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Miluju tebe」





 

  

 

5.

Miluju tebe

 

 

 

***

 

세나 이즈미가 운 날이 있었다.

서툴게 잡아당기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가 영원히 제 옆에 남아 있을 거라고 속단하던 나날의 일이기도 했다. 세나가 유우키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무언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던 날이기도 했다. 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서로 상처만 남았던 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유우키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린 세나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저가 똑똑히 쳐다보고 있음에, 유우키는 지금이 꿈인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마신 술냄새가 세나가 뿌린 청량한 느낌의 향수에 엉망진창으로 섞여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세나를 바라보았다’. 세나는 그의 시선과 똑바로 마주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마셨어, 라고 그가 물었다. 유우키는 콘서트 뒷풀이 때 한 잔 두 잔 손을 댔다고 대답했다. 반쯤은 사실이었다.

사실이 아닌 반절의 이유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 이름에는 반드시 세나 이즈미가 들어갈 것이다. 유우키는 손을 까딱거리다가, 그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세나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촬영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는 아직도 왁스로 고정해 올린 부분이 있었다. 유우키는 교복을 입을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엉덩이에 닿는 침대 매트리스가 그저 푹신해서 서러웠다.

은 그 때의 감정을 정확하게 내보내고 있었다. 먼지가 쌓여 흐려진 기억들은 마치 물에 잉크가 풀리는 것처럼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우키는 문득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엉망으로 붉어진 얼굴, 울렁거리는 속, 모든 걸 끊어내버리고 싶은 듯 저를 꼭 보고 있는 세나 이즈미. 울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유우키를 바라보고 있는 세나는 서릿발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서늘한 얼굴 너머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는 것을 지금의 유우키는 알 수 있었다. 유우키는 침대에 앉아서, 발을 움직였다. 세나의 집, 작은 방. 한 사람에게는 충분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모자란 방. 유우키는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그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보며 세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만이 둘의 세계를 돌리고 있었다.

그 날은, 특별한날이었다.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처럼 모든 사람들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날은 아니었다. 그냥, 둘 정도가 기념할 날이었다. 세나가 기억하고 있고 유우키가 잊은 날이기도 했다. 유우키에게 그 날은 우연히 자고 가게 된 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콘서트 뒤풀이를 하다가 전철이 끊겼고,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술을 마신 다음 기억할 수 있는 전화번호는 극소수였다. 그 중 세나가 있었고, 마침 뒤풀이 장소 근처에 세나의 집이 있었다. 그 뿐이었다. 그 무심한 사고思考는 사고事故일 뿐이었다.

오랜만에 발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나의 집은 여전히 서걱서걱했다. 갓 졸업한 스무 살 청년이 홀로 자취하고 있는 맨션은 혼자 살기엔 넓었지만 둘이 들어가기엔 좁았다. 그렇기에 억지로라도 들어오고 싶었는지도, 나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한 곳을 선택하기에도 애매한 느낌이었다. 소년은 벽에 붙어 있는 제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는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벽지도 흰 색, 가구도 흰 색인 살풍경한 방 속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우키의 포스터뿐이었다. 온 세상의 햇살을 담아 만든- 이라는 광고 카피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진을 이토록 깨끗하게 붙여놓는 이유에 대해서 유우키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짐작할 수 조차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의 방에서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포스터뿐이었다.

유우키는 세나의 어깨 너머만을 바라고 있었다. 유우-, 하고 그가 자신을 불렀다. 그제야 그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세나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만지는 순간 그 즉시, 닿은 자리부터 얼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표정을 보는 건 언제나 괴로운 일이었다. 유우키는 설탕 같은 말을 제 입에서 사탕처럼 굴렸다.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말들은 치아 뒤편이나, 입천장을 치고 스친다.

