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겨울 밤의 꿈

 

 

 

 


6.

한겨울 밤의 꿈

 

 

 


***

 


셋쨩 안-.”

기분 좋아 보이네.”

지금은 나의 시간이니까.”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번화가의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흐린 날임에도 불구하고, 빛은 바라지 않았다. 세나는 그 유한한 반짝임을 눈에 두다가, 리츠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 엔젤링 부근에 드는 원색의 조명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형 인간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돌려 말하는 것도 재능이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핸드폰 지도를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꾸물거리는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하늘이 비를 쏟는 모양이었다. 셋쨩, 나 얼굴에 비 맞았어, 리츠는 느긋하게 말했다. 세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츠키나가의 마음에 드는 가게는 대개 골목길 속에 있었다. 때문에 지도를 봐도 직관적으로 알 수 없었다. 세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로 난 샛길로 들어갔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명백한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손에 우산은 없었다. 어둑어둑한 골목을 더듬어 지나가는 일은 꽤나 어려웠다. 밤눈이 좋은 리츠는 길을 찾고 있는 세나의 고역 따위는 모르는 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익숙한 음이었다. 비긴 어게인? 하고 세나가 묻자, 리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며칠 전에 극장에서 재개봉을 했다는 정보를 알려주면서 언제 한 번 유우 군과 가 보라고 조언했다.


쿠마 군이 유우 군을 챙기는 거, 어색한 기분이네?”

그야 유우 군에게 관심을 둔 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나 예고편 굉장히 잘 보고 있거든. 리츠는 작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무언가 대답하기에도, 말을 더하기에도 애매한 기분이라, 세나는 입술을 입 안으로 감추었다. 어때? 라고 묻기에도 어색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았다. 어두운 골목길 안을 더듬어 가는 일은 여전히 어려워, 그는 벽에 한쪽 손을 대고 걸었다. 꼭 미로를 찾는 것 같네- 리츠가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다시 한 번 번개가 번쩍였다.

그들의 여정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포장되지 않은 골목길에 남은 자갈들이 그림자에 밟혀 소리를 냈다.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길을 몇 번이나 빙빙 돌고 나서 세나는 츠카사가 추천한 가게에서 만났어야 했다고 투덜거렸고, 리츠 또한 세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노인을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왕님 짜증나. 리츠는 손으로 이마께를 가리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세나가 보고 있는 스마트폰의 액정에 몇 개의 빗물이 눈물처럼 떨어졌다.

가로등의 희끄무레한 불빛을 따라 수 분을 헤매고 나서야 그들은 작은 이자카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술집 바로 옆에 있는 가로등은 꽤나 어두웠다. 굳이 골목 한쪽을 막으면서 주차해둔 세나는 그가 어떻게 차를 이곳까지 끌고 왔는지가 궁금했다- 츠키나가의 차를 확인한 둘은 잠시 이자카야의 차양 아래에 멈추었다. 세나는 제 바이크의 열쇠를 리츠에게 건넸다. 리츠는 차키를 쥐고, 츠키나가의 차 뚜껑을 세게 긁었다.

나름대로 소심한 복수를 마친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은 가게에 먼저 와 있던 세 명이 인사했다. 그들의 앞에는 맥주와 꼬치안주가 늘어져 있었다. 카사 군이 술을 마시는 걸 볼 때 마다 어색해. 세나는 인사 대신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스오우는 잔뜩 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인이 느긋하게 틀어둔 텔레비전 소리에 빗소리가 천천히 섞여 들어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꽤나 큰 비인 듯, 이자카야의 차양막을 치고 내리는 소리에 작은 말소리가 가려질 정도였다. 나루카미는 그들의 외투를 받아 걸어놓다가, 그들이 젖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이 매우 유쾌하다고 생각했는지 호들갑을 떨며 웃었다.


어머, 이즈미쨩, 리츠쨩, 운이 좋았잖니!”

하아?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났다고. 역시, 역까지 차 태워줘.”


세나는 그를 힐끔 보다가, 츠키나가를 보며 말했다. 츠키나가는 양 손에 양꼬치를 들고 있었다. 입에 든 것을 다 씹고 말할 정도의 상식은 남아 있는지, 그의 왕은 열심히 입을 오물오물 거렸다. 세나는 왕의 잔에 술을 따랐다. 땡큐, 라는 말은 그의 입속에 든 양꼬치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았다. 차나 태워줘, 세나는 제 등 뒤 쪽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창문 너머로 거센 빗줄기가 보였다.


어쩌지 세나! 대리 부를 생각이라 자리가 없는데!”

카사 군을 버리면 되잖아? 이제 혼자서 지하철 타고 다닐 나이라구?”

세나 선배는 역시 악마군요!”

새삼스럽게. 그러니 선배들 얻어 타고 다니는 건 그만 두도록 해.”

오늘따라 더 나쁜 것 같습니다.”

-. 나는 언제나 같다구?”


세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옆자리에 앉은 리츠가 맥주 캔을 따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왕님 단골 가게야? 세나가 묻자, 츠키나가는 단골은 아니지만 자주 오고 싶은 가게라고 대답했다. 스오우는 매운 맛이 나는 닭염통 꼬치를 우물거리고 있었고, 나루카미는 한 손으로 핸드폰 액정을 꾹꾹 누르며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세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제 캔을 땄다. 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섵불리 민감한 걸 묻지 않을 것도 같았다. 세나는 마음을 놓고 안주로 나온 유자채절임을 입에 넣어 오물거렸다.

상큼한 맛이 이 안에 가득 퍼졌다. 간만에 하는 편안한 식사였다. 집안에 있는 건 답답하다. 기다려 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게 유우키 마코토라는 게 문제였다. 트릭스타가 휴식기라는 말이 사실인지, 그는 저녁쯤엔 언제나 집에 있었다. 손이 덜 가는, 큰 개를 기르는 기분이었다. 아침엔 늦게 일어나지만 밥은 꼬박꼬박 잘 먹고 혼자서도 잘 노는 것 같았다. 외로움을 타는 것 같진 않았지만 퇴근 할 때에는 언제나 현관 쪽으로 나와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이래서 개를 기르는 구나 생각하면서 세나는 작은 화로 위에서 굽고 있는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츠키나가는 미식가였고, 쇠고기의 맛은 좋았다. 육즙과 양념이 적당히 스며 있어서, 씹을 때 마다 즐거웠다. 세나는 유우키의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도리질했다. 저녁은 잘 먹고 있을지 걱정이 됐다. 완전히- 개를 기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셋쨩의 유우 군은 잘 지내?”


