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이즈] La campanella

* 소녀님과의 연성교환 글입니다

* 뱀파이어x성야제...인데..집착...끼얹고 싶었......습니다.... 네......











La campanella




살인은 연애처럼 하라.

어두운 그곳에 그가 있다.

나는 그를 가둔다.

어두운 이곳에 그가 있다.

오래 묵은 사랑이

손끝에서 터진다.

― 「카프카-107호」 신해욱


   가끔 네 손을 뒤로 묶고 싶다. 도드라진 날개 뼈에 크게 채찍질을 하고 싶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세게 내리친 채찍에 살갗이 찢어져 스며 나온 피에, 하얀 피부에 입을 맞추고 싶다. 뒤로 묶인 손목을 어떻게든 풀고 싶어서 바르작거리는 두 주먹, 하얗게 질린 손톱 끝을 보면서 웃고 싶다. 네가 예쁘다고 했었던 웃음소리처럼. 그렇다면 너는 내게 뭐라고 말할까, 쿠마 군, 이라고 말할까 아니면, 지금처럼 신의 이름을 입에 담을까.






***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가 생각나는 밤이었다. 리츠는 밤하늘을 가리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에 대한 성화는 언제나 자애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쿠마 리츠는 신이 만들어내는 가장 어두운 부근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오늘 크리스마스 전야제 라이브가 없었더라면 이런 곳에 누워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이츠는 본디 개인주의적인 유닛이다. 유닛원이 성탄 기념 성가를 부른다고 해서, 꼭 구경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리츠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쨍한 파랑을 바라보았다. 역시 교회에 있는 건 불쾌했다. 오늘 세나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오지 않았을 곳이었다. 그는 조율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었다. F음을 반복하고 있던 현악기들 중 몇몇은, 본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손이라도 풀고 싶은 것인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파가니니가 연주하던 것 보다는 세련미가 떨어진다. 파가니니가 살던 시대에 비해서 미래인 게 오히려 세련미가 덜하다는 게 나름 유머로 느껴져, 리츠는 피식 웃었다. 밤이 깊어갈 수록 그는 활발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물이었다. 백 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교회에는 한 발자국도 못 들어왔을 것이다. 리츠는 혀를 쯧쯧 차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리츠는 세나의 말을 반추했다. 리스트에게 사사받았던 「라 캄파넬라」를 들려준 다음의 일이었다. 세나는 리츠의 ‘리스트’가 어떤 은유를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리스트는 너무나도 오래 전의 사람이었고, 사쿠마 리츠는 19살의 풋내기 소년이었다. 리츠는 세나의 그 행동들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먼지가 쌓여 있어 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리츠는 자신이 매우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나 이즈미는 현실적이다. 그는 유메노사키 내에서 돌고 있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에 대해 하나도 믿지 않았다. 삼기인三奇人이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도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지나갔다. 그런 그가 성야제 의상을 입고 신을 찬미한다는 것이 사쿠마는 조금 웃기게 느껴졌다. 분명 세나라면 신 또한 믿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느리게 하품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달아나지 않은 졸음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현실적이었다. 왜 이렇게 낮에 맥을 못추냐며 투덜거리는 말에, 나 사실 뱀파이어야, 라면서 진실을 알려줬을 때에도 세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형제가 둘 다 뱀파이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신기했는지, 언젠가 작은 목소리로 형의 컨셉을 지켜주려는 거야? 라고 질문 한 적은 있었다. 요컨대 그는 정말이지 기이하거나 이상한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물이 인간들 사이에서 섞여 지내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학교 안에서 피를 빨린 학생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도, 리츠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모함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사쿠마 리츠는 그런 세나가 좋았다. 비현실을 믿어주지 않는 단호함이 맘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러한 단단함을 사랑했다. 모두가 믿는 걸 믿지 않는 사람은 나름대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으면서도 어울려주곤 했다. 리츠가 셋쨩, 피 주세요- 라고 말하면 얼굴을 찌푸리고, 그런 컨셉은 이제 졸업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면서도 네? 주세요, 라고 조르면 팔을 내밀었다. 그의 손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 건 제법, 재미있는 놀이었다. 그의 피는 맛이 없었고, 빈혈이라도 있는지, 밍밍한 맛이 났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서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세나의 행동은 나름의 여흥이었기에 리츠는 그에게 계속 피를 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흡혈은 마치 기사서약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리츠는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세나의 손가락 끝에 키스한다.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 떨어지면 세나는 리츠의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세나는 맛있니? 맛있어? 라고 빈정거리면서도 한 번 결정한 걸 되돌리거나, 물리진 않았다. 그는 이상한 부분에서 아가페적이었다. 리츠는 그게 재미있어, 괜히 그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추곤 했다. 습관 같은 일이었다.

    그의 손바닥을 혀끝으로 핥으면 세나는 기분이 나쁜지, 주먹을 쥐었다. 힘이 들어가 손톱 끝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믿지 않는다면서, 피를 주고, 그런 주제에 무서워서 손을 꼭 쥐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모습을 계속- 계속 볼 수 있다면 저보다 약한 인간에게 몇 번이든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그의 자존심은 아름다움 앞에선 당연하다느 듯 고개를 숙이곤 했다.

   리츠는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하는 세나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도 좋아했다. 이로 강하게 깨문, 핏기 없는 입술에서는 당장이라도 신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힘들면서도 참고, 담담하게 보이려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 사랑스러움에 질식할 수 있을 정도였다. 흡혈을 할 때 찾아오는 쾌락을 기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피가 나는 게 무서운 건지 모를 정도로 긴장하는 세나의 어깨는 언제나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로 문다? 라고 말하면 세나는 짜증내기 전에 어서 하던가, 라고 말했다. 리츠는 그럼 기사복을 닮은 나이츠의 의복 아래에 가려져 있는 하얀 손목을 물었다. 송곳니로 여린 피부를 찢고, 혈관에 닿으면 뜨거운 피가 흘렀다. 더럽게 맛없는 피였다. 뭔가 많이 부족하고, 어리숙한 느낌의 피. 여태까지 리츠가 물어왔던 인간들 중 가장 맛이 없다고도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나의 반응만은 언제나 화음처럼 좋았고, 파가니니처럼 섹시했다. 「라 캄파넬라」의 마지막 종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피를 빠는 동안 세나의 반대편 손은 어딜 쥘지 몰라 방황한다. 그 때 손목에서 입을 때고 시선을 올려 쳐다보면 세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미간에 있는 주름들이 사랑스럽고, 꽉 감아 가려진 아이스블루의 눈동자가 아쉽지만 그는 쉽게 눈을 뜨지 않는다. 밀려오는 쾌락에 몸을 가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피가 빨리는 느낌이 생소한지, 허리에 힘을 주고, 앉은 허벅지에 힘을 주는 요령 없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리츠는 무심코, 몇 번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뱉을 뻔 했다. 세나는 목석같았고, 리츠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피를 지혈해 주기 위해 상처자국을 혀로 핥으면, 세나는 그 소리마저 듣고 싶지 않아하는지 얼굴을 꼭 숙였다.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자기보다 500년은 더 산 괴물 앞에서 의연하기란 어려운 일일 텐데도, 그는 엄지에 힘울 줘 구부리면서까지 ‘아무렇지 않아’하고 싶어 했다. 작은 숨을 내쉬면서 오르내리는 가슴팍은 여렸다. 목과 함께 누른다면 숨을 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거라면,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쿠마 리츠는 재미있는 인간을 사랑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영원이나 죽음으로 만들기에는 ‘내일’이 기대되는 군상들을 좋아했다. 세나는 딱 그런 사람이었다. 인간적인 고백을 하지 않았지만, 리츠는 그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보석과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울리는 짝을 찾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는 푸스스 웃었다.

   좋아하게 만든 세나가 나빠, 리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눈을 감을 때 종종 세나가 번져오곤 했다. 그는 언제나 서투른 모습으로 자리했다. 리츠는 그 서투름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손목을 뒤로 묶고, 예쁘게 드러난 날갯죽지에 채찍질을 하고 싶기도 했다. 피가 흘러나올 때, 아픔을 견디지 못해서 내는 신음은 얼마나 달콤할까. 절정에 달했을 때, 목을 젖히며 내는 소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리츠는 멋대로 상상했다.

   그의 상상은 꿈과 같이 달콤했으며, 만약 크리스마스 전야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쉬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딸기와 설탕을 넣어 만든 감주 같았다. 종은 크게 울렸다. 화음도 없는 시끄러운 소리였다. 여러 명의 구두굽 소리가 들려왔다. 리츠는 1층 예배당을 바라보았다. 2층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작은 본당의 한켠을 차지한 성가대석에,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크리스마스 전야제는 늦은 밤에 시작했다. 졸리진 않았지만 지치는 날이었다. 교회 안으로 유메노사키 학생들이 차곡차곡 들어왔다. 몇몇은 매우 지루해보였고, 몇몇은 신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믿기 어려웠지만, 나이츠의 두 명은 ‘경건한 쪽’이었다. 심지어, 세나의 목에는 반짝이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의외의 일이었다. 세나는 스오우보다 더 진지했다. 그는 지금 ‘라이브’를 대하는 게 아니라 ‘종교 의식’을 대하는 표정이었다. 리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신을 믿는 사람이었나, 하고 중얼거렸다.