세나는 나는, 하고 입을 열었다. 그는 그 뒷말을 고민하는 듯 했다. 그는 유우키에게 끝까지 상냥했다. 세나는 그것이 제가 서툴게 휘둘렀던 사랑이라는 이름의 오만을 사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 듯 했다. 어쩌면, 풋내 나는 첫사랑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세나의 속을 전혀 모를 것 같았다. 유메노사키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유우키는 세나에게 수많은 연락을 했다. 잘 지냈어요, 부터 보고 싶어요-까지. 가끔은 이라는 말을 섞어 넣기도 했다.

놀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더 다가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애매한 줄다리기였다. 유우키는 그를 사랑해야 할 당위성을 찾고 있었다. 사랑해야만 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다면 오랜 방황의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애매하다는 말을 붙여서 설명해야만 하는 마음이었다. 가끔은 그의 생각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였고, 가끔은 일 분 일 초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의 마음은 봄 날씨와 같았다.

나는, 하고 세나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오랜 정리를 끝낸 것 같았다.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머리카락을 올리고, 교복 블레이져 대신 다른 옷들을 걸치고 있는 세나는 스무 살이었다. 어른스럽게 행동하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스물이란 졸업과 동시에 놓아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던 마음을 마주하기엔 모자라나 나이였다. 나는, 세나의 목소리는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유우 군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세나는 숨을 들이켰다가, 깊게 내쉬었다. 그는 목 끝까지 올려 맸던 넥타이를 내렸다. 괜히 속이 답답한 듯 굴고 있었다. 마음에 파도가 치는 듯 했다. 그 파랑이 어디까지 밀려올지 유우키는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왜 왔어? 세나가 물었다. 그는 유우키가 선을 과하게 넘고 있다고 충고했다. 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지 않느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세나는 최대한 유들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누구보다도 폭발하는 감정을, 그저 담담하게 늘어놓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뿐인 일이었다. 나는 왜 네가 나에게 그렇게 문자를 해대는지도 모르겠어. 눈에서 멀어지니까 이제야 안심 한 거니? 하지만 을 대하는 태도도 아니잖아, 어쭙잖은 상냥함은 상처밖에 안 된다는 거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유우 군이잖아. 세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사근사근하고자 했다. 입 안에 물기가 없어 목이 따끔거렸다.

무언가 변명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그것이 세나에게 좋은 대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우키는 제 손가락을 건드렸다. 그가 졸업하고 난 다음, 빈 자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이즈미 씨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전히 고등학생 때처럼, 있어줬으면 좋겠다. ‘사랑인 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우키가 밤을 지새우며 생각했던 모든 어리광을 담은 말들이 그의 혀 위로 올라갔다가, 목구멍에 상처를 내며 흘러갔다. 침묵과 함께 그 과정을 반복한 지 몇 분이 흘렀고, 유우키가 내놓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전철이 끊겼어요.”

.”

잘 데가 없었고.”

그래서 이즈미 씨가 생각났어요.”


그 뿐이에요. 이 근처에서, 있는 건, 이즈미 씨 밖에 없었고. 유우키는 천천히 대답했다. 세나는 할 말이 있는 듯, 마주친 시선을 돌렸다. 목이 답답한 것처럼 보였다. 오늘만이야. 더 이상 오지 말아줘. 한참을 고민한 다음 그가 꺼낸 말은 다음과 같았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먹었어? 그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그런 행동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 어째서 나쁜지는 유우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세나의 앞에 서면 행동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원래자신의 성격이라면 하지 않았을 것들을 하게 되었다. ‘유우키 마코토라는 사람의 기준점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꼭 회전축이 엉망이 된 인공위성 같았다. 궤도를 잃어버린 채로 우주를 떠도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조차 할 수 없었다. 저를 이루고 있는 바닥이 천천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생각을 하고 움직이면 후회를 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 행동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유우키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최악이라는 대단원을 향한 여정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내부에서부터 단단히 엉켜버린 실타래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술기운에 목이 말랐다. 갈증이 났다. 말라져 갈라진 땅처럼,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무언가 되고 싶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잡아줬으면 좋겠다. 손을 잡고, 이끌어주길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제 감정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방 좁으니까, 내가 소파에서 잘게.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가를 닦았다. 한 방울 씩 그의 눈물은 손등을 적셨다. 왜 우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았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우키는 손을 뻗었다. 제 손아귀에 잡힌 세나의 손목은 가느다랐다. 스무살과 열아홉살의 사이에 있는 벽은 너무나도 깊고 견고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런 사이가 아니었음으로. 그러게 될 수 없었음으로. 흐린 날의 바다처럼 요동치는 마음을 어떻게 가라앉힐 수 있을지 몰라, 유우키는 그를 끌어 당겼다. 이즈미 씨, 라고 부르자 세나는 엉망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유우 군의 형이지?”


