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이즈] 젤네일 아래 손톱에 대한 짧은 단상
*앙스타 전력의 '사인회'라는 주제를 받아 썼습니다.
*왕님 부재기간에 왕님을 기다리는 세나...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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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네일을 벗긴 다음, 그 아래 남는 손톱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네가 떠난 뒤에 너를 추억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문득 고였다 스쳐지나가는 감정은 얕은 웅덩이를 스치고 퍼져나가는 흐름 같다. 나는 네가 없어진 빈자리를 보고, 옆을 더듬어보다가 다시 일어난다. 네가 찾아왔다 떠난 밤은 언제나 꿈같고, 너와 살을 마주 대는 것은 꼭 귀접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내가 너를 환상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은, 네가 내게 남겨두고 간 낙인 같은 자국 때문이다.
츠키나가 레오가 떠나고 난 다음날. 세나 이즈미가 맞이하는 아침에 대해서 생각 해 본 적이 있을까. 내가 아는 너는 섬세하지만 무딘 구석이 있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나는 네 행동을 미리 생각 할 만큼 너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아침, 내 아침. 네가 없는 내 아침은 평소보다 세 시간 먼저 시작한다.
네가 내게 남긴 사인을 더듬어야하기 때문이다. 신호를, 낙인을, 네 이름을.
온 우주의 별자리들을 다 헤매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막의 중심에서
나는 나의 죄를 닮은 밤하늘을 향해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생일, 이응준
젤네일 아래 손톱에 대한 짧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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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손을 잡고 잠에 든다. 마치 영원처럼, 언제나 함께 있을 조각상처럼 잠에 든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듯, 몇 번이나 손마디에 힘을 준 다음 눈을 감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매번 나는 세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일어난다. 배가 아파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뒤처리를 하지 않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언제나 단정하고 담담한 세나 이즈미에서 이탈 해 있는 것이다. 나는 너로 인해 흐트러진다.
하지만 너는 그 사이에 사라져 있다. 그 공백을 잡고 싶은 적이 얼마나 깊었는지 모른다. 잠을 자지 않으려 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세나, 라고 부르는 네 목소리와 체온을 느끼다보면 어느새 졸음이 몰려온다. 네가 평소에 줄 수 없는 안도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빈자리를 느끼며 일어난다. 새벽 세 시, 땀으로 젖은 몸은 끈적거리고 갈지 않은 시트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난다. 나는 이런 흐트러진 상태로 잠에서 깨, 샤워실로 이동한다. 샤워실로 이동하는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 마다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다.
이는, 온전히 불안하기 때문이다. 나는 샤워실에서 불을 켜고 내 몸을 살펴본다. 네가 남기고 간 키스마크는 울긋불긋하게 온 몸에 퍼져있다. 척주 줄기를 따라 앙큼하게 물어놓은 잇자국과, 내 몸을 긁어놓은 뭉툭한 손톱자국들이 난잡하게 남겨진 몸을 보며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세나 이즈미라는 이름의 상품에게는 안 좋은 일이지만, 세나 이즈미라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나는 언제나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다. 나는 이 표정을 가지기 위해 수많은 밤을 울어왔다. 물론 너에게 전달할 수 없는 사족이라 이렇게 마음으로 생각하고 삼켜, 버리지만.
나는 뜨거운 물을 튼다. 샤워기를 잡은 반대 손으로 물의 온도를 측정한다. 내 샤워기는 언제나 가장 찬 물로 돌려져 있다. 너는 언제나 체온이 높은 편이었음으로 나는 이것을 네 흔적이라고 멋대로 추정하고 있다. 너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따위를 짐작하며 나는 뒤를 돌아보려고 한다. 언제나 나는 내 등을 보고 싶다. 네가 남긴 사인 탓이다.