   셋쨩이 믿는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리츠는 얼굴을 찌푸렸다. 3년 동안 가까이 있었는데도 전혀 알지 못했다.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믿어주지 않으면서 더 멀리 있는 신을 믿는다는 게 화가 났다. 이는 전적으로, 아가페적인 사랑을 베풀지 않는 세나 때문이었다. 그의 사랑은 넓고 얇게 퍼지는 사랑이라기보다는 한 점에 가서 꽂히는 화살 같은 사랑이었다. 그 열정적인 마음을 아가페적으로 썼으면 벌써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리츠는 혀를 쯧쯧 찼다. 그의 피가 맛이 없었던 건 신을 믿어서였을까. 리츠는 볼을 부풀렸다.

   그렇다면 그가 기현상을 믿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는 예배당, 제 자리를 찾자마자 두 손을 끌어안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오밀조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신에게 무얼 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츠는 그게 퍽 아쉽다고 생각하며,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지휘자가 단상에 올라옴과 동시에, 성가대석에 서 있는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손이 움직이고, 박자에 맞춘 오케스트라 반주가 흘러 나왔다. 같은 영원을 살아가는 사이인데, 왜 자신은 그의 종교가 될 수 없을까, 리츠는 얼굴을 찌푸렸다.

   명백한 불쾌감이 몸 안을 어둠처럼 기어다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세나의 눈은 저만을 바라봐야 한다. 그 눈동자가 담을 수 있는 세상은 사쿠마 리츠면 족했다. 그의 세상을 한정시키고 싶었다. 새장 속에 가둘까, 아니면 내 속에 가둘까, 리츠의 상상은 극단적인 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신을 향해 웃어주는 그가 미웠다. 똑같은 영원이라면 내 쪽이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리츠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계속 머릿속에서 같은 생각이 종이 여러 번 겹쳐 울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신을 찬미하는 그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 곳에서 세나의 목소리는 화음처럼 쌓였다. 명백하게 불쾌한 일이었다. 리츠는 화가 났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서 신을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리츠는 세나를 노려보았다. 세나는 드물게도,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잔잔한 음들이 쌓여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성가가 되었다. 맘속에서 심장박동처럼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리츠는 그의 손목을 뒤로 묶고, 도드라진 날개뼈에 제 자국을 남기는 상상을 했다. 나쁜 아이에겐 벌을 줘야 마땅한 법이었다.

    사랑을 하는 아이는 언제나 아름답다. 그 반짝이는 두 눈이 저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잔인한 처사였다. 아, 가둬버리고 싶어. 리츠는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그가 들고 있는 푸른 악보가 거슬렸고, 신을 찬미하는 붉은 입술이 짜증났다. 걸고 있는 인이어와, 목에 매고 있는 감색 리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날 종교로 삼고, 날 믿고, 날 사랑할 순 없었던 걸까. 리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턱을 괴었다.

    모든 게 심드렁해졌다. 제 손 안에서 굴릴 수 있는, 농락할 수 있는, 변화 할 수 있는 세나를 좋아했다.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의 후반부처럼, 큰 종소리가 들려왔다. 리츠는 천천히 한숨을 내 쉬었다. 성가대는 신의 가장 가까이에 서서, 노래할 수 있는 자리라고 들었던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리마저 망가뜨리기로 결정했다. 신은 멀었고, 마물은 가까운 법이었다. 리츠는 성가가 끝나기 전, 2층에서 내려왔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 마다 그림자가 짙게 묻어 있었다.

    오래 묵은 사랑이, 손끝에서 터졌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울리는 것을 찾아가기 마련이었다. 그의 아름다움은 신의 것인 듯 정교했으나, 그것을 먼저 가져가는 것은 세상 속의 마물이었다. 리츠는 세나의 목을 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신을 찬미하는 목소리를 내뱉는 그 숨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두 목을 조르면 간헐적으로 떨면서, 쿠마 군, 하고 불러줄까. 아니면 지금처럼 신의 이름을 입에 담을까. 사쿠마는 천천히 한숨을 내 쉬었다. 고작 인간 하나에게 휘둘리는 자신이 웃기기만 했다.  

    그는 침몰하는 화음을 떠올렸다.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려 자신의 것으로, 신에게 손을 뻗는다면 억지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게. 리츠는 교회 밖으로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양은 저 안에서 신을 찬미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사근거리는 미소가 모두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리츠는 그의 하얀 등에 채찍질을 하는 상상을 했다. 꿈과 같은 상상은 곧 현실로 다가올 게 분명했다.

    신의 것이라면 매력적이지 말았어야지. 같은 영원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내가 종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날 종교처럼 생각하고, 날 사랑했어야지. 리츠는 그에게 하지 못할 말들을 제 목구멍 너머로 천천히 씹어 넘겼다. 그를 밤에 영원히 가둬, 침몰하고 싶었다. 숨을 쉴 수 없이 목이 졸려오는 세상 속에서 세나가 입에 담을 이름은 사쿠마 리츠, 하나 뿐으로 족했다. 리츠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그의 마지막 노래를 들었다.

    흡혈귀는 아이의 현실을 비틀어, 비현실로 옮겨 놓는 꿈을 꾼다. 성가의 화음처럼 달디 단 꿈이었다. 그는 괜히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하늘에 뜬 별처럼 멀리 있는 말이었지만, 이제 곧 세나에게 닿을 말이었다. 구속하고 망가지고 비틀렸으면 좋겠다. 리츠는 사랑에 질식하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밤은 깊기만 했고, 달은 그의 발밑에 그림자를 만들지 못했다. 그의 붉은 눈이 어두운 밤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는 무대가 끝나길 기다렸다. 커튼콜이 끝나고 난 뒤, 정적에 가까운 어둠은 본디 마물의 것이었다. 사랑이 깊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오래 묵혀둔 사랑이 손끝에서 터졌다. 리츠는 연애는 살인처럼 하라던 시구를 떠올렸다. 그의 가느다란 목을 물고 싶은 밤이었다. 그가 지세운 밤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것마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당장 세나를 물어 제 앞에 무릎 꿇리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가지는 건 자신 만으로 족했다. 그의 비틀린 사랑은 연리지처럼 자랐다. 


    교회의 종소리가 종언처럼 울렸다.

'히치하이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오이즈] Good bye, SUMMER  (0) 2016.01.24
[레오이즈] 不宣 :: 餘情  (0) 2016.01.24
[레오이즈] inspiration  (0) 2016.01.19
[리츠이즈] 불안  (0) 2016.01.17
[레오이즈]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1) 2016.01.15

[레오이즈] inspiration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리츠이즈] 불안

*네임버스

*이즈미는 졸업, 리츠와 아라시는 3학년입니다.

* 앙스타 전력의 '도시락'이라는 주제를 받아 썼습니다..(...)









불안

내 이름이 너의 다잉메시지가 되었음 좋겠어





***


   그래서 이즈미 쨩의 첫 연애는 어떠니? 좋아? 설레? 나루카미는 웃으며 물었다. 세나는 제 회색 코트를 벗어 가지런히 정리했다. 차도 안 나왔는데 할 질문으로는 너무 급한 게 아니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세나는 제 연애를 어떻게 정의할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루카미는 세나의 그런 무른 부분이 좋았다. 그는 외모만큼이나 고양이 같은 성격이었다. '마음에 드는 건 좋아,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싫어.' 라는 말은 완전한 타인에게는 상처일진 몰라도, 바운더리 안에 들어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말이었다.

   세나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댔다. 그는 한쪽 손으로 볼을 괴다가, 망설이듯 음, 하고 중얼거렸다. 평소의 그는 말을 할 때 툭툭 내뱉는 편이었기 때문에 나루카미는 음? 하고 작게 물었다. 세나는 미간을 좁혔다. 카페의 오렌지색 조명이 회색 머리카락에 닿아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는 입고 있는 물색 스위터의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루카미는 푸스스 웃었다.


   "리츠쨩?"

   "잘 아네."

   "의외로 달달하네?"

   "의외로?"


   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루카미는 손을 뻗어, 세나의 좁혀진 미간을 꾹 눌렀다. 세나는 발버둥치면서도 저항하지는 않았다. 카페에서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가 흐르고 있었다. 세나는 카페의 인테리어를 보는 듯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고, 찻잔이 가득 놓여있는 장식장과, 고풍스러운 표지의 책들이 가득한 책장을 보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그가 신은 구두 뒷굽과, 바닥이 버드키스를 하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는 제 손에서 반지를 뺐다. 은색 링에 가려진 '네임'이 보였다. 운명이랑 엮이면 달달해 질 수 밖에 없는 거지, 라면서 세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마치 반지처럼,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사쿠마 리츠'라는 글씨가 써져 있었다. 세나는 운명의 상대와 함께 하는 건 카르멘의 세기디야 같은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나루카미는 웃는 얼굴로 그의 설명을 찬찬히 듣고 있었다.


   "근데 말이지."


   세나는 제 네임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샌가 고민을 가득 담고 있었기에, 나루카미는 응?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머그컵에 담긴 아메리카노 두 잔이 나오자 세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짧게 목례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목을 축였다. 테이블에 놓인 반지가 유달리 무거워 보였다. 뭔가, 벌써 권태기? 나루카미는 일부러 발랄하게 물었다. 운명의 상대 사이에서 그런 일은 있을 리 없기에 던지는 농담이었다.

   세상 사람들 중 50%는 '네임'을 타고 난다. 사랑하게 될 상대의 이름은 사춘기 때 발현하는 것으로, 없어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노네임이 네임을 사랑하게 되는 상황은 문제였지만, 그런 일은 의외로 소수였다. 나루카미는 노네임이었기에 세나와 사쿠마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는 설탕을 한 스푼 넣고 커피를 저었다.

