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 | 2016. 2. 28. 23:06
*'망애증후군'을 살짝 변형했습니다. 추억을 기억하면 모든 사랑이 기억났다가, 다시 잊게 된다는 설정을 더했습니다.
* 다른 설정은 망애증후군과 같습니다.
* 앙스타 전력의 '발자국'이라는 키워드를 받아서 썼습니다 :)
사망 당시, 소지하고 있던 서간의 일부, 발췌.
너를 사랑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나는 비굴 속에 끼어들어
알지도 못하는 말을 쓴다
(슬픈 날, 신재순)
***
기대, 기다림. 사랑의 괴로움, 허무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사랑의 쓴맛.
제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저의 모든 것을 드릴게요.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비록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기억하는 날 보다 잊어버리는 날이 더 많았죠. 우리 사이는. 그래서 가슴에다 가장 가까운 곳에다 이름을 적을까, 하고 생각했던 날이 있었어요. 눈밭에 발자국을 찍는 것 같은 일이었죠. 솔직히 말해서 문신 무서우니까, 그리고 아무리 잊어버린다고 해도 ‘무서워하는 문신’을 할 정도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줄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걸 하려고 갈까, 하면서 길을 옮기는 순간순간마다 내 발자국 위에는 눈이 쌓이곤 했어요. 그냥, 그랬어요.
변명인 것 같지만 잊어버릴 것 같아서 적어요. 이걸 보내는 건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언제나 이즈미 씨에게 편지를 써요. 열통을 쓴다면 아홉 통은 보내러 가는 순간 잊어버려요. 그리고 ‘함부로 열지 말 것’이라고 정해놓은 규칙을 어기고 열어보고는, 왜 그걸 이즈미 씨에게 썼을까,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하면서 편지를 구겨서 버려버리죠. 열통을 써도 한통 밖에 가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이것도 갈까, 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요. 잉크가 부디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편지지 깨끗하게 쓰는 거 좋아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연필로 쓰고 싶었어요. 약하게 써서 지우면 좋으니까. 하지만 심이 부러지면 그걸 깎는 순간 잃어버릴 것 같았어요. 오늘은 그래도, 편지를 쓸 순 있어서 좋네요. ‘말할 수 없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굳이 적지 않을 게요. 그 말을 적는 것만으로도 없어질 것 같아서 무서워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부터 적고 있어요. 내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이즈미 씨의 이름을 문신하고 싶었던 거. 나는 뾰족한 걸 무서워 한다는 거. 하지만 그걸 하러 갈 때 마다 잊어버려서, 내 몸에는 이즈미 씨의 이름이 아닌 다른 말들이 늘어났다는 거. 이걸 알려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죠? 이게 부디 닿길 바라요. 나는 내가 걸린 이 병이 차라리 신체적으로 아픈 거라면 좋겠다고 매일 밤을 생각해요. 그리고 잊어버려요.
이즈미 씨에 대한 나의 기억은, 눈이 내리고 있는 상황에, 눈밭에 찍은 발자국 같아요. 그 대로 굳어버린다는 보장도 없죠. 그 위에는 하얀 눈이 가루처럼 내려 내 발자국을 없앨 거에요. ‘말할 수 없는 말’을 할 때 마다 나는 끊어진 눈밭 위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어요. 뒤를 돌아도 내 발자국이 없고, 앞을 봐도 걸어나갈 발자국이 없죠. 아이스크림 통에서 스쿱으로 덜어내 콘에 얹은 아이스크림처럼,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만 어디 있었는 지는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곤 해요.
나는 이 편지를 짧게 써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쓰고 싶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오랫동안 잊어버리지 않은 건 처음이라 글씨가 엉망이에요. 나는 내가 눈밭에 발자국 없이 표류할 때 마다 이런 생각을 해요. 세나 이즈미? 내 방에 세나 이즈미의 사진이 왜 이렇게 많지? 나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어. 기쁜 얼굴을 하네. 우리 키스하는 사진이 있잖아, 오, 이벤트에 당첨되어 놓고 잊어버리거나 합성 사진일 것 같아. 우리가 이렇게 친밀한 관계일 리 없잖아. 나는 그냥 예전에 아이돌을 했던 평범한 사람이고, 그렇게 반짝이는 사람이 나랑 있었다니, 와 절대로 모르겠어. 영문을 모르겠어. 영문을 모르겠어.
그리고 나는 나와 이즈미 씨의 흔적을 상자에 담아요. 분명 당신이 찍었을-남에게 부탁해서 찍었던, 아니면 타이머를 설정했던, 손으로 들고 찍었던 간에-나와 당신의 추억들을 보기 싫은 것처럼 정리해요. 이즈미 씨와 나 사이의 맥락을 모르고 있으니까 버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왜 가지고 있을까 하고 생각은 해보죠. 그리고 이즈미 씨가 나에게 고백하는 상상을 해요. 발칙하게도. 뭐, 그런 생각 할 수 있잖아요, 어디서부터 자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게이고, 이즈미 씨와 키스한 사진이 있다.
그러면, 그냥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거잖아. 저 사람이 나를, 「 」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는 매번 거절해요. 다음 조각을 찾을 때 까지. 당신이 내게 찍어둔 발자국을 찾을 때 까지. 매일 「 」하는 상상을 하는데, 그게 이뤄지는 상상은 할 수 없어요. 내 마음, 알겠어요? 나에게 남겨둔 흔적을 찾을 때 마다 나는 모든 걸 기억하는데, 그 기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하지만 울 수 없어요. 이 편지에서 조차 ‘말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없잖아. 내가 빈칸에 담은 마음을 생각 해 줘요.
