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이즈]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 염소님이 주셨던 '우주여행'이라는 주제로 레오이즈입니다u  u

* 추천 BGM은 이쪽 ←입니다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작은 북과 비올라, 첼로의 피치카토가 긴장감 넘치는 독특한 리듬을 연주하고 나면 그 위로 두 개의 주제가 겹쳐지며 흘러나온다. 이 동일한 조의 주제가 동일한 리듬을 따르면서 악기 편성을 바꾸며 느리게 고조된다.

   하나의 리듬과 두 개의 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조롭게 이어지지만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반복되며, 약한 음에서 출발해 결말의 폭발적인 관현악 총주에 이르기까지 점증하는 크레셴도의 매력이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 라벨, 「볼레로」





01.

‘첫 음’은 플루트 독주로부터.


   ― 사과, 배추, 양배추(1/2통),

   ― 랑콤 파운데이션?, 후춧가루, 고기(국거리)

   ― 해조류 코너에서 건다시마 있는 지 물어보기. 후춧가루가 아니라 통후추.

   ― 아마도, 건포도.


   슬슬 잠이 오는 시간이었다. 감은 눈 주위로 빛이 쏟아졌다. 이불이 진동했다. 아마도 여러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온 듯 했다. 세나는 베개 옆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손가락이 푹신푹신한 이불 위를 방황하다가, 핸드폰을 잡았다. 내일 있을 유닛 스케줄이 바뀌거나, 잡지 촬영일자에 변경이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곤란한데. 세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방금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그는 눈을 비볐다.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세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츠키나가는 간간히 이런 문자를 보내곤 했다. 누군가의 메모장이 되는 것은 달갑지 않았지만, 세나는 그게 ‘왕님’이기 때문에 아무런 불만도 표시할 수 없었다. 세나는 문자를 스크롤했다. 요즘 세상에 라인 같은 메신저를 쓰지 않는 게 츠키나가답다면 츠키나가다운 일이었다. 그는 ‘읽음’표시가 싫다고 했었다. 나름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읽음’ 표시가 뜨면 답장을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들어서 싫어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사적인 메모를 누가 ‘읽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게 싫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츠키나가 레오는 세나 이즈미에게 사적인 연락을 하지 않으며, 간간히 보내는 문자는 모두 이렇게 ‘심부름 메모’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나는 왜 그가 자신을 선택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츠키나가 레오의 기준은 평범한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우주적’이었다.

   세나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가 학교를 나오지 않았을 때도, 그는 간간히 심부름 문자를 보냈다. 세나는 눈으로 텍스트를 읽었다. 한 번도 지우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정말로 한 건도 없었다. 보고 싶다던가, 잘 지내고 있다던가 하는 안부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건 묘하게 외로운 느낌이었다. 그런 사근사근한 관계가 아닌데도 기대하는 자신이 나쁜 건지, 아니면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츠키나가가 나쁜 건지, 세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츠키나가가 정학처분을 받은 다음에 보낸 첫 문자는 다음과 같았다. 「보라색 반찬통(락앤락), 고등어, 시금치, 어묵. 그리고 농어 한 마리」. 세나는 그 문잘 받았을 때를 반추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제가 걱정했던 일이 모두 쓸모없는 일 같아서 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는 기사였으며 왕의 선택을 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건드리는 게 무서운 걸지도 몰랐다. 세나는 앞머리를 위로 넘겼다.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첫 문자가 좀 더 기대는 거였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의 눈 오는 날처럼 간간히 찾아오는 상념이었다. 물론 둘은 사적인 내용을 전혀 주고받지 않았다. 세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유닛 활동이라는 ‘비즈니스’를 제외하고, 둘의 세계는 교집합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한 채, 세나는 언제나 츠키나가의 심부름 알림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다른 말을 꺼내 준다면 이 ‘메모장’ 행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장을 보내고 싶지만 보낼 수 없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세나가 그 메시지를 받아온 것은 아주 예전 부터였다. 츠키나가 레오가 사라지기 이전부터, 그는 종종 세나를 메모장으로 이용하곤 했다. 덕분에 세나 이즈미는 원하지 않아도 그의 식단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님은 각 반찬 간의 밸런스에 신경을 전혀 쓰지 않으시는 타입이고, 디저트를 꼭꼭 챙기시는 타입이었다.