세나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리츠가 입을 열었다. 세나는 얼굴을 구겼다. 밖에서 번져오는 빗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입에 음식이 들어 있어 말하지 못한다는 듯, 세나는 입에 들어있는 고기를 느릿하게 씹었다. 질문이 오가지 않는 테이블은 어색하기만 했다. 나루카미는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식으로 리츠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 하는 파열음과 아파~ 하고 나른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잘 지내겠지.”

왜 남 일처럼 말해?”


셋쨩 유부남이면서. 리츠는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츠키나가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와하하, 세나, 내가 보지 않은 사이에 결혼 한 거야? 이거 아쉬운 걸! 잠깐, 누구와 결혼했는지는 알려주지 마, 망상하게 해줘! 언제나와 같이 정신없이 끝나는 그의 말에, 세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스오우는 가상결혼프로그램에 나이츠를 대표해서 세나가 나간 게 기억이 안나냐면서 츠키나가의 망상의 맥을 끊어버렸다. 그는 분한 얼굴을 하더니, 스오우의 손에 들려 있던 염통꼬치를 뺏어버렸다.


남이잖아. 결혼 한 것도 아니고.”

유부남이면서. 결혼 했잖아.”


화면 안의 일이지만. 리츠는 불에 올려둔 고기를 뒤적였다. 뒤집으려면 하지 말라는 츠키나가의 엄명이 내려졌다. 고기는 불에 올린 순간부터 두 번 만 건드려야 한다는 철학 강의가 이어졌고, 나루카미는 소고기도 두 번 뒤집어야 하느냐 물었다. 스오우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서민 식당식 소고기와 돼지고기에 굽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방금 안 듯한 표정이었다. 세나는 맥주를 입에 댔다. 목넘김이 유난히 묵직했다.


아무튼, 남이야.”


그는 단정 짓듯 말했다. 리츠는 아쉬워 보이는 얼굴을 했다. 그는 불만이 있다는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가, 여러 마디를 툴툴거렸다. 좋은 소식 가져다 줄 줄 알았어. 어린아이의 사랑을 구경하는 건 노인의 유일한 즐거움인데 말야. 리츠는 츠키나가가 눈독들이고 있던 고기를 집어 제 입 안에 넣었다. 그의 왕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세나는 제 쪽에 놓였던 고기를 츠키나가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도 항상 같이 있잖아.”

하아? 하우스메이트일 뿐인 걸.”

셋쨩, 여전히 얼음 같구나. 좀 더 남편한테 신경 써 주는 건?”

그건 구속이지. 내가 걔의 삶을 감시해야 하는 의무는 없거든?”


세나는 츠키나가의 손에 들려 있던 염통꼬치를 뺏어, 다시 스오우의 손에 돌려주었다. 그 다음 그는 간장을 발라 구운 곤약꼬치를 들어, 윗부분을 우물거렸다. 하우스메이트라니 너무 거리감이 멀게 느껴지는 단어야. 리츠는 턱을 괴면서 말했다. 나루카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츠키나가는 경쾌하게 웃더니, 구운 파를 제 접시로 가져가면서 유우 군이 누군데? 하고 물었다.

아무튼 납치까지 했던 셋쨩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는 명백히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의 마음을 흥밋거리로 삼는 것 같은 모습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터치하고 싶진 않았다. 세나는 다시 맥주를 마셨다. 할 말이 떨어졌을 때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오늘 따라 술이 술술 넘어갔다. 그래서 유우 군이 누구야? 츠키나가가 뜬금없이 물어왔다. 나루카미는 세나의 눈치를 보다가, 글쎄- 하고 망설였다. 그것이 뭔가 특별함의 스위치를 올렸는지, 츠키나가는 인스피레이션이- 하고 크게 외친 다음, 대답하지 마, 망상하게 해줘! 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스오우는 츠키나가의 생각의 맥을 끊고 움직였다. 그는 값싼 체리를 젓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트릭스타의 안경 쓰시고, 블론드인 선배님입니다. 기억 안 납니까?”


스오우는 주변에 신경을 쓰고 살라는 식으로 말했다. 많이 건방져졌어, 리츠는 그렇게 말하며 턱을 괴었다. 그는 이 상황이 퍽 재미있는 듯 했다. 츠키나가는 제 망상이 방해 받았음에 짜증을 냈다. 하지만 그는 부연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우 군이 기억나질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꿀 같은 느낌의 금발, 기억 안 나십니까? 스오우는 유우 군에 대해 부연설명을 했다. 예전보다 체격이 좀 더 좋아졌지만 호리호리하고, 목소리가 좀 상냥한 느낌이 들고, 스오우는 핵심이 아닌 곳을 에둘러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노력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나는 자조하면서 맥주를 서둘러 넘겼다.


예고편 봤어.”


리츠는 하품을 했다. 오늘 따라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말하고 있었다. 기껏 돌려 둔 화제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메트로놈의 바늘 위에 탄 기분이었다. 세나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리츠는 딱히? 라고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창 밖의 빗소리가 저 대신 분을 내보이는 것 같다는 게 세나이 즈미의 최대의 위안이었다.

아까 긁었어야 하는 건 츠키나가의 차 뚜껑이 아니라, 리츠의 속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의 말에 스오우가 동의했다. 나름대로 두근거리게 뽑아놨다는 감상을 늘어놓는 막내의 말에 공감하는지, 리츠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오래 산 노인이 볼 건, 그저 젊은 아이들이 연애하는 거라고 말하는 리츠의 목소리는 빗소리처럼 느릿했다. 츠키나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루카미는 지금 이 자리보다, 핸드폰 속의 연인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정말이지 한 번에 융합되지 않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곤약을 씹었다. 짠맛 너머로 느껴지는 미미한 단맛이 어설프게 스며 있었다.


뭘 봤는데.”

