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Imitation Love

*약간의 아도아라 주의해주세요.












4.

Imitation Love




***

 

    나루카미는 기지개를 폈다. 짙은 피로가 몰려왔다. 샤워를 한 후에는 더욱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하품을 하며 천천히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소파에 누워 있는 제 연인의 엉덩이를 두어 번 두드리면서 텔레비전에 시선을 옮겼다. 뭐 보고 있었니? 라고 질문하자, 그의 연인은 나루카미, 네가 나오는 걸 보고 있었다. 라고 말하면서 느리게 하품했다.

    그러니까 뭐, 라고 말하면서 그의 등 쪽으로 몸을 기대자, 오토가리는 하품을 하며 예고편, 이라고 대답했다. 13초 정도 되는 초콜릿 광고 내내, 어서 비키라는 오토가리와, 조금만 더 이러고 있겠다는 나루카미 사이에서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들의 작은 다툼이 끝난 것은 텔레비전에서 나루카미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때였다. 그들은 동시에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머, 벌써 광고가 나오네?”

   “방영 언제랬지?”

   “촬영 전부 끝나고 3일 뒤 일요일부터.”


    그리고 촬영 끝나기 까지는 조금 더 남았고? 정말이지 하드한 일정이라, 스텝들이 다 야근중이잖니. 인터뷰 따러 나갈 때 마다 사람들이 다 수척해있어져서 엄살 부리기도 어렵다니까? 나루카미는 하품을 하면서 소파 밑에 앉았다. 다리 근육을 쭉쭉 피며 스트레칭하면서, 그는 인터뷰 영상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의 유우키는 명백하게 서툴렀다. 연예계 물을 먹은 지 오래 됐는데도 저런 구석이 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장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독이었다.

   ‘웨딩촬영’날 땄었던 인터뷰였다. 화면 안의 자신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체크하던 나루카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유우키는 여전히 서툴게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등학생 때를 재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즈미 씨가, 절 너무 좋아해서 가끔 부담스럽다는 인터뷰를 하는 유우키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루카미의 표정에 그림자가 졌다. 여전히 싫어하는 거라면 연기는 완벽하게, 자르는 건 더 완벽하게 했어야지. 그는 화면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나루카미는 맥주 먹고 싶네, 하고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전사前事를 알고 있는 외부인이 보기에는 유우키가 답답하기만 했다. 물론 그 때의 세나도 잘한 건 없었다. 애매한 고착상태를 만든 건 둘 다였다. 일방향적인 잘못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잘못이었다. 어느 한 쪽 잘한 게 없었다. 그 일에서 도망치고 의심하던 세나도, 그 뒤로 붙잡지 않았던 유우키도 문제였다. 나루카미는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우키 마코토와 세나 이즈미 사이에 쌓였던 사건을 모두 아는 사람에게는 부조리극으로 보이는 인터뷰였다. 나루카미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세나는 정을 주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 이미 과거의 사람에게 정을 줘서 현재의 자신이 망가지기 싫다는 이야기였다. 그 때 마음 고생하던 걸 생각하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는 사랑을 받는 것 자체가 서툴렀다. 아마도, 유우키가 주는 것이라 더 먹지 못했을 것이다. 엉망으로 엉킨 속이 사랑을 받아먹기에는, 의심이 가시넝쿨처럼 자라있었을 것이다. 스물 중반을 넘긴 지금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아채기가 어려운데, 십대 후반의 세나가 그 고인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루카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토가리가 눈치를 보듯,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왔다.

   물론 ‘그 때’의 유우키 또한, 자기 나름대로 곤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건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멋대로 멀어지고 멋대로 다가가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시간을 정해 반복되는 것과는 달리, 불규칙적인 애정을 쏟았을 게 분명했다. 그 애매한 거리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는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점의 유우키 마코토에게 세나 이즈미는 어떤 방식의 피드백도 받아주던 사람이었으니까. 밀고 당기는 과정 속에서 ‘세나 이즈미’가 지칠 수도 있다는 걸 모를 게 분명했다.

    ‘목표’에 가까이 갈수록, ‘사랑’에 가까이 갈수록 사람은 쉽게 지치기 마련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목표를 향해 달렸던 자신의 행동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열아홉의 세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나루카미는 턱을 괴었다. 그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둘의 결혼 후 일상을 말하고 있는 유우키는 꼭 고등학생 같았다.