세나가 물었다. 마지막 관계 정립을 위한 말이었다. 유우키는 그 말에 대한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이라고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 때와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유우키는 그 때의 행동을 체험하고 있었다. 모든 결말을 아는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비극적이다. 필름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이상한 부분도 싫은 부분도 어쩔 수 없이 재생 될 수밖에 없다.

세나는 잡힌 손을 놓지 않았다. 가만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는 고여 있는 연못처럼 있을 뿐이다. 그의 그 애매한 행동이 유우키에게는 희망이었다. 조금만 더 당기고, 다가와 준다면 서로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로의 세상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유우키는 꿈속에서 자신이 내린 결말에 절망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과거의 자신이 예전에 내린 결론을 마주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게 우물에 갇힌 개구리의 생각이었다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세계는 비틀린 채로 공전했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위성일 수밖에 없는 관계는 위태롭다. 옷 가져다줄게. 세나는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그는 유우키의 손목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좁은 방, 미닫이문으로 연결 된 작은 공간을 넘어, 세나는 제 옷을 가져다 줬다. 유메노사키의 체육복이었다.

유우키는 세나의 저지를 걸치고, 바지를 갈아입었다. 유우키는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멀리서 세나가 간식거리를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갈 썰고, 만드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는 그것을 한참동안 듣고 있었다. 뒤풀이가 있었고, 술을 마셨다. 그렇다면 배는 가득 차 있어야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그는 그저 걸신들린 것처럼 허기가 졌다.

부엌에서 고소한 향이 났다. 그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준비하고 있었다. 뒤늦게서야 나 밥 먹었어요, 라고 뒤늦게 변명처럼 말하자, 세나는 유우키가 알던 세나처럼 왜 사람을 괜히 고생을 시키냐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듣기 싫은 소리의 끝은 아이돌 그만 둬.’라는 목소리였다. 유우키는 비로소 궤도가 안정되었다고 느꼈다. 그 목소리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 날, 부른 배에 파스타를 우겨넣었다. 크림 파스타였다. 고소한 크림이 입 안에 따듯하게 맴돌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다음 Once를 봤다. 남자가 노래를 부를 때, 피아노를 치던 여자를 보면서 세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옛날 로맨스 영화, 정말 싫으니까- 라는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둘은 새벽을 지새웠다. Falling Slowly가 흐를 때부터 그는 유우키의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손을 잡았다. 저항하지 않았다. 놓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Miluju tebe, 하고 화면 속 여자가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화면 속 남자가 말했다. 그 장면에서 세나는 텔레비전의 화면을 껐다. 너무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였다. 그는 리모콘을 소파 깊숙이 넣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잘 거니까 들어가. 세나는 차갑게 말했다.

위화감이 번졌다. 그는 그들의 서사를 알려주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다른 언어를 들려주기 싫은 것 같았다. 그는 거실을 정리했다. 테이블 위에 어지러져 있던 물건들이 열을 맞추어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늦었어, , 라는 말을 세나는 주문처럼 반복했다. 유우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에서 여자와 남자가 부르던 노랫소리가 내내 울렸다. 유우키는 다시 여자가 한 말에 대해 물었다.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감추고 있으니 알고 싶었다. 치기어린 오기였다. 세나는 언제나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제가 품은 감정을, 자기가 안고 있는 생각을, 겪어왔던 전사를, 저 혼자서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런 행동에 샘이 났다. 하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따.


