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이즈] 애매한 봄

*둘 다 뇨타 주의해주세요^q^)!

*무님 제가 많이 사랑해요.. 무님이랑 연성교환하기루했습니다 발레리나 세나랑 곡주는 왕님....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 김경주, 「몽상가」


***

 

오네긴에게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타티아나를 본 적이 있다. 실로 감각적인 첫 만남이었다.

튀튀는 길게 흘러 내려온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로맨틱 튀튀. 긴 잠옷 같이 생긴 베이지색 의상은 발을 움직일 때 마다 얌전히, 그리고 고상하게 움직인다. 사랑의 편지를 쓰는 타티아나, 타티아나의 사랑을 거절하는 오네긴. 장면 장면을 다루는 손끝과 발끝은 섬세하다. 살얼음이 낀 얼음호수 위를 사뿐히 걷는 느낌이다. 발톱을 감추고 우아하게 걷는 고양이 같다. 표정이 없으면 반드시 차가워 보일 그 얼굴은 예민함을 연기로 가리고 있다. 그녀의 표정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꿈결 같다.

타티아나의 긴 머리카락은 아래로 묶어 제법 가볍게 흔들린다. 조명 아래에 드는 은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일본의 타티아나들은 모두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는데 제법 특이한 조형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은색에서 눈을 땔 수가 없다. 봉긋한 가슴 아래로 흘러내리는 튀튀는 몸을 부해보이게 만들지만, 그녀의 발끝을 쫓다보면 몸매가 제법 좋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기민하게 움직이면서도 우아함을 잊지 않는다. 발레리나로서 성취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그녀는 호흡하듯 유지하고 있다.

극의 텐션은 오직 그녀를 위해 움직인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것은 그녀뿐이다. 학생 공연이란 으레 빛나는 하나에게 잠식당하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동정심이 드는 것은 그녀의 상대역이 꽤나 기량이 나쁘기 때문이다. 리프팅을 할 때 그녀의 얇고 가느다란 곡선을 보여주지 못한다. 동작처리를 할 때의 호흡부터가 어색하기 때문에 그녀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 정도로 실력이 차이나는 공연이라면 졸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합당했다.

수준이 떨어지는 공연은 보지 않는다. 새로운 자극이 없는 조잡한 공연을 보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다. 모든 무대 공연이란 사람의 시간을 강제로 소모시킨다. 볼 거라면 좋은 공연만 보고 싶다. 허투루 낭비하는 모든 순간이 츠키나가에게는 새로운 음악을 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무대 매너 때문이 아니었다. 조잡한 남자 무용수가 그녀의 얇은 허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공중동작을 하는 동안 팔과 다리는 땅에 있을 때처럼 움직이지 않고 우아했다.

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츠키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니라면 이 공연을 볼 이유는 없었다. 실로 운명적이라고 생각했다. 공연의 모든 요소들이 타티아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기사가 닦아놓은 피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왕이라면, 이 무대의 왕은 그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굴었다. 절로 다음 순간이 기대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타티아나가 저를 사랑하는 오네긴을 어떻게 대할지 궁금했다.

 

오로지 모든 것이 타티아나만을 빛나게 한다. 이 세상에서 대체할 수 없는 무용수는 없다. 모두가 모두의 스페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잔인한 세계에서 그녀는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발끝을 세우고 아름답게 움직인다. 모든 동작에는 이유가 있다. 감정이 실리지 않는 곳이란 없다. 곱슬진 머리카락을 묶은 리본은 짙은 검정이다. 그녀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츠키나가는 그녀를 시선으로 깊게 훑었다.