    유우키와 세나가 설정한 관계는 꼭 고등학생 때와 닮아 있었다. 그게 가장 편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루카미는 그 지점이 더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화면 안의 그들은 풋풋하고, 서툴렀다. 그게 묘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시청자들이 알 수 없는 범위에서 나루카미는 계속 ‘아이러니함’을 느끼고 있었다. 비틀려버린 사랑을 어른이 돼서 재연한다는 생각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던지 간에,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거듭해서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어른’이 된 지금 생각 해 봐도 둘의 관계가 파국을 맞이한 것은, 누구 한 쪽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이 얽히고 꼬이는 일에 일어난 헤프닝일 뿐이었다. 화면 속 부조리극은 사랑의 이름을 달고, 두근거리는 리듬으로 다가왔다. 역시 저 애한텐 좀 짓궂게 대하고 싶은 기분이야, 나루카미는 대답을 바라지 않고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악취미’라고 말할 오토기리도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해도, 저 둘 사이의 관계에서 나루카미는 세나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같은 학년 친구’보다는 모든 고민을 함께 나눈 ‘그룹 멤버’를 챙기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날 울던 세나의 얼굴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애는 그 날 서럽게 울었다. 유우키의 집에서, 나루카미의 집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다. 그 거리를 걸어와, 문을 두드리고 얼굴을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던 세나의 모습이 물처럼 번져왔다. 가슴에 멍울처럼 묵혀둔 답답합이 목 끝을 타고 한숨으로 나왔다.


   오토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맥주 두 캔을 가져왔다. 차가운 캔이 나루카미의 이마에 닿았다, 땡큐 자기- 하고 인사하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오토기리는 제 발로 나루카미의 허리를 꾹꾹 눌렀다. 익숙한 장난이었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한숨을 쉬는 게 제법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나루카미는 웃으면서 맥주 캔을 깠다. 내 일 아니고 별 일 아니라는 말에, 오토가리는 손을 뻗어 나루카미의 금발을 흐트러트렸다.

   화면 속, 턱시도를 입은 유우키는 ‘세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반해버렸다고 말하면서도 카메라 렌즈를 피하는 게 어색하기만 했다. 자연스럽게 물처럼 넘어간 세나의 인터뷰와 대조적인 느낌이 났다. 그 부분이 순수하게 보이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나루카미는 입을 열었다. 그가 저 때가 웨딩촬영 날이었는데, 나 완전 힘들었잖니, 라고 말하자 오토가리는 그래? 하고 대답해왔다. 의아하다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서툰가?”

   “아니 막 서툰 건 아닌데, 그 뭐랄까… 망설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망설여?”

    “뭔가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근데 예전 일이랑 겹쳐져서 좋겐 안 보이고?”

   “예전 일?”


    나루카미는 한숨을 쉬었다. 이 일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오토가리 아도니스’는 너무나 멀었다. 세상엔, 멀기에 말할 수 있는 게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나루카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괜히, 천천히 맥주를 넘겼다. 아니 그, 아니야. 나도 잘 모르는 일이란다, 라고 말하니, 오토가리는 그런가,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루카미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위화감 없어?”

   “없다.”

    “그럼 됐어. 나도 잘 모르는 일이라서 어떻게 더 말을 해줄 수가 없네.”


    나루카미는 능청을 떨며 하품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서툴게만 보인다면 된 거였다. 위화감이 없으면 프로그램은 그걸로 오케이다. 나루카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살피던 오토가리는 마치 첫사랑을 하는 것 같이 보이며, 왜 둘이 캐스팅 됐는지 알 것 같다고 설명했다. 나루카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우키는 세나를 만나서 좋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끌어내기 까지 오래 걸렸다.

    나루카미는 세나로부터 전해 들었던 ‘그 때’를 떠올렸다.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적으로 세나의 편이었다. 나루카미는 그가 다시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랐다. 세나는 겉으로는 차가워보이고 강해보여도, 안은 곪은 사과처럼 물렀다. 그 둘의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별 거 아닌 일이겠지만, 그게 ‘별거 아닌’ 일인지, ‘별거’인지는 겪은 사람이 정하는 법이었다. 나루카미는 과연 이 방송이 독인지, 독이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랑을 연출하고 싶다는 메인PD의 시도는 좋았으나, 그건 결국 ‘연기’일 뿐이었다.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어색해지기 마련인 가짜.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었어도 가짜는 티가 난다. 좋은 브랜드의 이미테이션이 금방 들통 나는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다. 나루카미는 하품을 했다. 그들의 가짜 사랑이 어떤 결실을 맺을 지, 그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턱시도를 입고 있던 유우키가 사라지고, 새벽에 깬 것 같은 세나가 보였다. 안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나온 세나는, 고양이 같은 발걸음으로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방 안이 아직 추운지, 그의 발가락이 곰실거렸다. 세나는 잠시 부르르 떨다 멈춰 있었다. 컴퓨터가 ‘로딩’하는 과정과 비슷하게 보였다. 그는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하고 입모양이 움직였다.

