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 | 2018. 6. 17. 22:34
Girl you know I want your love
저기요, 나 그쪽 사랑을 원해요.
Your love was handmade for somebody like me
그쪽 사랑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Come on now follow my lead
이리와요, 내가 리드할게요.
I may be crazy don’t mind me
난 미쳤을지도 몰라요, 신경쓰지 마요.
Shape Of You
효율 없는 사랑을 한다. 세나 이즈미는.
유우키 마코토가 기억하고 있는 세나 이즈미는 언제나 그런 사랑을 했다. 일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영특하기 그지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불규칙한 궤도를 가지고 있는 행성처럼 굴었다. 누군가에게는 과하게 다가가고, 누군가에게는 과하게 멀어지곤 한다. 나쁜 버릇이었다. 그 감정이 누군가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유우키는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두시, 그리고 삼십일분이 지나고 있었다. 도로와 인도의 경계를 가르듯 심어져 있는 가로등에서는 주황색 불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와이퍼가 창에 닿는 빗물을 지웠다. 아무것도 닿지 않은 창문을 비가 다시끔 노크했다. 그는 조수석에 던져놓은 핸드폰이 울리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고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유우키는 차선을 변경했다. 빨간 불을 무시하고 달렸다. 아무도 없는 것 마냥 고요한 도로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가만히, 머물러있듯 미동하지 않았다.
그 간격이 괜히 불안했다. 깊은 한숨을 담배 숨처럼 내쉬었다. 초조했다. 술에 취한 그를 데리러가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익숙하다’는 지점에 짜증이 났다. 이건 다 그가 효율 없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우키는 깜빡이는 빨간 불을 바라보았다. 속도를 줄이고 건널목을 살폈다. 클러치를 밟았다. 핸드폰은 여전히 울리지 않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아 괜히 아무것도 차지 않은 목을 만지작거렸다.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 된 이유는 그가 해왕성의 궤도를 침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주제에 공전 궤도가 어긋나있어 가끔은 해왕성의 앞에서 태양을 바라볼 때가 있다는 그 발칙함이 용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깝다가, 너무 무겁다가. 질량도 가벼운 주제에 건방진 일이었다. 유우키는 핸드폰을 들었다. 나루카미가 알려준 장소에 거의 도착했다. 그는 전화를 할까 하다, 그만 두고 다시 전화를 조수석 시트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불안하게, 하고 있어.”
프라이데이니 주간문춘이니, 스캔들에는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는 주제에, ‘아끼는 사람’이랑 같이 술을 먹으러 들어간 곳이 호텔이라니 질이 나쁘다. 스폰 기사가 뜨기 딱 좋은 호텔인 주제에 자기 차를 끌고 갔다는 것도 악질이다. 나루카미가 같이 있다면 호텔놀이라고 둘러 댈 수도 있지 그런 빠져나갈 구석도 만들지 않았다. 차라리 ‘왕님’이라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크든 작든 사쿠마가 같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새벽 두 시 사십분의 세나 이즈미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홀로 있는 것은 결백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무언가 상상을 덧붙여 ‘그럴싸한 스캔들’로 만들기에는 너무나 적당한 상황이었다. 가쉽을 좋아하는 기자들은 이미 세나가 체크인한 것 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검지로 핸들을 툭툭 두드렸다. 가죽에 지문이 묻으며 나는 신경질적인 리듬을 듣다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사소한 불안과 약간의 짜증이 그의 심장을 노크했다.
그는 완벽한 스타다. 나루카미가 제게 연락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완벽을 사소한 외로움으로 깨버렸을 때의 후폭풍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우키는 그가 외로움을 모르는 인종인 것처럼 구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혼자 술을 마시러 ‘어색한 장소’에 굴러들어가는 것은 대부분 사람 때문이었다. 효율 없는 사랑을 매번 보는 걸 질리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핸들을 돌렸다.
시 외곽의 싸구려 호텔은 세나 이즈미스럽지 않다. 이 지점이 오히려 더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을 ‘지금’의 세나는 판단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는 너무 많이 주었거나, 너무 덜 준 것들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있음으로 뒤를 돌아볼 여력도 없다. 유우키는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유메노사키의 울타리 안에서는 그저 속만 상하고 넘어갔을 일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는 조금 다르게 변주되는 것을 몇 번이나 봐 왔다. 가끔은 담배였고 아주 가끔은 술이었다.
강한 냄새를 싫어하면서도 굳이 그것을 입에 댄다. 심야에 운전하는 걸 싫어하는 제가 차를 몰고 오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유우키는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손등에 코를 대고 향수 냄새가 남아있는 지를 확인했다.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가볍게 정리하면서 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자꾸만 삐쭉거리는 언어들을 가지런하게 맘속에서 빗어내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는 순간 화를 낼 것 같았다. 유우키는 룸미러 속 제 눈을 바라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미련해요. 라는 말을 입 속에서 달콤하게 굴려본다. 이즈미 씨, 혼자 마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나도 왔어요. 라고 말해야지, 생각하며 입술에 달라붙지도 않는 말을 꾹꾹 눌렀다. 볼을 부풀린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술이라도 사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유우키는 핸드폰을 들었다. 온 연락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때문에 약해질 때 그는 절대로 유우키를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척 굴면서 저는 선 밖으로 빼버린다. 가장 많이 부르는 건 ‘왕님’이었다. 두 번째로 많이 부르는 건 작은 쪽의 사쿠마였다. 세나는 ‘왕님’과 ‘작은 사쿠마’는 둘 다 밤잠이 없어 부르기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다. 가끔은 두 사람 모두를 불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기만 한다는 소리도 건너건너 들었다. 세나는 이런 말을 유우키에게 해주지 않는다.
그만의 불문율이었다. 술에 꼴아 있을 때도 어기지 않는 규칙이었다. 유우키는 룸미러 안의 제 표정을 살폈다. 명백한 짜증이 묻어 있었다. 숨을 고르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머리카락이 삐쳐있는 게 신경 쓰인다고 생각하다가 괜히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몇 번 눌렀다. 그는 나루카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방 번호를 확인하고 차 문을 열었다. 한 여름의 새벽공기는 나름 쌀쌀했다.
세 번째로 많이 부르는 것은 나루카미였다. 오늘도 나루카미에게는 새벽 내내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당장 찾으러 가기에는 곤란하다는 말을 들은 건 한시 경이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차키를 들고 다시 나왔다. 구겨 신어 자국이 남은 신발 뒤축을 제대로 빼 신으면서 유우키는 차 문을 잠궜다. 삐빅, 그리고 찰칵. 문을 다시 당겨 잠겼는지를 확인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로비는 어두컴컴했다. 어딜 보나 세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기다렸다. 로비에 있는 괘종시계의 추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다가, 사람이 나오면 곤란한 듯 웃었다. 세나 이즈미씨가 찾아서 왔는데요, 근데 연락을 안 받아요. 아마 자나 봐요. 깨우기 싫으니까 전화하기 싫어요. 그냥 들어갈게요. 유우키는 능숙하게 말하면서 곤란한 듯한 얼굴을 만들었다. 열쇠를 꺼내 주자 활짝 웃는다. 친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관계란 편리하다. 그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승강기 쪽으로 다가갔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위로 올라가는 동안 입 속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아까 부드럽게 고쳐놓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나한테 연락 안했어요? 왜 전화 안했어요? 왜 내 전화 무시했어요? 왜 안 알려줬어요? 왜? 왜? 왜? … 연쇄되는 질문만이 그를 따라 궤도를 돌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카펫이 깔려 있는 어두운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복도로부터 아홉 번 째 방을 마주했다.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연신 눌러 내리다, 열쇠를 가져다 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술 냄새가 났다. 곧장 방 안으로 다가가자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세나가 보였다. 그가 밝혀놓은 인공우주 모양의 무드등이 싸구려 주황빛을 내고 있었다.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고 그제야 안도했다. 유우키는 방 안 중앙에 있는 무드등을 바라보다 그의 옆에 앉았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누워 있는 모습이 애잔했다.
