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쓸쓸해서 머나먼

 

 



 

 

7.

쓸쓸해서 머나먼

 

 

 

***

 

세나 이즈미는 눈을 떴다.

아련한 알콜 향이 목 끝에서부터 밀려왔다. 그는 폭신한 침대와 익숙한 천장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츠키나가의 작업실이 아니라, 자신의 집 안방이었다. 유우키가 자고 있어야 할 방에서 저가 잠들었다는 사실에 세나는 답지 않게 당황했다. 목구멍과 함께 위가 아팠다.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는 협탁에 제 핸드폰이 있는 걸 발견했다.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어젯밤의 츠키나가에게 온 메시지였다.


이거 보면 해장하게 나와, 작업실에서 비트 뽑고 있을 예정.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이면 언제나 와 있는 문자였다. 세나는 눈을 감으며 핸드폰을 잠갔다. 확인했음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세나는 다시 이불 사이로 파묻혔다. 그는 어제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어제는 비가 왔었고, 술을 마셨다. 폭신한 베개에서는 유우키가 쓰는 스킨 향이 났다. 상쾌한 향은 바람을 닮았다. 주먹을 쥐어도 손가락 안에 머무르지 않는 바람. 이즈미는 베개에 깊게, 얼굴을 묻었다.

이불이 사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제를 더듬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결국 울었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스오우가 매우 당황하여, 다른 녀석들을 혼내던 모습이 드문드문, 조각처럼 번져왔다.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움직일 때 마다 바람 향이 번져왔다가, 향기롭다 느껴질 때 쯤 사라져갔다. 익숙한 일이었음으로 이런 부분에까지 감상을 붙이긴 싫었으나, 세나는 그것이 아련하다고 생각했다. 겨울철 입김을 생각하며, 그는 한숨을 후, 하고 불었다.

유우키 마코토가 1주 조금 넘도록 생활한 안방에는, 어느새 그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가구의 배치나, 방의 구조가 바뀐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베개에 머리를 대면 향이 번져왔고, 고개를 돌리면 카메라의 사각지대에 보이지 않게 놓은 캐리어가 보였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모든 걸 풀어놓지 않은 것은, 그가 곧 떠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남은 촬영일자를 가늠했다. 14일 중에 이제 사흘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아쉽지 않았다.’ 세나는 몸을 반대로 뉘었다. 안방 안에 딸려 있는 화장실 앞쪽에, 옷을 갈아입고 정리하지 않아 허물처럼 남은 옷가지들이 보였다. 한꺼번에 세탁하게 제 때 내놓으라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런 점은 어렸을 때와 다름없었다. 유우키는 언제나 세나가 하는 말들을 듣지 않았다. 말을 잘 들었을 때가 편했다. 세나는 아주 먼- 과거를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제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공간 같았다.

속이 쓰렸다. 잠은 오지 않았다. 더 자고 싶다고 생각하며 세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시선은 이리저리 옮겨가다가, 협탁 위에 머물렀다. 유우키가 살기 시작한 지 열흘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자잘한 물건들이 늘었다. 안경집이나, 안경닦이가 놓여 있었고, 작은 포켓몬 인형 두 개가 있었다. 연보라색이며 털이 산발인 친구 하나와, 쥐를 닮은 노란색 친구였다. 세나는 유우키의 어린아이 같은 취미에 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점이 그를 어리다고 느끼게 했다. 졸업해야 할 취미들을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애는 어른이었다. 그는 그렇게 인식하도록 노력했다. ‘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던 어린애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려 했다. 어른, 어른. 유우키는 많이 자랐다. 더 이상 지켜주지 않아도 괜찮고, 더 이상 관심을 써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쌀알 한 톨 정도 편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인형들을 툭툭 건드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상체를 일으키긴 싫었다. 조금 더 이불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 이불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세나가 쓰는 것 보다 조금 프레쉬하고, 달달한 향이었다. 스킨에 체향이 섞인 향일까. 그는 괜히 코끝을 킁킁거리다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심장이 눈치도 없이 빠르게 뛰었다. 세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속절없이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제 중력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사흘 후면 끝날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도 어제 집에 들어와서 바로 잔 것 같았다. 세나는 기억을 더듬던 것을 그만 두었다. 가장 중요한 걸 알게 되면, 그 뒤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들은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많이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말 하나 하지 않고, 가타부타 따지거나, 나름대로 억울한 일들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축배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우키에게 무어라 말했다면 지금쯤 당장 안방에서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을 열고, 그 곳으로 나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을 것이었다. 제 몸으로 자유낙하 실험을 하기에는 아직 목숨이 소중했다. 또한 세나는 제 말들에 의해 유우키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연리지가 되기에 둘은 너무 많이 자랐다. 얽힐 수 없다는 건 안타깝기만 한 기분이 아니다. 세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잠은 여전히 번져오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엔 상념만이 부유할 뿐이었다. 모든 게 마법 같아서 믿기 어렵다는 생각과, 그것도 이제 곧 끝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다행이었다. 모든 게 끝나고 난 다음에는 조금 힘들겠지만, 그러한 감정들도 조금만 지나면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그 뭉쳐져 있는 억울함 때문에 평생 다른 사람을 담지 못할 수 도 있겠지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일이라 상관없었다. 세나는 비틀리고 조각난 제 사랑이 안타깝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에 대해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 나름의 자존심이었다.