   세나 이즈미는 계속 고민했다. 그는 뭔가 말을 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연신 꾹꾹 깨물었 다. 피가 몰려 그의 입술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예쁜 모습이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아이는 귀엽네~ 라고 말하자, 세나는 뭐가,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나루카미는 요즘 리츠가, 학교에서 꽤나 열심히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역시 너랑 동거하고 있기 때문일까나? 하고 운을 떼자, 세나는 깊게 한숨쉬며 화답했다.


   "날 도시락취급 하고 있어."

   "어?"

   "날 도시락 취급 하고 있다고. 도시락. 도시락."


   그는 휴대용 도시락이 된 기분이라면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나 그쪽 사생활 까진 듣고 싶지 않았는데? 라고 나루카미가 말하자, 세나는 '우리 사이에' 조금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니냐면서 말을 꺼냈다. 평소에는 쓰질 않을 단어에 나루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스웨터로 손등을 가렸다. 마치 문장과 문장 사이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마침표처럼, 세나 이즈미는 말 사이에 간간히 한숨을 쉬었다.


   "목이랑... 어깨랑 연결 된 쪽 있잖아."


   그러니까 이 부근,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 어깨 뒤쪽을 가리켰다. 나루카미가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하자, 세나는 거길 시도때도 없이 물어서 피를 마신다면서 투덜거렸다. 그는 얼마 전에 나간 건강검진 예능프로그램에서 피가 부족하며, 빈혈증세를 보인다는 진단을 받았고, 그 방송을 함께 시청했지만 사쿠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면서 투덜거렸다. 불안해 하는 거 아냐? 하고 나루카미는 무신경하게 물었다.

   남의 연애, 그것도 속사정을 듣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세나 이즈미가 '걸즈 토크'를 신청해 오는 것은 퍽이나 의외의 일이라 나루카미는 푸스스 웃었다. 그 웃음이 재수없다고 말하면서도 세나는 자신이 휴대용 도시락이 된 게 분명하다면서 억울해 했다. 그는 그 부근만 질겅질겅 물어 뜯어, 피부에 멍이 빠질 날이 없다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그의 눈썹은 애처롭게 휘어 있었다.


   "말로 따지는 건?"

   "안 들어. 완전 짜증나."

   "이유가 있을까?"

   "거기가 향이 가장 좋아~ 라면서 물어."

   "차라리 키스를 해달라고 하는 건?" 

   "도시락 취급을 받은 다음에, 키스까지 둘 다."

   "완전 재수 없어."

   "물어본 건 나루 군이라구?"

   "하지만 너무 달달한걸."


   아메리카노 안 시켰으면 어쩔 뻔 했니~? 나루카미는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향이 거기가 좋다는 건 좀 섹시한 느낌이고, 키스까지 하는 건 더더 설레서 재수 없지 않니? 세나는 반짝반짝하게 웃는 나루카미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초치는 말을 하는 건 무리라,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뱉은 숨에 아메리카노의 표면이 흔들렸다. 동거 한 다음에 말야, 안 물린 적이 없어. 뭔가 피를 저장해 둔 도시락 같은 느낌으로 냠냠 먹는단 말야. 세나는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고, 나루카미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냥 '네임'끼리 만나서 그런 건 아닐까? 뭔가 더 운명적으로 끌려서, 더더 씹고 맛보고 즐기고 싶은 거지. 나루카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호호 웃었다. 그는 세나가 먼저 졸업했기 때문에 불안해하던 사쿠마를 떠올렸다. 같은 나이지만, 1학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적다. 사쿠마 리츠는 사랑 앞에선 명백한 어린아이라, 그는 세나의 모든 걸 손에 쥐고 싶어 했다. 그런 면에서는 이해 못할 행동도 아니었다.

   그 어린애 같은 독점욕을 받아주는 것은 연인의 몫이 아니겠니? 나루카미는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세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 부분을 포토샵으로 지워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일이라면서 울쌍을 지었다. 쿠마 군 정말 성가셔어,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루카미는 「가까이 있는 연인은 도시락이 아닙니다!」 캠페인을 해야겠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세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약속처럼 걸려 있는 네임이 유달리 로맨틱 해 보이는 날이었다.


   "나도 네임이었으면 좀 로맨틱 했을까?"


   나루카미가 물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라낼 수 없는 운명으로 엮였다는 느낌은 좋아.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사랑에 한 톨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 두근거리기만 했다. 나루카미는 네임끼리 가까이 있어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건 정말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다면서 과장 된 목소리로 웃었다. 세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더니, 케이크 사줄까? 하고 물었다. 나루카미는 레드벨벳 케이크가 좋다고 말했고, 세나는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운명은 좋겠네, 나루카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푸스스 웃었다. 생각 해 보면 운명이란 대단하다. 세나 이즈미의 손에 사쿠마 리츠의 이름이 나타난 것은 18살의 겨울이었다. 그 때 까지 유우키 마코토를 따라다니던 그가 한 순간에 마음을 돌린 것도 그 이름 때문일 것이다. 명백하게 두 사람의 이름이었다. 누가 일부러 새긴 게 아닌 이상. 운명이란 꽤나 신비로웠다.

   아무리 밴드 같은 것으로 가려도 네임은 제 능력을 한다. 나루카미는 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점점 끌리는 두 사람을 보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았다. 하루에 한 스푼 씩 설탕을 먹는 기분이었는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도시락 취급 또한 나름 로맨틱하다. 싫다고 말하면서도 거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세나는 무른 구석이 있었다. 자기 바운더리의 사람에게는 친절하며, '사랑'의 대상에게는 일직선으로 집착하는 면모도 있으니까.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완전 이상한 얼굴."


   주문을 마친 세나가 물었다. 나루카미는 사쿠마가 학교에서 매우 불안해 한다는 말을 다시 꺼냈다. 세나는 어떤 식으로? 라고 대답했고, 나루카미는 호호,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세나의 두 볼은 봄철 벚꽃처럼 물들었다. 제법 귀여운 표정이었다. 붉어진 얼굴을 지적하자 세나는 애초에 네임인데 왜 불안해 하는 지 모르겠다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 다운 말이었다.





***


   사쿠마 리츠는 불안했다. 그는 세나 이즈미의 어깨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누군가와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의 마지막 부근을 듣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불안감은 종소리처럼 끊기지 않고 울렸다. 한 번 가라앉은 기분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차가 막혔다. 그는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깨진 커피잔을 보는 느낌이었다.

   세나의 피부는 쉽게 물드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원래대로 돌아가는 속도가 빨랐다. 사쿠마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에 새겨진 이름을 쓰다듬었다. 이왕이면 나가기 전에 한 번 물고 싶었는데, 그는 도시락 취급은 사양이라며 거절했다. 나루카미와 세나는 사쿠마 리츠의 기준에서 지나치게 친했다. 친하다고 해서 옷을 벗고 자국을 보여주는 정도는 아닐 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는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의 가슴은 피치카토처럼 뛰었다. 사랑한다는 말로 옭아매도, 그 사슬이 언제 녹슬지 모르는 것이다. 끊어지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 애초에 그들이 이어진 건 네임 덕분이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두 사람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오랜 기간동안 살아왔음에도 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 없기에, 사쿠마 리츠의 불안감은 점점 크레센도처럼 가중됐다.

   그의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근에 나타난 것은 유우키 마코토의 이름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울고 싶었다. 계속 물고, 살을 찢어 흉터를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나는 저를 도시락 같은 취급을 한다면서 짜증냈지만 그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칼로 찢어, 네임을 드러내는 수술도 있다지만 그걸 받게 할 구실이 없었다. 명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말할 수도 없었다. 다시 그 애를 보면서 웃는 세나를 견질 자신도 없었다.

   차라리 도시락처럼 언제나 가지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어, 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세나는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농담이지? 라고 말했다. 그 말은 둘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것 처럼 냉랭했다. 그는 사쿠마가 왜 불안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네임과 네임은 운명이잖아? 라고 철없이 묻는 목소리를 입술로 덮어 먹어도 마이너스적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을 알기에 더욱 불안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그는 한숨했다. 불안한 감정은 단조처럼 울렸다. 그 짧은 시간에 멍이 지워질 리는 없지만, 그래도 물어놔야 했다. 나루카미와 같이 있다는 카페에 들어가면 무슨 표정을 할까, 또 왔어? 라면서 웃어줄까 아니면 안 자? 하고 물어볼까. 피를 달라고 하면 어떤 얼굴을 할까. 사쿠마는 울고 싶었다. 불안에는 밑바닥이 없어서, 그는 계속, 계속 추락하고 있었다. 차라리 약속과 운명으로, 온전히 엮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쿠마는 제 난폭한 사랑에 목줄이라도 매어놓고 싶었다. 가둔다면 이 불안이 종식할 수 있을까. 그는 세나 이즈미를 감금하는 상상을 하다가, 푸스스 웃었다. 사랑이란 이다지도 달았다. 차라리 둘이서 잠들 수 있다면 편안할까. 그렇다면 세나 이즈미의 다잉메시지는 자신의 이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리츠는 한숨을 내 쉬었다. 막힌 도로는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히치하이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츠이즈] La campanella  (0) 2016.01.23
[레오이즈] inspiration  (0) 2016.01.19
[레오이즈]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1) 2016.01.15
[리츠이즈] The Glass Menagerie  (0) 2016.01.13
[레오이즈] moon river  (0) 2016.01.10

[레오이즈]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 염소님이 주셨던 '우주여행'이라는 주제로 레오이즈입니다u  u

* 추천 BGM은 이쪽 ←입니다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작은 북과 비올라, 첼로의 피치카토가 긴장감 넘치는 독특한 리듬을 연주하고 나면 그 위로 두 개의 주제가 겹쳐지며 흘러나온다. 이 동일한 조의 주제가 동일한 리듬을 따르면서 악기 편성을 바꾸며 느리게 고조된다.