    ‘세나 이즈미 관찰일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핸드카메라를 사용했는지,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이목구비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지금 시간은 다섯 시 반. 아침 촬영이 있어서 빨리 나가는 날이에요. 세나의 목소리는 밤처럼 조용했다. 소곤소곤 들리는 목소리에는 피곤이 드문드문 묻어 있었다. 나루카미는 맥주를 마시면서, 화면 잘 뽑았네- 라고 중얼거렸다. 오토가리 또한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우 군은 10시에나 일어나니까. 

   ―그러면 아침을 못 챙겨 먹을 게 분명하니까, 이 형이 챙겨주지 않으면,

   ―역시 곤란할 거니까… 만들어 놓고 나가려구요.


    작전에 이름 같은 걸 붙이는 건, 저 학교 다닐 때 유성대였던… 이번 시즌 일요일 7시를 책임지고 있는, 모리사와 치아키 군 같은 느낌이라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그래도 오늘은 좀 붙이고 싶네요. 이름하야, 형아의 사랑의 도시락 싸기- 작전. 특급 작전인 느낌입니다. 세나는 간간히 하품을 하면서도, 카메라를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좀 예쁘게 보여야 하는데, 라고 말하며 머리카락을 매만진 그는 포기 했는지 후, 하고 숨을 고른 다음 뒤를 돌아 손을 씻었다. 물 소리가 외롭게 공간을 울렸다.

   세나는 부엌 불을 켰다. 아, 완전 안 예쁘면 어쩌지 하는 목소리가 간질간질하게 들려왔다. 화면 안의 그는 국을 끓이면서, 아침 반찬을 준비했다. 연어 한 토막을 구울 거구요, 샐러드랑 같이 계란말이도 만들 거예요. 좀 짜게 할 건데 괜찮겠지? 국은, 유부를 넣은 미소시루를 끓이고, 또 후식으로는 차갑게 만든 토마토에 꿀을 뿌려줄 거고, 흰 쌀밥에… 세나는 반찬의 밸런스를 생각하는 듯 한참 고민을 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잠깐, 유우 군 해물 싫어하는데 연어는 해물일까?


   세나는 카메라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부가 되고, 동거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다는 변명이 쏟아지듯 다가왔다. 그는 어쩌지, 하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해물을 싫어하는 거면 민물이면 괜찮은 걸까? 나 갑자기 모든 개념이 햇깔려, 라고 카메라에 대고 묻는 그는 명백하게 사랑스러워 보였다. 세나는 고민하는 듯 주저앉았다. 그런데 저번에 삼치를 구워 뒀을 때는 잘 먹었던 것 같은데 라는 작은 목소리가, 분홍색 자막을 타고 화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핸드폰에 해산물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고 나서야 다시 주방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연어가 바다에서 자랐지만 결국 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강에서 죽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토가리는 세나 선배가 저런 캐릭터였나? 하고 물었고, 나루카미는 다 연기란다, 잃어버리기 쉬운 꿈 같은 거잖니, 라고 말하면서도 은은하게 웃었다. 저걸로, 기분이 괜찮다면 좋을 텐데. 나루카미는 맥주 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세나의 손끝은 꽤나 야무졌다. 가지런한 솜씨였다. 계란말이의 모양은 고왔고, 연어 또한 알맞게 구워졌다. 흰 쌀밥은 화면으로 봐도 고슬고슬해 보였다. 그는 샐러드드레싱을 다른 용기에 담았다. 그는 작은 포스트잇을 꺼냈다. 흰 바탕에, 노란 병아리로 사각 프레임을 친 귀여운 디자인 문구였다. 세나는 또박또박, 정갈한 글씨로 「드레싱과 샐러드는 다른 용기에. 잘 섞어 먹어야 해? 」라고 적었다. 세나는 자신이 쓴 글씨를 잠시 바라보다가 푸스스 웃었다.


   ―원래 방송에서 잘 웃는 성격이 아니에요.