어제는 울어버렸지만, 그래도 오늘부터는 절대 안 울어야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아침나절의 햇볕이 눈두덩이에 닿아 빛이 번져가는 느낌이었다. 세나는 이불을 이마까지 올려 덮었다. 눈을 감으니 청각이 예민해졌는지, 방 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사박거리는 이불 너머로, 무언갈 서툴게 썰어놓는 소리가 들렸다. 통통통통통, 하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통통, ……, 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2주 동안의 하우스메이트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듯 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움직이다가 으어, 하고 짧게 비명을 터트리는 유우키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는 무언가를 끓이고 있는 듯 했다. 냄비 뚜껑이 들썩이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부엌이 폭발하지는 않을까, 세나는 그 때 먹었던 크림파스타의 느끼하고 꾸덕거리는 맛을 생각하다가 혀를 내둘렀다. 면이 불었다고 했지만 심각한 맛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사서 쓸데 없는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2주 동안 무시하고, 밀어내고, 한 마디도 같이 안 해주려고 하고, 카메라가 켜지면 심각하게 들이대고 하는 걸 반복했다. 일부러 그 갭을 크게 만들었다. 유우키 마코토가 세나 이즈미에게 질릴 수 있도록. 질리려고 틈을 만들어 줘도 말을 듣지 않는다. 형의 말을 듣지 않는 건 유우키의 전매특허였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한 일이었다.

세나는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는 며칠 전 남색 종이에 써있었던 메모를 떠올렸다. 형이 날 싫어하는 건 알겠어요,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도발적인 문구였다. 밀어내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마음을 건방지고 싸가지 없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주제에 필체는 정갈하고 도도했다. 그 메시지를 생각하기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날 유우키는 트릭스타와 함께 심야 라디오에 출연했다. 공식적으로 연애하고 있지 않은 세 사람은 연애에 대한 환상을 늘어놓았고, ‘유부남 설정인 유우키는 신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아마도 제작진 끼리 합의했겠지만, 세나가 생각하기에는 한 프로그램의 설정을 다른 프로그램에 까지 사용하는 건 상도덕 위반이었다.했었다. 그대로 뒤풀이를 갔다가 커피를 마시면서 도란도란- 연애상담이라도 했는지, 꽤나 버릇없게 포스트잇을 작성했다.

본인은 이걸 패기라고 생각했을 거란 게 더 어이가 없었다. 아마도 아케호시에게 연애상담을 받았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세나는 가느다란 몸을 이불로 말았다. 어쨌든 포기 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은 했지만, 결국 그것도 프로그램이 끝나고 사적으로 만나지 않기를 반복하면 사라질 맹세였다.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에 나뭇가지로 쓴 맹세와도 같았다.

포기할 생각이 없다면 포기하게 만들면 된다. 의심하게 되는 사랑은 필요하지 않다. 보지 않으면 멀어질 것이다. 실제로 유우키 마코토는 그 날이후 세나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떠났기 때문에 찾지 않았다는 말은 그저 허울 좋은 변명일 뿐이다. 세나는 단 꿈에 젖어 있는 저가, 계란물에 적셔진 식빵 같다고 생각했다. 곧 버터를 바른 팬 위에 올라갈 것이다. 불은 곧 현실. 계란물의 꿈에 젖어있다 보면 바싹 타버리고 만다.

이불 위에서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나는 상쾌하고도 부드러운 향이 좋았다. 유우키의 향이었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설탕을 녹인 우유 같았었다. ‘이라고 부르던 시절에는 그것보다 더 부드러운 향이 났다. 베이비파우더보다 더 달큰한 향. 부드러운 볼에 입을 맞추듯 가까이 다가가서 숨을 들이 쉴 때 마다 신기루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어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달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세나는 얼른 이불코 끝까지 끌어 덮었다. 유우키가 걸어들어왔다. 그가 움직일 때 마다 시원한 향이 났다. 설탕을 녹여서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나는 최대한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했다. 들숨과 날숨을 규칙적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그것에 속은 것인지, 유우키는 이즈미 씨, 라고 작게 부르며 다가왔다. 그는 자요? 하고 물었다.