오네긴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작은 꾀꼬리처럼 그녀는 움직인다. 사랑받고 싶어 숨을 참는다. 그 순간의 그녀는 반짝임을 머금고 있었다. 발끝을 한껏 세우고 숨을 고른다. 사랑의 밀어가 담긴 종이는 갈기갈기 찢어진다. 손에 가만히 쥐어진 종이를 바라보는 그녀와 오네긴의 행동은 잘 짜인 안무지만 어쩐지 삐걱여보인다. 그녀가 동작을 하며 손을 올릴 때 마다 봉긋한 가슴 아래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튀튀의 선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그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인스피레이션, 이라고 중얼거리지만 손을 움직일 수는 없다. 초조하게 극이 끝나길 기다린다. 발레 음악 위로 흐르기 시작한 제 선율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의식적으로 호흡한다. 내쉬는 한숨에, 저에게서 빠져나가버리는 음악이 있을까 불안해한다. 이럴 거면 박스 석으로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해도 이미 나갈 수 없었다. 한 순간이라도 그녀에게서 눈을 땔 수 없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세월이라는 물감을 깊게 덧발라 깊은 색을 내고 있었고, 그녀의 우아함은 드가가 그린 무희와 같았다.

타티아나의 흰 드레스보다는 푸른 옷을 입은 발레리나들의 튀튀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눈 색과 분명 어울릴 것이다. 츠키나가는 제가 붙잡는 선율을 오네긴의 음악 위에 덮어씌운다. 자신의 노래 위에서 음률을 밟는 그녀를 떠올린다. 가슴과 허리의 곡선을 살리기 위해서는 저런 튀튀보다는 짧은 튀튀가 나을지도 모른다. 츠키나가는 턱을 괴었다. 오네긴 따위는 버리고 차라리 나랑 춤을 췄음 좋을 텐데, 라고 속삭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학생공연의 오네긴은 망한 공연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질 나쁜 오디오로 틀고 있을 음향은 조잡하다. 조명 또한 마찬가지다. 충분히 합을 맞추지 않은 것 같다. 팜플렛에서는 한껏 멋있는 척을 다 해놨으면서 그걸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건 감점요소다. 애써 보러 온 보람이 없다. 남자주인공은 설득력이 없다.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야 타티아나가 반한다. 반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공연에서 첫눈에 빠지는 사랑을 재현하지 못하는 움직임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츠키나가는 혀를 찼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설득력이다. 그는 팜플렛을 바라보았다. 팜플렛 위에 스티커로 붙여진 은발 미인의 사진. 줄을 맞추어 붙이지 않은 견출지 위에 빼뚤빼뚤하게 써져 있는 이름. 급하게 구한 대타는 극에 녹아들지 못하고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세나 이즈미, 라는 이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공연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오네긴의 남자 주인공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츠키나가는 다리를 꼬았다. 무대 위의 세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고상하다. 그녀가 발산하는 투명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달빛 같다. 슬픔을 동작하는 그녀는 모든 음률 위를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지금 이 객석이 만석인 것 또한 그녀의 영향일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츠키나가는 세나가 발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걷는 것처럼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수수한 조명은 마치 자연스럽게 내린 밤의 달마냥 그녀에게 다가갔다. 홀릴 것만 같았다.

 

이런 타티아나에게 첫 눈에 안 반하다니, 설득력이 없잖아.”

 

츠키나가는 무심코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이미 망한 공연에 망한 관객매너를 더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무한한 아름다움을 눈에 두고 반하지 않는 남자는 없다. 외계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다. 남자 주인공이 고자인 드라마에 이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혼한 타티아나에게 반하는 오네긴이 나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반하는 타이밍이 너무 늦다고 츳코미를 걸게 된다. 저런 아름다움 옆에 저런 찌질한 남자가 있는 건 어불성설이다. 츠키나가의 말에 주변의 관객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타티아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새로운 표정이었다.