동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 세나 이즈미를 발아래 두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답답했다. 그가 제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는 그의 우주에 초대받은 불청객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들이 모두 그랬다. 약한 모습과 뒷면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연락을 하고, 보고 싶다고 말해주었으면 싶었다. 유우키는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부드러웠다.
샴푸 냄새가 났다. 끝이 덜 마른 구석이 있었다. 방 한쪽의 테이블에는 와인잔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기포가 빠진 맥주가 들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패키지를 뜯지 않는 와인병과 그가 좋아한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큐브 치즈의 겉포장지를 보면서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 이즈미의 태양계에서 제가 낄 자리는 없어 뵈는 듯 했다.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 효율이 좋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저를 따라다닌다. 유우 군이 원한다면, 유우 군을 좋아해, 유우 군- 형아를 이렇게나 생각해준 거야? 유우 군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뻐. 유우 군이, 유우 군이, 유우 군이, 라고 이어지는 목소리를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유우키에게 언제나 상냥한 세나 이즈미였다. 그는 효율적으로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언제나 완벽한 모습과 다정한 형아를 보여주는 것은 그의 사랑이 비효율의 끝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손아귀에 쥐고 있는 건 언제나 완벽하게 써먹어야 한다는 말을 가장 지키지 못하는 건 세나였다.
아이러닉했다. 그래서 우울했다. 파랑 같은 기분이었다. 유우키는 그의 머리카락을 계속 정리했다. 예민한 주제에 깨질 않는 모습이 어색했다. 유우키는 깊게 잠든 그의 귀에서 떨어져 나온 커널형 이어폰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에 이어진 그것을 손에 들었다. 그는 세나에게 몸을 기대었다. 체중이 실림에도 불구하고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유우키는 그것을 손바닥에 담아 가만히 귀에 가져다 대었다. 직접 꽂지 않은 이어폰에서 삐져나오는 리듬이 손에 고였다.
제 귀에 곧장 들어오지 않고 겉도는 듯, 막힌 듯 들려오는 노래를 중얼거렸다. 애드시런의 shape of you였다. 툭, 던지듯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우키는 천천히 이어폰을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침대의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으, 하고 내는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불이 침대 시트와 맞닿아 바삭바삭거렸고, 유우키는 천천히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펴는 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낯선 그림자를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망할 오카마가 연락했어?”
세나 다운 말이었다. 글쎄요, 라고 말을 흐리며 유우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침대 곁 바닥에 털썩 앉았다. 세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오늘 새벽까지 촬영 있었잖아, 라고 중얼거리는 말에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다가온 말에 다가가지 않으니 대화가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삐걱, 삐거덕거리는 사이가 멀었다. 제 중력에 편입되지 않은 그가 제법 제멋대로라고 생각하며, 유우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방 안 가득한 술 냄새가 어색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유우키는 갈까? 하고 물었다. 갈까, 라는 말에도 그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찌푸린 채로 얼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제가 그를 찾으러 오는 것을 싫어한다. 계산적이지 못한 사람, 이라고 말할 뻔 한 것을 입 속에 구겨 넣었다. 저는 지금 소년이 아닌데 그는 저에게서 소년을 기대한다. 이 애매한 어긋남은 다분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그 망할 오카마지? 하고 다시 묻는다. 나루카미를 위해 고개를 젓는다. 유우키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간다. 침대에 허락 없이 눕는다. 팔을 그의 허리에 얹어 눌렀다.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형아랑 같이 잘래, 라고 속없이 굴었다. 침대 시트에 떨어져 있는 그의 이어폰 한쪽을 주워 그에게 돌려주었다. 아직도 애드시런의 shape of you가 들려왔다. 몸이 가까워질수록 술냄새가 났다.
완벽에서 멀어지는 그가 어색했다. 사랑하는 동생은 볼 수 없는 행성의 뒷면. 해왕성과 천왕성 정도만 알 수 있는 명왕성의 일탈. 일그러져있는 궤도를 비집고 들어간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운전해서 왔어? 라고 묻는 목소리에 유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벽까지 일 있었잖아, 라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 물었는데 두 번 다 흘리는 질문들에 대해서 세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힘든 일 있었어?”
“딱히? 그냥 이러고 싶었는데.”
“무드등 좋아해?”
“아니. 별로.”
“이즈미 씨 지금 굉장히 청승맞아.”
“어른은 그럴 때도 있어.”
나도 어른인데, 라고 말하면서 유우키는 제 볼을 긁었다.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보다가 세나는 뒤를 돌았다. 얇은 티셔츠 아래로 비치는 그의 얇은 선을 바라보다가 유우키는 손을 뻗으려 했다. 닿을 듯 말 듯, 제 손가락과 그의 등 사이의 간격은 우주만큼 넓었다. 그 간격을 좁힐까 하다가,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아가 한심해? 라고 묻는 목소리가 곧바로 다가왔다. 아니? 라고 대답하자 세나는 그럼 됐어, 라고 말했다.
노래를 하듯 가볍게 울리는 목소리가 중력을 가지고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지점이 매우 어색했다. 서먹했다. 닿을 듯 말 듯한 그 작용을 어떻게 좁혀야할지 알 수 없어 유우키는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늘 촬영장에서 약간 트러블이 있었는데 그게 좀 마음에 남아서 우울해졌어. 그런데 그 때 이즈미 씨 생각이 나서 그냥 보러 오고 싶었어. 혼자 술 먹고 있다고 해서 그냥, 그냥.
그냥. 그냥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 사탕처럼 굴렸다. 동생이 형을 보러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라는 변명을 더해 그에게 차려 놓았다. 그는 그것을 곱씹는 듯 가만히 음미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뒤를 돌지 않는 모습에 그냥, 이라는 말을 한 마디 더 붙여 놓았다. 닿을 듯 말 듯 한 그 간격을 억지로 좁히면 역횩과만 나는 것을 유우키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효율적이지 못하다. 계산적이지 못하다. 감정을 어디다 쏟아야 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유우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정답을 제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답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멋대로 헤매고 멋대로 상처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 유우키에게 작용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빙글빙글, 제 궤도를 돌고 있을 뿐인데 멋대로 상처를 받고 있는 건 유우키 마코토였으니까. 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는 ‘형’이라는 이름으로 물러선다.
“늦게까지 돌아다니면 못써.”
“보고 싶었는데.”
“유우 군이 살갑게 굴어주는 건 기쁜데.”
“응.”
“…그래도.”
그래도, 라는 말을 곱씹으면서 유우키는 그의 가느다란 등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봐봐, 또. 이렇게, 멋대로 멀어지지? 라고 묻고 싶었다. ‘동생’이라는 정의에서 저를 빼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유우키는 입 속에서 여러 가지 말을 굴리다가 다음에는 안 그럴게, 라는 말을 하면서 웃었다. 그제야 세나는 뒤를 돌았다. 가지런히 정리된 예쁜 얼굴이 웃고 있었다. 푸른색 눈동자 안에 담긴 제 표정이 어색해 유우키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어냈다.
형아는 유우 군을 정말정말 좋아해- 라고 노래하듯 말하는 건 평소의 세나 이즈미다. 그는 다시 ‘형’의 입장에서 ‘동생’을 쓰다듬는다. 알고 있지, 라고 맥락 없이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웃는다. 오늘은 누가 힘들게 했어, 라고 묻지 않는다. 형아는 그런 자잘한 것들을 동생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지독한 감정이었다. 제 품 안에 쏙 들어올 것 같으면서도 들어오지 않는다. 팔베개 해줘, 라고 어리광 부리듯 말하자 그는 선뜻 팔을 내밀었다.