너는 언제나 나에게 네 이름을 적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해야’한다고 해야 할지, ‘선호한다’라고 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떤 의도로 남기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대화는 대부분 몸을 마주 대며 이뤄지는 언어임으로 나에게는 그걸 물어볼 시간이 없다. 나는 불안감을 가지고 천천히 뒤를 돈다. 샤워기의 물은 점점 따듯하게 몸을 데워가고 있고, 나는 발 끝부터 오롯이 차가워진다. 나는 나의 두 견갑골 사이와 척추 위에 남겨진 너의 ‘사인’을 확인할 때 까지 몸을 돌린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거울에 비친 흔적을 볼 뿐이다. 나는 내 등에 남겨진 츠키나가 레오라는 이름을 볼 때 마다 안심한다. 비로소 따듯한 물로 차가워진 몸을 데우면서 씻을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남기고 간 흔적, 허벅지에 말라붙어 있는 정액은 물에 녹아 흐른다. 소용돌이처럼 빙빙 돌아가며 하수구로 쏟아져가는 허물들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너는 모를 것이다. 나는 내 안을 더듬어가면서 안심하던 네 얼굴을 떠올린다. 안쪽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긁을 때 마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별 거 아닌 것들이다.
너무 무거운 걸 생각하면 무너져 내린다. 세나 이즈미는 츠키나가 레오의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너는 밀물처럼 밀려와 썰물처럼 사라진다. 나는 갯벌처럼 남은 흔적들을 더듬거리며 그곳에 바다가 있었음을 반추한다. 깊게 생각하면 익사할 수 있는 관계. 더듬을수록 질척이는 관계.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감겨, 결국 한 발자국도 땔 수 없게 만드는 갯벌 같은 관계. 우리 사이는 꼭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 등에 사인을 하면서 네가 추억했을 것들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도 추억해주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센티멘탈한 사람이 아니다. 로맨틱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따지자면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깨진 것도 망가진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너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인연은 갯벌에 남겨둔 발자국과 같았다. 찍어도 언젠간 사라질 것이니 나는 더더욱 그것을 즈려밟으며 추억할 수밖에 없다. 이는 네가 내게 밀려오기까지 계속 될 것이다.
내가 회상하는 건 별 거 없다. 퍼진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던 일이라던가, 가리가리군 소다맛에서 하나 더가 나왔기 때문에 내가 하나 남은 것을 떠맡아야 했던 일. 단단히 굳은 아이스크림을 이로 가르는 것이 짜증나 아이스크림의 과즙을 빨아먹고 있던 걸 비웃던 너. 그 때 터지던 탄산 같은 청량한 웃음. 그냥, 나는 장면들을 회상한다.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흩어질 기억들을 별처럼 붙잡는다. 생각을 거듭하고 거듭하며 몸을 씻을수록 내 주변은 바짝바짝 말라간다. 내 발에 달라붙어 있던 차가움은 어느새 사막의 모래알이 되어있다.
사인, 다 네가 내 등에 낙인처럼 남겨 둔 자국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이돌’인 ‘왕님’의 사인을 해 두다가, 최근에는 정자체로 ‘츠키나가 레오’라고 쓰기 시작한 저의가 뭘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알 수 없었다.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음을 안다. 그러면 너처럼 빈 공간을 망상으로 채워야 하는 걸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상상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다. 나는 너를, 애틋하게 생각한다. 그리워한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네가 나에게 어느 정도의 소유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하나뿐임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네가 소유욕을 가짐으로 나는 완벽해진다. 망가지지 않은, 모조품이 아닌 나를 유지해야 한다. 네가 날 사랑함으로서 나는 성립할 수 있다. 역전의 세나, 완벽한 세나, 네가 사랑함으로 완벽해 질 수 있는 나. 네가 찾아오는 밤에는 언제나 흐트러지는 나. 나는 머리에 미지근한 물을 묻힌다. 네가 지문을 묻혔던 곳을 오롯이 더듬으며 물은 낙하한다. 소용돌이를 만들며 빙글빙글, 아래로 내려가는 물들을 바라보며 나는 손으로 등을 뻗어 그 곳을 꾹꾹 누른다. 너 혼자만의 사인회에 공감하려는 듯, 닿고 싶다는 듯. 나는 언제나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그럼으로 나는 반짝여야만 한다.
