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Curtain call

 

 

 

 






10.

Curtain call

 

 

 

***

 

간만의 아침이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츠키나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비긴어게인의 ‘Lost star’였다. 햇빛이 낭랑했다. 공기는 차지만 볕이 따듯한 걸 보면 이 겨울도 곧 질게 분명했다. 봄이 오면 좋겠다면서 그는 집에서 몇 분 걸리지 않는 작업실로 향했다. 도로에 고양이 몇 마리가 모여 있는 구석을 지나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가득한 겨울 한 가운데를 지나 그는 따로 지은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철제 대문이 열리는 소리는 여전히 둔탁했다. 바람이 불었고, 그는 추위에 어깨를 움츠렸다.

츠키나가는 작업실 현관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음계가 다르게 느껴지는 소리가 열세 번 울리고, 그는 문을 열었다. 먼지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손을 내질렀다. 조만간 청소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는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비어있어야 할 신발장에는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는 듯, 그는 그저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 풍경도 이제 이주 하고 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슬슬 익숙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하품을 했다. 끌고 들어온 겨울은 여전히 차가웠다.

18평 남짓 되는 작은 집은 잡동사니로 난잡하게 들이 차 있었다. 츠키나가는 하품을 했다. 역시 먼지 냄새가 들이 차 있었다. 조만간 업자를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불을 걷지 않아도 누구인 지 알 수 있었다. 2, 하고 3일 동안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츠키나가의 작업실에서 잠을 잤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이유란 뻔한 것이라 굳이 캐묻지 않았다.


세나, 환기 시킨다?”


츠키나가는 하품을 하며 커튼과 창문을 동시에 열었다. 겨울바람이 창문을 통과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불뭉치는 몸을 움직였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깊게 들어왔다. -, 일어나야지? 츠키나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배려 없이 강하게, 이물뭉치를 흔들었다. , 조용히 좀 해봐 왕님- 잠에 취해 갈라진 목소리가 울렸다. 세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그의 회색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이불에 부벼 흔들렸다. 츠키나가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첫 일주일은 그래도 사람 사는 꼴처럼은 하고 있더니, 그 뒤 일주일과 삼일은 이런 상태였다. 차라리 스케줄이라도 꽉꽉 차 있다면 나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이츠의 앨범 작업은 거의 끝나가는 상태라 세나의 손을 거칠 것이 없었고, 화보나 런웨이 의뢰도 없었다. 완벽한 시즌 오프. 소속사에서도 2주 동안 쉬지 않고 예능 촬영을 했으니, 쉬는 게 좋겠다며 스케줄 조정을 하고 있었다. 쓸모없는 배려였다. 츠키나가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와중에도, 부서질 것처럼 부드러웠다. 츠키나가는 장난을 치듯 그것을 쓰다듬었다. 세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불 속에 파묻힌 번데기처럼, 가만히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세나, 밥은 먹었어? 츠키나가가 물었고, 세나는 아니, 하고 대답했다. 먹었을 리가 없잖아, 라는 말이 타박처럼 다가왔다. 츠키나가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언제나 밥을 해주는 건 세나의 몫이라, 그는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도, 뭘 해줘야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이런 식으로 퍼져 있는 기사를 위로하는 건 왕의 업무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퍼져 있는 친구를 외면할 수 는 없었다. 츠키나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이 망가지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세나는 언제나 열정적이었다. 외면은 차갑고 냉철해보이지만, 속마음은 그와 상반되게 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여리기도 했다. 츠키나가는 이불 아래에 있는 그를 토닥였다.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라는 말을 내뱉기에는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세나는 언제나 사랑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게 생기면 정열적으로 저를 내던진다. 모델에서 아이돌로 전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짝일 수 있었던 건, 마음 속 한 구석이 정열적이기 때문이다. 그것만 보고 전진할 수 있는 열정. 하지만 그런 사람은 깨지기도 쉽다. 츠키나가는 무심코 혀를 차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불난 속을 굳이 긁고 싶진 않았다.

츠키나가의 손이 이불을 토닥일 때 마다, 세나는 몸을 웅크렸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 번 끝난 줄 안 사랑이 열병처럼 찾아온 걸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 때도 이런 모습이었다. 유우키 마코토를 제 인생에서 퍼낼 걸 선언할 때, 세나는 내리 이주 가량을 앓았다. 열병이 온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내내 울었다. 마음을 다해서 좋아했기에 곱씹을 것도 많았고 내던질 것도 많았다.

그들이 쌓아온 추억에는 고작 이주 정도가 더해진 모양이었지만, 그 이주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익숙해지는 건 2주일이면 충분하다. 제 시간에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와 섞이는 유우키를 밀어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모든 게 다 이해가 갔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없기에 더 위로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유우키 마코토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만두길 종용하는 것도 쉬웠으리라. 츠키나가는 그의 어깨를 슬슬 쓸었다.


뭐라도 해 줄까?”

왕님이 한 거 안 먹어.”