베개를 고쳐 베고 누운 그의 팔에 머리를 댔다.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이즈미씨, 오늘 나는 조금 힘들었는데 라고 지어낸 거짓말을 한다. 제 동생이 부리는 영악함을 알고 있을까, 생각하다가 유우키는 눈을 감았다. 아마 그는 제가 한 말을 우선으로 믿어줄 것이다. 그게 형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의 사랑은 저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이 제 것과 카테고리가 다르다는 것이 유우키의 유일한 비극이었다. 세나는 손을 뻗어 그의 안경을 벗겼다. 유우키는 그가 아직도 꽂고 있었던 이어폰 한 쪽을 뺐다.
하지만 그가 제 세계로 편입되는 거창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에 귀를 기댔다. 심장이 콩콩 뛰고 있었다. 제 것과 다른 소리일 게 분명했다. 그는 효율적인 사랑을 하지 못한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거나 너무 멀리 멀어진다. 비즈니스에서는 영악하게 굴고 있는 주제에 가까운 사람의 감정은 바라보지 못한다. 너무 무른 구석을 바라보다가 유우키는 눈을 감았다 떴다. 가까이 있는 그의 얼굴이 뿌얘졌다가, 다시 선명하게 보였다.
지어낸 거짓말에 그는 성실하게 대답을 한다. 고작 몇 개월 먼저 태어난 주제에 형처럼 위로한다. 정작 제 품에 안겨 있는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유우키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호텔을 나설 때 키스를 하고 싶었다. 저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주간 문춘이든 프라이데이의 카메라던 상관없었다. 화보를 찍을 때처럼 렌즈를 응시하면서 어그러진 관계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떤 마음으로 걱정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주제에 제 속편한 말만 하고 있는 그의 우주를 바라보았다. 천장에 닿아 있는 무드등의 불빛은 안경을 벗은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기에, 모양이 아닌 그저 뭉뚱그려진 빛의 무리처럼 보였다. 유우키는 꼭 그 모습이 세나가 오해하는 제 모습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힘들었지, 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여전히 저를 위로하고 있었다.
정말로 위로받아야 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저 자신의 사랑이 누굴 위해 준비 되어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작은 사쿠마나 그의 왕보다, 그의 감정을 오롯이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저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데. 유우키는 그의 입술을 올려다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침대의 어드매에 어지럽게 엉켜있을 이어폰에서는 오-아이- 오-아이- 오- 아이- 오- 아이- 하는 목소리가 늘어지듯 들려왔다.
세나 이즈미는 효율 없는 사랑을 한다.
그것이 유우키 마코토를 위해 준비되었을 것임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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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니까, 「오필리어」 같은 열일곱 살에는. 그리고 스물아홉 살의 세나 이즈미는 ‘사랑은 모두 부질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느는 건 사랑에 대한 환멸과 인생에 대한 지루함뿐이었다. 누군가가 수영장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소통이랑 장비 체크해! 라는 신경질적인 사진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나는 다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좀 더 어렸을 때에는 헤어지면 마냥 아팠던 것도 같았는데, 이제는 그저 버석거리는 자작나무마냥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세나는 양 팔을 쭉 뻗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옆에 없다고 해서 일을 나가지 않을 것도 아니었으며, 이미 잡혀 있는 스케쥴을 할 수 없다고 뻗대지도 않을 것이었다. 세나 이즈미는 어른이었고, 자신의 사생활을 일에 끌어오는 ‘아마추어’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메이크업아티스트에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피곤하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신경질적인 이미지'의 좋은 점은, 이렇게 대답했을 때 넉살좋게 이유를 물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신경과민에는 정수리를 눌러주는 편이 좋다고 대충 대답했다. 세나는 부드럽게 웃으려 노력하며 '참고하겠다'고 속삭였다.
그 사람과는 삼 주, 아니 이 주 전 쯤 헤어졌다. 적당히 사귀기에 좋은 사람이었다. 끝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주변에 요란하게 알리고 시작한 연애도 아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느는 건 신중함이라 그가 ‘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건 나루카미나 유우키 같은 지인뿐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헤어졌다는 보고는 하지 않았다. 이별은 그다지 큰 이벤트가 아니었다.
모든 게 귀찮았다. 연애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과정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는 건 어떠냐는 권유도, 왜 헤어졌는가를 기승전결에 맞추어 설명해야 하는 재연극장도 하기 싫었다. 모든 과정이 그저 귀찮았다. 유우키가 묻는다고 해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메말라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만약, 다음에 연애를 하게 된다면 주변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고.
거울에 달려 있는 조명 때문에 시야는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제 얼굴을 가볍게 팡, 팡, 두드리는 브러쉬 소리를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곧 물 속에 들어간다는 긴장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심장이 어째 목구멍 끝에서 뛰고 있는 모양이라 세나는 심호흡을 하며 손깍지를 더욱 더 단단하게 매었다.
눈두덩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섀도우는 평소보다 짙었다. 세나는 찌푸린 채 제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제가 낯선 화장을 덮고 있었다. 화려한 화장에 비해 세팅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유난히 수수해보였다. 그는 메이크업아티스트의 지시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글리터가 그의 눈 아랫부분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명을 받자 글리터를 바른 부분이 반짝였다. 물속에 들어가면 의미가 없지 않을까? 라고 묻자 메이크업아티스트는 그럴 수도 있지만 일단은 노력을 해 보는 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세나의 눈을 마무리하고, 입술을 우- 하고 키스하는 것처럼 내밀어 보라 요구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느린 통기타 소리가 겹쳤다. 키린지의 「에일리언즈」였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고 다시 숨을 내쉬었다. 립 컬러를 골던 그녀는 옅게 웃었다. 이제 세나 씨 집중해야 겠다. 라는 목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오늘 작업을 같이 하는 사진작가 A 씨는, 모델이 원하는 곡을 현장에서 내내 틀고 있는 사람이었다. 조명을 옮기는 소리가 분주했다. 그러니까 이제 말 걸지 말아요. 세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괜히 심술을 부린다며 웃었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기자재를 옮기는 난잡한 소리에 섞여서 들려오는 「에일리언즈」는 쓸쓸하고, 공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는 괜히 둥근 손톱 산을 쓰다듬었다. 수십, 수천, 수만, 수십만의 컷을 찍어도 카메라 앞에 설 땐 긴장이 되었다.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다 눈을 떴다. 거울 속 저를 바라보았다. 아이라인으로 덧그려놓은 날카로운 라인에 푸른 눈은 제법 볼만했다. 유리조각처럼 섬세했다.
스스로를 보면서 '예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의무처럼 짊어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았다. 아직 저가 자신의 미의식에 부합하다는 것은 묘한 고양감을 줬다. 하지만 묘한 불안감이 그의 등에 무게를 실은 채 기대어 있었다. 그는 메이크업을 하기 전에 들었던 ‘오늘의 컨셉’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물에 들어가는 건 역시 긴장 되죠? 라고 묻는 목소리에 세나는 ‘세나 이즈미’라 괜찮다, 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오필리어」였다. 청순하고 아름답게. 동시에 죽음이 가까워 온 유리조각 같은 미성숙함. 그는 제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갔다. 더 이상 소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들어오는 일들은 대부분 이런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나는 잘게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고조가 없는 음악은 어느새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세 번째로 재생하고 있었다. 당신을 좋아해요 베이베, 라고 툭 던지듯 털어놓는 부분을 그는 제 목소리로 따라했다.