낮은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불안한지, 돌아누운 이즈미의 어깨를 끌어 내렸다. 유우키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 천천히 호흡하는 가운데, 유우키는 다시 이즈미씨, 라고 불러왔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무언가 불안한지 세나의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심장소리를 확인하자 안심한지, 그는 몸을 숙였다. 그의 머리가 이불 너머로 느껴졌다.


앞으로도, 이러고 싶어요.”


목소리가 가까웠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닿을 거리였다. 유우키는 여러 가지 소망을 늘어놓았다. 세나가 이뤄줄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현실로 끌어오기 전에 흐트러트려놓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자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뭐 하는 거람, 유우키는 자조하듯 말했다. 밖에서 보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거리는 냄비 안에선 무엇이 끓고 있을지 세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의 심장 속에 들어 있는 감정을 알 수 없는 일과 같았다.

유우키의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웠다. 그는 세나의 감은 두 눈두덩에 쪽, , 하고 입을 맞추었다. 숨을 고르게 쉬는 일이 어려웠다. 그만 두라고 소리치고 싶으면서도, 미적지근한 마음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유우키의 입술이 세나의 콧날을 타고 쪽, , 쪼듯 내렸다. 콧망울에 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잠시 허공에서 머물렀다.


이즈미 씨,”


그가 호흡하듯 이름을 불렀다. 이름 한 글자가 발음될 때 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무심결에 대답할 뻔 했다. 큰일이었다. 유우키는 손을 뻗어 세나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의 손길은 꼼꼼했으며, 다정했다. 마디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갈 때 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간질거렸다.

이즈미 씨, 다시 그가 달짝지근하게 이름을 불렀다. 가까이 다가온 숨에 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안자고- 있죠? 유우키가 느릿하게 물었다. 세나는 시치미를 땠다. 그가 자는 지, 자고있지 않은 지는 상관이 없다는 듯 유우키는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마주 댔다. 숨을 들이쉬듯 빨아들이고, 열어달라는 듯 아랫입술을 집요하게 간질였다.

호흡이 모자라, 세나는 입술을 열었다. 벌려진 입 틈새로 혀가 들어왔다. 영원을 엮어내는 것처럼 유우키는 천천히 그의 혀를 옭아맸다. 할 말이 많다는 듯, 입천장을 꾹꾹 눌렀다. 세나가 눈을 뜨자, 감은 눈이 보였다. 밀어내려고 발버둥을 쳐도 이길 수가 없었다. 세나의 들숨이 그의 날숨이 되고, 유우키의 날숨이 그의 들숨이 되었다. 유우키는 그의 치열을 훑었다. 하지 못한 모든 말을 혀 끝에 올려, 세나의 목구멍 안으로 넘기려는 듯했다. 소화하지 못한 말들이 더부룩하게 남았다.


일어났어요?”


유우키가 물었다. 상냥한 어조와 대조되게, 그는 먹구름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건드는 것만으로도 비를 내릴 것 같은 얼굴에, 세나가 첨언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다만 닿았던 입술의 찌릿함을 느끼면서, 유우키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먹은 배 위를 손으로 쓸어내릴 뿐이었다.

사과는 하지 마, 세나가 말했고, 유우키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다고 대답했다. 예전의 유우키 마코토였다면 하지 않았을 맹랑함에, 세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둘 다, 컸다는 것을 인식한 아침이 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꾸만 오른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쓸쓸해서 머나먼, 거리감이 느껴졌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무어라 이야기할 수 없는 날이었다. 유우키는 아침을 했다고 말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색하고 머쓱한 지,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벌어진 감정골이 크레바스처럼 멀어졌다. 세나는 이불을 내렸다. 왜 자는 척 했느냐 물어보고 싶을까, 세나는 자신이 예상한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이불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먹자, 라고 가벼운 한마디를 건넸다. 닿은 자리는 여전히 화끈거리고 있었다. 민트 향이 나는 립밤을 가득 바른 느낌이었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무어라 타박할 수 없었다. 당황스러움과 설렘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나질 않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매쉬드포테이토처럼 진득하게 섞였다. 삶아서 으깬 감자 같은 기분이었다.

 

 


 

***

 

키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둘의 관계는 고양이가 흩트려 놓은 실타래처럼 엉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유우키가 끓인 술국은 맛이 없었다. 육수에서는 비린 맛이 났다. 세나는 카메라를 보면서 내가 아니면 널 누가 데려가겠느냐고 말했고, 유우키는 맞은 편 카메라를 보면서 이즈미 씨가 데려갔으니까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다. 이 짓도 사흘 후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후련하기 그지없었다.