이렇게 엉망인 주제에 자존심만 세서는. , 이런 점도 재미있어 세나. 너무 뻔해서, 인스피레이션이 흐를 정도는 아니지만.”


세나는 몸을 웅크렸다. 츠키나가는 같이 있어 줘? 하고 물었다. 이불뭉치가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는지, 흔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뭐라도 먹여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기다려, 라고 외치고 그는 뛰쳐나갔다. 세나는 퉁퉁 부운 얼굴로, 창문과 커튼을 닫고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다시, 방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연극이 모두 끝난 뒤의 무대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무대의 여백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세나는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츠키나가의 작업실에 신세를 진 것도 벌써 이주 하고도 삼일이 지났다. 유우키 마코토가 남아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혼자 있으면 그가 찾아올 것 같았고,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헐레벌떡 달려들어올 것 같았다. 돌아가면 다 잊어버릴 거라고 말했던 것은 자신이었으면서, 미련하게 그의 메시지를 기다렸다.

 


첫 날에는, 올 줄 알았다. 가슴이 떨리고 설레서 방 안에 있을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얼굴을 보면 사랑 해 달라고 어리광을 부릴 것 같아서 집을 나섰다. 츠키나가는 기꺼이 작업실의 작은 방을 내어주었다. 세나는 그 엉망인 방에서 잠을 청했다. 침대 바로 위에 있는 창에서는 찬 기운이 몰려왔다. 아직도, 겨울이었다.

둘째 날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무서웠다. 집 안에서 유우키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집이 자신의 집이 아닌 것 같아, 한참을 현관문 앞에서 망설였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입력하고 들어가니, 집 안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현관에 나와 있는 신발은 한 켤레도 없었다. 허무한 생각을 했구나, 하고 스스로 자조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안방 문을 열면 유우키가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문이, 그랬다. 문을 여는 게 무서웠다. 밀어낸 것은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사랑해주길 바랐다.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새벽을 혼자서 지새우는 게 무서워서 영화를 봤다. 보고 싶은 영화가 많았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어바웃 타임, 새 구두를 사야 해, 아멜리에, 노팅 힐,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 러브레터. 하지만 끝까지 볼 수는 없었다. 초반 10분을 보면, 아직도 그 영화들을 좋아하냐고 묻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이곳에 없음을 알면서도 환청이 번져왔다.

입술을 매만지고, 매만져, 껍질을 뜯고 피 맛이 나던 이틀째 밤. 세나는 새벽을 틈타 츠키나가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밤을 지새가며 작업을 하던 그는, 세나의 모습을 보고 어서 자, 라고 대답해줬다. 그의 침대에 몸을 의탁하자 잠이 왔다. 제 침대에서는 잘 수 없었다. 유우키가 남겨 놓은 향기가 아직도 스며 있는 듯 했다.

그 이후,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새벽에 나가기를 반복했다. 유우키가 자고 있을 때와 같은 스케쥴이었다. 촬영을 하고 있는 이주일 동안 했던 짓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츠키나가는 이미 익숙해진 것 같았다. 한 달, 하고도 삼일. 세나의 방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불을 다시 머리 끝까지 덮고,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유우키의 장난에 놀아난 제가 나빴다. 결국 연극에 놀아난 건 세나 이즈미 뿐이었다. 지독한 사랑, 폭력적인 사랑. 세나는 멍투성이가 된 제 우주를 다시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신이 아니었고, 사랑에 흔들리는 개인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마지노선을 넘어 찾아온 겨울은 같은 현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반짝반짝하던 삶은 다시끔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나 이즈미의 인생에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우키 마코토는 잠시 찾아온 열병 같은 존재였고, 떠날 걸 알고 있었던 존재였다. 그들의 관계에서 룰을 어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이 세나의 계절을 겨울 쪽으로 밀어가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온 츠키나가는 세나, 눈을 떠 세나,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다시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겨울이 번져왔다. 추워, 라고 중얼거려도 그는 문을 닫아주지 않았다. 그는 환상적인 일이 일어났다며, 동백이 아주 예쁘게 핀 곳을 지나왔다고 말했다. 세나는 츠키나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봄이 오겠다는 증거지, 라고 말하며 유쾌하게 웃는 츠키나가를 보면서, 세나는 자신이 여전히 겨울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우주 속의 한 줌 먼지가 된 기분이었다.

전자렌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보라는 재촉에 이불을 풀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츠키나가는 인스턴트 콘스프와, 식빵을 내밀었다. 세나는 깊게 오목한 숟가락으로 스프를 떴다. 적당한 점도였다. 왕님 인턴트는 잘 하는 구나? 라고 말하자, 츠키나가는 너에게 안 해주는 것 뿐 자신은 언제나 요리를 잘 해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세나는 따듯한 스프를 호호 불어 입에 넣었다. 갈라진 목에 뜨거운 스프가 들어가자, 몸이 덥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주, 그리고 삼일이 지났다. 이제 곧 일상적인 궤도로 돌아갈 차례였다. 이주일을 내내 앓았다. 잊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우키에게서는 연락이 없을 것이다. 알람 하나하나에 기대하고, 슬퍼하기 힘들어 일주일 전부터 꺼둔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괜히 그릇 바닥을 숟가락으로 긁었다. 눌어 붙은 부분이 있는 듯,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세나는 그 부분을 세게 긁어냈다.