옛 애인은 특히, 이 부분을 싫어했다. 쓸데없는 기억들이 파편처럼 그의 수면위로 올라왔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아프게 했어요? 라고 그녀가 질문했다.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런 세팅도 하지 않은 회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거리다 가라앉았다. 그녀는 머쓱한 모양인지 괜히 웃다가 입을 열었다.
“입술 다시. 키스하는 것처럼 우- 해봐요.”
세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브러쉬가 작고 얇은 입술을 쓸어내릴 때 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엷고 연약한 색으로 채우고 있다며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긴장하고 있는 게 티가 난 모양이었다. 세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음, 하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마주 닿게 하라 요청했다.
음, 하고 입술을 마주대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메이크업아티스트는 그에게 물속에서 숨을 잘 쉬냐 물었다. 숨을 예쁘게 쉬어야 촬영이 예쁘게 끝난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나는 입술을 키스하는 것처럼 내밀었다. 얇은 브러쉬가 그의 입술을 가볍게 여러 번 스치고 지나갔다. 의외로 립은 강하게 바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나는 거울 안의 자신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세팅이 되지 않은 잿빛 머리카락과 달리, 아이메이크업은 화려했다. 부드럽게 발린 섀도의 끝은 물고기의 비늘 같은 무늬를 그려 완성했고 아이라인은 깊게 뺐다. 세나는 제 앞머리 끝을 만지작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남자 보컬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고, 촬영장 안의 스텝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영장 특유의 화학약품 냄새를 맡으며 세나는 호흡을 정리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 애와 같이 듣던 노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고작 그러한 일’ 때문에 일할 때의 습관을 바꾸고 싶진 않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세나는 의자에 홀로 앉아 손을 만지작거렸다. 돌입 전의 긴장감을 나눌 상대가 없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상실’이었다.
전 애인과 함께 달의 너머로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먼 이야기였다. 발을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담가 두고, 진저 레몬 맥주를 먹으면서 했던 이야기인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아마 후쿠오카 쪽이 아니었을까. 성게와 크레송을 볶아낸 안주가 맛있었던 곳.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 주제에 이런 사소한 것만 기억이 난다는 게 제법 얄궂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당신이 좋아 에일리언’ 이라는 가사가 들려왔다.
눈을 감자,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수중水中 마냥 숨이 가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마다 아가미가 돋을 것 같았다. 세나는 폐호흡을 하는 물고기를 떠올렸다가 발끝을 까딱였다. 거울 속 그는 표정 없이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결핍이 느껴지는 건 아쉬울 때뿐이다. 철 지난 사랑은 깎아낸 손톱달 만큼이나 의미가 없었다.
세나 이즈미는 ‘예전 버릇’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기실에서는 언제나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페이스북의 메신저던, 인스타그램의 다이렉트 메세지던, 라인이던 간에 언제나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것 같다. 관습적인 일이었다. 다른 날임에도 반복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말에 그가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이란 건 언제나 부질없다고 말하던 나루카미의 목소리가 더 선명했다. 나름 오래 사귀었었다. 상실이 옅어 이상했다. 어딘가 붕, 뜬 느낌이었다. 세나 이즈미는 궤도와 중력을 잃어버린 행성을 떠올렸다. 지금의 저와 별반 다르지 않는 이름 없는 별을 그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상을 하기에는 별로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사랑의 끝은 맥주 거품과 같았다. 텁텁하고 쓰기만 한 주제에 다른 맛에 금방 지워져버린다. 그는 과거를 짚었고, 조금 더 과거를 짚었다. 이상하게 근래 했던 연애는 모두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나곤 했다. 깊게 남는 상처 또한 없었다. 흘러가다가 잠시 고이고, 다시 흐르는 빗물 같은 사랑은 세나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이런 관계는 실패, 일까. 가만히 한숨을 쉬며 세나는 중얼거렸다. 기타 소리가 깊게 끊겼다. 그리고 이어, 한 번 끝났던 노래가 다시 반복되어 들려왔다. 버전을 바꾸는 것도 없이, 다시 「에일리언즈」였다. 옛 애인은 그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걸 싫어했다. 염세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세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가사를 천천히 곱씹었다.
그대가 좋아. 에일리언. 이 별의 외딴 곳에서, 마법을 걸어 보이겠어. 그래도 되겠니? 라고 묻는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동시에 어 딘가 음울했다. 하지만 염세적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옛 애인이 그렇게 말하면 ‘염세적은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게 세나의 몫이었다. 이제는 할 일이 없는 말을 입 속에서 사탕처럼 굴리면서 그는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비어버린 잼통 안의 부스러기를 긁어내는 것처럼 추억이 방울졌다. 세나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와요, 라고 말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손을 흔들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영장의 마른 바닥만을 밟아가며 사진작가에게 가자, 그는 준비운동을 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스태프들은 전신 수영복을 입은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꼭 외계인 같다고 생각했다. 물 가까이에 오자 음악이 윙윙 울렸다. 가벼운 귀울음을 느끼며 세나는 수영장의 구석에서 천천히 스트레칭을 했다. 대기실에 남겨둔 핸드폰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팔을 하늘로 뻗었다.
옛 애인과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연예인이라고 해도 그라비아와 뮤지컬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전’ 아이돌과 ‘배우’의 영역은 상당히 갈리기 마련이었다. 친한 친구로 소문나 있는 게 조금 골치 아팠지만 동시에 캐스팅 되는 예능만 아니라면 평생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세나는 수영장 구석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물에 조명이 고여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는 천천히 발을 담갔다. 심장에서 가장 먼 곳부터 물을 묻혔다. 물의 온도는 차가웠다. 젖어드는 옷자락을 느끼면서 그는 맨 발을 물속에서 까딱였다. 천진한 오필리어의 모습을 이미지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잠수복을 입은 스태프들이 손에 꽃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어깨에 맨 산소통을 바라보며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나 군, 준비 되면 들어가자.”
“A씨, 감사합니다.”
“모델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작품이니까.”
사진작가는 샷을 확인해야 한다며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자리를 바라보다 세나는 손끝과 팔에 물을 천천히 묻혔다. 찰박이는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반절 쯤 물에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전히 키린지의 「에일리언즈」는 촬영장에 들려오고 있는데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세나는 제 허벅지 옆을 짚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스트레칭을 하는 듯 목을 길게 뺐다. 천장에서는 밝은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어제의 오후 두 시경이 떠올랐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오렌지 빛의 세상이 다시 ‘옛 애인’의 조각을 끌어왔다.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그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을 세나는 확실히 반추할 수 있었다.
—너는 언제나 경계의 저편에 서 있는 것 같아.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 사랑에 빠지려고 하지 않아.
세나는 부드럽게, 노래하듯 입을 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던 것 같았다. 나는 바다 안에 있어서 자꾸만 목이 마른데, 너는 해변가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어. 더 원하고 갈급하는게 나라서 너랑 사랑할 때는, 세나는 물을 받아 울리는 제 목소리를 듣다가 물속으로 뛰어내렸다. 약한 반향이 일었다. 오버 핏의 흰 드레스 셔츠가 물 안에서 해파리처럼 부풀었다. 그는 천천히 중앙으로 헤엄쳐갔다.
“너랑 사랑할 때는.”
비참해. 세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입술이 자꾸만 달싹였다.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키스, 라는 말에 다가오는 감정들은 담배 끄트머리에 달린 재 마냥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물 속에서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는 촬영장의 중심을 바라보다 다시 수영장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피우고 올게요, 라는 세나의 말에 A는 그럴 줄 알았다며 비상구를 가리켰다. 세나는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챙겼다. 봄 치고는 쌀쌀하다며 매니저가 가디건을 걸쳐주었다.