   ―캐치프라이즈도 「모델계의 시니컬한 왕자」고.?

   ―그런데 유우 군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계속 웃게 되고?

   ―애가 모자란 것도 아니고, 어른이란 걸 알면서도

   ―자꾸 어린애 같은 모습을 찾으려고 해서, 챙겨주고 싶고

   ―웃게 되는 것 같고.

   ―이게 사랑의 힘일까?

   ―음, 이건 역시 편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세나는 카메라를 보면서 검지와 중지가 가위라도 되는 양, 마주 댔다가 때기를 반복했다. 그는 밝게 웃었다. 자막으로는 ‘사랑의 힘은 시니컬한 세나를 변화시킨다’라고 적혀 있었다. 자막 센스는 영 별로라는 오토가리의 말에 동의하면서, 나루카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연기를 하면 할수록 문드러지는 건 세나의 마음이었다. 그는 그의 마음이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상상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카메라를 보면서 작게 하품했다. 그는 눈을 비비더니, 느릿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장면이 편집된다면 대신 넣을 장면을 찍으려는 듯 했다. 그는 정갈하게 싸, 예쁘게 담은 도시락을 핸디캠으로 가까이 찍다가, 제 얼굴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자연스럽게 바라보았다. 조명이 별로 안 좋아서 예쁘게 잘 안 보이는데, 아무튼,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작게 박수쳤다. 저렇게 혼자서 찍는 건 잘 못하겠던데. 오토가리가 느릿하게 말했다. 나루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스케줄이 좀 이상해요.


    세나는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이츠의 앨범 발매 콘셉트 회의에 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차피 왕님이 다른 인스피레이션을 받으면 갈아엎어질 콘셉트를 왜 지금 정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던 그는, 입술을 쭉 내밀어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세나는 인터뷰어가 앞에 있는 것 마냥 렌즈를 보면서 힘없게 웃었다. 그래서 유우 군을 더 챙겨줘야 하는데, 챙겨줄 수 없어서 도시락이라도 싸고 있는 거랄까. 신혼인데 너무 가혹해요.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신혼’이라는 단어에서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망설이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입장은 가혹하다. 나루카미는 그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래도 그릇은 비어있어서 다행일까?

    ―형이 만들었다고 안 먹으면 곤란한데, 여태까지 해준 건 다....그릇이라도 비어있어서 다행이죠.


    그렇지, 다행이지, 다행인 일이죠. 그렇죠… 세나는 주문처럼 속삭이다가 웃었다. 웃음 하나하나가 알알이 슬퍼 보였다. 같이 보고 있는 오토가리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그저 사랑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세나 선배가 요리를 원래 잘했던가? 오토가리는 그렇게 말하며 다 마신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루카미는 두 개의 맥주 캔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만들어 주는 거 좋아하니까, 의외로 소녀라니까 이즈미쨩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후후, 웃었다.


    ―그런데 유우 군, 형한테는 스케줄을 잘 말해주지 않아서

   ―언제 나가는지 몰라서, 반찬을 어떻게 만들어놔야 할지 감이 안 잡혀요.

   ―아침, 점심, 저녁을 다 만들어 줘야 할까?


    세나는 가만히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풋풋한 마음’이라는 자막이 떠올랐다. 하트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나루카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오토가리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고작 예고편이 그런 반응은 별로 좋지 않다. 아니면 나루카미, 너도 저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은 것인가? 그는 덤덤하게 물었다. 나루카미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담담한 주제에 나름의 불안감을 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오토가리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아냐, 괜찮아 그냥 여전히 이즈미쨩이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플 뿐인걸, 나는 인정이 많은 언니니까 말야. 나루카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발랄하게 웃었다. 세나는 도시락에 담긴 추억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저 이야기에 대해서도 나루카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만든 도시락은 언제나 식은 채로 돌아왔다. 꽝꽝 언 찬 밥. 하지만 세나는 도시락을 만들 때의 기쁨만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게, 과연, 좋은, 일일까? 나루카미는 질문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나는 귀여운 도시락을 만드는 노하우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었다. 텔레비전 안, 세나의 시계가 울렸다. 이제 가 봐야 할 시간이에요. 나는 이제 일 하러 가지만, 유우 군은 아직 단 꿈을 꾸고 있겠지. 나도 옆에서 좀 더…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세나는 새로 적은 포스트잇을 도시락과, 벽면에 붙여 놓았다. 유우 군에 대한 응원과, 사랑의 메시지였다.