   지적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세나는 바짝 마르는 제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런 문자에 몇 개월 동안 답장을 안 하다가, 문득 ‘잘 지내?’ 같은 말을 보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츠키나가가 어떤 기준으로 메모장을 선택 한 건지도 모르고, 왜 문자를 계속 보내는 건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나 이즈미의 기준에서는 메모장 하나를 켜는 것 보다 문자를 보내는 게 훨씬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해하기를 포기했으며, 대화하기 또한 포기했다.


   아마도 츠키나가는, 자신이 대답하지 않는 게 편해서 계속 문자를 보내는 건지도 모른다. 세나는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다가 웃었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더 이상 머리를 쓰는 것도 쓸데없는 소모였다. 그는 핸드폰을 잠갔다. 그는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다. 스케줄 변경이 아니라면 이제 잘 시간이었다. 10시부터 자야 메이크업에 지친 피부가 재생이 된다.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아름다워야만 했다. 가꾸는 것은 프로의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았음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상념이 우주처럼 부유했기 때문이다. 억울한 일이었다. 잠을 다 깨워 놓은 상대방은 지금쯤 아무런 생각도 없이, 24시간 마트로 차를 몰고 있을 것이다. 차 안에는 데모 CD에서 나오는 음악이 흐르고, 가로등 조명이 밝혀진 도로를 런웨이처럼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속이 타는 건 언제나 기사의 몫. 왕은 정면만 바라보고 걸으면 그만이다. 세나는 답답하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 진간장, 짜장?, 로스트비프용 고기.


   진짜 짜증나, 라고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세나는 눈을 떠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인은 여전히 츠키나가 레오였다. 이렇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는 건 간만의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이돌인 아들을 심부름을 보내다니, 어머님도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괜히 툴툴거렸다. 잠이 달아난 그의 두 눈은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밝기를 잃어가는 야광별들이 은은하게 색을 내고 있었다.

   츠키나가 댁의 식단은 오늘도 독특했다. 이런 근본 없고 영양소 계산도 없으며, 반찬 간의 밸런스를 생각하지 않는 식사로 괜찮은지 걱정이 됐다. 그는 답장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잠을 방해 받았으면 한 마디 정도는 첨언해도 되겠지 싶었다. 세나는 보낼 문구를 고민했다. 그동안 느낀 건데, 왕님 이런 거 먹고 괜찮아? 잘 살 수 있어? …… 녹-황의 밸런스를 맞춘 식단을 짜렴 …… 오늘 디저트는 그럼 건포도야? 완전 짜증나네. …… 여러 문장들이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세나는 하나도 입력할 수 없었다.

   그동안 고착 된 버릇을 깨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라벨의 『볼레로』의 첫 음을 너무 세게 시작했다고 해서, 곡을 중간에 끊거나 줄이거나 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뭐든지 시작이 중요한 법이었다. 처음 왕님이 문자를 보냈을 때, 메모장으로 쓰는 거 별로 안 좋아 한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그저 연락이 오는 게 좋아서, 자신을 기억 해 주고 있다는 것 같아서 저지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세나는 괜히 제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머릿속이 괜히 복잡했다. 처음에 허락하지 말 걸 그랬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벌려진 입술 사이에서 으으,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겨울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이름 있는 별들을 찾아내는 것처럼, 그는 제 생각들 사이를 부유하는 기억들 속에서 처음 문자를 받던 날에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절대로, 입 밖으론 말하지 못할 말들이었다. 옆으로 돌아누웠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아, 그는 짧게 탄식했다. 14분대의 볼레로처럼 커져버린 심장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반복되고 있었다. 처음, 작게 울리던 때에 파냈어야 했던 건데. 세나는 ‘어린 왕자’가 왜, 바오밥나무 씨앗을 매일 파내는 질 알겠다고 자조했다.