꾀꼬리같은 타티아나가 저렇게 행동할 리 없으니 저것은 세나이즈미다. 사실 성격 나쁜 타입?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망한 공연의 멱살을 잡고 홀로 움직이는 프리마돈나의 프라이드에 감탄하게 된다. 츠키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가 먹먹했다. 무언가 가득 찬 것 같이 꽉 막혔다. 심장소리가 들렸다. 제 것이었다. 츠키나가는 무대를 응시했다. 세나 이즈미의 표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대 위에서는 사랑스러운 타티아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또 다시, 음악이 나왔다. 츠키나가는 제게 흐르기 시작한 멜로디를 생각하며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었다. 발을 까딱였다. 타티아나를 눈에 담지 않으면 금새 지루해진다. 큰일이었다. 극보다 타티아나의 허리선에 관심이 가는 이상 글러먹은 일이었다. 오네긴의 음악으로는 그녀의 움직임을 살릴 수 없다. 그녀가 공중으로 뛰어오를 때 마다 튀튀 자락이 물에 풀리듯 멈추었다가, 다시 흘러내리길 반복했다. 볼륨 있는 가슴의 아래에서 출렁이는 옷자락이 섹시했다.

주변이 어둡지 않았더라면 휘파람을 불었을 것이다. 차라리 독무였으면 좋았을 듯 했다. 츠키나가는 몇 번이고 제 안에서 변주되고 있는 음악을 떠올렸다. 피아노를 기반으로 하는 것 보다는 바이올린이 좋다. 예민한 섹시함을 살리기에는 건반악기보다는 현악이 좋다. 차라리 오네긴보다는 백조의 호수가 나을지도 모른다. 왕자를 찾는 무도회에서의 러시아공주의 춤곡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백조 파드되도 나쁘지 않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젤의 전 막은 어떨까. 

그녀가 만드는 모든 순간이 보고 싶었다. 이레적인 일이었다. 실로 운명적인 일이기도 했다. 츠키나가는 팜플렛을 꼭 쥐었다.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이러다가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왼손목의 맥을 연신 짚었다. 그녀는 유연하게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경박하지 않다. 옷자락마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우연히 들어온 학생공연에서 '세나 이즈미' 같은 사람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갑자기 공연자가 바뀐 듯한 이 졸작에서!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이 완벽한 타이밍이 나올 확률을 속으로 계산한다. 정확한 수치가 없기 때문에 엉터리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근사값일만한 것을 잡아챈다. 필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숫자를 잡아채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면 꼭 사랑해야만 하는 타이밍 같다. 또 다른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오네긴의 지루한 춤이 이어지고 있음으로 이는 오롯이 츠키나가의 리듬, 츠키나가의 선율이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파리하게 흔들리는 제 타티아나를 바라본다.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았다. 이즈미, 라는 이름을 음악처럼 몰래 속삭였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것이 츠키나가 레오가 세나 이즈미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실로 감각적인 일이었다.

 

 

 

***

 

공연 중간,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냅다 달렸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인터미션의 그 짧은 순간 안에 지금 느꼈던 모든 인스피레이션을 담기에는 부족했다. 오선을 펼쳤다. 급하게 그었다. 언제나 모차르트처럼 정돈되어있던 그녀의 악보집에는 성급한 베토벤의 필체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머리카락을 올린 순간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를 담아야 했다. 악보 속에 선율을 담는 것은 츠키나가 나름의 기억법이었다.

흘러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거슬려 높게 묶었다. 세안밴드로 옆머리를 모두 올리고 펜을 돌렸다. 부러질 수 있는 연필보다는 차라리 지울 수 없는 볼펜이 좋았다. 샘에 고인 물을 퍼내듯이 끊임없이 그녀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재가공했다. 봉긋하게 부푼 가슴과 얇은 허리.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 가느다란 골반과 아슬아슬한 허벅지. 그것을 덮고 있는 남의 것 같은 튀튀. 발에 잘 맞는 분홍 토슈즈와 가지런하게 묶은 회색 머리카락. 한없이 꺾일 때 마다 아름답게 몸을 지탱하는 아치형 발등.