    “설레네요. 꼭 그 때 꿈을 꾸는 것 같아.”


   세나는 그렇게 속삭이면서 카메라를 껐다. 화면이 어두워지고, 다시 초콜릿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꿈같은 사랑을 그대에게, 밀크 초콜릿의 달콤함을 그대에게.」라는 카피에 웃음이 났다. 『한 겨울밤의 꿈』을 후원하는 제과업체의 겨울 시즌 메인 상품이었다. 나루카미는 화면을 응시했다. 맥주 한 캔 더 마실까? 그는 일부러 발랄하게 웃었다. 오토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다가갔다.






***


    유우키 마코토는 빈자리를 더듬었다. 두꺼운 재질의 커튼 사이로 느긋한 햇볕이 뻗어왔다. 스케줄이 없는 날이라 늦장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세나는 제 옆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누워도 충분할 크기의 침대의 반절은 냉랭하게 비어 있었다. 세나는 이 방에서 자지 않는다. 소파에서 잘까 싶어서, 새벽까지 기다려 거실로 나가봤지만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방을 더 돌아다닐까 싶었지만, 유우키에게 허락 된 공간은 그것뿐이었다.

    세나는 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그 선을 넘어갈 수 없었다.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 들어갔다가 쫓겨나는 게 무서웠다. 유우키는 그가 사라졌던 밤을 떠올렸다. 가끔씩 꿈으로 찾아오는 풍경은 명백하게 비에 젖어 있었다. 그 고요를 다시 마주하는 건 어려웠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 같았다. 유우키는 주먹을 쥐었다 천천히 폈다. 세나나, 자신이나 키가 컸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시야가 더 넓어졌고,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겼다. 유우키는 변한 상황들을 떠올렸다. 세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간간히, 무너질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아, 라는 말은 명백하게 무목無目的의 것이었지만 그 말은 유우키의 마음속에 아프게 꽂혔다. 과녁이 된 기분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다. 그는 기지개를 폈다. 폭신한 이불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언제나 세나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자신이 들어오기 전에는 세나가 이곳에서 잠을 청했을 것이다. 유우키는 눈을 감았다. 커튼의 틈에서 들어오는 햇볕이 그의 눈꺼풀 위에 올라 그의 시야를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보고 싶다.”


   유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신한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그는 카메라가 있는 쪽을 보면서 생긋 웃었다. 그는 눈을 비비다가, 안경을 잡아 썼다. 비로소 시야가 뚜렷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유우키는 천천히 거실 벽으로 다가갔다. 오늘도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그는 세나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나이츠의 콘셉트 회의’라는 포스트잇 다음에는 ‘술자리가 있을지도 모름’이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이번에는 안자고 버티고 있어야지. 그리고 나도 부렸으니까 술주정 부려달라는 식으로 말하면 괜찮지 않을까? 유우키는 며칠 전 있었던 알을 생각하면서 하품을 냈다. 유우 군, 이라고 불러달라는 말을 반복했던 것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 날 세나는 그의 옆에서 밤을 지새운 듯, 유우키가 누운 자리 옆에서, 침대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세나가 자는 모습은 천사 같았다. 밤새 손이 엮여져 있기라도 한 건지, 손가락 마디와 손목이 온통 저릿저릿했다.  손을 빼고 싶지 않아서 계속 보고 있었더니, 시선에 깨기라도 한 건지 세나가 번뜩 눈을 떴다. 당혹감을 담은 그 푸른 눈을 회상하며 유우키는 허허, 웃었다. 명백하게 싫어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거기서 유우키는 저가 외사랑을 시 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왜 둘 사이에 싹트는 사랑은 언제나 꼬리잡기인지, 유우키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포스트잇을 확인했다. 「반찬 만들어 놨어.」, 「먹을 수 없는 건 미리 적어줘」라는 포스트잇이 두 개, 빈 포스트잇이 하나였다. 유우키는 그 빈자리를 확인하다가 푸스스 웃었다. 아케호시가 보내준 예고편이 생각났다. 연어가 해물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던 세나가 아른거렸다. 그에게 이 모든 건 연기인 것 같아서 맘이 아렸다. 무슨 생각으로 매일 반찬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우키는 천천히 부엌으로 다가갔다. 그는 냉장고를 열었다. 분홍색 도시락에 ‘아침’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우키는 도시락을 꺼냈다. 토끼 캐릭터의 얼굴 위에 아침에는 간단하게 먹는 게 좋다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도시락 안에는 계란샐러드와 햄이 들어있는 샌드위치가 있었다. 다섯 개. 식빵을 두 개 겹쳐 만들어 반으로 갈라놓은 샌드위치니까 원래대로라며 여섯 개가 있어야 했다. 하나는 ‘망친’ 걸까, 아니면 먹고 나간 걸까. 유우키는 턱을 괴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생각이 많아진다. ‘사랑’을 겪는 사람이 시인인 것은 모든 서사와 행동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빠르게 저문다. 파랗던 하늘에 노을이 퍼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유우키는 샌드위치를 꺼냈다. 세나의 글씨는 언제나 단정했다. 유우키는 포스트잇을 땠다. 그는 안방으로 가서, 침대 밑에 넣어둔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날이 갈수록 담기는 쪽지들이 많아져, 이제 상자의 바닥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보고 싶다.”