셋쨩의 유우 군이랑, 셋쨩이- 침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거.”

하아? 그런 장면이 있다고?”

둘이 규칙을 정하셨습니다.”


서로 존댓말 쓰기랑, 어디 나갈 때 포스트잇에 적고 나가기, 밥을 세나 선배가 하셨으면 설거지는 유우 군선배가 하기, 적어도 저녁은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랑, , 스오우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이야기했다. 그는 이 이야기의 애청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거 다 짜고 하는 건 아는 거지? 세나는 문득 물었다. 스오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리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작게 하품했다. 송곳니가 보였다, 입술 안으로 사라졌다.


둘이 침대에서 사근사근하게 있어서 사귀게 된 줄 알았지.”

“2주 동안의 하우스 메이트.”

설레게 해줘 셋쨩- 그 때, 제법 예쁘게 웃었잖아?”


요즘 보고 있던 연속극도 끝나서 이제는 한겨울 밤의 꿈만 기대하고 있단 말이야. 끝나기 전까진 사귀고 있다고 믿을래. 노인의 즐거움을 빼앗지 말아줘.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내밀었다. 나이를 몇 살이나 먹었는데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행동인지, 세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쿠마 군은 팬픽 취향인 거야? 그는 맥주를 두어 모금 마신 다음, 짜증난단 어조로 물었다.

글쎄, 그것 보다는 셋쨩이 어서 정착하길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이랄까.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세나는 어깨를 움직였다. 츠키나가는 유우 군, 유우 군, 하고 염불을 외듯 중얼거렸다. 기억 속 깊은 곳에 묻힌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한 번 망상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만두지 않는 버릇은 여전했다. 세나는 다시 맥주로 목을 축였다. 위가 무거웠다.

거짓말이라는 거 다 알고 있잖아. 세나는 쥐어짜듯 말했다. 리츠는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단지, 미리 환상을 깨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게 저와 같은 그룹의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적은 것 같기도 했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나루카미는 리츠에게 이제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술기운이 오늘 따라 빨리 도는 듯 했다.

멀리 있는 텔레비전에서 유우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더, 저기의 금발이 유우 군선배입니다! 스오우는 마침 좋은 걸 발견했다는 듯, 화면에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작은 술집에 있는 것 치고는 큰 텔레비전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세나가 처음 보는 화면이었다. 부드러운 BGM이 깔렸다. 비긴어게인lost stars였다. 집에서 기다리는 거 힘들어요, 화면 안의 유우키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나만 기다리는 것 같아요.

그거야 내가 일을 하니까. 유우 군, 배우자가 능력이 있으면 좀 더 감탄하지 그래?


화면 안의 세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서운 해 보이는 유우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몇 초 동안 그의 얼굴을 잡았다. 미묘한 표정 변화 하나라도 캐치하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세나는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빗소리가 더욱 거세져 텔레비전 소리를 덮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바라는 일은 언제나 이뤄지지 않았다.

주황색 무드등 불빛이 두 사람 사이에 가득 퍼졌다. 그 불빛 때문에 오히려 연출하고 있다는 게 강하게 느껴졌다. 그 이질감에 리츠는 얼굴을 찌푸렸다. 잘 좀 만들어 주지, 라는 타박에 나루카미는 저게 최선이었을 거라고 말하면서 난감한 듯 웃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때, 이불 속에서 손이 꼼질거렸다. 유우키의 손은 천천히 다가왔다. 이불을 팡팡 두드리며 더듬거리고, 더듬거리다가 새끼손가락을 먼저 잡았다. 그는 그것이 어떠한 언약이라도 되는 것 마냥 소중하게 쥐고 있다가, 이내 손을 더 깊게 엮어왔다.

손과 손이 닿는 것뿐인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면에 잡히지 않는 부분이었지만 놓기 싫었다. 그래서 모르는 척, 못 이기는 척 힘을 주어 떼내지 않았다. 밀어내지만 여지를 주고 있었다. 세나는 자신이 이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인질 처음 알았다. ‘그 시기의 유우키가 했던 짓을 자신이 똑같이 답습하고 있었다. 이런 애매한 상냥함이 그를 망가뜨린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당해봤으니 알고 있었다. 밀어내려면 끝까지 밀어내야 했다. 세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상단에 뜨는 한겨울 밤의 꿈의 로고가 유달리 눈에 밟혔다.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우키의 모습이 사라지고, 인터뷰 화면이 떴다. 나루카미가 물었다. 집에 혼자 있는 거 재미없어요?, 그 상냥한 목소리에 유우키는 음, 하고 망설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 저는 휴식기고고정 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없으니까, 라고 입을 연 유우키는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을 해요.

강아지? 멍멍?


나루카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나가 없지만 있는 것 같은 빈 집에 있는 게 지루하다는 말을 꺼냈다. 놀아줄 주인이 없는 강아지 같다면서 곤란한 듯 웃었다. 물론 남겨준 포스트잇에 적힌 문구를 보다보면 시간이 훌훌 가긴 하지만, 그래도 빈자리가 크다고 대답했다. 그는 여백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고도 대답했다. 여태까지 했던 인터뷰 중에 저게 제일 잘 따였잖니, 나루카미가 실곤약을 다 씹고, 기쁜 듯 말했다.


분명 결혼하기 전 까진 둘 다 혼자였을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지금은혼자인 게 어색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유우키는 머쓱한지, 제 뒷머리를 쓸었다. 나도 혼자였고, 이즈미 씨도 혼자였을 텐데, 나는 이 여백을 견디는 게 힘이 들어요. 사실 방 안에 같이 있어도 뭔가 특별하게 같이 하는 것도 아닌데 같이 있었으면 좋겠고,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계속 내 생각을 해 줬으면 좋겠어요. 유우키는 천천히 말했다. 이즈미 쨩의 일방적인 구애에 익숙해진 모습이라며 화면 안의 나루카미가 감탄조로 말하자, 화면 속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방적이지 않았어요, 내가 눈치를 늦게 챘고,

응응

그리고, 우리의 타이밍이 애매해서, 내가 알려주는 게 늦었어요.

뭘 알려주는 게 늦은 거야?

내가 이즈미 씨를 보고 있다는 걸. 우리가 서로를 보고 서 있다는 거…… 조금 오글거리나?