츠키나가는 세나의 식사를 그저 들여다보다가, 의자에 앉아 곡을 생각하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평소라면 종이와 펜을 가져다 달라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었다. 이건 츠키나가 나름의 위로였다. 세나는 눌러 붙은 스프에 빵을 찍어 먹었다. 식빵 안에 들어 있는 블루베리 잼에, 손이 더러워졌다. 그는 손끝을 쪽쪽 빨았다. 그는 이불 위에 있는 스프 그릇이 움직이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주었다.


많이 힘들지?”


츠키나가가 물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휘둘린 마음에 바를 약은 시간 밖에 없다. 그는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세나는 말없이 스프를 퍼먹었다. 가루 두 개 분량의 스프는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싸구려 전분과 싸구려 옥수수 맛이었지만 나름 먹을 만은 했다. 세나는 그 때 먹었던 맛없는 크림파스타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다시 유우키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파랑은 우울함의 색이었다.

힘든데, 별 수 없지. 세나는 체념한 듯 말을 내뱉었다. 칠 년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루카미의 집에 찾아갔던 다음 날, 방황하다가 걸어갔던 작업실에서였다. 그 때도 그는 인스턴트 콘스프를 끓여 왔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했다. 몇 번을 겪어도 실연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세나는 어디서부터 제 연애운이 꼬였는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식빵을 뜯어 입 안에 가득 넣었다. 칼로리를 계산할 기운도 없었다.

스프 그릇이 다 비자, 츠키나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나의 허벅지 위에서 그릇과, 빵을 치웠다. 열어둔 창문에서 겨울바람이 들어왔다. 2월 말. 점점 3월을 향해 가는 날짜와 다르게, 겨울은 여전히 기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춥기만 했다. 꿈에서 깼으면 날도 봄이어야 할 텐데, 여전히 겨울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왕님.”

.”

우리 사귈래.”


세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차라리 너랑 사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 허탈함을 가득 담아 말하자, 츠키나가는 근래 들어 가장 재미있는 농담이라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사랑을 할 거라면 잘 맞는 사람이랑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유우키와 함께 살았던 이 주는,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다. 그의 생활 패턴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식도 저와 달랐다. 해물을 먹지 않는 게 가장 큰 마이너스포인트였다. 유우키 마코토와의 차이점을 말한다면, 백 가지는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 사이에 가벼운 침묵이 돌았다.

세나랑 사귀면 즐거울 것 같아. 음악 취향도 맞고, 음식 취향도 맞고, 나라면 울리기보다는 웃기게 할 걸. 내 기사는 폰이 아니라서 칸 끝에 도달해도 나의 여왕이 될 순 없지만, 그래도 나는 모자라지 않게 사랑 해줄 수 있을 거야. 눈이 오는 날 드라이브를 가고, 로맨스 영화에서 키스 씬이 나올 때 마다 입을 맞춰줄 수 있는 남자지. 츠키나가의 목소리 또한 농담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런 식의 우스갯소리를 나눠도 편한 사이란 건 좋았다. 츠키나가는 유쾌하게 말하다가, 목소리를 갑작스레 낮췄다.


하지만 나랑 사귀면 세나가 후회해서 안 돼.”

그렇지.”

세나의 마음은, ‘유우 군거잖아?”


그걸 함부로 차지하다니, 기사왕은 약탈 같은 거 안 해.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며 킬킬 웃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너 굉장히 힘들구나.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동정은 사양할게, 세나는 애써 입을 열었다. 말 한 마디를 내뱉는 게 힘들었다. 츠키나가는 그렇다면 좀 더 쉬어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사랑을 잊으려고 하는 건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은 지독한 위안이었다. 세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쌓인 기억들이 많았다. 그 모든 것들을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털어 내야겠지? 그가 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츠키나가는 그의 말끝을 잡았다. 털어내고 싶으면. 츠키나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세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털어내고 싶지 않으면, 털어내지 않는 게 좋지.”

잘못 하면 망가져 버리는데?”

세나, 나의 기사는 그렇게 약하지 않은 걸.”


계속 짝사랑해도 괜찮지 않아? 츠키나가는 하품을 했다. 그는 가볍게 말했다. 네 유우 군이 어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에 휩쓸리는 타입이라면 분위기를 만들어서 휘어 채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뭐 놓고 싶다면 놓는 게 좋겠지만. 츠키나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세나를 보며 웃었다. 요컨대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의무감 가지지 말라는 소리야. 세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입을 오물거렸다.