세나 이즈미는 츠키나가의 악보 위에서 춤을 추었다. 로맨틱 튀튀보다는 클래식 튀튀가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클레식 튀튀 특유의 선을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펜이 츠키나가의 손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카락을 긁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의 가슴에 대해 떠올린다. 극단적으로 마른 몸의 발레리나 사이에서, 그녀는 이질적이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체형은 선택받는 것이며, 발레는 신체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거면 다 된거 아냐? 하고 중얼거리다가 졸작 같았던 오네긴을 떠올렸다. 츠키나가는 투덜거리면서 악보를 정리했다. 휘갈겨 쓴 공책을 응시하다가 붉은색 펜을 꺼내 들었다. 드물게도 수정할 부분이 많았다. 원터치로 정리되지 않는 욕망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발레 음악 특유의 유연함과 아슬아슬함을 더하다가 펜을 던졌다.

초면인 사람에게 고백을 받는 건 유쾌하지 않다. 그렇게 예쁜 애라면 더 그럴 것이다. 제가 쓰고 있는 것은 꼭 나흐트무지크이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츠키나가는 침대에 다이빙했다. 발을 동동 굴렀다.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자꾸 부정맥이 온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그녀는 제 왼손에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댔다. 손가락 지문 아래에서는 자꾸만 맥이 뛴다. 덜커덕, 덜커덕 하는 심장 소리로도 벌써 몇 번의 곡을 퍼냈다. 눈을 감았다. 천장을 보고 디립다 누웠다. 빈 공간엔 다시 소리가 들린다.

제가 그려내는 세나 이즈미의 다른 모습이다. 그녀는 검은 튀튀를 입고 있다. 그녀에게는 차이코프스키가 어울린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두근거리는 것은 제가 만들어 낸 선율 위에서 움직이는 세나 이즈미다. 츠키나가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대 매트릭스가 끼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간 얼굴을 보자마자 키스할 것 같아! 소리치면서 방을 뱀뱀 맴돈다. 음악은 자꾸만 포르티시모로 격렬해지는데, 심장은 또 터질 것 같았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세나아, 하고 친하지도 않은 그녀를 부른다. 자꾸만 공중에서 정지한 것 같았던 그녀의 비상이 떠오르고, 옷자락과 함께 움직이던 곧게 뻗은 다리와 아치형으로 예쁘게 솟은 발등 산이 떠올랐다. 손목은 가느다랬고 뺨에는 복숭아빛 물이 곱게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잘 다듬어진 예술품과 같아,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았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화살로 심장을 꿰뚫리는 것과 같다는, 누군가 한 지 모를 말을 떠올리며 츠키나가는 책상 앞에 앉았다.

라 캄파넬라의 547초 부근처럼 심장이 자꾸 뛰었다. 죽음의 무도의 도입부 같았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녀를 다른 곳에서 만났을 때, 눈이 마주치자마자 키스할 게 분명했다. 괜히 틴트물 하나 발리지 않는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다가, 붉은 펜으로 교정한 흔적이 가득한 악보에 찍었다. 키스! 세나랑 키스하고 싶어, 라는 욕망을 여과 없이 말하다가도 음악으로 정제해 얌전히 담는다. 2차원에 담긴 마음의 주행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처럼 섬세하지 않다.

보는 순간 사랑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하다. 그 예민함에 어울리는 곡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타티아나를 볼 때, 그녀는 이것 또한 부드럽게 살릴 것이다. 욕심이 나는 무용수였다. 발레음악은 전혀 취향이 아니며 오히려 제 취향인건 피아노와 일렉이다. 전자음과 발레는 수억만광년이 떨어진 은하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 애는 제 곡에 춤을 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한한 과정이 망상으로 뻗어나는 과정은 꼭 짝사랑과 순서가 비슷했다.