아니 오글거리진 않아. 그냥 그게 마코토쨩의 감정인 거잖니?


화면 안의 나루카미는 방긋방긋 웃었다. 그 웃음에 안심했는지, 유우키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떨리는 시선, 떨리는 손길은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방송물을 오래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나타나는 순수함이 유우키 마코토의 장점이었다. 그는 첫사랑을 하는 것 같은 고등학생처럼 풋내나게 웃었다.

눈 내리던, 그 날 같았다. 세나는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화면 안의 유우키와, 밖의 자신. 그 둘을 제외한 모든 세상이 소거된 것 같았다. 진공상태의 유리관에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유우키는 볼을 긁적이면서 카메라 렌즈를 피하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앳된 유우키는 더 이상 없음을 아는데도, 세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그를 찾고 있었다. ‘그 날유우키가 썼던 어리숙한 향수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듯 했다. 서러웠다.


그냥, 좀 늦은 거죠. 그래서 이즈미 씨가, 자기가 혼자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거고. , 지금은 괜찮지만. 결혼 했으니까, 이제 내 남자니까…….


유우키는 자신의 말을 수습하려는 듯, 성급하게 말했다. 말에 과하게 담긴 사랑들이 길 잃은 별들처럼 흩어졌다. 먼지 우주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세나는 유우키의 고백이 어느 시점의 자신에게 해주는 말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가 보내는 신호들을 세나는 해석할 수 없었다. 두 우주의 언어체계는 확연히 달랐다. 모스부호와 음성언어 사이의 거리일 것이다. 세나는 해석할 수 없는 말들을 진짜라고 착각하게 되는 자신이 가장 미웠다. 유우키를 담고 있던 화면이 다시 번지더니, 한겨울 밤의 꿈의 첫 번째 방영 일시를 알려주었다.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츠키나가가 으음, 하고 고민을 가득 담은 소리를 냈다. 얼굴을 보고서도 모르는 겁니까? 하고 스오우가 물었다. 그는 여전히, 츠키나가가 유우 군이 누군지에 대해 떠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세나는 츠키나가가 일부러 잊은 척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언제나 재워주면서, 술을 같이 마셔주면서 모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츠키나가는 하품을 했다. 그는 모든 게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둘 사이에 얽힌 감정에 대해서 제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게 분명했다. 세나는 자신도 그렇게 쿨해질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에 풀어진 실곤약 같은 기분이었다. 츠키나가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얼굴 정도는 보면 안다고? 라고 말한 그는, 세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좋아했었지?”

.”


세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왕의 말에는 얌전히 대답하는 것이 기사의 소양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대답한 건 아니었다. 세나는 말로써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것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말로 확정짓는 단계가 필요하다 여겼다. 츠키나가의 질문에 바로 대답했던 것은 이런 의도가 다분히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성급하게 마신 술이 파도에 점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글세


그 때 만큼은 아니야. 세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리츠는 김이 샌 표정을 하고 있었고, 스오우는 방영 날까지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제법 맹랑한 말이었다. 그들의 막내는 가끔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곤 했다. 이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질척거리는 사랑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스오우가 부러웠다. 아픈 머리에 손을 댔다. 평소에는 넘어갔겠지만, 오늘 따라 마음에 말이 턱턱 걸렸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거야? 세나가 물었다. 스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 선배의 유우 군께서는 꽤나 좋은 액터이신 모양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소한 행동이나 시선이 설렌다는 부연설명을 했다. 리츠도 그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세나의 현실을 화면 속 먼 이야기를 대하는 것처럼 재잘거렸다.

낫쨩도 그렇게 생각할 걸? 리츠는 그렇게 말하면서 잔을 들었다. 세나는 나루카미를 쳐다보았다. 바른대로 고하라는 그 눈빛에 나루카미는 으음, 하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나는 그들의 입을 모두 틀어막고 싶었다. 데운 사케 시켜줘. 세나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여전히 빗소리가 강하게 들려왔다. 그는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세나에게로 쏠렸다.


더 이상, 말하지 마.”


나 진지하다고? 화 낼 거야. 용서 하지도 않을 거고.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애써 웃었다. 너희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도 완전 짜증나고,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도 완전 짜증나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말아줄래? 세나는 똑바로 발음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라, 그는 가슴께를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막힌 목이 터지려고 했다. 여기서라도 편하게 있게 해 줘. 그는 어리광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죄송합니다, 라고 스오우가 입을 열었고, 리츠도 작은 소리로 미안해, 라고 속삭였다. 나도 예민해서 미안. 세나는 그렇게 사과하며, 뒤를 돌았다. 여전히 빗줄기는 세게 내리치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저가 다 먹어버리고 싶다는 듯 기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먹먹함이, 도돌이표를 타고 돌았다. 보이지 않지만 공중에 머물러 있는 먼지처럼, 그들이 하고 싶은 말들은 목적에 닿지 못하고 부유할 뿐이었다. 연극이라는 거 알고 있잖아, 라고 세나는 속삭였다. 사케와, 감자고로케가 나왔다. 대답이 없는 테이블에서 젓가락이 멤도는 소리가 들렸다. 츠키나가는 담뱃곽을 들고 일어났다. 카멜이었다. 열렸다 닫히는 문에서는 끼익, 하는 파열음이 났다.

더운 사케가 세나의 앞에 놓여졌다. 밖으로 나간 신사분이 보내신 겁니다, 라는 주인장의 넉살에,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잔이 적당히 따듯했다. 그는 차갑게 식은 손끝을 데웠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엉켜버린 감정들이 단조처럼 울었다. 즐거워야 할 모음이 이런 모습이 되길 바란 적은 없는데. 그의 손가락들이 따듯한 컵 위를 연주하듯 오갔다.


우산 없는데.”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 세나는 입을 열었다. 잠시 담배를 태우러 나갔다 돌아온 츠키나가는, 저만 차를 타고 돌아갈 것이라 선언했다. 누가 차 앞뚜껑을 긁어 놓았다고 투덜거렸다. 그에게서 비냄새와 담배냄새가 났다. 세나는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유우키가 있었다. 남자 티가 나는 얼굴과, 예전보다 더 자란 키, 벌어진 어깨. 세나는 변해버린 것들을 찾으며 감자 고로케를 찢어 입 안에 넣었다.