    천장에 붙어 있는 야광별이 희끄무레하게 색을 냈다. 문자를 처음 받던 날 붙였던 것이었다.






02.

도- 도- 시도레도시라 도 도라도-


    눈이 우주처럼 내리는 날이었다. 츠키나가 레오는 핸드폰을 쥐고 놀이터에 앉아 있었다. 문자를 보내도 답장은 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세나는 자신에게 한 번도 답장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에게 문자를 보내는 건 우주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주파수를 쏘아 올려도 대답이 오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연락은 지구와 우주 사이처럼 철저하게 한 방향으로만 이뤄지고 있었다.

    츠키나가는 억울했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에서도 두 개의 주제부는 엮이고, 얽혀 크레센도로 나아가는데, 저와 세나는 고착 관계에 있는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이 우주에서는 별들도 운행을 하고, 지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지 매일매일 회전하고 있다. 우주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그는 그네에 발을 굴렀다. 찬바람이 볼을 타고 스쳤고, 쇠줄을 잡은 손이 딱딱하게 얼어 아프기만 했다.

   그네도 반복운동을 하고 중력도 날아가려는 걸 붙잡아주고 있는데 세나 이즈미만이 고정된 것처럼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유닛 활동을 위해 학교에서 만나면, ‘기대된다’는 표정을 하고 다가왔다. 세나 이즈미는 ‘설렌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그가 설레는 것은 ‘츠키나가 레오’가 새 곡을 가져왔을 때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사랑한다’는 말의 증거가 되지 못하는가? 츠키나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역시 이건 신개념 장난이 틀림없었다. 레오는 주선율은 온통 트릭키하지만, 무거운 리듬의 곡을 떠올렸다. 그는 주머니에 엉망으로 들어있던 노트를 꺼내서 음표를 끄적였다. 그가 앉아있는 그네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눈에 음표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메모한 것을 서둘러 주머니 안에 넣었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에 비친 눈은 은하수처럼 소복소복, 보였다. 우주 안에서, 외톨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츠키나가는 그 순간 지독하게도 외로워졌다.


   세나 이즈미를 대할 때면 감정이 자꾸 크레센도로 흘러간다. 댐의 물이 한꺼번에 방류되는 것처럼 극단적이 된다. 세나는 대화할 때,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는 버릇이 있다. 츠키나가는 그 투명한 느낌의 블루를 볼 때 마다 무심코 좋아해, 라고 말하려는 것을 몇 번이고 참아왔다. 이 짝사랑의 씨앗은 분명 라벨의 볼레로처럼 작디작았을 것이다. 어린왕자의 별에 심어진 바오밥나무 씨앗처럼, 작디작은 씨앗은 어느새 츠키나가 레오라는 이름의 별을 망가뜨릴 정도로 크게 자랐다.

   크레센도, 그리고 크레센도였다. ‘점점 강하게’ 울리는 사랑의 목소리를 어떻게 무시할 것인지, 츠키나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와 사적인 연락을 자제하기로 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옛말을 따라보기로 한 것이다. 언젠가 했던 잡지인터뷰에서 고백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츠키나가는 “좋아한다면 쿨하고 남자답게 좋아한다, 고 바로 말할 것”, 이라고 대답했었다. 멍청한 대답이었다.

   혹시나 거절당한다면, 이라는 말의 무게감은 상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의무감으로 사귀어 주는 것도 꼴불견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세나 이즈미가 좋아할만한 남자인가, 라고 물었을 때 자신있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도 없다.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천재에게도 두려운 게 있을 줄은 몰랐다. 츠키나가는 차라리 우주와 교신을 하는 게 더 즐거울 거라고 확신했다.

