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 | 2016. 3. 31. 01:39
봄비 내리는 밤
***
유우키 마코토는, 언젠가 세나 이즈미가 게스트로 출연한 라디오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시험기간, 졸음을 쫓기 위해서였다. 우연히 잡은 주파수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말로 소름이 돋아, 잠이 확 달아났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계속 좇게 되는 바람에, 공부 효율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채널로 이동하려고 해도 여의치 않았다. 그 날 새벽의 라디오는 정치, 클래식, 종교방송이 주류였다. 비올라인지, 바이올린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음률을 들으며 꾸벅꾸벅 졸아대는 것 보다는, 그나마 익숙한 가요가 나오는 라디오가 좋겠다싶어, 유우키는 그 날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세나가 나오는 라디오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토크 주제는 ‘연애의 로망’이었다. 라디오 DJ는 공식적으로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린 아이돌을 데리고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민망스럽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의 풋사랑에 대해서 캐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노골적이게 해석될 수 있는 질문이 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 로망을 꿋꿋하게 말했다. 한 번도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고, 영화나 소설에서 봤던 것들이라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비오는 날 연인이 데리러 오면서, 가로등 아래에서 키스를 해 주었으면 해요. 세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두근거림을 불러왔다. 소년이라 그런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도 볼이 붉어져 있네~ 라고 너스레를 떠는 DJ때문일지도 모른다. 유우키 마코토는 그의 그 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로망이라 조금 놀랐다. 그는 조금 더 과격한 로망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평범하게 들리는 그 ‘비오는 날 우산 아래에서 키스하고 싶어요’ 라는 소망은, 세나 이즈미라는 남자에게는 너무 수수하고 소박했다. 그래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 날은 마침 비가 오는 날이었다.
새벽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라는 듯,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DJ는 세나에게, 왜 그런 로망을 갖게 된 건지 물었다. 여자친구가 비랑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냐는 농담이 따라왔다. 세나는 목 끝으로 작게 웃었다. 낮은 미성이 간질간질하게 들렸다. 유우키는 그의 목소리를 달게 느끼는 저를 어색하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세나는 별 이유가 없다는 듯 음, 하고 고민하다가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가장 적당하고 쓸만한 대답이었다. 아무것도 캐내지 못한 DJ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
비가 내리는 저녁이었다. 유우키 마코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넣어놓은 메시지 옆에 ‘읽음’ 표시가 떠 있었다. 양상추, 돼지고기 반 근, 치커리와, 샐러리, 양파 반 단과 깐 마늘. 그리고 미림. 오늘 세나가 저가 촬영을 마치고 퇴근할 때쯤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것들이었다. 유우키는 비가 오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튀긴 물방울들이 맺혔다가, 아래로 흘러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빗줄기는 제법 거셌다.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았다. 그는 켜지기 시작하는 가로등들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문득, 생각이 났다. 비오는 날 날 데리러 오는 연인과, 우산 아래에서 키스를 하고 싶어요- 라는 맹랑한 로망. 유우키는 읽고 있던 잡지를 덮었다. 저가 고등학교 2학년쯤에 들었던 것이니, 벌써 햇수로 2년 정도 지난 이야기였다. 그는 잡지 표지를 가만히 쓸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 라디오 방송은 짓궂은 농담을 하며, 쓸데없는 루머를 양산하기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누구나 상상해봤을 것만큼 현실적이면서, 약간의 로맨틱함을 가지고 있는 대답을 말한 세나는 ‘정답’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쓸데없이 트집을 잡히지 않게 계산 된 대답이었을지도, 아니면 운이 좋게 그런 로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일단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유유키 마코토가, 그것을 기억 해 냈다는 것이 문제였다. 유우키는 비오는 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빗방울들은 저들 끼리 몸체를 불리고, 멈추었다가 미끄러지며 창문을 수놓고 있었다. 밤의 색은 비가 내리지 않는 어제보다 더 짙었다. 유우키는 볼을 긁적였다. 곤란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해 냈다는 게 문제였다.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세나 이즈미에 비해, 유우키 마코토는 로맨티스트였다. 하지만 대부분 행동하는 것은 유우키가 아닌 세나였다. 그는 세나가 움켜쥐어, 자신에게 만들어준 몇 가지의 로망에 대해 반추했다. 아무것도 아닌 날에, 좋아하는 꽃으로만 엮은―심지어 유우키는 세나에게 저가 좋아하는 꽃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꽃다발을 받았었고, 우울한 날 몇 시간이고, 아무 말 없이 드라이브를 했었다. 그것도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만을 밞으며. 캠핑카에서, 혹은 요트 위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꿈에 가까운 허무맹랑한 소리 또한 세나가 끌어온다면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그와의 연애는 의외로 달달했다.