   유우키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십대 때의 그라면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이야기였다. 세나를 보고 싶어 하는 일, 도시락을 쌌을 때 그의 상황과 생각을 추론하는 것. 이 두 가지를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다. 유우키는 상자에 담긴 마음들을 바라보았다.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나는 여전히 아침을 먹지 않을까, 그럼 사라진 샌드위치 한 개는 어디로 간 걸까. 유우키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이 카메라 렌즈에 여과 없이 담겼다.

    그는 상자를 닫았다. 그는 다시 침대 밑으로 상자를 밀어 넣었다. 비밀처럼 은밀하게 보관하고 싶은 추억이었다. 글자를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듯해졌다. 유우키는 포스트잇을 어떻게 채울 지를 고민하면서 다시 부엌 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확인했다. 세나의 성격답게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어 한 눈에 보기 편했다. 그는 캐리어를 끌고 이 집에 들어 온 첫날, 냉장고를 전투적으로 채우던 세나를 기억했다.

   집에서 뭔갈 만들어 먹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냉장고가 그렇게 휑할 리가 없었다. 양파 같은 기본 재료부터, 햄이나 통조림 과일까지, 세나는 모든 것을 채워 넣었다. 유우키가 뭘 좋아할지 모르겠다면서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건 다 자신이 좋아하던 브랜드뿐이었다. 그게 ‘여지’ 같기만 했다. 아직 마음이 있다고 표현 해 주는 것 같았다. 알아 봐 달라는 SOS 신호 같았다. 유우키는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또, 긍정적인 생각을 해 버렸다.


   유우키는 ‘세나 이즈미의 냉장고가 비어 있던 이유’에 대해서 추론을 시작했다. 입에 들어간 샌드위치의 맛이 좋았다. 거친 호밀빵 안에 들어 있는 계란 샐러드는 부드러웠다. 샐러드 안에 들어간 무르지 않은 당근과, 양상추가 아삭아삭 씹히는 게 식감이 좋았다. 토마토가 물을 내서 호밀빵의 퍽퍽함을 달래주고 있었다. 계란 샐러드는 약간 달았다. 밸런스가 좋은 샌드위치였다. 세나는 밥을 해 먹는 걸 귀찮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솜씨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혼자 밥 먹던 게 싫은 걸까, 유우키는 샌드위치를 씹다 말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의 외로움이 비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같이 먹으면 될 것을, 이라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포스트잇에 적혀있던 세나의 스케줄을 떠올렸다. 오늘은 세나가 바빴고, 내일은 유우키가 바빴다. 코코아 분말의 CF촬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지를 잡으라며 샘플로 줬던 코코아는 달고 맛있었다. 우유를 넣지 않아도 부드러웠다. 물에 타도 부담이 없는 맛이었는데, 세나는 그것도 입에 대질 않았다. 유우키는 입을 움직였다. 아삭아삭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의식이 세나로 귀결되고 있었다.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건 ‘회식이 없다면’ 오늘 저녁, 회식이 있다면 내일 모래 아침일 것이었다. 유우키는 문득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부인이 바쁘네요, 라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많이 먹구 힘내야지, 라고 혼잣말을 했지만 목이 말랐다. 유우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렌지 주스를 꺼내 컵에 따랐다.

   좋아하는 브랜드였다. 그게 유우키를 슬프게 만들었다.






***


   기분이 몽롱했다. 하이하진 않았다. 적당히 착잡했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 게 악몽 같았다. 나루카미에게 재워달라고 졸랐지만 ‘촬영이 있잖니’ 라는 말로 단번에 거절당했다. 세나는 붉어진 얼굴로 집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잊지 않았던 날짜를 입력하면 도어락이 열린다. 집 안은 놀랍도록 고요하다. 조용한 그 곳에 발걸음을 옮기면,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보인다.