무슨 뜻이에요?”

영화 끝날 때 까지 안 나와. 나 이런 거 싫어해.”

무슨 말인데요.”

내가 너한테 듣고 싶은 말.”


완전 싫어해, 정도.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하품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잡을 수도 없었다. 유우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까지만, 같이 가 줘요, 라는 어리광을 부렸다. 침대에 눕고 나서는 내가 잘 때 까지만 기다려줘요, 라고 말했다. 세나는 순순히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세나를 보기 위해 눈을 돌리면, 문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 쓰다듬어 줘요, 라는 말에 세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무드등을 켰다. 시야가, 번지는 세나의 모습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천천히 유우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무슨 말을 할 법도 했지만, 아무런 목소리도 내질 않았다. 그의 손이 유우키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그대로 세나의 표정을 보는 건 매우 힘든 일이라, 유우키는 포스터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멀게 보이는 포스터는 웃고 있었다. 모든 가구, 모든 기물이 무채색인 공간에서 홀로 색이 있는 것이었다. 유우키는 무드 등을 껐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암전에 휘말렸다. 이제 자. 세나는 명령조로 말했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자는 척을 했다. 세나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숨을 고르게 쉬었다. 잡은 손에 힘을 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멀어지지 않았다. 다만, 다만,


울 뿐이었다.

그는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 , 하며 목에서 막힌 소리를 내다가, 이내 토해내듯 울었다. 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눈물을 닦는지 피부가 거칠게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고장난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유우키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유우키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있지, 유우 군, ‘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잠든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듯 구는 행동이 짜증났다. 세나가 흘리는 눈물이 볼에 닿아 제 것처럼 흘렀다. 세나가 히끅이는 소리는 그들의 세상을 비오는 날처럼 만들었다. 왜 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우키는 잡은 손을 잡아 당겼다. 세나의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입술을 마주댔다. 변명이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유우 군, 이라는 호칭 대신 그가 부르는 제 이름이 듣고 싶었다. 떨어진 입술 새로, 유우키는 이즈미 씨,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 인가요? 라고 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말을 듣는다면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릴 것 같아 서둘러 입을 막았다. 숨과 숨이 얽혔다. 아스라이 흩어지는 감정의 편린들을 두 사람 다, 움켜쥘 수 없었다. 거듭하며 갈구하는 손길에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을 뜬 다음 날, 세나는 자리에 없었다. 걷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것은 볕뿐이었다. 전날 있었던 행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기억에 남은 일이었다. 기다렸지만 세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 사람이 있기엔 충분하지만 두 사람이 들어있기엔 버거운 집은 황량하고 외롭기만 했다.

시계 바늘이 몇 번이나 돌았을까. 유우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세나가 돌아오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 되긴 싫잖아, 그는 울면서 말했다. 밤의 기억은 꿈과 섞여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관계를 지속하는 내내 세나가 울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모든 걸 불안해했고, 의심했다.

그는, 울었다. 그가, 울었다. 이는 유우키 마코토의 세계에서 굉장히 큰일이었지만 동시에 사소한 일이기도 했다. 유우키는 이날 밤이 그들에게 무언가의 스위치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진한 착각이었지만, 어린 마음에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 잘한 건 없는 일이었다. 둘 다 어렸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라도 애매한 구석이 없었더라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었을까, 유우키는 가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묻곤 했다. 하지만 낼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유우키는 눈을 떴다. ‘그 날의 꿈이었다.