   하나의 리듬과 두 개의 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조롭게 이어지지만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반복되며, 약한 음에서 출발해 결말의 폭발적인 관현악 총주에 이르기까지 점증하는 크레셴도의 매력이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 라벨, 「볼레로」





01.

‘첫 음’은 플루트 독주로부터.


   ― 사과, 배추, 양배추(1/2통),

   ― 랑콤 파운데이션?, 후춧가루, 고기(국거리)

   ― 해조류 코너에서 건다시마 있는 지 물어보기. 후춧가루가 아니라 통후추.

   ― 아마도, 건포도.


   슬슬 잠이 오는 시간이었다. 감은 눈 주위로 빛이 쏟아졌다. 이불이 진동했다. 아마도 여러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온 듯 했다. 세나는 베개 옆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손가락이 푹신푹신한 이불 위를 방황하다가, 핸드폰을 잡았다. 내일 있을 유닛 스케줄이 바뀌거나, 잡지 촬영일자에 변경이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곤란한데. 세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방금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그는 눈을 비볐다.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세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츠키나가는 간간히 이런 문자를 보내곤 했다. 누군가의 메모장이 되는 것은 달갑지 않았지만, 세나는 그게 ‘왕님’이기 때문에 아무런 불만도 표시할 수 없었다. 세나는 문자를 스크롤했다. 요즘 세상에 라인 같은 메신저를 쓰지 않는 게 츠키나가답다면 츠키나가다운 일이었다. 그는 ‘읽음’표시가 싫다고 했었다. 나름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읽음’ 표시가 뜨면 답장을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들어서 싫어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사적인 메모를 누가 ‘읽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게 싫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츠키나가 레오는 세나 이즈미에게 사적인 연락을 하지 않으며, 간간히 보내는 문자는 모두 이렇게 ‘심부름 메모’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나는 왜 그가 자신을 선택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츠키나가 레오의 기준은 평범한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우주적’이었다.

   세나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가 학교를 나오지 않았을 때도, 그는 간간히 심부름 문자를 보냈다. 세나는 눈으로 텍스트를 읽었다. 한 번도 지우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정말로 한 건도 없었다. 보고 싶다던가, 잘 지내고 있다던가 하는 안부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건 묘하게 외로운 느낌이었다. 그런 사근사근한 관계가 아닌데도 기대하는 자신이 나쁜 건지, 아니면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츠키나가가 나쁜 건지, 세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츠키나가가 정학처분을 받은 다음에 보낸 첫 문자는 다음과 같았다. 「보라색 반찬통(락앤락), 고등어, 시금치, 어묵. 그리고 농어 한 마리」. 세나는 그 문잘 받았을 때를 반추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제가 걱정했던 일이 모두 쓸모없는 일 같아서 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는 기사였으며 왕의 선택을 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건드리는 게 무서운 걸지도 몰랐다. 세나는 앞머리를 위로 넘겼다.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첫 문자가 좀 더 기대는 거였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의 눈 오는 날처럼 간간히 찾아오는 상념이었다. 물론 둘은 사적인 내용을 전혀 주고받지 않았다. 세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유닛 활동이라는 ‘비즈니스’를 제외하고, 둘의 세계는 교집합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한 채, 세나는 언제나 츠키나가의 심부름 알림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다른 말을 꺼내 준다면 이 ‘메모장’ 행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장을 보내고 싶지만 보낼 수 없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세나가 그 메시지를 받아온 것은 아주 예전 부터였다. 츠키나가 레오가 사라지기 이전부터, 그는 종종 세나를 메모장으로 이용하곤 했다. 덕분에 세나 이즈미는 원하지 않아도 그의 식단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님은 각 반찬 간의 밸런스에 신경을 전혀 쓰지 않으시는 타입이고, 디저트를 꼭꼭 챙기시는 타입이었다.

   지적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세나는 바짝 마르는 제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런 문자에 몇 개월 동안 답장을 안 하다가, 문득 ‘잘 지내?’ 같은 말을 보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츠키나가가 어떤 기준으로 메모장을 선택 한 건지도 모르고, 왜 문자를 계속 보내는 건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나 이즈미의 기준에서는 메모장 하나를 켜는 것 보다 문자를 보내는 게 훨씬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해하기를 포기했으며, 대화하기 또한 포기했다.


   아마도 츠키나가는, 자신이 대답하지 않는 게 편해서 계속 문자를 보내는 건지도 모른다. 세나는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다가 웃었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더 이상 머리를 쓰는 것도 쓸데없는 소모였다. 그는 핸드폰을 잠갔다. 그는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다. 스케줄 변경이 아니라면 이제 잘 시간이었다. 10시부터 자야 메이크업에 지친 피부가 재생이 된다.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아름다워야만 했다. 가꾸는 것은 프로의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았음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상념이 우주처럼 부유했기 때문이다. 억울한 일이었다. 잠을 다 깨워 놓은 상대방은 지금쯤 아무런 생각도 없이, 24시간 마트로 차를 몰고 있을 것이다. 차 안에는 데모 CD에서 나오는 음악이 흐르고, 가로등 조명이 밝혀진 도로를 런웨이처럼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속이 타는 건 언제나 기사의 몫. 왕은 정면만 바라보고 걸으면 그만이다. 세나는 답답하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 진간장, 짜장?, 로스트비프용 고기.


   진짜 짜증나, 라고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세나는 눈을 떠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인은 여전히 츠키나가 레오였다. 이렇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는 건 간만의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이돌인 아들을 심부름을 보내다니, 어머님도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괜히 툴툴거렸다. 잠이 달아난 그의 두 눈은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밝기를 잃어가는 야광별들이 은은하게 색을 내고 있었다.

   츠키나가 댁의 식단은 오늘도 독특했다. 이런 근본 없고 영양소 계산도 없으며, 반찬 간의 밸런스를 생각하지 않는 식사로 괜찮은지 걱정이 됐다. 그는 답장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잠을 방해 받았으면 한 마디 정도는 첨언해도 되겠지 싶었다. 세나는 보낼 문구를 고민했다. 그동안 느낀 건데, 왕님 이런 거 먹고 괜찮아? 잘 살 수 있어? …… 녹-황의 밸런스를 맞춘 식단을 짜렴 …… 오늘 디저트는 그럼 건포도야? 완전 짜증나네. …… 여러 문장들이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세나는 하나도 입력할 수 없었다.

   그동안 고착 된 버릇을 깨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라벨의 『볼레로』의 첫 음을 너무 세게 시작했다고 해서, 곡을 중간에 끊거나 줄이거나 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뭐든지 시작이 중요한 법이었다. 처음 왕님이 문자를 보냈을 때, 메모장으로 쓰는 거 별로 안 좋아 한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그저 연락이 오는 게 좋아서, 자신을 기억 해 주고 있다는 것 같아서 저지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세나는 괜히 제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머릿속이 괜히 복잡했다. 처음에 허락하지 말 걸 그랬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벌려진 입술 사이에서 으으,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겨울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이름 있는 별들을 찾아내는 것처럼, 그는 제 생각들 사이를 부유하는 기억들 속에서 처음 문자를 받던 날에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절대로, 입 밖으론 말하지 못할 말들이었다. 옆으로 돌아누웠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아, 그는 짧게 탄식했다. 14분대의 볼레로처럼 커져버린 심장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반복되고 있었다. 처음, 작게 울리던 때에 파냈어야 했던 건데. 세나는 ‘어린 왕자’가 왜, 바오밥나무 씨앗을 매일 파내는 질 알겠다고 자조했다.

    천장에 붙어 있는 야광별이 희끄무레하게 색을 냈다. 문자를 처음 받던 날 붙였던 것이었다.






02.

도- 도- 시도레도시라 도 도라도-


    눈이 우주처럼 내리는 날이었다. 츠키나가 레오는 핸드폰을 쥐고 놀이터에 앉아 있었다. 문자를 보내도 답장은 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세나는 자신에게 한 번도 답장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에게 문자를 보내는 건 우주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주파수를 쏘아 올려도 대답이 오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연락은 지구와 우주 사이처럼 철저하게 한 방향으로만 이뤄지고 있었다.

    츠키나가는 억울했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에서도 두 개의 주제부는 엮이고, 얽혀 크레센도로 나아가는데, 저와 세나는 고착 관계에 있는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이 우주에서는 별들도 운행을 하고, 지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지 매일매일 회전하고 있다. 우주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그는 그네에 발을 굴렀다. 찬바람이 볼을 타고 스쳤고, 쇠줄을 잡은 손이 딱딱하게 얼어 아프기만 했다.

   그네도 반복운동을 하고 중력도 날아가려는 걸 붙잡아주고 있는데 세나 이즈미만이 고정된 것처럼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유닛 활동을 위해 학교에서 만나면, ‘기대된다’는 표정을 하고 다가왔다. 세나 이즈미는 ‘설렌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그가 설레는 것은 ‘츠키나가 레오’가 새 곡을 가져왔을 때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사랑한다’는 말의 증거가 되지 못하는가? 츠키나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역시 이건 신개념 장난이 틀림없었다. 레오는 주선율은 온통 트릭키하지만, 무거운 리듬의 곡을 떠올렸다. 그는 주머니에 엉망으로 들어있던 노트를 꺼내서 음표를 끄적였다. 그가 앉아있는 그네에서 끼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눈에 음표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메모한 것을 서둘러 주머니 안에 넣었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에 비친 눈은 은하수처럼 소복소복, 보였다. 우주 안에서, 외톨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츠키나가는 그 순간 지독하게도 외로워졌다.