아니면 멈춰 있어도 괜찮고. 츠키나가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니까, 그는 세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주치지 않는 다면 괜찮을 거야, 그는 칠 년 전과 같은 방법으로 위안했다. 오늘부터 집 안의 텔레비전은 절대 안 켤 거야. 세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보지 않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츠키나가는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그는 오늘 작업실에 제 동생이 올 거라는 말을 내뱉었다. 세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츠키나가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하면서 횡설수설, 이것저것 늘어놓기 시작했다. 세나는 그에게 자리를 비켜주겠다고 말했다. 아까까지 제법 대범하게 해결책을 제시하던 주제에, 괜찮아? 라고 묻는 눈에는 불안감과 걱정이 가득 묻어있어서, 세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왕님이 그렇게 말해줘서, 괜찮아 졌어.”


다시 쿨하고 멋진 세나 이즈미가 될 거니까. 왕님이 방 안 치우는 것도 잔소리하기 시작할 거고, 이것저것 잔뜩 참견 해 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조금은 괜찮아 진 것 같았다. 찾아오지 않는 현실을 인정할 때도 됐다. 유우키가 연락을 안 하는 게 더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사랑하게 되면 분명 안 좋게 헤어질지도 모르니까. 반짝이는 추억을 마음속에 가두며, 세나는 집에 갈 거라고 중얼거렸다.

오늘이라면 방에 가득한 미련을 치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집은 텅 비어있었다. 현관 앞에서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세나는 괜히 주변을 배회하며 샀던, 종이봉투에 들어 있는 바게트와 사과 몇 알을 부엌에 내려놓았다. 냉장고 안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이 가득 할 텐데도, 정리해야한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있고 싶었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 서늘한 방을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그는 소파에 정착했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등받이에 기대니, 다시 혼자라는 사실이 번져왔다.

이 주는 누군가에게 익숙해지기 적당한 시간이다. 첫 삼일은 사람의 사이클을 파악하는 데 쓴다. 서로를 탐색하기 위한 시간은 사일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일주일은 서로에게 녹아가는 데 사용한다. 자신의 공간을 남에게 내어주고, 남이 비워준 자리에 손을 얹는다. 최소한의 유대가 피어오르기에 적당한 이 주일. 세나는 제가 내어준 자리가 의외로 많았음을 실감했다. 그는 발을 까딱였다. 안방 문은 열지 않았지만, 그 곳에 유우키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미친 사람 같아.”


세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방 안에 보일러를 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우주를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찬 방에 머물러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든 치워야 했다. 그는 겁도 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얌전히 비어 있는 공간이 보였다. 세나는 불을 켰다. 방 안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보들보들한 향이 났다. 그는 언제나 중심이었고, 중앙이었다. 세나는 천천히, 유우키가 남아 있는 침대에 다가갔다. 걸터앉았다가, 뒤로 넘어가며 누웠다.

익숙한 천장은 벌써 낯설었다. 도망이 익숙해진 탓이었다. 다시는 이런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싫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그 눈꺼풀에는 유우키만이 존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물에 기억을 흘려보내는 상상을 했다. 카메라 앞에서, 붉은 불이 들어온 렌즈의 눈치를 보며 사랑한다고 말하던 날과, 제 눈만을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날, 그 미묘한 차이가 번져왔다. 세나는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매만졌다. 거칠었다.

내내 이렇게 되고 싶었다. 남는 미련이 이상하기만 했다. 세나는 옷가지들을 챙겨 욕실 앞으로 갔다. 목욕을 하고, 땀을 빼고 나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탁 바구니 앞에 옷가지들이 널려있지 않은 모습에 기분이 나빠 그만두었다. 집 안은 온통 기분이 나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차라리 연락하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망가진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다시 침대에 가 누웠다.


혼자 사는 건 익숙한데.”


졸음이 번져왔다. 자울자울, 눈이 감겼다. 향만 남기고 가버린 그, 그가 눕던 곳에 가지런히 몸을 뉘고 있는 게, 꼭 그에게 안겨있는 느낌 같아, 세나는 눈을 감았다. 혼자 사는 건 익숙한데, 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손을 꼼질거렸다.


혼잣말이 늘었어, 유우 군.”

그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혼자 사는 동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세나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유우키의 캐리어가 없는 방안을 힐끔거렸다.

내가 제대로 대꾸한 적은 거의 없지만

그는 하품을 했다.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카메라를 보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서 좋았어.”


혼잣말은 그대로 공중에 맺혀있다, 이슬처럼 증발했다. 들어주지 않는 말엔 의미가 없다. 좋아한다는 말이 그의 혀끝에 달게 맺혔다. 차라리 내내 솔직하고, 내내 좋아했더라면 그래도, 촬영이 좋게 끝나서 다행이네, 오늘 뭐 먹었니?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세나는 남은 미련을 갈무리했다. 번호는 알고 있으니,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전화를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심리적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다.