정지한 것처럼 단정한 글자를 보는 순간 나는 젤네일을 손톱에서 때내던 모델 시절의 동료를 떠올렸다.
그녀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젤네일은 매니큐어를 바르고 램프에 굳히는 방식으로 칠해 단단한 네일이다. 케어만 받는 나와 달리 그녀는 손톱에 무늬를 칠하는 걸 좋아했다. 그녀는 일을 고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어울렸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기 마련이다. 그녀는 자신이 한 네일에 맞추어 일을 골랐다. 그려놓은 무늬들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는 논지였다.
어느 날 그녀는 샵에 가지 않았다. 사무소에 앉아서 손톱을 벗기기 시작했다. 두껍게 바른 네일에는 손톱 표면이 묻어 떨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을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열 손가락을 벗겨냈다. 깊게 프렌치가 되어 있던 왼손 약지의 것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아, 그녀는 파일과 손톱깎이를 이용해 그것을 떼어내야 했다. 길게 기른 손톱 중 그것만 바짝 자른 모양은 어설프고 웃기기만 했다. 그녀의 손톱은 엉망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파일로 끝을 갈면서 이렇게 말했다.
있지 이즈미 군, 난 방금 사랑을 끝냈어- 라고.
그 때 당시에는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끝냈다고, 고작 네일을 벗기면서! 하지만 그 때 나는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언제나 당당하던 그녀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즈미 쨩은 기다리는 사랑은 하지 마렴, 하고 말하며 그녀는 자신의 손톱들을 정리했다. 단단하게 발려 램프 아래에서 굳혀진 젤네일 껍질들은 꼭 손톱을 때다가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것들을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가져간 다음에,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녀의 깨끗한 손톱을 보는 건 간만이었다. 그녀의 손톱 표면은 울퉁불퉁했다. 네일을 밀어낼 때 같이 떼어졌기 때문일 거라 추측한다. 단단하게 붙어 있던 걸 벗겨낸다는 건 그런 의미다. 자신 또한 깊게 상처받는다. 유착된 것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상처 입는다. 손톱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위를 덮고 있던 하늘이 없어지는 것이니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하늘이 좋아서 따라가고 싶었던 것들도 있었겠지. 그런 조각이 있었겠지. 나는 네 사인이 그녀 손톱의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젤네일 허물들에 남아있던 그녀의 손톱조각처럼, 나도 가끔은 내 등에 남은 네 사인을 깔끔하게 때고 싶다. 네가 나를 만지며 만들어냈던 이름 조각들. 너는 불이 꺼진 새벽, 내 등에 네 이름을 남기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의 네일은 남자친구가 해 줬던 거라고 한다. 헤어짐으로 떼어낸 흔한 서사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네가 남긴 자국을 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피부를 없애야 하는 걸까. 거품을 낸 스펀지로 문지르는 것만으로 지워지지 않는 자국들, 잉크를 타고 살결 안에 스며든 너의 지문들을 어떻게 떼어내야 하는 걸까. 별자리와 은하수를 모두 헤아려도 벗어날 수 없는 새벽의 중심에서 너는 사막처럼 남아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으며, 갈망하고 갈망해도 벗어날 수 없다.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틀에 박힌 나를 꺼낸 것은 당신이다. 세 시에 오겠다고 기약했으면서도 돌아오지 않은 어린왕자. 그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에 대해 생각 해 본적이 있는가. 떼내기 위해서는 손톱조각마저 딸려가는 젤네일, 손톱의 하늘에 대해서 생각 해 본 적이 있는가. 어린왕자가 오기 까지 아무도 없는 별 안에서 고민했던 장미를 기억하는가. 널 중심으로 하기에 사막으로 변해버린 나의 새벽과, 갯벌처럼 밀려오는 나의 기억들에 대해서 고민 해 본 적이 있는가.