    볼과 머리카락에 닿는 눈이 차가웠다. 눈은 여전히 우주처럼 내리고 있었다. 세나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츠키나가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놀이터가 크레센도로 울렸다. 그는 땅을 박차고 그네를 탔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사랑을 하면 더 고장 나는 타입이 자신인 줄 몰랐다. 발성연습을 하는 것처럼 큰 소리는 허망하게 사라졌다. 받아주지 않는 말을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츠키나가는 자신이 보낸 이상한 문자들을, 세나가 붙잡아주기를 바랐다. 마음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임박하면 하나 둘 씩, 약간의 트릭을 섞어서 보낸 것들이었다. 하지만 세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번도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게 그를 더 우주 속의 외톨이별처럼 만들었다. 사랑은 사람을 유달리 지치게 만든다. 레오는 ‘나이츠’의 다음 곡을 이별 노래로 쓰기로 결심했다가 푸스스 웃었다.

   교신, 교신에 성공하고 싶었다. 세나라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츄우, 하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받아도 무시할지도 몰랐다. 츠키나가는 허탈하게 웃으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네는 그가 두 세 걸음을 앞으로 걸을 때 까지 삐걱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세나의 입버릇을 빌린다면 ‘완전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츠키나가는 눈에 젖은 머리카락을 툴툴 털었다.

    츠키나가는, 차라리 처음부터 큰 소리를 냈다면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이어, 그렇다면 그 뒤에 몰려올 크레센도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는 결론을 냈다. 몇 번의 우주를 뒤집어, 새로 역사를 쓴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열아홉 살의 츠키나가 레오는 지금의 상황에 봉착할 것이었다. 변하지 않는 미래란 이런 느낌인가, 그는 이러한 상황 또한 그와 세나 같다고 느꼈다. 그는 핸드폰을 열어서 다시 ‘암호’를 보냈다.

    우주를 넘어서 전달 된 마음을 그가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라인 같은 메신저가 아니라 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그 ‘미지’의 가능성 때문이다.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명제 아래에서 안심할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암호에 대한 답장은 오지 않았다. 놀이터에 눈이 사복사복 내렸다. 세상을 온통 흰 별이 먹어가고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에서 츠키나가는 천천히 걸었다. 세나가 보고 싶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크레센도로 울리고 있었다.


    우츄우- 하고 속삭여도 외계인은 알아주지 않는다. 문장의 첫글자들을 따서 만든 암호를 세나는 알아주지 않는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는 몰라도 오늘의 츠키나가는, 사랑고백을 하고 싶었다. 마음이 온통 사랑으로 출렁거렸다. 떨어지는 유성의 각도처럼, 제 세계의 회전축은 세나 이즈미를 향해 돌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의 눈을 마주했을 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플루트 독주로 시작했었던 작은 소리가, 어느새 클라리넷과 바순을 거쳐 피콜로클라리넷과 오보에, 플루트와 약음기를 끼운 트럼펫, 테너섹스폰, 소프라니노 섹소폰, 호른과 피콜로 한 쌍- 첼리스타, 오보에, 오보에 다모레, 코랑글레, 클라리넷 한 쌍을 지나고 트롬본 독주를 거치며, 바순족을 제외한 모든 목관악기, 또 피콜로, 플루트 한 쌍, 오보에 한 쌍, 클라리넷 한 쌍, 제1바이올린이 만들어 내는 선율을 지나서 어느새 위의 악기들에 피콜로, 플루트 한 쌍, 피콜로트럼펫, 트럼펫 세 대, 소프라니노색소폰과 테너색소폰, 제1바이올린과 트럼본이 트롬본까지 추가하여 울리는 거대한 서사가 된다.