유우키는 사흘 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지만 물어보기 싫었다. 그의 대답에 따라서 마음이 크게 기울 것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돌아갈 때만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행위는 버거웠다. 체할 것 같았다. 그는 맛없는 술국을 다시 입에 넣었다. 그는 불안한지 맛있어요? 라고 물었다. 세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멸치와 무가 입 안에서 따로 놀고 있었다.

유우키는 식사를 하는 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괸 그의 눈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세나는 괜히 반찬을 뒤적였다. 계란말이에서 계란껍질이 보였다. ? 이거 일부러 그런 거야? 세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표정이던 유우키는 화들짝 놀라 계란말이를 살피고 울상을 지었다. 대형견 같은 표정이었다.


역시 이즈미 씨가 날 길러줘야겠어요.”

싫은데? 자기 일을 못 하는 어른은 사양이야.”

대신 내가 앞으로 빨래랑, 청소기 밀게요.”

빨래? 저번에 내가 아끼는 니트, 형편없이 줄여놓은 건 누구였지?”


세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유우키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계란말이에 박힌 껍질을 제거해도, 그 상처에서 피 같은 캐쳡은 쏟아지지 않았다. 그는 껍질들을 천천히 접시 가장자리에 놓았다. 나 불쌍하지 않아요? 그가 물었다. , 돌봐줘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유우키는 연신 질문했다.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싫다는 표현이었다. 카메라를 보면서 웃자, 유우키는 맞은편의 렌즈를 보면서 뚱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풋내가 났다. 세나는 그가 자신의 유우 군이던 시절을 떠올리다가, 맛없는 계란말이를 입에 넣었다. 간이 이상하게 들어 있었다.

그래도 별 말 하지 않고 먹자, 유우키는 세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일부러 맛없게 했지? 라고 진심을 가득 담아 물어보자 유우키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을 가득 담았으니까 맛이 없진 않을 거라는 말의 처음은 당당했으나, 끝은 작디작았다. 세나는 푸스스 웃었다. 그는 여전히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우키는 그게 어색한 듯, 세나의 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비꼈다. 어긋난 시선에야 비로소 세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연극 무대에서 연기력을 검증받은 배우들이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 할 때 발연기로 평가받는 이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그네들은 상대 배우를 정면으로 보며 호흡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어서, 카메라의 렌즈를 보며 대사를 치는 상황 자체를 어색해 한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세나는 그 무기질적이고, 이질적인 렌즈를 바라보는 게 더욱 편했다. 그 두 눈을 바라본다면 꺾일 것만 같았다.

여러 번 반복해서 돌았던, 멀어지기 위해서 걸었던 그 수많은 길이, 사실은 그에게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싫었다. 세나는 카메라 렌즈를 보고 웃었다. 정면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유우키와 상반 된 모습이었다. 그 엇갈리는 시선 사이에서 오가는 말은 많았다. 다만 서로에게 닿지 않거나, 대답하지 않거나, 들리지 않거나, 셋 중 하나의 경우일 뿐이었다. 아까 닿았던 자국이 자꾸만 화끈거려서, 감정이 울컥거리며 치받쳐 오르려 했다.

 

식사를 마치고, 세나는 소파에 앉았다. 오늘의 미션 카드는 세나 이즈미의 날이였다. 평소 집안일로 고생하는 아내에게 서비스를 해주는 남편이라는 테마로 진행되는 촬영이었다. 유우키는 밀크티를 만들고 있었다. 예전에 사놓은 다구를 어디서 찾아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제 부엌에도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세나는 외로워질 때, 집 안의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애써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의 붉은 렌즈가, ‘그 날 밤도망치면서 봤던 비상구의 초록색 불빛 같았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세나 이즈미는 대중이 원하는 자신의 가면을 쓰고 방긋방긋 웃었다. 예쁜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다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에서 부드러운 향이 우러나기 시작했다. 힘들 텐데 티백 끓이지. 세나가 말을 걸었고, 유우키는 형한테 해주는 게 뭐가 힘들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 이라는 호칭을 듣는 건 간만이었다. 그걸 일상적으로 듣던 때가 있었고,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하던 날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둘 다 서툴렀다. 어린애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좋아하는 사람을 바꾸곤 한다. 그 장난에 성의 있게 귀기울여주지 못한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그 날 도망쳤던 게 문제였을까. 세나 이즈미는 몇 번인지 셀 수 없는 후회를 다시 한 번 남기며,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끝나버린 마법을 다시 시작하려면 어떻게 하죠?