유우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넘겼던 걸, 기억했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건네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는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빗소리가 베란다 창문을 넘어서 다가오고 있었다. 봄비 치고는 제법 거센 비였다. 지금 나가서 괜히 엇갈리는 게 아닐까. 2년 전, 중요하지도 않은 라디오에서 저가 말했던 걸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유우키는 자신이 나가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생각하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로맨틱한 연애를 위해 세나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그렇다면 저도 어느 정도는 맞춰줘야 하는 게 아닐까. 세나 이즈미가 가지기에는 로맨틱하며, 그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는 작은 로망을 이뤄줘야 하는 게 아닐까. 유우키는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는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며 누웠다.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잡지가 바닥으로 톡, 톡, 굴러 떨어졌다. 일단은 데리러 가고 싶었고, 그 다음에 분위기를 봐서 입을 맞추고 싶기도 했다. 아직까지 먼저 하는 키스가 부끄러운 것은, 그만큼 연애 주도권을 세나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우키는 제 귓불을 만졌다. 안경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데리러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다. 오늘 아침엔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매니저가 아침에 픽업 해 갔기 때문이었다. 같이 살면서 좋은 점은 서로의 사소한 스케줄을 다 꿰게 된다는 것이라 생각하며, 유우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투명 우산을 들었다. 빗물과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면 우주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는 별빛 아래에서 키스를 하고 싶었다는 변명을 생각 하면서, 엘리베이터의 아래로 버튼을 눌렀다.
후문에서 곧장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그는 세나가 자주 가곤 하던 슈퍼 앞으로 다가갔다. 어디에요, 라고 질문한 메시지에서는 ‘곧 가’ 라는 대답이 찾아왔다. 유우키는 가로등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우산을 톡, 톡, 두드리고 지나가는 빗방울 소리는 그저 잔잔했다. 투명우산의 위로 쏟아지는 비가 남기고 간 물방울들이 가로등의 주황 불빛을 받아, 작은 우주를 만들었다. 소우주를 손으로 받치며, 유우키는 슈퍼마켓의 자동문이 닫히고, 열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닫히고 열릴 때 마다 사람이 하나씩 들어가고, 하나씩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는 핸드폰을 보다가도, 세나를 놓칠 새라 얼른 고개를 들길 반복했다. 자맥질 같은 모습이었다. 몇 년 전 라디오에서 말한 그 한 줄을 기억하고 있을까, 유우키는 둘만이―혹은 혼자만이―알고 있는 비밀을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계란 광고의 CM송이였다. 기다리는 일은 의외로 지루해서, 그는 물웅덩이를 슬리퍼로 몇 번 차 내기를 반복했다. 아스팔트 위에 고였던 물이, 슬리퍼 사이로 들어가 축축해졌다.
이따 밝은 곳으로 가면 혼나겠다. 유우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실실 웃었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보면 더 잘 보인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슈퍼마켓의 안쪽에서 줄을 서고 있는 세나가 보였다. 그와 멀지 않음에, 두근거림이 더 심해졌다. 조금 있다가, 자연스럽게 입을 맞출 수 있을까. 유우키는 괜히 제 입술을 더듬거렸다. 집 앞에 마중 나오는 차림이라지만 너무 프리 했던 게 아닐까. 그는 자신이 목이 늘어진 라운드티와, 유메노사키 학원의 3학년 체육복 바지를 입고 나온 게 패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는 점점 더 거세게 내렸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 마다 초조해졌다. 그를 지나 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불안했다. 손끝이 바짝바짝 굳었다. 분명 세나가 제 손을 잡으면 딱딱하고 차가울 거라고 확신하면서, 유우키는 슈퍼마켓 안을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이 레일 위에 무식하게 올려놓은 짐들 때문에 세나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유우키는 빗소리와 투명우산이 만들어 내는 우주 아래에서 까치발을 들어, 제 세상을 조금 더 높였다. 그제야 세나의 표정이 보였다. 그는 묘하게 불안 해 보였다. 그 모습에서 유우키는 그가 비 맞는 것을 싫어한다는 정보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잊고 있던 사실이였다.