이 병이 완치 된 사람들의 모임에 대한, 수기를 읽었어요. 이상하게도 이즈미 씨를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볼 때와, 그러지 않을 때 이 책에 대한 생각이 휙휙 바뀌고 있어요. ‘말할 수 없는 상태’일 때에는 빨간 색으로 메모를 남겨요. 빨간 발자국들은 이렇게 이야길 하죠. ‘나도 한 번이라도 「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할 수 없잖아. 하지만 이즈미 씨가 죽는 건 싫어. 정말 싫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잊었을 때는 이렇게 말하고 있죠.
…
…
아냐, 이건 말 안할래요. 응, ‘여백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에겐 시간이 모자라죠. 나는 이 증후군에 대해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한다고 생각해요. 말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잊어버리는 건 너무 하잖아, 이즈미 씨도 힘들겠지만, 기억하는 나도 힘들어요. 아니, 어리광 부릴 수밖에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나는, 진짜 나는,
아, 이런 감정으로 더 이어 써야한다는 게 쓸 수 밖에 없다는게 가혹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즈미 씨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해야 하는 말이 많아. 남기고 싶은 발자국이 많아. 이즈미 씨의 눈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내가 한 말들로, 기적처럼 보낼 수 있던 편지들로 엉망이 됐겠죠? 날 아직도 사랑하고 있겠죠? 가끔 차로 와서 내 방을 살펴보는 걸 알아요. 눈을 마주치면서 웃고 다시 돌아가는 것도 알아.
나는 당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매번 분노하고, 슬퍼하겠죠. 나를 새장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겠죠. 이사라 군에게 이 사실에 대해서 털어놓으면서 (몇 번째인지 이사라 군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거예요) 울겠죠. 쓸모없는 눈물인줄도 모르면서. 당신과 했던 일들이 스위치처럼 기억 나는 날이 있어요. 기억하자마자 서랍으로 가서 다시 사진을 걸어놔요. 그리고 박스 가장 안쪽에 만들어놨던 노트에다 기록해요. 우리의 추억에 대해서, 그 키워드에 대해서. 하지만 나는 내 노트 앞장, 그 곳에 적혀있던 발자국들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해요.
잊어버리고 지워져버릴 발자국들. 나의 「 」들. 나는 올 수 없는 계절에 위치하는 게 아닐까. 나는 언젠가 내가 안도할 수 있길 바라요. 당신을 싫어함에 안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길 바라. 그건, 아직,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그것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 아직 지치지 않았다는 거잖아. 지치지 않아서 고마워요, 나도 힘내고 있어요. 언제나 「 」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우리의 시간, 그 위를 같이 걸어왔음을 잊지 말기로 해요.
나는, 잊어버리겠지만.
아, 오늘 나에게 할애 된 시간을 미리 알고 싶어요. 모래시계처럼, 하지만 시계 안쪽에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을 모르고 있는 거겠죠. 나는 지금도 잊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부디 이 편지가 그대에게 닿기를. 저번에 선물해줬던 편지봉투 고마워요. 주소가 잔뜩 적힌 편지봉투들 덕분에, 한 통은 이즈미 씨에게 부담 없이 닿고 있겠죠. 아, 맞아 그리고 따질 게 있어요. 사쿠마 군이 해 준 이야기에요.
나에게 마지막으로 ‘말할 수 없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고 한다면서요. 그렇지만 그건 이즈미 씨가 끝나지 않고서는 할수 없잖아요. 내가 보낸 공백들에 대해서 생각해 줘요, 그 곳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적었다고 생각해줘요. 사쿠마 군은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이번에 기억한 키워드와 관련 되어 있답니다. 아네모네, 아네모네를 덮어 달라고 했다면서요. 나에게 꽃의 언어에 대해서 알려줬던 건 이즈미 씨에요. 매번, 매일 아침 나에게 아네모네를 선물하고 있는 것도 이즈미 씨인가요?
그렇다면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이즈미 씨겠죠. 트릭스타의 대기실로 가장 처음 보낸 꽃이 아네모네였으니까. 아아, 기억할 수 있어서 행복하지만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불선은 집어 치우고 하고 싶은 말을 할게요. 우리, 의심하지 않기로 해요. 지치지 않기로 해요. 할 말이 많지만 더 적을 수 없어요. 잊어버릴까봐 겁나. 빈 편지지 한 장을 덧대어 보냅니다. 그 곳에 들어갈, 들어갈 수 없는 나의 말들을 생각 해 줘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로 적을 수 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급히 봉하여 보냅니다. 부디 당신에게 닿을 수 있길. 나는 우리의 발자국이 어디에선가 맞닿을 거라 믿어요. 그것이 아네모네 같은 끝이 아니길 바라요. 그렇죠? 그렇게 생각하죠? 이사라 군이 색이 있는 립밤을 선물했어요. 종이에 찍어보니 꽤나 좋은 꼴이길래 찍어 보내요. 미안해요. 언제나, 「 」해요.
― ‘이즈미 씨’ ' ' 유우키 마코토
― 생략 된 접속사는 이즈미 씨가 익히 알고 있는 ‘그것’ 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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