨울 밤의 꿈 | 2016. 3. 12. 20:41
6.
한겨울 밤의 꿈
***
“셋쨩 안-녕.”
“기분 좋아 보이네.”
“지금은 나의 시간이니까.”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번화가의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흐린 날임에도 불구하고, 빛은 바라지 않았다. 세나는 그 유한한 반짝임을 눈에 두다가, 리츠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 엔젤링 부근에 드는 원색의 조명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형 인간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돌려 말하는 것도 재능이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핸드폰 지도를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꾸물거리는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하늘이 비를 쏟는 모양이었다. 셋쨩, 나 얼굴에 비 맞았어, 리츠는 느긋하게 말했다. 세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츠키나가의 마음에 드는 가게는 대개 골목길 속에 있었다. 때문에 지도를 봐도 직관적으로 알 수 없었다. 세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로 난 샛길로 들어갔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명백한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손에 우산은 없었다. 어둑어둑한 골목을 더듬어 지나가는 일은 꽤나 어려웠다. 밤눈이 좋은 리츠는 길을 찾고 있는 세나의 고역 따위는 모르는 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익숙한 음이었다. 비긴 어게인? 하고 세나가 묻자, 리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며칠 전에 극장에서 재개봉을 했다는 정보를 알려주면서 언제 한 번 ‘유우 군’과 가 보라고 조언했다.
“쿠마 군이 유우 군을 챙기는 거, 어색한 기분이네?”
“그야 ‘유우 군’에게 관심을 둔 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나 예고편 굉장히 잘 보고 있거든. 리츠는 작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무언가 대답하기에도, 말을 더하기에도 애매한 기분이라, 세나는 입술을 입 안으로 감추었다. 어때? 라고 묻기에도 어색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았다. 어두운 골목길 안을 더듬어 가는 일은 여전히 어려워, 그는 벽에 한쪽 손을 대고 걸었다. 꼭 미로를 찾는 것 같네- 리츠가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다시 한 번 번개가 번쩍였다.
그들의 여정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포장되지 않은 골목길에 남은 자갈들이 그림자에 밟혀 소리를 냈다.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길을 몇 번이나 빙빙 돌고 나서 세나는 츠카사가 추천한 가게에서 만났어야 했다고 투덜거렸고, 리츠 또한 세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노인을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왕님 짜증나. 리츠는 손으로 이마께를 가리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세나가 보고 있는 스마트폰의 액정에 몇 개의 빗물이 눈물처럼 떨어졌다.
가로등의 희끄무레한 불빛을 따라 수 분을 헤매고 나서야 그들은 작은 이자카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술집 바로 옆에 있는 가로등은 꽤나 어두웠다. 굳이 골목 한쪽을 막으면서 주차해둔 –세나는 그가 어떻게 차를 이곳까지 끌고 왔는지가 궁금했다- 츠키나가의 차를 확인한 둘은 잠시 이자카야의 차양 아래에 멈추었다. 세나는 제 바이크의 열쇠를 리츠에게 건넸다. 리츠는 차키를 쥐고, 츠키나가의 차 뚜껑을 세게 긁었다.
나름대로 소심한 복수를 마친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은 가게에 먼저 와 있던 세 명이 인사했다. 그들의 앞에는 맥주와 꼬치안주가 늘어져 있었다. 카사 군이 술을 마시는 걸 볼 때 마다 어색해. 세나는 인사 대신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스오우는 잔뜩 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인이 느긋하게 틀어둔 텔레비전 소리에 빗소리가 천천히 섞여 들어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꽤나 큰 비인 듯, 이자카야의 차양막을 치고 내리는 소리에 작은 말소리가 가려질 정도였다. 나루카미는 그들의 외투를 받아 걸어놓다가, 그들이 젖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이 매우 유쾌하다고 생각했는지 호들갑을 떨며 웃었다.
“어머, 이즈미쨩, 리츠쨩, 운이 좋았잖니!”
“하아?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났다고. 역시, 역까지 차 태워줘.”
세나는 그를 힐끔 보다가, 츠키나가를 보며 말했다. 츠키나가는 양 손에 양꼬치를 들고 있었다. 입에 든 것을 다 씹고 말할 정도의 상식은 남아 있는지, 그의 왕은 열심히 입을 오물오물 거렸다. 세나는 왕의 잔에 술을 따랐다. 땡큐, 라는 말은 그의 입속에 든 양꼬치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았다. 차나 태워줘, 세나는 제 등 뒤 쪽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창문 너머로 거센 빗줄기가 보였다.
“어쩌지 세나! 대리 부를 생각이라 자리가 없는데!”
“카사 군을 버리면 되잖아? 이제 혼자서 지하철 타고 다닐 나이라구?”
“세나 선배는 역시 악마군요!”
“새삼스럽게. 그러니 선배들 얻어 타고 다니는 건 그만 두도록 해.”
“오늘따라 더 나쁜 것 같습니다.”
“아-니. 나는 언제나 같다구?”
세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옆자리에 앉은 리츠가 맥주 캔을 따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왕님 단골 가게야? 세나가 묻자, 츠키나가는 단골은 아니지만 자주 오고 싶은 가게라고 대답했다. 스오우는 매운 맛이 나는 닭염통 꼬치를 우물거리고 있었고, 나루카미는 한 손으로 핸드폰 액정을 꾹꾹 누르며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세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제 캔을 땄다. 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섵불리 민감한 걸 묻지 않을 것도 같았다. 세나는 마음을 놓고 안주로 나온 유자채절임을 입에 넣어 오물거렸다.
상큼한 맛이 이 안에 가득 퍼졌다. 간만에 하는 편안한 식사였다. 집안에 있는 건 답답하다. 기다려 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게 유우키 마코토라는 게 문제였다. 트릭스타가 휴식기라는 말이 사실인지, 그는 저녁쯤엔 언제나 집에 있었다. 손이 덜 가는, 큰 개를 기르는 기분이었다. 아침엔 늦게 일어나지만 밥은 꼬박꼬박 잘 먹고 혼자서도 잘 노는 것 같았다. 외로움을 타는 것 같진 않았지만 퇴근 할 때에는 언제나 현관 쪽으로 나와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이래서 개를 기르는 구나 생각하면서 세나는 작은 화로 위에서 굽고 있는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츠키나가는 미식가였고, 쇠고기의 맛은 좋았다. 육즙과 양념이 적당히 스며 있어서, 씹을 때 마다 즐거웠다. 세나는 유우키의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도리질했다. 저녁은 잘 먹고 있을지 걱정이 됐다. 완전히- 개를 기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셋쨩의 유우 군은 잘 지내?”
세나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리츠가 입을 열었다. 세나는 얼굴을 구겼다. 밖에서 번져오는 빗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입에 음식이 들어 있어 말하지 못한다는 듯, 세나는 입에 들어있는 고기를 느릿하게 씹었다. 질문이 오가지 않는 테이블은 어색하기만 했다. 나루카미는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식으로 리츠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짝, 하는 파열음과 아파~ 하고 나른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잘 지내겠지.”
“왜 남 일처럼 말해?”
셋쨩 유부남이면서. 리츠는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츠키나가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와하하, 세나, 내가 보지 않은 사이에 결혼 한 거야? 이거 아쉬운 걸! 잠깐, 누구와 결혼했는지는 알려주지 마, 망상하게 해줘! 언제나와 같이 정신없이 끝나는 그의 말에, 세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스오우는 가상결혼프로그램에 나이츠를 대표해서 세나가 나간 게 기억이 안나냐면서 츠키나가의 망상의 맥을 끊어버렸다. 그는 분한 얼굴을 하더니, 스오우의 손에 들려 있던 염통꼬치를 뺏어버렸다.
“남이잖아. 결혼 한 것도 아니고.”
“유부남이면서. 결혼 했잖아.”
화면 안의 일이지만. 리츠는 불에 올려둔 고기를 뒤적였다. 뒤집으려면 하지 말라는 츠키나가의 엄명이 내려졌다. 고기는 불에 올린 순간부터 두 번 만 건드려야 한다는 철학 강의가 이어졌고, 나루카미는 소고기도 두 번 뒤집어야 하느냐 물었다. 스오우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서민 식당식 소고기와 돼지고기에 굽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방금 안 듯한 표정이었다. 세나는 맥주를 입에 댔다. 목넘김이 유난히 묵직했다.
“아무튼, 남이야.”
그는 단정 짓듯 말했다. 리츠는 아쉬워 보이는 얼굴을 했다. 그는 불만이 있다는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가, 여러 마디를 툴툴거렸다. 좋은 소식 가져다 줄 줄 알았어. 어린아이의 사랑을 구경하는 건 노인의 유일한 즐거움인데 말야. 리츠는 츠키나가가 눈독들이고 있던 고기를 집어 제 입 안에 넣었다. 그의 왕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세나는 제 쪽에 놓였던 고기를 츠키나가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도 항상 같이 있잖아.”
“하아? 하우스메이트일 뿐인 걸.”
“셋쨩, 여전히 얼음 같구나. 좀 더 남편한테 신경 써 주는 건?”
“그건 구속이지. 내가 걔의 삶을 감시해야 하는 의무는 없거든?”
세나는 츠키나가의 손에 들려 있던 염통꼬치를 뺏어, 다시 스오우의 손에 돌려주었다. 그 다음 그는 간장을 발라 구운 곤약꼬치를 들어, 윗부분을 우물거렸다. 하우스메이트라니 너무 거리감이 멀게 느껴지는 단어야. 리츠는 턱을 괴면서 말했다. 나루카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츠키나가는 경쾌하게 웃더니, 구운 파를 제 접시로 가져가면서 유우 군이 누군데? 하고 물었다.
아무튼 납치까지 했던 셋쨩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명백히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의 ‘마음’을 흥밋거리로 삼는 것 같은 모습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터치하고 싶진 않았다. 세나는 다시 맥주를 마셨다. 할 말이 떨어졌을 때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오늘 따라 술이 술술 넘어갔다. 그래서 유우 군이 누구야? 츠키나가가 뜬금없이 물어왔다. 나루카미는 세나의 눈치를 보다가, 글쎄- 하고 망설였다. 그것이 뭔가 특별함의 스위치를 올렸는지, 츠키나가는 인스피레이션이- 하고 크게 외친 다음, 대답하지 마, 망상하게 해줘! 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스오우는 츠키나가의 생각의 맥을 끊고 움직였다. 그는 값싼 체리를 젓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트릭스타의 안경 쓰시고, 블론드인 선배님입니다. 기억 안 납니까?”
스오우는 주변에 신경을 쓰고 살라는 식으로 말했다. 많이 건방져졌어, 리츠는 그렇게 말하며 턱을 괴었다. 그는 이 상황이 퍽 재미있는 듯 했다. 츠키나가는 제 망상이 방해 받았음에 짜증을 냈다. 하지만 그는 부연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우 군’이 기억나질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꿀 같은 느낌의 금발, 기억 안 나십니까? 스오우는 ‘유우 군’에 대해 부연설명을 했다. 예전보다 체격이 좀 더 좋아졌지만 호리호리하고, 목소리가 좀 상냥한 느낌이 들고, 스오우는 핵심이 아닌 곳을 에둘러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노력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나는 자조하면서 맥주를 서둘러 넘겼다.
“예고편 봤어.”
리츠는 하품을 했다. 오늘 따라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말하고 있었다. 기껏 돌려 둔 화제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메트로놈의 바늘 위에 탄 기분이었다. 세나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리츠는 딱히? 라고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창 밖의 빗소리가 저 대신 분을 내보이는 것 같다는 게 세나이 즈미의 최대의 위안이었다.