   두 개인 부엉이 장식품, 결혼식 때 받아서 거꾸로 걸어 말린 부케. 모두 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블랙 앤 화이트로 모던하게 꾸며둔 집안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거슬리는 건 웨딩사진이었다. 소파 위 벽면을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는 액자 안엔 이마를 마주대고 웃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볼 때 마다 쓴맛이 진했지만 가릴 수는 없었다.

   오늘따라, 세상이 빙빙 돌았다. 그래도 유우키가 현관에 나오질 않아 다행이었다. 그 때와 같은 상황을 만들 뻔 했다. 접촉하는 순간을 내내 줄이고 싶었다. 다 같이 간 술집에서 유우키의 인터뷰가 나왔을 땐 죽고 싶었다. 오가던 말들이 사라지고, 썰물처럼 침묵만이 남았을 때의 그 어색함이란. 어쭙잖은 배려는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드는 법이었다.

   그 츠키나가 레오가 ‘괜찮냐’라고 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었다. 뭔가 된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될 생각도 없었고, 변할 생각도 없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츠는 미리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물론 알았다면 절대로 오케이 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랬을 거니까. 스오우는 정말로요, 라고 물으려다가 그만 둔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었으면 오늘 제 발로 집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얼굴정도는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세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세계가 허물어지는 건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나루카미가 ‘우울해?’ 라고 물어봤을 때 뭐라고 대답했었더라. 세나는 몽롱하게 소파에 앉았다 털썩 누웠다. 졸음이 밀려왔지만, 잘 수 없었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했다. 내일은 유우키가 스케쥴이 있는 날이었다. 반찬, 만들어줘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나는 깨끗이 씻어 뒤집어 놓은 도시락통과, 그릇들을 바라보았다. 앙큼한 짓을 해 놓았네,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독한 짝사랑은 잠복기가 있는 감기 같았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없는 척 하고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세나는 그릇들을 보다가, 냉장고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재료를 확인해야, 내일 뭘 만들지가 결정 된다. 연어는 결국 해물이었을까, 해물이 아니었을까. 세나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정리할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유우키에게 싫어하는 음식이 있으면 적어달라고 부탁했었다. 포스트잇을 봤을 지는 미지수지만. 세나는 천천히 포스트잇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벽면으로 다가갔다. 내일 스케쥴을 적어 놓은 유우키의 글씨는 잘 썼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서투른 모습은 여전하구나, 싶다가도 뭔가 마음이 급했을까? 하고 신경 쓰게 되어버린다.


    「많이 바쁘죠?」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우키의 말투로 적힌 메모가, 그의 목소리로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세나는 손을 뻗어 메모를 떼어냈다. 가려져 있던 두 번째 포스트잇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 위로 올라갔다. 시야보다 조금 높게 있던 종이들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항상 고마워요」라는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술은 모든 걸 무르게 만든다. 세나는 그것을 떼어 구겨지지 않게, 가볍게 쥐었다.


   「저녁 먹고 올지 안 먹고 올지는 잘 모르겠어서 파스타를 했어요」

   「할 줄 아는 게 그것 밖에 없어서」

   「근데 이즈미 씨가 뭘 좋아하는 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조금 바보 같죠? 참, 나 오늘 일찍 잘 거예요.」

   「물가를 좋아하던 건 기억이 났는데, 모르겠어서 잡지를 찾아봤는데」

   「어디엔 빠네가 좋다고 하고, 어디에는 그냥 아무거나 다 좋다고 해서」

   「어디에 맞춰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진짜 좋아하는 건 어느 쪽이에요? 내일 아침에 볼 수 있으면 대답해줘요.」

   「아무튼, 파스타는 그냥 할 수 있는 걸로 만들었어요. 항상 고마워요.」


    세나는 한 장 한 장 포스트잇을 땠다. 붙였다 땠다를 여러번 반복 한 것처럼, 종이 뒤가 거의 말라 있었다. 많은 고민을 했을까, 다가오는 것도 무서워서 한 걸음 한 걸음 돌다리를 디디는 기분이었을까. 널 피해서 늦게 들어올 때도 깨 있었던 네가 자고 있는 건 내 반응이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멋대로 생각해도 좋을까. 우리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그건 ‘거짓말’이나 ‘착각’이 아닌 걸까? 세나는 여러 의문을 제시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하나에 대한 답을 해 갔다.