악몽이라기에는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치부하기에는 그림자처럼 묵직하게 번져오는 꿈이었다. 나른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딘가 잊어버린 게 있는 것처럼 찝찝한 아침이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침대 시트를 더듬었다. 저가 만들어 낸 온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손 안에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기 전에는 주저했다. 그가 자신을 놓고 도망갈까봐. 간신히 좁혀진 거리를 박차고 사라질까봐. 유우키는 천천히 문에 제 귀를 댔다. 나무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누구와 누구의 이야기 소리인 것 같아, 그는 안심했다.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나이츠의 누군가일까, 생각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거실에는 세나만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으로 특선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유우키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인사했다. ‘어른인 세나는 상냥하게 인사했다. 밝게 웃는 얼굴에 잡힌 그늘은 없었다. 손을 흔들면서 웃던 그는 소파 쿠션을 끌어안고서,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우키는 카메라 렌즈를 응시했다. 카메라엔 붉은 등이 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세나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옛날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집중하고 있는 지, 그는 쿠션을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유우키는 조심스럽게 세나의 옆에 앉았다. 데자뷰가 느껴졌다. 익히 알고 있는 영화였다. 원스, 라고 말하자 조용히 하라는 듯, 세나는 그의 입술에 제 검지손가락을 얹었다. 유우키는 잠자코 그가 하는 데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간 텔레비전의 화면에서는 예전에 봤었던 장면이 흐르고 있었다.


Miluju tebe

화면 안의 여자가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화면 속의 남자가 대답했다.


세나는 그 장면을 응시하다가,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는 그 다음 장면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때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유우키는 꺼진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 뒤가 궁금해요, 라고 말했다. 세나는 쥔 리모콘을 건네주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라도 되는 양, 꼭 쥔 손가락 마디를 보다가 유우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일 해야지,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우키의 미간을 톡톡 건드렸다. 그 때와 같이, 서릿발처럼 보이는 표정이었다.

보고 싶으면 나중에 찾아서 봐.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폈다. 그는 유우키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유우키는 손을 뻗어, 그의 잿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유우키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찾아보는 건 의미가 없어요, 라고 말하자 세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약간의 정적이 그들 사이에 한겨울 날의 눈처럼 내렸다.


“Miluju tebe”


유우키는 그의 턱을 간질이며 말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겨울날의 따듯한 햇살이 뻗어 들어왔다. 다시 한 번 그 말을 발음하자 세나는 놀란 표정을 했다. 유우키를 바라보는 시선이 떨렸다. 세나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에 유우키는 입술을 입 안으로 숨기다가 입을 열었다.

그 날, 내가 말해줬으면 했다면서요, 뜻은 잘 모르지만. 유우키는 볼을 긁으며 말했다. ‘싫어해라는 뜻이잖아요? 라고 묻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해라는 말을 하는 건 좀 내키지 않았지만, 과거의 일을 말해서라도 그를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유우키 마코토와 세나 이즈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 내가 싫어해라고 말해줬으면 싶었어요?”

상관없잖아 그런 거.”


세나는 퉁명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는 다리를 모아 끌어안았다. 유우키는 그의 둥그런 정수리를 보다가, ‘싫어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듣고 싶어하는 마음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의 사랑은 직선적이었기에, 긴 길을 돌아가듯 에둘러 가는 세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듣고 싶었어요? 라고 재차 묻자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다가 살포시 웃었다. 모든 세나 이즈미가 좋았다. 사소한 행동들마저도 설탕물이 발린 것처럼 달았다. 그의 지친 구석을 진작 이해했어야 했는데. 포기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줬어야 했는데. 유우키는 그의 닫힌 문 앞에 섰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려 했다. 유우키는 심호흡을 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카메라 렌즈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녹화중이라고 알려주는 붉은 불빛에 그는 안심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이 한겨울 밤의 꿈이며, 이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에 기대어서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가 연기라고 생각해도 좋았지만, 유우키는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좋아해요.”


조금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유우키는 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 땅처럼 굳은 표정을 유지하다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정하려는 듯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유우키는 손을 뻗어, 그의 표정을 잡는 카메라 렌즈를 가렸다. 그는 넘치기 직전의 바다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이라는 이름의 바다에서는 파랑이 치고 있을 것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이죠, 사랑한다-의 좋아한다에요.”