아까 긁었어야 하는 건 츠키나가의 차 뚜껑이 아니라, 리츠의 속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의 말에 스오우가 동의했다. 나름대로 두근거리게 뽑아놨다는 감상을 늘어놓는 막내의 말에 공감하는지, 리츠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오래 산 노인이 볼 건, 그저 젊은 아이들이 연애하는 거라고 말하는 리츠의 목소리는 빗소리처럼 느릿했다. 츠키나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루카미는 지금 이 자리보다, 핸드폰 속의 연인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정말이지 한 번에 융합되지 않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곤약을 씹었다. 짠맛 너머로 느껴지는 미미한 단맛이 어설프게 스며 있었다.
“뭘 봤는데.”
“셋쨩의 유우 군이랑, 셋쨩이- 침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거.”
“하아? 그런 장면이 있다고?”
“둘이 규칙을 정하셨습니다.”
서로 존댓말 쓰기랑, 어디 나갈 때 포스트잇에 적고 나가기, 밥을 세나 선배가 하셨으면 설거지는 ‘유우 군’ 선배가 하기, 적어도 저녁은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랑, 또…, 스오우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이야기했다. 그는 이 이야기의 애청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거 다 짜고 하는 건 아는 거지? 세나는 문득 물었다. 스오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리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작게 하품했다. 송곳니가 보였다, 입술 안으로 사라졌다.
“둘이 침대에서 사근사근하게 있어서 사귀게 된 줄 알았지.”
“2주 동안의 하우스 메이트.”
“설레게 해줘 셋쨩- 그 때, 제법 예쁘게 웃었잖아?”
요즘 보고 있던 연속극도 끝나서 이제는 「한겨울 밤의 꿈」만 기대하고 있단 말이야. 끝나기 전까진 사귀고 있다고 믿을래. 노인의 즐거움을 빼앗지 말아줘.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내밀었다. 나이를 몇 살이나 먹었는데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행동인지, 세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쿠마 군은 팬픽 취향인 거야? 그는 맥주를 두어 모금 마신 다음, 짜증난단 어조로 물었다.
글쎄, 그것 보다는 셋쨩이 어서 정착하길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이랄까.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세나는 어깨를 움직였다. 츠키나가는 유우 군, 유우 군, 하고 염불을 외듯 중얼거렸다. 기억 속 깊은 곳에 묻힌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한 번 망상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만두지 않는 버릇은 여전했다. 세나는 다시 맥주로 목을 축였다. 위가 무거웠다.
거짓말이라는 거 다 알고 있잖아. 세나는 쥐어짜듯 말했다. 리츠는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단지, 미리 환상을 깨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게 저와 같은 그룹의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적은 것 같기도 했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나루카미는 리츠에게 이제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술기운이 오늘 따라 빨리 도는 듯 했다.
멀리 있는 텔레비전에서 유우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더, 저기의 금발이 ‘유우 군’ 선배입니다! 스오우는 마침 좋은 걸 발견했다는 듯, 화면에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작은 술집에 있는 것 치고는 큰 텔레비전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세나가 처음 보는 화면이었다. 부드러운 BGM이 깔렸다. 「비긴어게인」의 lost stars였다. 집에서 기다리는 거 힘들어요, 화면 안의 유우키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나만 기다리는 것 같아요.
―그거야 내가 일을 하니까. 유우 군, 배우자가 능력이 있으면 좀 더 감탄하지 그래?
화면 안의 세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서운 해 보이는 유우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몇 초 동안 그의 얼굴을 잡았다. 미묘한 표정 변화 하나라도 캐치하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세나는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빗소리가 더욱 거세져 텔레비전 소리를 덮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바라는 일은 언제나 이뤄지지 않았다.
주황색 무드등 불빛이 두 사람 사이에 가득 퍼졌다. 그 불빛 때문에 오히려 ‘연출’하고 있다는 게 강하게 느껴졌다. 그 이질감에 리츠는 얼굴을 찌푸렸다. 잘 좀 만들어 주지, 라는 타박에 나루카미는 저게 최선이었을 거라고 말하면서 난감한 듯 웃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때, 이불 속에서 손이 꼼질거렸다. 유우키의 손은 천천히 다가왔다. 이불을 팡팡 두드리며 더듬거리고, 더듬거리다가 새끼손가락을 먼저 잡았다. 그는 그것이 어떠한 언약이라도 되는 것 마냥 소중하게 쥐고 있다가, 이내 손을 더 깊게 엮어왔다.
손과 손이 닿는 것뿐인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면에 잡히지 않는 부분이었지만 놓기 싫었다. 그래서 모르는 척, 못 이기는 척 힘을 주어 떼내지 않았다. 밀어내지만 여지를 주고 있었다. 세나는 자신이 이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인질 처음 알았다. ‘그 시기’의 유우키가 했던 짓을 자신이 똑같이 답습하고 있었다. 이런 애매한 상냥함이 그를 망가뜨린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당해봤으니 알고 있었다. 밀어내려면 끝까지 밀어내야 했다. 세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상단에 뜨는 ‘한겨울 밤의 꿈’의 로고가 유달리 눈에 밟혔다.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우키의 모습이 사라지고, 인터뷰 화면이 떴다. 나루카미가 물었다. 집에 혼자 있는 거 재미없어요?, 그 상냥한 목소리에 유우키는 음, 하고 망설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 저는 휴식기고… 고정 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없으니까, 라고 입을 연 유우키는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을 해요.
―강아지? 멍멍?
나루카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나가 없지만 있는 것 같은 ‘빈 집’에 있는 게 지루하다는 말을 꺼냈다. 놀아줄 주인이 없는 강아지 같다면서 곤란한 듯 웃었다. 물론 남겨준 포스트잇에 적힌 문구를 보다보면 시간이 훌훌 가긴 하지만, 그래도 빈자리가 크다고 대답했다. 그는 여백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고도 대답했다. 여태까지 했던 인터뷰 중에 저게 제일 잘 따였잖니, 나루카미가 실곤약을 다 씹고, 기쁜 듯 말했다.
―분명 결혼하기 전 까진 둘 다 혼자였을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지금은… 혼자인 게 어색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유우키는 머쓱한지, 제 뒷머리를 쓸었다. 나도 혼자였고, 이즈미 씨도 혼자였을 텐데, 나는 이 여백을 견디는 게 힘이 들어요. 사실 방 안에 같이 있어도 뭔가 특별하게 같이 하는 것도 아닌데 같이 있었으면 좋겠고,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계속 내 생각을 해 줬으면 좋겠어요. 유우키는 천천히 말했다. 이즈미 쨩의 일방적인 구애에 익숙해진 모습이라며 화면 안의 나루카미가 감탄조로 말하자, 화면 속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방적이지 않았어요, 내가 눈치를 늦게 챘고,
―응응
―그리고, 우리의 타이밍이 애매해서, 내가 알려주는 게 늦었어요.
―뭘 알려주는 게 늦은 거야?
―내가 이즈미 씨를 보고 있다는 걸. 우리가 서로를 보고 서 있다는 거…… 조금 오글거리나?
―아니 오글거리진 않아. 그냥 그게 마코토쨩의 감정인 거잖니?
화면 안의 나루카미는 방긋방긋 웃었다. 그 웃음에 안심했는지, 유우키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떨리는 시선, 떨리는 손길은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방송물을 오래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나타나는 순수함이 유우키 마코토의 장점이었다. 그는 첫사랑을 하는 것 같은 고등학생처럼 풋내나게 웃었다.
눈 내리던, 그 날 같았다. 세나는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화면 안의 유우키와, 밖의 자신. 그 둘을 제외한 모든 세상이 소거된 것 같았다. 진공상태의 유리관에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유우키는 볼을 긁적이면서 카메라 렌즈를 피하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앳된 유우키는 더 이상 없음을 아는데도, 세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그를 찾고 있었다. ‘그 날’ 유우키가 썼던 어리숙한 향수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듯 했다. 서러웠다.
―그냥, 좀 늦은 거죠. 그래서 이즈미 씨가, 자기가 혼자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거고. 뭐, 지금은 괜찮지만. 결혼 했으니까, 이제 내 남자니까…….
유우키는 자신의 말을 수습하려는 듯, 성급하게 말했다. 말에 과하게 담긴 사랑들이 길 잃은 별들처럼 흩어졌다. 먼지 우주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세나는 유우키의 고백이 어느 시점의 자신에게 해주는 말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가 보내는 신호들을 세나는 해석할 수 없었다. 두 우주의 언어체계는 확연히 달랐다. 모스부호와 음성언어 사이의 거리일 것이다. 세나는 해석할 수 없는 말들을 ‘진짜’ 라고 착각하게 되는 자신이 가장 미웠다. 유우키를 담고 있던 화면이 다시 번지더니, 『한겨울 밤의 꿈』의 첫 번째 방영 일시를 알려주었다.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츠키나가가 으음, 하고 고민을 가득 담은 소리를 냈다. 얼굴을 보고서도 모르는 겁니까? 하고 스오우가 물었다. 그는 여전히, 츠키나가가 ‘유우 군’이 누군지에 대해 떠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세나는 츠키나가가 일부러 잊은 척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언제나 재워주면서, 술을 같이 마셔주면서 모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츠키나가는 하품을 했다. 그는 모든 게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둘 사이에 얽힌 감정에 대해서 제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게 분명했다. 세나는 자신도 그렇게 쿨해질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에 풀어진 실곤약 같은 기분이었다. 츠키나가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얼굴 정도는 보면 안다고? 라고 말한 그는, 세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좋아했었지?”
“응.”
세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왕의 말에는 얌전히 대답하는 것이 기사의 소양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대답한 건 아니었다. 세나는 말로써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것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말로 확정짓는 단계가 필요하다 여겼다. 츠키나가의 질문에 바로 대답했던 것은 이런 의도가 다분히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성급하게 마신 술이 파도에 점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글세…”
그 때 만큼은 아니야. 세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리츠는 김이 샌 표정을 하고 있었고, 스오우는 방영 날까지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제법 맹랑한 말이었다. 그들의 막내는 가끔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곤 했다. 이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질척거리는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스오우가 부러웠다. 아픈 머리에 손을 댔다. 평소에는 넘어갔겠지만, 오늘 따라 마음에 말이 턱턱 걸렸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거야? 세나가 물었다. 스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 선배의 ‘유우 군’께서는 꽤나 좋은 액터이신 모양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소한 행동이나 시선이 설렌다는 부연설명을 했다. 리츠도 그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세나의 현실을 화면 속 먼 이야기를 대하는 것처럼 재잘거렸다.
낫쨩도 그렇게 생각할 걸?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잔을 들었다. 세나는 나루카미를 쳐다보았다. 바른대로 고하라는 그 눈빛에 나루카미는 으음, 하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나는 그들의 입을 모두 틀어막고 싶었다. 데운 사케 시켜줘. 세나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여전히 빗소리가 강하게 들려왔다. 그는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세나에게로 쏠렸다.
“더 이상, 말하지 마.”