뜨겁고 포실포실한 감자를 입 안에 넣고 가득 씹었다. 세나가 입을 오물거릴 때 마다 그들은 한 마디 씩 말을 걸어왔다. 나루카미는 제 차를 타라 말했다. 비를 맞고 골목길만 지나간다면 괜찮을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벌써부터 헤어질 소리를 하는 건 이르다면서 곧 비가 그치리라 말하는 리츠는 세나가 대답해주지 않자, 빈 입에 맥주를 마셨다. 서먹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고 있던 스오우는, 가방을 뒤져 작은 삼단 우산 하나를 세나에게 쥐어 주었다. 카사 군 쓰고 가, 라는 말을 듣기 싫다는 듯, 그는 세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화장실 쪽으로 아예 자리를 떠 버렸다.

엉망이 된 분위기 속에서는 흥이 나질 않았다. 미안, 하고 사과하는 말에 모두가 대답해주지 않았다. 감자고로케 속 전분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사케를 들이켰다. 억울함에 술기운이 올라갔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건 아니에요, 화면 속의 유우키가 속삭였다. 눈을 감자, 목소리는 더욱 가까이 들렸다. 손을 잡아도 괜찮은 지 알 수 없었다. 유우 군이 아이돌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턱을 괴었다. 뜨거운 사케를 홀짝일 때 마다, 술기운이 치받쳤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술잔을 연다라 비웠다. 머리가 띵했다. 물을 마시는 대신 맥주를 들이켰다. 뜨거웠던 위장이 차가운 기운에 잠식당하는 느낌이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혼자만의 질주를 말리려 나루카미가 말을 걸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츠키나가는 손을 뻗어 그의 개입을 저지했다. 쏟아내게 놔두라는 뜻이었다.

그의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 지 세나는 그저 서러웠다.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면 유우키가 있다. 졸린 얼굴로 눈을 비비면서 나올지도 모르고, 침실에서 자면서 몸을 뒤척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반응보다 중요한 건, 세나의 집에 유우키 마코토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바라왔던 상황이지만 달갑지 않았다. 사랑에 빠지는 게 무서웠다. 더 이상 자신을 잃어버리기 싫었다.

상대방보다 애정 크기가 큰 사랑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의 작은 반응 하나에 과하게 흔들러버린다. 언제나 세계가 붕괴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행동은 마치 사랑이라는 이름과 희망이라는 이름의 작은 발판에 두 발을 디디고 지지하고 있는 것조차 과분하다는 것처럼 다가온다. 이는 다,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2주 간의 마법, 그 짜릿한 순간에 빠지기로 생각했던 것은 자신이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기는 싫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때를 쓰는 것 같은 모양세였다.

리츠는 손수건을 건넸다. 세나는 손수건 대신 술잔을 쥐었다. 다시 한 번 잔이 비워졌다. 츠키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저번에도 그랬어, 하고 쓸모없는 부연설명을 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나의 볼에서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 주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기사를 보는 건 언제나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술기운이 펑펑 돌았다. 무엇이라도 말해야 할 거 같았다. 세나는 입을 열었다.


아이돌 그만 둬- 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세나가 입을 열었다. 그는 스오우의 빈자리를 보다가, 츠키나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푸스스 웃었다. 애써 웃는 모양이었다. 그의 왕은 말해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재의 눈으로 보면 기나긴 짝사랑이 어떻게 뒤틀려 왔는지, 어떤 식으로 꼬여 있는 지가 보이는 걸까? 세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세나는 음, 하고 망설이다가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 날의 일이었다.


왕님, 나는 유우 군이 아이돌을 그만 두길 바랐는데.”

알고 있어 세나.”


츠키나가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세나의 오랜 버릇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후회했던, 슬픈 일들을 쏟아낸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담겨 있던 목소리들은, 먹구름 속에 있다 대기중으로 낙하하는 비를 닮았다. 기사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왕의 의무였다. 츠키나가는 며칠 전에도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놓는 세나를 바라보았다. 우는 건 어울리지 않아, 라고 타이르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꺼낼 타이밍이 아니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반짝이던 제 기사가, 고작 사랑 하나 때문에 이렇게 지쳐 있는 건 그다지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촬영을 할수록 세나는 점점 메말라갔다. 츠키나가는 그들의 촬영 첫 날을 반추했다. 집에 못 들어가겠다고 퉁명스럽게 말하던 세나는 절박해보였다. 무언가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우키 마코토와 세나 이즈미 사이의 서사에서 츠키나가 레오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고작 세나가 불쌍해라는 이유로 끼어들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아예 안 보이고 소식도 끊겨버리면

.”


츠키나가는 잘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는 그 모습에 안심한지 푸스스 웃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한 마디를 꺼내는데도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나루카미가 그에게 생수를 건넸다. 찬 물을 천천히 마시면서, 세나는 제 입에서 나올 말을 골랐다. 흐지부지하게 결착을 낸 감정들이 엉망으로 엉켜서 그의 목을 막고 있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츠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날 걔는 파스타를 먹었어.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 고등학생 주제에 술을 마시고, 내 방에서 잤을, 거야 아마도. 그 뒤는 나도 몰라, 나는 그 날 밤을 걷고- 걸어서- 나루 군한테 갔으니까. 사실 학교 다닐 때에는, 그 애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아이돌 그만 두라고 설교 했던 건데,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이처럼 웃긴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그는 잔에 든 사케를 입에 털어 넣었다. 목 끝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꺼지고, 일반인이나 돼! 라는 마음으로


그 날, 아이돌 그만 두라고 마지막으로 말했어. 이제 갈라지자- 라는 의미였는데 유우 군은 그걸 몰라. 그래서 내가 멀어지려고 유우 군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섭외가 들어와도 안 갔고, 잡지 촬영도 같이 하자고 하면 안 한다고 했어, 그래서 안일해졌나봐, 안일해져서, 이상한 프로그램에나 나가고. 세나는 츠키나가를 보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는 이해한 다는 듯, 세나의 잔에 찬 술을 따랐다.


어제 걔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어.”