    볼레로 같은 마음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그 춤곡에 츠키나가는 어울리기로 했다. 눈은 중력을 무시한 것처럼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고, 머리 위에 내리는 가로등은 제법 은은하다. 로맨틱함의 절정이었다. 세나 이즈미라는 기사님은 츠키나가 레오라는 왕의 명령을 무시하지 못함으로, 부탁한다면 세나는 나와 줄 것이다. 정말로, 나올 것이다. 츠키나가는 도- 도- 시도레도시라 도 도라도- 하는 주제부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한 폭의 우주를 옮겨놓은 것 같은 세상에서 춤을 추자. 메트로놈은 ♩= 66으로 맞춰 놓고, 볼레로의 템포로- 매우 보통인 빠르기로 발과 발을 엮어 움직인다면 제법 보기 좋은 광경이 나올 것이다. 두 사람만의 우주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것은 세나고, 그의 허리에 나비를 잡는 것처럼 손을 올리는 건 자신이 될 것이다. 레오는 두 볼이 붉어짐을 느꼈다. 그는 한 발을 축으로 하여 천천히, 우아하게 돌았다. 볼에 내린 눈은 금방 녹아 스몄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 한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츠키나가는 자신의 망상을 방해한 사람에게 쏘아 붙여 주겠다고 생각하며 신경질적으로 잠금을 풀었다. 그는 메시지를 빠르게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세나 이즈미였다. 66으로 맞춰놓은 메트로놈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츠키나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긴장하는 풋내기 배우와 같은 모습이었다.

    세나의 컬러링으로 설정된 곡은 우연히도 라벨의 「볼레로」였다. 츠키나가는 자신의 우주와 세나의 세계가 점차 겹쳐져 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화기를 꼭 쥐었다. 여보세요? 하고 졸린 목소리의 세나가 전화를 받았다. 난데, 하고 말하자 아 문자 봤어? 하고 대답했다. 세나는 왜 자신이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에 대해 변명을 하려는 것 같았다. 츠키나가는 잠깐만! 하고 외쳐 말을 끊었다. 수화기 너머의 그는 응,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려, 생각하게 해줘!”


   여러 가능성들이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유성처럼 빠르게 달아올랐다가 연소되었다. 츠키나가의 망상은 계속 그들의 교집합이 합집합으로 묶일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세나는 이런 그에게 익숙한지, 아직 ‘정답’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저건 세나가 아닐 것이다, 세나가 아닐 것이다, 세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츠키나가는 염불을 외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말을 중얼거리다가, 정답! 하고 외쳤다.


   ―어디 한 번 말해봐.

   “나랑 왈츠를 추자 세나!”

   ―어이없어.


   머뭇거리던 세나는 그렇게 말했다. 졸음이 묻어있던 목소리는 언제 가다듬었는지 평소처럼 단단했다. 나와, 나 너희집 앞 놀이터야, 라고 다시 한 번 명령조로 말하자 세나는 밖이 많이 춥느냐 물었다. 그 시점에서 그는 나오길 결정했다고 생각하며, 레오는 눈이 내린다고 대답했다. 와우, 라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은 세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와 주겠어?’라는 요청을 다시 하기 전에 끊어진 전화가 세나 다웠다. 츠키나가는 전화를 끊은 다음 남아있는, 전파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한동안 귀에서 전화기를 때지 않았다.

    사랑이 볼레로처럼 번지고 있었다. 우주처럼 눈이 내렸고, 주황색의 가로등은 우주를 한층 더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레오는 오늘만 ‘어린왕자’가 되기로 했다. 별들의 운행 속에서 의미 있는 단 하나의 별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눈이 번져왔다. 좋아하는 사람이 지금,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오고 있다.

    이 보다 더 로맨틱한 리듬은 없었다.






03.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입김과 입김이 닿아 섞였다. 한 바퀴를 돌 때 마다, 입술이 붉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세나는 저보다 작은 왕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대에 올라갈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세나는 천천히 돌았다. 츠키나가의 손이 닿은 곳이 온통 화끈거렸다. 그는 볼레로의 리듬을 노래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들려주지도 않는 노랫소리에 세나는 울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스네어드럼의 목소리가 제 심장에서 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눈이 내렸다. 가로등 아래는 우주 같았다. 어두컴컴한 아스팔트 위를 서로 몸을 맞대고 돌았다. 스텝, 스텝, 턴, 원- 투, 를 유지하고 있던 왈츠는 어느 순간부터 붕괴되어, 츠키나가의 리듬을 세나가 따라가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새로운 우주 속에서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간간히 츠키나가는 허밍을 멈추고


    “세나”


    하고 불렀다. 그럼 세나는 그와 몸을 조금 더 맞대고, 그가 끌어가는 리듬과 제 발을 엮었다. 발과 발이 엉키면 된다는 점에서 그들의 춤은 탱고에 가까웠으나, 세나는 그것이 ‘볼레로’라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우주의 주제부들이 하나의 리듬 안에서 섞이는 기분이 들었음으로. 그들의 머리 위로 눈이 내렸다. 츠키나가는 간간히 세나의 어깨에 내리는 눈을 보면서, 웃었다. 비취색 눈동자가 사라지는 것을 볼 때마다 세삼 설렜다.