 

그는 벽면을 보았다. 남색 포스트잇에 적어둔 글자였다. 간간히 하얀 잉크가 번진 자국이 보였다. 꼴에 울었을까, 아니면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연출일까. 세나는 포스트잇을 꺼냈다. 받으면, 답장은 해 주세요- 라는 약속을 했었다. 어렸을 때 이후 처음,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새끼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으로 이어지는 그 얕은 약속을 과연 지켜야 할까, 고민들이 먼지처럼 그의 세계를 나폴나폴 채워갔다.

신데렐라의 마법같은 나날이 지속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붙잡아 준 왕자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것은, 진정한 사랑을 말해줄 왕자님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마법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었다.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위한 조건이 사랑이라면, 세나는 제 엔딩이 비극으로 끝나도 좋을 거라고 확신했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울렁이는 감정들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확인했음에도 때지 않았다. 땔 수 없다는 말이 정확했다. 유우키 마코토에게 잠식되어가는 하루하루가 바닥에 물처럼 고였다. 세나는 제가 어항 속에 들어 있는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에게 완전히 젖어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부분을 그에게 내어주고 싶을 게 분명했다. 한 번 했던 실수를 두 번이라고 못할 리 없다.

그렇게 된다면 헤어지는 것자체를 무서워하게 된다. 이별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꼴사나운 사랑은 없다. 끝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은 더욱 빠르게 찾아온다. 모든 일상적인 지표마저도 불안함을 담아 해석하기 때문이다. 세나는 다리를 쭉 뻗었다. 그는 카메라를 보고, 유우키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부엌 쪽에서 저를 찍는 카메라 렌즈에 세나는 환한 웃음을 선물했다.

차 마신 다음에 뭐 할 거야? 세나는 일부러 발랄하게 물었다. 설마 내 날인데 생각 안 해둔 거 아니겠지? 내 남편인데? 그는 일부러 남편이라는 단어를 느리게 발음했다. 유우키는 다 생각 해 뒀다고 말하면서, 차를 마신 다음엔 족욕을 시켜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예전에 트릭스타와 함께 한 장기 예능프로그램에서 마사지를 배운 적이 있다고 말했다. 세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우키가 토크에는 재능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사운드가 비는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착잡한 기분, 관리가 되질 않는 표정이 전부 다 카메라에 담긴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하지만 뭔가 뾰족한 수도 없었다. 프로답지 못했다. 이건 다 아침의 일 때문이었다. 미로의 끄트머리를 찾아가듯, 이유를 더듬어 가다보면 그 날때문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하루 때문에 엉켜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세나는 잠시 카메라를 꺼달라고 요청했다. 유우키는 천천히 다가와, 그의 표정을 전부 담고 있는 메인 카메라의 전원을 껐다.

세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가지런히 다리를 모아 앉았다. 무릎에 손을 얹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덜 풀린 속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츠키나가의 문자를 보고서 바로 나갔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깨물린 입술에 눈이 따끔거렸다. 눈물이 차오르는 탓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했다.

유우키는 세나가 모은 무릎에 얹은 손을 잡았다. 차갑게 굳어 가늘게 떨리는 손을 제 손에 가두듯 잡았다. 떨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이 빨리 뛰는 듯 세나의 얼굴이 붉었다. 카메라 다 끄고 와줘, 라는 어린애 같은 투정에 유우키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버튼이 달칵이는 소리가 반복됐다. 세나는 술 마시고 온 다음 날엔 눈물샘이 약해진다는 변명을 생각했지만, 이 말을 어떤 타이밍에서 내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힘들어요?”


유우키가 물었다. 그 또한 지친 음색이었다. 그는 세나의 앞으로 밀크티를 밀어 넣었다. 일단은 사흘만 참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세나의 앞에 무릎 꿇어 앉았다. 잔잔한 녹색 눈은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했다. 유우키의 두 손이 세나의 무릎을 감싸 쥐었다. 세나는 입술을 입 안으로 숨겼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가 내뱉는 숨이 당장이라도 제 입에 닿을 것 같았다.


사흘이 지나면 모두 끝인 거지?”

아니요, 계속 대쉬할 거예요.”


유우키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


세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부채의식이라도 가지고 있어? 세나가 가볍게 물었다. 유우키는 고개를 저었다.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그동안 찾지도 않았었잖아? 세나는 친절하게 질문하려고 노력했다. 유우키는 그 말도 맞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유우 군이 갑자기, 이러는 거 솔직히 이상하잖아? 세나는 제 감상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유우키는 익숙한 호칭에 화색을 지으며 베시시 웃었다.