   세나 이즈미를 대할 때면 감정이 자꾸 크레센도로 흘러간다. 댐의 물이 한꺼번에 방류되는 것처럼 극단적이 된다. 세나는 대화할 때,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는 버릇이 있다. 츠키나가는 그 투명한 느낌의 블루를 볼 때 마다 무심코 좋아해, 라고 말하려는 것을 몇 번이고 참아왔다. 이 짝사랑의 씨앗은 분명 라벨의 볼레로처럼 작디작았을 것이다. 어린왕자의 별에 심어진 바오밥나무 씨앗처럼, 작디작은 씨앗은 어느새 츠키나가 레오라는 이름의 별을 망가뜨릴 정도로 크게 자랐다.

   크레센도, 그리고 크레센도였다. ‘점점 강하게’ 울리는 사랑의 목소리를 어떻게 무시할 것인지, 츠키나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와 사적인 연락을 자제하기로 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옛말을 따라보기로 한 것이다. 언젠가 했던 잡지인터뷰에서 고백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츠키나가는 “좋아한다면 쿨하고 남자답게 좋아한다, 고 바로 말할 것”, 이라고 대답했었다. 멍청한 대답이었다.

   혹시나 거절당한다면, 이라는 말의 무게감은 상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의무감으로 사귀어 주는 것도 꼴불견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세나 이즈미가 좋아할만한 남자인가, 라고 물었을 때 자신있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도 없다.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천재에게도 두려운 게 있을 줄은 몰랐다. 츠키나가는 차라리 우주와 교신을 하는 게 더 즐거울 거라고 확신했다.

    볼과 머리카락에 닿는 눈이 차가웠다. 눈은 여전히 우주처럼 내리고 있었다. 세나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츠키나가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놀이터가 크레센도로 울렸다. 그는 땅을 박차고 그네를 탔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사랑을 하면 더 고장 나는 타입이 자신인 줄 몰랐다. 발성연습을 하는 것처럼 큰 소리는 허망하게 사라졌다. 받아주지 않는 말을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츠키나가는 자신이 보낸 이상한 문자들을, 세나가 붙잡아주기를 바랐다. 마음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임박하면 하나 둘 씩, 약간의 트릭을 섞어서 보낸 것들이었다. 하지만 세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번도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게 그를 더 우주 속의 외톨이별처럼 만들었다. 사랑은 사람을 유달리 지치게 만든다. 레오는 ‘나이츠’의 다음 곡을 이별 노래로 쓰기로 결심했다가 푸스스 웃었다.

   교신, 교신에 성공하고 싶었다. 세나라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츄우, 하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받아도 무시할지도 몰랐다. 츠키나가는 허탈하게 웃으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네는 그가 두 세 걸음을 앞으로 걸을 때 까지 삐걱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세나의 입버릇을 빌린다면 ‘완전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츠키나가는 눈에 젖은 머리카락을 툴툴 털었다.

    츠키나가는, 차라리 처음부터 큰 소리를 냈다면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이어, 그렇다면 그 뒤에 몰려올 크레센도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는 결론을 냈다. 몇 번의 우주를 뒤집어, 새로 역사를 쓴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열아홉 살의 츠키나가 레오는 지금의 상황에 봉착할 것이었다. 변하지 않는 미래란 이런 느낌인가, 그는 이러한 상황 또한 그와 세나 같다고 느꼈다. 그는 핸드폰을 열어서 다시 ‘암호’를 보냈다.

    우주를 넘어서 전달 된 마음을 그가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라인 같은 메신저가 아니라 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그 ‘미지’의 가능성 때문이다.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명제 아래에서 안심할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암호에 대한 답장은 오지 않았다. 놀이터에 눈이 사복사복 내렸다. 세상을 온통 흰 별이 먹어가고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에서 츠키나가는 천천히 걸었다. 세나가 보고 싶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크레센도로 울리고 있었다.


    우츄우- 하고 속삭여도 외계인은 알아주지 않는다. 문장의 첫글자들을 따서 만든 암호를 세나는 알아주지 않는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는 몰라도 오늘의 츠키나가는, 사랑고백을 하고 싶었다. 마음이 온통 사랑으로 출렁거렸다. 떨어지는 유성의 각도처럼, 제 세계의 회전축은 세나 이즈미를 향해 돌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의 눈을 마주했을 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플루트 독주로 시작했었던 작은 소리가, 어느새 클라리넷과 바순을 거쳐 피콜로클라리넷과 오보에, 플루트와 약음기를 끼운 트럼펫, 테너섹스폰, 소프라니노 섹소폰, 호른과 피콜로 한 쌍- 첼리스타, 오보에, 오보에 다모레, 코랑글레, 클라리넷 한 쌍을 지나고 트롬본 독주를 거치며, 바순족을 제외한 모든 목관악기, 또 피콜로, 플루트 한 쌍, 오보에 한 쌍, 클라리넷 한 쌍, 제1바이올린이 만들어 내는 선율을 지나서 어느새 위의 악기들에 피콜로, 플루트 한 쌍, 피콜로트럼펫, 트럼펫 세 대, 소프라니노색소폰과 테너색소폰, 제1바이올린과 트럼본이 트롬본까지 추가하여 울리는 거대한 서사가 된다.

    볼레로 같은 마음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그 춤곡에 츠키나가는 어울리기로 했다. 눈은 중력을 무시한 것처럼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고, 머리 위에 내리는 가로등은 제법 은은하다. 로맨틱함의 절정이었다. 세나 이즈미라는 기사님은 츠키나가 레오라는 왕의 명령을 무시하지 못함으로, 부탁한다면 세나는 나와 줄 것이다. 정말로, 나올 것이다. 츠키나가는 도- 도- 시도레도시라 도 도라도- 하는 주제부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한 폭의 우주를 옮겨놓은 것 같은 세상에서 춤을 추자. 메트로놈은 ♩= 66으로 맞춰 놓고, 볼레로의 템포로- 매우 보통인 빠르기로 발과 발을 엮어 움직인다면 제법 보기 좋은 광경이 나올 것이다. 두 사람만의 우주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것은 세나고, 그의 허리에 나비를 잡는 것처럼 손을 올리는 건 자신이 될 것이다. 레오는 두 볼이 붉어짐을 느꼈다. 그는 한 발을 축으로 하여 천천히, 우아하게 돌았다. 볼에 내린 눈은 금방 녹아 스몄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 한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츠키나가는 자신의 망상을 방해한 사람에게 쏘아 붙여 주겠다고 생각하며 신경질적으로 잠금을 풀었다. 그는 메시지를 빠르게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세나 이즈미였다. 66으로 맞춰놓은 메트로놈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츠키나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긴장하는 풋내기 배우와 같은 모습이었다.

    세나의 컬러링으로 설정된 곡은 우연히도 라벨의 「볼레로」였다. 츠키나가는 자신의 우주와 세나의 세계가 점차 겹쳐져 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화기를 꼭 쥐었다. 여보세요? 하고 졸린 목소리의 세나가 전화를 받았다. 난데, 하고 말하자 아 문자 봤어? 하고 대답했다. 세나는 왜 자신이 그런 문자를 보냈는지에 대해 변명을 하려는 것 같았다. 츠키나가는 잠깐만! 하고 외쳐 말을 끊었다. 수화기 너머의 그는 응,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려, 생각하게 해줘!”


   여러 가능성들이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유성처럼 빠르게 달아올랐다가 연소되었다. 츠키나가의 망상은 계속 그들의 교집합이 합집합으로 묶일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세나는 이런 그에게 익숙한지, 아직 ‘정답’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저건 세나가 아닐 것이다, 세나가 아닐 것이다, 세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츠키나가는 염불을 외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말을 중얼거리다가, 정답! 하고 외쳤다.


   ―어디 한 번 말해봐.

   “나랑 왈츠를 추자 세나!”

   ―어이없어.


   머뭇거리던 세나는 그렇게 말했다. 졸음이 묻어있던 목소리는 언제 가다듬었는지 평소처럼 단단했다. 나와, 나 너희집 앞 놀이터야, 라고 다시 한 번 명령조로 말하자 세나는 밖이 많이 춥느냐 물었다. 그 시점에서 그는 나오길 결정했다고 생각하며, 레오는 눈이 내린다고 대답했다. 와우, 라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은 세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와 주겠어?’라는 요청을 다시 하기 전에 끊어진 전화가 세나 다웠다. 츠키나가는 전화를 끊은 다음 남아있는, 전파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한동안 귀에서 전화기를 때지 않았다.

    사랑이 볼레로처럼 번지고 있었다. 우주처럼 눈이 내렸고, 주황색의 가로등은 우주를 한층 더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레오는 오늘만 ‘어린왕자’가 되기로 했다. 별들의 운행 속에서 의미 있는 단 하나의 별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눈이 번져왔다. 좋아하는 사람이 지금,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오고 있다.

    이 보다 더 로맨틱한 리듬은 없었다.






03.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입김과 입김이 닿아 섞였다. 한 바퀴를 돌 때 마다, 입술이 붉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세나는 저보다 작은 왕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대에 올라갈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세나는 천천히 돌았다. 츠키나가의 손이 닿은 곳이 온통 화끈거렸다. 그는 볼레로의 리듬을 노래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들려주지도 않는 노랫소리에 세나는 울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스네어드럼의 목소리가 제 심장에서 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눈이 내렸다. 가로등 아래는 우주 같았다. 어두컴컴한 아스팔트 위를 서로 몸을 맞대고 돌았다. 스텝, 스텝, 턴, 원- 투, 를 유지하고 있던 왈츠는 어느 순간부터 붕괴되어, 츠키나가의 리듬을 세나가 따라가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새로운 우주 속에서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간간히 츠키나가는 허밍을 멈추고


    “세나”


    하고 불렀다. 그럼 세나는 그와 몸을 조금 더 맞대고, 그가 끌어가는 리듬과 제 발을 엮었다. 발과 발이 엉키면 된다는 점에서 그들의 춤은 탱고에 가까웠으나, 세나는 그것이 ‘볼레로’라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우주의 주제부들이 하나의 리듬 안에서 섞이는 기분이 들었음으로. 그들의 머리 위로 눈이 내렸다. 츠키나가는 간간히 세나의 어깨에 내리는 눈을 보면서, 웃었다. 비취색 눈동자가 사라지는 것을 볼 때마다 세삼 설렜다.