먼저 연락하는 것도 구차했다. 유우키의 모든 게 한겨울 밤의 꿈이라는 프로그램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설정에 동화되어 나타난 작용이라면, 먼저 연락하여 마음을 흔들어 놓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말했던 사실들이나, 몸을 겹쳐가던 시간들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기에 다행인 점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고, 진심을 다하지 않아서 덜 아팠다.

, 아팠다. 죽도록 아파봤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는 코끝을 쓸었다.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아이스크림 스쿱처럼 유우키 마코토의 인생에서 세나 이즈미의 존재를 들어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가도, 그의 인생이 저로 인해 풍성하던 시절이 있었을 거라 기대하고 싶었다. 세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른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하며 움직였다.

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대로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 유우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고등학생 때, 내내 별님에게 빌었던 소원이었다. 그는 제 발판이 매우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충동. 사랑은 폭력.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세나는 여러 비유들을 입에 담으며 속삭이다가 눈을 꼭 감았다. 그의 세계는 쇼팽의 녹턴처럼 잔잔하게 흘러갔다. 어느새 창밖은 짙게 어두워져 있었다. 삼월이 가까워 오지만 봄이 아닌 탓에 낮이 짧았다.

방을 정리해야 했다. 정리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만 머물러 있고 싶었다. 눈을 마주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조금 더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남았던 모든 사랑을 털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쌓여 미련이 된다. ‘후련함으로 유우키를 마주할 수 있었다면! 그는 할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을 회상했다.

 


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 , , , 리듬도, 미학도 없는 그 소음은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세나는 제 집을 찾아올 사람을 알지 못했다. 현관 밖의 그는 벨을 여러 번 눌렀다. 인터폰을 확인할 기력도, 경비원을 불러 끌어 낼 생각도 없었다. 세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 불쾌한 일이, 자연스럽게 사그라지기를 바랐다. 그는 느리게 하품했다. 그는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와, 저렇게 불쾌한 방식으로 호출하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이별 후의 감정은 언제나 미미하고, 미묘하다. 배가 고팠다. 시간이 된 탓이었다. 바게트를 잘라 올걸, 생각하며 세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소음은 계속 되고 있었다. 평안하고, 조용하던 그의 세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그 소리는 마치 사랑처럼 폭력적이라, 듣고 싶지 않음에도 세나의 세계를 찢어발기며 들어왔다.

만약 저 소리가 유우키라면,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게트를 잘라 치즈를 꺼내 얹는 사이, , , 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차 사그라졌다. 울음소리가 섞인, 말소리가 현관의 철문을 넘어 들리는 것 같았으나, 아는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집을 잘못 찾은 것 같은 억울함이네, 세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 식어 딱딱해진 바게트를 씹었다.

벨이 울렸다. 얼굴이라도 보자 싶어서, 그는 인터폰 쪽으로 다가갔다. 무언가 웅크린 형체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이 으슬거렸다. 열린 베란다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밖은 추웠고, 하늘이 어둑어둑해다. 우주처럼 빛나는 작은 전구 줄을 매어 놓은 나뭇가지는 유난히도 메말라보였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철거하지 않은 반짝임들을 보며, 세나는 눈이 내리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마지막 계절에서 그는 계속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바게트 두어 조각을 먹으니 배가 불렀다. 요 몇 주 동안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칠 년 전에도 같았다. 세나는 거실, 충전기에 꽂아 둔 핸드폰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유우키의 연락이 와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 덕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았다. 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 비였고, 유난히 차게 보였다. 세나는 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마냥 슬픈 것에 당황하다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소음은 주기적으로 울렸다.

주먹으로 두드리는 듯 쾅쾅, 하고 찾아올 때가 있었고 노크를 하듯 똑똑, 가볍게 두드릴 때가 있었다. 세나는 연신 울리는 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핸드폰 화면에 닿은 불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방 안의 불을 하나도 켜지 않았다. 혹시라도 집 안에 사람이 있는 걸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겨울비는 지독하게 내렸다. 추적추적한 빗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기묘한 앙상블이었다.

작은 호기심이 생겼다. 호기심이 생쥐를 죽인다는 속담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누군가를 갈구한다는 게 기묘했다. 세나는 몇 번째 울리는지 셈할 수도 없는 벨소리를 들었다. 그는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걸었다. 그가 다가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람은 문을 더 이상 두드리지 않았다. 세나는 우유 구멍으로 그를 확인 할 수 있을까 몸을 숙였다.

소리는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지쳤는지, 떠났는지를 알 수 없었다. 세나는 천천히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미친 사람이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잠시 그에게 찾아왔으나, 세나는 갈급하듯 문을 두드린 사람을 보고 싶었다. 그는 천천히 잠금장치를 풀었다. 걸어두었던 체인이 짤랑거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걸어 두었던 걸쇠 두어 개를 풀었다. 녹슬지 않았지만 뻑뻑한 것들이 움직이면서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그는 문고리의 잠금장치를 옆으로 돌렸다. 찰카닥, 하는 소리가 퍼졌다. 세나는 문 밖에 있을 게 누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희망을 거세하기로 했다. 그는 번호 키로 열리는 도어락의 버튼을 눌렀다. 작은 음악을 남기고 잠금이 풀렸다. 그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천천히 문을 밀었다. 찬 바람이 먼저 들어왔고, 빗소리가 바람의 꼬리를 잡아 집 안에 퍼졌다. 밖은 상상했던 것 보다 추웠다.