   천재인 츠키나가 레오의 언어는 세나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웠다. 세나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허무맹랑한 망상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휘둘렸다. 츠키나가 레오는 세나 이즈미에게 우주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별과 별이 맞물려 ‘별자리’라는 하나의 카테고리가 되는 것처럼, 그들은 천천히 춤을 췄다. 너무 빠르지 않은 적당한 리듬이었다.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전화를 받았더니 왈츠를 추지 않겠느냐고 질문했다. 집 앞에 있는 작은 놀이터 앞이라고 하는 목소리에는 한 톨의 거짓도 없었다. 눕기 전에 이야기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얼마나 거울을 많이 봤는지 모른다. 잠깐 누웠다고 앞머리는 정신없이 뻗쳐 있었다. 세나는 평소의 세나 이즈미로 보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그에게 제정신이냐고 물어보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가로등 아래, 우주처럼 내리는 눈발 사이에서 손을 뻗는 츠키나가를 봤을 때, 세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정해진 수순 같았다. 눈은 별이었고, 츠키나가는 별 가운데서 가장 반짝이고 있었다. 거대한 행성의 중력에 이끌리는 소행성처럼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괜히 “왈츠는 무슨 왈츠야, 갑자기, 난데없이, 얼어 죽을, 진짜 짜증나”, 같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자, 츠키나가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로맨틱 하지 않나?”


    츠키나가가 물었다. 세나는 짜증나,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풀려 있어서, 츠키나가는 그의 표정을 보며 쾌활하게 웃었다. 다시, 가로등이 만들어내는 별무리 아래에서 반 바퀴를 돌아 움직였다. 세나 이즈미는 츠키나가 레오를 통해서 우주를 본다. 맨 정신의 자신이 갈 수 없는 ‘로맨틱함’을 엿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츠키나가의 중력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둘이 신은 신발이 아스팔트를 스치는 소리를 냈다. 눈이 얇게 쌓인 곳으로 츠키나가는 그를 몰고 갔다.

   턴 앤드 턴, 그리고 원 투 원. 그들의 발자국이 하얗게 내린 별무리들을 밟았다. 함께 움직이는 발자국은 어느 게 세나의 것이고 어느 게 츠키나가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서로의 우주를 겹치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세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리는 눈과 대조적으로, 마주 잡은 손은 너무나도 따듯해서 그거면 다 된 거라고 생각했다. 별 거 아닌 메시지에 고민했던 밤도, 결국 보냈던 답장도, 그 것에 얽힌 모든 상념까지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무슨 생각 해 세나?”


    왕이 물었다. 기사는 입을 열어, 가만히 대답했다. 왕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웃었다. 엉켜버린 리듬에 세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텼다. 아, 만족스러운 대답이야. 레오는 킬킬 웃었다. 세나는 팀파니의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고 생각했다. 이미 너무나도 커져버린 마음을 털어내기는 어려웠다. 그들의 볼레로는 한동안 자리에서 멈춰 있었다. 눈이 만들어 내는 우주 사이에서, 레오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담대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비취색 눈동자를 보는 것이 조금 어색해, 세나는 눈을 감았다. 입술에 입김이 닿았다. 따듯하고, 포근했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가고, 심장박동 소리는 14분대의 볼레로처럼 어마무지하게 컸다. 귀에서 고동이 뛰는 듯 했다. 입술에 입술이 닿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울 속에서 둘은 홀로만 봄 속을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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