   천재인 츠키나가 레오의 언어는 세나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웠다. 세나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허무맹랑한 망상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휘둘렸다. 츠키나가 레오는 세나 이즈미에게 우주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별과 별이 맞물려 ‘별자리’라는 하나의 카테고리가 되는 것처럼, 그들은 천천히 춤을 췄다. 너무 빠르지 않은 적당한 리듬이었다.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전화를 받았더니 왈츠를 추지 않겠느냐고 질문했다. 집 앞에 있는 작은 놀이터 앞이라고 하는 목소리에는 한 톨의 거짓도 없었다. 눕기 전에 이야기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얼마나 거울을 많이 봤는지 모른다. 잠깐 누웠다고 앞머리는 정신없이 뻗쳐 있었다. 세나는 평소의 세나 이즈미로 보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그에게 제정신이냐고 물어보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가로등 아래, 우주처럼 내리는 눈발 사이에서 손을 뻗는 츠키나가를 봤을 때, 세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정해진 수순 같았다. 눈은 별이었고, 츠키나가는 별 가운데서 가장 반짝이고 있었다. 거대한 행성의 중력에 이끌리는 소행성처럼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괜히 “왈츠는 무슨 왈츠야, 갑자기, 난데없이, 얼어 죽을, 진짜 짜증나”, 같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자, 츠키나가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로맨틱 하지 않나?”


    츠키나가가 물었다. 세나는 짜증나,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풀려 있어서, 츠키나가는 그의 표정을 보며 쾌활하게 웃었다. 다시, 가로등이 만들어내는 별무리 아래에서 반 바퀴를 돌아 움직였다. 세나 이즈미는 츠키나가 레오를 통해서 우주를 본다. 맨 정신의 자신이 갈 수 없는 ‘로맨틱함’을 엿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츠키나가의 중력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둘이 신은 신발이 아스팔트를 스치는 소리를 냈다. 눈이 얇게 쌓인 곳으로 츠키나가는 그를 몰고 갔다.

   턴 앤드 턴, 그리고 원 투 원. 그들의 발자국이 하얗게 내린 별무리들을 밟았다. 함께 움직이는 발자국은 어느 게 세나의 것이고 어느 게 츠키나가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서로의 우주를 겹치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세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리는 눈과 대조적으로, 마주 잡은 손은 너무나도 따듯해서 그거면 다 된 거라고 생각했다. 별 거 아닌 메시지에 고민했던 밤도, 결국 보냈던 답장도, 그 것에 얽힌 모든 상념까지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무슨 생각 해 세나?”


    왕이 물었다. 기사는 입을 열어, 가만히 대답했다. 왕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웃었다. 엉켜버린 리듬에 세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텼다. 아, 만족스러운 대답이야. 레오는 킬킬 웃었다. 세나는 팀파니의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고 생각했다. 이미 너무나도 커져버린 마음을 털어내기는 어려웠다. 그들의 볼레로는 한동안 자리에서 멈춰 있었다. 눈이 만들어 내는 우주 사이에서, 레오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담대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비취색 눈동자를 보는 것이 조금 어색해, 세나는 눈을 감았다. 입술에 입김이 닿았다. 따듯하고, 포근했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가고, 심장박동 소리는 14분대의 볼레로처럼 어마무지하게 컸다. 귀에서 고동이 뛰는 듯 했다. 입술에 입술이 닿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울 속에서 둘은 홀로만 봄 속을 헤매고 있었다.






'히치하이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츠이즈] La campanella  (0) 2016.01.23
[레오이즈] inspiration  (0) 2016.01.19
[리츠이즈] 불안  (0) 2016.01.17
[리츠이즈] The Glass Menagerie  (0) 2016.01.13
[레오이즈] moon river  (0) 2016.01.10

[리츠이즈] The Glass Menagerie

*리츠와 세나이즈가 많이 비틀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쪽의 카오카나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삼기인이 인외종족이라는 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진단메이커의 오늘(1월 13일) 리츠이즈의 문장을 빌려왔습니다. '난 너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











The Glass Menagerie

제가 폐렴에 걸렸을 때였죠.

결석하다가 다시 학교에 나갔더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플루로시스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는 내가 ‘블루로즈’라고 말한 걸로 잘못 알고

날 푸른 장미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 뒤부턴 줄곧 날 그렇게 불렀어요.

날 만날 때 마다 “안녕 푸른 장미?” 하고 소리치곤 했어요.

― 유리동물원 中 로라.





***



   “아무래도 옆집에 범죄자가 사는 것 같아.”


   사쿠마는 작게 하품했다. 저녁 즈음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가시지 않은 잠이 머물러 있는 탓이었다. 그는 눈가를 비비다가, 양 손 가득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옆집에서 벽을 타고 윙윙거리는 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히 물장구를 치는 소리가 옮아오는 건 여전히 수상했다. 보통 물고기는 저렇게 큰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지 않는다. 저런 소음이 날 리도 없다.

   오늘 옆집 남자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라왔다. 이사 올 때 한 번 인사했던 게 다였다. 반질반질한 웃음과 달리 뭔가 수상했다. 벽을 타고 들려오는 물장구치는 소리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사쿠마는 옆집의 범죄자가 하루 빨리 검거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밤은 저의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따라 자꾸 졸리기만 했다.

   그는 거실에 들어가며 안녕, 하고 짧게 인사했다. 세나는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교정에서 마주칠 때와는 사뭇 다르다. 익숙한 일이었다. 언제부터 익숙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사쿠마는 거실 소파에 기대듯 누웠다. 베란다에 쳐놓은 커튼 아래로 가로등 빛이 스며들어오는지,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세나의 하얀 손목에 난 상처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있지 셋쨩, 오늘 옆집 남자랑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어.”


   저번해 말해줬던 이상한 사람 말야. 혼자 산다고 말하면서 식기는 항상 세트로 두 개를 사 가는 게 수상했는데, 오늘은 커다란 농어 한 마리를 다 요리할 거라고 하는 거 있지? 먹성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데 신기한 일이야. 역시 뭔가를 납치해서 기르고 있는 게 아닐까? 사쿠마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에 반응하는지, 쇠로 만든 새장 속의 세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파란 눈이 보기 좋았다. 사쿠마는 푸스스 웃었다. 당장이라도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었다. 내보내 줘, 세나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사쿠마는 새벽에 운다는 카나리아를 떠올렸다. 목소리가 그렇게 좋진 않지만, 세나가 만들어 낸 음 만으로도 사랑스러웠다. 쿠마 군, 하고 재촉하는 그의 목소리는 홍차에 밀크를 넣을 때 처럼 잔잔하게 퍼졌다.


   “도망 갈 거니?”


   사쿠마의 질문에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기묘한 침묵은 무대의 암막처럼 내렸다. 커튼콜이 끝나고, 장치를 치우기 전까지 죽어있는 무대처럼 광막하기 그지없었다. 리츠는 커다란 새장을 바라보았다. 날개가 꺾인 새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엄마 취급이나, 도시락 취급이 싫다면서. 그래서 셋쨩에게 어울리는 장소를 마련 해 줬잖아? 사쿠마는 세나가 잊고 싶어 하는 일을 꺼냈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그는 해맑게 웃었다.

   1m도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서, 두 사람의 표정이 대조되는 것은 제법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의 은발과 자신의 흑발 사이의 간격 만큼 두근거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쿠마는 그의 은발에 자신의 어둠이 묻길 바랐다. 하지만 세나 이즈미라는 남자는 그 고고한 눈매만큼 자존심이 높아, 쉽게 물들여주지 않았다. 앞으로 몇 백 년을 함께 할지 모르는데, 이런 상황은 역시 달갑지 않았다.

   어린 뱀파이어는 자신의 영속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 백을 사는 동안 이렇게 다채로운 생물은 처음이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첫’을 언제나 움켜쥐고 싶어 한다. 인간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오리 장난감이나, 아기 곰이 그려진 낡은 이불을 버리고 싶지 않아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리츠는 새장 앞에 앉았다.

   세나의 두 발목에 걸려 있는 족쇄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랑해, 라고 속삭이자 세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나에게 좀 더 고분고분해질 수는 없니? 라고 리츠는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의 새장 속 연인은 쿠마 군에게? 내가? 라며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 놀라 대답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얼이 빠져 있는 느낌이라, 리츠는 제 손가락과 손가락을 엮으며 음, 하고 망설였다.


   “쿠마 군,”

   “응, 듣고 있어 세나.”

   “난 너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


   세나는 고장 난 천축처럼 느리게 말했다. 사쿠마는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지만 들을 때 마다 새로웠다. 내 집착이 사랑임을 이해해 주겠니? 라고 물을 때 마다 대답처럼 돌아오는 말은, 이제는 아무런 상처도 되지 않았다. 굳은 살 위에 상처가 나기는 쉽지 않은 법이었다. 아, 아름답다. 그는 새장 안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세나를 두 눈에 담았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가느다란 목은 위태로왔다.