세나는 문을 밀었다. 그는 제 문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지금 당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세나는 문을 밀었다. 유우 군, 하고 입을 열자, 유우키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안경에는 빗물이 잔뜩 묻어 있었고, 외투는 이미 폭삭 젖은 채였다. 돌아가려고 했는데, 다시 오길 잘 했다, 유우키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세나는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왜 왔어?”

세나가 물었고

사랑해서요.”

유우키가 대답했다.

 

 



 

***

 

, 라고 몇 번을 요구했으나 유우키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비에 젖은 것을 핑계로 세나의 집에 들어왔다. 많이 변할 줄 알았다는 말에는 안심이 묻어 있었다. 세나는 소파에 앉아, 제 발끝을 바라보았다. 유우키는 젖은 외투를 벗었다. 그의 외투가 떨어진 자리에 빗물이 고였다.

겨울이었고, 비가 내렸다. 그가 몰고 온 겨울에, 온 집안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오가지 않았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왜 왔어, 라는 말은 너무나도 상투적이었고 나가,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한 마디만 들어도 울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갑자기 찾아온 제 봄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의 어색한 침묵을 깨트린 건 유우키였다. 그는 연신 기침을 했다.

세나는 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고, 문 앞에 제 옷가지들을 내려놓았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찻잔을 꺼내 티백을 손잡이에 감았다. 연유를 컵 밑바닥에 깔았다. 집안에 한 사람이 더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위하여 세나는 보일러를 켰고, 물을 끓였다. 그는 그가 저를 위해 찾아왔음에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해했다. 유우키 마코토와 세나 이즈미의 관계에서 언제나 칼자루를 진 건 유우키였다.

단두대에 목을 넣는 기분이었다. 독이 든 칼과 마주하는 햄릿의 기분일지도 모른다. 잘못 걸린 마법에 대해, 어떤 보상을 청구하러 왔으면 어쩌지. 세나는 여러 가정을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들의 관계에서 예측과 예상은 필요 없었다. 그는 불안함에 떨었다. 그는 천천히 물을 부었다. 연유와 섞여 나오는 홍차가 금세 우윳빛으로 물들었다. 세나는 티스푼으로 그것을 연신 저었다. 멀리서 물소리가 번지는 듯 했다. 환청은, 아니었다. 그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다.

당연한 것처럼, 모든 일들은 겨울처럼 슬펐다. 세나는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짐작 할 수 없었다. 절 상처주려 왔다는 말 밖에 꺼낼 수 없었다. 그는 불안했고, 손 끝이 잘게 떨렸다. 그는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앉아 있었다.

샤워를 마친 유우키는 천천히 다가왔다. 밖에, 비가 내려서요, 라고 말하면서 그는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안경에 작게 김이 서려 있었다. 세나는 연유홍차를 그에게 밀었다. 밀크티에요? 라고 묻는 말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대사와 대사 사이에 찾아오는 공백을 메꾸기에는 둘 다 서투른 배우였다. 세나는 여러 번 고민했던 말들을 반추했다. 할 수 있는 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왜 왔어?”

세나가 물었다.

사랑하니까요.”


유우키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오늘 짐을 풀었어요, 일주일이 지난 지가 한참 됐는데 이즈미 씨 생각을 별로 안했는데, 그런데, 짐을 풀자마자, 이즈미 씨가 보고 싶어져서,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그가 늘어놓는 이유들은 마치 꿈처럼 달았다.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세나는 유우키 몰래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팠고,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저가 정교한 꿈에 갇힌 것만 같았다.


어쩌자고 기다렸어, 평소라면 안 열어줬어.”

세나의 냉랭한 말에 유우키는 난감한 듯, 아하하, 하고 웃었다.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그는 또 그렇게 대답했다. 세나는 무심결에 저도 사랑해라고 내뱉으려고 했던 것을 참아냈다. 그는 입술을 입 안으로 삼켜 깨물었다. 정리하려던 마음에 봄꽃이 피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었음으로 필 수 없는 꽃들이었다. 세나는 제 손 끝을 매만졌다. 아직도 안 될까요,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며 묻었다. 그의 눈 대신 바라볼 수 있는 카메라가 없었다. 세나는 손을 꼼질거렸다.

일주일 하고 일주일, 그리고 삼일이 더 지났어요. 유우키는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찾아올 줄은 몰랐네. 세나는 그렇게 말했다. 떨리는 손을 들키기 싫었다. 그가 퍼부어주는 사랑에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동안 많이 외로웠고, 아팠고, 힘들었고, 잊으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나는 힘들었어요.”