나 진지하다고? 화 낼 거야. 용서 하지도 않을 거고.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애써 웃었다. 너희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도 완전 짜증나고,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도 완전 짜증나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말아줄래? 세나는 똑바로 발음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라, 그는 가슴께를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막힌 목이 터지려고 했다. 여기서라도 편하게 있게 해 줘. 그는 어리광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죄송합니다, 라고 스오우가 입을 열었고, 리츠도 작은 소리로 미안해, 라고 속삭였다. 나도 예민해서 미안. 세나는 그렇게 사과하며, 뒤를 돌았다. 여전히 빗줄기는 세게 내리치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저가 다 먹어버리고 싶다는 듯 기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먹먹함이, 도돌이표를 타고 돌았다. 보이지 않지만 공중에 머물러 있는 먼지처럼, 그들이 하고 싶은 말들은 목적에 닿지 못하고 부유할 뿐이었다. 연극이라는 거 알고 있잖아, 라고 세나는 속삭였다. 사케와, 감자고로케가 나왔다. 대답이 없는 테이블에서 젓가락이 멤도는 소리가 들렸다. 츠키나가는 담뱃곽을 들고 일어났다. 카멜이었다. 열렸다 닫히는 문에서는 끼익, 하는 파열음이 났다.
더운 사케가 세나의 앞에 놓여졌다. 밖으로 나간 신사분이 보내신 겁니다, 라는 주인장의 넉살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잔이 적당히 따듯했다. 그는 차갑게 식은 손끝을 데웠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엉켜버린 감정들이 단조처럼 울었다. 즐거워야 할 모음이 이런 모습이 되길 바란 적은 없는데. 그의 손가락들이 따듯한 컵 위를 연주하듯 오갔다.
“우산 없는데.”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 세나는 입을 열었다. 잠시 담배를 태우러 나갔다 돌아온 츠키나가는, 저만 차를 타고 돌아갈 것이라 선언했다. 누가 차 앞뚜껑을 긁어 놓았다고 투덜거렸다. 그에게서 비냄새와 담배냄새가 났다. 세나는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유우키가 있었다. 남자 티가 나는 얼굴과, 예전보다 더 자란 키, 벌어진 어깨. 세나는 변해버린 것들을 찾으며 감자 고로케를 찢어 입 안에 넣었다.
뜨겁고 포실포실한 감자를 입 안에 넣고 가득 씹었다. 세나가 입을 오물거릴 때 마다 그들은 한 마디 씩 말을 걸어왔다. 나루카미는 제 차를 타라 말했다. 비를 맞고 골목길만 지나간다면 괜찮을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벌써부터 헤어질 소리를 하는 건 이르다면서 곧 비가 그치리라 말하는 리츠는 세나가 대답해주지 않자, 빈 입에 맥주를 마셨다. 서먹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고 있던 스오우는, 가방을 뒤져 작은 삼단 우산 하나를 세나에게 쥐어 주었다. 카사 군 쓰고 가, 라는 말을 듣기 싫다는 듯, 그는 세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화장실 쪽으로 아예 자리를 떠 버렸다.
엉망이 된 분위기 속에서는 흥이 나질 않았다. 미안, 하고 사과하는 말에 모두가 대답해주지 않았다. 감자고로케 속 전분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사케를 들이켰다. 억울함에 술기운이 올라갔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건 아니에요, 화면 속의 유우키가 속삭였다. 눈을 감자, 목소리는 더욱 가까이 들렸다. 손을 잡아도 괜찮은 지 알 수 없었다. 유우 군이 아이돌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턱을 괴었다. 뜨거운 사케를 홀짝일 때 마다, 술기운이 치받쳤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술잔을 연다라 비웠다. 머리가 띵했다. 물을 마시는 대신 맥주를 들이켰다. 뜨거웠던 위장이 차가운 기운에 잠식당하는 느낌이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혼자만의 질주를 말리려 나루카미가 말을 걸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츠키나가는 손을 뻗어 그의 개입을 저지했다. 쏟아내게 놔두라는 뜻이었다.
그의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 지 세나는 그저 서러웠다.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면 유우키가 있다. 졸린 얼굴로 눈을 비비면서 나올지도 모르고, 침실에서 자면서 몸을 뒤척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반응보다 중요한 건, 세나의 집에 유우키 마코토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바라왔던 상황이지만 달갑지 않았다. 사랑에 빠지는 게 무서웠다. 더 이상 자신을 잃어버리기 싫었다.
상대방보다 애정 크기가 큰 사랑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의 작은 반응 하나에 과하게 흔들러버린다. 언제나 세계가 붕괴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행동은 마치 ‘사랑’이라는 이름과 ‘희망’이라는 이름의 작은 발판에 두 발을 디디고 지지하고 있는 것조차 과분하다는 것처럼 다가온다. 이는 다,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2주 간의 마법, 그 짜릿한 순간에 빠지기로 생각했던 것은 자신이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기는 싫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때를 쓰는 것 같은 모양세였다.
리츠는 손수건을 건넸다. 세나는 손수건 대신 술잔을 쥐었다. 다시 한 번 잔이 비워졌다. 츠키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저번에도 그랬어, 하고 쓸모없는 부연설명을 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나의 볼에서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 주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기사를 보는 건 언제나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술기운이 펑펑 돌았다. 무엇이라도 말해야 할 거 같았다. 세나는 입을 열었다.
“아이돌 그만 둬- 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세나가 입을 열었다. 그는 스오우의 빈자리를 보다가, 츠키나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푸스스 웃었다. 애써 웃는 모양이었다. 그의 왕은 말해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재의 눈으로 보면 기나긴 짝사랑이 어떻게 뒤틀려 왔는지, 어떤 식으로 꼬여 있는 지가 보이는 걸까? 세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세나는 음, 하고 망설이다가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 날’의 일이었다.
“왕님, 나는 유우 군이 아이돌을 그만 두길 바랐는데.”
“알고 있어 세나.”
츠키나가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세나의 오랜 버릇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후회했던, 슬픈 일들을 쏟아낸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담겨 있던 목소리들은, 먹구름 속에 있다 대기중으로 낙하하는 비를 닮았다. 기사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왕의 의무였다. 츠키나가는 며칠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놓는 세나를 바라보았다. 우는 건 어울리지 않아, 라고 타이르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꺼낼 타이밍이 아니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반짝이던 제 기사가, 고작 사랑 하나 때문에 이렇게 지쳐 있는 건 그다지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촬영을 할수록 세나는 점점 메말라갔다. 츠키나가는 그들의 촬영 첫 날을 반추했다. 집에 못 들어가겠다고 퉁명스럽게 말하던 세나는 절박해보였다. 무언가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우키 마코토와 세나 이즈미 사이의 서사에서 츠키나가 레오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고작 ‘세나가 불쌍해’라는 이유로 끼어들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아예 안 보이고 소식도 끊겨버리면…”
“응.”
츠키나가는 잘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는 그 모습에 안심한지 푸스스 웃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한 마디를 꺼내는데도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나루카미가 그에게 생수를 건넸다. 찬 물을 천천히 마시면서, 세나는 제 입에서 나올 말을 골랐다. 흐지부지하게 결착을 낸 감정들이 엉망으로 엉켜서 그의 목을 막고 있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츠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날 걔는 파스타를 먹었어.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 고등학생 주제에 술을 마시고, 내 방에서 잤을, 거야 아마도. 그 뒤는 나도 몰라, 나는 그 날 밤을 걷고- 걸어서- 나루 군한테 갔으니까. 사실 학교 다닐 때에는, 그 애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아이돌 그만 두라고 설교 했던 건데,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이처럼 웃긴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그는 잔에 든 사케를 입에 털어 넣었다. 목 끝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꺼지고, 일반인이나 돼! 라는 마음으로”
그 날, 아이돌 그만 두라고 마지막으로 말했어. 이제 갈라지자- 라는 의미였는데 유우 군은 그걸 몰라. 그래서 내가 멀어지려고 유우 군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섭외가 들어와도 안 갔고, 잡지 촬영도 같이 하자고 하면 안 한다고 했어, 그래서 안일해졌나봐, 안일해져서, 이상한 프로그램에나 나가고. 세나는 츠키나가를 보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는 이해한 다는 듯, 세나의 잔에 찬 술을 따랐다.
“어제 걔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어.”
Miluju tebe- 라고 말해줬는데- 세나는 말을 하다 말았다. 지속되던 독백 속, 갑자기 찾아온 돌발 상황이었다. 그 어색한 침묵에 세나는 마침표를 찍기 위해 웃었다. 목이 메였다. 츠키나가는 진지하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 유우 군 좋아해. 세나는 자신의 세상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그 애는 지금, 연극에 취해 있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잔에 든 술을 털어 냈다. 위가 아팠다. 빗소리가 거셌다.
“유우 군은 너무 물러.”
그래서 밀어내지 않는 거야. Miluju tebe라고 말해 주는 건, 결국 거짓말인 거지. 나랑 유우 군은 『원스』나 『비긴어게인』처럼 될 거야. 결국 이어지지 못하는 거지. 우리는 궤도를 잃어버린 별들이야.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좋잖아, 라는 말은 주문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게 유우키의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건 아니에요.
“나는 내 지금을 믿는 것뿐이에요.”
세나와 유우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예전의 자신이 유우키에게 했던 말이었다. 너는 날 어디까지 놀리고 싶은 거니. 세나는 텔레비전 속의 유우키와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그는 건배하듯 잔을 내밀었다. 짠, 하는 술취한 소리와 함께 허공과 잔이 부딪혔다. 그의 세계에서 유우키는 단 하나밖에 없는 색이었다.
그는 언제나 다섯 번째 계절이었다.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며, 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되어 있는 특별한 존재였다. 처음엔 그저 형이고 싶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애틋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세나는 멍하게 울었다. 벅벅 비볐던 눈가가 아려왔다. 괜찮니?하고 말하며 나루카미가 세나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유우 군이 보고 싶어.”
“응. 세나, 저번에도 말했었지.”
츠키나가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의 여백을 밖에서 내리는 비가 덮고 있었다. 나는 셋쨩이 손해 보는 사랑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리츠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마르고 가느다란 등을 쓸 때 마다 울컥였다. 아까는 사귀었음 좋겠다면서, 라고 쏘아붙이자 리츠는 그건 네가 좋아하니까, 라고 대답했다. 세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네 망상이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영원히 그치지 않을 울음이었다. 감춰두는 것이 익숙한 밤이기도 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황홀한 듯, 화면 안의 유우키를 바라보다가 데운 사케를 한 병 주문했다. 조금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은 게 말야- 세나는 천천히 말했다.
“차라리 날 죽이러 와줬으면 좋겠어.”
그럼 꿈에서 깰 수 있을 것 같아. 오베론의 요정이 몇 십 년 전 발라두었던 사랑의 묘약을 씻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생각 때문에 초조한 날도 없어지겠지.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편안할 텐데. 그는 요정이 1년에 칠 수 있는 장난에도 한계를 정해야 한다면서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리츠는 세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닿아오는 따듯한 손길은 봄과 같이 상냥했다. ‘겨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촉이었다.