   모든 것은 물거품이며, 한겨울밤의 꿈과 같다. 이뤄질 가능성은 없으며, ‘결혼 놀이’를 하고 있어서 유우키가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세나는 제가 떼어버린 메모 뒷장에 나머지 한 장이 단단하게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장이 겹쳐져 있어서 잘 보지 못한 듯싶었다. 떼었다 붙였다 하지 않았는지, 그가 메시지를 가리고 있던 종이를 땔 때, 사박거리는 작은 소리가 났다. 세나는 입을 열었다. 술 취해 붉어진 볼이 달았다.


   “그럼 내일 봐요, 당신의”


    유우키 마코토. 세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쪽지들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냉장고를 여니, 노란 오리 도시락 통이 보였다. 세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꺼냈다. 심각하게 불어버린 크림파스타가 들어있었다.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속이 역했다. 그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굳게 닫힌 안방문을 바라보았다. 흰 문 너머의 유우키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을까, 세나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옯겼다.

    그러나 차가운 문고리를 잡은 그의 손은, 문을 열 수 없었다. 대신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눈이 아렸다. 먼지가 들어 간 모양이었다. 어른이 됐는 데도, 이런 감정을 대하는 데는 여전히 미숙했다. 아아, 하고 그는 탄식을 내뱉었다. 당신의, 유우키 마코토-라는 말이 자꾸만 그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다 불어버린 파스타의 재료 손질은 서툴렀다.

     차가운 척, 싫어하는 척을 하고 있다면 그저 넘어가 주지 그랬니. 어쭙잖은 상냥함은 독이 된다는 걸 아직도 모를 나이는 아니잖니. 세나는 억울함에 입을 열었다. 들어줄 사람이 없는 말은 빈 공간을 잔잔하게 울렸다. 저걸 만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같이 마주보면서 서툰 파스타를 먹는 생각을 했을까, 그럼 무슨 이야길 할 거라고 예상했던 걸까. 그걸 도시락 통에 담아놓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포스트잇을 붙일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당신의 유우키 마코토라는 문구는 어떤 의미일까. 당신, 당신의, 당신의. 왜 ‘이즈미 씨’가 아니라 ‘당신의’인 걸까.


   사랑을 하면 생각이 많아진다. 이는 세나 이즈미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입은 코트에서 겨울이 바스락거렸다. 코끝이 찡해졌다. 눈이 멀 것 같았다. 목울대가 울컥였다. 아이처럼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은 싫다. 하지만 그의 가슴께에서 치받치며, 파랑처럼 거칠게 몰려오는 감정들이 그를 멋대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세나는 화끈거리는 볼에 흐르는 것을 닦아냈다.

    모조품, 모조품인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유우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맞다. 저 또한 사랑하는 기분에 빠져 착각 한 것이다. 그렇게 멀어졌으면 잘라내는 게 마땅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떠나가야 한다. 진실한 사랑이니 뭐니 하는 PD의 농간에 빠져, 둘 다 이상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틀에서 벗어나면 놀랍도록 회복이 빠를 것이다. 그건, 처음부터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우 군에게는 좋은 형이고 싶었는데.”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득한 밤이 밀려왔다. 먹어야 할 시기를 놓쳐 식어버리고 불어터진 파스타처럼, 그들 사이의 감정 또한 엉망이 되어버렸다. 세나는 제 감정이 명백하게 모순임을 깨달았다. 이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아니었어. 그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다가, 부엌으로 다가갔다. 다 식어서 맛이 없는 파스타, 크림과 면끼리 달라붙어서 떡 마냥 찐덕찐덕하게 변해버린 파스타. 그는 그것에 ‘무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흔들릴까봐 무서워.”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입 밖에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유우 군, 네가 깨어 있었더라면 우리 사이는 뭔가가 ‘될 수’ 있었을까? 세나는 소리 내어 물었다. 연극의 독백인 것 마냥 ‘세나 이즈미’라는 이름의 연극의 27막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원채 독백이란 그런 것이었다. 무대에서 오로지 말하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말.

    오늘 밤은 뜬 눈으로 지새우게 될 것 같았다. 그는 도시락 통을 노려보았다. 끝나지 않을 눈싸움이었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했다. 주머니에 넣은 포스트잇에서 유우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세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밤은 짙기만 했다. 집에 가고 싶어, 그는 주저앉았다. 일으켜 줄 사람 없는 밤이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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