핸드폰은 챙기지 않았다. 젖은 바지가 움직일 때 마다 물 먹은 소리를 냈다. 숨이 막혔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물었다. 비상구를 열고 문을 닫았다. 녹슨 철문이 끼긱거리는 소리를 냈다.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선 당장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괜히 센치해진다고 생각하며 불을 붙였다.
여백 같은 시간이었다. 비참해, 라는 말을 키스대신 혀 위에서 굴렸다. 숨을 들이키며 불을 붙인다. 담배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진한 맛을 느끼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은 흡연을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면 어떻게 사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세나는 철문에 등을 기댔다. 가디건과 녹이 부딪히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약한 파열음이 일었다.
그는 연기를 내뱉었다. 비참한 사랑을 하고 싶진 않았다. 변명할 말들이 후회처럼 떠오르다가,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사라졌다. 끊어진 관계를 달콤한 말로 이어봤자 의미 없음이 분명했다. 어른의 연애를 했었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세나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들이 사랑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상처는 뒤로 숨기는 것이 현명했다. 인어공주가 제 다리의 아픔을 가린 것처럼, 예전에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을 숨긴 것처럼 말이다. 세나는 연기를 불었다. 가볍게 흩어지는 그것들은 그가 얼마전 끝낸 사랑처럼 덧없이 흩어지기만 했다.
숨을 정리할수록 마음만 복잡해졌다. 키스하고 싶었다. 그리고 순간, 그 사람을 떠올렸다. 「달의 뒷면」에 있던 이상한 사람. 마일드 세븐 같은 구식 담배를 피우던 사람. 우디한 계열의 향이 잘 어울리면서도 한없이 가벼울 수 있는 사람. 오렌지 빛을 뭉쳐둔 것처럼 생긴 사람. 그리고 동시에 세나는 그를 잊는다.
모르는 사람과 키스한다는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았다. 세나 이즈미는 손해보는 게임은 하지 않는다. 세나는 담배 끝을 털었다. 난간에 재가 쌓이다가 불어온 바람에 하릴없이 흩어졌다. 그는 그것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저가 향수를 가져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 손을 꿰지 않은 카디건의 소매를 흩날렸다.
회색. 그는 짙은 회색과 파랑이 겹쳐진 수면 아래를 떠올렸다. A가 원하는 「오필리어」의 이미지는 그 곳에서부터 덧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담배를 난간에 비벼 껐다. 그는 곧장 두 대째를 꺼냈다. A는 모델의 이입을 중요시하는 남자이니 앞으로 한 까지 정도는 더 피우고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바람이 이미 젖어 있는 청바지 사이로 들어왔다. 그는 높은 난간에서 아래를 둘러보았다.
봄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월이란 날짜가 무색했다. 세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깨물었다. 멘솔 캡슐이 들어있지 않음에도 짓이기듯 이로 물었다. 눈을 감았다. 난간에 기대에 한숨을 내쉬었다. 호흡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천천히, 의식하면서 숨을 마셨다. 완벽한 연출을 꿈꾸며 「이미지」를 뭉쳤다. 다 큰 어른에게 죽음에 고정되어 있는 ‘소녀’를 연기하라고 하는 저의를 셈했다.
자꾸만 생각은 다른 쪽으로 뻗었다. “꼭 우주에 있는 것 같지 않아?” 라고 속삭이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촬영을 앞두고 있는 이 중요한 순간에 생각하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세나가 만드는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템포를 맞추지 않고 말을 걸고, 곁에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데도 옆에 앉았다. 그가 쓰는 곡은 분명 정돈되지 않은 채로 엉망진창일 거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필리어는 사랑하는 것이 비참했을까. 오필리어에게 사랑받던 햄릿이 비참했을까. 세나는 대학 시절에나 읽었던 ‘햄릿’의 원 텍스트를 떠올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여기 오기 전에 밀레이의 그림을 잔뜩 보고 오는 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담배를 마셨다. 폐에 연기가 가득 차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언제까지 연령과 맞지 않는, 조금은 변태적인 이미지의 화보를 찍을 수 있을지.
그는 모든 애매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복잡한 건 한동안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생각에 익숙해져 있는 그의 사고는 자꾸만 다른 곳으로 뻗었다. 생각은 자꾸 엉켜 풀리려고 하질 않았다. 시나몬을 넣은 벌꿀 칵테일을 마시고 싶었다. 아니면 샹그리아나 다즐링 냉침이라도 좋았다. 그는 괜히 연기를 삼켰다. 탐욕스럽게 폐에 채우고 아슬아슬할 때 까지 뱉어냈다.
허기가 졌다. 해결할 수 없는 깊은 허기였다. 하지만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그는 철문에 등을 기대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빌딩 숲에서는 발 디딜 곳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난간의 삐걱거림을 보다가 담배를 비벼 껐다. 달의 뒷면에 가고 싶었다. 그는 발을 가볍게 까딱였다. 여전히 별에서 그를 잡고 있는 중력은 건제하다. 그는 먼 곳을 보다가 제 발 끝을 내다보았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너무 많이 지체하는 것 보다는 빨리 찍고 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는 문을 열었다. 다시 ‘세나 이즈미’의 경계를 밟았다.
저를 맞이할 준비 된 수영장 쪽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런웨이를 걷는 것 마냥 당당하게 움직였다. '세나 이즈미'만을 원하는 저 공간의 주인공은 오롯이 저 뿐이었다. 고민은 다 털었느냐는 A의 말에 세나는 뭐, 그렇죠, 라고 대답했다. 다시 심장에서 먼 곳부터 물을 적셨다. 예민하고 기민하게. 평소의 세나 이즈미처럼 찍으라는 조언이 들려왔다. 조금 더 빨리 말해주지 않은 건 A의 나쁜 버릇이었다. 세나는 ‘에일리언즈’를 속삭였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경계. 느린 템포.
세나는 가디건과 라이터, 담배를 매니저에게 건넸다. 다시 프레임 안에 담길 차례였다. A는 기다리다 지루했는지 그를 렌즈에 담고 몇 번의 플래쉬를 터드렸다. 창백하고 아름다워. 준비가 되면 바로 가지, 라는 말목소리는 이 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위안이었다. 세나는 발 끝을 쭉 뻗었다. 벌써부터 귀가 먹먹했다. 예민하고 파리하게. 평소 제가 쌓아올린 이미지처럼. 세나는 되새기듯 스스로에게, 말없이 속삭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별 거 아닌, 익숙한 일이었다. 세나 이즈미에게는 호흡같은 일이기도 했다.
다만 중력을 믿을 수 없어 그는 괜히 떠들었다. 메이크업은 괜찮으냐 물었다. A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우냐 물었다. A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세나는 텀을 두지 않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천천히 헤엄쳐 세팅 된 촬영 장소로 다가갔다. 수신호를 하는 스텝들이 보였다. 푸른 물속에 잠겨있는 그들은 외계인처럼 보였다. 손으로 물을 가르고 나갈 때 마다 조명에 눈이 부셨다. 세팅하지 않아 힘이 없는 머리카락이 실오라기처럼 하늘거렸다.
세나는 조명이 설치된 한 가운데에 ‘도착’했다. 숨을 내쉬었다. 산소방울이 수면으로 포르르 올라갔다. 그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11m 깊이는 아득할 만큼 짙은 파랑색이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푸른 느낌에, 시야가 아찔해졌다. 그는 고개를 들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물이 가볍게 찰박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스텝이 튜브를 안겨주었다. 세나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끌어안았다. 살이 움직일 때 마다 튜브에서는 까끌거리는 소리가 났다. 키린지의 노래가 울리는 와중 들리는 그 소리는 마치 불협화음 같았다. 갑자기 찾아오는 옛 애인의 기억 같이 이질적이기만 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긴장하는 것 같다는 A의 말에는 긴장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낡은 거 아냐? 라는 나름의 철학을 내뱉었다.