비가 내렸다. 그것뿐이었다. 두서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
말 그대로 느긋한 날이었다. 신혼생활의 단꿈에 대해서 찍을 내용도 없었다. 유우키는 카메라가 꺼진 방 안을 제 맘대로 돌아다녔다. 세나는 아침부터 촬영이 있다면서 나가버렸다. 2주 동안 진행되는 촬영에서 단 하루 있는 ‘카메라 꺼도 괜찮은 날’이었기 때문에 아쉽기도 했지만 붙잡을 권리는 없었다. 대신 유우키는 그의 개인적인 공간에 발을 들였다. 그는 서재와 안방을 뒤적였다. 어디엔가 지금의 세나를 알만한 단서가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움직였지만 ‘그 날’과 ‘그 때’에 관련 된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날 봤었던, 어려던 자신의 포스터마저 들어낸 듯 사라져 있었다. 배가 고팠다. 그는 세나가 만들어두고 간 도시락을 열었다. 영양 밸런스를 아낌없이 생각 한 요리였다. 그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설거지를 당장 할까 그만 둔 것은, 세나가 일찍 들어왔을 때 어지른 흔적을 보고 저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도 서재에서 유우키는 나름의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면서 유우키는 세나 이즈미의 비디오를 봤다. 그의 서재에 방치되어 있다시피 한 상자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듀얼』이었다. 세나의 팬이 찍어 준 영상인 듯 했다. ‘트릭스타’는 없고, ‘나이츠’만 찍혀 있는 비디오였다. 세나는 연신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지치지 않아 보였다. 중간에는 유우키를 향한 도발적인 메시지 또한 담겨 있었다. 있지, 『듀얼』은유우 군이 서기엔 과분한 무대라고?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반짝임만이 가득했다.
과거를 반추하는 영감처럼, 그래도 저 때가 좋았다고 생각하며 유우키는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는 다리를 접어 몸을 웅크렸다.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는 화면 앞에는 까먹다 만 귤껍질들과, 빈 도시락 통이 놓여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초인종이 울리면 꼬리를 흔들며 나갈 준비가 돼있었다. 세나의 숨이 없는 집은 외롭기만 하다. 평소라면 카메라를 보면서 ‘새 신랑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정말 나쁜 남자에요, 하고 흉이라도 봤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밤이 될 때 까지 세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들어오는 건지도 몰랐다. 유우키는 근 2주 동안 세나가 어디서 잠들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볼 수도,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는 얼굴을 포스트잇이 붙은 메모판을 뚱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남긴 메모는 딱히 없었다. 일찍 들어올 수 있으면 들어온다는 작은 메모만 있을 뿐이었다. 메모지가 흰 색인 걸 보니, 이는 『한겨울 밤의 꿈』용으로 사용하는 가짜 메모였다. 유우키는 메모판을 훑어보았다. 오늘도 좋아해, 언제나 응원할게, 사랑해, 우리 남편, 으로 시작하는 메시지들은 모두 다 흰색 포스트잇에 붙어 있었다.
진심은 짙은 파랑에 흰색 글씨, 거짓말은 하얀 바탕에 검은 볼펜. 그런 의미로 볼 때, 두 사람이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은 파란 색에서 비춰주는 진심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세나에게서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유우키는 진짜 규칙을 반추했다. 프로그램용 가짜 규칙뿐만 아니라, 진짜에서도 일정이 있으면 연락하기 항목이 있었다. 유우키가 졸라 대서 넣은 항목이었다. 이럴 거면 규칙을 왜 정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유우키는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세나 이즈미의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려보았다. 화면 구석에 잡힌 제 모습은 온 몸에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위잉, 하고 진동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었다. 유우키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세나일까 싶어 그는 빠르게 핸드폰 쪽으로 다가갔다. 두 발이 엉켜 엉거주춤하게 넘어졌다. 유우키는 아픈 무릎을 손으로 쓸면서, 화면을 확인했다. 하지만 세나가 아니였다. 유우키는 두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렸다. 부재중으로 만들까 싶었지만, 일 이야기 때문일지 몰라 그는 전화를 받았다. 너, 세나의 유우 군? 하고 도발적으로 물어오는 목소리는 유우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유우키 마코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물었다. 유우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와.
그는 그렇게 명령했다. 누구신데요, 하고 다시 묻자 그는 자신이 츠키나가 레오라고 대답했다. 그는 세나가 술에 떡이 되어 옮기기 어려우니, 어서 역앞 공원까지 나오라고 투덜거렸다. 그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어조로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이런 타입의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언제나 버거운 일이었다.
겨울비는 유달리 추잡하게 내린다. 눈이 되어 내리지 못한 한을 담아 내리는 것 같다. 유우키는 이즈미가 손에 쥐고 있는 작은 우산을 뺏어 내려놓았다. 늘어진 몸에는 겨울비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는 세나를 안아들어, 천천히 침실로 옮겼다. 울음이 묻은 세나는 무겁다. 알코올이 섞인 숨을 내뱉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했다. 비 묻은 옷을 벗겨 새 옷을 입히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유우키는 방 밖으로 나왔다. 남겨둔 손님이 있었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유우 군? 츠키나가가 물었다. 유우키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 맞은 옷을 대충 털어내고 소파에 앉았다. 뭐라도 드릴까요? 라는 물음에 츠키나가는 땡큐, 하고 대답했다. 유우키는 찬장을 뒤적거렸다. 인스턴트커피가 있던 것 같은데, 당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선반 여러 개와, 찬장 여러 개를 뒤적였다. 츠키나가는 유우키를 흘겨보고 있었다.
“가장 왼쪽 벽장에 있을 거야.”
“가장 왼쪽이요…?”
“스틱 말고, 플라스틱에 들어있어. 액상 형태야.”
유우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찬장을 뒤적였다. 헤이즐넛이라고 적혀 있는 커피를 꺼냈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낱개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포트에 물을 올렸다. 포트를 찾을 때 또한 츠키나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2주 동안 같이 살고 있는 자신보다, 츠키나가 쪽이 집안 구조에 능숙한 것 같은 게 어쩐지 분했다. 유우키는 뒷목을 긁었다. 젖은 옷이 말라가면서 체온까지 뺏어가는지, 썬득썬득한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츠키나가의 차 안에서, 세나는 궤도를 이탈한 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는 헬리혜성 같다고 연신 제 비유를 주장했으나, 그 비유에 달린 원관념이나 주어는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열심히 추측했으나 알 수 없었다. 유우키가 알고 있는 세나 이즈미는 단편적이다. 아동모델을 할 때의 형 같은 그, 고등학교 2년 동안의 그, 그리고 2주 정도 부대끼며 살고 있는 그. 이런 단면들을 모아 입체를 구성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무엇을 핼리혜성에 빗대는 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입이 썼다. 무엇보다도, 차 안에서의 분위기가 매우 마음에 걸렸다. 츠키나가는 세나의 말에는 호응하면서도 유우키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명백하게 미움받고 있었다. 유우키는 짐짝처럼 뒷좌석에 앉아 세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세나와 츠키나가 사이에서만 오가는 말소리를 듣고 있다가, 애처롭게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그를 집으로 안내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카메라 꺼져 있어?”
커피를 받아 들고 츠키나가가 물었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츠키나가는 커피를 마시다가, 그를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시선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긴장하지 마, 오래 있을 생각 없다구?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갈 거야.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물을 많이 탄 커피가 밍밍한 게 싫은 듯 했다.
많이 마셨네요, 라고 유우키가 말문을 열었다. 츠키나가는 어쩌다 보니, 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사이에는 어색함이 맴돌았다. 겨울바람 같은 사이였다. 둘은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은 관계는 어색했다.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츠키나가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그들의 침묵에 홀짝이는 소리가 더해졌다.
“술이 잘 안 깨네.”
“그쪽도, 많이 마셨어요?”
“아니, 나는 별로 안 마셨는데. 세나가 억울한지 좀 그래서.”
그렇게 됐고. 너한테 연락하라고 했던 건 나루. 안 그랬으면 내 작업실로 데려갔지. 츠키나가는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해답을 주려는 듯, 있었던 일들의 일부분을 풀어놓았다. 그는 정지 화면에 멈추어 있는 DVD와, 널려있는 귤껍질 따위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유우키는 그가 얼른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매우 불편했다.
세나, 좋아해? 츠키나가가 물었다. 그는 유우키와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았다. 손을 접어, 손톱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대답은 사실 중요하진 않아’- 정도의 태도였다. 유우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좋아합니다. 그는 그렇게 확언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쏟아진 다음에도, 츠키나가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대답을 예상한 것 같은 태도였다.
“좋아해?”
이번에 츠키나가는 눈을 마주치면서 물었다. 녹색 눈에는 싸늘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렇게 묻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마음을 알아서, 뭐 어떻게 하겠다고. 유우키는 이번에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다행이네, 라고 말하면서 츠키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근데, 어쭙잖은 마음으로 할 거면 그만 둬줘라.”
츠키나가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유우키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실에서 자고 있을 세나가 걱정되는 것 같았다. 그는 품 속에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난 듯, 피워도 괜찮아? 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츠키나가는 베란다로 연결 된 창문을 열었다. 빗소리와 함께 차가운 기운이 몰려들어왔다.
마음이 착잡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 저 사람에게 저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았다. 츠키나가의 시선은 그들이 찍어 걸어둔 웨딩사진에 머물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마주치지 않은 유우키와 세나의 시선, 그 엇갈린 시선이 담긴 사진에는 연출된 행복이 머무르고 있었다. 츠키나가는 불을 붙였다. 그는 베란다 쪽에 가까운 손으로 담배를 잡았다. 그는 이 공간이 익숙한 듯 했다.
“그만… 둬야 하나요?”
“응.”
“왜 그래야 하죠?”
“저번에도 그런 식이었잖아.”
저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엔, 너무 기간이 긴가? 츠키나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너희 사이에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내 기사가 힘들어 하는 걸 보기 어려워서.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는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 있는 벽면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꽤나 본격적인 장식이었다. 정말로 사랑한다고 착각 할 수 있을 정도로. 츠키나가는 담배 끝에 쌓인 재를 털었다.
협박하는 건가요? 라고 유우키가 물었다. 츠키나가는 권유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갈팡질팡 할 거면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뜻이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결벅적인 세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인테리어는 츠키나가를 위한 것이었다. 무슨 사이에요? 유우키는 물었고, 츠키나가는 ‘리더’와 ‘팀원’이라고 대답했다. 그것 뿐인가요? 라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랖이 넓은 것뿐이야. 세나는 언제나 ‘유우 군’에 관한 거면 힘들어 하니까.”
“나 때문에 힘들어 했어요?”
“그걸 그렇게도 들을 수 있구나.”
재미있어, 너 완전 재미없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조금은 괜찮은 느낌이네! 츠키나가는 킬킬 웃었다. 그는 재미없는 사람한테 집착하는 세나의 취향을 흉본 어제를 반성한다면서, 세나가 힘들어 했다고 대답했다. 연예인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매일매일 말하면서도, 너에게 시선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나보지. 지구를 바라보는 달처럼 굴었어. 츠키나가는 다시 담배연기를 뱉었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세나가 자신 때문에 힘들어했단 사실이 반가웠다. 아예 마음에서 때어놓은 게 아니구나 싶어 안심했다. 조금만 더 잡아당기면 모르는 척 다가와주지 않을까 안도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츠키나가는 타고 있는 담배를 커피가 담겨 있는 컵에 넣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뭘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네, 그는 혼잣말을 하듯 투덜거렸다.
“그만 둬.”
“제가 왜요?”
“어중간한 상태에서 그만 둘 거라면 하지 마.”