   그는 숨을 쉬지 않는다. 물어버렸기 때문이다. 좀 더 참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쿠마 리츠의 이런 행동에, 그의 형인 레이는 매우 화를 냈지만 그것은 이미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이 일은 세나 이즈미가 사쿠마 리츠를 ‘쿠마 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예견되었던 이야기였다. 서투른 열벙은 유리 동물원을 만든다. 사쿠마는 예전에 봤던 연극을 떠올렸다.

   그의 사랑은 유리로 만들어진 미로 속을 헤맨다. 대답을 듣지 못한 외사랑의 파장의 결말이란 대개 그렇다. 로라의 짝사랑은 짐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그가 ‘플루시스트’라는 단어를 ‘블루 로즈’로 잘못 들은 다음, 그녀를 ‘블루 로즈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녀의 유리동물원이 파국으로 치닫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쿠마는 천천히 새장 안으로 다가갔다.

   날 동정해? 그가 물었다. 세나는 응, 하고 대답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은 꿈처럼 반짝였다. 샄마는 천천히 새장의 문을 열었다. 육중하게 잠겨 있던 자물쇠가 땅으로 떨어지고, 사슬이 풀려 떨어졌다. 쇠문이 열릴 때는 벽을 긁는 소리가 난다. 그는 천천히 세나에게 걸어갔다. 겁이라도 먹었는지 그는 벌벌 떨고 있었다. 사쿠마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 낫쨩을 만나고 왔어.”


   셋쨩, 널 걱정하고 있더라. 갑자기 사라져서 보이지 않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안 좋은 표정을 하더라고. 그 말을 듣고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어. 그래서 부득이하게 기억을 지울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앞으로는 네 이야기를 밖에 가서 하지 않으려고 해. 홍차를 마시면서 낫쨩이,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말하기에 새를 한 마리 기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깃털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그래서 카나리아인지, 문조인지 잘 모르겠는데 깃이 회색인 게 아름답다고 했어. 꽁지에 푸른빛이 들어있다고 말하니, 물까치가 아니냐면서 웃더라. 이상하지? 네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는데 어쩜 그렇게 쉽게 웃을 수가 있을까. 나름 즐거운 농담이었어. 아, 이건 기억을 지운 다음의 일이니까 해당 사항이 없나. 참 임금님이 널 발견하면 당장 연락을 전해달라고 하던데, 글쎄 찾을 수 있을까.

   사쿠마의 목소리는 사근사근했다. 그는 오늘 나루카미와 함께 소품집을 가서 예쁜 리본을 끊어 왔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는 제 눈처럼 붉은 리본을 세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지쳐 늘어져 있는 손목을 얌전히 잡아, 끈으로 한데 단단히 묶었다. 포기한 것처럼 늘어져 있는 새는 아름답다. 사쿠마는 그의 모습에 “도망치지 않을 거란 걸 믿을 수 있다면 윙 컷도 하지 않을 텐데,” 라고 말하던 나루카미를 회상했다.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웃어준다면 적어도 새장 문은 열어주고 싶을 텐데. 사쿠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세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영생을 살게 되어도 여전히 푸른 장미 잎처럼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사랑해, 라는 말을 하자 그는 울 것 처럼 바라보았다. 동정이 가득 한 눈빛, 이렇게 강압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쟁취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연민. 이 모든 것이 가득 차 있는 모습에 사쿠마는 짧게 떨었다.


   “안녕, 푸른 장미.”


   사쿠마는 연극처럼 말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세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자국을 깨물면 피가 나온다. 좋은 향에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는 혀로 피를 핥았다. 단 맛이 났다. 눈이 멀 것처럼 달았다. 그는 사랑이 이런 맛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다가,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자신을 스스로 비웃었다.

   억지로 움켜쥔 새란 이다지도 연약하다. 이런 엔딩을 바랐던 건 아니었다. 사랑 해 주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다. 졸려하는 짐승에게 무릎을 내어주고, 어리광을 받아줬으면 마음까지 주었어야지. 갑자기 주어진 영생에 수긍하고 별처럼 웃어주었다면 좋았을 걸. 사쿠마는 자신들에게 일어나지 않을 환상을 생각했다. 틱틱거리면서도 졸려하는 눈을 쓰다듬어 주던 그 행동에 진심이 깃들어 있을 줄 알았었는데. 사쿠마는 웃었다. 피부에 닿는 숨결에 세나가 움찔댔다.

   세나가 저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무대 위에서 실수를 해 버린 배우에 대해 갖는 안타까움과 같다. 동정은 될 수 있지만 그 모습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되돌릴 수 있었다면, 신은 먼저 하늘의 은하수를 거둬들였을 것이다. 사쿠마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천천히 매듭지어 묶은 손목 리본에 키스했다. 제 눈과 같은 색으로 묶인 세나 이즈미는 포기한 듯 아름다웠다. 새장의 문이 끼익, 거리는 소리를 냈다.


   옆집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조에 담긴 무언가가 물 밖으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역시 옆집에서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 같아, 사쿠마는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하는 짓도 별반 다르지 않아, 쿠마 군. 세나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호칭을 입에 담았다. 다 쉰 목소리였지만 아름다워서, 사쿠마 리츠는 그의 앞에 기사처럼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착각과 착각이 엮여 만들어 낸 상황이었지만 잘못 알아본 사랑은 아니었다. 그의 사랑은 유리로 만들어진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돌았다. 철창에 갇혀 출구 없이 맴도는 애정에 키스하는 것처럼, 사쿠마는 세나의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영원한 기사 서약이었다. 그는 이 아름다움을 내어 줄 생각 없이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세나는 눈을 감았다. 어둠, 아찔한 어둠이 미련처럼 번져왔다.

   집 안은 연극이 끝난 무대처럼 적막했다. 둘은 서로와 함께 등장하는 연극에서 홀로 모노드라마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일인극은 부조리극처럼 아귀가 맞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랑해, 사쿠마가 말했고 세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너 정말, 짜증나. 그 목소리가 마치 구원이라도 되는 양, 리츠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손등에 제 낙인을 찍었다. 잇자국은 붉게 남아 타오르듯 번졌다.

   비틀린 무대 위에서 자라는 마음 또한 사랑임에 틀림없었다. 닫히지 않은 새장에서는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어디로 번져야 할지 모르는 사랑은 경멸과 동정, 열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움직였다. 사쿠마는 세나와 눈을 마주쳤다. 푸른 장미 같은 눈동자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멘, 그는 짧게 중얼거리며 기도하듯 웃었다.





'히치하이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츠이즈] La campanella  (0) 2016.01.23
[레오이즈] inspiration  (0) 2016.01.19
[리츠이즈] 불안  (0) 2016.01.17
[레오이즈]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1) 2016.01.15
[레오이즈] moon river  (0) 2016.01.10

[레오이즈] moon river





Moon river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우리는 같은 무지개의 끝을 따라 가고 있지요.



***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주파수에 말을 거는 일은, 세나 이즈미에게는 호흡마냥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일방적인 사랑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진을 찍고, 말을 걸고, 싫어하는 얼굴을 잔뜩 즐기는 것은 반응이 돌아오기에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이 쌍방향적인 사랑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주파수가 언제나, 퍼지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별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래왔음으로.

   그렇기에 그것이 갑자기 ‘쌍방향적 교류’로 바뀌었을 때, 세나 이즈미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교신의 주인이, 여태까지 갈구해오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바다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세나 이즈미는 자신이 지금 아가미 호흡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과 섞여 부는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하얀색 입김은 겨울과 꽤나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편지를 바라보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꽤나 아날로그 적인 수법이었다. 그는 그것이 제 맨션의 붉은 우체통 안에 들어있던 경위를 반추했다. 나름대로 골치 아프다면 골치 아픈 일이었다. ‘세나 이즈미님께’로 시작하는 편지는 매우 정중한 어조로 적혀 있었다. 영화를 흉내 낸 것 같은 필체였다. 그는 츠키나가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이 편지를 대필시킨 것이 아닐까, 추측하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온 볼이, 간질거렸다. 그 밤이 번져오는 탓이었다.


   그 날은 『러브레터』를 본 날이었다. 세나는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랑에 응답을 받을 것이라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밤에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세나의 주파수에 자신의 주파수를 마주 댄 남자였고, 그냥 무시하기에는 골치 아픈 사람이었다. 그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또 돌리면서 고민했다. 의미 없는 화면들이 반복되며 머릿속에서 엉켰다. 그는 한숨을 내 쉬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방 안을 시끄럽게 덥던 ‘문 리버’의 음이 끊겼다.

   세나가 전화를 받자마자, 츠키나가는 지금 112번을 틀어 세나. 라고 말했다. 내가 왜? 라고 되묻자, 그는 어서, 하고 재촉 해 왔다. 그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다만 “112번이야” 라고 재차 강조 할 뿐이었다. 세나는 그의 목소리를 어기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투정을 받아주는 쪽이었다. 텔레비전의 체널을 꾸역꾸역 돌리자, 하얀 눈밭이 나왔다. 하얀 눈밭에서 열리는 장례식을 무던히 보며, 세나는 왼쪽 귀에 끼고 있던 전화기를 오른쪽 귀로 옮겼다.


   ―그래서 뭘 보여주고 싶은 건데 왕님은?

   ―세나, 대단하지 않아? 『러브 레터』를 해 준다고!