옛 애인이 말했던, ‘비참하다’는 말의 다음 언어가 기억나질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나 이즈미가 세나 이즈미이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나, ‘내가?’나, ‘내가, 너를?’이라는 말. 이 셋 중 하나를 내뱉었으리란 것뿐이었다. 세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A를 바라보았다. 미미한 불안감에 메이크업이 번졌나요? 라고 다시 질문했다. A는 ‘완벽하다’고 대답했다.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텝들이 웅성거리고, 물을 찰박거리는 소리 때문에 노래가 잘 들리질 않았다. 섞이는 사운드 속에서 몇 분을 헤맨 후에야 겨우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달의 뒷면을 꿈꾸지, 라고 속삭이는 키린지의 목소리에 맞추어 그는 튜브를 놓았다. 그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중앙으로 헤엄쳐갔다. 가라앉지 않도록 발을 움직였다. 드레스 셔츠 사이로 물이 들어왔다. 하늘하늘하게 퍼지는 그에게 스텝이 다가왔다.
힘없는 머리카락 사이에, 푸른색 장미로 만든 화관을 썼다. A의 「오필리어」는 환상 속사랑을 꿈꾸는 이미지인 모양이었다. 햄릿의 무대에서는 절대로 구할 수 없는 파란 장미가 주는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세나는 옛 애인이 소리치던 것을 떠올려냈다. 괜히 싱숭생숭한 기분에 그는 눈을 감았다. 다들 조용히 해, 지금 세나 군 이미지 잡는 중이니까! A씨가 소리치는 소리에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을 거야.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해 줄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가 말했던 ‘경계의 저편’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나름대로, 많이 챙겼는데 닿질 않았던 모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트랙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세나는 눈을 떴다. 오늘 세나는 집중하는 데 오래 걸린다는 A의 말을 듣고 괜히 웃었다. 그의 웃음이 잦아들자, 그의 앞에 있던 촬영 감독이 수신호를 알려 주었다.
‘숨을 못 쉬겠어요.’ 와 ‘산소가 부족해요’ 였다. 전자는 수면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뜻이었고, 후자는 물속에서 산소를 마시고 싶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 미묘한 뉘앙스를 생각하며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면에 올라오면 촬영이 지체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그는 발을 구르던 것을 멈추었다. 몸이 조금 가라앉았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래로, 또 아래로. 몇 m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가라앉았다. 키린지의 노래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물 속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는 저를 담고 있는 카메라의 렌즈를 바라보았다. 물 아래에서 만나는 포식자와 같았다. 카메라의 렌즈는 곧 그의 현재를 잡아 채 포식할 것이었다. 스텝은 그의 주변에 미리 설치해 둔 ‘가라앉은 꽃’을 펼쳤다. 낚싯줄로 목을 꿴 그것들은 제법 그럴싸하게 보였다. 세나는 숨을 참았다.
카메라를 볼 때 마다 호흡이 모자랐다. 꼭 어두운 우주 속을 유영하는 듯 했다. 불현 듯 외로웠다. 그는 눈을 떴다. 시선 처리가 ‘좋다’던가, ‘이대로’라던가, 하는 수신호는 배우지 못했다. 물속에서 혼자 남겨진 듯 했다. 누군가가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소통할 수 없는 아득한 우주. 세나는 일부러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손을 들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발을 구르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불안감이 프레임 안에 계속 담겼다. 수면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스텝들이 다가와 그의 몸을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무수한 산소방울을 내뱉었다. 몇 컷을 찍었는 지, 언제 포즈를 바꿔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딴 우주에서 그는 혼자였다. 하지만 A는 답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원래부터가 그런 사람이었다.
머리를 흔들었다. 물 먹은 솜처럼 물이 떨어졌다. 무언가 묻고 싶었다. 나는 아름다운가요? 메이크업은 어떤가요? 조명은 괜찮은가요? 당신의 연출 속에서는 나는 완벽한가요? 하지만 그 말들은 목 끝에 감겨 움직이질 않았다. 촬영장의 수면 위에서는 키린지의 노래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물 안에 있다 밖으로 나온 것 만으로도 '유리'된 기분이었다. 세나는 침착하게 호흡했다.
신경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들려오는 노래에 집중했다. 좋은 멜로디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카랑카랑한, 오렌지 빛의 목소리였다. 햇살 같은 발성으로 외행성을 노래하는 가사를 곱씹었다. 멜로디에서는 물의 냄새가 났다. 얼굴을 찌푸리자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촬영 스텝은 그것 또한 「에일리언즈」라고 변명했다. 츠키나가 레오의 요즘 신보라는 설명을 왜 들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세나는 애써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밝은 목소리로 황량한 외행성과 잊혀진 명왕성, 그리고 그 곳의 외계인에 대해서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다가 세나는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귀가 먹먹했다. 침을 삼켰다. 세나는 다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외로웠다. 사랑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촬영 전 ‘사랑한다’고 말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냥. 남겨진 것 같아,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츠키나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귀울음처럼 먹먹하게 들리는 곡이었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입술을 씹었다. 키스하고 싶었다. 헤어진 애인이 생각나는 건 아니었다. 건조하고 예민하게, 라는 오더를 다시금 곱씹었다. 지금 이 순간 집중해야 하는 건 카메라뿐이었다. 점점 고조되는 ‘츠키나가’의 곡에 숨이 가빠왔다. 촬영 전에 ‘사랑해’ 라고 속삭여주던 연인의 목소리는 어떤 빛깔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가미를 잊은 물고기처럼 호흡했다. 다시 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우주처럼 어두운 그 곳에, 폐에 가득 숨을 채워 넣고 가라앉았다. 그가 숨을 내뱉을 때 마다 산소방울만이 수면으로 포로로, 날아갔다. 그는 다시 렌즈 앞에 자리했다. 그는 여전히 그것을 바라보지 않았다. 소외와 단절. 경계와 그 저편. 세나 이즈미가 연출할 수 있는 「오필리어」는, 그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렌즈와 비껴난 곳에서 시선을 둔다. 수중 촬영용 카메라 너머의 A는 이런 표정을 좋아할 것이다. 그의 취향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두 번 작업해본 게 아니다. 프로는 아마추어처럼 굴 수 없다. 호흡하는 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나는 카메라가 원하는 세나 이즈미의 가면을 썼다. 지금쯤 카랑카랑한 오렌지의 목소리가 노래하는 「에일리언즈」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을 것이었다.
물속은 짙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절 같은 그 파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세나는 알 수 없었다. 재해석 할 수 없는 것들이 모두 모여 목을 졸라왔다. 숨을 들이킬 수도 한숨을 내쉴 수도 없는, 맘대로 손을 움직일 수도 없는 세계. 세나는 렌즈를 응시했다.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세나는 눈을 감았다. 숨을 내쉬는 것조차 무서웠다. 물속은 외로웠고 그렇기에 우주 같았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세나는 그 이질감에 한 문장을 더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주는 메꿔지지 않는다. 그제야 그것은 끊임없이 익숙한 성경이나, 경전처럼 변해 세나 이즈미의 세계에 스며들었다. 키린지의 「에일리언즈」나 츠키나가 레오의 동명의 음악처럼.
세나 이즈미는 끝없는 상실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0. 「달의 뒷면」 (0) | 2018.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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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즈 (0) | 2018.06.13 |
히치하이커/에일리언즈 | 2018. 6. 1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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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면 언제나 눈이 부셨다.