Miluju tebe- 라고 말해줬는데- 세나는 말을 하다 말았다. 지속되던 독백 속, 갑자기 찾아온 돌발 상황이었다. 그 어색한 침묵에 세나는 마침표를 찍기 위해 웃었다. 목이 메였다. 츠키나가는 진지하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 유우 군 좋아해. 세나는 자신의 세상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그 애는 지금, 연극에 취해 있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잔에 든 술을 털어 냈다. 위가 아팠다. 빗소리가 거셌다.


유우 군은 너무 물러.”


그래서 밀어내지 않는 거야. Miluju tebe라고 말해 주는 건, 결국 거짓말인 거지. 나랑 유우 군은 원스비긴어게인처럼 될 거야. 결국 이어지지 못하는 거지. 우리는 궤도를 잃어버린 별들이야.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좋잖아, 라는 말은 주문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게 유우키의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건 아니에요.

나는 내 지금을 믿는 것뿐이에요.”


세나와 유우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예전의 자신이 유우키에게 했던 말이었다. 너는 날 어디까지 놀리고 싶은 거니. 세나는 텔레비전 속의 유우키와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그는 건배하듯 잔을 내밀었다. , 하는 술취한 소리와 함께 허공과 잔이 부딪혔다. 그의 세계에서 유우키는 단 하나밖에 없는 색이었다.

그는 언제나 다섯 번째 계절이었다.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며, 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되어 있는 특별한 존재였다. 처음엔 그저 형이고 싶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애틋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세나는 멍하게 울었다. 벅벅 비볐던 눈가가 아려왔다. 괜찮니?하고 말하며 나루카미가 세나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유우 군이 보고 싶어.”

. 세나, 저번에도 말했었지.”


츠키나가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의 여백을 밖에서 내리는 비가 덮고 있었다. 나는 셋쨩이 손해 보는 사랑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리츠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마르고 가느다란 등을 쓸 때 마다 울컥였다. 아까는 사귀었음 좋겠다면서, 라고 쏘아붙이자 리츠는 그건 네가 좋아하니까, 라고 대답했다. 세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네 망상이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영원히 그치지 않을 울음이었다. 감춰두는 것이 익숙한 밤이기도 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황홀한 듯, 화면 안의 유우키를 바라보다가 데운 사케를 한 병 주문했다. 조금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은 게 말야- 세나는 천천히 말했다.


차라리 날 죽이러 와줬으면 좋겠어.”


그럼 꿈에서 깰 수 있을 것 같아. 오베론의 요정이 몇 십 년 전 발라두었던 사랑의 묘약을 씻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생각 때문에 초조한 날도 없어지겠지.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편안할 텐데. 그는 요정이 1년에 칠 수 있는 장난에도 한계를 정해야 한다면서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리츠는 세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닿아오는 따듯한 손길은 봄과 같이 상냥했다. ‘겨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촉이었다.

비가 내렸다. 그것뿐이었다. 두서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

 

말 그대로 느긋한 날이었다. 신혼생활의 단꿈에 대해서 찍을 내용도 없었다. 유우키는 카메라가 꺼진 방 안을 제 맘대로 돌아다녔다. 세나는 아침부터 촬영이 있다면서 나가버렸다. 2주 동안 진행되는 촬영에서 단 하루 있는 카메라 꺼도 괜찮은 날이었기 때문에 아쉽기도 했지만 붙잡을 권리는 없었다. 대신 유우키는 그의 개인적인 공간에 발을 들였다. 그는 서재와 안방을 뒤적였다. 어디엔가 지금의 세나를 알만한 단서가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움직였지만 그 날그 때에 관련 된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날 봤었던, 어려던 자신의 포스터마저 들어낸 듯 사라져 있었다. 배가 고팠다. 그는 세나가 만들어두고 간 도시락을 열었다. 영양 밸런스를 아낌없이 생각 한 요리였다. 그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설거지를 당장 할까 그만 둔 것은, 세나가 일찍 들어왔을 때 어지른 흔적을 보고 저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도 서재에서 유우키는 나름의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면서 유우키는 세나 이즈미의 비디오를 봤다. 그의 서재에 방치되어 있다시피 한 상자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듀얼이었다. 세나의 팬이 찍어 준 영상인 듯 했다. ‘트릭스타는 없고, ‘나이츠만 찍혀 있는 비디오였다. 세나는 연신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지치지 않아 보였다. 중간에는 유우키를 향한 도발적인 메시지 또한 담겨 있었다. 있지, 듀얼은유우 군이 서기엔 과분한 무대라고?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반짝임만이 가득했다.

과거를 반추하는 영감처럼, 그래도 저 때가 좋았다고 생각하며 유우키는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는 다리를 접어 몸을 웅크렸다.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는 화면 앞에는 까먹다 만 귤껍질들과, 빈 도시락 통이 놓여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초인종이 울리면 꼬리를 흔들며 나갈 준비가 돼있었다. 세나의 숨이 없는 집은 외롭기만 하다. 평소라면 카메라를 보면서 새 신랑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정말 나쁜 남자에요, 하고 흉이라도 봤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밤이 될 때 까지 세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들어오는 건지도 몰랐다. 유우키는 근 2주 동안 세나가 어디서 잠들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볼 수도,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는 얼굴을 포스트잇이 붙은 메모판을 뚱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남긴 메모는 딱히 없었다. 일찍 들어올 수 있으면 들어온다는 작은 메모만 있을 뿐이었다. 메모지가 흰 색인 걸 보니, 이는 한겨울 밤의 꿈용으로 사용하는 가짜 메모였다. 유우키는 메모판을 훑어보았다. 오늘도 좋아해, 언제나 응원할게, 사랑해, 우리 남편, 으로 시작하는 메시지들은 모두 다 흰색 포스트잇에 붙어 있었다.