“지금은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지금, 둘이 같이 있는, 둘이 같이 사랑하는 환경에 갇혀 있으니까 좋아하는 건 아니고? 츠키나가는 무심하게 말했다. 걱정이 돼서 말하는 거야, 라는 끝 마디에, 유우키는 당신이야말로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서 말을 붙여왔다. 질투를 가득 담고 있는 녹색 눈동자를 보며, 츠키나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즈미 씨를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단단했다. 강단 있는 목소리, 그 울림에서 거짓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나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확실하게 다가오는 목소리니 되려 불안할 수밖에 없다. 몇 년 동안이나 의심했던 사랑, 멀리 떨어져 있었던 인연. 기다렸다는 듯 정답을 내놓는 모든 행위가 세나에게는 한겨울 밤의 꿈처럼 느껴지고 있을 것이다. 츠키나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놓는다면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세나가 걱정스러웠다. 마법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법이 끝난 직후의 공백을 견디기 어렵겠지. 뻔한 이야기였다.
세나와 동화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답지 않게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츠키나가는 세나가 아닌 것 같아~ 라고 물었던 자신에게, 동화의 끝 문장이 ‘모두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고 대답했던 세나를 반추했다. 마법이 풀려도 끊임없이 행복만이 지속되는 엔딩에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번져왔다. 안타까운 소리였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세나는 그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동화 같은 사랑을 꿈꿔왔기 때문에 현실이 잔인함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세나는 열두 시의 마법이 끝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하게 되면, 그 때에는 다시 또 ‘싫어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나름의 방어기제였다. 싫어할거라고 가정하고 행동하면 적어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대비할 수 있다.
사랑에 지친 사람은 언제나 최악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상처받음과 동시에 저가 무너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와 할 이야기는 없었다. 사적으로 관심이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건 저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츠키나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은 하지 않을게요, 라고 화난 목소리가 따라왔다. 고집 있네, 그것도 좋아, 나름 재미있어. 츠키나가는 유쾌하게 대답했다. 밖에서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세상을 가득 덮고 있었다.
리츠가 걱정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적어도 그 둘 사이에 있던 일들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츠키나가는 리츠의 방식이 너무 무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둘이 진심으로 '사랑'하길 바라고 있었다.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받을 수 있는 건 사랑 뿐이니까, 라고 말하면서 리츠는 자신이 세나에게 유우키의 말을 짖궃게 물어본 것도 이의 연장선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너무 강경하다. 세나는 강해보이지만 유약하다. 츠키나가는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유우키 마코토는 세나 이즈미에게 있어, 그 약한 부분에서 부터 곪은 상처였다. 더 건드려서 터질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 상처를 극복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꿈 속에서 깨지 못하며 헤매는 것 보다, 모든 걸 잊고 다른 쪽에 신경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이다. 츠키나가는 자신이 유우키를 찾아온 것에 대해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그는 느릿하게 하품했다.
이거 빌릴게, 그는 세나의 신발장에서 우산을 꺼냈다. 그 동작은 여전히 ‘익숙해’ 보이기만 해서 유우키는 속이 좋지 않았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삐삑,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유우키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다가,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비어버린 귤껍질 같은 기분이었다. 유우키는 비어버린 공간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방으로 다가갔다.
그는 닫힌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덜 되어있는 경칩에서는 끼긱 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우키는 살그머니 움직였다. 세나는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잠들어 있다는 게 오히려 안심이었다. 끝나버렸던 마법 속에서 나는 어떻게 확신을 줘야 하는 걸까. 유우키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가락과 제 손가락이 조용히 얽혔다.
“이즈미 씨”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잔잔하게 들리는 숨소리를 듣다, 가까이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잠든 모습은 편안하게만 보였다. 최근,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환하게 웃는 표정도 못 본지 한참 됐었지. 유우키는 그의 입술에 천천히 제 숨을 겹쳤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사랑의 표현은, 어떠한 반응도 낳지 않은 채, 그저 머물러 있다가, 아쉬운 듯 한숨과 함께 공중으로 퍼질 뿐이었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마음만을 믿고 있었다.
닿고 싶었다. 그들의 세계에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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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iluju tebe」
***
세나 이즈미가 운 날이 있었다.
서툴게 잡아당기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가 영원히 제 옆에 남아 있을 거라고 속단하던 나날의 일이기도 했다. 세나가 유우키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무언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던 날이기도 했다. 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서로 상처만 남았던 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유우키’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린 세나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저가 똑똑히 쳐다보고 있음에, 유우키는 지금이 꿈인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마신 술냄새가 세나가 뿌린 청량한 느낌의 향수에 엉망진창으로 섞여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세나를 ‘바라보았다’. 세나는 그의 시선과 똑바로 마주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마셨어, 라고 그가 물었다. 유우키는 콘서트 뒷풀이 때 한 잔 두 잔 손을 댔다고 대답했다. 반쯤은 사실이었다.
사실이 아닌 반절의 이유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 이름에는 반드시 ‘세나 이즈미’가 들어갈 것이다. 유우키는 손을 까딱거리다가, 그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세나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촬영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는 아직도 왁스로 고정해 올린 부분이 있었다. 유우키는 교복을 입을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엉덩이에 닿는 침대 매트리스가 그저 푹신해서 서러웠다.
‘꿈’은 그 때의 감정을 정확하게 내보내고 있었다. 먼지가 쌓여 흐려진 기억들은 마치 물에 잉크가 풀리는 것처럼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우키는 문득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엉망으로 붉어진 얼굴, 울렁거리는 속, 모든 걸 끊어내버리고 싶은 듯 저를 꼭 보고 있는 세나 이즈미. 울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유우키를 바라보고 있는 세나는 서릿발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서늘한 얼굴 너머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는 것을 지금의 유우키는 알 수 있었다. 유우키는 침대에 앉아서, 발을 움직였다. 세나의 집, 작은 방. 한 사람에게는 충분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모자란 방. 유우키는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그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보며 세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만이 둘의 세계를 돌리고 있었다.
그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처럼 모든 사람들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날은 아니었다. 그냥, 둘 정도가 기념할 날이었다. 세나가 기억하고 있고 유우키가 잊은 날이기도 했다. 유우키에게 ‘그 날’은 우연히 자고 가게 된 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콘서트 뒤풀이를 하다가 전철이 끊겼고,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술을 마신 다음 기억할 수 있는 전화번호는 극소수였다. 그 중 세나가 있었고, 마침 뒤풀이 장소 근처에 세나의 집이 있었다. 그 뿐이었다. 그 무심한 사고思考는 사고事故일 뿐이었다.
오랜만에 발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나의 집은 여전히 서걱서걱했다. 갓 졸업한 스무 살 청년이 홀로 자취하고 있는 맨션은 혼자 살기엔 넓었지만 둘이 들어가기엔 좁았다. 그렇기에 억지로라도 들어오고 싶었는지도, 나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한 곳을 선택하기에도 애매한 느낌이었다. 소년은 벽에 붙어 있는 제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는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벽지도 흰 색, 가구도 흰 색인 살풍경한 방 속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우키의 포스터뿐이었다. 온 세상의 햇살을 담아 만든- 이라는 광고 카피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진을 이토록 깨끗하게 붙여놓는 이유에 대해서 유우키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짐작할 수 조차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의 방에서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포스터뿐이었다.
유우키는 세나의 어깨 너머만을 바라고 있었다. 유우-군, 하고 그가 자신을 불렀다. 그제야 그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세나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만지는 순간 그 즉시, 닿은 자리부터 얼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표정을 보는 건 언제나 괴로운 일이었다. 유우키는 설탕 같은 말을 제 입에서 사탕처럼 굴렸다.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말들은 치아 뒤편이나, 입천장을 치고 스친다.
세나는 나는, 하고 입을 열었다. 그는 그 뒷말을 고민하는 듯 했다. 그는 유우키에게 끝까지 상냥했다. 세나는 그것이 제가 서툴게 휘둘렀던 사랑이라는 이름의 오만을 사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 듯 했다. 어쩌면, 풋내 나는 첫사랑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세나의 속을 전혀 모를 것 같았다. 유메노사키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유우키는 세나에게 수많은 연락을 했다. 잘 지냈어요, 부터 보고 싶어요-까지. 가끔은 ‘형’이라는 말을 섞어 넣기도 했다.
놀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더 다가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애매한 줄다리기였다. 유우키는 그를 사랑해야 할 당위성을 찾고 있었다. 사랑해야만 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다면 오랜 방황의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애매하다’는 말을 붙여서 설명해야만 하는 마음이었다. 가끔은 그의 생각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였고, 가끔은 일 분 일 초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의 마음은 봄 날씨와 같았다.
나는, 하고 세나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오랜 정리를 끝낸 것 같았다.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머리카락을 올리고, 교복 블레이져 대신 다른 옷들을 걸치고 있는 세나는 스무 살이었다. 어른스럽게 행동하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스물’이란 졸업과 동시에 놓아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던 마음을 마주하기엔 모자라나 나이였다. 나는, 세나의 목소리는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유우 군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세나는 숨을 들이켰다가, 깊게 내쉬었다. 그는 목 끝까지 올려 맸던 넥타이를 내렸다. 괜히 속이 답답한 듯 굴고 있었다. 마음에 파도가 치는 듯 했다. 그 파랑이 어디까지 밀려올지 유우키는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왜 왔어? 세나가 물었다. 그는 유우키가 선을 과하게 넘고 있다고 충고했다. 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지 않느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세나는 최대한 유들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누구보다도 폭발하는 감정을, 그저 담담하게 늘어놓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뿐인 일이었다. 나는 왜 네가 나에게 그렇게 문자를 해대는지도 모르겠어. 눈에서 멀어지니까 이제야 안심 한 거니? 하지만 ‘형’을 대하는 태도도 아니잖아, 어쭙잖은 상냥함은 상처밖에 안 된다는 거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유우 군이잖아. 세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사근사근하고자 했다. 입 안에 물기가 없어 목이 따끔거렸다.
무언가 변명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그것이 세나에게 좋은 대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우키는 제 손가락을 건드렸다. 그가 졸업하고 난 다음, 빈 자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이즈미 씨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전히 고등학생 때처럼, 있어줬으면 좋겠다. ‘사랑’인 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우키가 밤을 지새우며 생각했던 모든 어리광을 담은 말들이 그의 혀 위로 올라갔다가, 목구멍에 상처를 내며 흘러갔다. 침묵과 함께 그 과정을 반복한 지 몇 분이 흘렀고, 유우키가 내놓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전철이 끊겼어요.”
“응.”
“잘 데가 없었고.”
“응”
“그래서 이즈미 씨가 생각났어요.”
그 뿐이에요. 이 근처에서, 있는 건, 이즈미 씨 밖에 없었고. 유우키는 천천히 대답했다. 세나는 할 말이 있는 듯, 마주친 시선을 돌렸다. 목이 답답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만이야. 더 이상 오지 말아줘. 한참을 고민한 다음 그가 꺼낸 말은 다음과 같았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먹었어? 그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그런 행동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왜, 어째서 나쁜지는 유우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세나의 앞에 서면 ‘행동’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원래’ 자신의 성격이라면 하지 않았을 것들을 하게 되었다. ‘유우키 마코토’라는 사람의 기준점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꼭 회전축이 엉망이 된 인공위성 같았다. 궤도를 잃어버린 채로 우주를 떠도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조차 할 수 없었다. 저를 이루고 있는 바닥이 천천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생각을 하고 움직이면 후회를 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 행동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유우키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최악이라는 대단원을 향한 여정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내부에서부터 단단히 엉켜버린 실타래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술기운에 목이 말랐다. 갈증이 났다. 말라져 갈라진 땅처럼,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무언가 되고 싶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잡아줬으면 좋겠다. 손을 잡고, 이끌어주길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제 감정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방 좁으니까, 내가 소파에서 잘게.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가를 닦았다. 한 방울 씩 그의 눈물은 손등을 적셨다. 왜 우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우키는 손을 뻗었다. 제 손아귀에 잡힌 세나의 손목은 가느다랐다. 스무살과 열아홉살의 사이에 있는 벽은 너무나도 깊고 견고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런 사이가 아니었음으로. 그러게 될 수 없었음으로. 흐린 날의 바다처럼 요동치는 마음을 어떻게 가라앉힐 수 있을지 몰라, 유우키는 그를 끌어 당겼다. 이즈미 씨, 라고 부르자 세나는 엉망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유우 군의 형이지?”