세나 이즈미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단종 된 담배의 낡은 케이스가 손바닥 안에 감겼다가, 풀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묘하게 습기가 찼다. 그는 갑 안에 들어있는 담배의 개수를 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콧잔등 아래로 내려간 선글라스를 치켜 올렸다. 카페 안에서는 낡은 LP판으로 긁어가며 재생하는 90년대 팝이 흐르고 있었다.
손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낡은 메뉴판은 누군가의 손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세나는 질감이 있는 오돌토돌한 오선지에 삐뚤빼뚤하게 적힌 메뉴들을 바라보다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고민이 되는 메뉴였다. 오이와 방울토마토 깨무침 같은 간단한 메뉴부터, 양갈비 로즈메리와 타임 프라이팬 구이까지. 맥주는 라거에서 에일을 거쳐 흑맥주와 윗비어, 바이젠까지. 세나는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1에서 10까지 수를 세는 것 마냥 성실하게 정렬되어 있는 메뉴 사이에서 무얼 고를지 고민이 되는 건 인간의 근본적인 습성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메뉴판을 계속 뒤로, 앞으로 넘기기를 반복했다. 낮 시간 때부터 마시는 체코 맥주와 가라아게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타타키 오이 같은 간단한 안주와 짙은 흑맥주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았다. 애초에 한 낮에 마시는 술 만큼 배덕하고 좋은 건 없으니, 뭘 고르던간에 최악은 아닐 것이었다.
잘 관리 된 둥근 손톱이 페인트를 묽게 칠해 나무결이 그대로 보이는 테이블을 건드렸다. 고민이 많아질 때의 버릇이었다. 그의 손톱은 배경음악과 엇박자로 빗겨가며 톡, 톡,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앓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갸르르르, 하고 목에서 울리는 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세나는 테이블에서 손을 땠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의 끄트머리에 대충 묶어 뾰쪽뾰쪽한 꽁지머리가 걸렸다. 그 남자였다. 시선을 한껏 빼앗을 정도로 밝은, 주황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흐트러트리는 모습은 일상적일 정도로 익숙했다. 인스피레이션이 날아가 버리잖아! 우주의 손실! 이 세계의 종말! 그의 암담한 목소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주황’과는 달리 이질적으로 들려왔다.
세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마일드 세븐」이었다.
오늘도 그 남자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름의 지정석인 듯 했다. 세나는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한 낮인데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한가했다. 한량이라는 말에 퍽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세나는 그가 꾸기듯 던져놓은 ‘마일드 세븐’의 담배곽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바뀐지 꽤 된 담배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담배에는 언제나 ‘마일드 세븐’이 적혀 있었다. 묘한 일이었다. 세나는 선글라스를 다시 추켜올렸다. 그 남자를 바라보는 건 드물게 재미있는 일이었다.
「마일드 세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다가 멈춘다. 한없이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무언가를 적어 내린다. 펜은 언제나 볼펜을 사용한다. 샤프가 부러지는 사이에 날아가는 ‘인스피레이션’이 아깝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드물게도 수정액이나 수정테이프는 쓰지 않는다. 만약 「마일드 세븐」이 작가라면 타자를 두드리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세나는 그의 작업 방식에 태클을 걸 생각이 없었다.
둘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가끔 「달의 뒷면」에서 마주치고,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한 단면만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이름도 모르고 그의 정확한 나이나 뭘 하는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그를 관찰하고 있는 것도 그는 모를 것이다. 세나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일드 세븐」은 한동안 제 작업에 몰두할 것이었다. 조용해 졌다는 건 그가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계속 반복되기만 하는 장면은 재미가 없다. 세나는 진저 레몬 맥주를 노려보았다. 칼로리를 계산하다가 한숨을 내쉰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건 나름의 취미였지만 슬슬 자제해야 할 때였다. 다시 시선은 보리소주 미즈와리나, 하이볼이나 단 칵테일에 머물다가 차 종류로 넘어간다. 아메리카노와 샐러드를 먹는 건 어쩐지 건강을 마이너스했다가 플러스하는 눈가리고 아웅하기 식의 조합 같았다.
안녕 하이네켄. 안녕, 세인트 아처. 바이바이, 레페 브라운. 세나는 제가 눈길을 주었던 맥주에게 짧게 사과했다. 체중 관리를 시작 한 다음에는 고를 수 있는 메뉴의 폭이 좁아졌다. 프로 모델이라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메뉴판의 같은 곳을 또 보고, 또 보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고른 메뉴는 아보카도와 훈제연어오픈샌드위치였다. 우유를 곁드리기에는 위장이 무거울 것 같아 물을 부탁했다.
주문과 계산을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배 안에는 묘한 허기가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체중을 조절할 때에 가장 경계해야 할 감각이었다. 하지만 계속 입이 심심했다. 부쩍 흡연량이 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나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창가 자리를 곁눈질했다. 긴 바에 올려둔 물건들의 배치를 바꾸면서 인스피레이션의 고갈을 외치던 남자는 이미 다 쓴 종이를 벅벅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종이공은 익숙한 듯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다시 펜을 돌렸다. 볼펜이 그의 손 위에서 빙그르르 돌아 안착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오후 두 시의 햇살이 느리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는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았다. 도로 너머를 들여다보다 그는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펜에 종이가 긁히며 나는 소리가 느리지만 성실하게 들려왔다.
세나는 마일드세븐의 지정석을 흘겨보았다.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무언갈 써 댔다. 도로와 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볕이 잘 드는 자리였다. 남자의 발치와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서는 폭신한 고양이용 침대가 있었다. ‘리틀 존’의 자리였다. 오늘도 그 회색 고양이는 고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분주해 하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적는 남자와 한없이 느긋한 고양이의 조합. 언밸런스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시를 든 주인이 세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세나는 샌드위치를 받았다. 함께 나온 나이프와 포크로 샌드위치 조각을 잘게 자른다. 나이프의 날에 문질러 으깨진 아보카도를 호밀 빵의 빈 면에 바르며 고개를 들었다. 카페의 배경 음악은 90년대 팝에서 어느 순간 세련된 ‘요즘 노래’로 바뀌어 있었다. LP판을 돌리는 걸 포기하고 디지털 음원을 재생한 모양이었다.
노래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카페의 선곡센스는 믿을 만 했다. 적당히 듣기 좋으면서도 사색에 방해되지 않는 것만을 고른다. 광고 촬영장에서 몇 번쯤 들어본 노래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음이 가지고 있는 리듬 자체는 경쾌하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멜로디에서는 물 냄새가 났다. 짙고 암울한 우울. 세나는 이 노래를 '천재'가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민하지 않고 쓴 원 터치에서는 가끔 이렇게 작곡가가 묻어나올 때가 있는 법이었다.
세나는 샌드위치를 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배경음악과 종이, 그리고 펜의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카페는 고요하며, 또한 적막하다. 「달의 뒷면」에는 도통 사람이 오질 않는다. 위치 자체가 후미진 곳에 있는데다가, 정문에는 「츠키나가 레이블」이라는 회사의 간판이 붙어 있다. 사무실로 오해하기에 딱 좋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딱히, 사내 카페도 아닌 모양인지 오후 두 시경 이 곳에 들어오는 손님은 「마일드 세븐」과 세나가 전부였다.
「달의 뒷면」의 간판은 뒷골목 쪽에 있는 낡은 문에 붙어 있다. 육중한 철제문에는 적당한 오선지에 괴발개발한 악필로 ‘영업중’이라고 적혀 있다. 손으로 쓴 메뉴판 마냥 적당한 느낌이다. 카페 이름은 영업 중 종이가 붙은 위쪽에 거친 페인트로 쓰여 있다. 물론, 「달의 뒷면」이라는 한자 또한 영업 중 종이만큼이나 더러운 글씨였다.