세나의 앙다문 입을 떠올린다. 막이 내리기 전 봤던 그 단단한 입술은 불만이 가득했다. ‘사랑하는 소녀가 아닌 그녀의 표정은 러시아의 음악처럼 냉랭하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식으로 일방적으로’ ‘고백하는듯한’ ‘세레나데와 비슷한발레곡을 써주는 건 너무 이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런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가는 처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걱정과 욕망은 언제나 동전의 앞뒷면과 같았고, 츠키나가는 그녀와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한 보 두 보를 넘어 열 보를 건너간다. 속절없이 질주하는 생각의 목줄을 잡고 싶으면서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할 때를 떠올렸다. 한껏 올려 꺾인 발목, 엷은 핑크색 토슈즈, 손끝마저 떨림으로 유지하며 짓던 그 두근거리는 감정. 다시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츠키나가는 오른쪽 검지와 중지를 펴서 제 왼쪽 손목에 가져다 댔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내쉰다. 의식적으로 진정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또 다시 성욕 같은 음악이 찾아왔다. 짙은 욕망을 애써 정제하려다가 츠키나가는 펜을 바닥에 던졌다. 딥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방금, 단 한 번 본 타티아나에게 이렇게 욕망하는 것은 그 때의 오네긴이 너무나도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그 자식을 지워버리고 거기에 자신을, 자신의 음악을 덧발라 독무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퍼졌다. 이런 미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졸작을 공연한 세나가 나빠!”

 

그리고 낼 수 있는 결론은 언제나 졸작을 공연했던 세나 이즈미에게로 귀결된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그 때, 운명에 대한 경우의 수를 계산하던 것처럼 매우 일방적인 흐름이었다. 츠키나가는 다시 제 침대로 다이빙했다. 어째서 막이 끝났을 때 그렇게 찝찝한 얼굴을 지었는지 떠올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평소의 얼굴도 보고 싶었다. 꼭 짝사랑을 하는 기분이었다. 두근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자꾸만 다른 비트를 짜 줬기에, 츠키나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펜을 들었다.

타티아나의 낮게 묶은 머리카락은 단정했지만, 츠키나가 안의 세나 이즈미스럽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좀 더 반짝이고 화려한 게 어울렸다. 하얗기만 한 백조보다는 온갖 반짝이는 것으로 제 몸을 치장한 까마귀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턴을 할 때의 밸런스가 좋았으니 검은 백조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먼 곳을 응시하면서도 부드럽게 속삭이고,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아 오네긴에게 안기던 그녀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졸작과 함께 그녀를 떠올린다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속죄하듯 다시 그녀를 떠올리고, 츠키나가는 펜을 오선 위로 미끄러뜨렸다.

 

 

 

***

 

그 날을 회상하자면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세나 이즈미는 완벽주의자다. 그녀가 밟은 무대는 언제나 완벽해야 했다. 스태프부터 시작해서 모든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연기는 흠 잡을 데가 없어야 한다. 무용계는 언제나 대체할 사람이 있다. 프리마돈나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실수를 바라는 무리들을 가볍게 눌러줄 수 있는 실력이며, 둘째는 체형이고 셋째는 담력이다. 세나는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다리에 난 상처를 가리기 위해 신은 검은색 스타킹 위에 교복 치맛자락이 스치는 것이 묘하게 어색했다.

오네긴은 최악이었다. 프리마돈나가 다쳐서 급하게 대타를 뛸 수밖에 없었다. 학생공연인 주제에 외부인을 받았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실력이 없다면 관객을 제한하던가, 감당할 수 없는 홀은 처음부터 빌리는 게 아니었다. 교내의 발레부는 허구적인 상상력이 강하다. 긍정적으로만 뻗어나가는 환상에 취해있다가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 세나는 가볍게 움직였다. 무대 리허설 때 타티아나가 다쳤던 건 실력 없는 발레리노 때문이다.