세나가 물었다. 마지막 관계 정립을 위한 말이었다. 유우키는 그 말에 대한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꿈’이라고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 때와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유우키는 그 때의 행동을 체험하고 있었다. 모든 결말을 아는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비극적이다. 필름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이상한 부분도 싫은 부분도 어쩔 수 없이 재생 될 수밖에 없다.
세나는 잡힌 손을 놓지 않았다. 가만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고여 있는 연못처럼 있을 뿐이다. 그의 그 애매한 행동이 유우키에게는 희망이었다. 조금만 더 당기고, 다가와 준다면 서로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로의 세상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유우키는 꿈속에서 자신이 내린 결말에 절망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과거의 자신이 예전에 내린 결론을 마주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게 우물에 갇힌 개구리의 생각이었다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세계는 비틀린 채로 ‘공전’했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위성일 수밖에 없는 관계는 위태롭다. 옷 가져다줄게. 세나는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그는 유우키의 손목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좁은 방, 미닫이문으로 연결 된 작은 공간을 넘어, 세나는 제 옷을 가져다 줬다. 유메노사키의 체육복이었다.
유우키는 세나의 저지를 걸치고, 바지를 갈아입었다. 유우키는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멀리서 세나가 간식거리를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갈 썰고, 만드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는 그것을 한참동안 듣고 있었다. 뒤풀이가 있었고, 술을 마셨다. 그렇다면 배는 가득 차 있어야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그는 그저 걸신들린 것처럼 허기가 졌다.
부엌에서 고소한 향이 났다. 그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준비하고 있었다. 뒤늦게서야 나 밥 먹었어요, 라고 뒤늦게 변명처럼 말하자, 세나는 ‘유우키가 알던 세나’처럼 왜 사람을 괜히 고생을 시키냐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듣기 싫은 소리의 끝은 ‘아이돌 그만 둬.’라는 목소리였다. 유우키는 비로소 궤도가 안정되었다고 느꼈다. 그 목소리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 날, 부른 배에 파스타를 우겨넣었다. 크림 파스타였다. 고소한 크림이 입 안에 따듯하게 맴돌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다음 「Once」를 봤다. 남자가 노래를 부를 때, 피아노를 치던 여자를 보면서 세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옛날 로맨스 영화, 정말 싫으니까- 라는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둘은 새벽을 지새웠다. 「Falling Slowly」가 흐를 때부터 그는 유우키의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손을 잡았다. 저항하지 않았다. 놓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Miluju tebe, 하고 화면 속 여자가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화면 속 남자가 말했다. 그 장면에서 세나는 텔레비전의 화면을 껐다. 너무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였다. 그는 리모콘을 소파 깊숙이 넣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잘 거니까 들어가. 세나는 차갑게 말했다.
위화감이 번졌다. 그는 그들의 서사를 알려주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다른 언어를 들려주기 싫은 것 같았다. 그는 거실을 정리했다. 테이블 위에 어지러져 있던 물건들이 열을 맞추어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늦었어, 자, 라는 말을 세나는 주문처럼 반복했다. 유우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에서 여자와 남자가 부르던 노랫소리가 내내 울렸다. 유우키는 다시 여자가 한 말에 대해 물었다.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감추고 있으니 알고 싶었다. 치기어린 오기였다. 세나는 언제나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제가 품은 감정을, 자기가 안고 있는 생각을, 겪어왔던 전사를, 저 혼자서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런 행동에 샘이 났다. 하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따.
“무슨 뜻이에요?”
“영화 끝날 때 까지 안 나와. 나 이런 거 싫어해.”
“무슨 말인데요.”
“내가 너한테 듣고 싶은 말.”
완전 싫어해, 정도.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하품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잡을 수도 없었다. 유우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까지만, 같이 가 줘요, 라는 어리광을 부렸다. 침대에 눕고 나서는 내가 잘 때 까지만 기다려줘요, 라고 말했다. 세나는 순순히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세나를 보기 위해 눈을 돌리면, 문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 쓰다듬어 줘요, 라는 말에 세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무드등을 켰다. 시야가, 번지는 세나의 모습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천천히 유우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무슨 말을 할 법도 했지만, 아무런 목소리도 내질 않았다. 그의 손이 유우키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그대로 세나의 표정을 보는 건 매우 힘든 일이라, 유우키는 포스터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멀게 보이는 포스터는 웃고 있었다. 모든 가구, 모든 기물이 무채색인 공간에서 홀로 색이 있는 것이었다. 유우키는 무드 등을 껐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암전에 휘말렸다. 이제 자. 세나는 명령조로 말했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자는 척을 했다. 세나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숨을 고르게 쉬었다. 잡은 손에 힘을 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멀어지지 않았다. 다만, 다만,
울 뿐이었다.
그는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욱, 욱, 하며 목에서 막힌 소리를 내다가, 이내 토해내듯 울었다. 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눈물을 닦는지 피부가 거칠게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고장난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유우키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유우키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있지, 유우 군, ‘형’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잠든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듯 구는 행동이 짜증났다. 세나가 흘리는 눈물이 볼에 닿아 제 것처럼 흘렀다. 세나가 히끅이는 소리는 그들의 세상을 비오는 날처럼 만들었다. 왜 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우키는 잡은 손을 잡아 당겼다. 세나의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입술을 마주댔다. 변명이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유우 군, 이라는 호칭 대신 그가 부르는 제 이름이 듣고 싶었다. 떨어진 입술 새로, 유우키는 이즈미 씨,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 인가요? 라고 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말을 듣는다면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릴 것 같아 서둘러 입을 막았다. 숨과 숨이 얽혔다. 아스라이 흩어지는 감정의 편린들을 두 사람 다, 움켜쥘 수 없었다. 거듭하며 갈구하는 손길에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을 뜬 다음 날, 세나는 자리에 없었다. 걷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것은 볕뿐이었다. 전날 있었던 행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기억에 남은 일이었다. 기다렸지만 세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 사람이 있기엔 충분하지만 두 사람이 들어있기엔 버거운 집은 황량하고 외롭기만 했다.
시계 바늘이 몇 번이나 돌았을까. 유우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세나가 돌아오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 되긴 싫잖아, 그는 울면서 말했다. 밤의 기억은 꿈과 섞여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관계를 지속하는 내내 세나가 울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모든 걸 불안해했고, 의심했다.
그는, 울었다. 그가, 울었다. 이는 유우키 마코토의 세계에서 굉장히 큰일이었지만 동시에 사소한 일이기도 했다. 유우키는 ‘이날 밤’이 그들에게 무언가의 스위치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진한 착각이었지만, 어린 마음에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 잘한 건 없는 일이었다. 둘 다 어렸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라도 애매한 구석이 없었더라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었을까, 유우키는 가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묻곤 했다. 하지만 낼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유우키는 눈을 떴다. ‘그 날’의 꿈이었다.
‘악몽’이라기에는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치부하기에는 그림자처럼 묵직하게 번져오는 꿈이었다. 나른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딘가 잊어버린 게 있는 것처럼 찝찝한 아침이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침대 시트를 더듬었다. 저가 만들어 낸 온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손 안에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기 전에는 주저했다. 그가 자신을 놓고 도망갈까봐. 간신히 좁혀진 거리를 박차고 사라질까봐. 유우키는 천천히 문에 제 귀를 댔다. 나무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누구와 누구의 이야기 소리인 것 같아, 그는 안심했다.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나이츠의 누군가일까, 생각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거실에는 세나만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으로 특선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유우키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인사했다. ‘어른’인 세나는 상냥하게 인사했다. 밝게 웃는 얼굴에 잡힌 그늘은 없었다. 손을 흔들면서 웃던 그는 소파 쿠션을 끌어안고서,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우키는 카메라 렌즈를 응시했다. 카메라엔 붉은 등이 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세나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옛날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집중하고 있는 지, 그는 쿠션을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유우키는 조심스럽게 세나의 옆에 앉았다. 데자뷰가 느껴졌다. 익히 알고 있는 영화였다. 원스, 라고 말하자 조용히 하라는 듯, 세나는 그의 입술에 제 검지손가락을 얹었다. 유우키는 잠자코 그가 하는 데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간 텔레비전의 화면에서는 예전에 봤었던 장면이 흐르고 있었다.
―Miluju tebe
화면 안의 여자가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화면 속의 남자가 대답했다.
세나는 그 장면을 응시하다가,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는 그 다음 장면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때’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유우키는 꺼진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 뒤가 궁금해요, 라고 말했다. 세나는 쥔 리모콘을 건네주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라도 되는 양, 꼭 쥔 손가락 마디를 보다가 유우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일 해야지,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우키의 미간을 톡톡 건드렸다. 그 때와 같이, 서릿발처럼 보이는 표정이었다.
보고 싶으면 나중에 찾아서 봐.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폈다. 그는 유우키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유우키는 손을 뻗어, 그의 잿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유우키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찾아보는 건 의미가 없어요, 라고 말하자 세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약간의 정적이 그들 사이에 한겨울 날의 눈처럼 내렸다.
“Miluju tebe”
유우키는 그의 턱을 간질이며 말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겨울날의 따듯한 햇살이 뻗어 들어왔다. 다시 한 번 그 말을 발음하자 세나는 놀란 표정을 했다. 유우키를 바라보는 시선이 떨렸다. 세나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에 유우키는 입술을 입 안으로 숨기다가 입을 열었다.
그 날, 내가 말해줬으면 했다면서요, 뜻은 잘 모르지만. 유우키는 볼을 긁으며 말했다. ‘싫어해’라는 뜻이잖아요? 라고 묻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해’라는 말을 하는 건 좀 내키지 않았지만, 과거의 일을 말해서라도 그를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유우키 마코토와 세나 이즈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왜, 내가 ‘싫어해’라고 말해줬으면 싶었어요?”
“상관없잖아 그런 거.”
세나는 퉁명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는 다리를 모아 끌어안았다. 유우키는 그의 둥그런 정수리를 보다가, ‘싫어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듣고 싶어하는 마음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의 사랑은 직선적이었기에, 긴 길을 돌아가듯 에둘러 가는 세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듣고 싶었어요? 라고 재차 묻자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다가 살포시 웃었다. 모든 ‘세나 이즈미’가 좋았다. 사소한 행동들마저도 설탕물이 발린 것처럼 달았다. 그의 지친 구석을 진작 이해했어야 했는데. 포기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줬어야 했는데. 유우키는 그의 닫힌 문 앞에 섰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려 했다. 유우키는 심호흡을 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카메라 렌즈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녹화중’이라고 알려주는 붉은 불빛에 그는 안심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이 한겨울 밤의 꿈이며, 이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에 기대어서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가 연기라고 생각해도 좋았지만, 유우키는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좋아해요.”
조금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유우키는 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 땅처럼 굳은 표정을 유지하다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정하려는 듯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유우키는 손을 뻗어, 그의 표정을 잡는 카메라 렌즈를 가렸다. 그는 넘치기 직전의 바다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이라는 이름의 바다에서는 파랑이 치고 있을 것이었다.