세나 이즈미를 사랑 해 준 적이 있는가.
나는 너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도착하지 않는 말들은 모두 먹어버렸다. 내 혀는 너와 숨을 섞기 위해 존재한다. 나는 변해버린 왕님이 내 등에 이름을 써 두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다. 너만이 하는 사인회. 종이인 나의 의사는 전혀 반영하지 않는 폭력적 행위. 내 몸속에 네가 남긴 지문들이 쌓여 나는 질식할 것 같다. 지문만을 더듬거리는 나의 아침, 나의 새벽. 츠키나가 레오의 다른 이름은 갯벌이고 아침이며 새벽이다. 나는 널 놓아버리면 떨어져 버릴 나의 조각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 조각을 놓아버려도 손톱은 손톱으로, 세나 이즈미는 세나 이즈미로 존재할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을 한다. 쉽게 결론이 날 대답은 아니다.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는 한 대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였다. 네가 없는 새벽 나는 몸을 씻으며 네가 남긴 사인을 지운다. 다만 흔적만이 남아 내 혈액 속을 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머리카락을 말리고 몸에 남은 물기를 닦는다. 교복으로 가려지지 않는 곳에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등교한다. 네가 없는 학교로, 세 명 밖에 없는 나이츠로.
네가 남긴 지문은 단지 지문일 뿐임으로 언젠가 지워질 것을 안다. 정자체로 적어주는 ‘츠키나가 레오’라는 말이 언제 빛이 바랠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다만 기다릴 뿐이다. 나는 다시 널 왕님, 이라고 부르게 될 순간을 고대한다. 여전히 나의 하늘에는 츠키나가 레오라는 이름의 천정이 씌워져 있고, 내 손톱에는 네가 남긴 지문들이 젤네일처럼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나의 등에 적혀 있던 사인에 대해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네가 혼자서 한 사인회는 나의 사인이 될지도 모른다. 죽는 이유가 너라는 건 꽤나 로맨틱하다고 생각한다. 아, 오늘도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머리카락에 거품을 묻혔다. 스펀지에 거품을 묻힐 때에는 샤워기를 벽면에 고정 해 둬야 한다. 벽면에 고정 된 샤워기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들을 맞고 있어야 울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거울에 솔직하고 싶다. 사랑해, 라는 말은 뒤로 숨긴다. 너의 사인 또한 같은 의미일까.
나는 사막에 뜬 별처럼 많은 질문을 알고 있다. 그것을 모두 해결하기 전 까지 너라는 사막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안다. 나는 괜히 손톱을 긁었다.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은 손톱에는 벗겨낼 것도 없었지만, 나는 너를 벗겨내며 상처받을 나를 상상한다. 언제나 최악을 상상해두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네가 다시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돌아가, 나를 끝없는 진흙탕 안에 버려뒀을 때 ‘이번에도 최악은 아니야’라고 안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샤워기에 물을 맞았다. 츠키나가 레오라는 사인이 화끈거렸다. 아직도 너는 나의 사인이 될 수 있다. 이 사실은 ‘안도’인지 ‘안도’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다. 너는 새벽, 내 하얀 등에 매직으로 이름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수만 번도 더 고민했던 말 주섬주섬 꺼내 놓는다. 말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들과 섞여서 소용돌이 모양을 그리며 가라앉는다. 나는 괜히 내 손톱을 긁어냈다. 남지 않은 자국들은 꼭 내 아침에 흔적을 만들지 않는 너 같다. 나는 목소리를 냈다. 한숨과 밤과 새벽, 그리고 젤네일과 함께 떨어져버린 손톱조각, 그리고 네가 내 등에 했던 사인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아, 다행이다.
“이번에도 최악은 아니야.”