진심은 짙은 파랑에 흰색 글씨, 거짓말은 하얀 바탕에 검은 볼펜. 그런 의미로 볼 때, 두 사람이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은 파란 색에서 비춰주는 진심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세나에게서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유우키는 진짜 규칙을 반추했다. 프로그램용 가짜 규칙뿐만 아니라, 진짜에서도 일정이 있으면 연락하기 항목이 있었다. 유우키가 졸라 대서 넣은 항목이었다. 이럴 거면 규칙을 왜 정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유우키는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세나 이즈미의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려보았다. 화면 구석에 잡힌 제 모습은 온 몸에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위잉, 하고 진동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었다. 유우키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세나일까 싶어 그는 빠르게 핸드폰 쪽으로 다가갔다. 두 발이 엉켜 엉거주춤하게 넘어졌다. 유우키는 아픈 무릎을 손으로 쓸면서, 화면을 확인했다. 하지만 세나가 아니였다. 유우키는 두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렸다. 부재중으로 만들까 싶었지만, 일 이야기 때문일지 몰라 그는 전화를 받았다. , 세나의 유우 군? 하고 도발적으로 물어오는 목소리는 유우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유우키 마코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물었다. 유우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와.


그는 그렇게 명령했다. 누구신데요, 하고 다시 묻자 그는 자신이 츠키나가 레오라고 대답했다. 그는 세나가 술에 떡이 되어 옮기기 어려우니, 어서 역앞 공원까지 나오라고 투덜거렸다. 그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어조로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이런 타입의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언제나 버거운 일이었다.

 


겨울비는 유달리 추잡하게 내린다. 눈이 되어 내리지 못한 한을 담아 내리는 것 같다. 유우키는 이즈미가 손에 쥐고 있는 작은 우산을 뺏어 내려놓았다. 늘어진 몸에는 겨울비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는 세나를 안아들어, 천천히 침실로 옮겼다. 울음이 묻은 세나는 무겁다. 알코올이 섞인 숨을 내뱉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했다. 비 묻은 옷을 벗겨 새 옷을 입히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유우키는 방 밖으로 나왔다. 남겨둔 손님이 있었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유우 군? 츠키나가가 물었다. 유우키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 맞은 옷을 대충 털어내고 소파에 앉았다. 뭐라도 드릴까요? 라는 물음에 츠키나가는 땡큐, 하고 대답했다. 유우키는 찬장을 뒤적거렸다. 인스턴트커피가 있던 것 같은데, 당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선반 여러 개와, 찬장 여러 개를 뒤적였다. 츠키나가는 유우키를 흘겨보고 있었다.


가장 왼쪽 벽장에 있을 거야.”

가장 왼쪽이요?”

스틱 말고, 플라스틱에 들어있어. 액상 형태야.”


유우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찬장을 뒤적였다. 헤이즐넛이라고 적혀 있는 커피를 꺼냈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낱개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포트에 물을 올렸다. 포트를 찾을 때 또한 츠키나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2주 동안 같이 살고 있는 자신보다, 츠키나가 쪽이 집안 구조에 능숙한 것 같은 게 어쩐지 분했다. 유우키는 뒷목을 긁었다. 젖은 옷이 말라가면서 체온까지 뺏어가는지, 썬득썬득한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츠키나가의 차 안에서, 세나는 궤도를 이탈한 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는 헬리혜성 같다고 연신 제 비유를 주장했으나, 그 비유에 달린 원관념이나 주어는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열심히 추측했으나 알 수 없었다. 유우키가 알고 있는 세나 이즈미는 단편적이다. 아동모델을 할 때의 형 같은 그, 고등학교 2년 동안의 그, 그리고 2주 정도 부대끼며 살고 있는 그. 이런 단면들을 모아 입체를 구성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무엇을 핼리혜성에 빗대는 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입이 썼다. 무엇보다도, 차 안에서의 분위기가 매우 마음에 걸렸다. 츠키나가는 세나의 말에는 호응하면서도 유우키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명백하게 미움받고 있었다. 유우키는 짐짝처럼 뒷좌석에 앉아 세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세나와 츠키나가 사이에서만 오가는 말소리를 듣고 있다가, 애처롭게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그를 집으로 안내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카메라 꺼져 있어?”


커피를 받아 들고 츠키나가가 물었다.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츠키나가는 커피를 마시다가, 그를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시선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긴장하지 마, 오래 있을 생각 없다구?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갈 거야.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물을 많이 탄 커피가 밍밍한 게 싫은 듯 했다.

많이 마셨네요, 라고 유우키가 말문을 열었다. 츠키나가는 어쩌다 보니, 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사이에는 어색함이 맴돌았다. 겨울바람 같은 사이였다. 둘은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은 관계는 어색했다.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츠키나가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그들의 침묵에 홀짝이는 소리가 더해졌다.


술이 잘 안 깨네.”

그쪽도, 많이 마셨어요?”

아니, 나는 별로 안 마셨는데. 세나가 억울한지 좀 그래서.”


그렇게 됐고. 너한테 연락하라고 했던 건 나루. 안 그랬으면 내 작업실로 데려갔지. 츠키나가는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해답을 주려는 듯, 있었던 일들의 일부분을 풀어놓았다. 그는 정지 화면에 멈추어 있는 DVD, 널려있는 귤껍질 따위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유우키는 그가 얼른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매우 불편했다.

세나, 좋아해? 츠키나가가 물었다. 그는 유우키와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았다. 손을 접어, 손톱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대답은 사실 중요하진 않아’- 정도의 태도였다. 유우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좋아합니다. 그는 그렇게 확언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쏟아진 다음에도, 츠키나가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대답을 예상한 것 같은 태도였다.


좋아해?”


이번에 츠키나가는 눈을 마주치면서 물었다. 녹색 눈에는 싸늘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렇게 묻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마음을 알아서, 뭐 어떻게 하겠다고. 유우키는 이번에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다행이네, 라고 말하면서 츠키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근데, 어쭙잖은 마음으로 할 거면 그만 둬줘라.”


츠키나가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유우키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실에서 자고 있을 세나가 걱정되는 것 같았다. 그는 품 속에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난 듯, 피워도 괜찮아? 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츠키나가는 베란다로 연결 된 창문을 열었다. 빗소리와 함께 차가운 기운이 몰려들어왔다.

마음이 착잡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 저 사람에게 저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았다. 츠키나가의 시선은 그들이 찍어 걸어둔 웨딩사진에 머물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마주치지 않은 유우키와 세나의 시선, 그 엇갈린 시선이 담긴 사진에는 연출된 행복이 머무르고 있었다. 츠키나가는 불을 붙였다. 그는 베란다 쪽에 가까운 손으로 담배를 잡았다. 그는 이 공간이 익숙한 듯 했다.