“내 ‘좋아한다’는 말이죠, 사랑한다-의 좋아한다에요.”
나는 이즈미 씨를 좋아해요. 유우키는 부연설명을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 세나가 가장 바라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한계였다. 하루하루, 카메라 앞에서 ‘사랑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도 힘들었다. 모든 세상이 그를 향해 돌았으면 싶었다, 유우키는 정중하게 허락을 구했다. 세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둘은 서로 다른 주파수로 노래하는 고래였다. 유우키는 저의 목소리가 그의 채널을 통과해, 어떠한 의미로 정착하길 바랐다. 그는 다른 고래들이 들어주지 않아도 제 목소리를 바다에 퍼트리는 고래처럼,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언젠가 메시지가 닿을 거라고 믿으면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두근거림에 호흡하는 방법을 잊은 듯, 세나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다가, 대답 기다릴게요- 하고 말을 건넸다.
열여덟에서 셀 수 없는 발걸음을 걸어왔다. 예전의 자신이 하지 않을 말들을 하는 자신이 어색했다. 그는 자신의 이 변화를 세나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 세나의 손을 제 손에 겹쳐 쥐었다. 그는 불안함을 애써 목 너머로 넘겼다. 눈에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서툴고, 멋없는 고백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준비 되면, 말해줘요. 유우키는 애써 어른처럼 말했다. 세나는 아이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다고도 생각하면서도, 그 점이 뭇내 서운했다. 유우키는 세나의 손톱을 제 엄지로 가볍게 쓸었다.
완전 짜증나, 세나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너 주제에, 진짜, 짜증나. 세나는 반복 해 외우려는 듯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유우키에게 작은 생채기를 내며 박혔다. 하지만 유우키는 그의 행동이나 말소리에게 어떠한 이의도 재기하지 않았다. 그의 오랜 습관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우키는 카메라의 전원 버튼을 껐다.
낭패였고, 실패였다. 이는 패배이기도 했다. 붉은 버튼이 사라지고 그들의 연극에는 잠시 커튼이 커졌다. 암전이었다. 커튼 뒤의 배우가 다음 막을 위해 감정을 가다듬는 것처럼, 유우키는 치받쳐 오르는 제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티나지 않게, 깊게 숨을 쉴 때 마다 세나가 신경 쓰였다. 세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단단했다. 녹아내리지 않을 것 같은 그 얼굴과, 방 안으로 사라져버리는 뒷모습을 보다가 유우키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세나 이즈미는 울 기 전, 표정을 굳히는 버릇이 있었다.
***
미션이 나오는 날은 분주하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감긴 눈두덩이에 쉐도우가 발리는 느낌이 났다. 조금 연하게 해 주세요, 라는 세나의 오더에 네, 하는 상냥한 대답이 따라왔다. 집 안에 사람이 가득 차는 광경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카메라만 돌아갈 때가 편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말소리에 따라 눈을 살며시 떴다. 거실과 침실에 조명과, 카메라맨들이 서 있었다.
그래도, 메이크업을 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뭔가 ‘일’을 하러 들어간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사심이 섞일 듯 말 듯한 무인 촬영보다는, ‘일’이며 ‘연극’이라고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는 촬영이 좋았다. 이거, 방송 봤어요? 세나가 물었다. 세나의 눈꼬리에 아이섀도우를 바르던 스탭은 음, 하고 망설이다가 예고편은 봤다고 대답했다. 그는 유우키 씨가 잘 해주는 것 같다면서 꺄르르 웃었다.
“잘 해주는 것 같아요?”
“네, 저번 주인가? 유우키 씨가 크림 파스타 만드는 영상 떴는데.”
“그래요?”
“‘남편’의 비즈니스 안 찾아보나요?”
“딱히 뭐, 항상 보니까요.”
세나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스탭은 익숙하다는 듯 꺄르르 웃다가, 유메노사키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설레게 다가갈 거라는 사족을 달았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이었지만 세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것이 부연설명을 하라는 요구로 들렸는지 그녀는 음- 하고 잠시 말을 망설였다. 그 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
학창 시절의 인연이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난 느낌이라 두근거리죠? 둘 다 서로에 대해서 언급 전혀 없었잖아요. 세나 씨, 졸업하자마자 이상형이 녹색 눈이 예쁜 사람에서, ‘망설이지 않는 사람’, ‘사람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 ‘장난이 적은 사람’ 같은 걸로 바뀌어버리고, 유우키 씨도 딱히 세나 씨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없었고. 그녀는 사근사근하게 말하면서 웃었다.
“내 팬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유우 군 팬이었죠?”
“지금은 안 좋아해요?”
제 눈두덩에 브러시가 스치는 느낌이 없자, 세나는 눈을 뜨고 질문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렌즈를 계속 의식하고 있자, 그녀 또한 그곳을 바라보다가 호호 웃으면서 지금은 유부남이잖아요, 하고 대답했다. 스태프까지 참가하는 거대한 연극이었다. 세나는 엄지로 약지에 낀 반지를 굴렸다. 촬영 때만 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촬영이 연극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옷에 마이크를 달았다. 허리춤에 보이지 않게 마이크 팩을 차고 벙벙한 니트로 가렸다. 세나는 제 머리카락을 세팅하는 모습을 응시했다. 거울 안의 남자는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오늘 아침을 관통했던 사건 때문이었다. 식어버리기 전의 잿빛 머리카락이 가볍게 움직였다. 거울 속, 제 어깨 너머에서 유우키가 보였다. 그는 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빨랐다면 괜찮았을까- 세나는 멍청한 가정을 했다.
그는 유우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뒤에서 저를 보고 있던 유우키는 약간의 망설임을 담았다가- 손을 들어, 제 머리위로 흔들었다. 저 ‘틈’이나 ‘사이’가 싫었다. 그 간격이 잔인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세나는 제 연극이 무사히 커튼콜로 다가가길 바랐다. 같은 집에서, 같이 있다고 한들 결국 마음이 오가지는 않는다. 오늘의 그 멍청한 고백 또한 연기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유우 군’ 치고는 ‘선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우키 치고는 괜찮았다. 그래, 딱 그정도 감상이 어울렸다. 세나는 자꾸만 다가가려는 제 마음의 싹을 잘라냈다. 어린왕자가 바오밥나무의 씨앗을 매일 솎아내는 것처럼, 그는 매일매일 그를 한 걸음씩 싫어하기로 했다. 세나는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대 위에서만 통하는 규칙을 떠올렸다.
관객은 배우의 말과 행동이 모두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무대 위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전부 거짓이다. 또한 커튼콜이 시작됨과 동시에 무대 위에서 썼던 시간들은 0으로 돌아가며, 그들 사이에 쌓인 서사 또한 다음 회차 공연에서는 리셋되고 만다. 세나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이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 또한 ‘연극’에 포함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눈꺼풀에 사랑의 묘약을 바르는 상상을 했다.
모든 것은 거짓, 한겨울 밤의 꿈. 유우키의 좋아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애는 예전부터 어떤 상황에 몰입하는 데 능숙했다. 로맨스 영화를 보면 사랑하고 싶어 했고, 첩보물을 보면 저가 제임스 본드라도 된 것 마냥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이것 또한 감화된 것뿐이었다. 세나에게 조연출이 다가왔다. 그는 그에게 짧게 인사 한 다음, 이번에 촬영하게 될 장면에 대해 물었다.
“둘이서 살면서 불편한 점이 있잖아요?”
“딱히 그런 건 못 느끼겠는데. 유우 군에게 잘 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서로 결혼하면서 지켜 줬음 싶은 약속 같은 걸 정하는 거예요. 그런 거 한둘쯤은 있잖아요. 가령 빨래바구니에 세탁물을 안 넣는다던가.”
조연출은 그렇게 말하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세나는 따라 웃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피부에 닿는 스펀지의 감촉이 부드럽기만 했다. 뒤에서 유우키가 인터뷰를 따고 있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주 예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동모델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세나 또한 그 때를 회상했다.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추억은 흩어지기 때문에, 소중하게 가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세나는 ‘그 날’ 이후 새장의 문을 열었다.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회상할 수 있는 모든 트리거들을 치워버렸다. 그런 식으로 억지로 지워 간 추억들임에도 불구하고 잡초처럼 깊게 박혀있는 것이 있었다. ‘처음’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것들은 세나의 안에서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그는 번져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유우키는 그 시절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인형 같은 시간 속에서, 손을 내밀어줬던 이즈미가 마냥 좋다는 말에, 세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볼에 스펀지를 찍고 있던 스태프가 고개를 들어 달라 요청했다. 잠시만요, 라는 제스처를 담고 그는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촬영은 어디서? 침실에도 카메라 다시던데.”
“침대에서 두런두런, 손을 잡고 이야길 하는 모습을 딸 거예요.”
“하기 싫다면?”
세나가 물었다. 조연출은 클라이맥스 정도는 지켜줄 거라고 믿는다고 대답했다. 짜고 치는 도박판에서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라고 세나가 넋두리처럼 말하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연극인 거잖아요, 라고 말하는 조연출의 목소리는 유달리 무겁게 다가왔다. 생각만 하는 것과 남의 목소리로 듣는 건 굉장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제 손톱만을 매만졌다. 눈을 감을 때 마다, 좋아한다고 말하던 유우키가 눈물에 닿은 잉크처럼 번져왔다.
목욕을 하고 싶었다.
목이 잠길 정도로 물을 받아서, 좋아하는 향의 입욕제를 풀고 싶었다. 훈김에 손으로 가볍게 부채질을 하면, 따듯하게 피어오르는 온기와 함께 진한 겨울처럼 싸한 향이 번질 것이다. 발끝부터 천천히 미끄러지듯 욕조에 담기면,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습기가 귓가에 닿을 것이며, 귀를 먹먹하게 만들어서 온 세상이 ‘세나 이즈미’만 남기고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자아낼 것이다.
물에 닿은 근육은 천천히 풀어진다. 말랑말랑하고 노곤노곤한 상태가 되면, 그 때부터 호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곳에서 머리끝까지 담아, 따듯한 물이 두피를 적시고 지나가기를 몇 번 반복하면 괜찮아 질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서 실연을 겪은 여주인공은 언제나 목욕을 한다. 세나는 그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입은 상처를 오롯이 잊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상처에 물과 입욕제가 스며드는 시간은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 망각의 시간을 계산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욕조에 물이 받아지는 것을 가만히 보는 시간과, 몸을 담그는 시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훈김만이 들어찬 머릿속을 데우며 햇살을 받는 시간, 점심 메뉴를 고민하면서 발과 손을 깨끗이 닦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몸에 바디로션을 바르는 시간 정도를 더하면 된다.
하지만 그 일시적인 망각 후에는,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어진다는 것을 세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수락하지 말 걸.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메이크업 하고 들어갈 수는 없는데, 라고 망설이듯 말하자, 조연출은 오늘은 ‘유우키 데이’라는 설정이라 그가 마음대로 끌고 간다는 느낌으로 연기를 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세나는 다시 습기 찬 목욕탕을 생각했다.