.”

이즈미 씨는 어땠어요?”


유우키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세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말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를 보다가 유우키는 피식 웃었다.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듯 했다. 나는 오늘 불안하고 힘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래서 막상 찾아왔고, 찾아왔는데, 들어갈 수 없고, 그래서 계속 문을 두드렸는데, 이즈미 씨가 없는 것 같았고, 전화를 해도 받질 않아서,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계속 두드리고, 날 봐달라고 소리치다가, 우리는 더 이상 닿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려가서 몇 걸음을 걸었는데, 비가 끊임없이 내렸어요. 그런데 이런 날에 이즈미 씨가, 없으면 내가 외로울 것 같아서, 올 수 밖에 없었어요. 다시, 다시 올 수밖에 없었어요. 유우키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천천히 말했다. 하고 싶던 말이 많아 울면서 말하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많이 컸네, 라고 말하자 유우키는 이제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대답했다. 건방진 소리였다. 꽃이 피고 있었다. 겨울을 강제적으로 밀어내는 것은, 피는 꽃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세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을 잡아도 될지, 알 수 없었다.


이즈미 씨는, 어땠어요?”

나는

나는, 상처 받기 싫어서 이 주 동안, 밀어내고 밀어냈는데.”

.”

결국 이즈미 씨가 내 봄이었어요.”


겨울이 끝나려면 봄이 있어야 하는 거라서, 나는, 그래서, 잡으러 왔어요. 유우키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귀 끝까지 빨간 물이 들어 있었다. 세나는 그에게 어떤 대답을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라고 외치는 유우키의 목소리에 엮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내내, 불안했어. 세나는 쥐어짜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결국 그와 사랑하지 않고 싶어서 도망쳤던 모든 날들은, 유우키 마코토에게 다가가는 다른 길이었다. 밖에서는 비가 내렸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우키는 고개를 들었다. 창문에 비친 얼굴로는 그의 얼굴에 꽃물 같은 붉은 색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 할 수 없었다. 비가 내린 다음엔, 따듯해진대요. 유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세나의 손을 잡았다.


올해는 봄이, 조금 이르게 온대요.”

.”

좋아해요.”

.”

사랑해요.”

.”

이즈미 씨를, 사랑해요.”


유우키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번져왔다. 대답 해 줘요, 기다릴 게요. 당장 듣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다가, 한숨을 쉬듯 웃었다. 푸스스 흩어지는 목소리들의 끝을 잡고 싶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영원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세나는 눈을 꿈뻑거렸다. 이거 다 마시면 갈게요, 유우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두드리던 것 치고는 얌전했다. 보고 싶었어? 세나가 물었다.

자각 한 순간 보고 싶었어요.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어요. 봉오리가, 꽃이 되는 느낌이 이런 걸까 싶었어요. 유우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둘 사이에서 감출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 굴었다. 세나의 차례였다. 그가 대답할 수 있는 건 모두 대답했다. 들을 수 있는 것도 모두 들었다.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을 내뱉어야 했다. 떨렸다. 유우키의 잔은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세나는 입을 열었다. 유우키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어서 말해보라는 듯, 재촉하는 표정은 이내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불안 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싫어해도 괜찮아요. 이즈미 씨가 날 싫어해도 계속 문을 두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유우 군이라고 불러줘요. 나는, 언젠가 이즈미 씨가 내 아침을 열어주길 바라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봄이 피는 기분이었다. 별빛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세나는 나는, 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미칠 듯 도망쳤던 칠 년도, 미치게 사랑했던 청춘에도 정해두었던 대답이었다. 유우키는 제 봄이었다. 겨울이 감히 움켜쥘 수 없는 계절. 그를 집 안 에 들였을 때부터 예정됐던 결말일지도 모른다. 커튼콜 후에 진행되는 둘 만의 연극, 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

“‘유우 군

.”


유우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즈미 씨 표정, 보고 싶지 않으니까, 라고 변명하듯 눈을 가렸다. 호흡을 고르는 듯,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 와중에도 붉어진 귀는 가리지 않았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세나는 입을 열었다. 멀리 돌아왔던 길, 그 길 위에 찍는 마침표. 비가 그치면, 날이 따듯해진다고 했다. 조금씩 변해가는 풍경 속에서 봄은 반드시 찾아온다. 겨울의 뒤엔 봄이 밀려온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은 있다. 세나는 손을 곰질거렸다. 사랑한다고 말하기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뿐인데도 목소리가 갈라지는 듯 했다. 눈에 울음이 찼다. 목이 먹먹했다. 치받쳐 오르는 감정에 대해,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세상이 점점 개화하고 있었다.

유우 군, 하고 그는 그를 불렀다. 유우키는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의 눈에는 불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너무 성급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져왔다. 충동적인 리듬에 몸을 맡기는 건 아닐까, 이렇게 잡은 손을 놓치면 어떡하지. 세나는 다시 입술을 제 입 안으로 삼켰다. 밖에서 빗소리가 세게 울렸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유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애써 웃었다. 제 손도 떨리고 있는데, 웃긴 일이었다.