나는 이즈미 씨를 좋아해요. 유우키는 부연설명을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 세나가 가장 바라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한계였다. 하루하루, 카메라 앞에서 사랑하는행동을 반복하는 것도 힘들었다. 모든 세상이 그를 향해 돌았으면 싶었다, 유우키는 정중하게 허락을 구했다. 세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지금의 둘은 서로 다른 주파수로 노래하는 고래였다. 유우키는 저의 목소리가 그의 채널을 통과해, 어떠한 의미로 정착하길 바랐다. 그는 다른 고래들이 들어주지 않아도 제 목소리를 바다에 퍼트리는 고래처럼,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언젠가 메시지가 닿을 거라고 믿으면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두근거림에 호흡하는 방법을 잊은 듯, 세나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다가, 대답 기다릴게요- 하고 말을 건넸다.

열여덟에서 셀 수 없는 발걸음을 걸어왔다. 예전의 자신이 하지 않을 말들을 하는 자신이 어색했다. 그는 자신의 이 변화를 세나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 세나의 손을 제 손에 겹쳐 쥐었다. 그는 불안함을 애써 목 너머로 넘겼다. 눈에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서툴고, 멋없는 고백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준비 되면, 말해줘요. 유우키는 애써 어른처럼 말했다. 세나는 아이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다고도 생각하면서도, 그 점이 뭇내 서운했다. 유우키는 세나의 손톱을 제 엄지로 가볍게 쓸었다.

완전 짜증나, 세나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너 주제에, 진짜, 짜증나. 세나는 반복 해 외우려는 듯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유우키에게 작은 생채기를 내며 박혔다. 하지만 유우키는 그의 행동이나 말소리에게 어떠한 이의도 재기하지 않았다. 그의 오랜 습관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우키는 카메라의 전원 버튼을 껐다.

낭패였고, 실패였다. 이는 패배이기도 했다. 붉은 버튼이 사라지고 그들의 연극에는 잠시 커튼이 커졌다. 암전이었다. 커튼 뒤의 배우가 다음 막을 위해 감정을 가다듬는 것처럼, 유우키는 치받쳐 오르는 제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티나지 않게, 깊게 숨을 쉴 때 마다 세나가 신경 쓰였다. 세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단단했다. 녹아내리지 않을 것 같은 그 얼굴과, 방 안으로 사라져버리는 뒷모습을 보다가 유우키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세나 이즈미는 울 기 전, 표정을 굳히는 버릇이 있었다.

 

 



 

***

 

미션이 나오는 날은 분주하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감긴 눈두덩이에 쉐도우가 발리는 느낌이 났다. 조금 연하게 해 주세요, 라는 세나의 오더에 네, 하는 상냥한 대답이 따라왔다. 집 안에 사람이 가득 차는 광경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카메라만 돌아갈 때가 편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말소리에 따라 눈을 살며시 떴다. 거실과 침실에 조명과, 카메라맨들이 서 있었다.

그래도, 메이크업을 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뭔가 을 하러 들어간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사심이 섞일 듯 말 듯한 무인 촬영보다는, ‘이며 연극이라고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는 촬영이 좋았다. 이거, 방송 봤어요? 세나가 물었다. 세나의 눈꼬리에 아이섀도우를 바르던 스탭은 음, 하고 망설이다가 예고편은 봤다고 대답했다. 그는 유우키 씨가 잘 해주는 것 같다면서 꺄르르 웃었다.


잘 해주는 것 같아요?”

, 저번 주인가? 유우키 씨가 크림 파스타 만드는 영상 떴는데.”

그래요?”

“‘남편의 비즈니스 안 찾아보나요?”

딱히 뭐, 항상 보니까요.”


세나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스탭은 익숙하다는 듯 꺄르르 웃다가, 유메노사키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설레게 다가갈 거라는 사족을 달았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이었지만 세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것이 부연설명을 하라는 요구로 들렸는지 그녀는 음- 하고 잠시 말을 망설였다. 그 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

학창 시절의 인연이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난 느낌이라 두근거리죠? 둘 다 서로에 대해서 언급 전혀 없었잖아요. 세나 씨, 졸업하자마자 이상형이 녹색 눈이 예쁜 사람에서, ‘망설이지 않는 사람’, ‘사람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 ‘장난이 적은 사람같은 걸로 바뀌어버리고, 유우키 씨도 딱히 세나 씨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없었고. 그녀는 사근사근하게 말하면서 웃었다.