오네긴. 그래, 최악이었다. 어디서부터 반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제 연기를 관철했다. 관객석에서 보기에 삐걱거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제가 공연의 퀄리티를 끌어올려준 것과 다르게 그 자식은 찌질했다. 세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네가 날 무시했잖아! 라면서 무대 뒤에서 소리치던 건 잊을 수 없다. 너무 강하게 쥐어 허리 근육이 아팠다. 공중에서 가슴을 부드럽게 펴고 팔을 뻗을 때 마다 무거워, 라고 힘겨워하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했다. 그럼 발레 그만두던가? 라고 대답 할 수밖에 없었다. 체형이 안 예뻐서 솔로 무대밖에 못하고 프리마돈나는 될 수 없는 주제에, 라고 말하기에 노려봤더니 당당하게 내려다보는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친구에게 어디서부터 설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만뒀다. 고상하게 앞에서 욕을 했더니 물건을 던졌다. 최저, 최악이었다. 완전- 짜증나, 라는 말을 대놓고 했다가는 다음 리프팅 때 죽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 라는 말은 실력이 있는 친구가 배신당했을 때 하는 대사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라는 자아만 강조하는 건 옳지 못하다. 적어도 프로를 지망할 거라면 그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 세나는 복도를 지나 교실로 들어갔다. 높게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어폰을 끼고 턱을 괴었다. 바른 자세로 앉아야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리프팅을 할 때 마다 내던져져서 온 몸이 쑤셨다.

공연이 끝난 직후 아끼는 후배에게서 문자가 왔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의 타티아나 연기가 좋았습니다.’ 라는 문장은 간결했다. 이렇게 정제된 메시지가 온다는 건 문제가 있다. 볼거리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에 명확하게 기억에 남는 것만 서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공연에 출연했던 것 자체가 문제였다. 세나는 투덜거리면서 턱을 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노래가 귀에 가득 담겼다. 심지어 그 공연에는 인터미션 사이에 튄 건방진 애새끼도 있었다.

 

이런 타티아나에게 첫 눈에 안 반하다니, 설득력이 없잖아. 라는 옳은 말을 했지만 내뱉는 방식이 문제였다. 순간 표정이 무너졌다. 실력 없는 파트너의 얼굴이 더 구겨졌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저를 무대에서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기 시작했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한 마디 해줄까 했는데 건방지게 도망갔다. 주황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조명이 닿는 자리에 있어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집중하면서 보고 있기에 기특하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식으로 보답해?

세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제 움직임을 모두 먹어버리겠다는 듯, 똑바로 응시하던 이름 모를 그녀의 눈빛은 한 마리의 맹수 같았다. 그 곳을 스칠 때 마다 소름이 돋았다. 파트너와 음악에 집중하는 게 아닌, 그녀에게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행성의 중력에 소행성이 끌려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이상 그래서는 안 됐다. 세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었다. 결 좋은 곱슬이 굽이치며 흘러내렸다. 머리끈을 손목에 차고, 머리카락을 최대한 높게 올린다.

묘하게 인상에 남는 사람이었다. 막이 끝날 때는 기다려, 세나! 하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제 완벽한 공연을 망친 건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절 갈구해주는 것 같아 대기실에서 기다렸지만 들어오지 않았다. 빈자리를 보면서 몸을 움직이는 건 개운하지 않았다. 묘하게 가슴속에 찝찝했다. 세나는 손목에 걸어 둔 머리끈에 머리카락을 통과시켰다.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었네, 좀 이상한 사람이기도 하고. 라면서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찝찝했다.

조명은 오로지 무대를 위해 존재한다. 무대를 위해 쏘는 빛, 그 귀퉁이를 나누어 받았을 뿐이다. 무대는 그 곳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에 집중하라는 가이드라인이다. 무대 공연을 할 때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무시한 채 반짝인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세나는 제 공연을 망친, 노을색 머리카락의 그녀가 무대 위의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생각이 많아 자꾸 한숨을 쉬게 된다. 세나는 제 볼을 손끝으로 롤링하다가 곧 그만 두었다.