그의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언제나 어려웠다. 고등학생 때는 질투 때문이었고, 지금은 너무나도 화사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세나를 동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다. 자신은 동화의 구석, 귀퉁이에 있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신데렐라라면 계모에, 한여름 밤의 꿈이라면 요정여왕의 하수인 정도에 머무른다. 언제나 그의 사랑은 그 정도의 위치였다.


믿기 어렵다는 거 알아요.”

금세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말은 믿지 않아.”

그렇게 금방 빠진 건 아닌데.”

그럼 부채의식이겠지. 그 날, 아침에 혼자 일어난 게 싫었던가.”


세나는 일부러, 시니컬한 어조로 말했다. 날카로운 말이 비수가 되어 그에게 꽂히길 바랐다. 사랑을 부정하고 싶었다. 둘 사이에 남아있는 감정이, 찌꺼기만큼이나 가치 없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과 유우키 사이의 마음에 일부러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사랑만은 아니길, 그 곳을 디딜 때 마다 빠져 죽고 싶지 않게. 세나는 늪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언제 훅 꺼질지 모르는 땅을 디디는 기분은, 스스로 죽음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좋아해요.”

거짓말.”

몇 번 차고 받아주는 지 셀 거예요.”

왜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 너 안 좋아한다니까.”


너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이렇게 끈덕지지도 않았고, 나 싫어했잖아. 내가 다가갈 때 마다 초식동물처럼 벌벌 떨었으면서? 싫어하는 척이란 척은 다 해놓고, 무서워하는 척이란 척은 다 했잖아! 세나는 억울함에 말을 토해냈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정 할 건 인정하고 가겠다는 태도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프로그램에서 결혼 했다고, 여보 남편 자기야 허니 좀 불렀다고 착각하는 것뿐이야. 끝난 지 삼일 정도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걸. 이거 찍으러 나왔을 때 외로웠다면서. 외로워서 두근거리는 걸 찾고 싶었다면서. 근데 그게 예전에 날 짝사랑 했었던 세나 이즈미네! 와 횡재했다. 조금만 구슬리면 넘어와서 날 사랑해주겠지- 같은 생각 하는 거 아니야? 나 그런 거 완전 짜증나니까! 세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유우키의 눈을 볼 때 마다 굳게 결심했던 모든 건 사라졌다.


애초에, 지금의 날 모르잖아.”

세나는 대답하지 않는 유우키에게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알아 가면 되잖아요.”


이즈미 씨가 좋다-고 하면, 우리에게 시간은 많아요. 유우키는 담담하게 말했다. 세나는 저에게로 다가오는 이 홍수 같은 애정이 어색하기만 했다. 꿈꾸던 것이 가까이 와 있으니 도리어 믿을 수 없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사랑이 깊을수록 의심은 점점 제 몸을 키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 너랑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어. 세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마음도, 용기도 없으면서 흔들지 마.”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아니? 집으로 돌아가면 싹 잊어 버릴 걸.”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일이 일어났겠지. 네 눈꺼풀에 장난꾸러기 요정 퍽이 사랑의 묘약이라도 바른 모양이야.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본 게 세나 이즈미일 뿐이겠지.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등을 소파에 기댔다. 유우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에 앉았다. 그에게서 스킨 향이 끼쳐왔다. 이제는 어른이니까, 우리 감정도 이제 무미건조하고 아무 사이도 아닌게 돼야 하지 않겠니? 세나가 물었다. 유우키는 싫어요, 라고 대답했다.

마법은 끝날 거야. 세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기운 없는 목소리에 유우키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우리사이에 있을 마법은 이미 그 날 다 끝나 버렸어. 너랑 자고, 키스하고, 몸을 섞고, 내가 도망친 그 날, 마침표가 찍혔다니까. 세나는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는 천천히 마른세수를 했다.


그 날,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어떻게 믿어 그걸.”

이즈미 씨가 믿어주면 모든 게 좋게 끝날 문제잖아요.”

어린애 같아.”


유우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침묵이 세나는 오히려 편안했다. 그가 이대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멈춰있기를 바랐다. 그들의 간격은 문단과 문단 사이처럼 멀었다. 세나는 눈을 떴다. 그는 제 손 끝을 바라보았다. 밀크티의 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다시, 점점, 젖어, 들어, 가는 것 같았다. 감정의 파도에 삼켜지는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순간 모든게 물보라가 되어 흩어질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닫았다.


“어린애 같아도 상관 없어요.”


유우키는 세나의 팔뚝을 잡았다. 세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했다. 그는 그가 왜 이렇게 절박한지, 왜 이렇게 애틋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계와 세계는 갈라선 지 오래였다. 다신 합집합이 될 수 없는 관계였다. 서로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두 행성은, 멋대로 자전하며 공전하지 않았다. 유우키의 중력은 더 이상 저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스스로 팔짱을 꼈다.