좋아해.”

내 좋아해랑, 같은 말인가요?”


세나의 말에 유우키는 단번에 물었다. 그는 이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듯, 굴었다. 차가운 손이 닿았다.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불안감을 나누려는 지, 확신을 얻으려는 지, 세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해도 괜찮은 사이를 하고 싶다는 소리에요, 내가 세나 이즈미의 뭐가 되고 싶다는 말이에요, 유우키는 당황해서 부연설명을 늘어놓았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우키는 울음을 터뜨렸다. 눈에 고여있던 것이 툭, 하고 터져 볼을 타고 흐르더니, 한동안 소리를 내지 않고 서럽게 울었다.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이즈미 씨의, 연인이, 되고, 싶단, 그런, 말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그러니까, 유우키의 입술에서, 호흡과 함께 울음이 번져왔다. 세나는 잡은 손에 힘을 주다가, 손 하나를 빼,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러니까, 하고 그의 목소리가 울음과 함께 번졌다.


좋아해요.”


유우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마주쳐왔다. 확신할 수 없음에도, 확신을 주고 싶었다. 충동적인 밤이 겨울에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에는 조금 더 따듯해질 것이다. 그는 제가 한 걸음 밀려나고 있음을 알았다. 겨울에서, 봄으로, 그 당연한 계절의 순환. 내내, 겨울 안에서 호흡하고 있었다. 갑자기 밀려온 따듯함에 어떻게 대답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우키의 등을 토닥이는 것과, 그가 진정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의 사랑에 응답 해 주고 싶었으나, 아직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겨울에서 여러 번 외쳤던 말들이, 목을 타고 흐르지 않았다. 좋아해, 라는 말이 한계였다. 사랑한다고 성급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세나는 손을 들어, 그의 안경을 벗겼다.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여러 번 비빈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까이 와 줘요, 유우키는 눈을 깜빡였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보이지 않아서 불안한 어린아이처럼, 그는 세나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했다. 세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마주한 눈동자에, 저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흔한 로맨스 같은 타이밍이었다. 유우키는 천천히 그의 볼을 쓰다듬다가, 손을 얹었다. 그는 세나의 감은 눈에 입술을 두어 번 맞추었다. 눈꺼풀에 닿아오는 숨이 뜨거웠다. 이즈미 씨가, 좋아요, 그 중얼거림 같은 목소리에 세나는 입을 열었다. 나도, 라는 말을 내뱉자, 숨이 닿았다.

불안함에 뱉지 못하는 말들이 있었다. 입술이 가볍게 비벼졌다. 유우키는 입을 열어달라는 듯, 세나의 아랫입술을 물어, 혀로 핥았다. 세나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입을 다시 맞추기 전에, 다시 사랑한다는 속삭임이 닿아왔다.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다음의 일을 세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저에게 닿아오는 봄에 기대기로 했다.

입을 열어주었다. 서로에게 미처 하지 못한 사랑이 닿았다. 들숨이 날숨이 되고, 그의 날숨이 저의 들숨이 되었다. 숨이 닿을 때 마다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세나가 감았던 눈을 뜰 수 있던 것은, 그들의 입술이 떨어진 다음에서였다. 그는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시야에 가득, 유우키가 들어왔다. 좋아해, 라고 낙인을 찍듯 말했다. 유우키의 볼에 벚꽃 같은 수줍음이 번져 있었다. 제 볼에도 비슷한 것이 피어 있을까. 세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눈물 자국이 번져 있는 안경을 쓰고, 세나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는 지쳐 보였다. 하지만 그를 끌어안은 팔에는 힘을 풀지 않았다. 어디론가 도망 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우리, 무르기 없기에요. 유우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이즈미 씨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유우키는 불안하지 않게, 라는 말을 덧붙였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겨울비 소리가 들렸다. 2, 겨울의 마지막이 번지는 밤이었다. 정리하지 않은 미련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꽃이 필 것이다. 동백이 질 때쯤에는 벚꽃이 피고, 그들의 계절은, ‘겨울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만개할 것이다. 멀리 돌아온 계절이 어색하기만 했다. 세나는 제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유우키가 손을 마주잡아왔다

거짓으로 돋았던 것이라도 좋았다. 그 처음이 어디든 좋았다. 제 계절이 봄과 몸을 마주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랑해요, 유우키는 그가 불안하지 않도록 하려는 듯, 연신 속삭였다. 마음에 내리는 목소리는 봄꽃잎처럼 부드럽기 그지 없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이즈미 씨를 사랑해요, 그가 말하는 모든 목소리가 봄처럼 달았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라고 말하는 목소리 끝이 울음처럼 묽게 번졌다.

봄에 잠겨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세나는 제 봄에 입을 맞추었다.

 

 

 

 

 

 

 

― 『한겨울 밤의 꿈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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