오네긴 역의 발레리노는 그렇게 말했다. 단역으로 춤추는 네가, 타티아나를 모두 외우고 있는 건 쓸데 없는 욕심 아니야? 라고. 내가 발레를 하던 말던 그건 네 상관이 아니지,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자꾸 맘이 꿍하게 뭉쳐졌다. 세나는 팔을 모아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봄 햇살이 간질간질거렸다. 분해서 잠은 안 왔지만 짜증내는 표정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는 싫었다. 돈 덕분에 배역 따낸 니가 할 말인가? 라고 쏘아붙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뭇내 아쉬웠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내가 예뻐? 라고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체형이 그래도 매력적이야? 발레에 문외한인 네가 봐도 아름다워? 하고. 하지만 접점이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묻는 건 명백하게 실례이며 추한 일이다. 세나는 맥락 없는 대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좋았다. 설렘이며 끌림 같은 불확실한 것보다 차라리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에 익숙해지는 편이 나았다. 그 애의 대답에 따라 인생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보던 그 맹목적인 시선 때문이다. 나눠받은 조명 때문에 이목구비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엉망으로 입고 있던 후드집업은 발레 공연에 어울리지 않는다. 노을 같은 머리카락과 녹색 보석 같은 눈 색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의 칭찬에 일희일비할 시간은 지났다. 고등학교 3학년 발레리나는 모두 진지한 녀석들 뿐이다. 필요한 것은 프로의 평가와 날카롭게 벼려진 검 같은 실력뿐이었다.

세나는 가방에서 핸드크림을 꺼냈다. 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핸드크림을 예쁜 손끝에 발랐다. 조만간 네일 샵에 가서 손톱을 다듬어야 할 것 같았다. 체형이 나쁜 발레리나는 다른 강점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피곤한 삶이었다. 세나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움직이며 손등을 쓰다듬었다. 봄 같은 향이 났다. 구입했던 것 중에서 그나마 나았다. 그녀는 손바닥을 손바닥끼리 움직였다. 또 다시 그 애가 생각났다.

그 애에게 매달리는 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를 갈구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정도면, 그 애의 세계에서 저는 프리마돈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작은 목표에 만족하는 건 세나 이즈미 답지 않다. 세나는 발끝을 쭉 폈다. 눈을 감았다. 수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차라리 빠져나가 몸을 움직이는 게 좋을까 생각하며 발목을 까딱인다.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부정적인 감정은 고양이의 헤어볼처럼 애매하게 뭉쳐진다. 세나가 가장 싫어하는 감각이었다.

 

세나! 츠키나가가 찾아!”

그런 애 몰라.”

 

옆자리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츠키나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함부로 팬을 만나주지 않는 건 프리마돈나가 될 여자의 자존심이다. 세나는 다리를 쭉 폈다. 턱을 괴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츠키나가가 불러! 라고 다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마돈나가 될 수 없는 체형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꿈꾸는 건 오만일까 아니면 실력에 대한 과한 자신감일까. 세나는 저를 천천히 정의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상한 말을 내뱉을 것 같다. 한 번 봤는데도 계속 생각나는 건 괜히 짝사랑 같다. 한 번 본 애를 사랑한다는 멍청한 짓을 하기 위해선 몇 만의 확률이 필요할까. 세나는 미처 수량이 짐작되지 않는 무한을 셈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묘하게 기다려 세나!’ 라고 외치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웅장한 호수의 음악이 들렸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었다. 호수 위에서 움직이는 백조를 상상하며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 츠키나가가 불러-”

 

이어폰 안의 발레 음악을 뚫고 들어오는 츠키나가가 불러- 라는 목소리는 연쇄 동작처럼 부드럽게 이어졌다. 유우 군 아니면 안 나가, 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핸드폰의 볼륨을 올렸다. 유우 군이 누군데? 라는 낯선 목소리가 제게 다가왔다. 제 얼굴에 그늘이 졌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시선에 세나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움직일 때 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제 얼굴에 그늘이 졌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주목을 받는 건 익숙하다. 반으로 다짜고짜 찾아오는 멍청이들도 있다. 츠키나가도 그런 애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세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예의도 모르는 한심한 사람에게 쏘아붙여줄 말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냉랭한 표정을 빚어냈다. 무대 위에서와 달리 생글생글 웃어주는 헤픈 사람이 아니었다. 무릇, 프리마돈나는 언제나 관객에게 행복과 마법을 선사해야 하지만, 무대 아래의 세나 이즈미에게 그것은 의무가 아니었다.

 

세나!