세나는 물건 줄을 기다리면서도, 계속 밖을 쳐다보았다. 그는 빗줄기가 의외로 거센 게 어색한 듯 했다. 봄비로 내리기에는 어울리지 않은 장대비였다. 유우키는 길게 늘어진 그림자 위에 묻은 빗물에, 반짝이는 헤드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빛이 묻은 자리가 아름다웠고, 이걸 곧 세나와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설렜다. 사랑하는 사람과 별거 아니지만 예쁜 풍경을 보며 집에 돌아가는 길. 유우키는 실실 웃었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로망이 진짜가 아니더라도 별 상관이 없을 듯 했다.
그가 계산대에 물건들을 올렸다. 카드를 내밀고, 서명을 한 다음, 그는 슈퍼의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뛸 거리를 가늠하는 듯, 세나는 먼 곳을 응시하다가 거센 빗줄기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내려가는 게 뛰기를 체념한 듯 했다. 유우키는 천천히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갔다. 이즈미 씨, 하고 말을 걸자, 무언갈 생각하고 있던 세나는 어깨를 흠칫 하다가, 이내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맑고 투명한 미소였다.
“데리러 온 거야?”
그의 말에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쪽 우산을 들고, 세나에게서 비닐봉투를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세나는 내 거, 라고 대답했다. 그는 절대로 봉투를 넘겨주기 싫은 것 같았다. 같은 남자끼리 내가 드니 니가 드니 씨름을 하는 것도 조금 웃긴 일인 것 같아, 유우키는 때 쓰지 않기로 했다. 그는 우산을 들었고, 투명우산이 만들어내는 소우주 속에 두 사람이 자리했다. 별빛 같죠? 유우키의 말에 세나는 그러네, 하고 대답했다. 평소라면 이게 어떻게 별빛이야? 라고 되물었을 것도 같은데 의아한 일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었다. 빗줄기가 그들 사이에 자리했고, 그 덕분에 몇 마디 말은 뭉개져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둘이 한 우산 안에, 딱 달라붙어 선 탓인지 세나가 든 비닐봉투는 자꾸만 다리에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바꿔 들까요, 라고 제안했지만 바꿔주진 않았다. 그는 유우 군이 데리러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어린 애가 다 컸네, 라고 말할 때는 조금 울컥했다. 유우키는 세나가 자신을 너무 어린애로 보고 있을 때 마다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고,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명우산에서 번져온 별빛은 그의 색소 엷은 머리카락에 닿았다. 우주가 머리카락에 담긴 것 같은 모양이라, 유우키는 무심결에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원래부터 약한 곱슬기가 있던 머리카락은 습기를 먹어 평소보다 붕 떠 있었다. 유우 군, 지금 시비 걸어? 하고 로망이라곤 한 톨도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빗소리는 야박하게 이런 것만 가려주지 않았다. 둘은 한동안 인도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몇 대의 차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지나갔고, 몇 명의 사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데리러 와주니까 좋죠?”
“싫진 않지만. 유우 군 주제에 기특한 일을 했잖아?”
착한 아이네, 착한 아이야.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후후 웃었다. 그는 드물게도 기분이 좋은 듯 했다. 데리러 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워요? 라는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가로등 불빛이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유우키는 웅덩이를 넘었고, 세나는 웅덩이를 돌았다. 그 짧은 순간에 비를 맞아서 머리카락이 축 쳐진 모습이 귀여웠다. 들어가면 바로 씻기부터 해야겠다는 투덜거림에, 유우키는 발 먼저 씻으면 안 되느냐 물었다. 세나는 선심을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그는 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매우 물렀다.