내가 더 좋아할게요.”

너무, 늦었어.”

내가 더 좋아할게요.”

미안해.”

내가 더 좋아할게요.”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우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럼 왜 아까 키스했어요? 라고 물었다. 맹랑한 질문이었다. 갑자기 제게 끼쳐온 목소리에 세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울대에 변명들이 방울방울 맺혔다가 말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침을 삼킬 때 마다 목이 따끔거렸다. 아까 왜, 가만있었어요? 유우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뭐가 되고 싶은 거 아니잖아.”


그는 한숨 쉬듯 말했다.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끝나버린 마법을 다시 시작하는 방법 모르고 있으니까, 더 이상은 무리야. 세나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거절의 말을 내뱉으면 내뱉을수록 마음이 차갑게 식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머무르다, 사흘을 버티고, 그 이후에 다시 유우키를 보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제 세계도 원래 궤도를 돌 게 분명했다.

차라리 생각이라도 읽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아니면 사람이란 생물이 거짓말을 하면 발끝부터 굳어 돌이 되어버렸으면 좋았겠다. 세나는 이미 끝나버린 제 겨울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매우 싫었다. 그는 유우키를 바라보았다. 많이 자란 그에게서는 스킨 향이 났다. 그 프래쉬하면서도 달달한 향이 코끝에 닿을 때 마다 죽고 싶었다. 세나는 자신에게 깊게 쌓인 외로움을 마주했다.

외로움은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는 모습 보기 싫어,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꿀 같은 금발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신데렐라에서도 마법은 한 번 뿐이었잖아. 인어공주의 마법도 한 번,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깨어나는 마법도 한 번. 세나는 타이르듯 말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완곡한 경고였다. 그의 외로움이 눈을 깜빡일 때 마다, 녹색 눈에 물이 차올랐다.


나 그래서, 지금

,”

마법, 걸고 있어요.”


이즈미 씨에게, 닿도록, 말하고 있는데, 세나의 외로움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깜빡였다. 초록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일렁이다 흘렀다. 세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세팅기가 없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웠다. 세나는 그들의 처음을 반추했다. 분명, 처음은 우는 얼굴이 신경 쓰였다. 이십대 후반이라는 나이,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에도 늦은 이 시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우는 모습은 마음 속에 깊게 남아 있었다.

세나는 유우키의 안경을 걷었다. 그는 손으로 눈물을 훔쳐주었다. 나는 형이, 처음 이래줬을 때부터, 좋았어요. 유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깜빡였다. 가득 차오른 눈물이 연신 아래로 낙하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길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탄 물방울들이 그의 손금을 타고 흘러, 손바닥 안에서 감정처럼 머물렀다.


좋아해요.”

미안해.”

그럼 키스해줘요.”

억지야.”


그렇게 말하면서 세나는 그의 눈을 가렸다. 손바닥 너머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아, 라고 말하고 세나는 삼 초를 기다렸다. 생각 해 보면 첫 키스도 유우키의 것이었다. 그 때도 눈을 가렸었다.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어느 봄날이었다. 기온은 겨울처럼 차가운 날, 음악실 구석에서였다. 세나는 그의 입술에 천천히 제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게 닿는 숨이 쓰기만 했다.

마법을 걸 듯, 유우키는 세나의 입맞춤에 응해왔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였다. 짧게 닿기만 하고 끝난 것이 아쉽다는 듯, 제 쪽에서 입술을 내밀어 쪽, , 하고 소리를 내며 쪼는 듯 키스했다. 숨을 불어넣으며 입을 벌리자, 혀를 엮어왔다. 공중에서 엮인 입맞춤은 꿈처럼 달콤했고, 겨울처럼 시렸다.

세나는 눈을 가린 손을 땠다. 유우키는 슬며시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고, 그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소거됐다. 다만, 숨을 마주 섞는 소리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흘러갔다. 혀에 닿는 감각 하나하나에 소름이 돋았다. 유우키의 향이 짙게 번져왔다. 유우키 마코토의 마법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혀를 엮었다. 가늘게 뜬 눈 아래의 시선도 마주치기가 어려워, 세나는 눈을 감았다. ‘헤어짐을 담고 있는 별들이, 그의 시야에서 팡, 팡 터지며 점멸하였다.


말리지 않으면, 더 할 거예요.”


입술을 때고 유우키가 말했다. 세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거부의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선을 넘는 건 위험했다.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물러지는 것은 유구한 버릇이었다. 더 이상 애매해져서는 안 됐고, 밀어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로움은 언제나 온기를 갈구하는 법이었다. 식어가는 밀크티의 표면을 보며 세나는 고개를 숙였다.