   그것도 텔레비전을 돌리다가 발견했어! 방금!, 츠키나가는 이것이 운명적인 일이라 믿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버킷리스트 중에, 연인과 함께 전화통화를 하면서 로맨스 영화를 보기가 있다면서 말하고 있었다. 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감성이 충족된다는 그 달달한 목소리를 세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당연히 끊었겠지만, 그 들뜬 목소리를 뒤로 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는 잔잔했다. 세나는 울지 않았고, 레오는 간간히 감동한 듯,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감동했니, 라고 물어볼 때 마다 레오는 자신이 감동한 이유 세 가지 정도를 다다다, 하고 내뱉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까지 그들의 핑퐁은 계속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츠키나가 레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왼쪽 볼이 화끈할 때 쯤, 그는 오른쪽으로 전화기를 옮겼다. 전화기를 옮기는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수화기 너머의 왕 님은 웃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 영화에서는, 마지막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세나는 하품했고, 레오는 웃었다. 그는 그 간격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색하고,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세나가 어색해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오는 있잖아, 편지를 저렇게 주고받아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난다는 건 대단하지 않아? 라고 물었다.


   ―그거야 대단하긴 하지. 하지만 그게 무슨 로맨틱인데.

   ―받을지, 안 받을지, 나올지 안 나올지, 그걸 알 수 없다는 점이? 생각 해 보라구 세나!

   ―왕님의 로맨틱 너무 어려워. 애초에 지금 이 시대에 그런 로맨틱을 추구한다는 점이 낡은 거라구.


   세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츠키나가는, 그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던 날을 물었다. 세나가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그는 일방향적 통신의 최고봉은 연애편지라면서 떠들기 시작했다. 밤을 울리는 목소리는 제법 듣기 좋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편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강의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들은 꼭 꿈같기도 하고, 우주 같기도 해서, 세나는 별빛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츠키나가 레오는 ‘편지’를 보통 사람들 보다 좀 더 특별히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편지는, 한 사람의 우주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면서 동시에 외면받기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적어내기 때문에 편리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우체통을 잘 확인하지 않으며, 편지에 적힌 우주가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읽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번거롭기 때문이라는 부연 설명에 세나는 혀를 내둘렀다.

   새벽을 같이 지새우고 있다는 의식이 있는 것인지, 츠키나가는 편지에 대해서 예찬했다.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노래 같아서, 세나는 그래그래, 응, 쓸모없어, 진짜 짜증나, 등의 추임새를 넣으며 들었다. 츠키나가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고, 세나는 그걸 얌전히 들어주었다. 둘 사이에 공백이 찾아올 때 쯤, 츠키나가는 어김없이, 다시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은 카세트 테이프를 다시 듣는 기분이었다. 세나는 그가 부끄러움을 탄다고 생각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츠키나가의 말을 들을 때 마다 졸음이 한 스푼 씩 몰려왔다. 우주에 설탕을 뿌리는 기분이었다. 세나는 눈을 감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대하고 대담했지만, 점점 지쳐가는 것 같았다. 우주 속을 아가미 호흡하며 헤엄치는 기분에, 세나는 힘없이 하품을 했다. 왕님, 지금 무슨 생각 해? 말과 말 사이의 (사이)속에서 세나가 묻자, 츠키나가는 ‘문 리버’를 계속 듣고 있는 기분이라고 대답했다.

   왕님도 지치는 구나, 하고 세나가 힘없이 말할 때 쯤, 츠키나가는 문득 물었다. 있지, 라는 말 뒤에 오는 쉼표는 명백하게, 망설임을 담고 있었다. 제멋대로이고 독선적인 남자의 입에서 나올만한 단어는 아니었다. 세나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영화가 끝난 텔레비전에서는 광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립클로즈 광고를 눈으로 쫓으며, 제 입술 껍질을 톡톡, 건드렸다. 괜히 긴장 되는 기분에 손가락 끝이 바짝바짝 말랐다.

   츠키나가 레오의 ‘있지’ 라는 말 뒤에는 한 동안 공백이 찾아왔다. 그러다가, 바다처럼 물밀듯


   ―있지,

   ―응


   이라는 영양가 없는 대화가 파도처럼 이어지길 반복했다. 그들의 라디오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나는 이 아날로그적인 대화가 어색했다. 그는 괜히 제 볼을 긁었다. 어서 말 해, 라는 재촉도 할 수 없었다. 고백을 듣던 날 밤처럼 설레, 세나는 시간을 얼려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수조 안에서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멍청한 열대어가 된 기분이었다. 3초 동안 호흡만을 생각하고, 다시 잊어버리고, 3초 동안 호흡을 생각하는 금붕어처럼 세나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온 세상이 츠키나가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서로의 주파수를 마주잡는다는 것은 온 우주가 그로 물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호흡에 호흡을 거듭하는 순간, 두근거림이 묻어왔다. 매우 서정적인 흐름이었다. 세나는 괜히 손을 뻗어, 제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세계의 축이 점점 바뀌어 가는 기분이었다. 노을 같은 기분. 그는 눈을 감았다. 츠키나가 레오의 목소리가 꿈처럼 가깝게 들려왔다. 세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세나. 편지 써도 돼?


    고민 끝에, 그는 그렇게 물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세나는 그러던가, 라고 대답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머리색 같은 노을이 볼 위에 내리 앉은 게 분명했다. 그는 괜히 앉은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나는 괜히 8자를 그리며 걸었다. 츠키나가는 혼자 받는 게 싫으면 우리 교환하자, 라고 말했다. 서툰 목소리였다. 왕님이 풋풋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 라고 말하자 레오는 아하하, 나도, 하고 말했다. 우리, 라는 호칭이 새삼스럽게 가까웠다.

   세나는 별자리가 바뀌는 하늘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님이랑 이런 느낌이 될 줄은 몰랐어, 라고 말하니 츠키나가는 나도 마찬가지라고, 하고 대답했다. 그는 우주가 너무 휙휙 바뀌는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광속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느낌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세나는 그의 말을 기다리느라,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이걸 노래로 쓰고 싶어’라는 말이 올 타이밍에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세나는 어때? 라는 말이 물처럼 번져왔다. 그는 그 말에 새삼, 세나 이즈미와 츠키나가 레오가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결합함을 느꼈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던 주파수가, 서로에게 전달되는 건 이런 기분일까. 세나는 8자를 그리며 불안하게 걷고 있던 것을 멈추었다. 대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푹 누웠다. 뭐 해? 라는 말에 그는 침대에 다이빙 했다고 대답하다가, 문득 노을을 히치하이킹 하는 기분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와, 멋있는 말이야. 라는 말로 시작되는 찬사를 듣기는 싫어, 이즈미는 전화를 끊었다. 회전축은 점점 기울고 있었다. 홀로 내보내는 사랑에 익숙해진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울 것 같은 기분이고, 치받치는 기분이었다. ‘팀원’이나‘ 동료’에서 한 칸, 옆으로 움직였을 뿐인데도 세상이 진동했다. 둘의 주파수는 명백하게 이어져 있었다. 이상한 느낌에 볼이 간지러웠다.






***


   편지가 온 것은,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세나는 가만히 편지를 매만졌다. 편지봉투에는 우체국 소인이 없었다. 주소를 알고 있으면서도 우체통을 거치지 않은 것은, 직접 전해주고 싶었다는 뜻일까. 세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봉투의 안쪽에는 몇 월 며칠, 몇 시에 나와 주세요, 라는 요구가 적혀 있었고, 그 안쪽에는 편지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볼펜으로 또박또박 눌러 썼는지, 편지지 뒷면이 울퉁불퉁했다.

   한 장은 익숙한 가사였다. 세나는 괜히 문 리버를 흥얼거렸다. 그가 적어준 부분 외에는 가물가물 해, 허밍이 입김과 함께 흘러나와 노을을 덮었다. 그는 해가 지는 모습을 보다가, 뒷장을 넘겼다. 갈겨 쓴 것 같은 음표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셋잇단음표와 스타카토가 가득한 그 빠른 음률은, 『심장박동』이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았다. 세나는 ‘심장박동’이라는 글자 위의 취소선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 쉬었다.

   취소선의 옆에는 『일주일 전, 밤, 112번 채널』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또박 또박,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적은 것 같았다. 곡의 제목을 고민하다가 우체국에 가지 못한 걸까. 그는 여러 생각을 하다가 기지개를 폈다. 노을이 점점 하늘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하얀 눈이 쌓인 계절을 덮어가는 빛무리를 보면서, 세나는 이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손가락 끝이 딱딱했다.

   편지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츠키나가의 얼굴을 본다면 편지에 대한 답장은 근시일내로 주겠다는 말을 하리라 결심했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서정적인 왈츠를 듣는 기분에, 그는 잔뜩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친구’나 ‘동료’가 아닌, ‘연인’의 얼굴을 한 츠키나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세나!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세나는 자신이라는 이름의 우주, 그 세상의 주파수가 그에게로 수신되고 있음을 느꼈다.

   ‘러브레터’에 덕지덕지 묻어있을 츠키나가의 지문이 닿은 자리마다, 심장소리가 피었다. 그는 츠키나가 레오라는 이름의 우주에서 아가미호흡을 하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쌍방향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는 왕님, 이라고 부르는 대신 레오, 라고 첫 운을 땠다. 놀란 것 같은 얼굴이 보기 좋아, 세나는 괜히 쌜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담았을 아날로그적인 두근거림이, 서정시처럼 다가왔다. 츠키나가는 세나의 볼이 붉어졌음을 지적했다.

   노을이 묻은 모양이었다. 

'히치하이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츠이즈] La campanella  (0) 2016.01.23
[레오이즈] inspiration  (0) 2016.01.19
[리츠이즈] 불안  (0) 2016.01.17
[레오이즈] Tempo di Bolero, moderato assai, ♩= 66  (1) 2016.01.15
[리츠이즈] The Glass Menagerie  (0) 2016.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