내 팬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유우 군 팬이었죠?”

지금은 안 좋아해요?”


제 눈두덩에 브러시가 스치는 느낌이 없자, 세나는 눈을 뜨고 질문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렌즈를 계속 의식하고 있자, 그녀 또한 그곳을 바라보다가 호호 웃으면서 지금은 유부남이잖아요, 하고 대답했다. 스태프까지 참가하는 거대한 연극이었다. 세나는 엄지로 약지에 낀 반지를 굴렸다. 촬영 때만 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촬영이 연극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옷에 마이크를 달았다. 허리춤에 보이지 않게 마이크 팩을 차고 벙벙한 니트로 가렸다. 세나는 제 머리카락을 세팅하는 모습을 응시했다. 거울 안의 남자는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오늘 아침을 관통했던 사건 때문이었다. 식어버리기 전의 잿빛 머리카락이 가볍게 움직였다. 거울 속, 제 어깨 너머에서 유우키가 보였다. 그는 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빨랐다면 괜찮았을까- 세나는 멍청한 가정을 했다.

그는 유우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뒤에서 저를 보고 있던 유우키는 약간의 망설임을 담았다가- 손을 들어, 제 머리위로 흔들었다. 이나 사이가 싫었다. 그 간격이 잔인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세나는 제 연극이 무사히 커튼콜로 다가가길 바랐다. 같은 집에서, 같이 있다고 한들 결국 마음이 오가지는 않는다. 오늘의 그 멍청한 고백 또한 연기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유우 군치고는 선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우키 치고는 괜찮았다. 그래, 딱 그정도 감상이 어울렸다. 세나는 자꾸만 다가가려는 제 마음의 싹을 잘라냈다. 어린왕자가 바오밥나무의 씨앗을 매일 솎아내는 것처럼, 그는 매일매일 그를 한 걸음씩 싫어하기로 했다. 세나는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대 위에서만 통하는 규칙을 떠올렸다.

관객은 배우의 말과 행동이 모두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무대 위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전부 거짓이다. 또한 커튼콜이 시작됨과 동시에 무대 위에서 썼던 시간들은 0으로 돌아가며, 그들 사이에 쌓인 서사 또한 다음 회차 공연에서는 리셋되고 만다. 세나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이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 또한 연극에 포함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눈꺼풀에 사랑의 묘약을 바르는 상상을 했다.

모든 것은 거짓, 한겨울 밤의 꿈. 유우키의 좋아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애는 예전부터 어떤 상황에 몰입하는 데 능숙했다. 로맨스 영화를 보면 사랑하고 싶어 했고, 첩보물을 보면 저가 제임스 본드라도 된 것 마냥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이것 또한 감화된 것뿐이었다. 세나에게 조연출이 다가왔다. 그는 그에게 짧게 인사 한 다음, 이번에 촬영하게 될 장면에 대해 물었다.


둘이서 살면서 불편한 점이 있잖아요?”

딱히 그런 건 못 느끼겠는데. 유우 군에게 잘 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서로 결혼하면서 지켜 줬음 싶은 약속 같은 걸 정하는 거예요. 그런 거 한둘쯤은 있잖아요. 가령 빨래바구니에 세탁물을 안 넣는다던가.”


조연출은 그렇게 말하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세나는 따라 웃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피부에 닿는 스펀지의 감촉이 부드럽기만 했다. 뒤에서 유우키가 인터뷰를 따고 있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주 예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동모델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세나 또한 그 때를 회상했다.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추억은 흩어지기 때문에, 소중하게 가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세나는 그 날이후 새장의 문을 열었다.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회상할 수 있는 모든 트리거들을 치워버렸다. 그런 식으로 억지로 지워 간 추억들임에도 불구하고 잡초처럼 깊게 박혀있는 것이 있었다. ‘처음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것들은 세나의 안에서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그는 번져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유우키는 그 시절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인형 같은 시간 속에서, 손을 내밀어줬던 이즈미가 마냥 좋다는 말에, 세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볼에 스펀지를 찍고 있던 스태프가 고개를 들어 달라 요청했다. 잠시만요, 라는 제스처를 담고 그는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촬영은 어디서? 침실에도 카메라 다시던데.”