집 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유우키는 괜히 빛이 번지는 아스팔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 가로등 아래에서 멈추었다. 있잖아요, 라고 운을 떼자, 세나는 두 손으로 마트 비닐봉지를 꼭 쥐고 왜, 라고 물었다. 비닐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좁은 우주 아래에서 그들은 눈을 마주쳤다. 빗소리가 어색함을 가려주고 있었다. 그, 러니까, 하고 말을 망설였지만, 세나는 그의 행동에 대해 ‘느리다던가’ ‘생각을 하고 멈추라던가’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연애 초에도 이렇게 많이 기다렸었는데, 라고 뜬금없이 말하자, 세나는 내가 유우 군의 형이니까, 라고 말했다. 반년도 차이나지 않는 생일을 이렇게 써먹는 게 그 다웠다.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였다. 그렇다면 데리러 오는 길에 하는 키스도 기억하고 있을까. 유우키는 괜히 가로등 아래에요, 하고 말했다. 세나는 그렇지만? 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요구하는 태도에, 유우키는 그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눈을 마주쳤다.
“기억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숙였다. 연인이 된 사이에 달라졌던 눈높이가 단숨에 좁혀졌다. 세나는 하? 하고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유우키가 손을 뻗어 제 눈을 가리자 ‘이거 알아’ 라고 대답했다. 한 번 밖에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라는 말을 하며 조잘대는 입술을 유우키는 천천히 제 입술로 덮었다. 세나의 입술은 말랑하고, 보들거렸다. 숨이 따듯했다. 비에 식었던 몸이 홧홧해지는 기분이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에서 혀를 섞었다. 꼼꼼하게 그의 입천장을 누르면서 혀를 움직이자, 세나는 부드럽게 응해왔다. 그의 한쪽 손이, 유우키의 목에 둘러졌다. 유우키는 그의 눈을 가리던 손을 땠다. 세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움직였다. 저를 잔뜩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보면 안 될 걸 훔쳐보는 느낌에, 유우키 또한 어서 눈을 감았다. 그들의 머리 위에 놓인 투명한 우산은, 가로등 빛을 여전히 별빛으로 삼아 제 몸 안에 담아내고 있었다. 닿은 입술이 홧홧거렸다. 찌릿찌릿, 정전기가 통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키스는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랑에 매너리즘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숨과 숨이 닿았다. 아쉬운 듯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달아났더니, 세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완전 짜증난다고 대답했다. 유우키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고, 세나는 허전한 듯한 제 오른손을 보더니, 비닐봉투에서 삐져나와 1m 정도 굴러간 양상추 한 통을 집어왔다. 괜히 허둥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작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 타이밍임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설 때 쯤,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가 말하는 ‘기억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머뭇거리니, 세나는 해보고 싶었던 거라고 말했다.
볼에, 다시 봄이 들어 붉어졌다. 그들은 우산 속을 말없이 걸었다. 2년 전의 사소함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의 우주 속에 봄이 더해졌다.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에 괜히 침을 바르며, 유우키 마코토는 느리게 걸었다. 같이 사니까, 데리러 갈 수 있고, 좋은 것 같아요, 라는 쓸 곳 없는 말이 튀어나왔고, 세나는 그 말에 그러네, 하고 무심하게 호응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피하는 꼴이 영락없이 부끄러워하고 있는 모습이라, 유우키는 우산을 들고 남은 손으로 제 볼을 열심히 긁었다.
봄비 치고는 굵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유우키는 우산을 털었다. 조각처럼 내렸던 비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세나는 새로 선물 받은 입욕제에 대해서 말했고, 유우키는 집에 수납장이 더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이사 온 옆집 사람이 키우는 강아지에 대해서 이야길 하면서 짧으면서 지루한 시간을 버텨냈다. 양배추로 뭐 만들 거예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 전, 유우키가 물었고, 세나는 뭐든 만들겠지, 하고 대답했다.
양배추랑 넣어서 오므라이스 해줘요. 유우키는 현관 비밀번호를 풀며 말했다. 유우키가 먼저 들어가고, 세나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데리러 나가기 잘한 것 같아, 라고 생각하며 유우키는 두어 발 먼저 디딘 집 안에서 뒤를 돌며 세나를 바라보았다. 또 뭘 하려고, 하는 표정을 보며 그는 활짝 웃었다. 만개한 웃음에, 세나 또한 피식 웃었다. 어서 와요, 라고 말하며 팔을 벌리자, 세나는 현관 바닥에 비닐봉투를 놓아버리며 좁은 걸음을 달려가 유우키를 끌어안았다. 다녀왔어,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봄비처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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