 

세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애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무너져버린 표정을 다시 빚어 낼 수 없었다. 이런 순간에 무어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녀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햇볕이라는 조명 아래에서 츠키나가는 마치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쾌활하게 웃었다. 많이 기다렸지 세나! 라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어떠한 거리감도 없었다. 마치 저를 예전부터 잘 알던 사람처럼 그녀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돌아왔다.

그녀의 생각을 했다. 우주가 그녀로 물들었다. 그 순간에 그녀가 찾아왔다. 이상하게도 잘 맞는 타이밍이었다. 꼭 사랑에 빠지기 위해 존재하는 순간 같았다. 무어라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뻐끔거렸다. 내 이름은 츠키나가 레오야, 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그녀는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너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우주인과 교신을 할 수 있다면 바로 찾았을 텐데, 내 곡이 완성된 다음에 네가 없어서 얼마나 슬펐는데. 타티아나는 급조된 역이었다면서, 누구에게 물어도 너를 알려주지 않아 고생했어.

츠키나가의 목소리는 강처럼 흘렀다.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차이코프스키보다 세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홀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조잘거리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우주적인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라고 묻는 목소리에 무어라 반응을 하지 못했다. 세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여학생이 자리를 비껴주었고, 츠키나가는 그 자리가 마치 제 자리라는 것 마냥 당당하게 앉았다. 그녀는 다리를 까딱였다. 개선행진곡을 울리면서 입장하는 왕처럼 굴었다.

우리들 어쩌면 운명 아닐까. 나는 세나를 보면서 곡을 썼어. 내 인스피레이션이 이렇게 흘러넘치는 건 세나 때문이야. 퍼내도 퍼내도 세나를 위한 솔로가 멈추지 않았어. 너랑 춤을 추는 꿈을 꿨어. 나는 평소에 꿈꾸는 사람이라서 꿈을 잘 안 꾸는데! 그녀는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귀가 먹먹했다. 세나는 손을 들었다. 검지로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막았다. 비취색 눈동자가 깜빡였다. 세나? 라고 물을 때 그녀가 내뱉은 숨이 제 검지에 닿았다. 간질거렸다. 세나는 입을 열었다.

 

나 예뻐?”

 

이 순간 그녀에게 질문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그녀는 아까까지 조잘거리던 것과 다르게 부드럽게 웃었다. 세나는 츠키나가가 내뱉을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마치 운명적인 타이밍이었다. 사랑에 빠지기 위해 존재하는 순간. 마치 츠키나가의 입술을 느리게 재생한 스톱모션 비디오처럼 움직였다. 입술을 움직일 때 마다 립크림의 끈적한 감촉과 함께 츠키나가의 숨이 세나의 검지에 닿았다. 이 순간 필요한 대답은 하나였고, 츠키나가는 그걸 알고 있었다.

봄바람이 어설프게 불었다. 삼학년의 봄이었다. 예뻐, 라고 대답하는 말에는 다른 수식어가 따라오지 않았다. 주변이 웅성이고 술렁이는 목소리도, 이 순간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둘만의 독주. 둘만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들러리는 프리마돈나와 그의 파트너를 위해 준비된 순간이었다. 눈을 깜빡였다. 봄이었다. 따뜻한 바람이 살랑거렸다. 머리카락이 사부작거렸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 세나? 츠키나가는 부드럽게 물었다.

세나는 그녀의 숨이 닿았던 제 검지로 제 입술을 톡, 톡 두드렸다.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츠키나가는 자비를 베푸는 왕처럼 웃었다. 그녀는 세나의 품에 악보집을 안겼다. 카세트테이프를 던졌다. 구식이었다. 이런 걸 누가 써, 라고 투덜거릴 순간도 츠키나가는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오네긴에게 첫눈에 반하는 타티아나를 본 적이 있어! 세나! 그는 시적으로 말했다. 세나는 다 풀린 표정을 하고 눈을 깜빡이다가,

 

완전 짜증나.”

 

라고 대답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 라고 말하며 츠키나가는 웃었다.

이상하게 엇나간 타이밍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애매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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