이럴 거라면 외롭지 말 걸. 세나는 카메라 앞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을 꼭꼭 숨기면서, 마이크를 톡톡 건드렸다. 목소리에 목줄을 채우고, 행동을 만들어 낸다. 지금부터는 유우키를 사랑할 수 있다. 그는 그 시간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혐오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고 있던 유우키가 환한 얼굴로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추억을 모두 옥상에서 떨어트리고, 저도 그 아래로 낙하하고 싶었다. 제 날갯죽지에서 날개가 돋지 않을 것을 아는 추락은 언제나 비참하다. 세나는 유우키의 사랑이 마치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날개와 같다고 생각했다. 태양에 가까워지면 사라져버리는 그 가짜 애정에 대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세나는 큐시트를 받아 인터뷰 질문에 대해 확인했다.
유우키 마코토를 세나 이즈미가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나는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읽었다. 무대 위에 올라 간, ‘세나 이즈미’ 역을 공연하고 있는 배우가 목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진심은 뒤로, ‘사랑’이라는 거짓은 가면으로. 유리구두를 깨트린 신데렐라는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세나는 제 발 주변에 흩어진 깨진 유리의 환상들을 밟으며, 둘러 댈 말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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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커 | 2016. 2. 28. 23:06
*'망애증후군'을 살짝 변형했습니다. 추억을 기억하면 모든 사랑이 기억났다가, 다시 잊게 된다는 설정을 더했습니다.
* 다른 설정은 망애증후군과 같습니다.
* 앙스타 전력의 '발자국'이라는 키워드를 받아서 썼습니다 :)
사망 당시, 소지하고 있던 서간의 일부, 발췌.
너를 사랑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나는 비굴 속에 끼어들어
알지도 못하는 말을 쓴다
(슬픈 날, 신재순)
***
기대, 기다림. 사랑의 괴로움, 허무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사랑의 쓴맛.
제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저의 모든 것을 드릴게요.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비록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기억하는 날 보다 잊어버리는 날이 더 많았죠. 우리 사이는. 그래서 가슴에다 가장 가까운 곳에다 이름을 적을까, 하고 생각했던 날이 있었어요. 눈밭에 발자국을 찍는 것 같은 일이었죠. 솔직히 말해서 문신 무서우니까, 그리고 아무리 잊어버린다고 해도 ‘무서워하는 문신’을 할 정도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줄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걸 하려고 갈까, 하면서 길을 옮기는 순간순간마다 내 발자국 위에는 눈이 쌓이곤 했어요. 그냥, 그랬어요.
변명인 것 같지만 잊어버릴 것 같아서 적어요. 이걸 보내는 건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언제나 이즈미 씨에게 편지를 써요. 열통을 쓴다면 아홉 통은 보내러 가는 순간 잊어버려요. 그리고 ‘함부로 열지 말 것’이라고 정해놓은 규칙을 어기고 열어보고는, 왜 그걸 이즈미 씨에게 썼을까,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하면서 편지를 구겨서 버려버리죠. 열통을 써도 한통 밖에 가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이것도 갈까, 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요. 잉크가 부디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편지지 깨끗하게 쓰는 거 좋아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연필로 쓰고 싶었어요. 약하게 써서 지우면 좋으니까. 하지만 심이 부러지면 그걸 깎는 순간 잃어버릴 것 같았어요. 오늘은 그래도, 편지를 쓸 순 있어서 좋네요. ‘말할 수 없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굳이 적지 않을 게요. 그 말을 적는 것만으로도 없어질 것 같아서 무서워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부터 적고 있어요. 내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이즈미 씨의 이름을 문신하고 싶었던 거. 나는 뾰족한 걸 무서워 한다는 거. 하지만 그걸 하러 갈 때 마다 잊어버려서, 내 몸에는 이즈미 씨의 이름이 아닌 다른 말들이 늘어났다는 거. 이걸 알려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죠? 이게 부디 닿길 바라요. 나는 내가 걸린 이 병이 차라리 신체적으로 아픈 거라면 좋겠다고 매일 밤을 생각해요. 그리고 잊어버려요.
이즈미 씨에 대한 나의 기억은, 눈이 내리고 있는 상황에, 눈밭에 찍은 발자국 같아요. 그 대로 굳어버린다는 보장도 없죠. 그 위에는 하얀 눈이 가루처럼 내려 내 발자국을 없앨 거에요. ‘말할 수 없는 말’을 할 때 마다 나는 끊어진 눈밭 위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어요. 뒤를 돌아도 내 발자국이 없고, 앞을 봐도 걸어나갈 발자국이 없죠. 아이스크림 통에서 스쿱으로 덜어내 콘에 얹은 아이스크림처럼,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만 어디 있었는 지는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곤 해요.
나는 이 편지를 짧게 써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쓰고 싶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오랫동안 잊어버리지 않은 건 처음이라 글씨가 엉망이에요. 나는 내가 눈밭에 발자국 없이 표류할 때 마다 이런 생각을 해요. 세나 이즈미? 내 방에 세나 이즈미의 사진이 왜 이렇게 많지? 나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어. 기쁜 얼굴을 하네. 우리 키스하는 사진이 있잖아, 오, 이벤트에 당첨되어 놓고 잊어버리거나 합성 사진일 것 같아. 우리가 이렇게 친밀한 관계일 리 없잖아. 나는 그냥 예전에 아이돌을 했던 평범한 사람이고, 그렇게 반짝이는 사람이 나랑 있었다니, 와 절대로 모르겠어. 영문을 모르겠어. 영문을 모르겠어.
그리고 나는 나와 이즈미 씨의 흔적을 상자에 담아요. 분명 당신이 찍었을-남에게 부탁해서 찍었던, 아니면 타이머를 설정했던, 손으로 들고 찍었던 간에-나와 당신의 추억들을 보기 싫은 것처럼 정리해요. 이즈미 씨와 나 사이의 맥락을 모르고 있으니까 버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왜 가지고 있을까 하고 생각은 해보죠. 그리고 이즈미 씨가 나에게 고백하는 상상을 해요. 발칙하게도. 뭐, 그런 생각 할 수 있잖아요, 어디서부터 자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게이고, 이즈미 씨와 키스한 사진이 있다.
그러면, 그냥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거잖아. 저 사람이 나를, 「 」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는 매번 거절해요. 다음 조각을 찾을 때 까지. 당신이 내게 찍어둔 발자국을 찾을 때 까지. 매일 「 」하는 상상을 하는데, 그게 이뤄지는 상상은 할 수 없어요. 내 마음, 알겠어요? 나에게 남겨둔 흔적을 찾을 때 마다 나는 모든 걸 기억하는데, 그 기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하지만 울 수 없어요. 이 편지에서 조차 ‘말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없잖아. 내가 빈칸에 담은 마음을 생각 해 줘요.
이 병이 완치 된 사람들의 모임에 대한, 수기를 읽었어요. 이상하게도 이즈미 씨를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볼 때와, 그러지 않을 때 이 책에 대한 생각이 휙휙 바뀌고 있어요. ‘말할 수 없는 상태’일 때에는 빨간 색으로 메모를 남겨요. 빨간 발자국들은 이렇게 이야길 하죠. ‘나도 한 번이라도 「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할 수 없잖아. 하지만 이즈미 씨가 죽는 건 싫어. 정말 싫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잊었을 때는 이렇게 말하고 있죠.
…
…
아냐, 이건 말 안할래요. 응, ‘여백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에겐 시간이 모자라죠. 나는 이 증후군에 대해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한다고 생각해요. 말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잊어버리는 건 너무 하잖아, 이즈미 씨도 힘들겠지만, 기억하는 나도 힘들어요. 아니, 어리광 부릴 수밖에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나는, 진짜 나는,
아, 이런 감정으로 더 이어 써야한다는 게 쓸 수 밖에 없다는게 가혹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즈미 씨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해야 하는 말이 많아. 남기고 싶은 발자국이 많아. 이즈미 씨의 눈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내가 한 말들로, 기적처럼 보낼 수 있던 편지들로 엉망이 됐겠죠? 날 아직도 사랑하고 있겠죠? 가끔 차로 와서 내 방을 살펴보는 걸 알아요. 눈을 마주치면서 웃고 다시 돌아가는 것도 알아.
나는 당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매번 분노하고, 슬퍼하겠죠. 나를 새장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겠죠. 이사라 군에게 이 사실에 대해서 털어놓으면서 (몇 번째인지 이사라 군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거예요) 울겠죠. 쓸모없는 눈물인줄도 모르면서. 당신과 했던 일들이 스위치처럼 기억 나는 날이 있어요. 기억하자마자 서랍으로 가서 다시 사진을 걸어놔요. 그리고 박스 가장 안쪽에 만들어놨던 노트에다 기록해요. 우리의 추억에 대해서, 그 키워드에 대해서. 하지만 나는 내 노트 앞장, 그 곳에 적혀있던 발자국들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해요.
잊어버리고 지워져버릴 발자국들. 나의 「 」들. 나는 올 수 없는 계절에 위치하는 게 아닐까. 나는 언젠가 내가 안도할 수 있길 바라요. 당신을 싫어함에 안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길 바라. 그건, 아직,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그것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 아직 지치지 않았다는 거잖아. 지치지 않아서 고마워요, 나도 힘내고 있어요. 언제나 「 」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우리의 시간, 그 위를 같이 걸어왔음을 잊지 말기로 해요.
나는, 잊어버리겠지만.
아, 오늘 나에게 할애 된 시간을 미리 알고 싶어요. 모래시계처럼, 하지만 시계 안쪽에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을 모르고 있는 거겠죠. 나는 지금도 잊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부디 이 편지가 그대에게 닿기를. 저번에 선물해줬던 편지봉투 고마워요. 주소가 잔뜩 적힌 편지봉투들 덕분에, 한 통은 이즈미 씨에게 부담 없이 닿고 있겠죠. 아, 맞아 그리고 따질 게 있어요. 사쿠마 군이 해 준 이야기에요.
나에게 마지막으로 ‘말할 수 없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고 한다면서요. 그렇지만 그건 이즈미 씨가 끝나지 않고서는 할수 없잖아요. 내가 보낸 공백들에 대해서 생각해 줘요, 그 곳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적었다고 생각해줘요. 사쿠마 군은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이번에 기억한 키워드와 관련 되어 있답니다. 아네모네, 아네모네를 덮어 달라고 했다면서요. 나에게 꽃의 언어에 대해서 알려줬던 건 이즈미 씨에요. 매번, 매일 아침 나에게 아네모네를 선물하고 있는 것도 이즈미 씨인가요?
그렇다면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이즈미 씨겠죠. 트릭스타의 대기실로 가장 처음 보낸 꽃이 아네모네였으니까. 아아, 기억할 수 있어서 행복하지만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불선은 집어 치우고 하고 싶은 말을 할게요. 우리, 의심하지 않기로 해요. 지치지 않기로 해요. 할 말이 많지만 더 적을 수 없어요. 잊어버릴까봐 겁나. 빈 편지지 한 장을 덧대어 보냅니다. 그 곳에 들어갈, 들어갈 수 없는 나의 말들을 생각 해 줘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로 적을 수 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급히 봉하여 보냅니다. 부디 당신에게 닿을 수 있길. 나는 우리의 발자국이 어디에선가 맞닿을 거라 믿어요. 그것이 아네모네 같은 끝이 아니길 바라요. 그렇죠? 그렇게 생각하죠? 이사라 군이 색이 있는 립밤을 선물했어요. 종이에 찍어보니 꽤나 좋은 꼴이길래 찍어 보내요. 미안해요. 언제나, 「 」해요.
― ‘이즈미 씨’ ' ' 유우키 마코토
― 생략 된 접속사는 이즈미 씨가 익히 알고 있는 ‘그것’ 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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