침대에서 두런두런, 손을 잡고 이야길 하는 모습을 딸 거예요.”

하기 싫다면?”


세나가 물었다. 조연출은 클라이맥스 정도는 지켜줄 거라고 믿는다고 대답했다. 짜고 치는 도박판에서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라고 세나가 넋두리처럼 말하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연극인 거잖아요, 라고 말하는 조연출의 목소리는 유달리 무겁게 다가왔다. 생각만 하는 것과 남의 목소리로 듣는 건 굉장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제 손톱만을 매만졌다. 눈을 감을 때 마다, 좋아한다고 말하던 유우키가 눈물에 닿은 잉크처럼 번져왔다.


목욕을 하고 싶었다

목이 잠길 정도로 물을 받아서, 좋아하는 향의 입욕제를 풀고 싶었다. 훈김에 손으로 가볍게 부채질을 하면, 따듯하게 피어오르는 온기와 함께 진한 겨울처럼 싸한 향이 번질 것이다. 발끝부터 천천히 미끄러지듯 욕조에 담기면,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습기가 귓가에 닿을 것이며, 귀를 먹먹하게 만들어서 온 세상이 세나 이즈미만 남기고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자아낼 것이다.

물에 닿은 근육은 천천히 풀어진다. 말랑말랑하고 노곤노곤한 상태가 되면, 그 때부터 호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곳에서 머리끝까지 담아, 따듯한 물이 두피를 적시고 지나가기를 몇 번 반복하면 괜찮아 질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서 실연을 겪은 여주인공은 언제나 목욕을 한다. 세나는 그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입은 상처를 오롯이 잊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상처에 물과 입욕제가 스며드는 시간은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 망각의 시간을 계산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욕조에 물이 받아지는 것을 가만히 보는 시간과, 몸을 담그는 시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훈김만이 들어찬 머릿속을 데우며 햇살을 받는 시간, 점심 메뉴를 고민하면서 발과 손을 깨끗이 닦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몸에 바디로션을 바르는 시간 정도를 더하면 된다.

하지만 그 일시적인 망각 후에는,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어진다는 것을 세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수락하지 말 걸.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메이크업 하고 들어갈 수는 없는데, 라고 망설이듯 말하자, 조연출은 오늘은 유우키 데이라는 설정이라 그가 마음대로 끌고 간다는 느낌으로 연기를 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세나는 다시 습기 찬 목욕탕을 생각했다.

이럴 거라면 외롭지 말 걸. 세나는 카메라 앞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을 꼭꼭 숨기면서, 마이크를 톡톡 건드렸다. 목소리에 목줄을 채우고, 행동을 만들어 낸다. 지금부터는 유우키를 사랑할 수 있다. 그는 그 시간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혐오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고 있던 유우키가 환한 얼굴로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추억을 모두 옥상에서 떨어트리고, 저도 그 아래로 낙하하고 싶었다. 제 날갯죽지에서 날개가 돋지 않을 것을 아는 추락은 언제나 비참하다. 세나는 유우키의 사랑이 마치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날개와 같다고 생각했다. 태양에 가까워지면 사라져버리는 그 가짜 애정에 대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세나는 큐시트를 받아 인터뷰 질문에 대해 확인했다.

유우키 마코토를 세나 이즈미가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나는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읽었다. 무대 위에 올라 간, ‘세나 이즈미역을 공연하고 있는 배우가 목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진심은 뒤로, ‘사랑이라는 거짓은 가면으로. 유리구두를 깨트린 신데렐라는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세나는 제 발 주변에 흩어진 깨진 유리의 환상들을 밟으며, 둘러 댈 말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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