후미진 곳에 위치한 동네 카페치고는 와일드한 간판이었다. 대충 필요해서 대충 적은 것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턱을 괴었다. 마일드 세븐은 ‘이게 아니야’라고 큰 소리로 중얼거리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세나는 다시 작게 잘라놓은 훈제연어샌드위치를 씹었다. 차가운 연어와 샤워크림이 호밀빵과 어울리는 게 퍽 좋았다.
사람이 없는 게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생각했다. 뭔가 둘만의 아지트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담배를 챙겨 흡연실로 들어가는 「마일드 세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걸음걸이는 작은 키에 비해서 의외로 묵직하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 끄트머리에 불이 붙는다. 한숨만큼 깊은 연기가 흡연실 안을 깊게 메운다.
어쩐지 눈이 가는 사람이었다. 시선이 저절로 끌린다는 말이 맞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가 무대에 오르는 사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세나는 리듬을 타는 듯, 흡연실의 바닥을 톡톡톡 두드리는 그의 운동화 앞코를 바라보았다. 늘어난 남색 후드티와 엉망으로 묶은 머리카락의 어떤 부분에서 ‘끌림’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제 취향의 남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시선이 그에게로 흘러 고였다. 그가 도로와 가까운 곳에 앉아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햇살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뒷모습에서는 어떤, 강렬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중세시대였다면 분명 왕이나 영주쯤은 됐을 거라고 생각하며 세나는 물을 마셨다. 마시지 못했던 진저 레몬 맥주가 아른거렸다. 그는 등을 기댔다. 저 남자를 보느라 대본을 하나도 읽지 못했다.
어쩐지, 단 둘만 남으면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낯설지만 익숙한 남자를 관찰하는 취미가 생긴 것 같았다. 미완의 대본은 벌써 며칠이나 읽지 못했다. 흡연실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세나는 다시 선글라스를 위로 올렸다. 제가 그를 관찰하는 것만큼 그 또한 저를 관찰하는 듯 했다. 오후 두 시의 햇살을 받은 ‘리틀 존’은 길게 야-옹 하고 울었다.
대본의 글씨는 여전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린트의 흑백과 다른 선명한 유채색이 가까이 있는 까닭이었다. 집중해야지, 라고 괜히 중얼거리며 그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이럴 거면 집에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애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는 곳에 오래 있는 것도 별로였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흡연실 안에 있었다. 그가 있는 공간 안에 들어 갈 수 없었다. 세나는 턱을 괴었다. 그와 말을 섞고 싶다가도 섞고 싶지 않았다. 벌써 며칠이나 반복 된 풍경을 깨고 싶지 않았다. 아는 듯 모르는 사이. 오후 두 시 라는 애매한 시간 같은 관계. 세나는 자신들의 모습이 르누아르의 ‘선상파티의 점심’과 별다를 거 없는 구성이라 생각했다.
처음엔 모두 모르는 사이였으나, 같은 프레임 안에 ‘수백 년’ 동안 함께 있었던 애매한 관계. 세나는 대본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저를 바라보면서 하는 생각이 궁금했다. 굳게 닫혀 있는 흡연실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세나는 미완으로 처리된 악보와 확정되었는지 되지 않았는지 모를 대본을 팔랑팔랑 넘겼다.
오후 두 시의 햇살은 애매하게 따듯하다. 아직 완연한 봄이 되지 않은 계절 사이의 계절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질 것이었다. 창가 자리의 남자가 블라인드를 치지 않아 세나에게 햇살이 더욱 깊게 내려오고 있었다. 인테리어 소품인 것 같은 시간이 맞지 않는 괘종시계가 똑딱이는 소리를 내며 시간의 흐름만을 알렸다. 카페의 배경음악은 어느새 인기 아이돌 노래로 바뀌어 있었다.
이 카페는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카페 주인의 취향을 얼기설기 메꿔 만든 이상한 편집숍 같기도 했다. 세나는 흡연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운동화가 나무 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끼긱거리는 왁스칠 된 바닥의 소리를 듣는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부유한 먼지들이 햇살에 닿아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먼지의 우주를 바라보다가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컵에 손을 댔다. 유리잔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손 안을 가득 축축하게 채웠다. 창가 쪽을 보지 않아도 시선이 느껴졌다. 「마일드 세븐」이 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관찰이지, 관심은 아니었다. 적어도, 세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나와 같이 그와 저는 다만. 같은 공간 안에 고이듯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는 묘하게 편안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숨이 찼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저를 응시하고 있는 저 남자가 궁금했지만 궁금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모순 같은 오후 2시였다. 세나는 다시 샌드위치를 씹었다. 호밀 빵의 거친 식감이 입 안을 가득 긁었다. 연어의 차가움과 아보카도의 부드러움이 이어 다가왔다. 누군가가 제가 하는 식사를 지켜보는 건 오랜만의 일이라 묘하게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카페에 흐르는 노래는 체인스모커스의 closer로 바뀌어 있었다.
이상한 나라에 온 것 마냥 맥락 없는 일이었다.
세나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환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빛이 닿은 곳에서는 여전히 먼지 우주가 일렁이고 있었다. 작은 은하를 바라보다가 세나는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타인’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고개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일드 세븐」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카페 안에 내리쬐는 빛처럼 강렬한 빛이었다.
“꼭 우주에 있는 것 같지 않아?”
「마일드 세븐」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랑카랑하면서도 경쾌한 울림이 듣기 좋았다. 세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살을 받은 그의 머리카락은 언제나 바라봐 왔던 것처럼 화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세나가 입을 열지 않자 그는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지금 우주에 있는 것 같지 않아? 그의 질문은 의문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말하고 있는 본인이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성질이 있었다.
그는 대답할 때 까지 질문할 모양이었다. 그와 생각이 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쉽게 대답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말을 섞는 순간 귀찮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세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담배 케이스를 손에 쥐었다. 이 주 정도를 함께 하면서 생긴 무언의 룰이 형편 없이 깨지고 있었다. 그는 ‘카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카멜」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담배를 한 개비 들고 흡연실 앞으로 가자, 그는 소리치듯 외쳤다. 그것은 꼭 소리가 닿지 않는 우주에서의 의사소통법 같았다. 그는 두 팔을 흔들었다. 그의 손끝과 손끝 사이의 벌려진 간격은 생각보다 넓어 보였다. 세나는 그를 응시했다.
“대답해줘, 「카멜!」 우리는 꼭 우주에 있는 것 같지 않아?”
이 허무맹랑하고 맥락 없는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
“조용히 해, 「마일드 세븐」”
세나는 대답 대신 입에 담배를 물었다. 일부러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제 지정석에 앉아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무대에 어울릴 것 같은 반짝임이 「마일드 세븐」에게는 유채색으로 고여 있었다. 세나는 담배 끝을 씹었다. 그는 주머니에 지포라이터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제게 말을 건 그 남자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다시 「카멜」 하고 불렀다. 제 것인데도 제 것이 아닌 이름이 암호처럼 어색하게만 들려왔다. 비취색 눈동자는 저를 피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담고 있었다. 내가 세나 이즈미라는 걸 모르나? 싶었다. 할 말이 없어 망설이자 「마일드 세븐」은 다시 「카멜」의 이름을 불렀다.
부유하듯 날리는 먼지 우주. 투명하게 들어오는 햇살, 화려한 괴짜,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마일드 세븐의 빈 곽. 오후 두 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서야 두 시 종을 울리는 카페 안의 괘종시계. 「마일드 세븐」의 뒤쪽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지금 이 순간과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 세나는 모든 비현실들을 목도하며 중얼거렸다.
모두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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