허락으로 알래요, 유우키는 다시 그의 입술에 숨을 겹쳐왔다.

 

 


 

***

 

유우키 마코토는 눈을 떴다.

그는 반사적으로 침대 시트를 더듬었다. 옆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세나가 잡혔다. 그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가늘게 떨렸다. 유우키는 세나의 목 끝까지 이불을 올려주었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는 앙상한 겨울 같았다. 유우키는 제 겨울을 마주보았다. 그 겨울과는 달리, 옆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세나에게서 서늘한 향이 났다. 향수는 딱히 사용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는 그의 체향이었다. 그는 목 뒤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사랑은 언제나 감정적이다. 격렬한 파도처럼 일어, 온 몸을 적셔온다. 좋아한다는 말에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섞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딴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 껍데기 뿐인 사람을 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만두기 싫었던 건 그 껍데기가 세나 이즈미이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는 제 맘속에서 몸집을 키워갔다. 마음에 다시 파랑이 일었다. 요동치는 마음에 대해 그는 토해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사랑해요, 라고 말할 때 마다 세나의 얼굴은 형편없이 구겨진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고 애써 말하는 것 같다. 그게 오히려 더 사랑한다고 말하게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유우키는 너무 멀리 돌아 알아챈 제 사랑의 머리카락에 손을 얹었다. 밀어낼 거면 확실하게 밀어내 줬으면 좋겠는데, 라고 중얼거리다가 유우키는 제 말이 그 날새벽, 세나가 중얼거리던 말이라는 걸 알아챘다.

한 번 엎질러진 물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 애초에 한 번 차버린 사랑을 손쉽게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힘들었다. 그가 만들어 둔 벽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유우키는 제 사랑이 비처럼 내려, 그의 세계 안에 스미길 바랐다. 하지만 흔드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었다. 사랑을 말하면 말할수록 그는 땅에 약하게 박은 뿌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반칙이야, 추억 정도는 끌어안게 해줘.


유우키는 세나의 이 말에 서러웠다. 결국 밀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금세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세나는 자꾸 그 마법의 대상이 저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겨울 같았다. 포근해 지려 하면 눈을 쏟아내고, 길을 얼려버린다. 다가가는 길,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얼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세나의 봄이 되고 싶었다. ‘그 날잘못한 건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혼자 상처입은 것처럼 행동하는 세나의 시선을 저에게로 잡아 끌고 싶었다. 그는 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는 세나의 얇은 등을 바라보았다. 이 등이 크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고, 등을 돌리길 바라던 시절이 있었다. 유우키는 언제나 사랑에 둔했다. 받아본 적 없기에, 사랑을 사랑이라고 알아차리는 데에 남들보다 느렸고 제가 머물러 있는 곳이 사랑임을 눈치 채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맞물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길이 있다면, 세나는 먼저 걸어 먼저 지쳤고, 유우키는 늦게 걸어 지치지 않았다. 유우키는 세나와 자신의 세계가 평행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믿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기울어져 있다면, 언젠가는 어떠한 점에서 반드시 만나게 된다. 그 때까지 필요한 건 시간이며 끈기다. 세나에게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인내심도 더해야 할지 모른다.

유우키는 그의 뒷목에 손가락을 댔다. 천천히 쓸어내릴 때 마다 이불이 흘러내렸다. 마른 등에 남긴 자국이 유달리 붉었다. 눈에 잠긴 동백 같은 꼴이었다. 세나가 숨을 쉴 때 마다, 어깨가 움직였다. 유우키는 흘러내린 이불을 추켜올려주었다. 그에게 허락 된 시간은 많았다.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사랑이 한여름 밤의 꿈의 사랑의 묘약처럼, 일시적이지만 않으면 된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마주보았다. 반갑고, 외로웠고, 마침 타이밍이 맞아서 다시 좋아하게 된 건 아니었으리라 믿으며 유우키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요, 그는 다시 마법 같은 주문을 속삭였다. 새벽이었고, 밤은 새까맣게 깊었다. 끝나지 않을 마법을 거는 목소리엔, 그저 겨울나무 같은 담담함만이 남아 있었다.

제게 등을 돌리고 있는 시선이 마주 닿기를 희망하며, 유우키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어둠이 내리 앉았다. 사랑해요, 그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그는 그가 도망치지 않기를 희망하며, 한 팔로 그를 끌어안았다. 가까이 닿은 몸이 따듯했다. 유우키는 지금 이 시간이 지속되기를 희망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야상곡처럼 들리는 새벽이었다.

허나, 가까이 있음에도 쓸쓸해서 머나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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