그만둬야 하나요?”

.”

왜 그래야 하죠?”

저번에도 그런 식이었잖아.”


저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엔, 너무 기간이 긴가? 츠키나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너희 사이에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내 기사가 힘들어 하는 걸 보기 어려워서.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는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 있는 벽면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꽤나 본격적인 장식이었다. 정말로 사랑한다고 착각 할 수 있을 정도로. 츠키나가는 담배 끝에 쌓인 재를 털었다.

협박하는 건가요? 라고 유우키가 물었다. 츠키나가는 권유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갈팡질팡 할 거면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뜻이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결벅적인 세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인테리어는 츠키나가를 위한 것이었다. 무슨 사이에요? 유우키는 물었고, 츠키나가는 리더팀원이라고 대답했다. 그것 뿐인가요? 라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랖이 넓은 것뿐이야. 세나는 언제나 유우 군에 관한 거면 힘들어 하니까.”

나 때문에 힘들어 했어요?”

그걸 그렇게도 들을 수 있구나.”


재미있어, 너 완전 재미없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조금은 괜찮은 느낌이네! 츠키나가는 킬킬 웃었다. 그는 재미없는 사람한테 집착하는 세나의 취향을 흉본 어제를 반성한다면서, 세나가 힘들어 했다고 대답했다. 연예인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매일매일 말하면서도, 너에게 시선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나보지. 지구를 바라보는 달처럼 굴었어. 츠키나가는 다시 담배연기를 뱉었다. ---깍 움직이는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세나가 자신 때문에 힘들어했단 사실이 반가웠다. 아예 마음에서 때어놓은 게 아니구나 싶어 안심했다. 조금만 더 잡아당기면 모르는 척 다가와주지 않을까 안도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츠키나가는 타고 있는 담배를 커피가 담겨 있는 컵에 넣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뭘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네, 그는 혼잣말을 하듯 투덜거렸다.


그만 둬.”

제가 왜요?”

어중간한 상태에서 그만 둘 거라면 하지 마.”

지금은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지금, 둘이 같이 있는, 둘이 같이 사랑하는 환경에 갇혀 있으니까 좋아하는 건 아니고? 츠키나가는 무심하게 말했다. 걱정이 돼서 말하는 거야, 라는 끝 마디에, 유우키는 당신이야말로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서 말을 붙여왔다. 질투를 가득 담고 있는 녹색 눈동자를 보며, 츠키나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즈미 씨를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단단했다. 강단 있는 목소리, 그 울림에서 거짓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나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확실하게 다가오는 목소리니 되려 불안할 수밖에 없다. 몇 년 동안이나 의심했던 사랑, 멀리 떨어져 있었던 인연. 기다렸다는 듯 정답을 내놓는 모든 행위가 세나에게는 한겨울 밤의 꿈처럼 느껴지고 있을 것이다. 츠키나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놓는다면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세나가 걱정스러웠다. 마법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법이 끝난 직후의 공백을 견디기 어렵겠지. 뻔한 이야기였다.

세나와 동화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답지 않게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츠키나가는 세나가 아닌 것 같아~ 라고 물었던 자신에게, 동화의 끝 문장이 모두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고 대답했던 세나를 반추했다. 마법이 풀려도 끊임없이 행복만이 지속되는 엔딩에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번져왔다. 안타까운 소리였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세나는 그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동화 같은 사랑을 꿈꿔왔기 때문에 현실이 잔인함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세나는 열두 시의 마법이 끝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하게 되면, 그 때에는 다시 또 싫어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나름의 방어기제였다. 싫어할거라고 가정하고 행동하면 적어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대비할 수 있다.


사랑에 지친 사람은 언제나 최악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상처받음과 동시에 저가 무너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와 할 이야기는 없었다. 사적으로 관심이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건 저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츠키나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은 하지 않을게요, 라고 화난 목소리가 따라왔다. 고집 있네, 그것도 좋아, 나름 재미있어. 츠키나가는 유쾌하게 대답했다. 밖에서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세상을 가득 덮고 있었다.

리츠가 걱정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적어도 그 둘 사이에 있던 일들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츠키나가는 리츠의 방식이 너무 무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둘이 진심으로 '사랑'하길 바라고 있었다.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받을 수 있는 건 사랑 뿐이니까, 라고 말하면서 리츠는 자신이 세나에게 유우키의 말을 짖궃게 물어본 것도 이의 연장선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너무 강경하다. 세나는 강해보이지만 유약하다. 츠키나가는 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유우키 마코토는 세나 이즈미에게 있어, 그 약한 부분에서 부터 곪은 상처였다. 더 건드려서 터질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 상처를 극복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꿈 속에서 깨지 못하며 헤매는 것 보다, 모든 걸 잊고 다른 쪽에 신경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이다. 츠키나가는 자신이 유우키를 찾아온 것에 대해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그는 느릿하게 하품했다.

이거 빌릴게, 그는 세나의 신발장에서 우산을 꺼냈다. 그 동작은 여전히 익숙해보이기만 해서 유우키는 속이 좋지 않았다. ,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삐삑,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유우키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다가,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비어버린 귤껍질 같은 기분이었다. 유우키는 비어버린 공간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방으로 다가갔다.

그는 닫힌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덜 되어있는 경칩에서는 끼긱 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우키는 살그머니 움직였다. 세나는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잠들어 있다는 게 오히려 안심이었다. 끝나버렸던 마법 속에서 나는 어떻게 확신을 줘야 하는 걸까. 유우키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가락과 제 손가락이 조용히 얽혔다.


이즈미 씨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잔잔하게 들리는 숨소리를 듣다, 가까이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잠든 모습은 편안하게만 보였다. 최근,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환하게 웃는 표정도 못 본지 한참 됐었지. 유우키는 그의 입술에 천천히 제 숨을 겹쳤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사랑의 표현은, 어떠한 반응도 낳지 않은 채, 그저 머물러 있다가, 아쉬운 듯 한숨과 함께 공중으로 퍼질 뿐이었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마음만을 믿고 있었다. 

닿고 싶었다그들의 세계에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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